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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국제] 세상의 모든 눈이 오클랜드를 주목하고 있다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1/11/18 10:12
  • 수정일
    2011/11/18 10:14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점령(Occupy) 운동이 11월2일 오클랜드 도시 총파업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이 글은 총파업 이틀 뒤인 11월4일 영국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활동하고 있는 <더 코뮨> 그룹의 홈페이지(http://thecommune.co.uk)에 올라온 기사로 최근 오틀랜드 투쟁의 전개과정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글이라고 판단되어 번역해 싣는다. 번역 기사는 본지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주]


도나 데이비스(Donagh Davis)가 오클랜드 점령 운동(Occupy Oakland) 현장에서 스캇 올슨(Scott Olsen) 피격사건부터 파업, 항구 봉쇄, 그리고 오늘 아침(11월 4일) 건물 점거를 둘러싼 폭력상황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 대해 보고한다.

3주 전 텐트가 세워진 이후 오클랜드 점령 운동은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자체로 세계 주요 뉴스 기사뿐 아니라 하나의 주요 사회 운동의 현상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다른 많은 '점령 운동'들처럼 오클랜드 점령 운동도 처음에는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을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3주 후에 이 운동은 월스트리트 시위보다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가장 중요한 분수령은 일주일 전에 일어났다. 일주일 전, 진 콴(Jean Quan) 오클랜드 시장은 오클랜드 점령 운동에 나선 시위대 캠프를 쫓아내겠다던 협박을 실행에 옮겼다. 시청 바로 밖에 있는 프랭크 오가와 광장(Frank Ogawa Plaza)의 점령 캠프가 그녀에게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을 것은 분명하다. 점령에 참가한 시위대들은 프랭크 오가와 광장을 '오스카 그랜트 광장(Oscar Grant Plaza)'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2009년 지하철 승강장에서 경찰 총격으로 사망한 젊은이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오클랜드를 점령한 텐트촌을 해산시킨 것은 경찰과 시장에게 전술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전략으로서는 재앙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0월25일 이른 시간, 대규모 전경 부대가 몰려와 최루가스와 섬광탄을 쏘며 캠프를 초토화시고 100여 명의 시위대를 연행해 갔다.

점령대는 오클랜드 시내 중심부의 알짜배기 땅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점령대는 땅을 되찾기로 결의했다. 다음날 저녁, 텐트촌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클랜드 점령에 참가하는 대오의 규모는 더욱 늘어났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오스카 그랜트 광장으로 행진하여 그 곳을 말 그대로 ‘무력 점령’하고 있는 중무장한 경찰과 맞섰다.
 

 


빗발치는 최루가스와 그 보다 ‘덜 치명적인’ 물질들 속에서 점거참가자의 물결은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리를 떠나려하지 않았다. 길었던 그날 밤 경찰은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몇몇 사람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하지만 경찰로서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겠지만 이 ‘폭력’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시위대는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더욱 당혹스러운 일은 가장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이 이라크 전에 두 번이나 참전했던 24세의 청년 스캇 올슨이었다는 것이다. 근거리에서 발사된 경찰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과 뇌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바로 그 때, 이 청년은 해병대 재킷과 평화를 호소하는 참전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오스카 그랜트 광장에서 벌어진 결전은 주요 뉴스기사로 타전되어 전 세계와 미국 전역에서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자신들이 어리석은 판단착오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찰은 오클랜드 시내에서 철수했다. 콴 시장은 점령대를 달래기 위해서 애도의 뜻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텐트촌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지만 텐트촌이 철거된 지 이틀 후인 수요일, 오클랜드 점령대는 오스카 그랜트 광장에 다시 등장했다. 주위에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점령대가 개최한 총회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총회에서 15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11월2일 총파업을 개시하자는 안에 투표했다. 반대한 사람들은 2~30명에 불과했다. 소수파는 총파업을 성사시키는데 있어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지적했다. 이러한 장애물로 11월2일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는 점, 오클랜드에서는 1946년 이후로 그런 파업이 일어났던 적이 없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오클랜드 점령대가 노동자 조직이 전혀 아니라는 난감한 현실 역시 제기되었다.

그러나 고양된 자신감, 정부에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예감과 가능성에 비하면 이 모든 문제들은 부차적이고 기술적인 세부사항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놀랍지 않은 일이지만 11월2일에 벌어진 상황은 교과서적 의미의 ‘총파업’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는 일주일 전에 잡힌 계획이 옳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많은 회사들이 정상영업을 계속했고, 많은 노동자들이 출근했다. 하지만 오클랜드 시내는 절대 평상시와 같지 않았다. 주위에 경찰은 보이지 않았고 오스카 그랜트 광장 주위의 도로는 점령대와 파업참가자들로 넘쳐났다. 특히 교사들과 학생, 보건의료 노동자들이 많이 참가했다. 오클랜드 시는 해방구와 축제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후 늦게 수천 명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5번째로 무역량이 많은 오클랜드 항구를 봉쇄하러 시외로 몰려나가면서 축제의 양상은 빠르게 변모했다. 자전거에 실린 스피커에서는 전성기의 마이클 잭슨 노래들이 울려 퍼졌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점령 시위에서는 오클랜드 레이더스 야구팀이 “렛츠 고, 오클랜드”라는 구호를 연호하는 만큼이나 자주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악단이 그 뒤를 따랐다. 시위대의 목표는 항구의 야간조 교대를 막는 것이었다. 노동자 중에서도 급진적이라고 알려진 항만노동자들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항만노동자들과 노조 간부들이 항구 당국으로 하여금 그날 밤 오클랜드 항구가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물류량이 많은 항구에서 가장 물류량이 적은 항구로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외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도 들렸다. 그 도움은 항구의 모든 출입구를 둘러싼 인간의 물결로 나타났다. 이 물결은 화물트럭의 출입을 마비시켰다.
  


저녁 9시 전에 ‘미션 성공’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하지만 점령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아침조 교대까지 막기 위해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분위기는 활기찼다. 하지만 혁명과 마찬가지로 점령 운동 역시 평화로운 다과회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모험적이고 조숙한 행동의 날에 너절한 후기가 아니 붙을 수 없다. 이는 점령 운동이 갈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 일깨워주며, 그 길 곳곳에 존재하는 실제 긴장과 투쟁들을 일깨워준다. 그날 밤 늦게 한 무리의 점령대가 오스카 그랜트 광장에서 한 블럭 떨어져 있는 지금 사용되지 않는 빈 건물을 점거했다. 이 건물은 전에 노숙인 보호소로 사용되다가 정부의 기금 삭감으로 임대료를 낼 수 없게 되면서 비게 된 건물이 되었다.

지난주에 입은 타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경찰은 이날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이 올림픽 숨바꼭질 부문에서 오사마 빈 라덴에게 한 수 가르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시위대가 건물을 점거하자마자 어디선가 마법처럼 전경 부대가 나타나 강력계 형사들처럼 무자비하게 안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건물 점거를 초장에 박살내기 위해 또 다시 ‘치명적이지는 않은’ 최루탄과 섬광탄 및 비살상용탄환을 넣은 산탄총 등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수십 명을 체포했다.

이런 사태는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다음날 발표된 성명서에서 건물을 점거하는 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 일부는 이런 식의 — 공공 공간에서 빈 건물(사람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특히 은행에 저당 잡혀 소유권을 빼앗긴 건물들)로 점거를 확대하는 — 다음 단계가 점령 운동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 이래로 “다음 단계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에 관한 논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던 방안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명서는 <비즈니스 인사이더 (Business Insider)> 잡지에 실린 이 사건에 관한 기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The inevitable has happened)”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또 성명서는 경찰의 행동 이면에 깔린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나름의 추측을 내놓았다.

… 경찰은 다른 무엇보다 이 운동이 논리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다음 단계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경찰은 그것이 얼마나 큰 호소력을 가질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겁을 내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로 거리에 나앉거나 실업과 빈약한 임금에도 불구하고 집세를 내려고 애쓰는 사이 점점 깊이 빈곤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국 전역에 수천수만 개의 빈 상가건물과 주택이 방치되어 있다. … [경찰은 말한다.] ‘당신들은 쥐가 들끓는 공원에 살 수 있다. 우리가 허락하는 한 당신들은 여기서 캠프를 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들이 사유재산권을 위협하는 순간 우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당신들에게 덤벼들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도 오클랜드에서는 새로운 상황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시장과 경찰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고 있으며 당국이 점점 늘어나는 불화를 다루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혼선도 수요일 밤 오클랜드의 빈 건물에서 일어난 일처럼 ‘안전선’을 넘는 행동이 발생하는 나오는 순간 경찰이 공격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점령 운동이 나가는 방향에 대한 하나의 풍향계로서 모든 눈은 앞으로 며칠, 몇 주 동안 오클랜드를 주목할 것이다. (2011. 11.4)

번역 : 정지원(jeewon@jinbo.net), 이정인(picollo@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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