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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한장

윤도현 밴드 단상

  블로그에 대한 위키백과의 정의를 보면, "블로그(Blog 혹은 Weblog)란 Web(웹)과 Log(로그)를 합친 낱말로, 스스로가 가진 느낌이나 품어오던 생각, 알리고 싶은 견해나 주장 같은 것을 에다 일기(로그)처럼 차곡 차곡 적어 올려서, 남도 보고 읽을 수 있게끔 열어 놓은 글모음이다."고 되어있다.  남이 작성한 글에 동의해서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는 것을 탓할 일은 아니겠지만 남의 글로만 가득 찬 블로그를 보면 웬지 찡그려지곤 한다.  지금 나는 남의 글을 블로그에 올려 놓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남의 글을 올려 놓는 일은 최소화 하겠다는 나의 다짐정도랄까? ㅎ

 아래 글은 오마이뉴스, 윤도현, 노래 없는 '국민밴드'는 이제 그만 기사에 달린  "조명(stryger)"이란 독자가 쓴 댓글이다.

윤도현밴드 단상 2006/08/30 오후 10:17:16
조명(stryger)   조회 281, 찬성 3, 반대 0
윤도현밴드 단상



윤도현은 노래 하나는 잘하는 젊은 친구였던 시절부터 지금 윤밴의 리더까지, 윤밴은 한국적 록의 자존심에서 월드컵 가수까지 적지 않은 부침과 굴곡의 역사를 갖고 있다.





우연히 지방의 ㅇㅇ축제 같은 곳의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윤도현을 발견한 유병열(윤밴의 초기 리더)은 강호정등과 함께 윤도현밴드를 결성한다. 유병열은 당시에도 유명한 기타리스트였고 메이데이라는 운동권 록밴드의 프로듀싱을 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이들은 유병열을 중심으로 모여서 윤도현이라는 목청하나는 끝내주는 젊은 가수(당시 데뷔 음반을 낸 상태였음)를 타이틀로 내걸어 밴드를 꾸린 것이다.






그래서 나온것이 윤도현밴드의 사실상 데뷔 앨범이 된 윤도현밴드 2집 And Band(1997)은 시인 박노해의 시에 곡을 붙인 이 땅에 살기위하여, 철문을 열어 등의 노래를 담고 있다.





윤밴의 리더인 유병열은 밴드 결성 당시 명확한 운동적 지향을 갖고 있었고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서의 노래라는 신념을 모든 밴드 구성원이 공유하길 원했다. 모든 멤버들이 그런 신념으로 노래를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윤도현밴드 2집은 운동적 지향성과 한국적 록의 계승, 윤도현의 끝내주는 목청등이 잘 어우러져 SUB란 음악잡지(지금은 폐간)의 1998년 12월호에 실린 한국 대중음악사 100대음반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후 3집 소외(1998)을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4집 한국 록 다시부르기(1999)를 끝으로 유병열, 강호정이 탈퇴를 하게 된다. 음악적 견해차 때문이었을 것이다.





4집 한국 록 다시부르기를 내놓고 한동안 쉬었던(윤밴은 항상 라이브무대를 중심으로 대중과 만났다. 그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방송에서 윤밴을 부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노찾사를 방송에서 부르기가 어려운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그렇게 라이브활동을 정열적으로 하던 그들이 한동안 무대에 서지 않았고 4집을 내면서 다시 라이브로 돌아왔다) 라이브무대에 모습을 나타낸 윤도현은 "그동안 정말 많이 싸웠다. 하지만 윤밴은 계속 간다"는 멘트로 그동안의 갈등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그 일단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더이상 창작곡을 내놓지 못하고 결국 윤밴의 주축이었던 유병열, 강호정이 윤밴을 떠나면서 윤밴은 해체되는 듯 했으나 남은 멤버들이 윤도현을 중심으로 뭉쳐 새로운 기타리스트(재즈 기타를 전공한 허준)를 영입하여 윤도현밴드는 계속되지만 이전과는 완전히 단절된 다른 밴드가 되고 만다.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는 강한 비트의 하드한 메탈 사운드가 말랑말랑한 록발라드 중심의 사운드로 변해갔고 기타의 음색은 당연하게도 완전히 변했다. 또한 가장 큰 견해를 보였을 거라고 예상되는 운동적 지향성은 옅어졌다. 윤도현은 1집부터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일관되게 보이고 있었지만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서의 노래라는 거창한 사명감은 완전히 벗어던졌다. 하지만 유병열이 없이 제작된 5집에서도 이땅에 살기 위하여를 재수록하는 등 사회비판적인 시각은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2002월드컵을 계기로 부른 오 필승 코리아가 월드컵 열풍과 함께 널리 불려지면서 느닷없이 월드컵을 대표하는 가수로 등극하게 된다. 하지만 윤도현밴드는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다는 것 이외에는 월드컵과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윤도현밴드가 축구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2002월드컵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던 바로 그 6월에 윤도현밴드는 전국투어를 돌고 있었다. 그당시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던 또 하나의 그룹인 크라잉넛이 일체의 라이브를 중단하고 거리 응원에 올인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오 필승 코리아는 윤밴의 대표곡이 되어버렸고 전국민이 윤밴을 월드컵 가수로 인식하게 되면서 윤밴은 누구나 다 아는 유명 가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후 윤밴은 월드컵 공식 가수란 직함을 부담스러워 했다. 물론 록밴드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002년 이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윤밴은 월드컵 공식 가수란 이미지를 피해가면서도 월드컵으로 인해 높아진 인지도를 통해 보다 대중들에게 가깝게 다가서게 된다. 그것은 분명 월드컵을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웠다는 종류의 비난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일이다. 윤밴은 월드컵을 이용하려 한 적도 없고 월드컵을 통해 유명해지겠다는 의도를 가진 적도 없다. 단지 붉은 악마의 요청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 노래를 부른 결과가 그렇게 이어진 것 뿐이었다.



그런데 2006년이 다가오자 그는 다시 월드컵 응원가를 부른다. 그것도 SK란 기업의 광고 모델로 월드컵 응원가가 넘쳐나는 2006년의 TV 광고시장의 한켠을 비집고 월드컵 공식 가수가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는 2002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되었다.



윤밴이 부른 "애국가" 응원가는 그 자체로 많은 논란을 낳고 있으며 또한 윤밴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윤밴이 스스로 그렇게 상황을 만든 것이다.



월드컵 가수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의도적으로 월드컵과 축구를 외면해왔던 윤밴이 SK의 광고모델로 월드컵 응원가를 불러대는 것은 명백한 상업주의, 대중영합주의란 딱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으로써 윤밴이 5집 이후부터 보여온 지금까지의 행보 자체가 상업주의, 대중영합주의였다는 일부 음악팬들의 의심을 보다 확고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3] 이 독자의견에 찬성합니다.이 독자의견에 반대합니다.
종이한장(jongi)  삭제하기 [2006-08-31 01:40]
개인적으로 2집을 가장 좋아했고 최근 앨범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뒷 이야기가 있었군요.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그 초기 리더였던 유병열이란 분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신가
종이한장(jongi)  삭제하기 [2006-08-31 01:41]
요? 그 사람이 손 댔다고 하는 메이데이 앨범은 지금도 가끔씩 듣게되는데.... 1집 밖에 없어서 안타깝네요.
종이한장(jongi)  삭제하기 [2006-08-31 01:42]
아, 그리고 제 개인 블로그에도 퍼가겠습니다. (blog.jinbo.net/papy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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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들?


장맛비가 주룩 주룩 내리는 아침, 언제나 그렇듯이 허둥지둥 버스로 내달렸다.
여느때라면 자리에 앉아 책이라도 보며 갔을텐데 조금 늦은 탓인지 자리가 꽉 차 있다.
그래도 앉을 자리만 없을 뿐이지, 뒤쪽은 서서 책을 보고 갈 정도로 여유가 있어보여, 앞쪽에 몰려있는 사람들을 비집고 훤하게 트여있는 뒷쪽에 자리를 잡았다.  비집고 들어가는 도중에 안것인데, 사람들이 유난히 앞쪽에만 몰려 있던 이유랄까? 뒤쪽은 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든 자리를 차고 앉아 이리 저리 뒤돌아보며 수다떨기 바쁘다.  그 중간에 자리를 차지하기란 웬지 쌩뚱맞게 느껴졌을 것이다.
쌩뚱맞은 어색한 기분을 빨리 잊고 싶어서 들고있던 우산을 얼른 바닥에 내려놓고 책을 꺼내들려고 하는 순간, 목 뒷쪽 힘줄을 자극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이씨~ 왜 내 앞에 서고 그래~ ......"
움찔해 오는 신경을 감지하며,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고2 정도로 보이는 앳뎌 보이는 여학생.
한마디 쏘아 붙일까 속으로만 생각하다, 마는가 싶었다.
뒤쪽에 자리가 나자 이 친구 잽싸게 일어나서 가려다 내가 가로막고 있자 눈은 마주치지 않으면서 영 뭐 씹은 기분나쁜 눈초리로 바라보다 비켜주자 뒷쪽으로 쪼르르 가 앉는다.
그 눈초리 탓이었을까?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아이 씨~ 진짜~"
뒷쪽에  가서 앉은 그 친구가 했던 말이 내 귀에 들렸던 것 처럼, 내가 한 말이 바로 내 앞에 앉아있던 그 친구의 친구가 들었나보다.  바로 반응하지 않은 나와는 다르게 그 친구의 친구는 바로 반응한다.
"왜? 욕하고 그래요?"
순간 뜨끔했다. 하지만 조금 전 부터 누르고 있던 감정이 용수철처럼 튀어오르고 만다.
일대 설전이 오고갔다.  사실 감정섞인 막말이 오고가는 중에는 나이를 조금이라도 먹은 사람이 불리하기 십상이다.  이미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불리한 싸움이랄까? 

그래도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차근차근,  뒷쪽에 가서 앉은 아이가 먼저 내 뒤에 대고 뭐라고 했다고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 뒤에 가 앉은 그 아이, 그런 일 없다며 딱 잡에 떼고는 왜 욕 했느냐며 난리다.
어리고 만만해 보였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튀어오른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뻔히 불리해 보이는 싸움 한복판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이런 싸가지니 뭐니 하는 말이 먼저 나와버리고 절제하지 못한 감정은 뒤에 앉은 그 아이 앞에까지 다가가서 손찌검하는 시늉까지 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미 늦어버린 후회...

처음 뚝 잡아 떼던 그 친구 드디어 할 말이 생겼는지, 처음에 뒤에서 나에게 한 말은 혼잣말이었다. 그리고 째려 본게 아니라 비켜달란 말을 하기 싫어서 그냥 쳐다본것 뿐이라며 자신이 했던 행동에 대해 인정한다. 그러면서, 나 더러 아무리 그랬더라도 나 더러 더 잘못했다면서 큰소리다.
이러던 중, 앞쪽 어떤 아주머니는 시끄러웠던지 뒤를 돌아보더니 한 마디 한다.
"바득바득 끝까지 대드는 학생이 너무하네~"

나를 거들기 위한 말이었을까.  그러나 순간 정신이 번쩍 든다.
사실 이런 말싸움에서 제3자가 처음부터 자초지종을 다 알고 누구 편을 들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아주머니가 보기에 그저 어린 아이가, 좀 들어보이는(?) 나에게 대드는 모습만으로 그 아이에게 한마디 한 것일 뿐이다.

그 아주머니가 끼어든 덕분에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비록 그 친구가 나에게 뒤에 대고 뭐라고 한 것이 발단이긴 했지만, 나 역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잘못된  방법으로 그들과 소통한 것이 문제였다.  내가 정당한 방식으로 소통했더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텐데 그렇지 않았던 탓에 나도 잘 했다고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즈음 되니, 볼썽 사납긴 하지만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선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되었던간에 싸움 중에 욕한 것과 손찌검 하는 시늉을 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니 학생도 먼저 뒤에대고 뭐라고 한것에 대해 사과하라는 요구도 함께.
그랬더니 그 친구는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모두가 다 내 잘못이란다.
이미 냉정을 되찾은 터, 그런 도발에 발끈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생각하라고 하고 말았다.  여전히, 자기는 잘했다는 말을 애써 무시해 버렸다.

그렇게 몇 정거장을 지나고 난 뒤, 불쑥 내가 했던 말을 그 친구에게 전달해 주었던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정말로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친구, "에이~ 둘 다 잘못했어요~!"

....

중간에 내려서 택시를 타고 올까 하다 그 꼴이 더 우스울듯 해서 끝까지 다 와서 내렸다.  그리고 회사까지 걸어오는 동안 영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처음에 참지말고, 조용히 이야기 했다면 좀 나았을까? 아니면, 내가 그 나이 때에 어른이 뭐라고 했더라면 기분 나빠서 나도 똑같이 그랬을까? 
아주 쉽게 그냥, "요즘 애들은 다 싸가지가 없어~!"하고 마는게 나을까?

요즘 애들, 요즘 애들...
요즘 애들이 문제일까,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내 탓일까?
어차피 툭~툭~ 내뱉아서 사람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은 요즘 애들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럼 요즘 애들 문제는 도대체 뭐지?



인격수양이 덜된 덕분에 이렇게 유쾌하지 못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ps1. 훗~ 복잡했던 기분이 이렇게라도 정리하고 나니 한결 낫다.  이 찜찜함에 허비한 시간이 도대체 얼마야.... 휴~~~ 이제부터 일에 집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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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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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음유시인?

 

블로그 링크를 따라가다 발견한 책 광고 사이트 해럴드 왕국 살리기 프로젝트.

광고에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중세왕국'..... 그러나, 부제 "중세왕국이라면 과연 당신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라는 말에 혹해서.... 재미삼아 테스트!

 

대충 열 문제 정도 내 주고서 내 인성유형을 "꿈꾸는 음유시인"이란다.

광고 사이트란 점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내뱉는 유형은 절대 나쁜것은 없으리리라.

우연이었을까? 내가 찾아들어간 블로그 주인장도 나와 같은 유형.... 이거 모두 다 "꿈꾸는 음유시인"이 나오는 것은 아냐?

 

어쨋든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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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성 유형은... 꿈꾸는 음유시인(Dreamer-Minstrel)

*좋아하는 것 : 다른 사람의 동기 유발, 새로운 만남, 즐거운 놀이

*싫어하는 것 : 고독한 환경, 시시콜콜한 세부사항,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살벌한 경쟁

꿈꾸는 음유시인은 왕국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다.

그들은 왕국의 공보담당관으로, 사람들을 모아놓고 왕국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를 즐긴다.

(흠..... 이 녀석 얼굴이 떠오른다.... )

 

꿈꾸는 음유시인은 어떤 상황에서든 희망을 발견하며 모든 무지개의 끝에서 황금단지를 찾아낸다. 그들은 훌륭하고 멋진 팀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재능과 다른 이들을 모든 일에 열광케 만드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자기 자신만큼이나 열렬히 열광하게끔 말이다!

꿈꾸는 음유시인은 온 나라를 여행하며 긍정적 이미지와 커다란 기쁨이 담긴 이야기들을 퍼뜨린다. 그들은 왕국의 시적 낙천주의자로, 사실에 시적 윤색을 가한다.

또한 그들은 영원불변한 낙천주의자로서 더 나은 내일을 향해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모든 일은 결국에 다 잘 풀리게 되어 있다'는 말이 그들의 철학을 대변한다.

그들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처럼, 꿈꾸는 음유시인은 대체로 창의적이지만 대부분 비현실적인 몽상가이다. 꿈꾸는 음유시인은 때때로 길가에 쪼그려 앉아 초목이 자라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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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날짜가 맘에 들지 않긴 하지만, 어쨋든 스승의 날이다. 우리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다.  내년이면 정년 퇴임인데도 여전히 평교사로 계신다. 아버지 동기는 물론이거니와, 후배분들 대부분이 교장으로 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평교사이시다.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 교통사고로 인해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신다.
내 기억 속에는 아버지가 두 팔을 사용하셨던 기억이 없다.  그저 사진 속에서 아기였던 나를 안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을 뿐...

2년 전 쯤 스승의 날이 가깝던 어느 날 일요일, 아버지는 아침부터 안절부절 하지 못하시며 점심때가 다 되어 주섬 주섬 옷을 챙겨 입으시고는 일요일임에도 학교에 출근하신다고 하며 서둘러 나가셨다.  나는 그냥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이야기 하신다.
"그냥 애들이 부르면, 가서 같이 있다고 오면 되지 뭘 그렇게 빼느냐?"고....
옛날 제자들이 스승의 날이라고 동창회를 하면서 스승이었던 아버지를 초대했던 것인데, 아버지는 한사코 거절하며 학교에 출근해야 한다고 핑계를 둘러대셨던 것이다.  모처럼 친정에 와 있던 누나나, 어머니나, 나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했다. 그래서 재차 어머니 말에 동조하면서 가시라고 재촉하는데, 양말을 신으시던 아버지가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걔들 앞에 나서는게 떳떳하지 못해서 가지 않는거야!"
"뭐가 그렇게 떳떳하지 못하신데요?"
"그 때가 언제였나면, 내가 교통사고 당해서 아주 힘들었을 때 담임 했던 애들이야, 내가 힘드니까 애들한테 화만 내고 아주 사소한 일에도 애들 때리고... 잘 했던 애들이야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걔들 중에는 날 아주 안좋게 기억하는 애들도 있을거라구! 그런데 내가 어떻게 스승이라고 걔들 앞에 나설 수 있겠어..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찡해져 옴을 느꼈다.
그리고 뭐라고 나무라는 어머니한테,  "엄마나, 나나 아빠한테 뭐라고 할 게 못되네... 그냥 아빠가 판단하실 일이네.."

* * *
나는 한 때 아버지의 모습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엘 가거나 같이 조깅할 때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목욕하는 사람들이나 이상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눈길이 싫었다.  나는 남들의 그런 눈이 나에게까지 꼿히는 것이 싫어서 아버지와 떨어져 있으려고 했다.  그랬던 그런 나의 기억을 내가 아직 어렸을 때이니까라고 위안해 보지만 여전히 너무나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만일 아버지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런 생각을 해 보면 아버지처럼 의연하게 묵묵히 생활 할 자신이 없다. 내가 아버지 옆에서 느꼈을 시선을 아버지는 언제나 온 몸으로 직접 느끼셨을게다.

예전에 아버지와 함께 근무하셨던 분으로부터 아버지 별명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 별명이 홍길동이시란다. 왜 그런 별명이 생겼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언제나 남들보다 앞서서 걷고, 여기 계신가 하면 어느 새 저쪽에 가서 궂은 일을 하시고...
아버지랑 같은 학년이 되어서 일 하면 참 불편하단다.  자기들 보다 나이 드신 분이, 거기다 몸도
불편하신 분이 궂은 일에 앞장서시니 자기들이 영 불편하다는거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아버지랑 벌초를 가면 아버지는 거의 쉬시는 법이 없다.  몸이 불편하셔서 모든 일을 다 도맡아 하시지는 못해도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처음부터 끝 까지 쉼 없이 하신다.  그러니,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쉴 틈이 없다.  잠시 쉬노라면 아버지는 여전히 일 하고 계신데 맘이 편칠 않으니 그냥 그렇게 쉴 수 없는 것이다. 아마, 아버지를 홍길동이라 부르시는 그 분도 나와 같은 기분이셨을게다.

* * *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요즘들어 아버지가 부쩍 힘들어 하심을 느낀다. 내 기억에 아버지가 감기에 걸리신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요즘엔 아주 가끔씩 아주 심하게 앓으신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아버지가 정말 나이가 드셨구나 하는 생각에 직접 표현하진 못하지만 마음이 싸아 하다.

우리 집 3남매 중 아버지와 가장 많은 트러블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나다. 누나나 동생은 아마 내가 일으킨 트러블 때문에 감히 트러블을 일으킬 생각조차 못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자다가도 가끔씩 아버지 생각에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올라 주체하지 못하고 한참을 흐느끼며 우는 적이 있다.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 내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대답한다. 세상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존경스럽다는 삶은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이 아니기에, 나는 내가 직접 보고 느껴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나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아버지나 어머니께 단 한번도 사랑한다는 소리를 해보지 못했다. 언젠가는 꼭 한번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아직까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꼭 한번 하고 말리라...
"아버지 사랑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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