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거리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하며 완연한 봄이 찾아왔지만, 대한민국 경제는 매서운 한겨울의 한파 속에 갇혀 있다. 현재 우리 경제는 고유가, 고환율, 고물가, 고금리에 더해 공급망 붕괴까지 겹친 사상 초유의 '5중고(五重苦)'에 직면해 있다. 1970년대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국민소득 수준은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경쟁력 있는 산업도 꽤 늘어났다. 하지만 1970년대 전 세계가 석유파동으로 겪은 스태그플레이션 공포 이상의 엄청난 충격이 예견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 인식과 대응은 너무나도 태평해 보인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어떤 위기 앞에 서 있으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은 중동에서 시작된 전쟁으로 인해 세계 석유 물동량의 핵심인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 데 있다. 벌써 한 달째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유조선의 발이 묶였다. 특히 중동 산유국들의 정유 시설과 카타르의 나프타(Naphtha) 생산 시설이 피격을 당하면서,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비닐이나 플라스틱 제품의 국내 공급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우리는 원유의 70.7%, 정제 석유 제품의 66.2%를 중동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소규모 개방 경제 국가다. 지구 반대편의 전쟁이 당장 우리 집 쓰레기봉투 대란이란 가짜뉴스의 소재가 되고, 50%나 급등한 페인트 가격으로 직결되는 것이 바로 공급망 붕괴의 무서운 민낯이다.
1530원 환율, 100달러 이상의 유가가 만든 '초대형 인플레'
공급망 붕괴는 필연적으로 물가 폭등을 부른다. 현재 두바이유는 배럴당 100달러를 훌쩍 넘어선 수준에서 움직이고 있다. 연초 60달러 수준에서 70% 이상 상승한 수준이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은 1530원까지 치솟았다. 우리가 수입하는 물건의 가격 자체가 올랐는데, 그 물건을 사 오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달러의 가치마저 폭등했으니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일반적으로 환율이 오르면 수출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 기업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국책연구기관인 IBK경제연구소의 작년 보고서에 따르면, 환율이 1500원 이상으로 높아질 경우 3개월 뒤 소비자물가는 최대 7% 치솟고, 9개월 뒤 수출은 오히려 9%나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자재를 수입해 가공한 뒤 수출하는 우리 산업 구조상, 수입 원가가 너무 높아져 수출 경쟁력마저 갉아먹기 때문이다. 결국 수입 물가 상승은 바나나 등 먹거리 물가부터 시작해 서민들의 장바구니를 텅 비게 만들고 있다.
거품 꺼지는 주식시장과 고금리의 역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리마저 요동치고 있다. 전쟁의 여파로 미국의 재정 적자가 늘어나고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금리 인하 기대감은 사라졌고, 장기 금리가 서서히 오르고 있다. 미국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한때 4.4%까지 치솟았다. 이는 가계 대출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로 연명하던 우리 경제의 약한 고리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금리가 오르면 빚을 진 서민들과 중소기업들은 이자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도산할 위험이 커진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청년들과 서민들이 뛰어든 주식 시장의 붕괴다. 한때 6300선까지 치솟았던 코스피는 AI와 반도체 거품이 꺼지며 5000선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최근 구글에서 AI 모델의 메모리 사용량을 6배나 압축하는 '터보 퀀트' 기술을 발표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반도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우리 주식 시장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 두 기업이 국내 주식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빚을 내어 투자(빚투)했던 개인 투자자들의 반대매매가 속출하며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반면,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시장의 거품을 이용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린 채 높은 가격에 주식을 팔고 유유히 빠져나가고 있다.
금리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금융 당국
더욱 절망적인 것은 우리 경제가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최근 반도체 호황으로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인 삼성전자가 그 대금을 국내로 들여오려 했으나, 놀랍게도 국내 금융기관들이 이 막대한 예금을 받아주기를 거부했다는 보도가 있어 시장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금융권이 오랫동안 가계 대출이나 부실한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에 치중하다 보니 생산적인 곳으로 자금을 융통할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처럼 치명적인 유동성 함정과 고환율의 압박 속에서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은 무력화되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외국 자본의 도피를 막고 환율을 방어하려면 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막대한 가계 부채를 안고 있는 서민 경제와 중소기업들이 무너질까 봐 금리를 올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금리를 내릴 수도 없는, 말 그대로 '손발이 꽁꽁 묶인' 상태다. 돈을 푼다 한들, 주식 시장이나 투기 자산으로만 몰렸다가 거품이 꺼지며 막대한 피해를 낳고 있어 정책 수단은 사실상 증발했다.
상황이 이토록 엄중함에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국가적 경제 위기에 대한 절박한 목소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의 딜레마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서 "경제가 위기다"라고 외치는 순간, 불안감을 느낀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자영업자와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는 등 진짜 경제 붕괴가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책임 있는 주체는 절제된 용어만을 사용하며 침묵하고, 서민들은 그저 영문도 모른 채 쓰레기봉투를 사재기하는 등 거대한 경제 쓰나미를 맨몸으로 맞고 있는 실정이다.
위기 대응 거버넌스 마비로 복원력 잃은 국가 경제
미국은 지난 2월 항공모함을 중동에 파견하면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미 오래 전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대비해 육상 송유관을 만들어 우회 수출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5중고를 맞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다시는 같은 위기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국제금융센터와 한국투자공사를 설립하고, 금융위원회를 강화하고,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제고하는 한편 6개월에 한 번씩 금융안정보고서를 만들어 국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등 수많은 제도와 기관을 신설했다. 그럼에도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대해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이런 기관이나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거대한 충격이 가해졌을 때 국가 경제가 다시 일어서는 힘을 '복원력(Resilience)'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 경제의 복원력은 일본 등 이웃 국가들에 비해서도 현저히 취약하다. 한국은행조차 우리나라가 글로벌 리스크 충격에 매우 약한 국가라고 공식적으로 경고했을 정도다.
우리의 복원력이 이토록 약해진 근본 원인은 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할 한국 정부의 거버넌스(국정 운영 구조)가 사실상 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국가경제회의(NEC)'와 같이 대통령과 핵심 경제 장관들이 좁은 원탁에 모여 즉각적이고 치열하게 비상 대책을 논의하는 컨트롤 타워가 존재한다. 반면, 우리는 수십 명의 인원이 넓은 국무회의장에 멀리 떨어져 앉아 마이크를 잡고 상명하복식의 형식적인 보고만 나누는 낡은 관료주의에 머물러 있다.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확대하는데 집중하는 대신, 내 임기 중에만 문제가 터지지 않기를 바라는 책임 회피(NIMTOO)와 부처 간 '칸막이(Silo)'에 갇혀 협업을 외면한다. 대통령이 반도체나 AI 같은 특정 산업만 강조하면 모든 부처가 그곳으로 맹목적으로 달려갈 뿐, 정작 경제의 기초 체력을 다지기 위해 중동 석유 의존도를 줄이거나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는, 당장 표가 나지 않는 궂은일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 우리의 참담한 현실이다. 결국 위기가 터지면 문제의 본질을 수술하기보다는, '급한 불부터 끄자'며 대기업에 유동성을 지원하거나 단기적인 건설 경기 부양책만 쏟아내 양극화만 더 부추기고 있다.
전면적 개혁의 골든타임: 에너지 독립과 구조 전환을 향해
지금은 단순히 주가 하락이나 일시적인 물가 상승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우리 경제를 억누르는 저성장, 막대한 민간 부채, 양극화라는 부실한 펀더멘털을 근본적으로 바꿔서 위기 대응능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는 이 사상 초유의 위기를 국가의 복원력을 높이고 낡은 체질을 뜯어고치는 대대적인 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첫째로 낡은 거버넌스를 타파하고, 칸막이를 허문 강력한 비상 컨트롤 타워를 구축하여 중장기적인 위기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기존의 경제 관료들로 구성된 대통령 주재 비상경제점검회의나 국무총리를 위한 비상경제본부가 제대로 기능하기 어려울 정도로 관료주의의 병폐가 심하다. 대통령과 총리가 아무리 위기를 강조해도, 다른 부서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고 상부의 지시만 기다리는 경제 관료들의 복지부동 자세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둘째, 위기를 맞아 속도감 있게 중동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정책을 펴야 한다. 늦게나마 구조개혁을 통해, 석유를 원료로 하는 플라스틱 제품의 무분별한 사용을 멈추고 친환경 종이 제품 사용을 장려하는 소비 구조 전환이 시급하다. 또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교통 체계를 개편하여 대중교통 요금은 파격적으로 낮추고 개인 차량의 운영 비용은 높이는 장기적인 수요 관리 방향을 설계해야 한다.
무엇보다 공공기관부터 솔선수범하여 앞으로 지어지는 모든 새로운 공공 건축물은 에너지를 자체적으로 자급자족하는 '제로 에너지 건물'로 짓도록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모두 석유파동 당시부터 수십 년간 대책으로 제시된 것인데 정부 캐비넷에 먼지가 쌓여있는 자료들로만 남아 있다. "벼락을 맞았다"며 피할 수 없었던 외부 요인 탓만 하며 과거의 관행에 머물러서는 이 혹한기를 결코 견뎌낼 수 없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국가의 복원력을 튼튼히 다지고, 과감한 에너지 체질 개선을 밀어붙일 때 비로소 대한민국 경제에 진정한 봄이 찾아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