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못가고 한국에 온 김명복씨. 사진 이정용 기자
15살 때 인민군 징집됐다
한달 만에 포로로 붙잡혀
남도 북도 아닌 인도 거쳐 브라질로
고향 찾는 과정 그린 ‘리턴 홈’
주인공으로 지난달 한국 입국해
“고향 평북 땅 생전에 밟아봤으면”
1954년 2월의 현실은 소설과 같았다. 한국전 당시 제3국행을 택한 전쟁 포로 77명(중국인 포함 88명)이 인천항에서 ‘아스투리아스호’를 타고 실제 인도로 떠났다. 이 가운데 55명이 다시 브라질로, 9명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했다. 김명복(80·사진) 할아버지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젊은 시절 김명복 할아버지. 영화사 아침해놀이 제공
10일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할아버지의 눈은 허공을 향했다. 그렇게 참전한 한국전쟁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참전 한 달도 안 돼 포로가 된 그는 이후 부산에서 거제, 영천, 마산, 중립지대(판문점) 수용소까지 여러 곳을 전전하며 3년을 보냈다. 그리고 휴전이 됐다.
그가 평생 들어왔을, 그리고 스스로도 자문했을 질문을 던졌다.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혹은 남한에 남을 수 있지 않았냐고. 한참 뜸들이던 할아버지는 판문점 수용소에서 겪은 일화를 들려줬다. “한 텐트에서 지냈던 동료가 ‘고향에 가고 싶다’는 잠꼬대를 했다가 맞아 죽었어. 한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포로가 되는 것 자체를 죄로 여기던 북한도, 고향 가고 싶단 말에 맞아 죽는 남한도 선택할 수 없었지.”
그는 자신을 받아줄 나라를 기다리며 인도에서 2년을 머문 뒤 1956년 브라질로 갔고, 최대 도시 상파울루에서 1000㎞ 넘게 떨어진 ‘오지’ 마투그로수주 쿠이아바에 정착했다. 말조차 통하지 않는 신산한 삶이었지만, 착한 브라질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둘, 딸 둘을 낳았다. 농사를 지어 자식들 대학교육까지 시켰다.
“먹고사느라 고향을 마음으로 그리워만 했어. 호랑이도 죽을 땐 고향을 찾는다는데…. 부모님은 돌아가셨겠지. 5살 터울 누이와 2살 터울 남동생은 혹시 살아 있을까? 일요일마다 다녔던 부평교회는 남아 있을까? 그냥 고향 땅만 밟아도 좋겠어.” 이내 김 할아버지는 눈물을 쏟았다. 흐느낌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5년 전 뎅기열에 걸려 삽관 치료를 받다 기도를 다쳐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미안해. 다 늙어서 무슨 꼴이람. 미안해.”
브라질 농장에서 일하는 젊은 시절의 김명복 할아버지. 0078도 인도에서 찍은 젊은 시절의 김명복 할아버지. 영화사 아침해놀이 제공
자신과 동료 생존 포로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조경덕 감독이 찍고 있는 다큐영화 <리턴 홈>(귀향)이다. 조 감독은 2009년 중증 장애인의 성적 권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섹스 볼란티어>가 상파울루 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며 시상식을 위해 찾은 브라질에서 생존 포로들의 이야기를 처음 접한 뒤 6년째 이 영화 제작에 매달리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조 감독과 함께 지난 5월 브라질을 출발해 인도, 아르헨티나 등을 거쳐 7월말 한국에 입국했고, 이 여정은 영화에 담길 예정이다. “포로생활을 하던 부산·거제·양평 등을 다니니 많이 잊었던 한국말도 기억나고, 고향 생각도 더 간절해. 13일에 판문점에 가는데 멀리서나마 고향 땅을 볼 수 있을까?”
글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