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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과 연대-[자본주의의 종말] , 엘마 알트파터

  • 등록일
    2008/10/04 11:47
  • 수정일
    2008/10/04 11:47

 

마지막 장을 덮으면 읽기를 끝내기가상당히 아쉬운 책들이 있다. 문학류일 경우에는 저자의 쾌청한 문체의 여운이 자꾸만 오감을 간지럽히기 때문이고, 인문-사회 과학 서적의 경우는 문제의식과 대안이 함께 명쾌하기 때문에 그렇다.

 

알트파터의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상당히 잘 쓰여진 책이다. 문제의식은 '지속가능성과 연대'이고, 그 대안도 이 문제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안이 문제의식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편협하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러한 한계를 맴도는 것은 심화된 문제의식과 그로부터 나오는 명쾌한 결론을 방증하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불가능성'과 그 데카당티즘적 구조에 대한 분석은 더욱 더 훌륭하다. 하나의 학술 서적으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임에는 틀림 없다. 부분부분 빛나는 구절들이 보이고 ... 그런데 뭘까? 이 맹숭맹숭함은 ... 마치 well-made한 가족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심심하고 감동적인(?) 기분은?

 

이를테면, 알트파터가 비판하는 홀러웨이나, 네그리, 심지어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은 그에게 '국가' 또는 '권력'의 '유용함'마저 폐기하는 무모한 시도처럼 보이는 지도 모른다.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린다는 말을 알트파터가 이 경우들에 적용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모호한 말이 또한, 심심하게 만든다. 자신의 대안이 반자본주의는 맞지만 '혁명'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단다.

 

결국 이 책은 잘 쓰여진 책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뭐, 좀 심심하다. 고전적인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레닌식 질문이 이 책에 통하지는 않는다. 그만큼 대안도 명쾌하다. 그래도 혁명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신뢰도 보인다. 그러나 '국가'와 '권력'에 대한 미련 같은 걸 버리진 않는다. 알트파터가 너무 온건한가? 그것도 아니다. 제멋에 사는 사이비 생태주의자인가? 그도 아니다. 하여간 난 아직 좀, 심심하고, 다들 읽어 보면 알게다.

 

애고, 뭔 서평이 이런지 ... 원. 잘 읽었지만, 큰 쇼크 없었다면, 항상 글이 이 모양이다.

 

*여기 누르면 [프레시안]에 쓴 redbrigade의 서평이 나온다.


 


『자본주의의 종말』, 엘마 알트파터 지음, 염정용 옮김, 동녘, 2007.

 

나는 프랑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한 간략한 발언의 논지를 논증적으로 따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본주의 붕괴 이론을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나는 자본주의가 … ‘내인성(內因性)’ 쇠약에 의해 붕괴될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외부로부터의 아주 격심한 충격만이 신빙성 있는 대안들과 결합해서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따라서 우리는 외부로부터 오는 충격 요소들과 사회 내부에서 무르익고 있는 신빙성 있는 대안들을 지적으로 그리고 또한 아주 현실적으로 찾아 나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 대안들을 실현시키는 데도 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서문에서 언급된 ‘집단적 연구’라는 프로젝트의 진정한 의미이며, 이 프로젝트는 실천적 경험과 이론적 성찰이 계속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14).

 

미래는 실제로 야만의 특성들을 대단히 많이 보여줄 것이며, 이 야만은 분명 자본주인 것이 될 것이다(25).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지역적인 생존의 틈바구니가 아니다. 연대의식은 사실 이웃과 소규모의 협동 조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적인 연관 관계, 즉 시공간적으로 미치는 범위를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사회 내부로부터의 대안적인 사회조직과 정치적 참여의 반대 운동들이 형성된다. 어쩌면 여기서 머리로 구상한 모델이 아니라 아래서부터 성장하는 새로운 세계주의가 생겨날지도 모른다(26).

 

신빙성 있는 대안들은 주어져 있는 셈이다. 현행 자본주의를 계속 이어 나가는 것은 파국으로 끝난다. ‘야만의 제국’은 아직 생겨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곧 생겨날 것이다.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에다 거기에 적합한 사회 형태와 연대적으로 조직된 경제가 갖춰지면, 이것이 현행 자본주의의 종말이 된다. 새로운 사회 형태는 만들어질 수 있다. 역사는 종말에 와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열려 있으며 계속 나아간다(27).

 

‘역사의 종말’은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영원하고 무한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36).

 

대안을 만드는 일은 ‘혁명 전위대’ 뒤에서 대오를 맞추어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지 않는 것이 확실하며, 또한 글로벌 공간에서 ‘다중’의 다양한 함성(이 말에서는 홀러웨이가 쓴 ‘절규’라는 비유가 생생하게 와 닿지 않는다)과 더불어 진행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홀러웨이의 말이 옳은 것도 사실이다. “자본주의에서는 … 실제로 또 다른 종류의 사회 체제를 위한 토대들이 놓이지만, 이 토대들은 우리가 생산하는 기계와 물건들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행위 혹은 자본주의적 형태와의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서서히 생겨나는 협력 속에 있다 …”(44)

 

경제가 사회에서 이탈되었다는 점, 사회 이론적인 토대도 확립하지 않은, 수량화되고 형식화되고 생명력 없는 경제가 사회를 이론적으로 성찰한다는 점이 실제의 자본주의 경제를 더 이상 하나의 사회적 체제로 파악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학은 그 개념적 빈곤함 때문에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확산시켰던 이론가들에게조차 그 유용성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된다. 따라서 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를 도외시하고 그 대신 순수한 시장 논리가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면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가 생겨난다. 순수한 시장논리는 존재하지 않거나 기껏해야 공허한 모의 세계에서만 존재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세상에서 가르치고 대중들에게 유포하는 것이다. 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는 실재하고 있고 아무런 대안 없이 글로벌 자본주의로서 존재하고 있지만, ‘현대’ 인간의 개념 세계에서 이미 폐기되어 버렸다(70).

 

[사적 전유의 네 가지 형태][1. 가치화]데이비드 하비는 가치화의 방법들을 마르크스의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는 설명과 밀접하게 연관시켜 열거한다. 이 방법들은 다음과 같다. ①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그리고 농민들을 강제로 추방하고 임금 노동자로 만들기, ②공동소유지, 공적 재산, 공유지를 개인 독점 재산으로 바꾸기, ③노동력을 상품으로 바꾸고 자연을 전유하는 데 대안이 되는 (자급 자족 경제의) 형태들을 억압하기, ④식민지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약탈, ⑤교역을 화폐 위주로 하고 세금을 부과하기, ⑥노예 매매 ⑦고리대금업. ... (76)자본화란 (대부분 공적이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재산을 사적인 상품으로 바꾸는 과정이며, 탈취하고 (사적으로) 전유하는 이중의 과정이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공적 재산이거나 공동재산이었던 (건강을 관리하거나 교육을 하는) 공유지 공간들을 사유화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제국주의는 외향적인 동시에 내향적이다. ... (78)아직 가치화되지 않은 것을 최초로 가치화하는 것을 탈취와 사적 전유의 첫 번째 형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상품으로 바꾸는 것’, 즉 기능적 공간들과 자본주의적 축적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2. 절대적 잉여가치 창출](79)자본의 가치 증식은 가치화라는 ‘제1막’이 끝난 이후로는 노동력이 자본가들이 전유할 수 있는 초과 이윤을 창출할 대에만 지속적으로 가능하다. ... 마르크스가 말한 이른바 절대적 잉여 가치 형태의 초과 이윤을 창출하는 것 이상의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은 오히려 자본에 형식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 (80)그렇지만 첫 번째 형태와는 달리 이 절대적 잉여 노동의 전유는 이미 가치 증식 과정의 요인이며 가치화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다.

 

[3. 상대적 잉여가치의 창출](81)생산자들에게서 탈취할 수 있는(이 때문에 그들이 물질적으로 더 나빠지지 않으면서도) 노동 효율이 더 높아지면, 또한 그것은 자연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자원의 남획과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과도한 유해물질이 침전되기 때문이다.

 

... (83)노동과 자연이 실질적으로 자본에 종속되는 것 ... 우선 근대 자본주의는 산업을 기반으로 하나의 체제로 발전하고, 자본의 축적에 영향을 미치는 이윤율에 의해 방향이 조종되며, 화석 에너지원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는다. 이 화석 에너지원은 다른 에너지들(생체 에너지, 목재, 수력, 바람)을 점차 밀어내고 자본주의에 세계사적으로 비길 데 없는 뛰어난 동력을 부여한다. 생산 과정 전반에 재편되고 노동력과 자연은 ‘실질적으로’ 자본에 종속된다. 주관적 그리고 객관적 생산 조건은 자본주의적-합리적 조건으로 변환된다.

 

(86)생명체의 한계는 나노기술과 생명공학을 통해 ‘생명 과학적으로’ 극복된다. 따라서 글로벌화는 전 세계에 걸친 가치화를 목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압축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로부터 시장의 유리’의 이면에 감추어진 원리다. 경제는 자연과 사회의 시공간적인 조절로부터 유리되며 또한 그와 더불어 정치적 원칙과 그 원칙이 명시하는 구속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경제적 합리성이 일단 이런 식으로 모든 사회 문화적 그리고 영토적 굴레에서 유리되고 나면, 반자연적, 반사회적이고 따라서 철저하게 자폐증적인 체제라는 것이 이해된다. 결국 이것은 또한 신자유주의의 대변자들이 신자유주의를 어떤 식으로 소개하든 신자유주의의 결정적으로 중요(87)한 특성이기도 하다.

 

[4. 지정학과 새로운 제국주의](98)이 시대의 제국주의에서는 노동력의 ‘통상적인’ 착취는 전세계적으로 활동하는 투자가들의 수익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불충분하다. 포드식의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이하는 포지티브섬 게임은 금융계의 높은 수익률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적은 수익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취라는 새로운 형태 내지 방법을 통한 전유가 추가된다. 이것은 금융위기의 결과 터무니없는 높은 채무를 떠안는 형태가 된다. ... (100)강대국들의 정치에서는 과거 지정학의 입장을 보여주는 요소들이 오늘날에도 다시 나타난다. 경제의 논리(최대의 이윤 달성)는 영토의 논리(권력과 전유)에 의해 보완된다. 미국이 세계의 핵심 지역에 군사 거점들을 두고 영토상으로 주둔하고 있는 것은 명백히 지리전략적인 편성이다. 그러므로 탈취와 전유는 군사적 수단을 이용해서도 강탈과 불평등한 교환으로 행해진다. 자원, 특히 석유는 자본주의적 가치 증식 공간에 상품으로 나와 있기는 하다. 1배럴의 석유는 걸프 만에서 로테르담의 기착지로 가는 도중에 소유주를 몇 번이나 갈아 치운다. 석유는 현물 시장과 선물 시장에서 거래된다. 따라서 가격 동향은 글로벌 금융 시장에서의 투기의 대상이자 그 결과다. 이 때문에 자원시장과 금융시장의 상호 의존도는 매우 높다.

(101)하지만 이것은 일차적으로 석유라는 자원의 ‘교환 가치 측면’에 관한 것이다. 석유의 사용 가치 측면, 즉 원료의 형태는 자연이며, 오랜 기간(수백만 년)에 걸쳐 생겨났으며, 오늘날 특혜를 받은 영토 공간에 집중되어 있다. 따라서 자원은 자본주의적 교환 가치 논리와 가치 증식 논리의 대상일 뿐 아니라 영토적인 논리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곧 개별 국가 주권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따라서 네 번째 형태의 전유와 탈취에서 경제적 기능의 메커니즘들뿐 아니라 정치력과 군사력이 중요성을 얻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정치, 경제, 문화, 지경학과 지정학의 이러한 앙상블이 ‘새로운 제국주의’를 형성한다.

 

(107)자본주의, 화석 에너지원, 산업의 목적과 수단 관계에서의 합리성이라는 삼위일치는 인류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모든 경제, 사회적 과정의 가속화를 불러오며 또한 그렇게 해서 ‘국가의 부’를 크게 증대시킨다. 그러나 가속화의 결과로 자연의 파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는 발전 노선들이 선택된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과 정책적으로 적절한 대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원인을 밝혀 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것은 원칙상 새로운 자본주의의 동학이 불러온 또 다른 결과, 즉 세계의 불평등이 엄청나게 심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09)글로벌화의 논리는,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탈규제와 자유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로 생겨난 역사적 글로벌화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산업혁명가과 더불어 세계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수단들이 늘어난다. 이렇게 해서 산업 자본주의의 생산 과정은 세계 모든 지역에 뿌리 내리고, 지역적인 저항에도 굴하지 않는다. 결국 경제 상황의 ‘무언의 강제’가 승리한다. 이 강제는 종종 앞 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형태를 띤 정치적 실력행사와 결합해서 이루어진다.

 

(111)자본주의와 화석 에너지의 결합이 없었다면 가속화를 통한 생산성의 증가는 허사가 되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가 생산성과 부의 증대를 이루는 토대라고 확인했던 분업의 가속화는 새로운 기계류와 동력 전달 장치, 에너지 변환 시스템(특히 증기 기관)이 없었다면, 따라서 화석 에너지원이 없었다면 거의 진척을 보이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산업 혁명은 화석 혁명이기도 하다.

 

(119)에너지 방화벽은 베를린 장벽처럼 영구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적합한 화석 에너지 체제는 태양 에너지 사회에 맞서 지속될 수 없다. ... 화석 에너지 자본주의의 종말에는 재생 가능 에너지 체계만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가 재생 가능 에너지 체계에 적응될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보다 더 강력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혁명이다. 이 혁명은 또한 18세기 말의 산업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자본주의는 현실사회주의처럼 ‘벨벳’ 혁명을 통해 종말을 맞이하지 않는다. 지배계층들은 자신의 지배권을 움켜쥐고 있으며, 이 지배권은 본질적으로 석유, 천연가스, 핵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 엘리트층의 기획은 에너지 방화벽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의 종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민중혁명의 결과가 아니라 (120)끔찍한 혼돈, 지배 계층이 세계를 ‘글로벌 무정부 상태’로 빠뜨리는 것임이 밝혀질 것이다(120).

 

(129)자본주의, 화석 에너지, 합리주의의 일체화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 재생 가능에너지라는 대안적인 발전도상으로 접어들면 되면, 사회적 변화가 (130)얼마나 철저하게 일어날 것인지를 예감하게 해 준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을 채굴하고 수송하고 사용하기 위해 이전에 만들어진 오일 시대의 인프라 구조, 즉 ‘공간적 고정화’(spatial fix)는 이런 자원들보다 훨씬 더 오래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산업-화석 에너지 체제의 생활 양색이 생겨났지만, 이것은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에너지 체제, 유럽 합리주의, 자본주의라는 세 분야의 일체화에 균열이 일어난다.

 

(144)성장이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성장이 질적인 축적을 나타내는 하나의 양적인 특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사회적인 연관 관계들과 정치적 구상들의 복잡성을 단순화시키는 만능열쇠라는 것이 입증된다. 모든 문제들은 너무나 낮은 성장률에 그 원인이 있다는 식이다. 따라서 해결책도 간단하고 (145)명확하고 확실하다. 더 높은 성장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 노동 생산성과 요소 생산성의 증가율 역시 모두 20세기 후반에는 마이너스였지만, 그럼에도 국민총생산 성장률보다는 높았다. 따라서 축적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에 노동력은 해고되는 것이다. 성장은 많은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인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금융상의 한계, 높은 성장률에서 오는 생태적 결과, 그리고 특히 이미 달성된 높은 수준의 GNP에서의 절대적 증가의 조절에 대한 경제적 장벽도 성장과 함께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49)이러한 ‘시장 실패’는 고전파 이론과 신고전파 이론애서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것 중의 하나다. ... 경제가 역사적 시간과 지리적 공간을 벗어난 체제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이론은 경제적 변환, 즉 에너지와 원료의 소비가 자연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 외부효과들이 내부화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 (150)경제과정을 단지 가치창출과정으로 뿐만 아니라 원료와 에너지의 변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근본적이고 중대한 오류다. 하나의 오류는 자연과 사회에 동시에 해를 끼치는 생산의 문제가 시장 경제의 수단들과 능률을 높이도록 자극하는 것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은, ‘외부효과들’은 이미 외부화되었기 때문에 경제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효과들은 ‘일반 생산 조건’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160)‘금융주도’의 축적 체제는 금융 시장 활동가들의 지금까지 ‘억압 되어 있던’ 수익률 기대치를 너무 높게 끌어올릴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렇게 되면 실질 자본의 이윤율이 금융의 요구를 지속저으로 충족시키기에 불충분하게 된다. ... 하지만 실질적 이행 능력을 과중하게 요구하는 높은 실질 이자를 불러온 사태는 오늘날 경기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동시에 전 세계적인 문제다.

 

(164)금융 거래 관계와 동떨어진 세계에서도 실물 경제의 성장은 무조건적으로 숭상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실물경제의 성장 없이는 금융 분야의 수익률 요구는 실질적으로 충족되지 않고, 따라서 금융 자본의 가치 잠식이 불가피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좋은 거버넌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무원이나 교부금 수입자에게가 아니라, 공공 투자 발주의 혜택을 받는 대부분 초국적 기업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공공 투자 발주의 혜택을 받는 대부분 초국적 기업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초국적 기업들은 또한 한편으로는 공공 수주의 폭넓은 자유화에, 다른 한편으로 ‘좋은 거버넌스’를 통한 수주의 합리화와 신뢰성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173)금융문제와 관련된 어떤 격언에 의하면 한 나라는 외국 자본을 그 나라가 슬기롭게, 즉 투자를 할 수 있고,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 만큼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만약 그 나라가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채무를 상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신용능력을 감시하는 신용 평가 기관들은 처음에는 신주하게 그러나 나중에는 위협적으로 경보를 발동할 것이다.

언젠가 자본이 마치 도피하듯이 그리고 대규모로 그 나라에서 다시 빠져나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투자된 자본이 멀리 떨어진 해외에 거주하는 ‘투자자들’에게 - 다른 ‘현지들’과 글로벌하게 비교해 볼 때 - 충분한 수익률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다. 충분한 수익률은 영원히 불가능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외국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금융 수익률 조건은 너무나 높아서 실질 자본으로 투자해서는 그 수익률을 전혀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높은 이자를 대가로 도입한 자본은 투자의 형태로 생산 시설에 흡수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경쟁력을 뒤처지게 만든다. 왜냐하면 자본 도입과 함께 통화가 평가 절상되기 때문이다. 이 결과는 적어도 외국에서 도입된 자본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려다가 국가재정과 경상수지에 적자가 발생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 (174)따라서 실질 수익률보다 금융투자의 수익률이 훨씬 높을 때는 무엇보다 금융 분야가 번성하고 글로벌 금융 시장이 걷잡을 수 없이 성장하며, 이와 동시에 실물 경제가 과도하게 넘쳐 나는 금융 분야에 의해 압박을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76)오로지 높은 실질이자와 불가피한 금융위기의 고난이 지나고 나면 투자 의욕이 높아지고 그렇게 되면 고용과 소득도 늘어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희망만이 안정화 정책의 입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을 뒷받침하는 단 하나의 사례도 찾아볼 수 없다. ... 노동가치는 금융시장의 활동가들이 전유하며, 이 가치의 창출에 대해 이들은 전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그것에 관여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이자를 수단으로 하지 않는 한 어떤 식으로든 전혀 관심이 없다. 수익률 요구(금융상의 청구권)라는 형태로 전유하는 것이 이 청구권이 충족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인 초과 이윤의 창출보다 더 중요해진다. 전유방식과 생산방식은 모순 속으로 빠져드는데, 이 모순은 채무자가 자신의 의무를 더 이상 이행할 수 없을 때 갑자기 드러난다. ... (177)금융자산의 실질 이자나 수익률이 높아지면 - 특히 다른 투자와 비교해서, 여전히 위험요인들을 고려하더라도 - 그에 대한 투자는 특별히 매력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금융시장을 자유화하고, 혁신적인 금융상품과 새로운 경영전략들을 개발하거나, 탈규제로 얻어진 활동의 여지를 크고 작은 거래에, 불법적이거나 탈법적인 혹은 심지어 범죄적인 거래에 이용하려는 아주 결정적인 동인이 생겨난 것이 확실하다. 금융 투자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자금은 실로 엄청나다.

 

(201)그러므로 테러리즘은 결코 근본주의에 눈먼 자살 테러범들이 외부에서 가하는 충격이 아니다. 테러리즘은 서방 세력들이 방대한 산유 지역에서 독재 정권을 비호하고 국민들을 억압함으로써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수십 년에 걸친 시도에 대한 대응이다. 또한 ‘테러와의 전쟁’에서 국가적으로 자행되는 테러에 대한 응징이기도 하다. 이 테러와의 전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끝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어떤 상대가 어떤 조건에서 패배할지 전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205)석유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소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매년 채굴되는 양이 새로 발견되는 매장량보다 더 많아지는 시점이 중요하다.

 

정치력과 군사력 뿐만 아니라 경제적 잠재력도 보유하고 있는 석유 소비국들은 자국의 에너지 안정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에너지 안정 정책은 결코 가난하고 약소한 나라들의 일이 아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들하게 배분될 수 없는 자원을 장악하는 강대국들의 석유 제국(233)주의다.

 

(235)미국은 중동과 중앙 아시아에서 ‘지배적인 외부세력’이 되어 유럽 연합, 러시아, 중국, 인도에 맞서 자국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에는 군사 거점들이 이용되는데 이 거점들은 전 지역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고 특히 2001년 9월 11일 사태 이후에 구축되었다.

정권교체 전략도 이 목적을 위해 추구되는데, 이라크에서는 잔혹하게, 그러나 키르기스, 그루지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도 본성을 숨기고 유화적으로 수행된다.

 

(251)그러므로 사회혁명은 사정에 밝은 당 지도부나 운동 엘리트층의 지시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석에서 뿐 아니라 (252) 자신의 희망과 이상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정치적 목표 설정에 있어서도(마르크스에 의해) ‘일반적 지성’으로, 즉 사회 운동과 정치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라고 불렸던 수준에 도달해야만 한다. 집단 행동의 방향을 정하기 위한 논쟁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사회 혁명은 쿠데타가 아니라 많은 사회적 실험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반복되는 과정이다. ... 여기서 혁명의 구 얼굴이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정치적 전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구성체의 변화이다. 이 두 가지는 각 특수한 사정에 따라 병행해서, 시간적으로 연이어서, 동시적으로 여러 나라들에서 (영국과 프랑스에서처럼) 진척될 수 있다. 진(253)척되는 속도는 서로 다르지만.

 

(254)우리는 존 홀러웨이가 멕시코 반정부 농민 저항 운동 사파티스타를 설명하면서 넌지시 제안했듯이 “권력을 넘겨 받지 않고서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멋진 일이겠지만,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255)세상을 바꾸려는 사람은 경제를 연대적으로 만들고, 자연을 지속 가능하도록 다루어야 한다. ... (256)글로벌 시대에는 사회 운동의 많은 활동들이 영토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상수도의 민영화는 철회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물은 식품이지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의 공적 공간들을 점령하고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공장들은 폐쇄를 저지하고 점거한 직원들에 의해 채워진다. 이것들은 몇 가지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투쟁들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가능한 것이기는 하다.

 

(267)연대의식은 공동체에서부터 생겨나며, 이 공동체는 공동의 가치 체계와 공동의 경험 배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연대의식은 공동의 집단적 기억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치적 논쟁에서 공동의 선-이해를 매개하며, 이러한 선-이해는 예를 들어 학교 교육 과정을 통해 습득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등가성 관계와 상호성 관계는 배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것들은 시장과 더불어 사회(268)에서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귀소된 채’ 남아 있다.

 

(269)여기서 일자리가 비정규화되고 불안정화되는 것은 ‘불안의 글로벌화’를 점차적으로 등급화해서 보여주는 형식으로 풀이될 수 있다. 처음에는 노동조합 측으로부터, 그러나 또한 자발적인 사회 운동 단체들과 정당들로부터도 이러한 현상에 항의하는 아주 요란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항의, 데모, 기업점거로 나타났다.

 

(273)비정규직 분야는 글로벌화의 일종의 충격 흡수장치며, 이 기능은 위로부터의 지배라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편입되어 있다. 하지만 이 비정규화는 글로벌화의 결과에 당황한 사람들의 대응 방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들은 확실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라는 전략을 따른다. 이들은 ‘저절로 얻어지는 수법’, 외부에서부터 주어진 여건에 적응하는 수법, (274)다시 말해 자주성이 결여된 정신 상태를 만들어 낸다. 이 정신 상태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의 의미에서, 통치하는 것을 쉽게 한다. ...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무리 보잘것 없는 시장 기회라도 붙들어서 자신의 생활과 생존을 안정시켜야만 하며 따라서 초국적 대기업 경영자들과 정치 지배자들이 호화롭게 지내는 것과 동일한 행동 논리를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행동 패턴의 일체화는 사회적으로 분열된 집단을 통합하는 본질적으로 중요한 요인이다.

 

(276)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안은 여러 이유에서 단점이라기 보다는 장점이 된다. 불안은 해방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실현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왜냐하면 불안은 끊임없이 경쟁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고 연대 의식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불안은 신자유주의의 견해에 의하면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 (279)불안한 여건에서는 연대 의식을 보여주는 행동 패턴이 길러질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많은 사람들은 독재적인 정부에 의한 안전을 기대한다.

 

(279)하트와 네그리는 노동자들의 대규모 유랑 생활을 가령 생존에 대한 불안의 표현이 아니라 거부의 표현이며, 기존의 생활을 벗어나 새롭고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추구하는 것의 표현이라고 여긴다. 홀로웨이 (280)역시 이주를 자본을 멀리 하려는 희망에 가득 찬 ‘도피의 한 형태’로 ‘자율성을 얻으려는 투쟁’으로, “이런 저런 형태로 일자리에서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거부의 목소리”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개별적인 경우에만 그렇다. 일반적으로 이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도피는 자본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인신 매매꾼들과 사악한 착취자들의 품 속으로 데려 간다. 이주는 ‘이탈’(exit)의 한 형태이며, 오히려 따져 보아야 할 것은 왜 이주자들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 홀로웨이가 자신의 실존주의적 역사해석에서 계속해서 표현하는 인간의 ‘절규’(Schrei)는 ‘목소리’(voice)가 아니라 깊은 좌절감의 불명료한 표현이다.

 

(310)유토피아는 막연히 열악한 현실을 황금시대와 대비해서는 안 되며, 과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운동 법칙’을 이끌어 내는 것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316)화석 에너지 체제를 전제로 하는 많은 유토피아들은 구체적이지 못하고 심하게 말하면 관념적이기 때문에 여러 가능한 세계들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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