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단편과 테제(2009/8/4-17)

  • 등록일
    2009/08/18 00:26
  • 수정일
    2009/08/18 00:26

- 첫째, 논쟁 당사자의 논변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논쟁 중 빠지기 쉬운 가장 유치한 함정은 바로 논변이 아니라 상대방의 정서를 분석하려고 할 때 일어난다. 그가 지금 어떤 감정 상태인지 상관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그가 한 '말'이며, 그 말이 이끌어 가는 '논리'며, 그 논리의 '사실관계'일 뿐이다. 둘째, 상대방의 논변을 분석한 후에 결론을 항상 유보하라. 항상 의문형으로 '되물어라'. 그것이 진정 소크라테스적이다. 논쟁에 있어서 우리는 그때 이후로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한 것 같다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셋째, 절대 이기려고 하지 마라. 스스로를 진실을 찾아 가는 오디세우스라고 생각하라. 그 외에 어떤 승패에도 얽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십중팔구 평상심을 잃고 자기감정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 이를테면 '흘러넘침'의 이념이 존재하고, '빼기'(결핍)의 이념이 존재한다. 고대 이래(플로티누스)로 전자는 신적 본질이었고, 후자는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악의 본성이었다(칸트는 이 방면에서도 획기적이었다. 그는 악을 결핍으로 본 것이 아니라, '전도'로 보았다. 즉 악은 기피해야 할 것이지만 '온전한 것'이라는 거다). 기독교 신앙은 철학적 관념의 올바른 부침조차 강박적으로 만들었다. 이 관념의 분위기를 부수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로부터의 들끓음, 그것은 민중과 다중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량의 표현이며, 그것은 흘러넘치는 것이라기 보다, 자본의 숨막힐 듯한 밀도 안에서 스스로를 빼 버림으로써 거기 새로운 활력, 혁명의 숨길을 터 놓는 존재론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바와는 달리 악마야말로 저 천상의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을 뿐이다. 신과 천사는 바로 이 땅 위 빛이 없는 어딘가에서 남루한 복장을 하고, 상기된 눈을 뜨고 헤매는 자들 속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관념-해방신학에서조차-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생각이다. 차라리 이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이나 정토사상에서 더 쉽게 이념적인 적합성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 철학이 정치의 평면에 도달하는 순간은 어떤 때일까? 그러니까 이건 정치의 철학 즉 ‘정치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이것이 그렇다고 플라톤적인 철인정치가 아님을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철학의 정치가 “관념의 오솔길이 아니라 대도시의 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Deleuze).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철학의 정치를 어렵게 한다는것도 분명하다. 어떻게 이념을 저 거리의 활력과 더불어 ‘살게’ 할 것인가 말이다. 이념의 역동성을 표면으로 운반하는 것, 그것이 또한 정치술 다시 말해, 'polis-craft'일 것이다.

하나의 종합적 질문: 철학정치가 맑스/레닌이라면 정치술은 마키아벨리/한비자일 수 있는가?

 

- 시공간을 무화시키는 특이점은 물리학적 실재다. 그런데 그 특이점으로부터 모든 것이 발생한다는 사유는 새로운 것이지 않은가? 이를테면 잠재성을 취급하는 모든 발생론적 사유는 이런 식이다. 구조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조푸루아 식의 그 괴물로부터 벗어나 다른 식으로 특이점을 사유할 수는 없을까? 그러니까 좀 더 벤냐민적으로 좀 더 테크놀로지에 가깝게 말이다. 로봇공학? 아님면 영화나 홀로그램?

 

- 주체는 잔여(residue)다.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다. 피카소가 면을 통해 주체를 사유하기 전에는 그러니까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신>(1913) 이 있었던 거다(물론 이는 연대적 순서와는 상관 없다). 신체는 어떤 충만한 기관이 처음이 아니라 움직이는 잔영, 즉 잔여가 처음인 것이다. “양과 질 이전의 극화”라는 들뢰즈-니체의 테제는 따라서 콤플렉스 이전의 오이디푸스를 가리킨다. 우리-주체들은 그 오이디푸스를 완전히 다르게 변주한다. 그래서 때로 오이디푸스는 햄릿이기도 했다.

 

- 이 시기 한국사회에 그나마 존재하는 강단좌파는 부단히 스스로를 이론적으로 일신해 나가야 한다. 그들이 교육자라서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또한 당대의 지식이 그룹을 대표하는 그런 체제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그래서 이들은 마땅히 새로운 개념에 대해 기본적인 똘레랑스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조적인 담론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그를 통해 집단적인 문화이윤을 수취하면서 이 메커니즘을 교육과 학회활동을 통해 재생산하는 것 그것만이 자신의 임무인 것처럼 여기는 기풍이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조건은 다시 이데올로기 층위에서 교조주의를 강화한다. 게다가 이 카르텔과 폐쇄순환구조가 학벌과 연고 등과 얽히면 말 그대로 학문적 지옥도가 펼쳐지는 것이다. 한국사회 아카데미즘은 이 지옥의 입구로로부터 얼마나 멀리까지 들어와 있는가?

 

- 비가 많이 온다. 사당가는 7001번 버스 맨 앞좌석에 앉아 있다. 운전석 유리로 들이치는 빗물들. 이런 도로 위를 이런 찬 비를 보며 간다는 것, 언제나 그런 게 사는 거다. 별다른 것 없는 고뇌의 연속 말이다.

 

- 연대 이전에 중요한 것은 물론 전선이다. 연대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조성되지만 전선은 언제나 정치적 적대에 의해 구성된다. 전선과 연대의 인식론적 선후관계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유념해야 하는 것은, 현장에서는 존재론적인 구성의 관점(perspective)이 더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연대 안의 전선과 전선 안에서의 연대를 구성하는 것은 그 매번의 관점에 달려 있으며, 싸움의 효과와 승패 모두가 이 능란한 관점 구성에 우선 달려 있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따라서 모든 레닌주의와 운동론의 ABC는 여기서부터다.

전선은 확고하게 연대는 느슨하게 그리고 “전략과 전술에 있어서 적들을 앞서 가는 것”(Guattrai).

 

- 개념실체론과 마찬가지로 계급실체론은 칸트적 의미에서 사용이 제한되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초월적 사용이 문제가 아니라 경험적 사용이 문제일 것이다. 계급의 이념적 사용은 사실상 예지계에서 뿐만 아니라 감각계에서도 허용될 것이다. 하지만 이념이란 항상 그것의 그림자인 반입자를 가지고 있는 법인데 이를 미분화라 한다. 경험계에 이를수록 미분화는 계급이라는 몰적 이념의 자루에 쓸어 담기에 차고 넘치는 분자들로 들끓을 것이다. 이 지점을 들뢰즈는 특이점이라고 했으며 칸트는 숭고함이라고 했고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라 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해서 맑스에게서 계급‘론’이라는 게 없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말마따나 이는 단지 “경향적”인데 경향이란 건 일종의 반(半)목적의식적인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나코-들뢰즈의 지평에서 이는 단지 브라운 운동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말이다. 따라서 ‘계급’이 이런 미분적 투쟁과정이나 현장 안에서 초재적으로 사용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몰적 선별과 플라톤적인 배제가 작동한다. 결국 현상은 기이하게 뒤틀리고 차이는 억압당하며 마침내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이를 보통 ‘이론가’ 또는 ‘철학자’라고 부른다. 계급의 경향성이 정치의 내재면에 그리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경로 위에서 모든 혁명은 적법성의 내기에 걸리고 필패할 것이다. 그러므로 로두스는 계급의 산맥이 아니라 특이점의 고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조정환과 이택광(그리고 최원?)이 벌인 촛불성격논쟁은 그 생동감에도 불구하고 감정과잉과 이론의 빈곤으로 귀착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론이란 과학이 아니라 바로 철학이며, 또는 그 둘의 공명지점과 차이를 드러내는 역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특히 둘의 논쟁이 서로의 취미판단을 분석하면서(마치 그것이 분석될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반지성주의와 쁘띠부르주아 지식인론으로 비화될 때 일어난다. 이들은 이 주장의 철학적-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하기를 포기하면서 등을 돌린채 고성을 질러댄 것이다. 전자의 철학적 근거는 바로 데카르트와 칸트, 헤겔로 이어지는 근대 이성중심주의에 있을 것이며 후자의 경우엔 엥겔스의 맑스 혹은 레닌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조정환은 한 가지 필수불가결한 계보적 사항을 더 첨가하는데 그것이 들뢰즈다. 그러므로 이 논쟁은 마땅히 이 근거들의 심층 안에서 독자적인 2라운드에 돌입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이 둘은 근거와해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이 근거들의 어두운 지대(zone obscure), 이념의 고딕풍 놀이터로 들어오기를 거부했으며 각자의 과학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 차례 서로의 “방만 바꾸었을 뿐 혁명은 없었다”(김수영).

 

- 인격적 관계성은 불가능하다. 엄밀하고 가혹하게 대답하자. 당신은 내 코나투스의 인격성 따위를 논할 수 없다. 그런 건 애초에 없다고 말이다. 다만 당신과 나 사이엔 거리가 존재하며 그것은 기반으로 해서만 평가(evaluation)가 가능하며 기쁨의 생산도 가능하다고 말이다. 나든 당신이든 인격이라는 유기체적 조직으로 총체화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는 모든 루카치식 ‘전형적 총체성’에 대한 고별 선언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