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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북한인권과 미국의 대북정책 - 사진연

‘북한인권’ 과 미국의 대북정책
-인도주의 간섭의 노림수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 필자 : 정 희 찬(사회진보연대 정책편집부장)

* 이 글은 '인권운동 사랑방' 등이 11월 30일 개최한 ‘북 인권 문제의 대안적 접근’ 토론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이다.

 


최근 이른바 ‘북한인권’이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작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대북인권 결의안의 통과 및 미국 의회에서 「북한인권법」이 만장일치로 제정․통과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그 이전 미국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2002)에서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지목되면서부터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서 ‘인권 상황의 개선’을 공공연히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처럼 ‘북한인권’에 대한 문제가 운위될 때마다 운동진영은 북한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외면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공화국의 질서를 교란하는 제국주의 책동”, “불순한 의도의 내정간섭”이라는 북한 당국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거나 혹은 반북․반공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지배언론들의 보수적 비판에 수긍하기 어려웠기 때문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운동진영은 연북적인 입장을 취하거나 쟁점을 회피함으로써 수동적인 정치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북한인권’을 둘러싼 갈등은 현재 진행 중인 6자회담에서 논의되는 ‘북핵문제’에 비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향후 언제든지 정세의 핵심으로 점화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안고 있다. 유럽연합이 유엔에서 이 문제를 공세적으로 제기하고 있고 미국의 네오콘 역시 공격적인 대북정책을 펼 것을 행정부에 주문하는 가운데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은 강경한 대북정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세적 조건 속에서 운동진영이 ‘북한인권’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는 향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 갈등과 대립, 그리고 논란 속에서 수동적이거나 무능력하지 않게 사태에 개입할 수 있는가를 규정한다.


가. 1. 인도주의 간섭의 배경

나. -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위기

1)  인도주의 간섭이란 무엇인가?

북한체제를 압박하는 주요한 수단이 다름 아닌 ‘인권’(human right), 혹은 ‘인도주의’(humanitarianism)에 준거하고 있다는 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 냉전체제의 소멸 이후 1990년대 초반 소말리아, 부룬디, 유고내전의 반인도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유엔, 혹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개입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그 이후 자국의 시민에 대한 시민적․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에 대한 국제적인 압력과 제재, 최종적으로 군사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점차 대세로 굳어진다. ‘북한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를 단지 “미제국주의의 불순한 내정간섭”으로만 파악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여기에는 미국만큼이나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간섭의 주체는 미국과 서방열강을 주축으로 한 중심부 국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간섭이 인권을 둘러싸고 출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일단 1990년대 이후 개인의 인권을 위협하는 것은 권위주의적이고 부패한 국가 내부에서 지도자들의 잘못된 결정으로 초래된 무정부 상태와 내전이라는 진단이 제기된다. 최의철, 『인도주의 개입에 대한 국제사회의 동향』, 통일연구원, 2004, pp.8-11. 내전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나 현실사회주의 몰락 과정에서 국가가 붕괴한 뒤 벌어지는 종족적․종교적 분쟁의 양상으로 드러난다(舊유고슬라비아, 르완다, 소말리아, 수단 등).
  20세기 말에는 전쟁의 양상이 20세기 초 세계대전과 같이 국가간의 총력전이 아니라 주로 민간인의 희생을 야기하는 국가 내부의 내전으로 변화했으며 그 과정에서 8백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고 4백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타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빈곤과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안전과 교육 등의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실패한 국가들”(failed states)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서 “실패한 국가들”이란 영토를 통제하지 못하고, 시민적․정치적 자유를 위협하며, 정치적 폭력과 범죄로부터 시민을 보호하지 못할 뿐 아니라, 법치주의, 즉 독립적인 사법부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들이다. “실패한 국가들”의 시민들에게는 정치적 재화들(political goods)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러한 정치적 재화들로서는 민족적․지역적 차이들에 대한 존중과 지원, 근본적인 시민권과 인권(human right)의 보장, 보건의료 체계, 학교와 교육제도, 도로․철도․항구 및 기타 물리적인 기본시설, 통신의 기본시설, 화폐와 은행체계 등을 포함하며 이는 어떤 국가들이 튼튼한 국가(Strong Staes)이며 어떤 국가들이 약한국가(Weak States)이며, 어떤 국가들이 이른바 “실패한 국갚인지를 가늠하는 주된 잣대가 된다. Robert I. Rotberg, “Failed States,
Collapsed States, Weak States: Causes and Indicators”; Robert I. Rotberg, ed, State Failure and State Weakness in a Time of Terror, A World Peace Foundation Book 2003. 롯버그는 “약한 국갚와 “실패한 국갚를 다루는 문제가 “21세기의 중요한 질문”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실패한 국가들”이라는 표현은 테러가 빈발하는 조건 속에서 국제적인 안보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약한 국가들”을 강하게 하고 “국가의 실패”를 방지하기 위한 정책 아젠다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의 군사․안보 전문가들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갈등의 근본원인이 아니라 사태를 관리하고 그 부정적 결과를 통제하기 위한 군사․안보전략가들의 정책 아젠다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들의 분석에는 세계적인 폭력과 무질서라는 현실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들 국가들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국가의 의한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나아가 지역의 안보를 위협한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왜냐하면 영토 내에서 정부의 부재상태를 초래하고 자국민들의 생명과 세계 질서를 위협할 뿐 아니라 대규모 이민, 각종 범죄와 테러의 온상으로서 결국 폭력적인 갈등이 분출하다가 국가의 합법성이 붕괴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국가들에 대해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른바 ‘인도주의 간섭’이 이루어지게 된다. 인도주의 간섭에는 부패와 무능력을 노정하며 국가의 실패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지도자들에 대해 공개적 비판, 외국여행 제한, 자산동결 등의 조치를 포함하는 제재 뿐 아니라 정부전복까지를 포함한다. 그렇지만 인도주의 간섭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도주의 간섭 이후의 문제이다. 안전, 경찰행정, 법제도 정비, 경제재건 등의 작업에는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이 소요되기 때문에 간섭국가들이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도주의 간섭을 논하는 많은 정치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주권 개념에 대한 재해석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최의철, 앞의 책, pp.45-49. 그런데 여기서 제시되는 경제제재- 정권의 전복- 국가 재건이라는 일련의 도식에서 현재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점령정책을 연상한다는 것은 후술하겠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해당국에서 인권을 보호하고 안정적인 권위(정부)가 수립되는 것은 해당사회의 자치적인 능력의 결여, 군대, 민병대, 테러집단 등에 의한 폭력의 만연 등으로 인해 인도주의 간섭의 목적은 당장의 주권 회복이 아니라 국제적인 협력 과 지원 속에서 이루어지는 제도적인 안정과 통치질서의 확립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권보호는 단지 국가의 관할에만 맡겨둘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혹은 국가 내부의 폭력 및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고 해결하는 국제적 안보현안으로서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는 것이 ‘인간안보’이다. 인권의 의미를 전통적인 안보 개념의 변화와 접목한 것인데 이는 전통적으로 안보가 국가질서와 영토의 보전을 추구했던 것에 비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외부적 요인과 국가 내부의 물리적 위협으로부터의 안전, 즉 포괄적인 인간 개개인의 발전을 포괄하고 있다. 유엔개발계획(UNDP)에 따르면 인간안보는 국제적이고 보편적 관심사로서 마약, 빈곤, 환경오염, 인권 침해 등의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그 위협에 대해서 모든 국가의 참여를 통한 해결이 중요하며, 사전 예방이 필수적이다.
이처럼 인권이나 안보가 전통적으로 단일 국가의 관할이나 영토적 범위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계화의 영향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세계화로 인한 빈곤과 부의 불평등은 특히 다양한 민족적․종교적 구성을 지니고 있는 국가들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켜 내전, 테러, 범죄가 만연한 가운데 국제적인 안정을 저해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하게 드러나는 반인도적 참상과 빈곤, 폭력의 고통은 이미 해당 국가 차원에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권이나 안보의 영역이 국제적으로 모든 국가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대두함에 따라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 이후 출범한 국가간 체계를 지탱해왔던 주권원칙은 도전받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설립된 유엔의 기본 목표는 주권을 보유한 다양한 국가들간의 체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목표였으며 따라서 그동안 다른 국가에 의한 내정 불간섭과 국제관계에서 무력사용 금지라는 두 원칙을 고수해왔다고 볼 수 있다. 유엔 헌장 자체가 회원국들의 주권 평등과 자치권을 인정하고(2조 1항), 국가간의 갈등은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강조하며(2조 3항), 무력을 사용하거나 무력사용을 위협하는 행위를 금지(2조 4항)할 뿐 아니라 유엔이 해당국이 관할하는 사안에 간섭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규정(2조 7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예외도 존재한다. 개별적․집단적 자위권(51조)과 평화에 대한 위협과 파괴 및 침략행위를 금지(7장)하기 위해서는 무력사용이 허용된다.
 그러나 인권과 안보의 의미가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인식되고 나아가 “국가, 또는 국가들의 집단이 타국에서의 인권에 대한 심대한 침해를 중단시키거나 방지하기 위해서 해당 국가의 허가 없이 국경을 넘어 무력을 사용하거나 무력사용을 위협하는 것” 이는 홀츠그레페(J. L. Holzgrefe)의 정의이다. 최의철, 앞의 책, p.24에서 재인용.
으로 정의되는 인도주의 간섭(humanitarian intervention)은 기존의 주권규범과 충돌하게 된다. 그렇지만 국제법이나 주권 모두 그 도덕성과 정당성을 인권에 기반하고 있으며 더욱이 유엔에서 최근 평화를 보다 광의의 맥락에서 해석함에 따라 평화에 대한 위협 시 무력사용을 허용한 7장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면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1999년 54차 총회에서 인도주의 간섭에 평화적인 수단과 강압적인 수단을 모두 포함할 것을 제안하고 국가주권에 개인주권이 우선함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유엔 헌장이 타국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는 인식을 배제하지는 않고 있음을 언급하는 등 주권에 대한 기존의 규범이 상대화되고 있다. 2000년 유엔은 국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반인도적 참상과 이에 대한 유엔의 대응의 한계를 평가하면서 인권에 대한 대규모적이고 체계적인 침해가 발생할 경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인권과 주권(state sovereignty) 사이의 딜레마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를 구축하기 위해 구성한 ‘간섭과 국가주권에 대한 국제위원회(Iinternational Commission on Iintervention and State Sivereignty)’는 보고서를 통해 ‘보호의 의무’를 강조하며 국가가 인권 보호의무에 실패했거나 수행할 의지가 없을 경우 그 의무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국제적 보호의무를 주장했다. 인도주의 간섭은 국제사회의
도덕적 의무이며 무력사용을 제한하면서 그 절차를 구체화하는 국제규범 또는 행동지침 등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구축할 것을 제안했다. 여기서 인도주의 간섭은 도덕적 의무로 규정된다.


2)  인도주의 간섭과 미국의 군사․안보전략

그런데 인도주의적 간섭은 유엔 차원에서 이루어지거나, 혹은 유엔의 승인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는 더욱더 몇몇 열강들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제기되는 하나의 의문은 바로 오늘날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안보전략으로부터 이러한 인도주의 간섭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인도주의 간섭의 결과가 더욱 커다란 폭력과 분쟁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여부이다. 미국의 군사․안보전략의 핵심이 9․11 테러 이후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으로 표현되었고 테러를 자행한 알카에다를 박멸하고 이른바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2001년과 2003년에 걸쳐 각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대규모로 침공하여 결국 탈레반 정권과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켰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의 군사․안보전략의 대상은 이른바 “불량국가들”(rogue states)이다. 이러한 ‘불량국갗는 국제법적인 정의도 아니며 일관되게 적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지조차 의심스러운 정치적 수사에 가까운 표현으로서, 미국의 군사․안보전략을 구성하는 주요한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국가들이 ‘불량국갗로 규정되는가? ‘불량국갗들은 공통적으로 “국제규범의 거부하고 세계적․지역적 헤게모니를 추구”하거나 “테러에 관련되어 있고 대규모의 재래식 군비를 소유하며 대량살상무기(WMD)를 획득하려 하는” 등의 행동을 추구함으로써 미국식 이념을 침해하며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도전하는 국가들이다. 미국은 이로부터 이들 ‘불량국가들’에 대한 제재의 정당성을 도출하는데 그 주된 방법은 경제제재를 통한 국가봉쇄 및 군사적 위협을 통한 강압, 또는 보상과 포용, 혹은 양자를 병행하는 전략(당근과 채찍)이다. 다양한 “불량국가론”의 개념과 그 역사에 대해서는 박형중, 『ꡒ불량국가ꡓ 대응 전략』, 통일연구원, 2002, pp.7-19 참조.
 1980년대 미국은 테러리즘을 기준으로 이른바 ‘불한당 국갗를 규정해왔으며 클린턴 행정부 시기까지는 이처럼 테러리즘, 혹은 WMD의 추구와 같은 대외적인 측면을 기준으로 ‘불량국갗를 정의해왔으나, 2001년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작성된 『미국
국가안보전략』(2002.9.20)에서는 이뿐만 아니라 자국민에 대해 잔혹하며 국가자원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낭비하고, 인간의 기본적 가치를 거부하며 미국과 미국이 옹호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는 것 등을 ‘불량국갗의 주된 성격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들 ‘불량국갗들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유와 같은 미국의 이상과 근본적으로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은 결국 이러한 국가들에 대한 정권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된다. 또한 9․11 테러와 같은 참사를 방지하고 이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이른바 ‘부시 독트린’에서는 필요한 경우 미국의 일방적인 독자적인 행동을 추구하고 테러와 연계된 국가들에 대한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 즉 테러와 대량살상무기의 국제적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포함한 적극적인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 전략을 강조한다. 여기서 미국의 공격적인 군사․안보전략, 즉 미국의 강력한 간섭을 통해 테러와 전제적인 정권의 위협을 감소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상당 부분 인도주의 간섭을 정당화한 논리와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그 주체가 미국인지, 아니면 이른바 ‘국제사회’인지, 혹은 그 절차가 적법했는지에 대해서 벌어지는 논란은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 ‘불량국갗 혹은 2002년 「연두교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른바 ‘악의 축’에 포함된 국가들(북한, 이란, 쿠바)은 대외적으로는 테러와 대량살상무기의 획득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지역의 안보와 평화를 위협하며, 대내적으로는 기본적인 시민적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지 않은 전체주의 독재정권으로 규정됨으로써 이들 국가에 대한 미국의 군사․안보전략은 ‘불량국갗를 변화시키는 인도주의적 간섭이라는 명분을 획득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에서 발견되는 사고방식 중의 하나가 이처럼 자신들의 호전적인 외교․안보전략을 절대적인 도덕적 수사로 표현하는 것인데 이러한 관념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부시 대통령의 이른바 “악의 축” 발언이었다.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과 결탁한 네오콘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종교적․도덕적 이데올로기인데 정의와 선의 자리에 미국이 들어서고 악이자 징벌과 응징의 대상에는 이른바 ‘불량국갗가 자리잡게 된다. 네오콘은 극단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축으로 하는 미국식의 이념을 절대적으로 잣대로 하여 이러한 이념에 기반한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무력사용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긴다. 바로 이러한 인식이 이른바 선제공격 독트린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다음의 인용문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은 전지구적으로 전례가 없으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힘과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 자유의 원칙과 자유로운 사회의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 지탱되면서 이러한 미국의 위치는 상당한 책임감과 의무와 기회를 동반하고 있다. 이 나라의 위대한 힘은 자유를 선호하는 힘의 균형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 이것은 또한 미국을 위한 기회다. 우리는 이 영향력의 계기를 평화와 번영과 자유의 세기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미국 국가안보전략보고서」 中)
 네오콘은 이미 이들이 정치세력으로 결집한 계기였던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에서 미국의 가치를 보편적인 것으로 선언하고 이를 위해 선제공격을 불사한다는 것, 그리고 세계를 민주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서 중동민주화를 제창하였다. 체제 교체(regime change)는 따라서 악에 대한 응징의 의미뿐 아니라 (미국식) 자유민주적 가치의 수출이란 점에서 정당화된다. 이로부터 네오콘의 군사․안보전략은 단지 미국의 국익을 수호한다는 차원을 넘어 기독교적 사명감에 기반한 ‘도덕적 우월주의’, 권위주의나 독재체제를 민주적으로 전환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으로서의 성격을 부여받는다. 이와 관련하여 안병진, 「미국 신보수주의의 사성적 배경 : 레오 스트라우스를 중심으로」; 남공군 편, 『네오콘 프로젝트 -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사회평론, 2005, pp.113-19; 김성한, 「미국 신보수주의 외교이념의 구성과 주장」, 같은 책, pp.190-94 참조.

이처럼 미국의 인권-외교정책이 군사․안보전략과의 밀접한 상호공명 속에서 추구되고 있으며, 또한 인도주의적 간섭이 현실적으로 이러한 미국의 세계전략의 틀 내에서 전개된다면 과연 이것이 진정 해당 국가와 지역의 인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인도주의 간섭을 침략전쟁으로 정의할 수는 없더라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침략전쟁과 구분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인도주의 간섭의 한계이다.


3)  실업과 빈곤, 불평등: 임계에 봉착한 자본주의

앞서 언급한 유엔과 미국의 해법은 모두 세계적인 야만적인 폭력과 무질서를 교정하기 위한 맥락에서 출현한 것으로서 부분적으로는 상이하지만 공통적으로는 폭력과 무질서의 원인을 피상적으로 진단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세계적인 폭력과 갈등의 부작용을 단지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전락한다. 국가의 해체와 종족적․종교적 집단들 사이에 벌어지는 내전, 그리고 빈곤, 교육과 보건의료 체계의 붕괴, 민주주의의 후퇴 등은 1970년대 이후 금융세계화의 전개와 미국의 냉전기 군사․안보전략의 실패를 의미하며 이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통치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게다가 이러한 금융세계화의 효과는 단지 특정한 국가나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며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중심부 국가들 내부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주변부를
창출하고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를 위축시킨다.
1970년대 인플레이션과 실업이 동시에 증가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을 조정하는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의 메커니즘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했다. 실업이 증가하는 불황기에 재정정책과 화폐정책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조정함으로써
사실상 완전고용을 이룰 수 있는 것으로, 1929년의 대공황과 같은 악몽을 반복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간주되었던 중심부 국가의 경제정책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1945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가 파멸의 늪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한 이후 1973년까지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들에서 고성장과 저실업을 기록했던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막을 내린 이후 1973-75년 사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연평균 성장률은 불과 0.1%였으며 그 이후 약간의 회복이 있었으나 결코 그 이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의 성장률을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이전까지 각각 3% 미만과 4.8%였던 유럽과 미국의 실업률은 10% 이상과 7.1%를 기록했다(Phlip Armstrong․Andrew Glyn․John Harrison, Capitalism Since 1945 (Basil Blackwell, 1991)[국역『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동아, 1993 14장 참조]).
 등장한 것이 이른바 금융시장의 규제를 해제함으로써 중심부의 자본이 금융적 팽창을 추진할 수 있게 장려한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경제위기가 만성화되고 발전이 정지된 것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위기비용을 (반)주변부에 교묘하게 전가한 중심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기인한다. 그 신호탄은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시행한 고금리․강한 달러 정책인데,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소련과의 군비경쟁과 이로 인한 재정적자를 세계 자본의 미국으로의 유입을 통해 상쇄하려한 결과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저렴한 이자율로 대출되었던 자본은 급격하게 미국의 금융시장으로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 바로 외채위기이며 주변부 국가들은 터무니 없이 높은 외채부담 속에서 부와 자원의 유출을 강제받게 된다. 1970년에 10억 달러를 빚진 국가는 12개 뿐이었으나 1980년에는 6개국이 자신의 GNP, 또는 그 이상의 외채를 안고 있었고, 1990년에는 - 사하라 사막 이남의 모든 국가들을 포함하여 - 24개국이 자국의 생산액 이상의 외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수백억 달러를 빚진 3대 채무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을 포함하여 모든 외채는 전적으로 ‘제3세계’라 불리는 주변부 국가들이 지고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은행의 조사에 따르면 저소득 및 중소득 국가에 해당하는 96개국 가운데 외채가 10억 달러 미만인 국가는 7개국에 불과했고 그 국가들조차 외채는 20년 전에 비해 몇 배나 증가했다. Eric Hobsbawm, Age of Extremes -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London: Michael Joseph, 1994) [국역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하』, 까치, 1997, pp.780-81].
 이러한 외채위기는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는 초민족화한 자본가들의 자본도피와 투자의 실패에 대한 비용을 해당 국가와 민중이 부담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고(일례로 외채규모에서 자본도피를 제외할 경우, 1985년 현재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50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 멕시코의 경우 97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줄어든다) James Petras, "Latin America's Transnational Capitalists and the Debt: A Class Analysis Perspective", Development and Change, 1988 no.2, pp.179-201[국역 「라틴 아메리카의 초민족적 자본가와 외채문제: 계급분석적 시각; 다이앤 앨슨 외,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 페미니즘적 시각』, 공감, 1998]
 아프리카의 경우 1980년대 이후 자본의 ‘가뭄’은 이후 연이은 가뭄과 자연재해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켰으며 1975년 이후 오히려 경제적으로 쇠퇴하였다. 1975년에서 1990년 사이 라틴 아메리카는 1인당 GNP가 19%,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33% 감소했는데 Giovanni Arrighi, "The African Crisis: World Systemic and Regional Aspests", New Left Review 15(May/June 2002)[국역 「아프리카의 위기: 세계체계적인 그리고 지역적인 양상들」, 『월간 사회진보연대』2002년 11월호, 2003년 1/2월호]
, 이는 한편으로는 자본 이동의 역전(더이상 자본은 주변부로 유입되지 않고 오히려 중심부의 금융시장으로, 혹은 중심부 사이에서 이동한다)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외채위기 당시 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IMF가 부과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라 자원과 산업을 해외매각하거나 사유화하고, 정부의 복지지출을 감축한 결과 실업과 빈곤의 위협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데 따른 결과이다. 이들 지역의 국가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사각지대’가 되었다. 그러나 금과 다이아몬드가 매장된 지역은 예외적으로 세계 자본주의와 연결된 통로로서, 이 지역을 통제하기 위한 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데 앙골라의 경우에서는 내전이 용병과 무기를 제공하는 군수 사업가들과의 제휴 속에서 장기간 지속되었다. 이처럼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경제와 사회를 만성적인 경제위기와 외채부담 속에서 내파시키고, 1997-98년 아시아와 러시아 등을 휩쓴 금융위기를 빌미로 구조조정을 관철시킨 신자유주의의 모습은 이미 세기말적 자본주의의 자기-조절 능력이 부재함으로 드러낸다.
중심부 내에서도 실업을 수반하는 구조조정과 저임금의 불안정 노동이 노동조합과 복지국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진행되는 가운데 일반화되고, 규제가 완화된 금융화한 자본은 세계 각지의 신흥시장과 중심부의 금융시장을 왕복하며 소수의
금융자산가 계층을 정점으로 한 거대한 사회적 위계와 불평등이 심화된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미국인데 1980년에서 1994년 1-3분기 사이, 연기금․뮤추얼펀드․보험회사․은행․재단 등이 소유한 금융자산은 1,331억 달러에서 11,770억 달러로 증가하였다. François Chenais, La Mondialisation du Capital(La Découverte & Syros 1997)[국역 『자본의 세계화』, 한울, 2003, p.53].
 불평등의 심화는 금융기관, 가계들로 지불되는 거액의 이자와 배당의 형태로 부와 소득이 이전되는 금융적 성격을 간과하고는 설명될 수 없으며 1980년대 주식시장의 급격한 성장은 부의 불평등을 심화하였다. 소득 상위 1%가 소유한 부의 비율은 1976년 22%였는데 2000년대 들어 이는 무려 40%에 육박한다. Gérard Duménil and dominique Lévy, “The Nature and Contradictions of Neoliberalism”, Socialist Register
2002[국역 href="http://jinbojournal.jinbo.net/">http://jinbojournal.jinbo.net/ 번역자료실
16번]. 한편『포브스』(Forbes) 지의 계산에 따르면 1990년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400명은 2000년에 더 부자가 되었는데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의 국민소득은 고작 두 배 증가했을 뿐이다.(Emmanuel Todd, ARRÈS L'EMPIRE (Éditions Gallimard 2002)[국역 :『제국의 몰락』, 까치, 2003, p.101])
 
이처럼 소수를 제외한 주변부에서의 경제발전의 정지, 혹은 후퇴와 중심부에서의 빈곤과 저임금노동의 일반화는 2차 대전 이후 반공-발전주의, 복지국가, 민족-국가의 수립을 자국의 노동자와 식민지 인민들에게 약속했던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를 드러내는 징후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복지국가를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하며(과거 시민들의 적극적 자유로 해석되었던 경제와 복지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은 이제 위험천만한 ‘반시장적’ 관념이며 연금수혜자들은 이제 ‘기생충’으로 취급된다), 과거 케인즈주의가 제한적으로나마 달성했던 세계경제의 실질적인 성장은 부와 자원의 중심부로의 지속적인 유출 속에서 빈곤한 지역들로 둘러싸인 중심부의 도시들과 주변부 내의 몇몇 중심부에 국한된 금융적 팽창과 세계적인 불평등으로 대체된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면적인 수정 없이는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에서 개도국들이 인권의 선결조건으로서 요구한 ‘발전권’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역설한 ‘인간안보’도, 인도주의 간섭 이후에 새로운 통치질서를 재건하는 작업도 실효성이 있을 수 없다. 일례로 중심부 국가들은 외채부담을 경감하는 문제 대해 매우 소극적이고 인색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난 7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외채탕감 규모는 과중채무빈국(HIPC) 38개국에 대해 550억 달러의 외채탕감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는 이들 국가들의 총외채 1,670억 달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총외채 2,080억 달러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액수일뿐더러 향후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는 관계로 고작 한 해에 10-20억 달러의 효과를 내는데
그친다. 그런데 남반부 국가들로부터 G8 국가들이 거두어들이는 외채에 대한 이자는 한 해 230억 달러에 달하며, 탕감하기로 한 외채 중 400억 달러는 이미 악성외채여서 실제 거래되는 가격은 32억 달러에 불과하다. 게다가 G8은 외채탕감운동을 전개하는 단체들이 요구하는 증오스럽고 불법적인 성격의 외채탕감에 쉽사리 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인권과 인도주의를 침해하는 독재국가의 비도덕성을 비난하던 서방열강들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사실이다. 박하순, 「G8 외채탕감계획의 기만성」, 『월간 사회운동』2005년 7/8월호.
 1970년대 남미 군부독재 정권들, 1994년 이전 남아공의 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 정권, 필리핀의 마르코스 치하 외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이 이란과의 전쟁을 위해 빌린 외채도 완전히 탕감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1,200억 달러에 달하는 이 외채에 대해 지난 해 채권국들의 비공식 협의체인 파리클럽은 80%를 탕감하는 전제조건으로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실행과 이에 대한 IMF의 긍정적인 평가를 내세웠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사실상 이라크의 모든 부문의 산업에 대해 외국인 투자의 제한을 철폐하는 것으로서 이미 연합군임시행정처(CPA) 시절 법령 39조를 통해 보장된 바 있다. 여기서 미국이 강조하는 이라크의 재건이란 초민족적 자본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권의 재분배에 다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이러한 부분적인 탕감조차도 교육, 보건 같은 사회적 비용을 줄여 재정적자를 감축할 것, 전력, 전기, 전화, 물, 의료 등을 사유화하며 외국인 투자에 대한 장벽을 제거할 것, 공공부문의 규모를 줄일 것, 노조조직을 어렵게 만들 것, 외화획득을 위해 (자연자원을 포함한) 수출을 늘릴 것, 생활필수품에 대한 보조금을 제거할 것 등의 신자유주의 개혁에 순응하는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현행 체계의 근본적인 변혁 없이는 인간안보나 ‘발전권’은 신자유주의와 공존하는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어야 할 것이다.


4)  군사세계화: 세계화를 방어하는 중심부의 통치전략

불평등과 빈곤의 근본원인으로 금융세계화의 이면에는 이른바 군사세계화가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이 임시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미국의 막대한 군비지출이다.
2005년도 미국 국방예산 4,206억 달러는 부르키나파소, 부룬디, 콩고, 케냐, 레소토, 모리셔스, 모로코, 나이지리아, 르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튀니지 등 아프리카 12개국 3억9천4백만 명의 국민총소득 총합 3,857억 달러보다 많다. 이러한 군비지출의 증가는 9․11 테러를 기점으로 상당히 늘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냉전 이후 국방예산의 감소추세가 역전된 것은 1999년부터이다. 1990년 미국의 국방예산은 3,850억 달러에서 1998년 2,800억 달러로 28%나 감소하였다. 1990-2000년 사이 세계에 배치된 미군의 수는 200만 명에서 140만 명으로 10년 동안 32%가 줄었다. M. E. O'Hanlon의 분석. 엠마뉘엘 토드, 앞의 책, pp.115-16.
 이미 클린턴 행정부는 1999년-2003년 동안 국방예산을 1,120억 달러 증액하기로 결정했고, 부시 대통령이 국방예산을 15% 증가하기로 결정한 것은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이었다. 또한 1990년대 초반 미국이 자신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 동안 군사기술의 혁신을 위한 예산은 잘 유지되었고(1980년 273억 달러에서 1996년 390억 달러), 군수기업들 간에 이루어진 인수․합병 과정에서 연금기금과 투자기금 등의 금융자본이 참가했으며 ‘주주 가캄를 극대화하기 위해 국방예산을 증액하기 위해 국방부에 꾸준히 압력을 행사했다. 기관투자가들은 클린턴 행정부의 국방예산 증가에 환호를 보냈으며 2001년 9월 11일 이후 S&P 지수와 나스닥 지수가 각각 20%와 60% 하락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군수기업의 증가는 10% 상승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군사상의 우위를 통신의 효율성, 정보도구의 성능, 무기 유도의 정밀성 등에 근거하는 이른바 ‘군사혁명'(Revolutions in Military Affairs)이 대두하면서 군수산업들은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제고하는데 9․11 이후 팽창한 안보시장은 이들에게 새로운 이윤 창출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전통적인 군비생산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써 국방부 이외 민간부문의 지출이 크게 증가하여 이미 야간경비․사고예방 등 안보관련 민간지출은 400억 달러로 연방․주․도시들의 경찰예산과 맞먹는 것이었다. 과거의 군산복합체를 대체하는 이들 ‘군사․안보 복합체’ Claude Serfati, "La guerre sans limites: à l'èrre de la mondialisation du capital", href="http://www.france.attac.org/">http://www.france.attac.org/, 15 Jan. 2003[국역: 「금융세계화와 무한전쟁」;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대안세계화운동』, 공감, 2003, pp.35-52]. 클로드 세르파티는 오늘날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은 세계화한 미국자본의 이해를 방어하는데 필수적이라고 진단한다.
가 금융자본과 결탁하여 미국의 사회와 경제에 깊숙이 뿌리내리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냉전 이후 미국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이다. 안보시장의 팽창을 가속화한 것은 ’본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의 설치였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예방전쟁, 선제공격 독트린으로 악명높은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이 방어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냉전의 소멸과 세계화로 인한 각종 위협과 불안정(‘테러와 불량국가'로 대표되는)으로부터 폭넓게 정의된 미국의 ‘사활적 이익’(vital interests), 즉 신자유주의 질서와 금융 부르주아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안보’는 단지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미국국익위원회(The Commission on America's National Interests)의 보고서에 따르면 "무역․운송․금융․에너지 네트워크와 환경 같은 세계적 차원의 주요
시스템의 안정성의 유지"에 대한 공격으로부터의 방어를 포함하며, 또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따르면 예방적․선제적 행동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도덕적 원칙으로 선언되는 “자유기업․자유무역”이며, 이 원칙이 문제시될 때 미국의 안보는 보장될 없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서 “자유무역․자유시장”에는 기업활동을 촉진하는 탈규제정책, 한계조세율을 인하하는 재정정책, 금융시장을 부양하는 통화정책, 아메리카자유무역지대의 창설, 다자간․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의 부과 등을 포함한다. 이처럼 미국의 군사․안보전략 자체는 금융화한 자본주의 질서를 방어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명명되는 이 전략은 9․11 테러 이후 사회적 저항을 범죄화하는 일련의 현상과도 관련이 있다. 실상 이라크에서 보았듯이 미국의 군안복합체는 첨단무기로 무장한 보병과 공습이 교대로 이루어지는 전쟁을 수행하는 무기체계를 고안하고 있고 이는 ‘도시전쟁’ 즉 남반부의 붕괴해가는 국가들과 그 인민들, 그리고 북반부 도시의 빈곤층을 잠정적으로 ‘위험한 계급’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저항에 맞선 전쟁을 의미한다. 또한 부시정부가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발행하는 국채는 기관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성을 보장하며, 군수시장 및 안보시장의 전망을 밝게 만들 뿐 아니라 중심부의 발전한 국가들의 금융자본이 미국을 더욱 안전한 투자처로 간주하는 계기가 된다.
‘예방적 공격자’로서 ‘세계의 경찰’임을 완성하려는 미국의 행동은 이미 클린턴 행정부 시절 시작되었다. 1990-99년 사이 미군은 1945-90년 동안보다 더많은 대외개입을 수행했으며 『LA 타임즈(LA Times)』(2002.1.6)에 따르면 2001년 9월 10일 현재 “6만명 이상의 미군이 약 100개의 나라에서 작전과 훈련을 수행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미국과 다른 국가들 사이의 불화가 없지는 않겠지만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미국과 이외의 국가들 사이에 군사력의 격차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1차대전과 같이 열강들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03년도 미국 국방예산은 3,961억 달러로 ‘불량국갗로 지목된 북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쿠바의 국방비 총합의 26배이다. 심지어 미국의 국방비는 미국을 제외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 남한, 호주의 국방비 총합보다 740억 달러가 많다.
 오히려 미국이 선호하는 것은 미국과 세계자본주의의 질서를 교란하거나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중심부 차원에서의 ‘공동작전’(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 이라크 침략전쟁에서 미․영 연합군 등)이다. 유럽연합 회원국 전체는 세계군비의 30%를 차지하며, 세계군비의 2/3를 차지하는 나토는 ‘세계화의 무장력’으로서 미국에게 필요한 것이다(바로 이 점이 냉전 이후에도 나토가 계속 유지되는 이유이다). 이로써 전쟁은 오늘날 경기를 부양하고 금융화한 자본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중심부의 공동대응의 핵심적인 구성부문으로 통합된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다양한 분쟁지역, 즉 인종정화와 난민의 발생, 만긴인에 대한 폭력과 테러의 위협 등을 야기하는 전례없는 유형의 전쟁, 즉 냉전 이후 등장한 ‘새로운 전쟁’은 냉전 시기 축적된 거대한 군사적 자원의 바탕 위에서 그 자체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자원과 무기, 병력을 조달하는 연속적인 폭력과 분쟁의 순환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련의 해체 이후 미국과 소련 양자로부터 원조가 중단된 사하라 이남 국가들, 혹은 중앙 아시아 국가들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점차 정규군 자체의 유지가 불가능해지고 이들 전․현직 군인들은 자이르에서처럼 약탈과 강탈에 고용되거나, 타지키스탄에서처럼 군벌화하는 등 일반적으로는 준군사집단, 군벌, 자위조직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은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강탈이나 납치를 통한 인질장사에 의존하거나, 다이아몬드(시에라리온과 앙골라), 청금석과 에메랄드(아프가니스탄), 마약(콜롬비아와 타지키스탄) 생산과 거래를 ‘보호’하는 대가로 이득을 보거나 내전 중인 상황에서 국제기구들 및 NGO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도주의적 원조를 암시장 거래 등을 통해 군사적 자원으로 전용하는 방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인구절멸 등의 수단을 통해 특정한 종족적․종교적 동일성에 기반한 공포, 증오를 표출하고, 약탈에 의존하는 이러한 비공식 군사집단들과 이들이 수행하는 새로운 전쟁은 냉전 시기 축적된 군사적
자원이 세계화된 경제와 결합하여 처분되는 하나의 양상이다. Mary Kaldor, “The Globalized War Economy”, New and Old Wars: Organized Violence in a Global Er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국역: 「세계화된 전쟁경제」, 『월간 사회진보연대』2003년 5월]
 이러한 극단적인 폭력은 사회적 권력관계를 변화하지 않고 단지 교전 당사자 사이를 중대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외교협상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미국이 주창하듯이 선제적․예방적 전쟁에 의해서는 오히려 무한전쟁의 순환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게다가 전략적 이해관계가 없는 지역의 분쟁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해결노력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목격되는 다양한 극단적 폭력과 야만의 유형들은 자본주의의 위기와 신자유주의 실패라는 관점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러한 진단 없이 제기되는 인간안보, 혹은 인도주의 간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미국의 군사․안보전략의 독트린 속에서 그 일부분으로서 기능할 것이다.


다. 2. 1990년대 이후 미국의 대북 정책

라. -군사․안보전략에 종속된 미국 외교정책

1)  핵과 미사일 문제: 1994 - 2005

지난 1990년대 미국의 대북정책을 살펴본다면 오히려 문제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이런저런 이유로 회피하고 여전히 대북경제제재를 유지함으로써 북한의 개혁․개방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는 미국이다. 1980년대 말까지 미국에게 북한은 ‘봉쇄’(containment)의 대상으로서 대화의 상대가 아니었으며 남한정부를 통한 간접적인 개입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부각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과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라는 전략적 목표를 위해 북한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불가피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접촉(engagement)’이란 유화나 포용이 아닐 수도 있는데 접촉정책의 가장 일차적인 목표는 다름 아니라 미국 주도의 군사․안보질서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를 위해 정치․경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미국의 전략적 목표에 순응하도록 유도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며, NGO 네트워크 등 다양한 채널을 확보한다는 다자간 접근법 등이 접촉정책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핵․미사일 문제는 물론이고 북한인권에 대한 미국의 문제제기 역시 접촉정책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미국 주도의 군사․안보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는 전제를 침해하지 않는다.

냉전질서의 소멸 이후 한반도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당시 남북은 상호체제(제도)의 인정․존중, 내부문제 불간섭, 비방․중상 중지, 파괴․전복행위 금지, 정전상태의 평화상태로의 전환, ‘남북화해공동위원회’를 구성․운영 등에 대해 합의하였다.
와 1992년「비핵화공동선언」 당시 남북은 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 금지, 핵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 보유 금지,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의 구성을 통한 상호 사찰 실시에 합의하였다.

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 및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장밋빛 전망이 제기되지만 이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강경한 입장과 공명하는 노태우 정권의 공안탄압 당시 법무부는 「남북합의서」를 조약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국가보안법 상 ‘반국가단체’는 이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1992.4), 안기부의 ‘남조선노동당 사건’ 및 경제협력 동결,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등을 발표하는 1992년 10월 경 남북관계는 다시 대결국면으로 되돌아갔다.

 속에서 순식간에 경색국면으로 전환된다.
1993-94년으로 접어들면서 미국과 남한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저지하기 위해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고, 유엔을 통한 대북 제재와 영변 선제공격계획 등을 검토하면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삽시간에 고조된다. 여기서 1994년 6월 카터의 전격적인 방북을 계기로 그 해 가을 북한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제네바 합의는 북핵문제 및 북․미 관계에 중대한 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Leon V. Sigal, Disarming stranger: Nuclear Diplomacy with North Korea (Princeton, N.J. :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국역: 『미국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 북한과 미국의 핵외교』, 사회평론, 1999].

 제네바 합의의 주된 내용은 북한이 영변의 원자로를 동결하고 핵비확산조약(NPT)에 규정된 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 일본과 함께 경수로 건설 및 난방용 중유와 4억 달러의 장기채와 지급보증을 약속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 기본 합의서」에는 양국 간 관계정상화를 명시함으로써 정치․외교적 고립상황에 빠진 1990년대이래 북한이 추구하던 ‘교차승인’이 머지않아 현실화할 것으로 보였다(2항. “양측은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추구한다”). ‘교차승인’이 처음 제기된 것은 베트남전 패배와 경제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현실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미국의 유화책으로서 ‘데탕트’가 등장한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관련하여 제기된 것이 ‘교차승인’이었는데, 이는 한반도에 독자적인 두 개의 국가가 있음을 인정하고 주변 국가들이 서로 상대방 진영의 국가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은 1975년 UN 총회에서 한반도에 이른바 ‘교차승인’을 제기하지만 이는 한반도에서 기존 한․미 군사동맹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현실화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90년대 舊소련 및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급속하게 해체․몰락과 더불어 남한이 소련 및 중국과는 각각 1990년과 1992년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순식간에 국제적 고립 상태에 놓인 북한은 분단을 고착화한다며 교차승인을 반대하던 입장을 바꿔 미국 및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한다.
 또한 「제네바 합의서」에는 3개월 내 양국의 통신 및 금융거래, 투자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고,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며, 양국관계를 대사급으로까지
격상시켜 나간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네바합의는 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을 일단 동결하고 과거 얼마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재처리했는지에 대한 조사(를 위한 연료봉의 해외반출) 및 기존 핵시설의 해체는 대체 원자로(제네바합의에 규정된 경수로의 건설)에 따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는 경수로가 완공되는 수 년 동안은 북한의 과거 핵 프로그램이 당분간 모호한 채로 남겨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미국 내에서 공화당을 위시한 보수진영의 비판은 여기에 집중되었다. 북한이 비밀 핵시설이 있다든지, 혹은 이미 만들어진 핵무기가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경우 제네바 합의는 결국 미국이 북한에게 사기를 당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제네바 합의에 대한 비난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을 압박하는 데는 미국보다 적극적이었던 김영삼 정권은 북․미 직접대화에서 한국이 소외된 것과 북한의 핵이 철저하게 규명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게다가 1994년 미의회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 양원에서 모두 다수파를 차지한 직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비난은 봇물을 이루었다. 제네바 합의는 ‘카드로 만든 집’이라고 조롱받았고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 투명하게 밝혀지기 전에는 북한에 대한 연료 공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북한에 대해 미사일 개발이라는 추가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1998년 북한이 정권창립 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발사한 광명성 1호는 미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문제삼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은 사정 거리 500km의 스커드-C형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제작․보유하고 있었고 대포동 1호의 사정거리는 1,500-2,000km에 달했다. 또한 이를 개량한 대포동 2호는 (실험되지는 않았지만) 3,500-6,000km를 날아 이론상으로 미국의 북서해안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사일의 개발은 이란, 파키스탄 등의 국가들에게 수출되었는데 이는 북한의 주요한 외화수입원 중 하나였다.
동유럽의 몰락과 소련의 해체 이후 북한은 1차 연료의 부족과 대외무역의 급속한 감소로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소련․러시아와의 교역은 1990-94년 동안 26억 달러에서 1억 달러로 줄었고 무역총액은 47억 달러에서 23억 달러로 반토막 났다. 와다 하루키, 『북조선 - 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 국가로』, 돌베게, 2002, p.238.
 당시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부풀리며 전역미사일방어망(TMD)을 정당화하는 계기로 삼았고, 제네바합의에서 약속한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와 관계 정상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별다른 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대조적으로 북한은 이미 1995년 1월 미국과의 상업 및 금융거래 금지를 폐지했다). 게다가 미국은 1998년에도 펜타곤에서 북한에 대한 모의 핵공격을 훈련하는 등 북한에 대한 핵위협을 여전히 철회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새롭게 등장한 북한의 중․장거리 미사일 문제를 포함하여 한반도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1999년 발간된 『페리 보고서』에서는 북한에게 경제제재 해제와 실질적인 대북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북한이 기존 제네바 협정에서의 이행사항을 준수할 것과 더불어 미사일 실험의 유예와 중동지역에 대한 미사일 판매를 포함한 미사일 프로그램의 중지를 요구했다. 이는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북․미 관계정상화와 대북 경제제재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문제가 악화되지는 않았다. 2000년 북한 조명록 차수의 방미와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의 평양방문에 이어서 11월의 시점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과 정상회담을 갖기 일보직전이었다. 여기서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수년 동안 10억 달러 상당의 식량원조를 받고 사정거리 180마일(388km) 이상의 미사일을 규제하는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가입하는 것이 거의 기정사실로 인식되었다.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New York: The New Press 2004)[국역: 『김정일 코드』, 따뜻한손, pp.197-199] 참조.
 그러나 전례 없는 박빙의 승부였던 당시 미국 대선의 와중에 클린턴의 방북은 취소되고 공화당의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네바 합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등장한다. 당초 제네바 합의에 따르면 기존 흑연 감속로를 대체하는 경수로의 건설 시점은 2003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와 경제제재에 소극적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2001년 『핵태세 보고서』에서 북한을 선제핵공격이 가능한 국가로 분류하고, 2002년 연두교서에서 이라크․이란과 더불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들 국가의 체제교체를 목표로 설정한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을 통해 핵무기나 화학무기 등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예방적 반확산’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미국의 공격적인 군사․안보 전략의 첫 시험대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였다. 2002년 말 북한과 미국 사이의 관계는 다시 제네바 합의 이전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11월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의 비밀 핵 프로그램-농축 우라늄 개발-을 추궁하는 켈리 미국무부 차관보에게 북한은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수출을 포기하는 대가로 북한 주권의 인정과 불가침 보장, 여타의 경제적 지원을 제안하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한다. 당시 북한은 "미국이 대담한 조치를 취하면 우리도 이에 상응하겠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냈으며, 이에 대한 미국측의 반응이 없자 북한이  수 주 후  유엔
국제원자력기구(IAEA) 요원들을 추방하고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서 탈퇴한데 이어 플루토늄 생산 시설을 재가동시켰다고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와 존 오버도퍼 교수가 밝힌 바 있다. 이 둘은 2002년 켈리 미국무부 차관보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었다. (『연합뉴스』6월 22일)
 켈리의 귀국 이후 미국은 제네바 합의의 무효를 선언한다. 이에 대응하여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요원들을 추방하고 발전소의 봉인을 연료봉을 재처리했다고 발표했다. 이듬해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에서 북한은 다시금 북․미간의 모든 현안을 일괄에 타결하는 ‘대담한 제안’을 협상하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며 끝까지 북한체제에 대한 인정과 불가침을 보장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한다. 지난 9월 11일 4차 6자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을 포함한 6개국은 6개항으로 이루어진「공동성명」의 형태로 합의문을 발표했으나 이로써 북한과 미국 사이의 핵 및 관계정상화를 둘러싼 갈등이 해소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경수로 제공, 북․미 관계정상화 및 불가침 조약의 체결 등의 구체적인 쟁점들에 대한 더욱 지난한 줄다리기가 지속될 것이다.


2)  북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불량국가', 그리고 「북한인권법」

그런데 여기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추가적인 요구사항을 제시하는 이면에는 북한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과 북한 체제의 붕괴를 원하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1994년 10월 21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의 사설은 “이번 주에 타결된 합의서의 역사를 기술할 시점에서 붕괴하게 내버려두어야만 했을 때 전세계가 김정일 정권에 돈을 퍼붓기 시작했다는 과연 기억될 것인가가 의문스럽다”라며 북한과의 협력과 대화에 부정적인 보수진영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리안 시걸, 앞의 책, p.258.

 게다가 북핵문제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대응은 북한이 전형적인 ‘불량국갗로서 미국에 적대적이고 핵무장에 광분하고 있으며 이러한 국가의 야망을 단념시키기고 핵확산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대화나 협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법자라는 규탄과 무장해제에 대한 요구, 그리고 응징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의해 계속 지배되고 있었다. 위의 책, p.325.
 부시 행정부가 등장한 이후 이러한 신념은 대통령과 그 주위의 몇몇 인사들이
개인적으로 북한에 대한 강한 혐오와 증오의 발언(부시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가리켜 “독재자”, “못된 아이”, “피그미” 등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을 일삼아 왔는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거부하는 국가를 악으로 취급하는 인식 속에서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체제에 대해 2001년 2월 17일『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투명성이 부족한 데다 국민을 가두고 굶주리게 하며 동시에 무기증강을 하는 국갚로 평가하고 있으며 김수암, 『미국의 대북인권정책 연구』, 통일연구원, 2004, p.29.
, 지난 11월 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국민을 억압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리더십의 자질은 먼저 국민들의 인권 복지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표명한 바 있다. 또한 지난 6월 13일 백악관은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처참한 인권 유린 현실을 고발하는 책을 쓴 탈북자 출신 기자를 초청하여 환대함으로써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는 의회의 청문회에 출석하여 “북한의 인권문제에 침묵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일련의 발언들 속에서 이들의 북한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거니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테러의 근본적인 근절은 정권의 민주화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체제 교체’라는 발상과 결합된다. 근본적으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김정일 정권의 교체를 통해 북한을 민주화하고 북한의 인권상황을 개선한다는 전략과 연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체제에 대한 미국의 부정적인 인식은 비단 최근 몇 년 동안 생겨난 것이 아니며 네오콘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미국 국무부가 발간하는 『연례 각국 인권보고서』(유엔 회원국 전체를 대상으로 1978년부터 발간)에서 북한은 1993-96년 동안 “조선노동당 절대권력 하의 독재체제”로서, 독립된 사법부가 존재하지 않는 관계로 인권이 보장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또한 국가안보를 위한 군과 보안기구들에 의해 심각한 인권침해가 이루어지고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군부에 대한 과도한 투자, 북한주민들에게 정부를 교체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어 미국 국무부는 북한체제를 군사력과 대량살상무기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굶주리게 하는 ‘전체주의 체제’(totalitarian regime)로 규정한다. 위의 책, pp.28-29.
 또한 북한은 미국 의회 종교자유위원회에서 발간하는 『국제종교자유보고서』에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특별관심대상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국 대표는 59차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대표단 단장인 커크패트릭은 북한을 “지구상의 지옥”으로 지칭하며 시민들의 인권이 [이보다] 더 가혹하게 유린되는 국가를 상상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커크패트릭은 카터 행정부 당시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던 인권외교를 비판하며 미국의 동맹국인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자유화의 요구는 미국에 우호적인 이들 정부를 약화시키고 미국의 이익에 불리하게 작용할 정권을 수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경고한 적이 있다(마상윤, 「미국 신보수주의의 역사적 배경 : 탈냉전에서 이라크전쟁까지」; 남궁곤 편, 『네오콘 프로젝트 -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념과 실천』, 사회평론, 2005, p.73).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국무부가 발간하는 『인권 및 민주주의 지원 보고서(Supporting Human Rights and Democracy)』(2003년부터 심각한 인권침해 국가들을 선별하여 분석)를 통해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다른 국가와의 공동대처를 모색하고,
『연례인신매매보고서(Report on Trafficking in Persons)』(2001년부터 발간),를 통해 강제노동수용소의 운영과 인신매매에 대한 북한 정부의 미흡한 대처를 비판하는 것처럼 각종 보고서의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고, 의회에서 관련 입법을 제정함으로써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 또는 인권 NGO를 지원하는 것 미국은 이미 2002년와 2003년에 걸쳐 한국의 두 개 NGO 단체에 25만 달러를 지원하였는데, 미국의 인권-외교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기금’(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의 지원을 통한 국제적인 NGO와의 협력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인권과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한 미국의 외교정책은 경제제재와 봉쇄, 체제전복을 위한 반체제 단체의 조직 및 지원, 무력개입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북한인권 관련 NGO는 북한자유연합(North Korea Freedom Coalition)이 대표적인데 이 단체는 북한의 인권유린이 계속되는 한 북한에 대한 지원에 반대하고, 북․미 간 협상에서 인권문제를 최우선적으로 다룰 것을 요청한다(김수암, 앞의 책, pp.22-25, 49-56).
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북한인권 관련 입법의 대표적인 것은 작년 만장일치로 제정․통과된 「북한인권법」을 꼽을 수 있는데, 미국이 국내법을 제정함으로써 타국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 간섭하는 것은 이미 1990년대부터「쿠바민주주의법」(1992년), 「쿠바자유․민주연대법」(1996년), 「이라크해방법」(1998),「쿠바자유법」(2001년), 「이란민주주의법」(2003년) , 「이란자유․민주주의지원법」(2004년) 등으로 시작된 것이다.
「북한인권법」은 2003년 상정된 「북한자유법」을 손질한 것인데, 2004년 10월 14일 부시 대통령이 최종 서명함으로써 효력을 발휘하였다. 「북한인권법」의 각 조항에 대한 비교․분석과 그 영향에 대해서는 김수암, 앞의 책, 4장을 참조할 것.
 「북한자유법」은 지나치게 공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여기서는 명시적으로 대량살상무기의 개발로 인해 위협받는 미국의 안보가 궁극적으로 북한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확립, 시장경제로의 근본적 전환이 이루어질 때 보장될 수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와 선박나포, 선제공격을 포함한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에 대한 남한 및 일본의 참여를 유도한다든가 북한과의 모든 협상에서 수용소 문제와 종교의 자유 등을 제기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법안에서 의도하는 것은 북한의 정권교체였고 「북한자유법」의 통과를 위해 국무부와 의회를 상대로 활발한 로비활동을 벌인 허드슨연구소의 마이클 호로비츠(Michael Horowitz)는 대표적인 네오콘으로서 이를 숨기지 않았다. 이에 비해 「북한인권법」은 대량살상무기 관련 조항과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 조항을 삭제하여 보다 온건한 형태로 다듬어졌다고 볼 수 있다. 북한과 함께 미국에 의해 ‘악의 축’으로 규정된 이라크나 이란에 적용된 「이라크해방법」,「이란자유․민주주의지원법」에서는 명시적으로 “민주주의로의 이행”(transition to democracy)를 언급할 뿐 아니라 반체제단체에 대한 군사교육 및 훈련원조(9,700만 달러), 민주적 반체제 단체 지원과 반체제 민주조직의 편성(1천만 달러) 등의 구체적 조치를 담고 있는 것에 비하면 이라크, 이란에 대한 법안과의 비교는 위의 책, pp.63-66 참조.
 「북한인권법」은 아직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간의 외교적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법안에서는 북한을 이탈한 주민(이른바 ‘탈북자’)을 보호하고 이들에 대해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 미국이 이들의 대량입국을 허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법안의
제․개정 과정에서 북한주민들의 미국 입국시 난민 혹은 망명 신청에 대한 특혜를 부여한 조항(박해받는 북한주민들을 특별한 인도적 관심을 갖는 2순위 지정그룹으로 인정, ‘임시망명정책’의 추진, 인도적 임시입국 허가, 18개월 내 신분변경 가능, 난민 신청인에 대한 노동허가)은 9․11테러 이후 미국입국이 보다 엄격해지고 있는 방향을 감안하여 모두 삭제되었다. 일본 역시 재일교포 및 일본인 처와 그 가족에 한하여 수용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미국이 선별적으로 북한주민들을 수용할 가능성은 있다(위의 책, pp.61-62, 84-85). 는 점에서 법안 자체는 상징적인 대북압박의 수단으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북한인권법」은 기본적으로 법안의 목적을 “민주적 정부체제로의 한반도 평화통일 가속화”한다는 제정목적에서 드러나듯 명시적으로 ‘체제 전환’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북한체제의 변화를 (점진적?) 추구한다고 할 수 있으며 경제제재 등 엄격한 대북협상 조건을 부과하지는 않고 있지만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대북협상시 “주요 관심 요소”(key concern element)로 고려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인도주의적 관심은 언제든지 북한에 대한 미국의 강경한 군사․안보전략의 하위 범주로서 활용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열려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이나 대북경제봉쇄 등의 강경한 수단이 동원될 가능성은 이미 여러 모습으로 입증된 바 있다. 이번 4차 6자회담을 앞두고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서 공습을 담당한 전체 F-117 스텔스기의 27%에 달하는 15대를 군산기지에 배치한 바 있고(5월 31일), 대량살상무기와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북한기업들(조선광업무역회사, 단천은행, 조선룡봉총회사)의 자산을 동결(6월 29일)한 바 있을 뿐 아니라, 2004년에는 확산방지구상을 발표하면서 핵무기의 ‘수평적 확산’(horizontal proliferation; 핵보유국이 늘어나는 것을 가리킴) 핵무기의 확산에는 또한 ‘수직적 확산’(vertical proliferation; 기존 핵보유국들의 핵전력이 강화되는 것을 가리킴)이 있는데, 미국의 반확산 전략은 수평적 확산만을 문제삼고 있으며 스스로는 포괄적핵실험금지협약 부결(1999년), 지하 벙커를 파괴하기 위한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기로 결정(2004년)하는 등 수직적 확산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핵비확산(NPT) 비회원국들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써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천명하였다. 게다가 지난 7월 21일 발표된 미국 국가안보자문그룹(여기에는 「페리 보고서」를 작성했던 페리 前 대북정책조정관도 포함되어 있다)은 플랜 A와 함께 플랜 B를 제시했는데, 플랜 A가 북한이 핵 및 미사일 프로그램을 폐기하는 대가로 미국은 북한에 대한 불침공을 약속하고 주변국과 함께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시나리오라면 플랜 A가 실패할 경우, 플랜 B는 봉쇄와 금수조치, 대량살상무기의 생산․배치․실험시설에 대한 폭격을 포함한 무력사용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지난 10월 10일 국정감사를 통해 밝혀진 것처럼여전히 미국과 남한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포함하는 공격적인 군사 시나리오를 여전히 유지하고 개정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언론에 공개된 2003년 11월에 열린 제35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 회의자료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이 당시에 합의한 전략기획지침에는 ‘작계 5027’의 목적으로서 북한군 격멸, 북한정권의 제거, 한반도 통일여건의 조성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 해 7월까지 북한의 화생방(운반 능력 포함) 능력과 지휘․통제 체제의 파괴 및 무력화를 목적으로 하는 추가적인 ‘작계 5026’을 보완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또한 ‘개념계획 5029’를 대비하는데, ‘개념계획 5029’는 북한에서 소요나 내란 등의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시, 주한미군의 주도로 북한 내부에 개입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다. 5026․5027․5029을 종합하면 북한의 군사시설에 대한 정밀폭격을 단행하고
이에 맞서 북한군이 남침할 경우 이를 격퇴하고 주한미군의 주도로 북한정권을 전복하고 통일을 달성하는 것이 현재 한국군과 미군의 작전 시나리오라는 점이 명백하다. 국정감사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군사기밀임을 내세워 답변을 거부했지만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은 "미국이 도입하는 정밀타격용 첨단무기와 한국이 현재 도입을 추진 중인 F-15K, 공중급유기, 합동정밀직격폭탄(JDAM), GPS 유도폭탄 등은 작전계획 5026에 따른 정밀타격 능력을 갖추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대북정책은 첫째로 ‘불량국갗로서 북한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둘째 미국 주도의 군사 질서에 대한 도전과 위협에 대한 불용(不容), 셋째, 비록 가상시나리오이기는 하지만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옵션에 기반하고 있다. 1994년 제네바 합의와 1998년 「페리 보고서」조차도 남한과 미국의 군사적 동맹을 전제한 것이었으며, 실질적인 대북 관계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나 해 제정된 「북한인권법」은 명시적으로 이란이나 이라크를 겨냥한 입법과는 달리 ‘북한 민주화’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주요 관심사안으로서 ‘북한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근본적인 목표(‘악의 축’으로서 테러를 지원하고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정권의 전복, 즉 ‘체제의 전환’)가 반영되어 있으며,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적 수단과 보완적인 관계를 맺는다.


마. 3.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앞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현재 인도주의 간섭을 제기하는 것은 명백히 중심부 국가들이다. 현재 미국이 내세우는 군사․안보전략은 “민주주의와 인권”를 내세우고 있으며, 유럽연합 국가들은 그동안 유엔인권위원회에서 「북한인권결의안」 발의를 주도하고, 이를 유엔 총회에서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난 11월 17일 유엔 총회에서 84개국의 찬성을 얻어 결국 「북한인권결의안」이 가결된 만큼 ‘북한인권’에 대한 국제적인 비판과 문제제기는 보다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앞서 미국과 나토를 포함한 중심부 국가들에게 시장의 질서, 오늘날 금융자본과 금융부르주아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한 예방적이고 선제적인 군사적 수단이 활용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인도주의적 간섭은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불투명성, 위협과 도전에 대해 중심부 국가들에게 요구되는 불가피한 개입의 논리에 다름 아니다. 또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서는 항상 ‘불량국갗로서 북한에 대한 반대급부를 최소화하려는 미국의 군사적 관심사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왔다.
그런데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20세기 초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들이 다름아니라 민주주의와 권리들을 확장해온 역사적 과정이었다. 이 역사적 경험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실천들을 통해 민주주의는 고정불변의 체제나 이념이 아니라 항상 지속적으로 배제와 불평등, 부당한 압제에 항거하는 모든 이들의 보편적 언어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동진영에게 중요한 과제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불평등과 빈곤으로 한계에 봉착한 자본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중심부 열강들의 침략과 압제의 새로운 전략 속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보편화의 과정을 다시 재개하는 것에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것이 오늘날 과연 “누가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의 주체인가?” Jacques Ranciére, "Who Is the Subject of the Rights of Man?", South Atlantic Quarterly 103:2/3, Spring/Summer 2004.

라는 질문일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데 오늘날 인권은 자신들의 이름으로는 그 어떠한 권리나 요구도 주장할 수 없는 희생자들의 권리로서 나타나고, 결국 이들의 권리는 타인에 의해 뒷받침되고 “인도주의 간섭”이라는 새로운 권리, 즉 (다른 국가를) 침략할 권리로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1789년 “모든 인간들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하는「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통해 자유와 평등의 원리로서 공동체에 각인된 성문화된 권리를 여성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식할 수 있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이러한 권리들을 요구하였다(“교수대에 가는 것이 여성에게 허락된다면 그녀들은 마찬가지로 의회에 가는 것도 허락된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들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요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그녀들의 권리를 의미한다. 이처럼 인간의 권리는 단지 이미 존재하는 기존의 권리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들을 건설하고 각인할 수 있는 주체들의 권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상황에서 인권(Human Rights)이 의미는 “그릇된 것”과의 관련 속에서 재사고된다. 바로 절대적이고 구제불가능한 악. 인권은 절대적인 “악”의 “절대적인” 희생자들의 권리인데 비인도적 억압으로부터 고통받는 이들은 인권을 규정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이들의 권리를 물려받아야 한다(이른바 “인도주의적 간섭”에 대한 권리의 등장). 희생자들의 권리를 물려받는 이들은 “악의 축”에 맞서는 "무한정의(infinite justice)"와 밀착하여 행하는 것은 사실상 복수이다. 이 “무한정의”의 문제는 내정간섭을 금하는 국제법을 어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Good)과 악(Evil) 사이의 종족적 갈등으로 모든 구분을 지워버린다는 데 있다. 규범과 사실, 법적 제재와 사적 보복 등등(얼마 전 언론에 보도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 포로 수용소와, 쿠바 관타나모, 그리고 이라크의 아부그라이브를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도주의 간섭이 전제하는 인권에 대한 관념과의 단절이다. 칼 맑스가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 규약의 전문에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들 자신의 작업이어야 한다”고 썼듯이, 피압제자들의 해방은 그들 자신에 의해 쟁취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단지 ‘인간으로서의 권리’라는 도식만으로는 인도주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특정한 인간이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현실에서 인간의 권리는 시민의 권리와 정확하게 동일시될 때 그 의미가 있다. 이는 곧 누구에게나 정치에 대한,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E. Balibar, “‘Droits de l'homme' et 'droits du  citoyen': La dialetique moderne de l'égaliberté et de la liberté”, Actuel Marx, no.8(1989)[국역: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 에티엔 발리바르 외, 『’인권의 정칼와 성적 차이』, 공감, 2003].
 이러한 권리의 행사는 기존의 인간학적 한계를 깨뜨리는 새로운 정치의 주체들을 형성해왔다. 노예, 여성, 식민지의 다양한 종족과 민족들, 여성, 노동자 등등. 인간의
권리들이 시민의 권리로서 제시될 때, 그것은 사실상 무제한적이며, 무조건적이며, 민주주의를 그 한계로까지 이끌고 가며 현존하는 법의 질서, 기존의 사회질서를 끊임없이 문제삼는 위험한 작업이 된다. E. Balibar, "Qu'est-ce une‘une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Les Frontières de la démocratie: Essais et erreurs, 1981-1991, La Découverte, 1992, pp.238-66[국역: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의 전망: 인권의 정치와 정치의 탈소외」; 윤소영 편역,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이론, 1992]. “이는 언제든 구성/헌정(constitution)의 안정성에 대립하지만 구성을 기초지우고 준비한다는 그러한 의미에서 봉기적 행위를 전제한다”.

현재의 위기는 단지 기존의 권리의 목록을 제시하는 것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며, 한계에 처한 민주주의를 해체하고 새로운 권리를 발명함으로써 다시 형성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새로운 주체들이 기존의 권리를 급진적 확장함으로써 사실상 새로운 권리들을 보편적인 것으로서 제시할 때, 현존하는 체계는 더이상 유지 불가능하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민주주의와 인권은 유엔으로 대표되는 국가간 체계,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안보질서의 해체를 전제한다.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능하다면 남한과 북한에서 동시에 그러한 변혁적 운동들이 동시에 형성되고 교류를 나눈다면 좋겠지만, 그 전망은 지극히 불투명한 것이 사실이며 지금과 같은 미국의 ‘북한인권’에 대한 문제제기와 강력한 군사적 위협의 감축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2005년 12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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