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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중도통합 깃발든 반미자주화 1세대

[뉴리더]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뉴스메이커 652호

‘중도통합’ 깃발 든 반미·자주화 1세대
학생운동 넘어선 386 정치인… 민족경제공동체 향해 ‘미래를 조직’한다


임종석 의원 약력

1966년 4월 24일 전남 장흥 출생. 4형제 중 3남.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이사.
1985년 용문고 졸업.
1986년 한양대 입학(1995년 무기재료공학과 졸업).
1987년 노래패 ‘소리새벽’에 가입, 6월항쟁 참여.
1988년 한양대 총학생회장에 당선.
1989년 서총련 의장, 전대협 3기 의장. 전대협 대표로 임수경 평양축전 파견. 수배 중 10여 차례 기자회견, 12월 18일 검거됨. 3년 6개월 복역(1993년 5월 출소).
1994년 청년정보문화센터 창립. 부소장. 2~4기 소장.
1999년 한국청년단체연합회(KYC) 창립. 회원으로 참여.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서울 성동 을).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민화협 청년위원장. 새천년민주당 청년위원장·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
2001년 새천년민주당 대표 비서실장.
2002년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 국회 여성위원회 위원,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2003년 열린우리당 원내부대표·국민참여운동본부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서울 성동 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위원. 열린우리당 대변인.
현재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간사. 열린우리당 연수원 부원장.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환상의 전술’로 시작해서 ‘신비의 탈출’로 끝난 6·30 한양대 투쟁으로 노태우 반통일 정권에 대하여 전술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대협은 역사상 꺼지지 않는 불멸의 위훈을 세웠으며 전설적 신화를 창조하였다.”(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지음 ‘전대협’ 돌베개, 1991년)

‘임수경 대표 평양축전 참가투쟁’에 대한 전대협의 자체 평가다. 1989년 ‘임수경 방북 파문’은 ‘국내 세 번째로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집단’으로까지 불린 전대협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내적으로는 통일운동에 불을 지르는 한편 극심한 이념논쟁을 야기했고 대외적으로는 한반도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계기가 됐다. 학생운동사의 가장 화려한 장면이랄 수 있는 이 투쟁을 주도함으로써 그들의 표현대로 ‘불멸의 위훈’을 세운 전대협 3기 의장이 임종석 의원이다.

집권 열린우리당 재선그룹의 일원인 임 의원의 정치적 자산은 ‘8할이 전대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사에 보기 드문 강력한 학생조직’이라는 전대협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구가한 전력 때문이다. ‘의장님’의 막강한 대중동원력과 ‘임길동’으로 불리기까지 한 신출귀몰한 행각은 전대협 세대는 물론 일반인에게도 쉬이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다.

이런 이미지와 상징성이 임 의원에게 정치적 발판이 된 게 틀림없지만 정치적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조금 세게 소신을 펴면 ‘학생운동가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비아냥을 듣고 정치적 타협을 하면 ‘변절했다’는 비난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전대협 전성기 이끈 ‘의장님’

임 의원은 1966년생이다. ‘아직 486으로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386세대다. 386세대, 전대협, 운동권 출신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가장 귀가 따가울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너무 빨리 컸다’든가 ‘지름길로 왔다’는 등의 지적도 부담스럽다.
전대협 세대는 다른 학생운동 세대와는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 반미·자주화를 공개적으로 표방한 첫 세대로서 대중운동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점이 그렇다. 이들은 6월항쟁을 통해 ‘승리의 체험’을 맛보았고, 노무현 캠프에 집단적으로 참여한 2002년 대선을 통해 두 번째 정치적 승리까지 ‘쟁취’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반미에서 주사(주체사상)까지 운동권 선배세대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강한 이념과 노선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이들의 힘은 미스터리하기까지 하다. 이전 세대와 확연히 다른 이런 점 때문에 기성세대의 눈에는 불안하게 보일 법도 한 것이다.

새로운 리더십에는 당연히 새로운 세대의 꿈과 비전이 담겨야 할 것이다. 기성세대의 공감과 신뢰를 얻는 것이 그 다음이다. 물론 꿈이나 비전을 세우는 것보다 그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와 실현 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이다. 이 점에서 임 의원은 ‘정치 뉴리더’에 부합하는 호조건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꿈과 비전은 젊은 세대의 그것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고, 이를 현실정치에서 구현할 수 있는 위치에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임 의원은 당내 재선의원 그룹의 막내 축에 들지만 내년 초 전당대회를 통해 지도부 입성을 ‘권유’받는 입장이다. 다음 개각에서 통일부 장관 물망에 오르기도 한다. 그는 입각에 대해서는 “기자들이 재미삼아 쓴 것 같다”며 “지금은 파격인사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전대와 관련해서는 당 쇄신을 위해 “재선그룹의 집단 출마도 한 방법”이라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그가 학생운동가로서 워낙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정치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최대한 몸을 낮추면서 국민과 기성정치권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가 정치인으로서 가장 놓치지 않으려는 덕목이 균형감각과 책임감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전대협이나 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왜곡·과장된 측면도 있다. 생각보다 튀지도 않고 생긴 것도 가까이서 보면 ‘순하기’ 이를 데 없다. 가장 투쟁적인 모습을 보인 때가 이라크 파병 결정 때 단식에 들어간 것 정도다. 그는 “원래 나는 단식 반대주의자”라며 “앞으로 단식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임 의원은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중도개혁’으로 설정하고 있다. 우파는 물론 좌파진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우파는 과거지향적인 점에서, 좌파는 전세계적으로 주된 흐름을 역행하는 점에서 ‘반대를 조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국민은 중도세력에 훨씬 안정감을 느끼고 있는 만큼 이를 규합해 ‘미래를 조직’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지금은 되돌아갈 수 없게 됐지만 임 의원의 원래 꿈은 과학자였다. 운동권에 입문한 것도 대학 2학년 때 6월항쟁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 전까지는 순진한 공학도였고, 성격도 내성적인 편이었다. 고교 때는 학내 활동 경력도 없다. “깡촌 출신인 데다 고등학교에 갈 무렵 1년 반 동안 신장염을 심하게 앓아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내성적인 공학도에서 ‘구국의 강철대오’를 지휘하는 학생운동 지도자가 되는 과정은 그래서 소설처럼 극적이기까지 하다. 재수해서 한양대 무기재료공학과에 들어간 때가 1986년이었다. 김세진·이재호 분신사건 등을 겪으며 심한 심적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과학자의 꿈을 접지는 않았다. 자신도 뭔가 ‘참여’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소리개벽’이라는 풍물패에 가입하면서 학생운동에 발을 걸쳤지만 언젠가는 다시 전공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정치 참여로 ‘통일’의 꿈 대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대학가는 집회·시위가 일상이 돼버렸다. 자연히 풍물패의 역할이 커지고 학생들에게 노출 빈도가 많아졌다. 이 와중에 그는 학생들의 눈에 띄었고, 1988년 여름 86학번 활동가 총회에서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서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총학생회장 출마는 곧 구속을 의미했다. 그는 이 제의를 수락하면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섰다. 한양대 총학생회장, 서총련 의장, 전대협 의장에 연거푸 올라 1989년 12월 검거되기까지 약 1년 동안 현란한 활동을 펼쳤다. 5년형을 받고 3년 6개월 복역한 뒤 1993년 5월 출소한 그는 청년정보문화센터·한국청년단체연합회(KYC) 등을 결성, 전대협 세대 중심의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정치에 참여한 것도 전대협 세대의 집단적인 결정에 의해서였다. 그를 비롯한 전대협 1~3기 지도부 5명은 2000년 16대 총선에 새천년민주당 간판으로 출전했다. 그는 이 가운데 유일한 당선자가 됐다. 17대 국회에는 18명이 도전해 12명의 당선자를 냈다.

임 의원이 대변해야 할 이들의 꿈은 ‘통일’이다. 전대협 세대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민주화 이후의 통일문제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의 앞날에 대한 그의 전망은 낙관적이다. 그는 “우리 사회는 고도로 민주화한 사회라고 본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지역갈등이라든가 과도한 권력투쟁이 사회 주요 기관들까지 정치화하게 만드는 점 등 몇 가지 이분법적 갈등이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는 면이 있지만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임 의원의 꿈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거기에 우리가 한 가지 더 이루고 싶은 것은 민족경제공동체다. 남북문제를 풀어야 우리가 선진국이 된다고 본다. 반북·반공 논리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게 나의 확고한 생각이다. 이미 우리의 관심은 북을 어떻게 경영할 것이냐는 데까지 와 있다. 되도록 큰 부담 없이 북쪽을 자립할 수 있게 하고 개혁·개방할 수 있게 해서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그래서 우리가 대륙으로 북방경제시대를 열고… 관심이 그렇게 와 있는데 계속 우리한테 과거의 것을 물어본다.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인터뷰]임종석 열린우리당 의원

“국민 신뢰얻는 노력부터 해야”

과거 전력 때문에 늘 두 가지 상충되는 주문을 받는 것 같다. ‘성숙한 모습을 보여라’ ‘과거의 소신을 지켜라’ 가운데 어디에 더 비중을 두는가.

“시민단체나 재야운동을 하는 분들의 몫이 있고 정치인의 책임이 따로 있다. 정치에 와 있는 이상 정치인으로서 책임감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가치나 철학 등에서는 균형감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깥에 있는 분들에게는 늘 모자라고 때로는 변절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도 있다. 지금까지 과격하다고 욕먹어 본 경험은 없는 것 같다. ‘너 변했다’, 이런 쪽이었던 같다.”

이수일 전 국정원 차장 자살사건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이 ‘6·25를 통일전쟁이라고 한 사람에게는 관용을 베풀고 공산당을 잡은 사람들은 구속시켰다’는 취지의 말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난번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나 강정구 교수 발언 파문 때 당이나 정부가 조금 더 높은 목소리로 더 분명하게 정리해서 얘기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그 얘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가 하는 게 좋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하려고 의견조율을 하다가 시기를 놓쳤다. 그때 기자들이 물어서 나는 ‘완전히 정신 나간 소리’라고 했다. 문제는 정신 나간 사람의 인권은 어떻게 할 것이냐지…. 전체적으로는 얘기를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당이나 정부에서 그런 문제에 대해 좀더 단호하고 분명하지 못했던 것이 케케묵은 논란을 초래한 빌미가 됐다. 지금 와서 반공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이성적이거나 지성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분명하게 얘기해줄 필요가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지적에 공감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나도 두 분 국정원장 구속에 대해 정치권에 들어와서 제일 독한 소리를 했다. 검찰에 대해 ‘편협하고 편파적이고 이중적인 싸구려 정치다’라고 했다. 특히나 두산그룹 일가에 대한 불구속 방침 직후에 이 건으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정치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최근 중도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는 이유가 뭔가.

“열린우리당의 목표가 혁신정당이라든가 선명한 개혁정당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완전히 번지수가 틀린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시 국민의 신임을 받아서 집권할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중도세력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민주당과 합하자,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안 풀린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요구되는 지도자의 덕목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남북문제에 대한 미래지향적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성장잠재력 확충과 함께 양극화돼가는 사회에 대한 따뜻한 철학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이라 하면 성장잠재력 확충과 함께 양극화 해소인데, 이런 문제들에 대해 한나라당 주도세력은 과거지향적이거나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고 본다. 진보운동, 소위 좌파운동하는 분들도 전 세계적인 주도흐름에 대해서 반대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지 현실에 닥쳐 있는 국가적인 문제, 국민들의 필요, 이런 것을 책임지고 국정운영을 해갈 수 있는 준비는 안 돼 있다. 그래서 중도세력의 대통합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국민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열린우리당이 하자는 것이다.”

<글/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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