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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경성 트로이카

이제 '선배운동가'를 되살려 낼 때
 <쉽게 읽는 사회과학> 경성 트로이카

노동과세계  제304호
장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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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아닌 과거사 논쟁이 한창이다. 다분히 정쟁의 성격을 띤 여야의 옥신각신 속에서 그래도 반가운 소식이 있다면 '좌파' 항일운동도 정당히 평가되어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이었다. 해방의 그 날까지 항일운동의 횃불을 끝까지 이어간 이들 중 다수가 사회주의자들이었다는 것은 한국사의 상식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역사적 평가에서조차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해왔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일제 시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운동·농민운동을 통해 일제에 저항했다. 말하자면 노동자·민중운동의 선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운동은 이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뿌리가 없는' 아니 '뿌리를 잊고 있는' 운동인 셈이다.
역사는 결코 보수 정치꾼들의 싸움판에 내맡겨질 수 없다. 선배들의 자랑스런 투쟁 기억은 역사학자의 펜 끝에만 머물 수 없다.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 돌아와야 한다.
이 점에서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책이다. 안재성은 10년 전 <파업>이라는 노동소설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작가다. 그가 이번에 낸 책은 소설보다는 기록문학에 가깝다. 역사와 소설적 재구성의 경계 위에서 1930년대 경인지역 노동운동을 주도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생생히 되살리고 있다.
특히 그 중심에 있는 이재유라는 혁명가는 대통령의 좌파 항일운동 재평가 발언이 나오자마자 신문의 좌파 항일운동가 명단에서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지식인 중심의 사회주의 운동을 노동자 중심의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기여했고, 두 번의 탈옥이 말해주는 끈질긴 투쟁정신으로 일제 당국에게는 공포를, 조선 민중에게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물론 이재유와 그의 그룹('경성 트로이카'는 바로 이 그룹의 초기 명칭이었다)에 대해서는 김경일 교수의 <이재유 연구>(창작과비평사)라는 결정적 저작이 이미 나와 있다. 그런데도 안재성의 책이 독자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은 이 책이 이재유 그룹에서 활동한 한 여성활동가의 증언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소설가의 필체까지 더해, 70년 전의 역사가 더욱 더 살아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이제 이 책을 계기로 남과 북 모두에서 망각되었던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 보자. 우리 식의 과거사 복원 운동에 나서자. 정쟁이나 개인적 명예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꿈과 이상이 지금 우리의 희망과 열정의 연료가 되도록 말이다. 어차피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과 마찬가지로 아직은 이 지상에 없으니. 안재성 지음, 사회평론
장석준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소 준비위원, newer @ 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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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박승호의 현대자본주의론 재구성

한국 진보세력의 우경화 질타한 ‘황야의 목소리’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
(박승호 지음 / 한울아카데미 펴냄 / 28000원 / 664쪽


정성진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이 책은 저자가 지난 겨울 제출한 서울대학교 경제학 박사학위논문을 출판한 것이다. 저자는 학자로서 매우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는 1985년 서울대학교에서 노동과정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다른 선후배 동료들처럼 대학 강단으로 가지 않고 10여 년 공안당국의 수배를 받으며 노동운동 현장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불혹을 넘긴 나이로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학위 논문 준비에 매진했다. 오늘 출판된 700 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은 그 결산이다.

이 대작에는 지난 10여 년 동안 저자의 노동운동 경험과 지난 수년 동안의 맹렬한 이론 천착의 과정이 그대로 배어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저자는 노동운동 현장에서의 존재 그 자체로서 우리나라 정치경제학 선후배 동료 연구자들의 우경화와 개량화를 질타하는 ‘황야의 목소리’였다. 이제 저자는 오늘 출판된 이 책은 반자본주의․반전운동의 세계적 고양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시작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르네상스’를 본격적으로 확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다.


조절이론'자율주의' 브래너 위기이론

저자는 이 책에서 소련, 동유럽 블록 붕괴 이후 퇴조한 ‘거대 담론’을 초대형 규모로 다시 전개하고 있다. 저자는 조절이론과 자율주의 이론, 브래너(R.Brenner)의 세계경제위기론 등 3개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다. 이 때 저자는 ‘비판적 재구성’의 입장으로서 주로 개방적 마르크스주의(Open Marxism)의 입장을 채택한다. 여기에서 개방적 마르크스주의란 최근 <제국 >으로 유명한 네그리(A.Negri)가 주도하는 자율주의(아우토노미아)의 한 분파인데, 국내에서도 최근 그 지도적 논객인 홀로웨이(J.Holloway)의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가 소개된 바 있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주로 개방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물신주의 비판 이론, 형태 분석과 계급투쟁의 관점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채택한 다음 (2장), 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체계 플랜’ 후반부(국가-외국무역-세계시장)의 재해석 (3장)과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 (4장)에 적용한다.

저자는 이 책 2장에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과 실체적 추상의 논리에 의거하여 조절이론, 자율주의, 브레너의 세계경제위기론 등 3개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이 구조주의, 경제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또 마르크스 물신주의 비판의 관점에 설 경우 “임노동자의 투쟁은 본질적으로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이며 “반(임)노동 투쟁”(p.170)이라고 주장한다.

3장에서 저자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체계 플랜’ 후반부를 자본주의적 국가형태에 대한 추상적 규정으로서 “형태적 분리”와 “내용적 통일”의 측면을 중심으로 재해석하여, 세계시장, 국민국가, 국민경제 범주들의 관계를 구명한다. 4장에서 저자는 1970년대 이후 현대자본주의가 케인즈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전형되는 과정에 관한 조절이론, 자율주의, 브레너의 세계경제위기론의 논의를 “계급 역관계의 분석방법”(p.332)에 기초하여 자본축적 형태와 국가형태의 측면에서 재구성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격화되면서 케인즈주의의 위기가 이윤율의 저하와 복지국가의 위기로 표출되었고, 이에 따른 1970년대의 자본의 유연화 세계화 공세 속에 노동자계급이 패배하면서 “자본의 일방적 우위의 역관계”(p.489)가 구성되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전형되고 제3세계의 “경제적 재식민지화”(p.606)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마르크스 물신주의 비판의 확장

이 책의 주요한 공헌은 무엇보다 그 동안 주로 철학, 인문학 영역의 토픽이었던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을 발전시켜 현대자본주의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데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물신주의 비판을 강조하는 것은 개방적 마르크스주의에 특징적인 것이지만, 마르크스 물신주의 비판의 이론적 정치적 함축을 극대화하여 현대자본주의론의 영역에까지 확장, 적용한 것은 저자의 고유한 성취이다.

또 그 동안 대개 문헌주석학적 방식으로만 연구되던 ‘정치경제학비판체계 플랜’ 후반부에서 세계시장, 국제적 국가체계, 국민국가, 국민경제 범주 간의 연관을 체계화하고 이를 기존의 국가론 논쟁, 국제적 부등가교환 논쟁, 세계화 논쟁에 비판적으로 적용한 것 역시 이 책의 독자적 기여이다. 또 이 책의 본론이라고 할 수 있는 4장에서 2차세계대전 이후 케인즈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전형”을 “계급 역관계의 분석방법”에 기초하여 설명한 것은 기존의 좌파 이론에서는 많이 간과되었던 역사 발전에서 계급투쟁의 역할을 부각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저자는 또 최근 유행하는 조절이론의 ‘금융주도 축적체제론’이 신자유주의에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외관상의 분리를 절대화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통일성”,“산업자본의 금융그룹화로 표현되는 산업자본의 금융적 축적 전략”(p.575)을 정당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관련되어 생각될 수 있는 거의 모든 주제들이 망라되어 논의되고 있고, 책 전체에 걸쳐 저자가 지난 20년에 걸쳐 축적한 연구와 투쟁 경험이 수많은 통찰들로 빛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정치적 입장이나 결론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필독해야 할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워낙 광범위하고, 또 이 주제들에 대한 저자의 논의가 매우 깊이 들어가 있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이 책의 구체적 내용을 제대로 검토하는 것은 필자의 능력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이 지면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에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한 상세한 검토보다는 이 책이 우리나라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실천의 역사에서 갖는 정치적 함의가 무엇인지에 한정하여 몇 가지 동지적 비판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대한 침묵

먼저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 >이라는 책 제목으로부터 대부분의 독자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달리, 가장 대표적인 ‘정통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인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로 비판하고 있는 현대자본주의론은 조절이론, 자율주의, 브레너 이론 등 3개인데, 저자는 이 이론들이 구조주의, 경제주의의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구조주의, 경제주의의 문제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서 더 심각한데도, 저자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본격적인 비판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저자는 또 좌파 이론의 문제점을 구조주의, 경제주의에서만 찾고, 좌파 이론의 정치, 예컨대 스탈린주의의 문제는 전혀 거론하고 있지 않다. 저자에게 좌파 특히 이른바 ‘정통좌파’ 내부의 차이, 특히 스탈린주의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간의 차이의 문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가 이 책에서 비판 대상으로 고른 조절이론과 브레너 이론, 자율주의와 ‘개방적 마르크스주의’들은 모두 현대 상황에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사상을 구현하려고 노력했으며, 이 때문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사상과 대립적인 스탈린주의 ‘정통’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이론들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반스탈린주의 좌파 이론을 집중 공격하면서도, 스탈린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은, 저자의 실제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또 저자가 이 책에서 반스탈린주의 최신 좌파 이론들을 부분적 실용적으로 차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는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지지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 책이 기본적으로 스탈린주의 문제설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이르러 망조가 들었다”(p.5)는 스탈린주의 파국론을 이 책의 결론으로 제시하는 데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또 “사회주의 진영의 등장은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축소를 의미할 뿐 아니라, 자본/노동의 적대적 대립이 냉전체제라는 외부화된 대립으로 정립되었음을 의미했다”(p.355)라는 주장에서 보듯이, 저자는 스탈린주의에 핵심적인 ‘소련․동유럽 블록=사회주의’, 즉 ‘진영테제’를 반복하고 있다. 저자가 개방적 마르크스주의를 실용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 합리적 핵심인 ‘소련․동유럽 블록=국가자본주의’이론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단계론적 인식의 오류를 개방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단계론은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제2인터내셔날 마르크스주의에서 기원하고 스탈린주의에서 교조화된 역사 발전에 대한 “패러다임적 접근방법”(p.337)으로서 “기능주의로 귀결”(p.337)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자신의 입론을 제시하는 과정에서는 다시 단계론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단지 용어가 단계적 이행에서 “전형”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케인즈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의 “전형”은 “계급 역관계”를 절대화하는 것 이외에는 기존의 단계론적 인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는 “제국주의는 역사적으로 19세기말 이후 20세기 초에 걸쳐 출현한 현상으로 특정화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애초부터 제국주의였다는 식으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동일시하는 견해는 잘못된 것”(p.238)라면서 단계론을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스탈린주의 청산이 이토록 어려운가

저자가 스탈린주의적 단계론적 “패러다임적 접근방법”을 탈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은 신자유주의 단계에서 제3세계는 제국주의의 “경제적 재식민지”(p.606)로 되었다는 허무할 정도로 진부한 스탈린주의적 ‘NL’적인 이 책의 결론에서도 확인된다. 중심부가 고전적 제국주의→케인즈주의→신자유주의로 전형함에 따라, 제3세계도 식민지→신식민지→재식민지로 전화하고 있다는 도식적 패러다임적 주장이다.

저자에게 식민지/신식민지/재식민지 간의 차별성은 의미 없다. 제3세계는 제국주의 중심부의 전략에 의해 철저하게 규정되는 객체로 상정된다. 이와 같은 저자의 “재식민지” 패러다임은 역사 발전에서 주체의 능동적 개입과 투쟁의 의의를 강조하는 저자의 “계급 역관계의 분석방법”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국민경제 개념은 “물신적 개념” “기만적 의식형태”(p.324)라는 이론 부분에서의 정식화와도 상충된다.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을 현대적으로 복원”(p.3)시키는 것을 과제로 하는 저자가 이처럼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의 유혈적 압살 체제인 스탈린주의 교조들을 반복하는 데서 요즘 ‘과거사 청산’처럼 스탈린주의 청산도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를 알 수 있다.

내용상 문제점을 몇 가지만 지적해 보자. 우선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의 중요성을 환기한 것은 이 책의 중요한 공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처럼 물신주의 비판 이론을 절대화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상체계에 대한 일면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기존 좌파 이론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물신주의 비판 이론을 경시했다고 해서, 그것이 예컨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이론 또는 이윤율의 저하경향 법칙의 이론과 같은 경제법칙이 자본주의 동학 분석에서 갖는 중심적 의의를 부정하는 것으로 되어서는 곤란하다.

또 저자가 강조하는 이른바 “계급 역관계의 분석방법”의 핵심적 내용이 실은 네오리카아도주의(Neo-Ricardian) 이윤압박론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즉 계급투쟁의 고양이 전후 장기호황의 종식, 케인주의적 자본주의의 붕괴를 가져왔다는 주장인데, 이같은 주장은 이미 1970년대 마르크스주의 공황 논쟁에서 ‘근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에 기인한 이윤율 저하 이론)에 의해 마르크스 공황 이론과 아무런 인연이 없음이 밝혀졌고, 최근에는 브레너의 세계경제위기론에 의해 실증적으로 철저하게 논박된 바 있다.

또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시대의 계급 역관계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일방적 우위의 역관계”(p.489)라는 저자의 주장은, “계급 역관계와 계급투쟁을 ... 승리냐 패배냐 하는 식의 이분법에 입각해 단선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p.372)는 자신의 앞선 주장과 모순된다. 또 저자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의 일방적 우위의 역관계”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신자유주의적 금융적 축적 전략을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회피하기 위한 도주 전략”(p.533)이라고 규정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당장 자본이 노동자계급에 대해 일방적으로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면 왜 “도주”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또 저자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장기호황의 원인 구명에서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갗의 측면, 혹은 “통합주의적” 측면은 절대화하는 반면, 이 시기 장기호황이 미소 양대 제국주의의 ‘영구군비경제’에 힘입은 사실을 무시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는 저자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금융세계화와 금융적 축적, 혹은 정보화의 측면만을 주목하고, 이것이 동시에 군사적 세계화, 즉 ‘무장한 세계화’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사실을 중시하지 않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경제주의라는 비판은 저자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망의 추상성은 결점

이 책은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투쟁의 전략과 지향점,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가 매우 미흡하다. 이른바 “인간해방투쟁”, “자본주의를 극복한 인간다운 사회의 건설”(p.5)이라는 개념만 제시되고 있을 뿐, 그 구체적 내용을 채우고 있지 못하다. 만약 저자의 “인간해방투쟁” 개념이 소외와 물화에 대한 추상적 거부를 절대화하면서, 착취와 억압에 반대하는 노동자계급의 반자본주의 투쟁, 자본주의 국가 분쇄 투쟁의 의의를 상대화하는 것이라면, 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사상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끝으로 이 책은 서술 방식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는데, 예컨대 저자는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비판, 시초축적, 후반체계에 관해 최근 이루어진 전문적 연구들을 검토하지 않고 마르크스의 잘 알려진 텍스트를 직접 인용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이는 이 주제에 대한 저자의 고유한 학문적 기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한다.

또 저자가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을 위한 소재, 전거로 홉스봄(E.Hobsbawm), 글린, 만델(E.Mandel), 카스텔(M.Castells) 등 오래 전에 출판된 개론류의 서적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은 뜻밖이다. 또 저자가 우리나라 좌파 이론가들의 현대자본주의론을 총망라하여 검토하면서도, 윤소영은 단 한번도 인용하지 않는다든지, 다른 금융화 이론들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하면서도, 대표적 금융화 논자의 한 사람인 크로티(J.Crotty)는 우호적으로만 인용한다든지 하는 것은 너무 실용주의적이지 않을까?

이 책은 위에서처럼 제기한 몇 가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에 걸친 저자의 혁명 이론의 연구와 실천의 경험에 기초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적 타당성의 논증을 시도한 것으로서, 그 성공 여부를 떠나, 귀중한 학문적 성취로 인정되어야 한다. 이제 ‘돌아온 장고’처럼 학계에 복귀한 저자가 소련․동유럽 블록의 붕괴 이후 우경화를 거듭해 온 우리나라 진보 학계의 풍토를 일신하고, 이 책에서 시작한 “마르크스의 사상과 이론을 발전시키고 혁신하는”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밀고 나갈 것을 기대한다.



월간말 2004년 2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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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노동운동가 평전 영국노동당 창건자 제임스 키어 하디
최재희 (고려대 노동사 박사과정)
광부들의 열악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하디는 임금향상과 노동시간단축을 목표로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6주간 지속된 1880년 라나크에서의 파업을 위시한 여러 광부파업은 파업자금의 부족과 자본가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하디는 해고당한다.


제임스 키어 하디는 1856년 8월 스코틀랜드의 광산 마을에서 한 가난한 노동자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 메리 키어는 조선소 목수였던 데이비드 하디와 재혼했고, 하디는 새 아버지를 따라 스코틀랜드의 여러 마을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

당시 영국이 세계 최고의 산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삶은 매우 열악했었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디 또한 8살이란 어린 나이에 직업 세계에 뛰어들게 되었다. 교육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첫 직업은 하루 12시간 반을 일하는 빵가게의 점원이었다. 실직한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아 집을 비우고 있었고, 그의 임금이 가계의 유일한 수입이었다. 바로 밑의 동생이 열병으로 죽고 어머니가 다른 동생을 해산하는 어수선함 속에 15분 늦게 가게에 출근했고 그 때문에 급료가 지급되는 바로 그날 해고당한다. 맛있는 음식냄새가 진동하는 주인의 내실에 불려가 처음 보는 화려함에 눈이 부셔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불성실하다는 비난과 함께 돈 한푼 받지 못하고 쫒겨난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릴 어머니 생각에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거리에서 웅크리고 앉아있어야 했던 아이, 그가 바로 영국노동당의 창건자라 불리는 어린 시절의 하디였다.
몇 가지 직업을 거친 후 하디는 10살에 그가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던 광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아침 6시에 막장에 들어가 해가 진 다음에야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으므로 겨울에는 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라야 했다. 12살에는 막장이 무너져 갇힌 상태에서 지쳐 잠자다 구출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야학에서 글을 배웠고 노동조합의 집회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속기법도 익혔다. 사려깊으면서도 반항적인 광부로 성장한 하디는 이런 자질과 더불어 노조활동의 헌신성으로 자연스레 광부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광부들의 지도자

광부들의 열악한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하디는 임금향상과 노동시간단축을 목표로 파업을 주도한다. 그러나 6주간 지속된 1880년 라나크에서의 파업을 위시한 여러 광부파업은 파업자금의 부족과 자본가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하디는 해고당한다. 하디는 파업승리의 열쇠가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에 달렸다는 인식을 갖고, 1886년 에어셔광부연합과 스코틀랜드광부연맹을 조직하면서 동시에 기관지 『광부』(The Miner)를 발간한다. 이 과정에서 하디는 신생조합이 산업내의 분쟁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을 보장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설사 간헐적으로 성공한다 하더라도 경기 변화와 자본가의 변덕에 좌우되는 일시적인 이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국가를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며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1867년과 1884년의 선거법개정을 통해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지만, 유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던 자유당과 보수당이 의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이 노동자의 표를 얻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지만 실제로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 일부 보수적인 노조의 대표가 자유당의 후원을 받으며 자유당원으로 의회에 진출했지만, 이들 또한 개인적인 출세나 명성에 집착하면서 자신들이 속한 계급의 이해를 기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디는 기존 정당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노동자 대표만이 진정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디에게 그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온다.
1888년 미드라나크에서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하디는 노동자의 대표로 의원직에 도전한다. 광부밀집지역인 이곳에 런던출신의 변호사를 공천한 자유당은 하디에게 출마포기를 설득한다. 조건은 그 동안의 선거비용을 보전해주고 일년간 200파운드의 봉급과 다음 선거에서의 공천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하디는 이를 거부했고 곧 이 선거는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된다. 각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이 자원봉사를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작가였던 플로렌스 하크니스는 300파운드를 기부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하디는 617표를 얻었고 자유당의 필립스가 3847표로 당선되었다.

노동자 정당 결성을 향해

그러나 하디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선거 직후 8월에 그는 스코틀랜드노동당을 결성했고 이는 영국정치사에서 노동자당의 명칭을 사용한 최초의 정당이었다. 이 당의 강령은 상원의 폐지, 토지와 광산의 국유화, 무상교육, 학생에 무료급식, 철도, 운하의 국유화, 누진세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노동당의 궁극적인 목적은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자본의 국유화였다. 이와 같이 하디는 노조활동과 정치활동을 통해 자연스레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 비록 그가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해 경제문제 등에서 몇 가지 이론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하디의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출신으로 누구보다 더 노동자의 삶의 현실과 소망을 잘 알고 있던 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는 중간계급 출신의 일부 도그마적인 구호성 사회주의와 달랐고,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전체노동자의 이익을 외면하던 기성노조의 보수적인 태도와도 다른 입장이었다.
하디와 그의 입장이 전국적인 관심을 끌게 될 기회는 다시 찾아왔다. 1891년 총선거에서 그는 런던 사우스웨스트햄의 노동자후보로 지명된다. 이곳은 런던에서 가장 빈곤한 노동자 밀집지역이었다. 선거 결과, 하디는 시장 출신의 보수당후보를 1232표차로 물리치고 의원으로 당선된다. 새로운 의회가 개회하던 날, 그는 노동자의 평상복 차림으로 노동자들에 둘러싸여 의회에 입장한다.
그의 첫 의회연설은 실업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실업이 노동자와 그 가족에 얼마나 큰 정신적, 육체적, 도덕적 폐해를 끼치는 지를 역설하면서 국가차원의 실업구제책을 마련할 것을 주장한다. 실업구제책의 핵심은 8시간 노동법이었다. 노동시간의 법적 규제는 노동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뿐 만 아니라 일자리를 늘려 실업자를 구제하는 방안이었다. 그에게 이것은 노동자들간의 경쟁을 지양하고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넓혀간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했다.
"한사람이 하나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도 좋지만 각 개인에게 하나의 직업은 더 중요하다." 그는 곧 실업자의 의원이란 별칭을 얻게된다. 1894년 알비온 탄광이 무너져 200명 이상의 광부가 사망한 바로 그날 빅토리아여왕의 손자가 태어난다. 의회가 왕위계승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결의안을 논의할 때 수많은 야유에도 불구하고 홀로 서서 왕실을 비난하며 광부들의 슬픔을 위로하고 보상하는 것이 국민의 대표인 의회의 역할이라 역설하던 그의 모습은 특이하기까지 했다. 하디는 영국정치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첫 노동자의원이었다.
하디는 당선 이후 곧 새로운 전국정당의 결성에 몰두한다. 그 결과 1893년 독립노동당이 탄생한다. 그는 노동자정당의 건설에 기존 노동조합의 지지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노조는 자금, 인원, 조직의 현실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당명을 둘러싼 논란에서 나타난 하디의 입장은 이런 인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하디는 당명에 '사회주의'를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주의에 거부감을 가진 노조를 배려했고, '노동'이란 명칭을 통해 당의 입장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 사회주의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선언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었다. '독립'은 계급기반이 다른 기존 정당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은 노조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노조는 참여를 거부했고 하디를 포함해 1895년 총선에 나선 당의 모든 후보들은 패배한다. 정치활동이 조합의 기금을 헛되이 소모시키며 조합자체의 존립을 위협할 수 있다는 기존 노조의 인식은 하디의 입장과 큰 차이가 있었다. 조직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 및 실업자의 이해가 배치될 수 있는 상황에서 노조가 자신들의 자금과 희생으로 전체노동자의 이익과 사회진보를 옹호려는 분위기는 아직 성숙되지 못했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 사회문제의 본질이며 사업장 안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단초는 곧 마련된다. 태프 베일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당의 결성

1900년 웨일즈남부 태프 베일 철도회사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회사는 소송을 제기한다. 즉 파업이 야기한 손해에 대해 노조의 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법원은 2만 3천파운드의 배상을 결정했다. 이제 파업권은 사실상 부인되었으며 노조의 모든 일상행위도 손해배상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노조는 다시금 법과 정치활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0년 독립노동당을 위시해 노동조합, 노동단체, 사회주의단체들이 결집해 노동자대표위원회를 결성했고, 이는 1906년 영국노동당으로 발전한다. 하디를 위시한 독립노동당은 이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당의 노선과 활동의 결정에서 유일한 준비된 집단이었다. 1900년의 총선에서 하디만이 다시 홀로 노동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당의 세력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1906년에는 29명의 후보가 의회에 진출했고 영국의 정치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혁명과 무장봉기를 주장하던 완고한 사회주의집단과 한줌의 기득권에 집착하던 보수적인 노조 사이에서 양자의 공통점을 찾아내 연결하고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사회진보와 인간해방의 선봉에 서고자 했던 하디의 소망이 다소나마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영국노동당에서 하디의 이름은 절대 부패하지 않는 이상주의와 연대와 단결의 상징이 되었다. 1918년 영국노동당은 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국유화를 위시한 사회주의 강령을 선언한다.

제국주의 반대! 전쟁 반대!

하디가 말년에 몰두했던 작업은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보어전쟁을 반대해 곤욕을 치렀던 그는 대륙의 사회주의자와 연대해 전세계적인 총파업으로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전쟁을 막고자 했다. 레닌은 그를 "제2인터내셔날의 지도자 중 끝까지 진정으로 전쟁을 반대한 유일한 인물"이라 평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하디는 전쟁반대와 평화를 역설하며 전국을 돌았고 무분별한 애국주의의 분위기에서 그의 집회는 총성과 함께 끝나곤 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하디는 영국의 정치사와 노동운동사에서 특이한 인물이었다. 전쟁이 그의 계급과 당을 분열시키는 것을 보면서 키어 하디는 1915년 9월 26일, 59세의 나이로 자신이 꿈꾸던 이상세계로 떠났다.


출처: 노동사회 1999년 2월호, 통권 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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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역까지> 중 푸리에와 오웬

푸리에와 오웬이 꿈꾸었던 멋진 신세계


에드먼드 윌슨

19 세기의 두 괴짜

샤를르 푸리에 (Charles Fourier)와 로버트 오웬 (Robvert Owen)은 19 세기 전반의 독특한 특성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거의 유사한 생애를 살아갔던, 서로 매우 닮은 인물들이다. 푸리에는 브장송의 포목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행상인으로 세상을 떠돌아 다녔고, 오웬은 웨일즈의 말 안장을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포목점 점원으로 일했다. 두 사람 다 당대의 자유주의 정치에 실망하였으며, 당대의 인습적인 문화를 외면하였다. 푸리에는 '과학의 세기인 지난 23 세기 동안' 인류를 '피로 뒤범벅되게' 이끌어 온 유럽 철학의 전통을 끊임없이 비난하였다. 그리고 '거의 반무식쟁이이자 상점 점원'인 샤를르 푸리에 자신을 인류에게 신의 뜻을 설명하는 사람으로 선택한 것은 신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직업적 철학가들을 불신하고 '정치 및 도덕에 관한 모든 서적'을 논박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고 그는 믿었다. 푸리에의 말에 따르자면 천 여 년 동안의 정치인의 잘못은 오직 종교와 행정상의 폐단만을 다루어 왔다는 점에 있었다. "신의 율법은 우선 근본적인 기능인 산업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 정부가 이 일에 착수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며, 더구나 그들은 '자유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 산업상의 분열과 상업적 사기'를 조장하는 그릇된 방향을 취했다는 것이다. 한편, 로버트 오웬은 『정치적 정의에 관한 연구』(1793)의 저자인 윌리엄 고드윈 (William Godwin)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이나 이 비슷한 다른 어떤 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던 적이 없었고, 통계 이외의 다른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뜨인 적도 없었다. 정치 조직을 통해 일해 보겠다는 시도는 실패하였으며 단기간이었을 뿐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곤경으로부터 사회를 구제할 다소 합리적인 '그 무엇'을 급진당, 휘그당, 토리당 혹은 어떤 특수 종교 종파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로버트 오웬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고집스럽고 자주적인 영국인다운 코와, 뺨 둘레까지 뻗어나올 듯한 움푹 들어간 순진스런 타원형의 두 눈과, 달걀 모양의 갸름한 얼굴을 지닌 사색에 잠긴 유순한 큰 산토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치켜올려 감고 있는 흰 목도리 위의 푸리에와 얼굴은 비록 굳게 다문 입과 날카로운 콧날과 다소 양미간이 넓지만 또렷하고 자애스런 두 눈이 강인한 옛 프랑스인의 합리주의적 위엄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어딘지 모르게 오웬과 비슷한 기이한 순진성을 풍기고 있다.

오웬과 푸리에는 모두 완전히 세속을 벗어난 솔직 담백한 사람으로 지칠 줄 모르는 끈기를 지니고 있었다. 양자 모두 심원한 인도주의적 연민과 체계적 정확성에 대한 열정을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 둘은 서구 사회를 가속도로 지배해 가는 상공업제도의 가정 추악한 면을 직접 체험하였다. 푸리에는 국민 의회의 혁명군이 리용을 포위 공격했을 때 자신의 가산을 모두 잃어버리고 가까스로 단두대를 면했다. 또 직물 공업의 성장으로 인해 리용 주민의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는 것을 보았다. 한번은 그의 고용주가 기근이 한창일 때 쌀 매점에 성공하여, 가격을 유지할 목적으로 일부러 쌀을 썩게 만든 뒤 마르세이유항 앞바다에 내다버리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푸리에는 잔혹한 것을 극도로 혐오했고 동정심이 유별나게 강했기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힘이 약한 동무들을 두둔하다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예순 살 때는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다만 주인 마나님이 몹시 학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 어떤 불쌍한 하녀를 위해 무엇인가 도와줄 작정으로 비를 맞아 가며 몇 시간 동안 헤매고 다닐 정도였다. 인간생활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이와 같은 억제할 수 없는 강인한 충동은 그에게 낙관적인 확신을 불어넣었으며, 그를 거의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보상받지 못하는 일들로 몰고 갔다. 이상스럽게 고독한 생활을 해나가며 푸리에는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를 구성할 다양한 집단들의 상호 관계를 구상하고, 그들이 거주할 건물들의 정확한 비율까지 계산해 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우주의 수명이 정확히 8만 년이라는 것을 계산해 내었다. 그의 계산에 따르자면 그 기간 동안 모든 영혼은 분명히 인간이 살고 있다고 그가 간주한 다른 혹성들과 지구 사이를 810번 여행하며, 정확히 1,626번까지의 생애를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푸리에와 마찬가지로 로버트 오웬도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매우 민감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어린 시절 그가 다녔던 무용학교에서 어린 소녀들이 자기 짝을 구하지 못해 실망하였던 광경을 가슴 아픈 기억으로 떠올리곤 했다. 그는 열 살 되던 해에 집을 뛰쳐나와 단시일 내에 출세하여, 20세에는 벌써 5명의 직공을 거느린 면직 공장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새로운 면방직 기계를 초창기부터 이용했던 오웬은 이윽고 '생명 없는 기계에 대한 끔찍스런 정성과 살아 있는 기계에 대한 혹사와 천대'라는 엄청난 모순에 깊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미대륙의 노예제도는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악하고 어리석은 제도일 터이지만, 이 자제할 줄 모르는 시대에 영국의 공장에서 일하는 백인 노예들은 후일 내가 서인도 제도 및 미국에서 보게 된 가정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들보다 훨씬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18세기 말의 영국 농촌의 소작인과 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의 본토의 가내 공장에서 학대받던 소년들과 노동자들보다 여러 면에서, 특히 보건て식품て의복 면에서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그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받던 사람들은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용주 자신도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웬은 말한다. "나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데에만 능숙해진 동료들이 정말 싫어졌다. 이 직업은 우리 본성의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면들을 타락시키고 때로는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온갖 다양한 무역업, 제조업, 상업을 두루 겪어 온 나의 오랜 인생 경험으로부터 나는 이러한 철저히 이기적인 제도 아래에서는 어떠한 훌륭한 품성도 나타낼 수 없음을 깊이 확신한다. 진실, 정직, 미덕은 현재도 그렇고 과거에도 줄곧 그래 왔던 것처럼 미래에도 오직 명목에 그칠 것이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진정한 문명이 있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이것은 사람들 간에 대립적인 이해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모든 사람이 서로 적대하도록, 심지어 서로 파멸시키도록 제도적으로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세상사를 처리해 가는 방식으로서는 저열, 비속, 열등, 무지한 것이다. 인격을 배양하고 부를 창조하는 방식으로서 좀더 나은 방식이 이를 대처하지 않는 한, 항구적이고 전면적이며 실질적인 진보는 이룩될 수 없다."

푸리에는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을 거부했다고 믿었고, 오웬은 관찰만으로 자신의 결론에 도달했다고 주장했지만, 양자 모두 자신들 주장의 토대를 루소의 사상에 두고 있었다. 인류는 천성적으로 선량하며 인류를 사악하게 만들어 온 것은 제도일 뿐이라는 루소의 사상은 당대를 완전히 휩쓸었던 사상이었으므로, 책에서 읽지 않더라도 누구나 물들어 있을 지경이었다. 푸리에는 주장하기를 마치 도구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 보듯이 인간의 천성을 꺼내 보면, 신이 다양한 목적에 쓰라고 인간에게 주신 몇 가지 인간적 '열정'―본능과 기호―이 있다는 것이다. 이 '열정'들은 모두 필요한 것들인데, 근대 사회에서 문제는 이들 '열정'이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있을 뿐이요, 적절한 열정이 적절한 방향으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조화'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버트 오웬이 전 생애를 통하여 역설한 원리가 있었다. 즉 자기 스스로는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교육과 어린 시절의 감화가 인간의 됨됨이를 형성하는 것인 바,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나쁜 일 대신에 옳은 일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인간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수학적 정확성'을 띠고 누구나 행복하고 선량해질 수 있다는 원리이다.

절대 평등의 이상 사회

개인의 이해가 전체의 이해와 상충되지 않음을 실례로써 입증하기 위해, 푸리에와 오웬은 모두 대사회 내부에 제한된 규모의 몇몇 자족적 사회를 결성해 볼 것을 주창했다.

푸리에가 요구한 공동체는 개인 자본에 의존하며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보통 선거제가 실시되며, 부자와 빈자의 자제가 동일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푸리에는 소득 격차가 너무 현격한 사람들을 동일한 공동체 내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소득 격차와 더불어 종래와는 다른 성격의 것이긴 하나 계급 제도가 존재하긴 한다. 이 계급 제도에서는 자본가가 맨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먼저 공동체 성원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 줄 몫을 공제한 뒤)배당제로 소득을 분배한다. 단지 4/12만을 자본량에 따라 분배하며, 5/12는 노동량에 따라 나머지 3/12은 발휘한 기량에 따라 분배한다. 하기 싫은 노동은 편한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고, 필수 노동은 단순 유용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며, 유용 노동은 사치품 생산 노동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다.

푸리에에게서 문제의 초점은 인간의 노동에 대한 관계를 모든 '열정'이 유익한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화한다는 간단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하고 싶어하는 몇 가지 일은 있으니, 모든 일이 행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모든 인간적인 충동에는 유용한 용도가 있으니 모든 충동을 만족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 일에 매력을 느끼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일만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권태나 피곤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누구나 제 나름의 취미와 다양한 감정을 갖고 있을 것이지만, 각자는 다양한 일에 종사함으로써 이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산업상의 능률은 다양한 집단 간의 경쟁에 의해 촉진된다. 푸리에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서도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조직을 구상해 내었다. 그의 골치를 썩혔던 두 가지 문제―아이들이 흙장난을 좋아한다는 문제와 공동체 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문제―는 서로가 서로의 해결책이 되었다. 즉 쓰레기를 아이들이 치우게 한다는 것이다.

로버트 오웬이 구상한 공동체는 이와 반대로 절대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공동체의 유일한 계급 제도는 연령에 따른 것이었으며, 장년층이 통치 평의회를 구성한다. 어린이들은 세 살이 되면 부모 곁을 떠나 전문 교육자와 보모 밑에서 양육되고, 교환 수단의 단위는 한 시간의 몫의 노동으로 한다.

푸리에는 자기 계획의 자기 재정을 담당하고 싶은 부자와 기꺼이 상의하기 위해 매일 정오 자기 집에서 기다리겠다고 공고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동안 매일 그 시각 그 장소에서 기다렸지만, 한 사람의 후원자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확고한 신념을 지니긴 했지만 매우 실망한 채로 1837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면 오웬은 자신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오웬은 한때 자기에게 도움을 기대한 푸리에가 자기에게서 제한된 집단으로 공산주의를 실천하려는 사상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여기서 중심 인물―그리고 그 당시 가장 특출한 인물―은 역시 오웬이다.

꿈을 현실로 바꾼 뉴 라나아크

로버트 오웬의 실제 행적은 오늘날에는 그 당시 소설의 주인공인 칼렙 윌리암스나 프랑켄슈타인만큼이나 기괴하다. 푸리에와 똑같이 사욕을 떠난 사회적 이상주의자인 그의 생애는 헨리 포드의 생애를 연상시킨다. 오웬은 스코틀랜드의 뉴 라나아크에서 최초의 면직 공장을 인수하였을 때, 그 공장 직공들은 더럽고 주정뱅이인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남녀들과―그 당시 어쨌든 공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고아원에서 실어온 5~10세의 어린이들이었다. 이런 형편없는 인간들을 바탕으로, 또 게다가 모두 스코틀랜드인인데 자기만이 웨일즈인이라는 특히 불리한 조건을 지닌 채, 오웬은 25년 이내에 높은 생활 수준과 상당 수준의 교육을 갖춘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웬 자신은 그 공동체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오웬은 공동체 성원들에게 다른 어떤 경쟁 상대보다 높은 임금을 주고 짧은 시간 일하게 했으며, 그들과 함께 불황을 이겨냈다. 그는 자기의 동업자들에게 지불할 배당금을 일정액으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모두 공동체의 개량 사업에 돌렸다. 오웬은 사회전체가 이런 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전세계를 향하여 호소했다. 모든 어린이들을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인수하여 처벌하거나 학대하지 않고 내가 우리 노동자들의 어린이들 교육하는 방식처럼 교육시키기만 한다면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지 않겠는가?

오웬은 인적 자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 혹은 그 인적 자원을 다듬기에 적합한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 어디인지를 우선적으로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인간이란 전반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지와 누구에게 그 시작을 맡길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점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는 가장 가망성 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뉴 라나아크에서 스스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매우 고상한 인격을 지닌 예외적인 인물이며, 뉴 라나아크를 이상적인 공동체로 만든 것은 질이 나쁜 부모들에게서 태어난 어린이들의 천성적인 선량함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가 자기 자신이 건설했으며, 자기가 관리하고 운용해야만 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로버트 오웬은 자신의 공장에서 자애롭고 전능한 신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권고만으로는 직공들을 근면하고 정직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 그들을 점검하고 억제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는 일터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 머리너머로 작은 사각 나무 패찰을 걸어 놓았다. 이 나무 패찰의 네 변에 각각 다른 색깔을 칠해 놓았는데 각 색깔은 각각 다른 품행 등급을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그는 어느 날이건 공장을 둘러볼 때면 십장이 돌려 놓은 패찰의 색깔을 보고 그 직공이 전날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품행 극히 나쁨'이나 '품행 좋지 않음'을 나타내는 색깔의 표찰과 마주칠 때마다 그는 지나가면서 태만한 근로자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 그는 색깔이 점차로 검은색에서 파란색으로, 파란색에서 노란색으로, 마침내는 흰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매일의 등급을 일지에 기록하게 하여, 그가 없었던 동안에 노동자들이 어떻게 처신했는가를 돌아온 뒤 자신이 항상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는 도둑을 추적하여 찾아내는 전혀 실수 없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도덕적인 세계를 창출해 낸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결코 깨닫지 못했던 오웬은 자기가 거느린 교사들이 다른 곳에 가서는 뉴 라나아크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에, 그리고 그의 공동체를 다른 사람이 관리하도록 맡겨 두자 번영하지 못하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후일 오웬과 함께 협동 조합 운동을 벌인 차티스트운동의 한 지도자인 윌리엄 로베트는 오웬이 본래 독재적인 성격이어서 여하한 민주주의적 기반 위에서도 함께 일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의 동업자들이 자신의 방법에 반기를 들 기세가 뚜렷해져서 그가 항상 새로운 동업자를 찾으러 다니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 새로운 동업자를 발견한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감에 따라, 그는 점차적으로 자본가들이란 탐욕스럽고 무지한 족속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의회를 통해 로비 공작을 벌여 온(영국에서는 최초로 제출된) 연소자 노동 금지 법안이 면방업자들의 맹렬한 반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가 신뢰해 온 피일과 같은 정치가들에 의해 그 법안 내용의 핵심 조항을 삭제당해 버리자 그의 신념은 한층 더 흔들렸다. 오웬은 기대를 걸고 런던의 경제학자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그들이 실제 경험은 조금도 없는 사람들로서, 오웬의 말에 따르자면, 단지 공장주들의 추악한 행위를 합리화할 체계를 만드는데 골몰하고 있음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을 뿐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에 뒤따른 절망적인 경제 사정의 타개책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가 캔터베리 대주교를 의장으로 하여 저명한 경제학자, 박애주의자, 정치가, 실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그도 초대를 받고 참석했다. 그런데 그 회의에서 그는 당시의 실업 사태의 원인이 제대 군인과 군수 산업의 급격한 붕괴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참석자가 변변히 교육도 받지 못한 자기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기계로 인해 수백만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렸다고 설명하자 모든 참석자들이 놀랄 정도였다. 젊은 시절 그는 면직 공장의 관리자 노릇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매우 가까이 살고 있던 공장주는 단 한 번밖에 공장을 방문한 일이 없었으며, 그 방문조차도 외국 손님에게 공장을 구경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웬은 이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결론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이해시키자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리라는 것을 염려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가혹한 현실

그런데 그럴 즈음에 그들⇬수상, 대주교, 왕 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하류 계급의 불온한 정세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하류 계급을 행복한 상태로 유지시켜 주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오웬은 여전히 그들의 공평 무사함을 신뢰하고 있었다. 엄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는 그들 같은 사람들이 인류의 전반적인 향상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린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1817년 엑스라 샤펠에서 개최된 열강 회의에 참석하여 그 회의의 간사장인 한 노련한 외교관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 저명 인사에게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덕택으로―만일 인류가 서로 협력하는 것이 인류 자신의 최고의 이익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만 된다면―이제 소수 특권 계급만이 아닌 전체 인류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훌륭한 음식을 먹으며,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여태까지 다종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었다. 그러나 간사장의 대답을 듣고서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노련한 외교관은 맞는 말이라고 대답한 뒤, 그들―그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유럽의 지배 세력―은 그것을 다 알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일반 대중이 잘 살게 되고 자립적이 된다면,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지배 계급이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간사장의 이러한 고백을 듣고 난 뒤, 나는 회의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어버렸다. 장기간에 걸친 험난한 과제가 내게 주어져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과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서로 다툰다는 것이 양자 모두의 진정한 이해와 참된 행복에 정면으로 반하고 있음을 양자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쳐부수어야 할 편견이 모든 나라 모든 계급에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감지했다. 이 편견을 뿌리 뽑자면 무한한 인내와 끈기 이외에도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진함과 사자의 용맹함이 요구됨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굳은 결의로 시작한 일이니 만큼 단호하게 목표를 향하여 곧장 전진해 나가야 함을 절감했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이미 오웬을 파괴적인 이상주의적 세력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는 공개 연단에서 진리의 주요한 적은 종교라고 단언하였으며, 종교만이 아니라 재산제도와 가족 제도까지 공격했다(이리하여 그는 푸리에보다 훨씬 앞으로 나아갔다. 푸리에는 이 세 가지를 수정한 채로 유지하는 공동체를 계획했었다.). 이제 교회가 그에게 적대감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의 친구들은 그와 어울리기를 꺼려하게 되었다.

그는 유럽은 병들었으므로 새로운 사회를 창건하려면 신선한 땅을 찾아야만 한다고 단안을 내렸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일계 라파이트 교파로부터 인디애나주 뉴우 하모니의 3만 에이커의 땅을 인수했다. 오웬은 1826년 7월 4일에 인류의 3대 억압자인 '사유 재산て불합리한 종교て결혼'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정신 독립 선언>을 선포하고, '근면하고 선량한 사람은 국적을 불문하고' 그의 공동체에 참가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유럽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났다. 그러나 미국인은 영국인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뉴 하모니에서 그들은 더욱 형편없었다. 서부인들은 뉴 라나아크의 스코틀랜드 프롤레타리아처럼 온순하지가 않았다. 또 제한 없이 누구나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종 부랑자와 악당이 들끓었다. 오웬은 테일러라는 파렴치한 인물과 동업을 하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그와 손을 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테일러는 자기도 그 땅 위에 공동체를 하나 세울 생각이라고 하면서 오웬에게 손을 끊는 대가로 한 구역의 땅을 요구했다.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날 밤 테일러가 많은 양의 농기구와 가축을 몰래 자기쪽 땅으로 날라 갔기 때문에 그 다음날 거래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것들이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 후 테일러는 자기 땅에 위스키 제조소를 만들어 오웬의 금주 설교를 조롱했고, 제혁 공장을 세워 오웬의 제혁 공장과 경쟁했다. 뉴 하모니는 3년도 버텨 내지 못했다. 오웬은 마침내 재산을 여럿으로 갈라 팔아 버렸다.

그는 그 뒤에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같은 일을 벌여 많은 돈을 이러한 공동체에 날려 버렸다. 그는 돈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뉴 라나아크 시절의 초창기에는 면직업의 경기가 좋았었고 그가 자신의 최초의 공동체만을 소유하고서 스스로 감독할 수 있었으므로, 돈 관계에서의 약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유지해 나갈 방도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설비와 공장을 사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림으로써 많은 돈을 날려 버리곤 했다.

외로운 죽음

그는 마침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자식들의 부양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더이상 부유한 공장주도 아니요, 또한 지배 계급의 호의마저도 잃어버린 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32년의 개정 선거법은 오직 중산 계층에게만 지지를 얻었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환멸과 반항심만을 남겨 놓았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환멸을 느낀 오웬은 노동자계급에 가담했다. 그는 뉴 라나아크마저 포기해 버렸으며 이제는 고용주 신분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이제 오웬식 협동 조합 운동과 전국 대통합 노동 조합에 관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너무도 못 견뎌한 까닭에, 즉 많은 경험을 했음에도 여전히 자기 제도의 확신성과 필연성을 너무도 확신한 까닭에, 그는 노동자 계급의 장기간에 걸친 고통스런 투쟁에서는 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조직한 후 1년도 채 못되어 노동 조합 운동은 와해되어 버렸다. 오웬은 차티스트 운동과 곡물법 폐지 운동에는 관심이나 공감을 거의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일거에 대뜸 평등을 확립하는 것이 훨씬 쉬운 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인류가 아직도 너무나 몽매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저승에 간 사람들의 힘에 의지하려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자기가 알고 있던 모든 고결한 인물들―생시에 그의 주장을 공감을 갖고 경청하였으며 그의 이상을 정말로 공유하고 있었다고 느껴졌던 사람들로서 이제는 죽어 그의 곁을 떠나간 모든 사람들―즉 셸리, 토마스 제퍼슨, 채닝, 켄트 대공(이 대공이 그에게서 돈을 빌어 쓴 뒤 갚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등이 자기와 여러 가지 약속을 맺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자기와 의논하고 자기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저승에서 돌아오고 있는 중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에게 죽은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은 여러 해 전에 그의 머리에 떠올랐으나 지금 세상에서는 아직 확실한 근거를 잡지 못한 몇 가지 생각―"지금의 무지몽매한 인류로서는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을 매우 중대한 어떤 변화가 명백히 진행 중"이라는 생각, "쌓이고 또 쌓이는 엄청난 부 속에서 모든 사람이 빈곤에 허덕이거나 아니면 남의 빈곤 때문에 절박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상호 간의 적대적인 이해 관계에 기초한 제도가 인류를 위해 다행스럽게도 이제 오류와 모순의 극한점에 도달하였다."는 생각, 곧 '단결의 원칙'이 '분열의 원칙'을 대체하게 된다는 생각, 또한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행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확인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큰 돈을 모았다가 깡그리 날려 버린 로버트 오웬은 1858년 웨일즈의 조그마한 마을―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열 살에 사회로 진출하여 꿈같은 출세를 거듭하고, 마침내 면방업계의 개척자가 되었다―로 돌아가 아버지의 말 안장 가게 옆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에드먼드 윌슨/미국의 뉴저지주 출생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차 대전 이후 신문 기자 등으로 활약했다. 후에 비평에 눈을 돌려 20세기 비평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To the Finland station』, 『Axel's Castle』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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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쇼] 부르주아 사회주의자

쇼, Yousuf Karsh가 찍은 사진
 

George Bernard Shaw

1856. 7. 26 더블린~1950. 11. 2 잉글랜드 하트퍼드셔 아이엇세인트로렌스.

아일랜드의 극작가, 문학비평가, 사회주의 선전문학가.

192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청년시절

조지 버나드 쇼는 조지 카 쇼와 루신다 엘리자베스 걸리 쇼 사이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족보상으로는 아일랜드의 지주계급으로서 프로테스탄트계의 '권력층'에 속하지만 현실에 어두웠던 아버지는 처음에 한직인 공무원으로 시작했다가 곡물상 일을 벌여 실패했다. 가난하면서도 귀족행세를 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이는 그에게 단순한 가난 이상의 굴욕이었다. 처음에는 친척 목사에게 공부를 배웠고 그후 학교에 다녔지만, 학교 자체를 거부해서 16세 때 토지중개인 사무소에서 일했다. 쇼는 어머니의 영향과 아일랜드 국립미술관을 자주 방문한 덕분에 음악·미술·문학의 폭넓은 지식을 갖출 수 있었다. 1872년에 어머니는 1866년 이래로 더블린에서 쇼 일가와 한집에서 살던 그녀의 음악교사 조지 존 밴덜리어 리를 따라 남편을 버리고 두 딸과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1876년 쇼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런던에 자리잡은 어머니와 큰 누나에게 합류했는데 이때 작은 누나는 죽고 없었다. 그는 20대에 계속되는 좌절과 빈곤을 겪어야만 했으며, 어머니가 그녀의 남편에게 받는 용돈과 그녀가 음악교사로 버는 수입으로 생활했다. 오후에는 대영박물관 독서실에서 소설을 쓰고 학생 때 미처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으면서 보냈고, 저녁에는 당시 런던 중류계급 지식인들 사이에 성행한 강의와 논쟁에서 부족한 지식을 스스로 보충했다.

그의 소설은 완전히 실패했다. 반자전적이며 적절한 제목이 붙은 〈미성숙 Immaturity〉(1879, 출판 1930)은 런던의 모든 출판업자에게 거절당했다. 그후에 쓴 4편의 소설과 10여 년 간 언론에 기고한 대부분의 글도 마찬가지로 퇴짜를 맞았다. 그가 첫 문학작품으로 번 돈은 1년에 10실링도 못 되었다. 1887~88년에 씌어졌으나 죽은 뒤인 1958년 출판된 작품〈미완성의 소설 An Unfinished Novel〉은 그의 소설 중 마지막 실패작이었다. 1880년대에 그는 소설가로서는 실패했지만 자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가, 논객, 극작가로서의 경험을 했다. 1884년에는 영국 중류계급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이 새롭게 창설한 페이비언 협회의 유력한 인물이 되었다. 이 협회는 혁명이 아닌 지적·정치적 생활의 '침투'(시드니 웹의 표현)를 통한 영국 사회의 변화를 목표로 했다. 쇼는 이 협회의 모든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영국 사회주의의 고전이 된 〈사회주의에 대한 페이비언적 연구 Fabian Essays in Socialism〉(1889)을 편집하고 두 장(章)을 직접 쓰는 등 눈부신 활동을 했다. 1885년 마침내 연극비평가 윌리엄 아처가 쇼에게 고정적인 저널리스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초기에 잡지에 기고한 글로는〈펠 멜 가제트 Pall Mall Gazette〉에 쓴 서평(1885~88),〈월드 World〉에 쓴 미술평론(1886~89),〈스타 Star〉에 쓴〈바셋 호른 Corno di Bassetto〉등의 재기 넘치는 음악평론(1888~90)과〈월드〉에 쓴〈지 비 에스 G.B.S.〉등의 음악평론(1890~94) 등이 있다. 쇼는 음악, 특히 오페라에 탁월한 식견을 지녔으며, 여기에 재치 있는 여담을 곁들임으로써 그의 평론은 오늘날까지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프랭크 해리스가 그를 〈새터데이 리뷰 Saturday Review〉지의 연극평론가(1895~98)로 임명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치와 언변을 동원하여 빅토리아 시대의 허위와 위선에 찬 무대를 생명감 넘치는 무대로 일신시킬 운동을 전개했다.

 

초기 극

쇼가 희곡을 쓰기 시작했을 당시 영국에서 가장 저명한 극작가는 A.W. 피네로 경과 H.A. 존스였다. 이들은 근대적 사실주의 극을 개척하고자 했지만 인위적인 구성과 진부한 인물유형에서 벗어날 힘이 없었다. 이러한 극의 빈곤은 입센의 여러 작품이 런던 무대에 소개되면서 분명해졌다. 1890년〈인형의 집 A Doll's House〉, 1891년에〈유령 Ghosts〉이 런던에서 공연되었고, 영국 무대에 새로운 자유와 진지함의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쇼는〈입센주의의 정수 The Quintessence of Ibsenism〉(1891)를 막 출판하려던 참이었는데, 미발표작인 희극〈홀아비의 집 Widowers' Houses〉을 급히 손질해 런던 빈민가의 악명 높은 지주제도를 다룬 '입센풍' 작품으로 고쳤다. 1892년에 공연된 이 극은 당시 대담한 신예 극작가들조차 여전히 자주 사용하던 진부한 낭만적 인습을 흔들어놓았다. 이 작품은 사랑에 빠진 선량한 영국 젊은이가 미래의 장인의 재산과 자신의 수입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한 결과임을 깨닫는다는 줄거리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비극적 상황이지만, 쇼는 늘 비극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의 사랑이 연민을 일으키지 않는다. 주의를 끄는 것은 낭만적 곤경이 아니라 사회의 악이며, 인물의 행위는 풍자적 희극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893년에 쓴 이와 유사한 경향의 극〈워렌 부인의 직업 Mrs. Warren's Profession〉은 검열관인 궁내부장관의 반대로 1902년에야 공연될 수 있었다. 이 극의 주제는 조직 매춘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가 그 '직업'을 거쳐 유럽 전역 매춘굴의 일부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극 전환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도 상황을 결정하는 경제적 요인이 강조되고, 당시 성행하던 '타락한 여성들'을 다룬 희극과는 달리 주제가 냉혹하게 다루어진다. 쇼의 여러 작품처럼 이 극도 일정한 범위에서는 관념극에 속하지만, 관념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보면 본질적으로 고급 희극이다.

쇼는 자신의 초기 극들이 "관객으로 하여금 즐겁지 않은 사실에 직면하도록 극적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유쾌하지 않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뒤 그는 이 신랄한 희극들에 감정이 상해 있던 감독과 관객을 새롭게 끌기 위해 '유쾌한' 4편의 극을 썼다. 이 두 부류의 작품들을 개정해서〈유쾌한 극과 유쾌하지 않은 극 Plays Pleasant and Unpleasant〉(1898)으로 출판했다. '유쾌한 극'의 첫번째 작품〈무기와 인간 Arms and the Man〉(1894 공연)에서는 발칸 반도를 배경으로, 사랑과 전투라는 낭만적 소재를 가끔 신랄하기는 하지만 재미있고 쾌활하게 다루고 있다. 2번째 작품〈캔디다 Candida〉(1897 공연)는 영국 연극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된다. 그것은 1904년 이 극이 왕립극장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된 것을 계기로 할리 그랜빌 바커와 J.E. 베드렌이 손잡고 그곳에서 뛰어난 무대를 잇달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 극의 여주인공은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성격이 둔감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자인 목사 남편과 그녀를 사랑하는 젊은 시인 사이에서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녀는 남편이 실제로는 약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만만한 척하는 남편을 선택한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시인은 병적으로 흥분하지만, 예술가로서 더 큰 창조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포기할 만한 아량을 지닌 사람이다. 이것은 쇼에게 중요한 주제이며, 정신적 창조자인 남성과 인류의 생물학적 존속을 이끌어가는 여성 간의 갈등이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이 주제는〈인간과 초인 Man and Superman〉의 근간을 이룬다.〈캔디다〉에서 이러한 사변적 주제는 가볍게 다루어질 뿐이며, 이는〈아무도 모른다 You Never Can Tell〉(1899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서 남녀 주인공은 각각 능란한 호색가와 이성적이고 해방된 여성임을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이러한 관념과는 무관한 생명력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한다.

쇼는 비평서와 정치적 작품을 계속 왕성하게 발표하는 한편 이러한 극까지 쓰느라 겹친 과로로 건강을 해쳐 중병에 걸렸다. 1898년 그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베아트리체와 시드니 웹의 친구이자 상속인이며 그의 개인 간호사였던 아일랜드인 샬럿 페인 타운센드와 결혼했다. 표면상 금욕적인 결혼생활은 평생 계속되었으나 엘런 테리, 패트릭 캠벨 부인 등 여러 여성들과의 서신왕래를 통해서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쇼는 다음 희곡집〈청교도들을 위한 3편의 희곡 Three Plays for Puritans〉(1901)에도 희곡 자체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이 암시하는 주제까지 감동적인 산문체로 다룬 서문을 붙였다.〈악마의 제자 The Devil's Disciple〉(1897 공연)는 미국 독립전쟁중의 뉴햄프셔가 배경이며, 여기서 전통적인 멜로드라마가 전도된다. 쇼의 최초의 대작〈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Caesar and Cleopatra〉(1901 공연)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셰익스피어의〈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에 등장하는 38세의 요부가 아니라 버릇 없고 포악한 16세의 아이이다. 카이사르는 군인의 면모뿐만 아니라 철학자의 면모도 지닌 고독하고 준엄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 극의 빼어난 성공은 카이사르를 무대 위의 초인적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아량과 '본유의 도덕성'을 갖춘 설득력 있는 인물로 다룬 데 기인한다. 3번째 연극〈브래스바운드 대장의 변절 Captain Brassbound's Conversion〉(1900 공연)은 의무와 정의로 위장한 여러 종류의 위선에 대한 설교이다.

 

국제적 명성

〈인간과 초인〉(1905 공연)에서 쇼는 인류는 더 높은 삶의 형태를 향해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명력' 운동의 최종 단계라는 자신의 철학을 피력한다. 이 희곡의 주인공 잭 태너는 여주인공 앤 화이트필드의 집요한 청혼을 뿌리치고 이러한 철학에 걸맞게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추구한다. 결국 잭은 인류의 존속과 운명이 앤과 다른 여성들의 생식능력에 달려 있으므로 그녀야말로 '생명력'의 강력한 도구임을 깨닫고 가엾게도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극의 비현실적인 제3막〈지옥에 빠진 돈 주안 Don Juan in Hell〉의 꿈 장면은 가극풍이며, 자주 개별작품으로 무대에 올려진다. 쇼는 유럽 대륙에서 극이 공연됨으로써 일찍이 극작가로서의 자리를 굳혔지만, 이상하게도 영국에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훨씬 뒤에 런던에서〈존 불의 다른 섬 John Bull's Other Island〉(1904 공연)이 공연되면서 에드워드 7세를 위해 특별공연을 한 뒤였다.

쇼는 계속해서 고급 희극을 통해 종교적 자각을 탐구했고 사회와 사회악의 결탁을 파헤쳤다.〈소령 바버라 Major Barbara〉(1905 공연)에서 구세군 소령인 여주인공은 자신과 등을 돌린 군수품 제조업자인 아버지가 죽음을 거래하긴 하지만 그의 원칙과 행동은 가장 높은 차원의 의미에서 종교적인 반면, 구세군은 대개 위선적인 대중의 참회와 자신들이 신랄하게 매도하는 양조업자·무기제조업자의 헌금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의사의 딜레마 The Doctor's Dilemma〉(1906 공연)는 보편적인 직업의 자기 보호의식을 대표하는 의료직에 대한 풍자이자 동시에 예술가 기질과 그것을 예술가의 업적과 구분할 줄 모르는 대중의 우매함에 대한 풍자이다.〈안드로클레스와 사자 Androcles and the Lion〉(1912 공연)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한 철학적 희곡으로, 종교적 찬양의 참과 거짓을 다룬 작품이다. 집단 공개처형을 선고받은 초기 그리스도교 집단을 통해서 보여준 주된 주제는 누구나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쇼의 걸작 희극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인기 있는 작품은〈피그말리온 Pygmalion〉(1913 공연)이다. 그는 이 작품이 음성학에 관한 교훈극이라고 주장했으며 반영웅적인 주인공 헨리 히긴스는 음성학자이지만, 이 작품은 사랑과 영국의 계급제도를 다룬 인간적인 희극이다. 이 극은 히긴스가 런던 토박이인 꽃 파는 소녀를 훈련시켜 귀부인 행세를 하도록 하는 과정과 이 실험의 성공이 몰고온 결과를 보여준다. 정확한 억양은 익혔지만 예의 바른 대화술은 배우지 못한 엘리자 둘리틀이 상류사회에 등장하는 장면은 영국의 극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 작품은 1938년에 영화화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쇼에게 안겨주었고, 뮤지컬〈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1956, 영화화 1964)로도 각색되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작품

쇼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분수령이었다. 처음에 그는 극작을 그만두고 논쟁적인 소책자〈전쟁에 관한 상식 Common Sense About the War〉을 출판해 대영제국과 그 동맹국을 독일과 마찬가지로 비난하면서 협상과 평화를 주장했다. 그는 반전연설로 악명이 높아졌고, 많은 이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상심의 집 Heartbreak House〉(1920 공연)에서는 전쟁 발발 직전의 한 시골집을 배경으로 전쟁의 유혈에 책임져야 할 세대의 정신적 파탄을 폭로했다. '낙담시키는 비관주의의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으려고〈므두셀라로 돌아가라 Back to Methuselah〉(1922)라는 제목으로 쓴 5편의 연작 희곡에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AD 1920년에 걸쳐 진행된 극적 우화를 통해 창조적 진화라는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1920년에 잔 다르크 시성식을 본 쇼는 그녀에 대한 역사극을 쓸 결심을 했다. 이렇게 탄생된 걸작〈성녀 조앤 Saint Joan〉(1923 공연)에서 잔 다르크는 가톨릭 성자와 순교자로서뿐 아니라 실천적 신비주의자, 이교도 성자, 영감을 받은 천재가 결합된 인물로서 다루어진다. 조앤은 '교회와 법률이라는 강력한 힘 사이에서 파괴된' 탁월한 존재로서, 비극적 여주인공의 화신이다. 그녀의 죽음은 인류가 성자와 영웅들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살해하기도 하는 모순을 보여주며, 인류가 두려워하는 높은 차원의 도덕성이 진화과정을 거쳐 인간의 보편적 기준으로 될 때까지 그러할 것이라고 말한다.〈성녀 조앤〉에 대한 격찬은 1925년 노벨 문학상으로 이어졌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했다.

후기 작품들에서 쇼는 자신의 탐구를 심화시켜 희비극적·비사실주의적 상징주의를 완성시켰다. 그후 그는 5년 동안 희곡은 쓰지 않고 1930~38년에 쓴 작품을 편집하는 한편, 백과사전적 정치 소논문인〈여성을 위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입문 The Intelligent Woman's Guide to Socialism and Capitalism〉(1928)을 썼다. 그뒤 발표한〈사과 수레 The Apple Cart〉(1929 공연)는 미래파 시각에서 쓴 고급 희극으로, 쇼가 평생 동안 지켜온 급진적 정치철학과 보통사람의 자제력을 불신하는 근본적인 보수성향 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외 후기 작품들로는〈너무나 진실해서 선할 수 없다 Too True to Be Good〉(1932 공연)·〈바위 위에서 On The Rocks〉(1933 공연)·〈이상한 섬의 바보 The Simpleton of the Unexpected Isles〉(1935 공연)·〈제네바 Geneva〉(1938 공연)·〈선왕 찰스의 황금기 In Good King Charles's Golden Days〉(1939) 등이 있다. 전쟁 동안 극작을 중단했던 쇼는 전후 90대에도 희곡〈부자연스런 우화 Farfetched Fables〉(1950 공연)〈셰이크스 대 셰이브 Shakes Versus Shav〉(1949 공연)를 비롯해 초기에 보여준 날카로움의 흔적만이 엿보이는 백일몽〈왜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Why She Would Not〉(1956 공연) 등을 발표했다.

건방지고 불손하며 항상 자기과시적이던 쇼는 94세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쾌활한 기지를 발휘하여 줄곧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깡마른 체구, 무성한 턱수염, 멋진 지팡이는 그의 희곡만큼이나 전세계적으로 유명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중에 아내 샬럿이 지병으로 죽자 쇼는 더욱 전쟁의 궁핍함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그는 런던의 아파트를 떠나 1906년부터 살았던 고향 하트퍼드셔의 아이엇세인트로렌스에 있는 시골집으로 내려가 1950년 그곳에서 죽었다. 쇼는 17세기 이후 영국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로서 당시 가장 뛰어난 희극작가 이상의 역할을 했다.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인간과 초인〉의 일부인〈지옥에 빠진 돈 주안〉,〈소령 바버라〉,〈상심의 집〉,〈성녀 조앤〉 같은 작품들은 당대의 다른 극작가들과는 견줄 수 없는 수준 높은 진지함과 수려한 산문체를 갖추었다. 그는 도덕적 열정과 지적 갈등 및 논쟁이 담겨 있는 극을 발전시켰으며, 풍속희극을 재생시키고, 상징적 소극과 이단적인 극을 과감히 시도함으로써 그의 시대 이래로 연극의 개념을 새롭게 형성했다. 몽상가이며 신비주의자인 쇼의 작품에는 도덕적 열정에 관한 철학이 스며 있다. 쇼는 스위프트 이래로 가장 신랄한 격문의 저자였고, 영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음악평론가였으며, 그당시 가장 탁월한 극비평가였다. 또한 정치학·경제학·사회학에 관한 비범한 연사이자 평론가였고, 가장 많은 편지를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대담한 비평적 관점을 많은 다른 관심분야에까지 확장하여 그가 살았던 당시의 정치적·경제적·사회학적 사상 형성에 기여했다.

S. Weintraub J. I. M. Stewart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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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수감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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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Karl Marz, F. 뚷딘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에서



 

* 제목설명 : “공산주의 당파의 선언”, 1848년 런던에서 발간된 30페이지 단행본의 제목


하나의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 공산중의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이 유령을 잡기 위한 성스러운 모리 사냥을 위해 동맹하였다.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관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자신의 적수들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는 비방을 받지 않았을 반정부당이 어디 있으며, 더 진보적인 반정부 인사들과 자신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라고 낙인 찍는 비난을 되돌리지 않았을 반정부당이 어디 있는가?

두 가지 결론이 이러한 사실로부터 나온다.

공산주의는 이미 유럽에 모든 세력들에게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견해, 자신들의 목표, 자신들의 지향을 전세계 앞에 공공연하게 표명하여,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소문에 당 자신의 선언으로 맞서야 할 시기이다.

이러한 목적으로 매우 여러 국적의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랑드르어, 덴마크어로 발표될 다음의 선언을 기초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봉건 사회가 몰락하면서 생겨난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계급대립을 폐지하지 않았다.”


“수많은 자유를 단 하나의 인정사정 없는 상업자유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무기들을 버려 냈을 뿐만이 아니라, 이 무기들을 지니게 될 사람들도 낳았다. 현대 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들을 낳았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똑같이 불가피하다.”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리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는 것을 경멸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질서의 폭력적 전복에 의해 달성될 수 있을 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족쇄 말고는 공산주의 혁명에서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1. 선언은 왜 쓰여졌나!


그나마 남아있던 봉건적 잔재들이 하나둘 불타고, 산업혁명, 프랑스혁명, 그리고 자본주의가 도래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 자본가 자신들조차 끝없는 경쟁을 위한 끝없는 착취를 일삼아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1837년 프랑스나 스위스에 거주하는 독일 수공업자들이 만든 ‘추방자동맹’에서 급진적인 성원들이 독립하여 바이틀링을 지도자로 추대한 ‘의인동맹’을 조직한다. 이 단체는 독일의 노동자들과 수공업자들의 최초 비밀조직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동맹과 관계를 맺으며, 바이틀링파의 애매한 인도주의 노선과 대결할 필요를 느꼈고, 당시 동맹의 성원들이 우호적으로 생각하던 ‘진정한’ 사회주의 조류의 실체를 드러내 그 유파를 격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47년 동맹에 가입한 맑스와 엥겔스는 동맹을 개조하기로 합의한다.

1847년의 유럽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기근이 있었고, 이 기근은 곡물의 흉작으로 이어졌다. 굶주린 백성들의 항의와 투쟁이 폭발하는 가운데 자유주의적 정치 세력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선거권 개혁 운동과 함께 다양한 유토피아적 평등주의 경향들이 일었다.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 4세는 주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으나, 의회 내 다수파인 부르주아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의회는 곧 해산하였다. 폴란드, 이탈리아, 아일랜드에서는 민족 해방 투쟁의 물결이 확산되고 있었고, 잉글랜드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이 상당히 많은 수의 노동자들을 집회장으로 불러냈다. 1840년대 말의 유럽의 위기는 자본주의와 함께 생겨난 사회세력들이 이전의 지배 집단인 봉건 세력들에게 저항하며 비롯된 것이었다.

의인동맹 대회는 1847년 6월에 런던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훗날 ‘공산주의자동맹 제 1차 대회’로 불리게 되었으며, 엥겔스의 노력으로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정되었다. 1. 단체의 명칭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변경한다. 2. 단체의 구호를 ‘만인은 형제다’에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바꾼다. 3. 엥겔스가 작성해 둔 ‘공산주의자 신조 표명’을 동맹의 규약으로 삼기 위해 토의에 부친다. 엥겔스는 ‘신조표명’을 수정하여 「공산주의의 원칙들」을 작성했지만, 문답형식으로 된 이 문서는 동맹의 강령으로 삼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었다. 같은 해 11월 29일부터 열린 공산주의자 동맹 2차 대회는 강령 채택을 미루고, 그 집필을 다시 맑스와 엥겔스에게 위임했다.

맑스와 엥겔스가 1847년 말부터 1848년초에 브뤼셀에서 집필한 선언이 ꡔ공산주의 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ꡕ이다. 노동자 계급의 최초의 국제적 조직인 공산주의자 동맹이 무언가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한 1848년 “자신들의 견해, 자신들의 목표, 자신들의 지향을 전세계 앞에 공공연하게 표명하여, 공산주의의 유령이라는 소문에 당 자신의 선언으로” 맞선 것이 바로 ꡔ선언ꡕ인 것이다.



2. 선언은 무엇을 말했는가!

ꡔ선언ꡕ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 운동(혁명운동)의 출현을 바라보면서 부르주아와 권력의 두려운 상태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과정을 설명하고 자본의 탄생과 함께 태동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적대감의 증폭을 폭로한다. 봉건제와의 투쟁에 함께 했던 부르주아를 반동 계급으로 탈바꿈했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ꡔ선언ꡕ은 자본주의의 속내를 철저하게 폭로한다. 노동자 계급은 잔인하게 착취당하며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한 모든 사회적 가치를 화폐로 환원시켜 비인간적 사회를 만들고 전쟁의 역사를 야기시켰다고 말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노동자들을 대공장에 집중하고 분업의 시대를 열면서 생산관계를 더욱 밀착시키는 일정한 토대 위에 생산하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스스로 발전시킨 생산력을 파괴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을 설명하며 자본주의 체제 전반의 철폐를 위한 길이 도래할 것을 예언한다. 또한 맑스와 엥겔스는 부르주아가 자본을 생산하면 할수록 자본주의를 철폐할 혁명 세력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출해 왔다고 단언한다.

마지막으로 혁명을 준비하고 혁명의 시기 공산주의자들의 임무와 역할을 피력하고 반동적 조류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으며 당당히 공산주의를 선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맑스와 엥겔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착취의 역사는 사적 소유의 역사이다. 다라서 사적 소유는 철폐되어야 한다. -맑스의 사적 소유에 대한 개념은 착취다- 또한 부르주아가 그러하였듯이 소멸해 가는 어떠한 지배계급도 자발적으로 역사의 무대를 떠나지 않는다. 오직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통해서만 타도될 수 있다.



3. 1848년과 2002년


앞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ꡔ선언ꡕ은 19세기 중엽에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설명하기 위해 쓴 문서이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자들은 어떤 사람들인지가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고 유령처럼 소문으로만 입에 오르던 상황에 대처하여 그 사상과 사람들을 또렷한 말로 설명할 필요에서 생긴 문서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당시의 정황과 필요에서 ꡔ선언ꡕ을 집필하였다.

주된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유럽에 닥친 위기는 자본주의로부터 나왔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의 폐지’를 통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만들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폭력적 전복에 의해 달성될 수 있을 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해야 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ꡔ선언ꡕ 집필 이후 죽을 때까지 한 일은 자신들이 도달한 결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노력은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에 개입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러한 사태들을 분석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의 폐지가 모든 인간의 자유로운 생활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 ꡔ선언ꡕ이 대결하고자 했던 상황은 지금 사라졌는가? ꡔ선언ꡕ이 발표된 지 15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이 두 가지 질문이 유령이 되어 전세계를 떠돌고 있다. ꡔ선언ꡕ은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가 무엇인지를 “선언”했을 뿐, 이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다.

2002년 현실의 모순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지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참고 문헌

「공산주의 선언」, 김태호 옮김, 박종철 출판사, 1998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김세균 감수, 박종철 출판사, 1991

「서양사 강의」, 배영수 편저, 한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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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철] 명예퇴임 토론회

오세철 교수 명예퇴임 토론회 - 좌파운동의 반성과 모색

 

http://blog.naver.com/miavenus/60006229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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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이 책은 미국이 세계를 어떻게 경영해야 하는 가를 잘 보여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앞에 아른거린 것은 내가 태어난 나라의 지정학적 모습이었다. 극동의 조그만 나라, 그것도 반이 잘려서 지역 강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는 우리 조국에 대한 안쓰러움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내 자신이 지금까지 배워오면서 세계 경영이라든가 세계를 조망해야 하는 필연적 이유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것 역시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미국인들이 가지는 사유의 스케일의 방대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나는 기껏해야 한국의 국내 문제나 통일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다(물론 이것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세계적인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다고 생각하니 썩 유쾌하지는 못하다.

브레진스키는 1990년대 소련의 붕괴로 이 지구상에 유일한 제국은 미국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미국이 앞으로 이 세계의 여러 잡다한 인종과 민족과 국가의 문제들을 어떻게 하면 미국의 이익에 배치되지 않게 하면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발휘할 것인가에 대해 논한 책이다. 저자는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 "유라시아"라고 본다. 유라시아는 유럽과 아시아를 통칭하는 것으로 유라시아를 하나의 체스판으로 보고 그것을 어떻게 운영하느냐가 관건이라고 보았다. 그는 "미국의 세계 일등적 지위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이러한 위치를 지속하느냐에 달려있다"(p.51)고 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영향력의 기초를 '정치적 지리학'(political geography)이라고 본다. 나폴레옹은 '한 국가의 지리를 안다는 것은 그 국가의 대외정책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저자는 유라시아를 크게 '유럽', '러시아', '발칸', '극동' 4부분으로 나누어 본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이 주요한 유럽의 지도국으로 보면서도,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유럽 연합의 지도국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미국이 느슨한 유럽연합을 통해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동반관계를 강화함으로서 유럽에 교두보를 공고히 하는 것이 미국의 목표라고 한다.
'러시아'는 지난 10년간 모스크바 중심의 대제국이 해체되었다. 이 대제국의 해체는 지정학적인 혼란을 야기하였다. 즉 연방의 대다수 나라들이 독립함으로서 이 지역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지정학적 변화는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하락시켰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독립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풍부한 농공업의 기반 상실과 5천200백만의 인구 감소, 그리고 흑해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도 끝났다. 미국의 입장에서 러시아는 이제 미국과 동등한 나라가 아니다. 미국의 관점에서 러시아는 '파트너가 되기에는 너무 약하고, 돌봐줄 환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강하다'(p.158)고 한다. 러시아는 범유럽과 유기적 관계를 개선하는 일이 중요하다. 미국은 러시아가 유럽회의에 참여하게 하여 스스로 민주화, 유럽화의 길을 걷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발칸'은 지정학적으로 복잡하다. 다양한 민족, 이질적인 문화로하여 세계적 불안정 지대이다. 또한 발칸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이며, 특히 잠재적인 자원의 보고이다. 이 지역은 소련에서 독립한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아와 같은 9나라와 터키와 이란을 포함한다. 터키와 이란은 발칸에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한다. 러시아 역시 이 지역에 정치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방침은 단일 국가가 발칸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나라들- 터키, 이란, 러시아, 중국-의 이해관계를 잘 조정하여 '교묘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극동'은 중국, 일본, 미국의 삼각관계에 의해 운영될 것이다. 브레진스키는 중국이 세계 일등 국가로 부상하지 못하고 지역적 강국이 될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지금의 폭발적인 경제 성장률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역적 불균형과 함께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이다. 이는 후에 정치의 불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 둘째, 지금처럼 닫혀진 정치제도를 가지고는 힘들다. 경제적 역동성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이고 경직된 공산당 독재와는 어렵다는 점이다. 셋째, 경제가 발전하더라도 여전히 상태적 빈곤상태에 머물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세력은 일본이다. 일본은 모순적이다. 경제적으로는 강국이지만 군사적으로는 미국의 보호아래 있다. 또한 지역에서의 역할을 증대하려고 해도 극동의 여러나라가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서 지역적 강자가 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는 중요하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 대만을 잇는 삼각관계가 극동의 영향권이다. 이는 극동에서 중국의 영향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중국은 통일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의 비동맹적 완충 지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과 일본의 뿌리깊은 적대감이 한국을 중국의 영향권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미국은 통일 후에도 한국에 군사력이 남기를 원하다. 그러나 이것은 중구에 의해서 거부될 것이다. 결국 미국이나 중국, 일본 모두는 한국이 지금 이 상태로 존속하기를 원한다. 또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화해시켜 이 지역의 안정적 구도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냉전 체제가 끝나자 미국에서는 두 가지 흐름이 대립한다. 하나는 세계의 경찰과 같은 개입주의를 버리고 대내문제에 중점을 두자는 고립주의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지도력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이 그것이다. 저자는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하여 저자는 세계의 여러나라에 미국의 영향력을 심고 키우려고 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 나라의 조건이나 상황보다는 먼저 미국의 국익이 어떤가가 정책 결정의 중요한 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미국은 이 땅에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주둔하고 있으며, 우리의 통일도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을 곳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의 세계전략과 중국의 전략 사이에서 그들을 역이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세계에 유일한 분단을 종시시키기 위해서는 이 민족의 지혜를 모아서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실리 위주의 외교와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남북한의 정상이 서로 만나 한민족임을 확인하고 통일로 가는 초석을 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 시작이지만, 그래도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서로 평화롭게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지혜를 모아서 체제를 넘어 통일의 길로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re: 미국 국익을 위한 현실주의적 관점
chonge24 (2005-03-25 18:14 작성) 이의제기
질문자 평 
우와 너무 감사드립니다~ 최고에요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ㅎㅎ

한 마디로 미국 국익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정책담당자에게 조언하는 현실주의 학자의 지침서입니다.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현실주의, 하나는 자유주의, 마지막은 구조주의입니다.

 

현실주의는 대개 군사적 측면(안보)을 강조하며, 국제정치상황을 중심적 권위체(권위를 가진 세계정부)가 없어 각 국가가 서로 아귀다툼을 하는 무정부상태라 인식합니다. 따라서 국제평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맞상대 혹은 맞상대하는 동맹들끼리의 세력균형을 만들거나 단일 패권국의 패권에 다른 모든 국가들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대개 경제적,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며, 국제정치에는 국가 외에도 다국적 기업이라든가 초국적 NGO(예: 그린피스) 등이 있는데, 다국적 기업이나 초국적 NGO는 국가간 상호의존을 강화하고 충돌을 억제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군사충돌의 가능성은 적으며, 이러한 관계가 지속될 경우 국제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세계정부에 준하는 국제기구를 만들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기도 합니다.

 

구조주의는 맑시즘의 관점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는 중심부의 선진국(미국, 유럽, 일본)이 주변부의 후진국들을 착취하는 구조라고 인식합니다. 따라서 개별 국가의 선택 폭은 실제로 현실주의가 말하는 것만큼 크지 않으며, 모든 것은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면 이러한 구조를 타파해야 하며, 한 대안은 전세계적 차원의 사회주의 혁명이고, 또 다른 하나의 대안은 초국적인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민주적인 세계정부입니다.

 

이 책은 현실주의 관점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은 세계를 상대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브레진스키가 말하는 방법이 '도덕적' 이라거나 '다른 나라를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 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주의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잔혹하리랄만큼 비정한 수도 서슴없이 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키아벨리즘) 이 '거대한 체스판' 에서 체스를 두는 자는 오로지 미국입니다. 그리고 체스판은 세계이며, 체스말은 동맹국이나 적대국, 혹은 해외주둔미군이 되겠지요. 여기서 이 논의가 체스말의 권리(개별국의 주권)를 크게 문제시하지는 않으리란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세계는 냉전 종식과 민족주의 분출 등으로 매우 불확실성이 강한 상황이므로 미국이라 해도 자칫 잘못 대응하면 막대한 국익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으로 정치체제나 종교, 정체성 등이 유사한 유럽과는 동맹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껄끄럽고 적으로 삼기 거북한 러시아를 점진적으로 동맹의 품 안으로 끌어들여 이들 지역 내에서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라고 말합니다.

 

중동에서는 친미적 국가인 터키를 충분히 배려하라고 말합니다. 터키의 이익을 위해서는 인근 코카서스 지방의 국가들(아르메니아, 아베르바이잔, 그루지아 등)의 이익을 덜 고려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까지 말합니다. 이를 기반으로 중동을 안정화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부 아시아에서는 인도를 지원할 것을 강조합니다. 인도는 자칭 제 3세계 주도국가였지만, 구 소련에게서 받았던 지원이 끊긴 상태이며 개발을 위해 선진국의 도움이 필요한 국가입니다. 또한 인도는 미국의 잠재적 적국인 중국을 견제하고, 혹시 불안정해지리 수 있는 중앙아시아를 견제하는 데에도 매우 유용한 패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경우, 미국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상대입니다. 적대시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나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중국-러시아-이란간의 '반 미국패권 동맹' 이 결성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브레진스키의 생각입니다.

 

일본의 경우, 미국에게 있어서 중국의 패권을 견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미일동맹이라 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에 적당히 힘을 실어 줄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칫 그것이 일본의 지역패권 시도로 이어지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 도 병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국의 경우, 통일가능성이 높아지는데 현 상태로는 반일감정 때문에(그리고 반미감정때문에) 통일한국은 친중적 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게는 한국이 분단된 상태로 남아 있거나 중립국이 되거나 친중국가로 변모하는 것이 최선이나, 미국에게는 한-미-일의 삼각동맹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과 한국이 화해하도록 유도해야 하며, 한국에서 반일감정을 완화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통일 이후에도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키는 것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 정치에 영향력이 강한 학자의 견해를 통해 미국의 미래 정책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주의적으로 이 책에 나오는 미국중심적 정책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는 아니겠지요. 상대의 전략을 알아야 뭐가 되는 한국의 국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전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이 책이 한국에 중요한 이유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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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진스키의 근작 <제국의 선택>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근작 <제국의 선택(The Choice)>를 통해서
미래의 세계에 대한 식견과 통찰력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1. 내가 주장하는 미국의 역할은 간명하다. 오늘날 위압적 방식으로 국가 주권을
강조하는 미국의 힘은 전 지구적 안정을 위한 최후의 안전판이다.


#2. 유럽이 미국의 경제적 경쟁 상대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이 정치적으로
미국과 경쟁할 수 있을 만큼 통합성을 확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본은
한 때 차기 초강대국으로 간주되었지만 이제는 경쟁에서 탈락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진보했지만 적어도 두 세대 동안은 상대적 빈곤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고, 그 과정에서
엄혹한 정치적 시련에 봉착할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미국과의 경주에서 탈락했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에게는 더 이상 전 지구적 수준의 또래 강국(a global peer)이 존재하지
않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러한 또래 강국이 등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배적인 미국의 헤게모니와 지구적 안보에 필수불가결한 미국의 역할을 대신할
현실적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오늘날 세계는 미국의 우월적 지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세계는 미국을 신뢰하지 않고
분노하며 심지어 음모를 꾸미기도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문제에서는 미국의 우월적 지위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 ... 미국의 헤게모니가 갑자기 종료되면 반드시 지구적 혼란이
뒤따를 것이며, 국제적 무정부 상태가 강화될 것이다.

#4. 미국인들은 안보(security)를 표준으로, 불안(insecurity)을 탈선으로 생각해 왔다.
지금부터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 미국의 힘과 세계화의 결합은 미국 국가 안보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있다. 현대 기술은 갖가지 수단들, 파괴의 범위, 폭력을 투사할 수 있는
행위자들의 수를 증대시킴으로써 지리적인 거리의 효과를 상쇄시키고 있다. 동시에 세계화에
대항하는 반대 세력은 가장 명백한 표적인 미국에 분노를 집중시키고 있다. 세계화는
미국에 적대감을 집중시키는 한편 대외적 침투로부터의 취약성을 보편화시킨다.

기술의 발전으로 사회적 침투에 대한 취약성은 보편화 되었다. ... 과학이 자기 파괴 행위를
저지르는 인간의 능력을 계속해서 강화시켜 주며, 조직화된 사회가 항상 그것을 잘 방지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5. 서구 세계는 이슬람 국가들이 향후에도 약하고 비효율적인데다 자주 정치적
혼란으로 좌초하고 서구에 분노할 것이라고 인식한다.
또한 그들은 국내 문제나
이웃 국가들 간의 분쟁에 열중하고 그들의 상황은 국제적 불안정을 야기할 것이며 정기적으로 테러를
촉발하고 광범위한 긴장을 조성할 것이다. 사회적 피로와 반미 정서는 국가적 불만이나
지역적 갈등의 부작용처럼 종교적 적대감이 낳은 결과이다.

#6. 미국이 유럽과의 공조가 필요한 부분은... 첫째, 중동을 교란하는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해결, 둘째, 페르시아 만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석유 생산 지역의 전략적
방정식의 변화, 셋째, 대량살상무기의 확산과 테러의 전염을 견제하는 지역적 조치들에
주요국의 정부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7. 안정되고 민주적인 이라크를 만들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평화를 추진하는
미국과 유럽의 협조는 페르시아 만과 이란,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와 천연가스 지대에
만연한 불만족스러운 전략적 방정식을 보다 우호적으로 풀어 나갈 정치적 조건들을 만들어
줄 것이다. 에너지가 풍부한 러시아와 달리 이 지역의 국가들, 곧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에서 사우디아라비아로 내려가는 방향의 모든 국가들은 자국에서 생산한
에너지의 주요 소비자가 아니라 수출자이다. 이 나라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와
천연가스를 보유한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책정된 에너지에 신뢰할 만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이 세계 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북아메리카, 유럽, 동아시아의 존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전략적 지배는 전 세계적으로 핵심적인
헤게모니적 자산이 될 것이다.

#8. 유럽인들은 미국을 비난할 때 좀 더 주의해야 한다. 유럽엘리트의 전통적인
문화적 자부심을 제쳐 놓는다면, 유럽의 주된 비난은 미국이 국제적으로 점점 일방주의자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난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은 이른바
우직한 반공주의와 소련과의 타협 거부, 군사적 대응 태세에 대한 지나친 강조 등으로 자주
비판받았다. ... 냉전이 종식된 이래 미국이 거침없이 행패를 부리는 세계적 깡패와
같다는 유럽의 비난은 점점 확산되고 정교해졌다. ... 유럽인들은 대서양 관계가
정말로 심각하게 붕괴되면 유럽의 미래가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미국인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대서양 관계의 붕괴는 또 다시 유럽을 내적 경쟁과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취약하게
만들 뿐 아니라 유럽 구조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9. 전략적 사고방식을 지닌 유럽인들은 미국의 일방주의가 미국의 독특한 안보 역할의
한 부분이며, 경제적, 법적, 도덕적, 안보적 동기를 쉽게 구획지을 수 없는 세계에서
'할 수 있다(can-do)'는 미국의 자세를 보존하려면 썩 내키지 않더라도 인내하는 것이
나머지 세계가 지불해야 할 대가임을 깊이 인식한다. 미국의 일방주의적 태도는 전 세계를
위한 자유의 기수로 자국을 인식하는 미국의 역사적 비전에서 비롯된다.
국제 규정을 꼼꼼하게 준수하는 미국, 주요 유권자들에게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경제
영역에서 그 이해를 보호할 수 있는 힘의 행사를 애써 피하는 미국, 고분고분하게 자신의
주권을 기꺼이 제한하려는 미국, 군사력을 국제법의 관할권 아래 귀속시킬 준비가 된
미국은, 세계적 무질서를 방지하는 데 필요한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유럽인들은 공동 합의의 최소 공약수에 리더십을 굴종시키는 줏대 없는
미국이 초래할 결과들을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10.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미래가 20세기 전반의 유럽을 닮을 것인지 아니면 20세기 후반의
유럽을 닮을 것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어떤 측면에서 오늘날의 아시아는 불길하게도
1914년 이전의 유럽을 떠올리게 한다. ... 이 지역의 안정은 여러 아시아 국가들의 국력이
성장하면서 도전받고 있다. 이곳에는 구속력 있는 지역 안보의 협력 구조가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 오늘날 아시아의 강대국들은 현재 유럽이나 심지어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도
나타나는 정치, 경제, 안보적 협력을 위한 다자주의적 틀이 결여된, 유동적이고 구조화
되지 못한 지역적 맥락 속에서 활동한다. 아시아는 이처럼 경제적으로 성공적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화산과 같으며 정치적으로 위험한 곳이다.

#11. 그 속에서 부상하는 중국은 미국의 동맹인 일본과 지역적 우위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 오늘날의 중국은 과거 대영제국을 시기하고 프랑스에 호전적이었으며 러시아를 경멸하던
독일 제국을 연상시킨다. 중국은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해 점차 실용적으로 대응
하지만 일본에 대해 신경질적이고 인도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듯 거들먹거리며 러시아에
대해서는 거만한 태도를 보인다.


#12. 극동에서의 전쟁과 평화는 대체로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이들과 미국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만약 미국이 이 지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킨다면 20세기 유럽의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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