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은 대한민국 재정사에 남을 해다. 국세수입이 2026년 390조 원에서 2027년 584조 원으로 늘어난다(본예산 기준). 반도체 기업들의 실적 개선에 힘입은 법인세 급증이 주된 요인이다. 불과 한 해 만에 50%가 증가한다. 반도체 '슈퍼사이클'(반도체 업황이 장기간 이어지는 큰 호황 국면을 가리키는 말) 덕분이다.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3%를 넘고, 물가 상승분까지 포함한 명목성장률은 15%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성장도 좋고 세수도 넘친다.
세금은 넘치는데, 지갑은 비어간다
하지만 국민은 체감하지 못한다. 언론은 이를 '고용 없는 성장'이라고 부른다. 한가한 소리다. 전체 취업자는 늘었지만, 청년 취업자는 계속 줄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26년 8월 15~29세 청년 취업자는 1년 전보다 14만 3천 명 줄었다. 청년 취업자 감소는 46개월째, 청년 고용률 하락은 28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언론은 '상대적 박탈감'과 '포모'(FOMO·자신만 뒤처지거나 기회를 놓칠까 봐 느끼는 불안감)도 이야기한다. 역시 한가한 소리다. 상대적 박탈감은 나는 10만 원 벌었는데 옆 사람은 1억 원 벌었다는 이야기다. 물가를 반영한 실질 근로소득은 올해 1분기 -1.7%, 2분기 -2.1%로 두 분기 연속 줄었다. 빚을 감당 못해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조정을 신청한 사람은 3년 새 56% 늘었고, 2026년 상반기에만 벌써 9만 7천 명을 넘어섰다. 절대적 박탈이다. 2026년은 훗날 반도체로 인한 새로운 소득불평등 원년으로 불릴 만하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국가 곳간은 넘친다. 소득불균형을 해소할 돈도 있다. 그래서 2027년 예산안을 복지 분야 중심으로 뜯어본다.
늘어난 돈은 복지로 가지 않았다
2027년 총지출은 821조 원으로 12.8% 늘었지만, 총수입은 881조 원으로 30% 늘었다. 통합재정수지(정부의 모든 수입에서 지출을 뺀 지표로, 국민연금 등 사회보장기금의 흑자까지 포함해 계산한다)는 올해 본예산 기준 52.7조 원 적자에서 내년 59.9조 원 흑자로, 오랜만에 큰 폭으로 흑자 전환한다. 국가채무비율(국내총생산 대비 국가가 진 빚의 비율)도 당초 정부 계획상 2027년 53.8%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됐지만, 이번 예산안에서는 오히려 48.3%로 낮아졌다. 총지출을 12.8%나 늘려도 재정여력은 더 늘어난다.
사회복지 분야는 244조 원에서 267조 원으로 23조 원, 9.4% 늘었다. 16개 분야 가운데 하위권이며, 총지출 증가율 12.8%에도 못 미친다. 복지지출은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와 법으로 정해진 급여(법정급여) 때문에 저절로 늘어나는 부분이 커서 보통 총지출보다 더 많이 늘어난다. 그런데 세수가 50% 늘어난 해에 복지는 9.4% 늘어났다. 늘어난 돈이 복지로 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늘어난 복지예산 23조 원, 어디로 갔나
복지예산 증가분 23조 원을 뜯어보자. 핵심은 인구구조와 법률 때문에 자동으로 늘어난 돈과, 정부가 정책적으로 새로 선택한 돈을 구별하는 것이다.
공적연금 6.4조 원
가장 많이 늘었다. 국민연금 5조 원, 공무원연금 1.3조 원이다. 현 정부의 정책 의지와는 무관하다. 관련 법에 따라 저절로 늘어나는 돈이라 정부의 재량적 선택이 개입할 여지가 사실상 없다. 노인이 늘고 물가가 올랐다는 이야기이니 넘어가자.
기초연금 2.5조 원(노인 부문)
마찬가지로 노인인구 증가와 물가 상승으로 설명이 끝난다. 다만 지급 방식이 바뀌었다. 올해는 소득 하위 70% 어르신에게 약 35만 원을 일률 지급했다. 2027년에는 70% 이하 수급자를 상·중·하로 나눈다. 상위는 올해와 같은 약 35만 원, 중간은 물가상승률만 반영한 36만 원, 하위는 그보다 조금 더 오른 38만 원이다. 소득이 높은 어르신 몫을 소득이 낮은 어르신에게 더 준다니 얼핏 합리적으로 보인다.
문제는 가장 가난한 노인이다. 지난해 기초연금과 생계급여(기초생활보장제도의 핵심 급여로, 소득이 일정 기준 이하인 가구에 최저 생계비를 지원한다)를 동시에 받은 노인이 78만 명을 넘는다. 이 가운데 99.8%는 기초연금을 받은 만큼 생계급여가 깎였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소득인정액에 기초연금 등 다른 소득을 합산해 부족분만 메워주는 방식(보충급여 원리)이라, 기초연금이 오르면 그만큼 생계급여가 줄어드는 구조다. 그래서 이들에게 기초연금을 3만 원 더 줘도 실제 가처분소득은 거의 늘어나지 않는다.
반면 상위 소득자 기초연금은 물가 인상을 고려하면 실질 삭감됐다. '상박(上薄)'은 확실하고, '하후(下厚)'는 제한적이다. 기초연금은 국민연금과 기초생활보장 사이에 끼어 있는 애매한 제도라 원래 양쪽과 조금씩 겹친다. 이번 개편으로 기초생활보장과 겹치는 부분이 더 커졌다. 중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기초생활보장 4.8조 원
24조 원에서 28.8조 원으로 19.9% 늘었다. 정부의 자랑과 실제 평가가 가장 엇갈리는 부문이다. 정부는 기준중위소득(국민 가구를 소득순으로 세웠을 때 한가운데 가구의 소득을 기준으로 정부가 고시하는 값. 실제 중위소득과는 산정 방식이 달라 별도로 '기준'이라는 말이 붙는다)을 6.7% 올린 덕이라고 자랑한다.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기초생활보장을 크게 강화했다는 정부 말을 믿지 않는다.
첫째, 생계급여 기준이 32%에 묶였다. 기초생활보장은 소득이 중위소득에서 일정 수준 이상 떨어진 사람에게 국민 최저선의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다. 만약 중위소득이 월 300만 원이면 중위소득의 50%는 150만 원이고, 보통 그 아래를 빈곤층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초생활보장의 핵심인 생계급여를 빈곤층, 즉 중위소득 50% 이하 전체에게 주지 않는다. 기준중위소득의 32% 이하에게만 준다. 2026년 1인 가구 기준중위소득은 약 256만 원이다. 35%라고 해도 90만 원도 안 되는 빈곤층이다. 그런데 생계급여 자격은 32% 이하, 소득 약 82만 원 이하에만 생긴다. 모든 국민의 최저선을 지키자고 만든 제도에서, 소득이 83만 원만 돼도 소득이 너무 많다고 생계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윤석열 정부는 당시 30%였던 생계급여 기준을 32%, 33%, 35%까지 단계적으로 올리겠다고 국정과제로 발표했고, 실제로 32%까지 올렸다. 이재명 정부라면 최소한 그 로드맵보다는 더 올리는 게 원칙적으로 맞는 방향이다. 그런데 전 정부가 2026년까지 하겠다고 했던 35%를 현 정부는 2030년까지 하겠다고 늦췄다. 그러고도 2027년에도 32%다. 소득양극화 원년에, 국세수입이 50% 증가하는 해에, 전 정부 로드맵도 이행하지 않으면서 기초생활보장을 강화했다고 자랑하기는 어렵다.
둘째, 기준중위소득은 실제 중위소득이 아니다. 빈곤층이 홍길동도 아닌데 중위소득을 중위소득이라 부르지 못하고 앞에 '기준' 자를 붙였다. 실제보다 낮은 행정적 기준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실제 중위소득과의 격차를 6년에 걸쳐 줄이는 산식을 도입했다. 그 방식은 2026년 종료됐고, 2027년부터 적용되는 새 산식에는 격차를 언제까지 해소한다는 목표가 없다. 더구나 올해는 명목성장률이 15%를 넘길 수도 있는 해다. 실제 중위소득이 크게 오를 수 있다. 이런 해에 기준중위소득을 6.7%만 올리면 격차는 줄어들기는커녕 벌어질 수 있다. 초성장기에 가만히 있으면 빈곤선은 뒤로 밀린다.
기초생활보장 4.8조 원 증가에는 의료급여 중증장애인 부양의무자(수급자를 부양할 법적 의무가 있다고 간주돼, 그 소득·재산이 수급 자격 심사에 반영되는 가족) 기준 폐지, 주거급여 기준임대료 인상 같은 긍정적 조치의 몫도 있다. 그러나 제한적인 기준중위소득 인상 그리고 물가와 수급자 자연증가로 더 많은 부분이 설명된다. 최소한 생계급여에서는 더 많은 사람을 더 두텁게 보호하겠다는 결정의 흔적은 없다.
주택 5.6조 원
14.5% 늘어 공적연금 다음으로 증가액이 크다. 대부분 건설임대주택 증대분이다. 윤석열 정부는 "주택은 임대하는 게 아니라 구매하는 것"이라는 철학으로 구입 지원 예산은 크게 늘리고 임대 지출은 반토막 냈다. 임대주택 지출을 다시 늘린 것은 긍정적이다. 23조 원 가운데 정책 의지가 분명히 읽히는 대목이다.
고용 0.8조 원
고용 부문은 25조 원에서 25.7조 원으로 7800억 원, 3.1%만 늘었다. 물가를 감안하면 사실상 제자리다. 정부는 조기재취업수당 등 비효율적인 실업급여 지출을 개혁하면서 금액이 줄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구조조정이 필요한 측면은 있다. 그러나 비효율을 정리하는 일과 아낀 돈을 다른 고용대책에 쓰는 일은 별개다. 이 숫자 하나가 2027년 예산안이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말해준다.
새 아이디어가 아니라 기존 로드맵을 돌아보자
정부의 곳간은 넉넉하다. 미래대응기금(반도체 호황으로 예년 추세를 웃돈 초과 세수를 별도로 적립하는 정부 기금)은 무려 162조 원이다. 이 가운데 당장 사업에 쓰지 않고 여유자금으로 쌓아두는 돈만 100조 원이 넘는다. 정부는 반도체 호황이 꺾일 2028년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생계급여 32%를 35%로 올리는 데 필요한 돈은 이 기금의 규모와 대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한쪽에서는 100조 원이 넘는 돈을 미래를 위해 쌓아두면서, 다른 쪽에서는 생계급여의 문턱을 32%에 묶어두었다. 산업·중소기업·에너지 분야는 9.4조 원, 30% 늘었다. 에너지·자원개발이 5조 원으로 95%, 산업혁신지원이 2.9조 원으로 34.5% 늘었다. 반도체와 에너지로 돈이 쏟아졌다. 정부가 힘을 실은 곳은 복지보다 산업과 에너지였다.
지금은 절대적 박탈의 시기다. 소득이 줄고 빚이 느는 사람이 늘어나는데 국세는 한 해 194조 원 늘었다. 능력도 있고 돈도 있다. 100조 원을 기금에 저축할 여유가 있는 정부가 생계급여 기준을 32%에서 35%로 올릴 돈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할 일은 이미 나와 있다. 전 정부가 세운 생계급여 35% 로드맵을 앞당기고, 전전 정부가 세운 기준중위소득 현실화 로드맵을 다시 꺼내면 된다. 실업급여 구조조정으로 아낀 돈은 고용보험 밖 청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못 찾은 청년에게 돌리면 된다. 새 아이디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있는 로드맵을 따를 의지가 필요하다.
세수 584조 원의 해에 복지 증가율 9.4%는 숫자가 아니라 선택이다. 그 선택을 바꾸는 일은 이제 국회 몫이다.
필자 소개 :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정부 예산서를 분석하는 타이핑 노동자이며 <소셜 코리아> 편집위원입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예산서, 결산서, 집행 내역을 매일 업데이트하고 분석하는 일을 합니다. 재정 관련 정책이 법제화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덕업일치 타이핑 노동자입니다. 주요 저서로 <경제뉴스가 그렇게 어렵습니까>가 있고 공저로 <한국의 신복지체제의 재정전략>, <지방의정백과> 등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