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분에 대해선…위기는 결코 아니라고 보죠."
그의 답은 생각보다 빨랐다. 기자가 원-달러 환율에 대해 물었을 때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1500원을 넘어서고 있는데, 시장에선 위기라고 한다"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이어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등을 들어가며 현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그는 "(당시에는) 외화가 부족해서 빚을 갚기 위해 달러를 사야 했던 구조였지만, 지금은 투자를 위해 달러를 사는 구조"라고 했다.
이승헌 전 한국은행 부총재(숭실대 교수). 한은에서만 33년을 일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은에 들어와서, "처음 몇년 동안 (한은 생활이) 너무 어려웠다"라면서 "대학에서 준비한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더라"라고 했다. 국제금융시장과 정책 기획에 정통하다는 평가와 함께 지난 코로나 위기 때 선제적인 금리 인상과 물가 안정을 위한 긴축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숭실대 경제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를 지난달 19일 만났다.
"조금 전까지 강의하고 왔다"라며 기자를 맞이한 그는 1시간 30분이 넘도록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면서도 담담하게 풀어갔다. 그와의 대화는 숫자를 놓고, 확인해 가는 경제 인터뷰가 아니었다. 돈의 본질에서 시작해 환율, 부동산, 한국 경제의 구조, 중앙은행의 역할 그리고 이재명 정부 경제팀에 대한 평가까지, 그의 답변은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이어졌다.
33년 한은맨의 진심어린 충고
연구실의 탁자에 앉자마자, 기자는 최근에 그가 펴낸 <돈의 변신>(연합인포맥스북스 출간)이라는 책을 내보였다. 이어 "금융과 화폐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풀어쓴 책은 드문 것 같다"라고 소감을 전하자, "30여 년 전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핵심은 하나"라고도 했다. "화폐는 고정된 게 아니라 변하는 것이고, 그 흐름을 이해해야 경제를 볼 수 있다"라는 것이다. 그는 이 책을 경제학도, 기자, 정책 실무자, 심지어 한국은행 신입 직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고 했다. "경제를 공부했어도 막상 돈의 전체 그림은 잘 안 잡힌다. 그래서 전체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환율 얘기가 나왔다. 요즘 시장과 정치권 모두 민감하게 바라보는 원-달러 환율 1500원대 문제였다. 질문은 단순했다. "지금의 1500원 환율, 위기인가?"라고. 이 전 부총재의 답은 단호했다. "두 가지 포인트인데, 하나는 위기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상황을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선상에 놓는 건 맞지 않다고 했다. 당시에는 외화가 부족했고, 단기외채를 갚기 위해 달러를 울며 겨자 먹기로 사야 했던 구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은 달러가 없어서 사는 게 아니라, 투자하기 위해 사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과거의 환율 급등이 '부채 상환의 공포'에서 나왔다면, 지금의 달러 수요는 '자산 배분과 노후 준비'에서 나온다는 설명이었다. 그의 설명은 더 구체적이었다.
"한국의 50대, 60대는 지금 경제의 중추이고 동시에 은퇴를 준비하는 세대예요. 연금을 비롯해 개인투자 등 노후의 현금 흐름을 만들기 위한 거예요. 그런데 한국 주식만 갖고 있으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위험 관리 차원에서도 미국쪽 자산을 담을 수밖에 없어요."
그는 서학 개미의 미국 주식 투자 확대를 두고 일부 정치권에서 "고환율의 원인"이라고 몰아가는 시선을 사실상 반박했다. "그건 투기라기보다 포트폴리오 투자"라는 것이다. 이미 시장은 열려 있고, 글로벌 포트폴리오에서 미국 자산 비중이 큰 현실을 거스를 수 없다는 말이었다. 어려운 경제학 용어를 늘어놓기보다, 한국 사회의 저축 구조와 은퇴 세대의 현실을 먼저 꺼내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원-달러 환율 1500원 시대 위기라고?
물론 그는 지금 환율 수준을 아예 정색하고 "정상"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배경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고 했다. 그의 판단으로는 한국의 저축 초과 구조, 국내 투자 부진, 미국 자산 선호 같은 흐름만 놓고 보면 원-달러 환율이 1300원대 중반 정도가 하나의 기준선일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 트럼프 변수, 관세 압박, 지정학적 전쟁 위험, 유가 상승 같은 외부 충격이 얹히면서 1500원대까지 뛴 것이라는 분석이다.
"1500원 이상은 펀더멘털에 비해 좀 높은 수준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위기라고 볼 일은 아니에요. 시장은 늘 오르내리며 가격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죠."
대화는 자연스럽게 부동산으로 옮겨갔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한국 경제의 돈의 질적 변신'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지금 한국 경제가 은행 중심, 부동산 중심의 자금 흐름에서 조금씩 생산적 금융과 미래산업 투자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돈은 항상 이동한다"라면서 "문제는 그 돈이 생산적인 곳으로 가느냐, 아니면 비 생산적인 곳에 머무느냐는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책에서 마지막 제언이 지금 정부가 말하는 생산적 금융과 닿아 있다"라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축은 많은데 국내에서 그 돈을 받아 생산적으로 투자할 곳이 부족한 게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라는 진단이었다. 그래서 돈이 부동산에 머물거나 해외로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결국 부동산 문제도 단순히 집값의 문제가 아니라, 자금이 어디로 흐르느냐의 문제로 읽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그의 말도 귀에 걸렸다. 현직에 있을 때는 "말 한마디가 곧 시장 개입으로 읽힐 수 있어서 뻔한 얘기밖에 못 했다"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시장이 과열된 해석에 휩쓸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말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환율이 오르면 곧바로 위기론, 투기론이 쏟아지고, 유튜브와 정치권이 이를 증폭하는 상황에서, 전직 중앙은행 인사로서 구조적 배경을 설명하는 게 오히려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 경제정책 방향? "민생중심으로 정책 설계는 맞다"
이재명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러웠다. 특정 정책의 디테일까지 평하는 것은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거시적 방향에 대해서는 비교적 분명했다.
"지금 정부 경제팀이 굉장히 잘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매크로적(거시경제적)으로 단단하고, 마이크로적(미시경제적)으로도 잘 아는 분들이 설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이제는 부동산 중심에서 금융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고, 국민들도 직접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시대죠. 또 재정을 확대하고 민생 중심으로 정책 자체를 설계하는 방향도 맞다고 봐요."
책에서 강조했던 생산적 투자, 미래 산업으로의 자금 이동, 환율 변동성에 대한 시장 구조 보완 같은 제언이 지금 정부의 정책 방향과 맞닿아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다만 그는 끝까지 신중했다. "디테일은 더 세밀하게 봐야 한다"라면서도, "큰 방향 자체는 맞다"고 평가했다.
인터뷰 말미,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왔다. <돈의 변신>은 단순히 화폐의 역사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돈이 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한국 경제의 위기와 기회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숭실대 연구실에서의 긴 대화 역시 그 연장선에 있었다. 환율도, 부동산도, 중앙은행도 결국은 같은 질문으로 모였다. "돈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라고.
이승헌 전 부총재는 그 질문 앞에서 "서둘러 '위기'와 '공포'를 말하지 말자"라고 했다. 위기라는 말보다 먼저 구조를 보자고 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지금 한국 경제를 읽는 가장 차분한 방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