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10/11/03 19:24
Filed Under 손가락 수다방

홍실이의 청탁으로 노건연 소식지에 보낸 안로브 참가기이다. 활동가도 전문가도 아닌 것 같은 모호함에 답답한 요즈음의 나에게 고민의 깊이를 더 하게 만든 시간이었다. 지금이야 그냥 이대로 모호함에 괴로워하며 지내겠지만 그래도 말하는 것 만이라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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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였다. 학교 일로 오가는 학회 말고 다른 나라의 활동가들을 만나러 가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은. 특히 아시아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학회에서도 북반구의 경제 대국 출신 연구자들이 발표하는 주제와 아시아와 남반구의 연구자들이 발표하는 주제는 달랐다. 세계화된 시장에서 생산에 있어서의 역할이 국가별로 나누어지게 되고 위험과 유해물질은 수출되고 이동되었고 싼 노동력도 이동했다. 이러한 이동에 따라 연구의 주제도 사람들의 발표 내용도 달랐던 것이다. 이황화탄소 노출의 주범인 레이온 공장이 중국으로 수출되고 한국에도 동남아에서 온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학자들의 논문이 아닌 실체가 궁금했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아시아 노동재해 피해자 권리를 위한 네트워크(안로브, ANROAV)’의 연례회의가 열리는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안로브에 참석한 인원은 120여명 정도였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필리핀, 인도, 캄보디아, 태국, 뉴질랜드, 미국, 호주, 인도네시아, 미국, 캐나다, 벨기에 등에서 많은 노동보건단체 활동가들과 노동조합 활동가, 노동재해 피해자등이 모였다. 다양한 말과 다양한 문화, 다양한 사례와 경험이 나누고 섞이는 장이었다고나 할까? 

아시아 각국의 노동보건 현안에 대한 이야기로 회의는 시작되었다. 2천 900만 인구에 1천 800만 노동자가 있는 인도네시아의 서부 자바 주에 관련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의사가 3명밖에 없고 근로감독관이 128명밖에 없어 관리감독이 어렵다는 인도네시아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이 되었다. 인도에서는 연마공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규폐증에 걸려 1년간 13명이 사망했고 홍콩에서도 보석을 가공하는 사람들에서 규폐증이 발생했다. 중국은 배터리 공장의 집단 카드뮴 중독이 발생했고 원인규명을 요구하고 책임을 묻는 집회에 용역 깡패가 동원 되서 일부 참가자들이 다치기도 했다. 중국 활동가들은 공안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활동하기 어렵다며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한국 반올림의 투쟁보고가 이어졌고 미국과 유럽의 노안 단체들의 활동 내용에 대한 보고가 이어졌다. 

미국과 유럽은 주로 이주 노동자에 대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다양한 단체들이 노동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교육 자료를 개발하고 기술적 지원을 하고 있었다. 미국은 마낄라도라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활동을 하고 있었고 최근 ‘Doubt is their product (한국어판 제목: 청부과학)’의 저자인 데이비드 마이클스가 직업보건안전청(OSHA)의 수장이 되면서 거는 기대가 있는 것 같았다. 유럽은 EU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노동조건에 대한 규약들에 대한 개입과 연구사업, 유기용제 사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소개했고 노동조합이 안전보건문제보다 돈에 더 관심이 많다면 비판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하루 반 정도의 시간동안 폐질환, 전자산업, 피해자 조직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주제별 워크숍이 실시되었다. 내가 참여했던 전자산업 부분에서는 유해성을 파악하고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참여형 교육이 실시되었다. 현장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할 건지에 대한 고민을 나누면서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그들의 위험을 인지하고 대응할 수 있는 방식을 스스로 찾아가게 하는 교육방식이 신선하다는 느낌이었다. 인도네시아 노동청(?)에서 집회를 하는 것으로 3일간의 일정은 마무리가 되었다. 

사실 공식적인 행사도 훌륭했지만 빡빡한 일정 중 식사시간이나 잠깐의 휴식시간에 이루어진 다른 활동가들의 대화가 더욱 기억에 남는다. 한국에서 아직도 트리클로로에틸렌을 사용하냐고 진지하게 묻던 미국의 한 칼럼니스트는 20년 전에 미국에서 금지된 화학물질을 아직도 한국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는 것 같았다. 몇 년 전에 이주 노동자가 TCE에 의한 스티븐존슨 증후군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며 놀라기도 했고 노동조합이 이 화학물질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강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노동조합이 독하기 그지없는 TCE를 아직도 사용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필리핀의 금속노조에 있는 활동가는 우리에게 한진중공업에 대해 물었다. 사내 하청 노동자만 2만 명이 넘는다는 수빅 조선소에서 끊임없이 사망사고가 발생하고 있는데 한진에서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구조조정으로 한국 사업장의 상황도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고 한국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니 많이 안타까워했다. 노동보건의 문제는 기본권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조합 내에서나 전체 노동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한국내 필리핀 이주노동자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나는 건강 상담을 하면서 만난 필리핀 노동자들이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고 장시간노동, 야간고정 근무 등을 하고 유해 작업을 도맡아서 하는 매우 나쁜 상황에 처해있다고 했고 그는 그런 일자리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지고 가는 것이 필리핀 사람들이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인도네시아의 전자 산업 노조와 금속 노조의 활동가는 한국의 총파업에 대해 물었고, 산재 보험 제도에 대해 물었다. 총파업도 산재보험도 이름에 걸 맞는 만큼의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다는 이야기에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이는 것 같았다. 제도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그들의 눈에 간절함이 담겼다. 한국과 인니의 최저임금 결정 방식이 똑같고 이에 대응하는 노동계의 투쟁도 똑같다는 사실에 같이 쓴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랬다. 어디는 통계도 없고, 어디는 통계가 있어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디는 제도가 없고 제도가 있어도 활용이 안 되는 나라도 있었다.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한국처럼 위장취업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지 고민하는 활동가도 있었다. 회사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지만 어디서나 용역깡패한테 맞아서 다친 사람들이 있었다. 똑같은 이름을 가진 회사에서 일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죽어간 노동자들이 있었다. 신분을 밝히기가 어려워하는 활동가들이 있었고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며 답답해하는 활동가도 있었다. 석면 공장 옆에 살다가 6형제 중 4명과 부모가 중피종으로 사망한 벨기에 사람과 석면 공장 옆에 살다가 40대 초반에 환자가 되어 힘든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만나기도 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날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는 수천명이 모이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1998년 민주화 시위를 통해 7선에 성공한 수하르토의 독재를 끝장냈던 민중들이 지금의 대통령이 여전히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하고 있고 자기 역할을 못하고 있다며 한 시위였다. 전경들이, 살수차가, 최루탄이 난무했다. 3일간 반둥에서 이루어졌던 많은 만남에서도 그리고 떠나는 날의 그 모습에서도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겹치고 있었다. 역사의 흐름 어딘가에 우리는 각자 서 있었다. 상황도 다르고 조건도 다르고 부딪히고 있는 문제도 달랐지만 지금, 각자가 서 있는 그 지점이 중요했다. 그 지점에서 발을 딱 붙이고 눈을 부릅뜨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뚜벅뚜벅 하는 것, 그것이 현재의 아시아의 다양한 국가의 활동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이었다. 그 지점에서 말하고, 조직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짧은 3일간의 만남이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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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3 19:24 2010/11/03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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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naaeun님의 트윗

    Tracked from @naaeun / 2010/11/05 09:43  삭제

    https://blog.jinbo.net/ptdoctor/522 "말하고, 조직하고, 투쟁하라" ‘아시아 노동재해 피해자 권리를 위한 네트워크(안로브, ANROAV)’ 참가기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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