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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04/12
    나는 흙수저인가 특권층인가
    queerinternationalproletariat

나는 흙수저인가 특권층인가

나는 흙수저인가 특권층인가

97년 외환 위기 때 나는 중학생 이었다.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지만 그 전에도 삐걱 그렸던 부모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다...고 하기엔 별 기억이 남아있다 않다.

열 살이 되기 전엔 서울 변두리 산업 도시의 반 지하에서 몇년 간 살았다. 부모는 신문배달, 우유배달을 몇년 간 했는데 어느 순간 나름대로 대기업인 공장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90년대 초반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덕분에 95년 가을 수해 난민을 위해 70년대에 지어진 구식 주공 아파트에서 포도원이 가까운 또 다른 산업 도시의 베드 타운의 아파트로 분양받아 이사를 가게 된다. 그 해에 부모는 할부로 자가용을 구매했다. 정상 가족을 이뤄 보리라 꿈꾸었을 것이다.

한국 전쟁 휴전 직후에 태어난 부모의 가족사는 내게 대부분 빈칸으로 남아있다. 아빠는 중학교 때 아버지를 잃었고 강원도의 농촌 고등학교를 다니다 말았다. 그가 언제 어떻게 이 경기도의 산업도시로 오게 됐는지 알지 못한다. 휴전선 근처의 시골에서 태어나 자란 엄마 역시도. 7남매 중 여섯 째인 엄마는 국졸이었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어렸을 때 일찌감치 돌아가셨다. 조부모에 대한 기억도 희미하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기억에 없고 여덟아홉살 즈음에 돌아가신 친할머니만 어렴풋이 기억한다. 부모는 3교대를 하느라 지쳐있었지만 늘 돈 때문에 싸웠다.

외환 위기를 전후로 그들이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된, 수도권이라고는 애도 외진 동네의 아파트는 그렇게 과거로 남겨졌고 다시 전세살이가 시작됐다. 그 사이 나는 그저 그런 (소위 말하는 문제아도, 뛰어나지도 않은) 학생으로 여중 • 여고를 졸업하고 « 지잡대 » 라고 하기도 애매한 경기도의 4년제 인문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생활 내내 동기나 선배등과 근처 술집에 가본 횟수는 다섯벗을 넘지 않았다. 동아리 활동을 해보려고 했지만 당시 소위 운동권 문화는 여전히 집단주의적이었다. 시대는 2000년대를 넘어와 있었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부분의 관심사는 1) 인서울 대학으로의 편입, 2) 교직 이수 과정을 통해 교육대학원에 진학해 임용교시 시험자격 획득 (한 학번에 10%만 가능), 3) 공무원 시험…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엔 왕따가 되었다기 보다는 (절반 쯤은 그 말이 맞다)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학과 교수들의 임용 비리가 별다른 대학생활이랄 게 없는 내게도 들려왔고, 그들의 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취업과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교양 철학이나 역사학 수업을 들락거렸다. 친구들이 없었으므로 돈 쓸 일도 별로 없었다. 전문대에 진학한10대 때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기 시작했다. 재밌는 게 몇몇 수업 밖에 없었으므로 상위 10%에 들어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했다. 10년 넘게 3교대로 일하며 온갖 수당을 다 합쳐야 월급200만원을 넘을까 말까 하던 엄마의 자랑거리가 됐다. 빚은 지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다녔던 대학엔 취업용 교육대학원 말고는 없었다. 당시 역사학과 수업에 꽂혀 열심히 듣는 걸 눈여겨본 한 교수님이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면 서울에 있는 대학원에 가라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다. 이화여대를 80년대에 나온 선생은… 서울대는 가지 마라, 걔들 텃새에 못버틸 거고… 지도교수들이 너는 전혀 챙겨주지도 않을 거다… 고려대는 지나치게 마초적이다… 연세대는 삐딱한 네 성향에 맞지 않을 거다…서강대가 어떻겠니…그나마 진입장벽이 낮다. 하지만 대출을 받아야 했다. 돈 때문에 싸우는 부모를 보며 자란 까닭인지 대출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의 일이다.몇몇 계약직 알바를 전전하며 때로는 잘렸다. 커피 끓이기 싫은 티를 냈기 때문이었다. 과외. 출판행사. 영화제. ISO인증원. 학원. 무역회사. 소위 말하는 대안 공간들의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이제는 86세력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꾸린 제도적 학계 밖 공간이었다. 먹고 살 만큼 사는 사람들이 모여 공부하며 지적 수다를 떠는 곳들 이었다. 지적 허영에 눈이 멀었으면서도 그 낯설음을 감당하지 못했다. 더 이상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취직을 하려고 했던 이십 대 후반, 어디에도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럴 듯한 학벌도 없었고 인맥은 전혀 없었다. 대학 여름방학 때 공장에서 알바를 한 기억을 빼면 소위 근로 계약서도 없이 착취당하는 노동자도 아니었다.

 

다시 도망쳤다. 빚지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으므로 영미권 국가는 갈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낸지 10년이 훌쩍 넘어간다. 별로 있지도 않은 장학금 받아보겠다고 시도해 봤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돌아올 리 없었다. 주당 노동 하용시간 19시간. 여전히 내 비자는 비 유럽 연합 국가 외국인 학생이다. 가끔 지쳐 한국에 가서 만난 지인들에게 « 인터내셔널 프롤레타리아죠 » 라고 말하면 « 니가 무슨… ! », « 넌 니가 하고 싶은 걸 하잖아. » 듣는 사람의 뜨악한 표정과 더불어 불편함이 역력하다.  

 

공부를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것- 다시 말해 학력자본·상징자본을 획득하는 것 만으로 부족하다는 걸 깨닫는데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이 무지함, 정보력의 부재, 요령없음이 내 존재를 규정는 요소들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희생자 코스프레로 들릴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한 변명이 이 블로그를 개설한 이유다.

 

나는 흙수저인가 특권층인가. 흙수저를 벗어나 특권층이 되고 싶어 안달하는 그저 그런 존재인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아름다움의 미학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인터내셔널 프롤레타리아 » 라는 존재를 부러 상기시키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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