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반전 평화와 국제연대에 관한 캠페인이에요

WTO 반대를 왜 하는가. #1

1) 도하개발의제가 노리는 우리의 삶

√ 농업협정
·농산물 관세를 낮추고 국가의 보조금을 축소하여 시장지향적인 농산물 무역체제 수립
·토지와 식량에 대한 통제권을 초국적 농기업에 집중시켜 이들의 시장지배력 강화
·농민들에게는 소득 감소, 부채 급증, 토지에 대한 권리 박탈을 가져오며, 민중들의 식량에 대한 접근권을 박탈함
·유전자조작식품의 거래를 자유화하여 민중의 건강 위협

* 식량문제는 한국에서 매우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음. 한국의 현재 식량 자급률은 20~30%수준이지만, 쌀의 자급률은 약 106% 수준. 즉, 쌀을 제외하면 자급률은 10%미만. 쌀의 자급률은 생산량의 증가가 아닌 소비의 축소로 인한 자급률 상승임. 특히, 한국에서 소비되는 쌀은 자포니카 종으로서 한국, 일본, 중국의 동북지역 3성(흑룡강성, 연길성 등),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만 생산.
미국은 자국에서 소비하지 않는 쌀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는 유일한 국가임. -> 수출 외에는 소비방법이 없는 상태.

√ 서비스 협정
·교육, 의료, 물, 에너지, 통신, 종자, 유전 등 모든 서비스 분야에서의 무역장벽 제거
·민중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누구에게나 공급되어야 할 필수서비스 사유화, 개방
·공공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 박탈

* 한국에서는 현재 철도청의 철도공사화, KT 민영화 등 각종 공기업의 민영화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민중의 삶이나 안전보다는 자본의 이익에 치중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 대표적 사례로 KT의 대주주가 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영향으로 인해 공식소프트웨어가 '아래한글'에서 '마이크로소프트워드'로 변경될 정도로 주주의 이익에 복무하지만, 투자 부족으로 인한 시스템 다운으로 전화가 불통되는 등 오로지 자본의 이익에만 복무하고 있음.

√ 지적재산권협정
·역사적인 지적재산권 협정들을 망라, 초국적 자본에게 무한한 독점적 권리 부여
·미생물과 식품종에 대한 특허도 보장
·초국적 제약자본의 이윤을 우선시하여 값싼 약 공급 불가능하게 함
·농민들의 종자에 관한 권리, 원주민들의 전통 지식에 관한 권리 박탈

* 변형조류독감(사람간 감염) 발생 시나리오에 의하면, 한국내에서만 수 백만명의 감염자가 발생하고 사망자의 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중세 유럽 인구의 절반을 죽음으로 몰아간 제2의 흑사병이라 불리우지만, 현재 스위스 로슈사의 치료약(타미플루)이 개발되어 있음. 하지만, 로슈사의 배타적 특허권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타미플루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있음.
한국에서도 조류독감 발생에 대비하여 타미플루를 비축하고 있지만, 현재 약 60-70만명 분에 의한 비축. 한국내 조류독감 발생 시 절대적 품귀현상 발생 예정. 타미플루 판매할 경우 사재기를 우려한 정부가 판매를 통제하고 있는 상황.

√ 비농산물시장접근
·각 국의 산업정책 무력화, 탈산업화를 초래
·남반구의 취약한 산업구조가 세계적인 경쟁에 직접 노출되도록 해, 실업과 빈곤을 남반구로 이전

2) 도하개발의제(Doha Development Agenda)란?

지난 2001년 1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WTO 4차 각료회의를 통해 시작된 새로운 무역협상 라운드를 일컫는다. 이 협상은 새로운 무역 규범을 2007년부터 출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개발의제’라는 이름을 달고 ‘무역에 있어서 개도국들의 이익을 증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들을 협상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허울 좋은 도구일 뿐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개도국 우대조치’에 관한 이행 계획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농산물 관세를 낮추고 농업에 대한 보조금을 철폐하는 한편, 필수 공공 서비스를 상품화 하여 개방하도록 유도하는 등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성공리에 끝난다면 현재의 WTO보다 포괄하는 범위가 더 넓고 더 많은 자유화를 보장하는 무역 규범이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 GATT에서 도하개발의제까지

· GATT(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1947)
2차 세계대전 직후 각국의 통화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그 위에서 무역의 자유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 세계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한 목표가 되는 상황에서, IMF, IBRD와 함께 자유 무역을 추구하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세워졌다. 1947년부터 효력을 발휘하게 된 이 협정은 관세율을 낮추고, 관세 이외의 모든 무역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하여,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자유무역을 완성하기 위해 체결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무역자유화의 대상은 주로 ’공산품‘에 한정되었다.

·‘농업’과 ‘서비스’를 자유무역의 대상으로-WTO 출범(1995.1.1)
GATT의 8차 무역협상 라운드인 ‘우루과이라운드(1986~93)’의 성과를 바탕으로 95년 출범한 새로운 무역규범이다. 미국으로서는 이 협상을 통해, 자국의 초국적 곡물기업의 시장 장악력을 높이고, 초국적 금융자본이 침투하여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는 것이 관건이었다. 미국의 이런 의도가 대폭 반영되어 WTO 협상에는 농업협상, 서비스협정, 지적재산권 협정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은 철강, 자동차 등 이미 잠재력이 소진된 전통적인 산업분야에 대해 자국의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유지했다. 반덤핑법, 섬유·의류에 대한 수입할당제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지적재산권 협정(TRIPs)을 통해 IT산업 등 첨단 산업의 핵심요소인 기술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더불어 WTO는 GATT와는 달리 ‘분쟁해결절차’와 ‘무역보복제도’를 두어 주변·반주변국으로 하여금 중심국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한다.

·‘시애틀 투쟁’과 3차 각료회의 무산(1999.11)
시애틀에서 열린 3차 각료회의는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설정된 의제-농업, 서비스, 지적재산권 등-에 관한 개방의 폭과 수위를 확정하고, 투자자유화, 무역과 노동·환경 기준 연계등 새로운 의제를 추가하여 새로운 무역협상을 개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농업협상을 둘러싼 농산물 수출국(미국, 호주 등)과 수입국(EU, 일본)간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약속된 개도국 우대조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것에 대한 개도국들의 반발이 거세어서 합의가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3차 각료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전 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새로운 무역협상 라운드의 출범에 반대하는 투쟁이 시애틀에서,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서 분출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가 가져다 준 끔찍한 결과로 촉발된 전 세계 민중들의 분노는 각료회의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각료회의를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 도하개발의제 출범 - 4차 각료회의(2001.11)
도하개발의제를 탄생시킨 각료회의다. 미국으로서는 9.11 사건으로 무너진 미국중심의 세계 경제 질서에 대한 신뢰도를 회복하기 위해 3차 각료회의의 실패를 딛고 새로운 무역협상을 출범시키는 것이 사활적인 과제였다. IMF, 세계은행, G8정상회의 등 주요 국제기구들의 회의가 있는 곳마다 벌어진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을 의식하여, 시위대의 접근이 힘든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된 4차 각료회의에서 미국은 중심국간의 이견을 최대한 좁히고 개도국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 결과로, 미국은 새로운 무역협상의 범위와 방식에 대한 합의를 담은 선언문을 채택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회의의 결과로 제출된 선언문에는 농업협상의 3대 목표, 서비스협상의 방식이 담겨있으며, 환경이슈를 새롭게 추가한다는 것, ‘투자·무역원활화·정부조달투명성·경쟁’의 이른바 싱가포르 이슈 협상을 5차 각료회의 이후에 시작한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그 밖에 아프리카 그룹의 제기로 ‘TRIPs 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특별선언문’이 채택되어, 지적재산권이 말라리아, AIDS, 결핵 등 전염병으로 신음하는 전세계의 민중들의 의약품 접근권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 ‘칸쿤 투쟁’과 5차 각료회의 (2003. 9)
‘각료회의 무산’이라는 사건이 4년 만에 재현되었다. “WTO가 농민을 죽인다”는 외침을 남기고 한국 농민 이경해 열사가 자결한 사건은 멕시코 칸쿤 5차 각료회의장 안팎을 뒤흔들었고, 결국 ‘도하개발의제 협상 골격 완성’을 목표로 한 각료회의가 아무런 성과 없이 무산된 것이다. 5차 각료회의에서 개도국과 최빈국들은 ‘G20(농산물수출개도국그룹)', '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 인근국가 그룹(ACP)’, ‘최빈개도국그룹(LDCs)’ 아프리카연합(AU)등으로 의견 그룹을 형성하여 미국과 유럽연합이 주도하는 협상에 반기를 들었다. 농업협상에서 개도국들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높은 국내보조금/수출보조금이 오히려 ‘자유무역’을 해친다며, 보조금을 철폐하고 개도국 농산물의 수출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아프리카 면화수출 4개국 역시 미국의 면화 보조금이 자국의 소농을 말살한다며 이로 인한 손해를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개도국/최빈국 그룹은 초국적 투기자본의 권리를 무한정 늘이는 내용을 담은 ‘싱가포르’이슈에 대해서도 반대했고, 비농산물시장접근(NAMA) 협상이 남반구를 탈산업화로 이끌고 실업과 빈곤을 확대한다며 반대했다. 결국 5차 각료회의 무산으로 ‘개도국과 최빈국이 자유무역의 혜택을 누리도록 한다는’ ‘도하개발의제의 명분이 허구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 7월 기본골격 합의 (2004. 7)
칸쿤 각료회의가 무산되고 난 후 2004년 7월 말 제네바에서 열린 ‘일반이사회’에서 도하개발의제 협상 기본 골격이 타결되었다. 칸쿤 각료회의 무산 이후 미국은 미국의 일방주의에 불만을 표한 개도국들은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협상 결렬에 결정적 역할을 한 G20을 파괴하는 데 집중해왔다. 미국은 G20에 속한 중남미 여러 나라에 G21에서 탈퇴하면 부분적인 시장개방을 제공하겠다고 사탕발림하여 이들을 G21에서 이탈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 그룹을 이끄는 브라질과 인도를 ‘이해당사자 5개국 그룹- 미국, 유럽연합, 호주, 브라질, 인도)’으로 끌어들여 기본골격 초안을 작성하는데 동참시킴으로서 G20의 단결을 파괴했다. 또한 G90(ACP+LDCs, AU) 회의에 로버트 죌릭 등을 파견해 싱가포르 이슈 중 ‘무역원활화’에 대해서만 협상을 개시한다는 안을 제시해 G90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미국은 이렇게 해서 ‘기본골격’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 만큼 7월 기본골격에는 농업협상, 비농산물 시장접근, 서비스협정 등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의 입장만 노골적으로 반영되어있다. 앞으로 이루어질 협상은 이 7월 기본골격을 바탕으로 한다.

· APEC에서 도하개발의제 추진 결의(2005. 11)
2003년 칸쿤 5차 각료회의가 무산되고 이후 전세계 민중의 지속적인 투쟁으로 인해 도하개발의제가 거의 폐기될 위기에 처함. 특히, 5차 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연합에 반기를 든 다양한 의견 그룹들의 반발로 인해 도하개발의제의 지속여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2005 부산 APEC에서 도하개발의제를 재추진 할 것을 천명. 2005 홍콩 각료회의에서 막강한 압력으로 작용할 예정.
APEC은 전세계 교역량의 45%를 차지하는 등 막강한 시장장악력을 토대로 도하개발의제를 추진할 것으로 보임.

(홍콩투쟁단 공식 자료집 발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홍콩 WTO 반대 민주노동당 원정투쟁단 참가

WTO 반대 홍콩 민주노동당 원정 투쟁단에 참가를 결의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 차원의 지원이 없는 가운데 여러 강북구위원회 당원들의 도움으로 홍콩가는 길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직 중앙당의 투쟁지침은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해 열심히 투쟁하겠습니다.

요즘,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 꼴통 언론들이 흘리는 정보가 꽤나 위협적입니다. 특히, 중앙일보가 흘리는 정보는 협박수준입니다. 그런 정보를 자꾸 흘려서...우리를 위축시키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홍콩 경찰의 알프레드 마 홍보국장은)"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 부산에 직접 가서 한국 시위대를 유심히 관찰했다"고 밝힌 뒤 "대부분 평화적 시위였지만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차량에 방화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이 같은 행위는 홍콩에서 14년 이하 징역형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불법집회 개최자 및 참가자 : 5년 이하 징역
평화적 시위 무시(폴리스라인 침해등) : 폭동으로 간주, 10년 이하 징역
시위 중 자동차 건물 훼손 : 14년 이하 징역
각목 쇠파이프 등 무기 소지 : 2년 이하 징역
사전에 허용되지 않은 플랭카드 소지 : 약 67만원 벌금
경찰관에게 반항 및 신분증 제시 요구 불응 시 : 6개월 이하 징역

위와 같은 내용으로 기사가 나왔습니다. 또한 사설에서는 다음과 같은 망발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해외 원정가는 데모 종주국 됐나"라는 제목으로 "농민단체들은 농촌경제가 어렵다고 국내에서 과격시위를 했다. 이제는 비행기표 끊어가며 원정시위까지 한다면 역설적으로 "농촌이 잘살기는 잘사는 모양"이라는 지적에 무엇이라 답변할지 궁금하다."거나 "농민단체들은 농촌경제가 어렵다고 국내에서 과격시위를 했다. 이제는 비행기표 끊어가며 원정시위까지 한다면 역설적으로 "농촌이 잘살기는 잘사는 모양"이라는 지적에 무엇이라 답변할지 궁금하다"며 시위단체 자체를 거의 폭도 수준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농민단체들은 왜 해외에서 폭력시위의 상징으로 낙인찍혔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사설에서 묻고 있는데요. 왜 농민단체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무뇌아가 따로 없네요.

이런 상황이지만, 여러 당원들이 도와주셔서 홍콩에 한발짝 한발짝 다가가고 있습니다.

현재, 홍콩원정투쟁에 대한 개인별 예산은 민주노동당 국제국의 메일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항공권 53만원, 숙박비 10만5천원, 보험료 5천원, 그리고 공동경비 3만원, 비상금 3만원
약 4만원의 교통비와 8만원의 식비는 개인별로 따로 지참

약 82만원 정도가 예상됩니다. 이 중 비상금 3만원은 사용치 않을 경우 환불받는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강북구 위원회의 노동위원회 수련회, 지방자치 토론회등에 참가하여 WTO 투쟁에 대한 결의를 밝히고 모금을 진행해 왔습니다.

박용진, 이명영, 홍승석, 박인용, 최선, 구본승, 송희진, 최금옥, 박종택, 박민선 강북구 지역위원회 당원과 강북구청 상용직 노동조합에서 모금에 동참하여 현재 27만원이 모금되었습니다.

도와주신 강북구 당원과 강북구청 상용직 노동조합에 진심으로 감사말씀 드립니다.

오늘은 친구이자 공무원 노조 구로지부에서 사무차장으로 근무중인 친구를 조직해서...

같이 홍콩에 가서 뜨겁게 투쟁하기로 하였답니다.

홍콩에서 뜨겁게 투쟁하고, 보고도 착실히 올리고, 사진도 많이 많이 찍어 오도록 하겠습니다.

김희서 강북구 지역위원회 사무국장의 배려로 앞으로도 투쟁을 떠나기 전까지 강북구 지역에서 계속 모금을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보고를 계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부산APEC 반대 전야제

사진 몇 장으로 설명이 되겠습니까만은...

사진 몇 장으로 글을 올려 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부산 반아펙 시위 사진 모음

경찰의 무차별 소금물대포 때문에...노트북에 소금물이 들어가서... A/S상태입니다.
반 아펙 전야제 사진이 노트북안에 있으므로...
노트북을 찾는대로...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시위대는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경찰이 물대포를 쏘는 바람에 취재중이던 기자들의 장비만 망가졌다.
이 날 경찰은 기자와 시위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진압을 해댔다.


경찰의 장벽 뒤로 멀리 보이는 아펙회담장인 벡스코.




주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경찰 채증반.



화재 진압하라고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소방차는 이 날 시위진압을 위한 물대포로 변신했다.


이 날 물대포를 이용한 진압은 기자들도 예외가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무차별 살수했다.


흥분한 일부 경찰이 대오에 달려나오고 있다. 농민대오 쪽에서는 큰 침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컨테이너를 치우는 작업을 하고 있는 시위대에게 이들의 존재는 불안감을 조성할 뿐이었다.


시위 막바지. 한 농민이 전경 앞에 앉아 차라리 죽이라며 외치자 전경들이 욕을 하며 위협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부산은 경찰의 불법, 탈법의 천지...

Anti-APEC투쟁 참가를 위해 부산에 내려와 있습니다.

서울에서 오늘 출발한 팀은 지금 부산으로 향하고 있을터이고, 저는 친구를 만날 일도 있고 해서 하루 먼저 내려와 있습니다.

부산 서면에서 17일 저녁 7시부터 Anti-APEC 전야제가 있을 예정입니다. 서면은 부산의 중심가 중 하나로 APEC 회담 정상들이 머무는 숙소인 부산롯데 호텔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롯데호텔 근처인 이곳은 지금 경찰의 탈법, 불법의 천지가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불법인지조차 모를 그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지하철 서면역내에는 수많은 전경들이 배치되어 있고, 주변 시장골목등에도 여기 저기 전경들이 완전무장한 상태로 무더기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서면 롯데호텔 주변에는 전경들이 수백개의 무리를 이루고 있다.

지나는 길에 전투경찰 소대장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왜 여기에 이렇게 있는지...

그는 롯데호텔 주변의 경비차원에서 배치되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10조의2 (경찰장구의 사용) ①경찰관은 현행범인인 경우와 사형·무기 또는 장기 3년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범인의 체포·도주의 방지, 자기 또는 타인의 생명·신체에 대한 방호, 공무집행에 대한 항거의 억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그 사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필요한 한도내에서 경찰장구를 사용할 수 있다. [개정 91·3·8, 99·5·24] ②제1항의 "경찰장구"라 함은 경찰관이 휴대하여 범인검거와 범죄진압등 직무수행에 사용하는 수갑·포승·경찰봉·방패 등을 말한다. [신설 99·5·24] [[시행일 99·11·25]]"

즉, 전투경찰들의 행색을 보건데 롯데호텔 주변에는 "현행범" 또는 "사형·무기 또는 장기 3년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범인"이 있는것 같았으며, 또는 "자기 또는 타인의 생명·신체에 대한"위협을 느끼고 있거나 "공무집행에 대한 항거"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APEC이라는 분위기에 미루어 볼 때 롯데호텔 주변에는 테러 또는 그에 준하는 세력이 있으며 전투경찰들은 그것에 매우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라 할 것입니다.


곧곧에 무리지어 다니는 그들은 위협적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경찰이 느끼는 위협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경찰들의 불편이 아니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면지역은 그리 넓지 않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십 여대의 전경버스가 배치되어 경비하고 있는 이 곳을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전투경찰들은 오히려 지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만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 곧 Anti-APEC 전야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엊그제 농민집회에서 보여준 경찰의 모습때문인지, 오늘의 집회도 내일의 집회도 모레의 집회도 걱정됩니다.

모레 집회까지 계속 함께하고 서울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다음은 민중의 소리 관련 기사들과 관련법규를 짝지어 봤습니다.

기사제목 : 경찰, 신부 폭행에 현금 탈취까지..."계엄령 내렸나?" -민중의소리
http://www.voiceofpeople.org/new/news_view.html?serial=32735

"제10조의2 (경찰장구의 사용) ①경찰관은 현행범인인 경우와 사형·무기 또는 장기 3년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범인의 체포·도주의 방지, 자기 또는 타인의 생명·신체에 대한 방호, 공무집행에 대한 항거의 억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그 사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필요한 한도내에서 경찰장구를 사용할 수 있다. [개정 91·3·8, 99·5·24] ②제1항의 "경찰장구"라 함은 경찰관이 휴대하여 범인검거와 범죄진압등 직무수행에 사용하는 수갑·포승·경찰봉·방패 등을 말한다. [신설 99·5·24] [[시행일 99·11·25]]"

"제10조의4 (무기의 사용) ①경찰관은 범인의 체포·도주의 방지, 자기 또는 타인의 생명·신체에 대한 방호, 공무집행에 대한 항거의 억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는 그 사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필요한 한도내에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다만, 형법에 규정한 정당방위와 긴급피난에 해당하는 때 또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에게 위해를 주어서는 아니된다. [개정 88·12·31, 99·5·24]
1. 사형·무기 또는 장기 3년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하거나 범하였다고 의심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자가 경찰관의 직무집행에 대하여 항거하거나 도주하려고 할 때 또는 제3자가 그를 도주시키려고 경찰관에게 항거할 때에 이를 방지 또는 체포하기 위하여 무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다른 수단이 없다고 인정되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2. 체포·구속영장과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할 때에 본인이 경찰관의 직무집행에 대하여 항거하거나 도주하려고 할 때 또는 제3자가 그를 도주시키려고 경찰관에게 항거할 때 이를 방지 또는 체포하기 위하여 무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다른 수단이 없다고 인정되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3. 범인 또는 소요행위자가 무기·흉기등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고 경찰관으로부터 3회이상의 투기명령 또는 투강명령을 받고도 이에 불응하면서 계속 항거하여 이를 방지 또는 체포하기 위하여 무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다른 수단이 없다고 인정되는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4. 대간첩작전수행에 있어 무장간첩이 경찰관의 투강명령을 받고도 이에 불응하는 경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문정현 신부와 함께한 하루, 그리고 부산.

아침 8:30분 인천에 도착.

이스탄불에서 출발할 때부터 예정되어 있던 평택주민의 국방부 앞 기자회견 소식에 달려가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기자회견의 내용은 그 동안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의 기록을 모아 만든 "들이 운다"라는 책의 출간 기자회견이었습니다.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들어라"는 할머니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맞은 것은 시커먼 전투경찰일 뿐이었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친 후 매월 한 차례씩 진행되는 미 대사관 앞 집회를 위해 이동했습죠.

미대사관 앞에 도착해보니... 같은 날 있었던 농민집회에 모두 동원되어서인지, 소위 아는 얼굴인 종로서 정보과 형사들도 없고 처음 보는 전투경찰 부대만 있었습죠.


사전에 "들이 운다"를 미대사관에 전달할 것을 공지했었고 합의도 되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미 대사관으로 향하는 길은 전투경찰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고 우회해서 가려는 신부님과 일행을 막아서는 통에 일이 커졌던것 같습니다.

나중에 전경 소대장이 한다는 말이... "차도를 행진하는 것은 불법이다"라고 하더군요.
인도를 안 막아서면 차도로 나갈 일도 없었을 것을... 게다가 행진을 한 것도 아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시고 책 한권 전하러 간다는 것이...

우리는 그날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인도를 걸어갈 권리도 없고, 80먹은 노인네가 행여 테러라도 저지를까봐 움직이기만 하면 전경이 겹겹히 애워싸는 그런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국민이었다면 그런 대접을 받았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대한민국 경찰이 아니었겠지요.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 경찰이 국민을 그런식으로 내동댕이 쳤겠습니까?

암튼 이때서야 나타난 구(라)과장(종로경찰서의 정보과장, 워낙에 구라를 잘 쳐서)은 오늘도 어김없이 진가를 보여줬습니다.

신부님을 속여서... 대표단만 간다면 미대사관에 갈수 있게 해주겠다고...
미 대사관을 경찰의 허가가 있어야 갈수 있는 것만으로도 열받는 상황이었지만, 책과 항의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그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대표단을 일차 전경의 벽을 통과시켜... 집회장과 대표단을 분리한 후...

기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대표단은 채 50여미터도 가지 못한 채 다시 전경에 둘러 쌓인 거죠.

그래봐야... 인터넷 언론사의 기자들 몇 명이 있었을 뿐인데... 기자들을 우리손으로 내쫓으란것도 아니고...

구 과장이 진가가 나타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와서 하는 변명 비스무리한 것이... 구 과장의 밑에서 일하는 형사가 말이죠...

쟤네들은 우리 말 안 듣는다. 우리도 통제가 안돼 죽겠다.

뭐 이런 말만 늘어 놓더라구요.

결국 밤샘 농성을 하게 되었는데... 시차적응도 안된 상태에 여독도 풀리질 않아 먼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부산에 있습니다.

부산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보수단체들에 의해 모든 집회장소를 선점당하고, 조그만한 집회라도 그 자체가 모두 불법이 되는 상황이어서 일겁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폭풍전의 고요함 같습니다.

얼마전 농민열사의 죽음과 엊그제 농민집회에서 도저히 경찰이라고 볼수 없는 진압(심지어 현금 65만원을 강도질 해 가기도 했다죠), 그리고 귀가하다 사망한 농민의 죽음으로 인해...

이곳의 집회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것만 같습니다.

18일 집회도 집회지만, 19일 집회는 농민 집중집회로 잡혀 있었는데요.

18일 집회부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부산은 거의 반계엄 상황인것 같습니다.

해운대로 들어가는 길 자체가 막혀있으니까요.

이 곳에서 제가 할 일은 사진을 많이 찍어 올리는 일 같습니다.

지역에서 송희진 사무차장 한 명만 부산에 오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다 전달하진 못하겠지만, 또한 언론사들의 사진보다 못하겠지만...

지역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Amed(디아르바크르)를 떠나며...

18일간의 아메드(디아르바크르)는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티그리스강을 끼고 움직이는 아메드는 짧은 여행이었던 지난번과는 다른 느낌이엇고, 짧은 경험으로 인한 오해를 풀어주기도 하였다.

50여명이 코숄루파크에서 집회를 하던 날, 이전 방문에서도 마지막날 집회갇 있었기에 분위기는 대략 알수 있었지만 단 50여명의 집회때문에 시내 곳곳에 장갑차가 배치되고 평소의 서너배 가량의 경찰이 순찰을 하는가 하면, 시내에서 무장군인을 목격하는 일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있었고, 하영식씨의 '굿바이 바그다드'라는 책을 통해 얻은 정보(그 책에 의하면 아메드는 거의 계엄상황이다)보다는 자유롭고 활기찬 도시였고, 많은 단체들이 외형상으로는 문제 없이 활동하고 있고 그런 곳들만 골라 방문하는 우리의 뒤를 쫓는 경찰의 시선은 느낄수 없었다.

하지만, 집회 취재를 위해 타고가는 버스 안에서 본 장갑차(이것들 때문에 교통 정체가 일어날 만큼 당당하게 도로 한 가운데 서 있었다)들, 그리고 집회장 근처에 배치괸 장갑차는 여차하면 참가자들을 바로 진압할 수 있다는 터키 정부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리고, 한국의 전투경찰처럼 집회장 근처에서 무리지어 대기하는 경찰의 모습은 눈에 익숙했다. 방탄복을 입고 실탄이 장전된 총을 든 모습만 빼면...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지만, 아메드를 떠나 이스탄불로 향하는 내 가슴엔 그래도 희망으로 두근거린다.

기아자동차 비리 사건, 강승규 부위원장 구속, 민주노총 지도부 총사퇴, 민주노동당 지도부 총사퇴 등으로 이러지고 있는 한국 운동의 위기속에서 작으나마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렝긴을 돕기 위해 한달여 짧은 기간동안 50만원이 넘는 큰 돈을 모아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은 렝긴의 교과서와 약값이 되었고 힘이 되었다.

국제 연대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움주시는 모든 후원인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렝긴 후원금 관련 사용내역

교통비 - 28 YTL
교과서 - 42.8 YTL
문구류 - 79 YTL
약값 - 200 YTL
통역 - 20 YTL
합계 - 369.8 YTL

총 모금액은 530,000원이 모금되었습니다.

이 중 핸드폰 후원등 아직 입금되지 않은 금액을 제외하고 40,6000원 정도가 첫 지원금으로 잡혔고, 현지에서 500 YTL을 인출하니, 1600원정도가 남았습니다.

렝긴의 사연이 알려진 후 현지에서도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어서 당뇨병에 대한 치료는 현지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합병증인 신장이상에 대한 검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상진씨와 저는 렝긴 지원금의 사용에 관해 논의한 후, 신장약값과 교과서와 학용품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단, 현금지원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합의하였습니다.

개학(9월)한지 2개월이 넘었지만 교과서가 한 권도 없는 렝긴이었습니다. 교과서를 사기 위해 돌아다녔지만, 렝긴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단 한 종류의 교과서도 없었고 그나마 아메드 지역에서 몇 종류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만, 모든 교과서를 살순 없었고 반 정도만 살 수 있었습니다. 돈을 들고서도 교과서를 살 수 없다니...

또한, 문구류가 없는 렝긴을 위해 교과서와 함께 한 학기 내내 사용할 수 있는 문구를 지원하였습니다.

약값은 현금지원 불가의 원칙에 따라 한 약국을 선정, 렝긴이 원할 때마다 약을 지급하기로 하고 약국에 선불하였습니다.

현재 130.2 YTL이 남아 있으며, 핸드폰 지원금이 수납되면 잔액은 더 늘어날 예정입니다.

앞으로 렝긴 뿐만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정치범 가족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발전시키기로 하였으며 그에 따른 여러 방법을 연구중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관심갖고 지켜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소외되는 것보다 무서운 것

이번 쿠르디스탄 여행에서 가장 큰 것이라면, 소외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쿠르드 민족은 4천만 명이나 되지만, 5개 나라(이란, 이라크,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터키)에 의해 나뉘어졌다. 이 중 2천 5백만 명 정도가 터키라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쿠르드 민족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쿠르디스탄이라고 부르는데, 터키 지역내에 있는 디야르바크르라는 도시가 쿠르디스탄의 수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인구 2백만 명의 중심도시이다. 쿠르드 민족이 어떻게 소외되어 살았는지 구구절절 말하자면 너무나 긴 이야기이므로 몇 가지의 사례만 들어보고자 한다.

터키 지역에는 쿠르드 민족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봉기했던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PKK)이 있다. PKK가 1984년 8월 15일(공교롭게도 한국의 해방기념일과 일치한다) 터키군에 반격하여 무장봉기를 기점으로 게릴라 투쟁이 벌어졌다. 이후 90년대 초반, ‘터키군이 쿠르드족의 산악마을에 올라와서 농부에게 게릴라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쿠르드 농부가 난생 처음 듣는 터키어를 알아들을 리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농부는 터키에 살면서 터키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터키군에게 죽임을 당했다.(굿바이 바그다드/하영식)’

또한 지난 90년대, 쿠르드 담배를 피운 것이 이유가 되어 죽은 사람이 있다. 쿠르드 담배는 예전 한국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피우던 쌈지담배와 비슷하다. 시장에서 담배를 사다 피우는 것이 탈세혐의가 되어 경찰에 체포되었고,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 죽었다고 한다.

이렇듯 이유 같지 않은 이유(한국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소위 막걸리 반공법)로 사람이 죽어나갔지만, 이런 사실들은 이제야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지난 10월 2일 이스탄불에서는 PKK 당수 오잘란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며 사격을 가해 19살 청년 알틸라가 즉사하는 사건이 있었다.

디야르바크르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을 여행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점이 바로 소외되어 살아가는 것보다 힘든 것은 소외된 사실을 알면서 견뎌야 하는 것임을 알았다.

디야르바크르에서 가까운 에르가니라는 도시를 갔을 때였다. 한상진에게서 ‘알리’라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 놓을테니 시청직원인 그를 찾으라는 당부를 듣고 무작정 시청으로 직행, 지난 사람들을 붙잡고 알리를 찾아갔던 적이 있다. 마침 알리는 시청 밖에 있었고, 그를 호출하여 그가 시청으로 돌아오는 동안 약간은 당황스러운 일을 당했는데, 에르가니 시장과의 면담이었다.

시청내에 영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고, 시장도 영어를 하지 못했다. (뭐 영어로 말한다한들 내가 알아들었을리 없지만...) 그래서 음료수 한 잔을 대접받으며 알리를 기다리는 동안 시장과 한 일을 그냥 서로 웃으며 약간의 터키어와 바디랭귀지로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것과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말을 하고선 눈만 쳐다봤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나를 한 도시의 시장이 왜 만났을까. 나중에 한상진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에르가니의 시장은 나를 무척 반가워했고(이건 분위기상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했을 것이라 한다.

외국인인 내가 그 도시를 방문한 것만으로 고마워한다. 시장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사람들이 죽어가도 알려지지 않고, 9000년이나 된 유적이 사방에 깔려있어도 찾아오는 외국인은 일 년에 몇 명뿐이라고 한다.

그들은 소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맞지 않는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내 말에 의심이 가거든 권하고 싶다. 터키에 갈 기회가 생기거든 꼭 쿠르디스탄을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도시이든 시청에 방문하여 가이드를 부탁해 보라. 그러면 그 도시의 시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단, 디야르바크르 시장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디야르바크르가 쿠르디스탄의 수도라 불리는 만큼 그는 쿠르디스탄의 대통령과 비슷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정상들이 쿠르드 지역을 방문하면 만나는 상대가 디야르바크르 시장이다. 하지만, 지방도시는 확실하다.

한국에서는 구청장 한 번 만나려고 해도 무척이나 어렵지만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터키에 오면 이런 곳에 방문을 해 보세요.

안녕하세요. 단풍입니다.

며칠동안 소식이 통 없었습니다. 그 동안 인터넷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습니다. 가는 곳마다 인터넷을 연결할 수 없는 지역이었거나, 마음이 급해서 피씨방을 들릴수가 없었습니다. 또 피씨방에 들려도 한글을 쓸 수 없는 환경이어서 메일 정도만 확인하고 그랬습니다.

지난 며칠동안 되도록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배우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외국인 입장에서 그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첫 방문지로 선택한 곳은 '에르가니'였습니다. 에르가니가 선택된 이유는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9,000년정도 된 마을의 흔적이 발견된 곳이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위 사진은 그 흔적의 전경사진입니다. 현재 이 곳에서 사람의 뼈가 발견되어 DNA검사중에 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 곳은 수렵생활에서 유목생활을 거치지 않고 농경사회로 바로 전환된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는 신전-우리식으로 치면 신당 정도?-의 흔적, 무덤의 흔적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지역이 늘 그렇듯 제대로된 보호조치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많은 훼손이 있었습니다. 지방정부가 설치한 철조망이 수없이 뚫려 있었지만 그것을 보수하기조차 어려운 처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를 해주었던 '알리'는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설명해주기 위해 한 마디 한 마디에 혼신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알리는 매우 유쾌하고 입심(?)좋은 양반으로 꽤나 즐겁게 만들어주는 그런 힘이 있었습니다. (알리의 영어는 그리 유창하지 못하고 저 역시 유창하지 못한 관계로...ㅋㅋㅋ 말도 안통하는데 얼마나 재밌었겠습니까.)



알리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 곳은 최초의 정착을 이루었던 곳에서 동굴을 파고 들어가 생활을 하게 된 곳이었습니다. 예로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비옥하기로 소문나 있어서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린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지에서 이루던 마을이 동굴로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의 사진들은 그 동굴마을의 사진들입니다.





몇 장의 사진과 몇 줄의 이야기로 다 설명한다는 것에, 그리고 글쓰기 실력이 짧다는 것에 한계를 느낍니다.

유적지 방문을 끝내고 체르믹으로 가서 온천을 했습니다. 체르믹은 이 지역에서 유명한 온천으로 유황온천이어서 피부에 매우 좋습니다. 온천을 하고 나왔을때 그 매끄러운 피부란...ㅋㅋㅋ




온천을 마치고 알리의 집에 가서 홈스테이를 했습니다. 알리는 시청의 문화재 관련 담당 공무원인데요 알리의 유쾌함은 가족과의 즐거운 생활에서 나오는 듯 했습니다. 제게 쿠르드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고 온 가족을 소개시켜주기도 하고, 특히 알리 부부는 친구처럼 살아가는 듯 보였습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그런 모습을 본다는 것은 매우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하산케이프'로 이동했습니다.




하산케이프는 고대 캐슬로 유명한 지역이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관광객의 발길이 드문 곳입니다. 터키하면 다들 이스탄불을 이야기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하산케이프를 방문하지 않고서 터키를 방문했다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산케이프는 말보다는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듯 합니다. ^^








그렇게 하산케이프에서 하룻밤을 또 보내고 간 곳은 미디얏. 미디얏에서는 아주 놀라운 경험을 했더랬습니다.

이슬람지역이라고만 알려진 이 지역에서 '동방정교회' 교회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로마카톨릭과는 다른 종파이지만 비슷한 점도 매우 많은 그 교회는 한국의 카톨릭 교회의 모습과는 다른듯 하면서도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이 지역의 다양한 문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미디얏을 빠르게 방문하고 당도한 곳은 누사이빈이라는 시리아 국경지대였습니다.

쿠르디스탄이 강대국의 힘에 의해 지도상에서 어떻게 분할되었는지는 보여주는 그런 도시였습니다. 지금은 국경지대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갈리워졌지만, 원래는 한 마을이었던 이 곳은 도시의 절반은 시리아, 절반은 터키로 갈리워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곳의 사람들은 시리아에 친척이 있기도 하고 서로 장을 보러 국경을 넘기도 합니다.

누사이빈은 국경지대이며, PKK라고 불리우는 게릴라들의 활동지역이기도 해서 군대가 넓게 주둔하고 있으며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경계가 삼엄해서 사진찍는 것마저 금지당했는데요. 몰래 몇 장을 찍었습니다.

이 곳의 심각한 문제는 지뢰매설이 전쟁의 과정에서 매설된 것이 아니라 게릴라 소탕작전의 일환으로 지뢰를 매설하였는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까지입니다. 할 말은 많은데 정리가 않는군요.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기자도 미행당하는 터키는 계엄상황?

이 글은 대자보에 제공된 기사입니다.


2005년 11월 1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광화문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 시위를 막기 위해 서울시내 도처에는 경찰 장갑차 십여 대가 배치되고, 무장한 경찰과 무장군인이 배치되었으며 시위대열은 이 기세에 눌린 탓인지 수 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시위대 숫자와 같은 수의 경찰이 시위대에 섞여 사진을 찍기도 하고 비디오 카메라를 이용해 시위대의 모습을 구석구석 담는다. 집회를 취재하는 해외 통신사 외국인 기자의 모습도 경찰의 카메라에 담기고 촬영하는 경찰을 찍는 기자의 카메라는 경찰에 의해 제지받았다.

집회를 주도한 연사는 연설을 끝내자마자 경호원에 둘러싸인 경찰서장으로 보이는 자에 의해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으며 검문을 받았다. 그리고 집회는 끝났고, 집회장을 떠나는 해외 통신사의 외국인 기자는 상당 거리를 이동하면서 경찰의 미행을 당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소설이거나 지난 70-80년대 이야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이야기는 2005년 터키의 현실이다.

11월 1일 터키 디야르바크르주 디야르바크르시 코숄루 공원에서는 터키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2000년이 넘는 만리장성 다음으로 긴 성벽을 가진 디야르바크르는 소위 쿠르디스탄의 수도라 불리우며 탄압받고 있는 터키 내 쿠르드족의 중심지이다.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여성

낮 1시경 디아르바크르시 중심가인 오피스 거리에는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정복경찰이 순찰하고 있었고, 정복이 모자랐는지 사복차림에 경찰 조끼만을 걸치고 나온 경찰도 보였다.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었지만 시내 도처에 배치된 경찰 장갑차와 무장경찰 때문인지 집회참가자의 수는 생각보다 적다. 오피스 거리 잘 보이지 않는 골목에는 무장군인이 배치되어 있는 놀라움은 표현 할 길이 없다.


▲디야르바크르 번화가인 오피스(OFIS)거리에 총을 들고 경계중인 무장경찰

▲멀리 보이는 경찰 장갑차. 시위전부터 디야르바크르시내에 여러대가 주둔했다. 이 곳 터키는 경찰은 물론 모든 군, 경찰의 시설물을 촬영하면 경찰의 제지를 받는다.

▲오피스(OFIS)거리 골목안에 총을 들고 경계중인 군인.

핸드마이크를 들고 연설문을 낭독하는 여성은 낭독이 끝나자마자 집회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경호원에 둘러싸인 경찰 고위관계자의 검문을 받는다. 처음에는 몇 마디 말로 대응해보지만 곧 순순히 신분증을 제시한다. 만약 끝까지 신분증 제시를 거부했다면 그녀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곳 터키에서 경찰에 체포당할 경우 재판 없이 몇 개월을 경찰서에서 온갖 회유와 협박, 그리고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


▲경찰 고위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이 집회연설자의 검문을 하고 있다.

시위대와 같은 수(비밀경찰의 수를 포함하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의 경찰이 시위 참석자, 언론사 기자들과 뒤섞여 비디오카메라 등을 이용해 시위 구석구석을 담는다. 그리고 집회가 끝난 후 기자는 상당거리를 미행당하며 시내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통역의 말에 의하면 이제부터는 사진이 담겨있는 노트북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의 도난에 대비해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고 한다. 카페에 들어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통역의 조언에 따라 벽을 등지고 사진 등을 편집하고 있다.


▲두 명의 경찰이 촬영하는 기자를 캠코더를 이용해 촬영하고 있다. 목격된 캠코더의 수는 10여대. 대부분이 경찰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시위 취재를 가는 것 자체가 우려할 만한 일이었다. 지난 10월 2일경 이스탄불에서는 독방에 수용되어 있는 쿠르드 노동자당의 당수 오잘란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는데 시위과정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있었다. 사망한 청년은 19세의 아틸라.


▲10월 2일 이스탄불 시위에서 경찰의 총을 맞고 사망한 19세의 알틸라.

이곳은 쿠르드인의 수가 많고 쿠르디스탄의 수도라고 불리우는 곳이기에 충돌이 일어난다면 이스탄불보다 강경한 진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10월 29일로 예정되었던 집회가 오늘로 연기된 상황이기에 더욱 충돌이 예상되었다.

다행히 시위대는 오잘란의 석방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무사히 집회는 끝났고 시위대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이 한 달 후 어디에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대한민국의 형제 국가 터키, 중동지역에서 가장 민주화된 국가 터키, EU가입을 준비하고 있는 터키는 현재 계엄상황인 듯하다.


▲기자를 촬영하고 있는 경찰을 촬영하자 얼굴을 가리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