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4일,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노인 대중교통 무임승차의 피크타임 제한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고 출퇴근 시간의 혼잡을 줄이겠다는 명분이라더군요.
지하철이 혼잡하니 노인들은 나오지 말거나, 노인들이 꼭 필요하면 돈을 내고 타라는 게 에너지 위기 대응의 대책이 될 수 있을까요? 설령 그렇게 해서 지하철 혼잡도를 덜 수 있다손 치더라도, 특정 세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까요?
에너지 위기에 대응한다는 정부가 법 제정 이후 29년 만에 석유 판매 가격 상한제를 전격 실시한 것도 함께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이는 냉정하게 말해 에너지 절약이라는 국정 과제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정책입니다.
기름 가격을 억지로 눌러놓으면 사람들은 차를 계속 끌고 나옵니다. 나라 곳간을 털어 자가용 운전자의 기름값을 보전해 주면서, 정작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어르신들에게는 혼잡하니까 피크타임엔 돈 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상식적일까요?
한국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싱가포르
제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는 우리와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피크타임을 피해서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에게는 요금을 받지 않기로 한 겁니다.
승객이 몰리는 지하철 피크타임은 평일 오전 7시 30분부터 9시까지입니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북동선(NEL) 6개역과 셍캉-풍골 경전철(SPLRT)의 모든 역에선 평일 7시 30분 이전에 타면 공짜입니다. 피크타임이 지난 후인 평일 오전 9시에서 9시 45분 사이 역시 공짜입니다. 다른 노선 역시 오전 7시 45분 이전에 타면 최대 50%까지 요금을 감면받을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왜 이러는 걸까요? 이건 철저히 계산된 수요 관리 전략이자 국가적 에너지 절감 대책입니다.
피크타임에 승객 수요에 맞춰 열차 운행을 무작정 늘리는 것은 엄청난 비용과 사고 위험이 따릅니다. 반면 승객을 분산시키면 기존 열차로도 충분히 쾌적하게 운영할 수 있습니다. 추가 투자 없이 기존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니 지하철 공사 입장에서도 남는 장사입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고유가 시대에 공짜 지하철은 자가용 운전자를 대중교통으로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유인책입니다. 차를 집에 두고 지하철을 타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국가 전체의 에너지 소비는 줄어듭니다. 싱가포르에서 이 제도가 도입된 후, 전체 승객의 약 8%가 피크타임을 피해 무료 시간대로 이동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내 옆에 서 있는 사람 10명 중 한 명만 사라져도 숨통이 트이는 법입니다.
피크타임 피하면 지하철 무료, 한국은 왜 안 되나
이 제도 덕분에 기업들의 유연 근무제 도입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직원이 일찍 출근해서 교통비를 아끼겠다는데, 회사가 출근 시간을 조정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정부가 정책적으로 장려만 하던 유연 근무제가 요금 혜택이라는 실질적인 보상을 만나 꽃을 피운 셈입니다.
한국이 특정 세대의 특정 시간에 대한 혜택을 박탈하는 규제와 제한을 선택했다면, 싱가포르는 특정 시간에 혜택을 부여하는 보상을 통해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습니다.
한국의 방식은 자칫 세대 간의 갈등으로 번질 우려가 있습니다. 노인들 때문에 출근길이 힘들다는 식의 비난 말이죠. 하지만 싱가포르처럼 일찍 타는 사람에게 혜택을 주면, 이는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부지런함과 선택의 문제가 됩니다.
한국과 싱가포르 두 나라 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상태입니다. 노인들의 이동권 보장과 그로 인한 비용 부담에 대한 고민 역시 비슷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지하철 이용과 관련한 세대 간 갈등은 없습니다.
한국은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공짜라서 수시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노인으로 인한 교통 혼잡과 비용 부담, 세대 간 갈등이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지하철을 이용하지 않거나, 지하철이 없는 지역에 사는 노인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60세 이상을 노인의 기준으로 정하고, 지하철이나 버스 등 교통비의 절반을 감면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노인의 교통비 부담을 줄여 주면서도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라 요금 일부를 부담하게 함으로써 노인들이 필요 이상으로 지하철을 이용하는 건 제한하고 있는 겁니다.
에너지도 아끼고, 지옥철도 해결하고, 시민들의 주머니 사정까지 챙길 수 있는 길. 싱가포르는 이미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손해 보기 싫으면 나오지 말라는 것과 일찍 나오면 돈을 아껴준다는 것 중 어느 것이 실제로 더 효과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정부가 국민을 대하는 기본 태도 하나만큼은 싱가포르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크타임을 피하면 지하철 이용이 무료, 노인 일괄 무료가 아닌 교통비 감면을 통한 수익자 일부 부담 등 싱가포르에서는 이미 적용해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는 정책을 우리나라라고 못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 정부의 긍정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