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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이 아니라 반격이 필요하다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통과되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물론, 스스로를 진보정당이라고 하는 정의당 또한 체포동의안에 찬성하는 것을 당론으로 정한 바 있어 예상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통합진보당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4일 현재 최종 입장은 이렇다. ‘농담을 하며 웃어 넘겼던 당시 분위기를 녹취록에 대한 편향적 해석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정치노선에 비춰보았을 때 녹취록에 담긴 내용들이 완전히 가공된 이야기들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입장이 국면을 전환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다.

 

이른바 진보ㆍ좌파진영이라고 하는 곳의 분위기는 다양하다. 일단 국정원의 국면전환용 공안탄압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는 입장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에 대한 태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이는 이번 사건이 기존의 공안사건들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의 공안탄압에 맞선 투쟁과 정치사상과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위한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것이 없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진보ㆍ좌파운동의 혼란은 공안탄압의 활로를 열어줄 뿐이다. 통합진보당의 위기가 좌파에겐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새로운 차원의 공안사건

 

국정원이 케케묵은 공안사건을 터트리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얻어낸 것은 기존의 것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최근의 공안사건들은 국정원의 조작 여부를 떠나 시민들에게 구체적인 위협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몇 차례 남북의 군사적 마찰이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긴장국면이 조성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은 국민들 사이에서 눈앞에 닥친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종북 운동권들이 북한 정권을 위해 활동을 한다는 혐의는 구체적인 군사적 대립과 연결되지 않았다. 시대착오적인 소수의 세력들로 인식되는 정도였다.

 

이번 그림은 다르다. 국민들이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협세력으로 느끼게 하고 있다. 제시하고 있는 자료도 그럴만한 수준이다. 조선일보의 헤드라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석기 의원, 총기 마련해 국가시설 파괴 모의”(8/29), “RO, 습격 목표인 통신ㆍ유류시설 답사”(8/30), “이석기, 전작권ㆍ미군기밀 빼내려했다”(8/31)라는 헤드라인을 보면 북한과의 연계 가능성을 떠나 이들이 구체적인 국가기간시설에 대한 파괴계획을 추진하려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그림은 ‘종북 운동권의 이미지를 넘어 종북 테러리스트의 이미지에 가깝다. 게다가 그 주도자가 주요 국가정보에 접근 가능한 입법기관, 즉 국회의원이라는 점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보이도록 하고 있다.

 

국정원의 퍼즐을 함께 맞출 때인가?

 

물론 녹취록이 담고 있는 상황이 실제로 어떤 수준의 이야기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정원이 던져준 녹취록 하나로 이만큼 온 것이다. 실제로 어떤 수준의 논의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됐다. 국정원과 언론이 그리는 그림은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 그림을 완성하는데 정의당이 일조했다. 문제는 정의당뿐만 아니라 일부 진보운동세력들과 진보언론들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일까. 기존의 사건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의 문제였던 반면, 국정원은 이번 사건을 내란음모 및 내란선동에 해당하는 형법의 문제로 던졌다. 그동안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해온 세력들의 혼란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정의당의 공보국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올렸다.

 

물질적 기술적 준비, 보스턴 폭탄, 철탑 폭파 같은 것은 사상의 자유를 넘어선 일탈이며 용인할 수 없다. 통합진보당 당원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130명이 모여서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이를 수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사회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국회의원이고 정당 간부들이었다.”



심상정 의원 또한 국민으로부터 헌법적 권한을 위임받은 국회의원으로서 법이 정한 책무를 다해야 한다며 비판한 바 있다.

 

이런 판단에는 이미 내란선동과 내란음모에 해당하는 형법 위반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원의 판단이 내려지기 전에 이런 입장을 냄으로써 정의당은 국정원이 진보진영에 바란 바를 정확히 수행하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 통합진보당은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국정원의 불법유출과 언론의 보도로 녹취록은 세상에 모두 알려졌습니다. 통합진보당은 이런 상황에서 관련자의 최소한의 방어권 보장과 사실관계의 공정한 확인을 위한 조치로, 국정원에 왜곡 편집되지 않은 동영상 전체의 공개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정원은 정작 녹취록의 원본인 동영상은 공개하지 않는 상태에서 무분별한 여론재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정원이 위법수집증거를 공개한 것은, 사법부의 판단 영역을 완전히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법절차에서 사건 관계자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방어권을 실질적으로 침해한 것으로 극히 부당합니다. 오늘 제가 녹취록에 관하여 말씀드리는 것과 별개로, 재판 과정에서는 관련자 각자의 방어권이 완전하게 행사되도록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마치 비상사태라는 듯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탄압을 강행하는 것에 대한 통합진보당의 문제제기는 완전히 정당하다. 우리는 이를 지지하고 구체적인 탄압들에 함께 맞서 방어해야 한다. 정의당은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에 찬성하는 등의 입장을 통해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세력으로 드러내고 싶은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국정원을 민주주의 세력으로 포장해주는 데 일조하고 있을 뿐이다.

 

국정원의 안보 민주주의, 반성이 아니라 반격이 필요한 때

 

사실 국정원과 같은 공안기관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특히 그 정점을 찍은 것이 최근 촛불운동을 불러일으킨 대선 개입 문제였다.

 

그러나 대선에 불법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도 공안기관의 존재 이유는 정치사상과 활동을 감시하고 제약함으로써 지금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국정원 같은 초법적인 정보기관은 그 존재 자체가 민주주의와는 공존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부정이다.

 

그러나 이런 공안기관들은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위협을 계기로 안보가 민주주의의 전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국민들에게 구체적인 위협을 제시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보가 전제된 민주주의, 안보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무엇을 뜻하는가.
 

미국의 NSA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이 국제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도청과 감시를 하고 있다는 사실, 관타나모는 여전히 치외법권이 되어 아무런 민주적 절차와 이유 없이 테러리스트로 지목된 사람들을 가둬놓고 있다는 사실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안보의 민주주의는 감시ㆍ통제의 강화이자 정치적 자유의 제약, 즉 민주주의의 후퇴인 것이다.

 

따라서 안보 민주주의의 기준은 명확하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안보 민주주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필요한 명목일 뿐이다. 저항운동과 관련된 모든 세력은 감시와 통제, 탄압의 대상이 될 것이다. 벌써 통합진보당 다음은 어디를 향할지 계산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우리의 정치의 자유를 스스로 제약하자고 말할 때가 아니다. 그렇게 우리가 범위를 정한다고 해서 탄압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우리 스스로 저들이 원하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거나,탄압의 대상이 되어 더욱 수세로 몰리는 것 두 가지 길로 내몰릴 것이다. 정의당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점점 보수화되어 스스로 저들이 그어놓은 선 안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그런 반성을 선언한다고 해서 국정원이 진보ㆍ좌파정치와 저항운동에 대한 탄압을 멈출 가능성은 전혀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반성이 아니다. 더 강력하게 국정원 해체와 국가보안법 폐지, 감시와 통제 철폐를 주장해야 할 때다.


 

정치사상과 활동의 완전한 자유라는 원칙

 

정의당은 헌법을 부정하는 정치를 배제하는 해야 한다고 한다. 물론 그런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정당으로서 그런 입장을 제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국가권력이 헌법을 기준으로 정치사상과 활동의 자유를 제약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정치사상과 활동의 자유에 대한 기존의 진보ㆍ좌파진영의 주장에서 한참 후퇴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는 정치가 있다면 이는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배제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국가권력에 의해 제한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정치노선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는다면 함께 맞선다는 것이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지 않았는가.

 

또한 이번 사건에 내란음모와 내란선동이 적용된다면 이 또한 정치의 자유의 제약이 강화되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도 명확하다. 통합진보당 내 일부세력이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떳떳하게 제시하지 않은 채 국민들을 속이면서 지지율을 확보한 것에 대한 비판은 국가권력의 탄압에 의해서 이루어져야할 일이 아니다.

 

국가에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 새로운 사회를 위한 행동을 가로막을 권한은 없다

 

정의당의 주장은 자본주의를 넘어서자는 정치, 3권 분립의 민주주의가 허상이라고 말하는 정치를 배제하자고 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모든 정권이 저항운동을 탄압한 논리와 다르지 않다.

 

헌법의 정신을 뜯어 고칠지 뛰어 넘을지,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결정을 할지 말지, 새로운 민주주의를 정립하기 위한 시도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대중들의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헌법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박근혜처럼 부정한 방식으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게다가 정의당의 주장은 세계 곳곳에서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며 급진적인 좌파 운동이 다시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다. 오히려 지금 우리는 거리에서, 직장과 공장에서, 우리의 모든 생활공간에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국회에서도 이러한 급진적인 좌파 정치가 탄압받지 않고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야하는 것 아닌가.

 

국가권력의 탄압을 진보ㆍ좌파운동의 반성의 계기로 삼자는 코미디는 그만두자. 민족주의 좌파의 정치를 비웃음거리로 만들며 자신의 정치가 우월하다고 자위하는 코미디도 그만두자. 국정원의 공안탄압에 맞선 투쟁,정치사상과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할 때다.

 

-국가보안법, 형법 상 내란음모와 내란선동 적용에 반대한다.

-국정원의 공안탄압에 맞서 통합진보당을 포함한 진보ㆍ좌파운동을 방어하자.

-국정원을 해체하자.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정치사상과 활동의 완전한 자유를 쟁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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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신에서 반성폭력 운동 돌아보기 연속 워크샵 두 번째를 진행합니다

사노신에서 <반성폭력 운동 돌아보기 연속 워크샵> 두 번째를 진행합니다.

이번에는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2003년 <현장노동자신문> 김정수 언어성폭력 사건을 통해 당시 사회주의 운동단체들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입장들을 돌아보고,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을 둘러싼 입장들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남길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날짜 : 2013.8.27. 화요일 저녁 7시
장소 : 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회의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경향신문사 별관 2층)

문의 : 010-7647-7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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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가

  • 분류
    여성
  • 등록일
    2013/08/06 18:14
  • 수정일
    2013/08/06 18:1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2011년 7월, 서울시립대 <대학문화> 교지편집위원회 MT에서 성폭력사건이 발생했다. 다함께 회원이던 대학문화 편집장과 편집위원이 함께 활동하던 여성 활동가에게 강제로 야동을 틀어놓고 보게 한 것이다. 이들은 이를 원치 않았던 여성 활동가에게 계속해서 성적 농담을 하며 거부의사를 묵살했다. 피해자는 MT 이후 1년이 넘게 다함께 측에 문제해결을 요구했지만, 다함께는 이 문제가 개인의 문제일 뿐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며 아직까지 묵묵부답이다. 피해자가 제기했던 성폭력 사건의 정당성을 더욱 널리 알려내기 위해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지모임>의 류한수진 동지가 글을 기고해주셨다. 많은 독자들의 지지와 응원이 이어지길 바란다. 기고 기사의 관점은 사노신의 입장과 다를 수 있다. [편집자]


'노동자연대 다함께의 성폭력 방임을 폭로합니다'


…제가 계속 거부를 하는데도, 강제로 야동을 보여주고 과도한 수위의 성적 농담들(“임신은 어떻게 하는지 아냐?”고 묻고 대답하기를 강요하는 등)을 했습니다. … 그 이전부터 … 일상적으로 섹드립을 쳤었고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부적절한 언사를 고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 다른 다함께 회원들에게 이 사건에 대해 털어놓았으나 그들은 … 개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다함께의 지도부 중 한 명에게도 이 문제에 대해 조언을 구했으나, …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 결국 지쳤고 직접 폭로할 용기가 없어 이 사건을 묻어두게 되었습니다.

-'노동자연대 다함께의 성폭력 방임을 폭로합니다!' 중에서(2012.11.16.)

2012년 11월, ‘노동자연대 다함께’는 한 차례의 논란에 휩싸였다. 16일 새벽, ‘다함께’에서 1년여를 활동해온 한 여성 활동가가 ‘‘다함께’ 회원이던 시기에 활동하던 단체에서 성폭력을 당했으며, 가해자 중에는 ‘다함께’ 회원도 있었고, ‘다함께’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도 방임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사건 이후에도 반성의 기미 없이 성폭력적인 언행을 계속하였고, 이것이 문제가 있다고 느껴서 몇 차례나 ‘다함께’ 활동가들에게 사건에 대해 상담하거나 해결을 촉구했지만 번번이 묵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로 충격적인 것은 이 글에 대한 ‘다함께’의 반응이었다. 글이 올라온 직후, 가해자로 지목된 회원은 물론 다함께의 다른 회원들 여럿이 집단적으로 욕설과 인신공격으로 점철된 악성 덧글을 달고 SNS에 글을 올려 피해호소인을 거짓말쟁이, 음해 세력, 정신이상자로 몰고 가기 시작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다함께’의 중앙위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수십 명의 다함께 회원이 동조하는 덧글을 달거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르는 등의 방식으로 동조하였다. 한 회원은 장문의 입장서를 올려 피해호소인이 연애결별의 앙갚음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으며, 이를 읽은 활동가들 몇몇이 '2차 가해'라고 지적하자, '다함께' 회원들은 '2차 가해를 이유로 토론을 봉쇄한다'며 이들을 교조주의자로 몰아갔다.

가해지목인들은 피해호소인이 시청을 거부한 것은 공포영화를 볼 때의 반응[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하는 반응]과 같은 것이며, 피해호소인이 성적으로 문란했기 때문에 교육을 위해 동의를 받고 보여준 것이고, 성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농담을 주고받다가 포르노까지 보게 된 것이라는 등 모순되는 주장을 늘어놓으며 피해호소인을 거짓말쟁이나 정신이상자로 몰고 갔다. 수많은 '다함께' 회원들은 이 주장을 덮어놓고 받아들이면서, 이 사건과 관련하여 ‘다함께’를 비판하는 활동가들을 ‘진실을 모른 채 부화뇌동하는 이들’이나 ‘원래 ‘다함께’를 싫어하는 이들’이라고 폄하하였다. 가해지목인 정**는 급기야 피해호소인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까지 했고, 한 대학에서는 '다함께' 회원들이 총학생회장을 찾아가 '다함께'를 비판하는 자보를 붙인 사람을 고소자 명단에 추가하겠다며 누가 자보를 출력해갔는지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엽기적인 일까지 일어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함께'의 대응은 좀더 지능적으로 바뀌었다. 사건이 폭로된 지 일주일 정도 지나자 '다함께' 회원들의 대부분은 사건에 대해 침묵하기 시작했다. 대신 갑자기 'Duckling Hyeon'이라는 계정을 사용하는 익명의 '다함께' 회원이 SNS에 글을 올려 자신이 정**의 대리인을 맡기로 했으며,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다함께'를 탈퇴한다고 밝힌 후 피해호소인과 지지모임 회원들을 정신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Duckling Hyeon'은 피해호소인이나 지지모임에 대한 온갖 욕설과 인신 공격으로 가득찬 입장서를 거의 매일같이 자신의 SNS에 게재하고, 피해호소인이 성적으로 문란하였다거나 정**를 운동 사회에서 영구추방하려고 주장한다는 등의 거짓말을 퍼뜨리고, 심지어 지지모임 회원에게 '까불던데 나랑 한 번 만나자'는 위협의 메시지를 보내거나 '가만 안 두겠다. 죽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하는 등 실로 다양하고 악질적인 방법들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다함께'의 일반 회원들 대신 '다함께'에서 여성주의자를 자처하는 활동가들이 'Duckling Hyeon'의 입장을 지지하는 글을 올리거나 연대단체에서 피해호소인을 험담하는 등 보다 온건한 배후 지원에 나섰다. 그러면서도 '다함께'는 공식적으로는 'Duckling Hyeon'은 '다함께'와 관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사건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할 개인적 문제이므로 '다함께'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사건이 폭로된 이후로 6개월이 흘렀다. 그 동안 피해호소인을 지지하는 활동가들이 모여 피해자 지지모임과 사건 해결을 위한 연대회의를 결성했고, 피해호소인은 이 단체들을 통해서나 개인적인 수단을 통해 계속해서 피해를 호소하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거듭거듭 설명해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건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피해호소인의 요구와 입장에 대해서는 왜곡된 소문들이 떠돌고 있다. 왜 이렇게 상황에 진척이 없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어떻게 이런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다함께'의 행동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운다는 활동가들이 어떻게 이런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을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는 진보단체가 내부의 불의를 지적하는 입장을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묵살해버릴 수 있었을까? 해방을 지향한다는 정치 조직이 어떻게 조직의 힘을 이렇게 비열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피해호소인이 시종일관 제기하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는 '다함께'가 반성폭력 교육이나 내규 등 여성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다함께'가 그 스스로 역설하고 있듯 낙태나 재생산권, 여성 노동 등의 부문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점을 고려하면 다소 의외스럽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에서도 '다함께'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와 민주노총의 무책임을 사정없이 질타한 바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다함께' 내부에서 성적 권력관계에 대한 성찰은 거의 전무하였고, 심지어 '여성 차별에 반대하면 됐지 여성주의가 왜 필요하냐'라는 발언까지 서슴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부 간부조차도 '여자가 숙박시설에 같이 가는 것은 관계에 동의한다는 뜻이므로 숙박시설에 따라갔다가 성폭력을 당한다면 거기엔 피해자의 책임도 있다'는 식의 인식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데이트 강간이나 가정폭력, 아내나 여자친구에게 '뒷바라지' 시키기 등의 불평등한 성역할 구분이 이루어져도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여자가 사회를 봐야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이유로 여성에게 사회를 시키는 일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 등 일부 회원들의 경우 성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해방이라는 이상한 개방주의가 진보적인 것처럼 주장하고 다니기도 했다. 요컨대 '다함께'가 외형상 여성운동에 매우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다함께' 회원들이 자기 삶과 사고, 언행에 자리잡은 성적 억압과 차별을 성찰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함께'에게 있어 여성주의는 결국 실천을 규율하는 원칙이 아니라 단순한 구호나 동원 기제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다함께'가 피해호소인의 문제제기를 번번이 묵살하고 심지어 피해호소인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을 여성주의의 부재 탓으로만 돌린다면, 이는 사태를 왜곡하는 셈이 될 것이다. 여성주의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조직이라 하더라도, 조직에 대한 문제제기에 조금이라도 열려 있다면 내부 성폭력 문제에 이런 식으로 대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다함께'가 보여준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나 많은 '다함께' 회원들이 조직에 대한 어떤 문제제기도 은폐하고 억압함으로써 조직의 체면을 보존해야 한다는 오도된 조직보위론에 철저하게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의와 개인의 인권 사이의 이분법을 운운하기 이전에, 이는 조직의 이해관계와 대의를 동일시하는 유아적 사고방식, 조직의 입장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덮어놓고 따르는 무비판적 추종, 조직의 행위를 객관화할 능력의 철저한 결여 등, 그야말로 전형적인 종파주의의 사례라 할 만하다. 운동 전체의 관점에서 조직을 볼 수 있는 시야, 조직의 입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따져보고 스스로의 입장을 정할 수 있는 용기와 주체성, 조직의 오류를 인정하고 그것을 시정하도록 이끌 수 있는 반성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때 조직에 대한 믿음과 일체감이 어떤 괴물을 낳을 수 있는가를 '다함께'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비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실 위에서 던진 질문들은 이번에 처음 던져지는 것이 아니고, 이 사건에 대해서만 제기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함께'의 행태들은 정도에 있어 더 노골적이고 폭력적일 뿐,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비롯해 조직이 내부의 인권 문제를 묻고 넘어가려고 할 때 흔히 등장하는 양상들과 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100인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여성주의자들이 운동사회 성폭력에 대해 본격적으로 포문을 연 지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다른 말로 해서, 이는 '다함께'가 이번에 보여준 끔찍한 면모들이 운동 사회에, 또 한국 사회에 널리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피해호소인의 목소리는 단순히 ‘다함께’에 대한 항의뿐만 아니라, 운동 사회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성폭력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 : 공동의 과제, 모두의 몫


피해호소인이 '다함께'에 요구하는 것은 이번 사건이 성폭력이었음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반성폭력 내규와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가해자들에 대한 재교육을 실시하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요구는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제대로 논의되어 보지도 못했고, 피해호소인이 가해자들을 매장시키려고 한다거나 '다함께'를 파괴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왜곡된 구도만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다함께’에 응당한 책임을 묻는 것을 생략하고 모든 것을 성폭력적 문화나 억압적 구조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변화는 구체적인 계기들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건 하나하나가 투쟁의 고리가 되지 못하고 '구조'나 '문화'의 문제로 일반화되고 추상화될 때, 그 구조와 문화를 타격할 구체적인 지점은 유실되고 만다. 성폭력적 문화를 바꾸는 데 있어서, '성폭력을 저지르고도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는 없다'는 선례를 만드는 것은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게다가 자신들이 말하는 대의와 이렇게 정면으로 모순되는 행동을 한 조직이 정치적 평가를 받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책임한 슬로건만 횡행하는 것을 막고 운동 사회의 자정작용을 꾀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성폭력을, 나아가 운동 사회의 병폐와 무책임을 물리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가 아무리 힘이 있다 하더라도 옳지 못한 일을 저지른 이(조직이든 개인이든)를 단호하게 평가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워야만 하며, 만약 그가 책임 회피하고 불의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그를 더 이상 동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운동 사회가 지금 사건에 대해서 해야 할 첫 번째 대응이다.

그럼에도, 사건의 해결이라는 것이 단순히 ‘다함께’를 응징하는 데서 그친다면, 혹은 '다함께'가 태도를 시정하는 계기가 되는 데서 그친다면, 이 투쟁의 의미는 애초의 문제제기가 지닌 함의에 비하면 매우 협소해지고 말 것이다. 또한, '가해자의 태도 변화'라는 목표를 싸움의 종착점으로 삼게 되면 자칫 투쟁 전체가 소모적인 과정이 되기 쉽다. 무엇보다 ‘다함께’가 설령 변한다 한들, 다시 ‘다함께’에 돌아갈 마음이 없는 피해호소인의 삶에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다함께’에 속해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는 연대 세력에게는 이 사건이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누군가를 도와준 것 이외의 어떤 경험으로 남을 수 있을까?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운동 사회의, 나아가 사회 전체의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보다 확장된 시야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다함께'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다함께'의 어떤 지점에 대해 문제제기가 되고 있는 것인지, 왜 그것이 바뀌어야 하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을 때, 즉 이 사건의 쟁점들을 운동 사회 성원들이 공유하는 경험과 과제들에 연결지을 수 있을 때, 사건의 해결은 곧 우리의 삶과 연관된 변화의 과정으로 정립될 수 있을 것이고, 피해호소인에 대한 연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한 시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함께 손잡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피해호소인의 치유라는 측면에서도 절실히 필요한데, 왜냐하면 피해호소인이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고 피해로부터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그녀가 받아야 했던 고통을 보상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사건 해결을 위해 투쟁하는 시간들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과정으로 남기 위해서는, 피해호소인이 불운을 당했다가 힘들게 구제받은 사람이 아니라 운동을 진전시킨 주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것이 ‘다함께’ 뿐만 아니라 피해호소인이 앞으로 살아나갈 공간에서도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사건에서 '다함께'의 행동과 거기에 대한 문제제기는 분명 운동사회의 현실에 대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일단 무시하고 이 투쟁의 의미를 단순히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데 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운동사회 전체라는 관점에서 원칙을 확립하는 효과를 낳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투쟁은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건 해결의 주체는 지지모임과 다함께뿐만 아니라 좁게는 운동사회, 넓게는 한국 사회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의 해결은 ‘다함께’가 반성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 사건이 던져주는 문제의식을 받아안고 스스로 변화하는 데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전자보다 후자일 수도 있다. 피해자의 문제의식이 올바로 전달되고, '저들의 악덕'이 아니라 '우리 삶의 문제'로서 풍부하게 논의되고, 변화를 이끄는 계기가 되는 것- 이 사건의 해결을 그렇게 정의한다면, 지금 우리 모두는 '다함께' 못지않게 사건에 대한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는 셈이다.


류한수진  다함께대학문화 성폭력사건 피해자지지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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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 운동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 분류
    정치
  • 등록일
    2013/08/06 18:09
  • 수정일
    2013/08/06 22:5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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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1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주최로 조직 내 민주주의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사노위 분열, 통진당 사태 등에서 나타났듯이 한국의 운동진영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는 최근까지도 지극히 편의적이고 도구적인 경우가 많았다. 

운동진영에서는 대개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리들을 부르주아민주주의라고 불신하고 이를 대체하는 개념으로 노동자민주주의 혹은 민주집중제를 자신들의 조직원리라고 표현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민주집중제에 대한 강조는 흔히 중앙의 과도한 권력, 소수의 독재, 반대파에 대한 억압으로 귀결되곤 했다. 

운동진영이 그동안 사회의 민주화를 주장하면서도 내부에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해왔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 토론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피상적인 토론에서 벗어나 조직 내 민주주의와 민주집중제에 대해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집중의 논리로 변질된 민주집중제


민주집중제를 조직원리로 내세운 운동단체들은 많은 경우 조직의 통일성, 혹은 지도부의 지도력에 대한 이의제기에 대해 조직의 절차를 내세워 폭력적으로 억누르는 모습을 보여 왔다. 이는 특히 여성주의적인 문제제기에 대해 그랬던 사례가 많았다. 여성주의에 대한 동의성이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성폭력 가해자들을 감싸 안고 문제 제기를 외면해온 조직들은 <다함께> 같은 정치단체부터 민주노총, 전교조 같은 노조조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하지만 이런 양태는 비단 여성주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운동진영에서 민주집중제를 내세워 조직 내 이견을 억누르고 묵살하는 경우는 다른 예들에서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8년 기아화성비정규직지회 김수억 집행부는 정규직노조의 집요한 조직통합 공세에 결국 굴복하고 이를 통과시키기 위한 조합원 총회를 소집했다. 당시 이동우 부지회장과 조직국장 2인은 비정규직지회 집행부를 사퇴하고 자유로운 개인의 입장에서 부결 선동에 나섰다. 이에 대해 김수억 집행부는 두 동지가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기아 사태 당시 비정규직지회 집행부의 입장을 지지하던 노동자정치협회(이하 ‘노정협’)에서도 이에 관련한 내부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이견을 제기한 소수파 동지들이 노정협에서 탈퇴하는 것으로 결과했는데, 내부 논쟁이 탈퇴로까지 이어진 이유는 다수파가 기관지인 <노동자정치신문>에 소수파의 이견을 게재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유사한 예가 2011년 사회주의노동자정당공동실천위원회(이하 ‘사노위’)에서 되풀이되었다. 사노위가 발행한 <사회주의 지금 여기에!>라는 선전용 소책자에 대해 당시 사노위 회원이던 임천용 활동가가 서울지역위원회가 발행하는 온라인 신문에 비판 기사를 싣자 사노위 지도부는 조직 내부의 혼란을 부추기고 조직 사업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기사의 삭제와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이 사건은 소수파가 사노위에서 탈퇴하는 것으로 결과했다.


민주집중제란 무엇인가


모두 알다시피 민주집중제는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의 줄임말이다. 이 용어는 한국에서 흔히 중앙집권을 강조하는 용어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민주집중제라는 말이 나온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그것은 중앙집권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였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 수 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하 ‘러시아사민당’) 건설 운동을 주도한 레닌을 비롯한 ‘이스크라 파’는 중앙집권을 매우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는 광활한 러시아 전역에 산개해 있는 각기 배경이 상이하고 자치적인 성격이 강한 지역서클들을 하나의 단일한 정당으로 묶어 세워야 했던 러시아 당 건설 과정의 특수함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스크라 파’가 캠페인 한 강력한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반대는 사실상 첫 번째 당 대회였던 1903년 러시아사민당 2차 당 대회에서 심각하게 나타났다. 레닌의 주장들은 광범위한 반대 견해에 부딪쳤고 종국에는 ‘이스크라 파’ 자체가 분열하는 결과를 낳았다. 가장 강력한 반대파였던 유태인 동맹 분트가 자치권을 주장하다가 당 대회에서 퇴장하면서 레닌 지지자들은 간신히 다수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반대파들은 이후 당 대회 결정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레닌은 <일보전진 이보후퇴>라는 저작을 써서 당 대회 의사결정 과정을 세세하게 분석하면서 다수파(볼셰비키)의 합법성을 강조하고 당 대회 결정에 대해 소수파(멘셰비키)가 복종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책에서 레닌은 소수파를 “귀족적 무정부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조직된 당”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원리로 당내에 지도적인 중앙기관의 형성, 다수자에 대한 소수자의 복종, 전체에 대한 부분의 복종, 상급기관에 대한 하급기관의 복종, 중앙권력의 지도 아래에서의 업무의 분업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당의 위계와 규율에 대한 레닌의 강조는 반대파 뿐 아니라 독일사민당에서 활동하던 폴란드 사회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을 받았다. 로자는 사회주의정당이 중앙집권제를 추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레닌의 경우는 정도가 지나쳐 “창조성과 자발성을 질식시키기 쉬운 상하명령식 발상에 다름”아닌 “초중앙집권주의”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여기에 레닌은 자신이 어떤 새로운 원리를 창조하려 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조직원리를 적용하려 했을 뿐이라고 응수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 저서(<일보전진, 이보후퇴>) 전체를 통하여 내가 옹호한 것은 어떠한 당 조직의 어떠한 체계에서도 적합한 초보적인 원칙이다.”

사실 레닌이 제기한 여러 원리들은 당시 독일사민당이나 대다수의 정당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조직 원리들이었으므로 그의 답변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그를 “진짜” 초중앙집권주의자로 만들어온 한국의 많은 운동집단들이 잘못됐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레닌이 유럽 사민당들에 비해 상급기관에 대한 하급기관의 복종을 매우 강하게 강조했던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민주집중제와 러시아 당건설 운동의 특수성


레닌이 제기한 중앙집권주의가 그의 주장대로 유럽사민당들의 운영원리와 특별히 다른 것이 없었다면 왜 굳이 ‘민주집중제’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해야 했는가? 이는 러시아사민당에서 실제로 민주주의 원리들이 많은 부분 제약을 받아왔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당의 완전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경제주의자들과 논쟁 속에서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공개제와 선출제가 시행되어야 하는데 당시 러시아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공개제라는 것은 당내 벌어지는 모든 활동과 논쟁이 당 내외에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선출제는 말 그대로 당의 모든 기관은 아래로부터 선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1905년 이전까지 거의 정치적 자유가 허락되지 않던 러시아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1905년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사민당에서는 상급기관에서 하급기관을 임명하거나 기관에서 성원을 자기 충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닌은 대신 보완책으로 소수파의 의견에 대한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완전하진 않지만 “광범위한” 공개제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비합법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 대회 의사록이 비록 해외에서였지만 공개발간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물론 대회의 구체적인 장소, 일시, 참가자들의 신상은 공개되지 않았다.) 현실의 한계가 있지만 부분적으로라도 민주주의 원리들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 2월 혁명은 우리나라의 1987년 6월 혁명처럼 부분적인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귀결되었다. 어느 정도의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듯 보였고, 이를 계기로 레닌은 중앙집권제의 기초 위에 그동안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온 민주주의 원리들을 크게 확대해서 실시하려 했다. 즉, 당의 하부에서 상부까지 광범위한 선출제를 실시하고 선출된 기관들에게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 당원들에 보고하는 엄격한 의무를 지우며 상급기관은 임기 중이라도 경질될 수 있게 하는 조치들이 공개제의 더 넓은 확대와 함께 도입되었다. 

중앙집권주의에 민주주의라는 말이 더해져서 민주집중제라는 새로운 조어가 등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따라서 민주집중제라는 것은 사실상 다수결, 대의제, 상임기관에 권력의 위임, 중앙의 경질가능성 등 일반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 기구들에서 시행되는 조직원리와 별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다. 


 

민주집중제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조직원리인가


때문에 우리가 사회주의를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실현으로 볼 때, 의사결정 모델로서 민주집중제는 역시 한계가 많은 조직원리이다.

1921년 3월에 열린 소련공산당 10차 대회는 신경제정책과 분파금지 조치가 통과된 대회로 유명하다. 그러나 분파금지 조치와 함께 노동자민주주의가 강조된 결의가 통과되었다는 것은 대개 망각되고 있다. 이 대회에서 통과된 <당 건설 문제에 대해여>라는 결의는 “혁명의 모든 단계에서 통용되는 절대적으로 올바른 조직형태”는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해서 전시공산주의 시대에 도입된 군사화된 당 조직 형태가 불러일으킨 폐해를 해소하기 위해 노동자민주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당 조직형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결의에서 노동자민주주의의 원리로 거론된 것은 기존의 민주집중제의 원리들에 “당원 전체”에 의한 의사 형성과 문제해결이라는 원칙, 중요한 모든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 비판의 “완전한” 자유를 추가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결의는 분파금지가 일시적인 조치일 뿐이며 민주집중제 역시 절대적인 당의 조직원리는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반면 스탈린 시대에 들어서 민주집중제는 당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절대적인 조직원리로 변질되고 나아가 모든 조직에 일반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 원리로 확대되었다. 그로부터 민주집중제는 당뿐 아니라 소비에트와 노조 등 대중조직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조직원리로 인식되었다. 한국에서도 노조나 학생회 같은 대중조직이 민주집중제를 기본 조직원리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스탈린주의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민주집중제는 높은 정치의식을 갖고 있다고 상정된 당원들을 전제로 하고 있는 조직원리이다. 즉, 적극적으로 당의 정보를 알려하고 자발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는 성원들을 전제한 개념인 것이다. 하지만 조직 구성원들의 의식 편차가 큰 대중조직에서 민주집중제는 관료주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대중조직에서는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에서 흔히 보듯이 중요한 결정이 대의기구가 아니라 집행기구로 편의적으로 위임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조합주의자들과 관료들이 하급기관의 상급기관에 대한 복종 같은 원리를 절대화해서 투쟁을 억압하고 가로막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흔히 한국 노동운동의 빛나는 전통이라고 칭송되는 총회민주주의는 민주집중제와 대립되는 것이었다. 과거 민주노조운동 초창기에는 조합원의 의사에 거슬러 체결권을 행사한 노조 위원장을 조합원 총회에서 곧바로 소환하고 그 자리에서 새롭게 지도부를 선출하곤 했다. 이런 총회민주주의의 전통은 선출된 교섭권자에 대한 권력 위임을 부정하는 직접민주주의의 형태를 띠었다. 민주집중제의 핵심원리 중 하나가 권력의 위임이라는 점에서 볼 때 총회민주주의는 민주집중제와 상충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대중조직의 지향점이 민주집중제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소비에트, 노조, 학생회와 같은 대중조직은 최대한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하는 것이 맞다. 민주집중제가 주장하는 상임기구로 권력의 위임은 현실적 한계로 말미암은 것일 뿐이며, 현실을 고려하면서도 그것을 절대화 하지 않고 대중조직 속에서 지속적으로 직접민주주의 요소들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주의정치조직과 민주집중제


그렇다면 당이나 정치조직에서는 어떠한가? 민주집중제를 마치 일반적인 민주주의와 별개의 특수한 조직원리인 것처럼 강조하는 해석들은 정치조직에서도 민주주의를 침해할 때가 많았다. 요즘에도 운동조직에서는 절차민주주의를 부르주아민주주의라고 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비밀투표의 원리가 부정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대표자들이 투표권을 위임받은 간선제나 대의기관에서 투표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회원총회와 같은 평의회 구조에서 공개투표는 개인의 입장 표명을 어렵게 만든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에서는 모두가 대등한 주체라는 관념은 허구적일 때가 많다. 어떤 조직에서나 개인들 사이에 권위와 권력의 차이가 있게 마련이며 이에 따른 권력관계와 진영논리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공개투표는 타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자기 의사와 다른 결정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일반 당원이나 회원이 조직 앞에 개인으로, 진정으로 대등한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비밀투표와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수용해야 한다. 노동자민주주의는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이룩한 성과 위에서 그 형식적인 절차주의를 뛰어넘는 실질적이고 고도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것들을 그냥 부정한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집중제를 집중과 통일을 강조하는 조직원리로 이해하는 해석은 여전히 분파금지를 민주집중제 조직의 중요한 원리로 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대개 분파를 일반적인 반대파와 동일시하는 매우 경직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분파(fraction)란 독자적인 정강과 행동원리를 가진 조직 내 조직에 한정되는 개념이다. 때문에 레닌 역시 반대파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며 조직의 건강성의 표출이라고 생각했지만 분파에 대해서는 당의 통일성을 근간에서 뒤흔드는 것으로 보고 경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1921년까지 러시아사민당이 분파를 금지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분파는 금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견그룹의 출판물 발행의 보장, 공개적 선동의 보장 등 당내 민주주의를 더욱 적극적으로 실현함을 통해 끊임없이 조류(일반적인 의견그룹)화 시켜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사실 1912년 프라하 당 협의회에서 자신을 독자적인 당으로 선언할 때까지 볼셰비키 자체가 러시아사민당의 분파였던 것이다. 

분파금지는 크론슈타트 반란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내려진 임시 조치였을 뿐이다. 당내 소통과 민주주의가 제약될 때 반대파 혹은 소수파가 자신의 견해를 관철할 수단 중의 하나로 분파를 형성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민주집중제를 넘어서


민주집중제의 여러 전제들이 오히려 해악을 가져오고 있는 현실에서 그 올바른 이해뿐 아니라 과감히 넘어서려는 시도도 필요하다. 민주집중제는 보통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이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된다. 

레닌이 제시한 기준은 당이 어떤 입장으로 캠페인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결정된 이후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토론의 자유와 이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권리가 있지만 일단 캠페인이 시작되면 통일된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준도 애매하며 실제로는 개인이나 소수파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억누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아주 노골적인 이적행위가 아닌 이상 캠페인 기간에도 이견자들의 활동이 전면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볼셰비키 역사를 레닌의 저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역사로서 살펴본다면 그런 행동들에 대한 제재가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시월 혁명 당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봉기 계획을 공개하는 명확한 이적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제명되지 않았다. 조그만 이견과 실천의 차이를 가지고 제명이나 축출을 반복해온 우리 조직운동의 역사를 생각하면 놀랄 만큼 관대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 

레닌의 주장처럼 민주집중제는 지금 사회에서 불가피한 일반적인 조직원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다수결과 권력 위임은 상시적으로 조직 구성원 전부가 모여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강제되는 방식이다. 때문에 오히려 정치의식이 높은 활동가들의 결사체로서 정치조직은 현실적인 조건을 고려하되 가능한 한에서 더욱 과감하게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

형식 절차나 일회성 투표행위보다 다양한 공식·비공식 통로를 통해 조직 내외 소통을 활성화시키는 노력, 직접민주주의를 바로 구현할 수는 없다 해도 의사결정구조에서 아래로부터의 의견이 직접 관철되는 구조, 예를 들어 상시 소환, 상시 선거, 선출자에 대한 상시 통제 등 적극적인 고민과 다양한 시도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들은 규약·규정 놀음을 넘어 조직 전체의 성실하고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수 활동가에 대한 개인적 충성이나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흔히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은 대개 유능한 몇 사람에게 일이 몰리다가 그것이 그대로 권력으로 고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활동가들의 결사체인 정치조직에서는 선출제를 넘어 추첨을 통한 직무 순환 같은 직접민주주의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해 보는 것도 고려해볼만한 일이다.



서클주의와 폐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실 한국에서는 민주집중제가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다. 노정협과 사노위의 예에서 나타나듯이 민주집중제의 기본적인 운영원리들마저 이해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 조직운동에서는 보안을 강조하면서 내부 논쟁이나 문제의 공개를 막은 적이 많았다. 이건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닌데 최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성폭력 사건에 관련해서 회원들이 SNS를 통해 논의했다는 이유로 제명조치를 내렸다. 이런 행위들은 조직을 더욱 폐쇄적으로 만들 뿐이다. 

자족적인 서클이 아니라 공조직이라면 조직 내의 모든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내부 논쟁을 공개적인 논쟁으로 이끌어야 한다. 예컨대 <일보전진 이보후퇴>는 당 대회 전 과정을 세세하게 공개했는데, 이런 일은 소위 한국 운동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운동진영이 폐쇄적인 서클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언젠가 국가 탄압의 최전선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사회주의 조직에서 보안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며, 지난 몇 년 동안 과거 비합법 시대의 역편향으로 무조건 공개를 지향했던 흐름들은 교정되는 것이 마땅하다. 실질적인 보안대책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무시된 무조건 공개가 선(善)이라는 노선으로의 갑작스런 전환은 불필요하게 조직성원의 신상을 노출시키거나 경찰의 수사에 대한 대응에 있어 진술거부 같은 중대한 원칙을 무시하는 행위로 귀결되었다. 

이런 일들은 결국 다수 조직성원들의 일상에 피해를 주는 것으로 결과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현실의 탄압을 방어하기 위한 보안대책과 민주주의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이 보호되어야 개인의 의사가 온전히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운동진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안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으로 보인다. 집중과 통일이 강조되며 조직 내부의 이견이 밖으로 공개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고, 강철같이 통일된 조직이 가장 우월한 조직이라는 관념 속에 조직 내 민주주의는 성장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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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일베는 왜 ‘광주’에서 폭발하였나

7월 23일 일간베스트 저장소 홈페이지 첫 화면. 기독교와 청소년, 여성, 전라도에 대한 비하가 주를 이루고 있다.


광주민중항쟁 역사왜곡 사건을 계기로 이미 일베에 대한 많은 분석이 나왔다. 이미 논란이 한차례 지나간 것으로 보이지만, “일베는 왜 ‘수지 입간판 성폭행 사건’에서 문제화되지 않고 ‘광주민중항쟁 역사왜곡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나”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할 지점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혹자는 일베가 국정원의 댓글 공작과 초청행사를 통한 실질적인 현물 지원을 바탕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조작’된 것이라며 그동안 이루어진 많은 분석들이 의미가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정원의 작업이 일베를 활성화할 수는 있었을지언정, 일베를 받치고 있는 광범위한 정서가 존재하지 않는 한 순간 접속 2만 명이라는 수치는 나오기 힘들다고 본다. 일베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일베는 여성, 이주자, 전라도, 민주화 운동 세대, 청소년 등의 집단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를 그동안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던 방식으로 표출하여 뜸하지 않게 여론화되었다. 이런 정서의 배경에는 스스로를 성적으로 무능력한 남성으로 여기는 ‘남성성의 위기 표출’, 일상이 된 경쟁 속에 형성된 ‘보편적인 루저 심리’, ‘정치에 대한 냉소와 허무주의’가 깔려있다.

일베는 여러 언론보도를 통해 ‘위험한 곳’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매장 당해야할 존재들로 낙인찍힌 것은 5.18 광주민중항쟁이 북한 개입에 의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 시작하면서이다.



왜 ‘광주’가 문제가 되었나

누군가에게 있어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일베의 ‘왜곡’은 엄청나게 큰 문제일 수 있다. 특히 민주화 운동의 계보 속에 광주민중항쟁을 위치 짓는 것이 중요한 386 민주화운동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은 북한이 개입하여 일어난 폭동’이라는 주장을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청춘을 바쳐 이룩한 민주화의 결실이 땅에 짓밟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그들의 ‘민주화’가 한국 역사에서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다고 여기는 그들에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물론 민주화 운동 역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 건드릴 수 없는 성역으로 여기는 것은 이미 지배세력의 한 축이 되어버린 386세대의 입지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해온 점도 분명하다. 아무리 민주당이 무능력해도 친일독재의 계보에 있는 새누리당은 아니지 않느냐는 정서 따위가 그렇다.

따라서 주목해야할 것은,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가지는 의미를 사회적으로 재확인함으로써 지배세력으로서의 힘 또한 재확인 할 수 있는 ‘386세대의 사회적 위치’를 봐야한다. 한윤형이 ‘네오라이트는 누구의 유산인가’(시사인 298호)라는 글에서 정리한 것에 비춰 일베를 둘러싼 논쟁의 지형에 대해 말하자면, ‘깨어있는 시민’이라 스스로 칭하는 세력이 386세대와 연합하여 386 이후 세대의 냉소주의, 허무주의와 맞서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386세대는 한국에서 이러한 여론지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세력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386세대가 일베의 역사왜곡에 대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라는 반응을 보인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민주화 운동 역사의 장본인이기에 이를 부정하는 기존의 보수세력이나 그들을 따르는 ‘젊은 것’들에게 민주화 운동 역사에 대해 평가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이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에 대한 역사교육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제출한다. 그런데, 이 문제가 역사교육을 잘 받으면 해결될 문제일까? 이런 인식은 원인과 결과가 뒤집힌 것이다. 단적으로 책 많이 보고 공부 열심히 한다고 정치적으로 우파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문제는 그 역사를 받아들이게 하는 현재의 삶이다.

386 이후 세대에게 있어 386세대는 직장에서는 권위적으로 굴고, 민주화 운동 했다면서 근로기준법도 안 지키고, 비정규직이거나 실업자인 나에게 온 데서 ‘갑’질 하고 있고, 두 번이나 집권했는데 내 삶은 나아지는 게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의 민주화 운동 담론은 그들의 현재 삶과의 모순을 더 극적으로 만든다. 386세대가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신성시하는 모습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모순적인지는 386 이후 세대들이 자신의 삶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두리반 투쟁에 함께하고 여의도소음대폭격 등에서 공연하기도 했던, 일베와는 정치적으로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는 ‘밤섬해적단’이라는 밴드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386세대를 비꼬기도 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퇴근 후에 넥타이를 존나 풀고 찾아와
옛 추억에 잠겨 노래 한곡 워어어어
케케묵은 노래들을 불러대며 울어대네
아름다운 젊음이여 흘러간 내 청춘이여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밤섬해적단, <386 sucks>

 

물론 촛불운동의 가장 큰 귀착점이 나꼼수라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386세대의 정치를 어떤 방식으로든 공유해나가는 386 이후 세대의 층이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386 이후 세대의 광범위한 반새누리당 정서 속에 386세대의 담론이 겹쳐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세대를 중심으로 일베와 같은 집단이 등장한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386세대가 신자유주의의 추진과 함께 하나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하여 자신들을 삶을 망친 것 때문이 아닐까? 386세대의 현재 모습으로부터 그들이 신성시하는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비꼬기 시작한 것이지, 보수세력이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왜곡하고 지금 세대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서 이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운동 역사를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신성시 하면서 386 이후 세대들을 역사에 무지한 세대로 규정하고 교육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오히려 일베가 발 딛고 있는 정서를 강화할 것이다. 냉소와 분노, 결집력을 키울 가능성이 크다.

혐오정서의 배경이 교육이 아니라 그들의 배제된 삶이라면, 지금 필요한 것은 아마도 그 집단들의 삶에 기반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정치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촛불운동 내내 확인되었던 좌파의 공백 아닐까. 일베에 의해 촛불운동이 386세대의 담론과 함께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촛불운동이 ‘다른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가능성을 비췄을지언정 386세대의 민주주의를 결국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좌파는 어떤 마땅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왜 ‘수지 입간판 성폭행 사건’은 이 정도의 저항을 불러오지 않았나

한 남성 일베 이용자가 광주 출신 연예인 수지의 사진이 사용된 입간판을 성폭행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홍어산란기’라는 제목으로 게시판에 올렸다. 게시자는 얼마 전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비교적 크게 언론에 보도되기는 했지만, 민주화 운동 역사 왜곡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불러왔다. ‘미친 놈’ 혹은 윤리적으로 도를 넘어선 경우로 여겨지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사건은 대대적인 일베에 대한 규탄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이 사건은 사실 여성들이 어느 장소에서나, 어떤 방식을 통해서나 남성들의 성적 지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확인하는 개인적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성적 매력을 지닌 여성’이 어떻게 다뤄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기 있는 여자연예인이 왜 이런 대상이 되는지 의아할 수 있으나, 실제로 군대나 남중남고처럼 젊은 남성들만 모여 있는 집단에서 TV 등에 등장하는 여자연예인들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면서도 동시에 쌍욕을 하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인 반응이다. 여성은 언제든지 남성의 욕구를 위해 성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대상이므로, 그 여자연예인이 지금 손에 잡히지 않지만 ‘네가 얼마나 잘난 여자이건 간에’ 어차피 남성의 성적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그 쌍욕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사실 이 사건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성별권력이 드러나는 사건’에 대한 흔한 반응과 다르지 않다. 성별권력은 대부분 권력이 아닌 개인의 윤리 문제로 다뤄진다. 각기 조금씩 다른 색깔을 지닐지언정, 성별권력에 대한 이런 사회적 태도는 여론형성을 주도하는 세력들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된장녀, 김치녀라는 유행어에 깔려 있듯이 여성혐오 정서는 일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이주민 혐오도 마찬가지다. 이주민에 의한 범죄율이 전체 평균에 비해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범죄 사건과 인육 및 장기밀매에 대한 소문들을 뒤섞어 아주 강도 높은 혐오 담론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 386세대를 포함한 여론 주도층이 강하게 맞선 적이 없다. 오히려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편승하는 여론을 찾아보기가 더 쉬울지도 모른다. 여성혐오, 이주민혐오는 분명 일베와 같은 특정 집단이 아닌 한국사회 전반의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일베에 대한 낙인은 일단 일베의 고립을 가져왔다. 그러나 일베를 특별히 비정상적인 공간으로 규정하여 사회적 여론형성에서 배제시키는 과정이 긍정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는 한 편으로 위험한 담론들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걸림돌을 놓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혐오정서가 오히려 사회 전반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것을 가리는 과정일 수도 있다.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 부분을 지적해온 임재성은 일베에 대해 “대중이 감히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한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2013/6/5 “일탈적 놀이 즐기는 누리꾼일 뿐이냐, 세력화 가능한 여론집단이냐”)

따라서 오히려 일베의 위험성을 주목해야할 지점은 이 부분이다. 한국의 여론 지형에서 역사왜곡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 쉽지만, 동북아의 강화되는 민족주의와 발맞춰 여성혐오와 이주민혐오 정서는 오히려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의 결집과 지지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베를 해프닝으로 받아들이고 넘길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형성한 담론이 사회 불안정의 심화가 왜곡된 방식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베 이용자들 중에 실제로 학력이나 자산 측면에서 높은 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담론이 형성되는 것은 사회 불안정의 심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불안이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할 것인지는 예단할 수 없다. 따라서 일베에서 드러난 사회적 불안의 담론들이 이후 어떤 계기로 강화되고 구체적인 형태로 결집할 것인지를 지속적으로 추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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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갈라진 재능투쟁, 다시 함께 날 수 있을까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3/08/01 10:36
  • 수정일
    2013/08/01 10:4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지난 6월11일로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이 2000일을 넘었다. 햇수로 6년째. 노동운동 역사상 최장기 농성투쟁이다. 하지만 더 큰 힘을 모아야 할 이 때 재능 해고자들은 소위 “종탑파”와 “시청파”로 나누어져 갈등을 빚고 있다. 이 문제가 지난 몇 개월 동안 수도권 운동진영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지만 정작 이와 관련해서 단체나 정치조직에서 입장을 낸 곳은 드물다. 대개의 경우 언급조차 피하고 있다.

이런 기묘한 침묵 속에서 SNS를 중심으로 개인들 간의 상호비방 수위가 도를 넘고 있다. 이 투쟁에 오랫동안 연대해온 여러 단체들과 개인들도 양 편으로 갈려 많은 활동가들이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박스] 재능투쟁의 역사와 의미

재능교육 학습지노동자들의 노조는 1999년 11월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재능교육 정규직노조와 구별하기 위해 재능교육교사노조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다가 2006년 학습지노조 산하로 편입되면서 재능교육지부로 명칭을 바꾸었다. 재능지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정규직노조로 비단 학습지노동자들 뿐 아니라 특수고용·간접고용노동자 투쟁의 선봉이 되어왔다.

99년에서 2002년 사이에 건설된 비정규직노조들은 김대중 정권과 자본의 극심한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붕괴했다. 하지만 재능교육교사노조는 설립 다음 해 7500여 명 중 절반이 넘는 3800여 명을 조직했으며 2000년에는 특수고용노동자 최초로 사측과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등 대중적 노조로 안착하는 듯 보였다. 이후 학습지노동자들의 투쟁은 대교, 구몬, 웅진, 한솔 등 다른 학습지 회사로 퍼져나갔고, 이를 바탕으로 2000년 11월 소산별체인 전국학습지산업노조가 출범했다.

재능지부가 지금처럼 소수의 조합원들만 남아 장기농성 투쟁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2007년 단체협상 과정에서 당시 이현숙 지도부가 사측이 요구한 수수료제도를 합의한 것이었다. 이 제도는 그만두는 회원의 비율이 커질수록 임금이 삭감되게끔 되어있어 학습지노동자들에게 2십여만 원에서 백여만 원까지 임금삭감이 예상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현숙 지도부는 조합원 찬반투표를 강행하여 불과 네 표 차이로 합의안을 가결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지도부의 사주를 받은 대리투표와 부정투표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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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현숙은 재능지부 지부장과 학습지노조 위원장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무리한 합의안을 밀어붙인 것은 산별노조로서 특수고용자들이 맺게 된 최초의 임단협 체결이라는 성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새 수수료 제도 도입으로 임금이 크게 삭감되자 많은 노동자들이 퇴사를 선택했다. 2007년 6천여 명이던 재능교육 교사노동자의 수는 한 해 만에 45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현장이 황폐화되고 부정투표가 드러나자 단협 개악에 반대했던 조합원들은 학습지노조와 재능지부를 모두 장악하고 있던 이현숙 지도부를 끌어내리고 새 지도부를 구성하여 2007년 말부터 농성투쟁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학습지노조 강종숙 위원장·유득규 사무처장, 재능지부 유명자 지부장·오수영 사무국장 체제가 만들어졌다.

이후 노조간부들은 차례로 해고 됐고 노동조합에 대한 극심한 탄압이 뒤따랐다. 2008년에는 이현숙 지도부가 개악한 단협 마저 사측에 의해 파기되고 2010년부터는 대대적인 노조탈퇴 공세가 시작되었다. 노조 탈퇴를 거부한 조합원들은 모두 해고되었다. 이 사태를 초래한 이현숙, 정순일, 최민정 씨 등 전지도부 측들도 2010년 11월 결국 해고되어 농성투쟁에 결합했다. 조합원은 11명으로 줄어들었고 재능지부는 해고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5년간 2000일 넘게 농성투쟁을 하고 있다.

가장 노사협조적인 상급단체로 알려져 있는 서비스연맹은 새 지도부 등장 이후 재능지부의 농성투쟁을 사실상 방치했다. 2011년 4월 재능 사측은 농성투쟁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서비스연맹을 통해 자신들의 안을 제시했는데, 해고자들의 단계적 복직과 복직유예기간 중 생계비 50만원 지급하겠지만 단체협약 체결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서비스연맹은 이 안을 갖고 해고자들과 논의했으나 해고자들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안을 받고 복직할 수 없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전부터 결합도가 떨어지고 있던 서비스연맹은 이를 계기로 모든 전술 논의의 중심이 되어온 <재능지부투쟁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이하 ‘공대위’)>에서도 철수했다.

사측의 회유 안에도 불구하고 재능지부는 이명박 정권 내내 단협 원상회복과 해고자 전원복직을 걸고 농성 투쟁을 계속했다. 비록 소수의 투쟁이었지만 이 투쟁은 용역을 동원한 사측의 농성장 침탈 등 극악한 탄압에 완강히 맞서며 특수고용노동자의 간접고용 문제를 전면화 시켰고, 연대단체들과 함께 공대위를 꾸려 지금까지 수도권 연대투쟁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해왔다.■


사건의 재구성

문제의 발단은 작년 3월 재능 사측이 서비스연맹을 통해 해고자들을 우선 복직시켜 줄 테니 단체교섭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해 보자고 제안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안은 노조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그전까지 태도에 비해 상당히 전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서비스연맹은 전국학습지산업노조(이하 ‘학습지노조’)와 재능교육 지부(이하 ‘재능지부’)에 이 안을 수용할 것을 종용했으나, 강종숙·유명자 지도부는 단협의 우선 회복이 원칙임을 주장하면서 사측이 제시하는 선(先) 복귀 후(後) 단협 논의는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강종숙·유명자 지도부는 조합원들을 설득해서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조합원들의 생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비대위 구성 이후 강종숙·유명자 지도부가 밝힌 내용에 따르면 유득규 당시 학습지노조 사무처장은 수용할 수 있는 안은 아니지만 일단 사측과 직접 교섭을 여는 것이 중요하므로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고, 오수영 당시 재능지부 사무국장은 즉각 입장을 밝히진 않았지만 나중에 작성한 문서에서 사측이 줄 수 있는 최대치를 내주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사측의 교섭요구로 작년 5월부터 교섭이 재개됐지만 강종숙·유명자 지도부는 단협 원상회복이 우선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완강하게 유지했다. 그러나 교섭이 계속되던 7월 유득규 사무처장과 오수영 사무국장은 차례로 학습지노조와 재능지부 임원에서 사퇴했다. 사유는 각기 달랐지만 두 사람 모두 유명자 지부장과 함께 교섭위원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때 아마도 이 과정에서 나타난 의견불일치가 원인이었던 듯하다. 결국 교섭은 8월에 최종 결렬되고 종탑 농성투쟁 이전까지 사측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전부터 여러 가지 문제로 삐걱거리던 재능지부의 의사소통 구조가 완전히 깨진 것도 대략 이때부터이다. 유명자 지부장이 더 이상 조합원들과 회의를 하지 않겠다는 문제의 발언을 한 것도 이 무렵이었고, 그 뒤 학습지노조 위원장과 지부장을 제외한 나머지 조합원들(소위 이후의 ‘종탑파’ 8인)이 따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여민희 조합원이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교섭 결렬 이후 작년 말부터 지도부를 제외한 나머지 조합원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사측을 압박하기 위한 강도 높은 전술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명자 재능지부장과 강종숙 학습지노조 위원장은 고공농성 같은 극한전술을 반대하고 시청 농성장을 유지하며 사측에 대한 압박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종숙·유명자 지도부가 강하게 반대하자 조합원들은 지난 2월 강종숙 위원장과 유명자 지부장에게 종탑농성 계획을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오수영·여민희 조합원이 종탑에 올라갔다. 그 동안 전술 논의의 중심이던 공대위 참여 단체들은 이 과정에서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두 조합원이 종탑에 올라간 2월6일 유득규 조합원은 기존 공대위와 논의 없이 2011년 이후 공대위에 불참하며 재능지부 투쟁을 방기하고 있었던 서비스연맹과 통진당을 포함한 확대회의를 열겠다고 연락을 돌렸다. 2년 만에 회의에 들어온 서비스연맹은 곧바로 유명자 지부장의 임기 문제부터 거론했다.

이후 몇 차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논의들이 있었지만 결국 조합원들은 임기 만료를 이유로 유명자 지부장을 해임하고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선언하여 비대위 위원장에 종탑에 올라간 오수영 재능지부 전사무국장을, 집행위원장으로 유득규 학습지노조 전사무처장을 선출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이하 ‘비없세’)의 활동가들이 양측의 중재에 나섰다.

비없세가 제시한 중재안의 핵심내용은 양측이 한 발씩 물러나서 재능지부 비대위 체제를 인정하는 대신 임기가 다 된 강종숙 학습지노조 위원장을 대의원 대회를 통해 직무대행으로 선출하여 재신임하자는 것이었다. 학습지노조 직무대행 자격으로 강종숙 위원장이 교섭의 최종 체결권을 가지고 교섭이 마무리된 뒤 학습지노조와 재능지부는 정식으로 선거를 열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기로 하였다.

하지만 이 중재는 실패로 돌아갔다. 비없세 활동가들의 선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중재안 자체는 본질적으로 밀실야합의 성격을 띤 것일 수밖에 없었다.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 선거를 치르려고 했다는 발상 자체가 떳떳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안이 어느 정도까지 비대위 측과 합의가 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선거 결과를 합의했다는 사실을 문서화 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문서상으로는 대의원대회를 통한 직무대행의 선출에 합의한 것만 남았는데, 비없세 측은 강종숙 위원장을 직무대행으로 선출하는 것까지 합의가 됐었다고 하고 비대위 측은 그런 내용을 합의해 준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습지노조 선거 당일 직접 황창훈을 후보로 추천한 비대위 측의 강경식 조합원도 비없세 측으로부터 강종숙이 당선되도록 협조해 달라고 거듭 문자가 왔었다고 밝히고 있으니 비없세가 강종숙의 재신임을 전제로 하고 중재에 나섰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어쨌든 결과는 2월27일 열린 학습지노조 직무대행 선거에서 강종숙과 함께 황창훈이 후보로 추천되었고 경선 결과 황창훈이 학습지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는 강종숙·유명자 지도부가 지적하는 몇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의 요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중재자들의 의사와 달리 학습지노조 직무대행 선거는 유명자·강종숙 지도부의 완전한 배제를 제도적으로 공고화하고 비대위의 절차적 합법성을 확고히 하는 것으로 결과했다.

학습지노조 선거 이후 유명자·강종숙 지도부는 종탑 측이 비대위 체제를 해소한다면 새로 선출된 황창훈 학습지노조 직무대행을 교섭대표(교섭체결권자)로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기존 공대위 소속 연대단위들이 포함된 가칭 <재능교육지부 투쟁승리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학습지노조 양측 각 1인, 공대위 단위 1인 포함 3인의 공동위원장 체제로 운영하자는 새로운 안을 제시했다. 공동위원장과 교섭위원의 연석회의에서 교섭 및 투쟁방향을 논의하고, 공투위 소속 모든 단위와 개인이 참여하는 전체회의를 열어 그 결과를 교섭 및 투쟁방향에 반영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을 이미 획득했다고 판단한 비대위 측으로서는 논의할 필요가 없는 안으로 보였을 것이다. 종탑 측 주변 인사들은 노조의 적법한 절차에 따른 정당한 투표 결과에 승복하라는 비판을 유명자·강종숙 측에 퍼부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사측은 재능 해고자들이 다 참여하지 않는 교섭은 의미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재능지부의 분열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교섭이 교착에 빠지면서 공대위 회의를 통해 양측이 몇 차례를 논의를 했으나 비대위 해소가 여전히 쟁점이 되면서 논의는 공회전을 반복했고 반목은 더욱 깊어졌다. 여기에 통장 문제 같은 부차적인 문제가 과도하게 부각되면서 논란은 더욱 진흙탕 싸움으로 빠지게 되었다. 교섭국면을 재개하고 사측을 압박하기 위한 종탑 농성투쟁 전술의 목표는 의미를 잃었고 6월11일 각자 따로 2000일 기념행사를 진행한 것에 드러나듯 양측의 자존심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혼탁한 논란이 흐린 문제의 핵심

최근까지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강종숙·유명자 지도부에게 분명 과도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듯하다. 발단은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이 SNS에 유명자 지부장에 대한 지지 멘트를 남기면서 비롯되었다.

하종강 소장은 재능지부의 내부 갈등을 투쟁의 원칙을 지키려는 자와 출세주의자의 대립으로 규정하며 유 지부장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는데, 별다른 근거를 밝히지 않고 툭 뱉는 이런 식의 코멘트는 이후 재능지부를 둘러싸고 누구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막말들이 난무하게 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종탑 농성을 지지한다는 소수의 몇 사람이 SNS에서 강종숙·유명자 동지에게 퍼붓고 있는 언사들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물론 소위 ‘시청파’에서도 막말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긴 하지만 이들에 비하면 그 양과 질에서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대개 이전부터 재능지부 투쟁에 결합해온 사람들이 아니라 최근에 이 투쟁이 이슈가 되면서 결합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누구든 투쟁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지만 상황을 둘러싼 복잡한 맥락을 삭제하고 일방의 입장을 배타적으로 전달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활동이 양측의 갈등과 반목을 더욱 조장할 뿐 투쟁에 별반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재능지부 투쟁에 연대하던 활동가들 상당수는 진흙탕 싸움이 되어가는 논쟁과 양측의 신경전에 질려 차라리 양쪽 다 안 가는 편을 선택하고 있다. 그 결과 양측의 농성거점에는 배타적 지지자들 외에는 발걸음이 거의 끊기고 있다.

재능지부의 내부사정을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수도권 투쟁사업장 활동가들이나 좌파 성향의 활동가들은 여전히 강종숙·유명자 지도부에게 심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 동지는 최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만약 비대위 측이 제기하는 대로 “기존 지도부 임기 만료와 조합 내부 회의의 부재, 독단적인 사업 운영 등”이 문제였다면 “이런 문제를 굳이 종탑에 올라서 해야 했냐”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는 종탑 농성전술에 대한 주변 활동가들의 의혹을 요약하고 있다.
재능지부처럼 조합원이 소수화된 장기투쟁 사업장에서는 노조체계가 이미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지부장 임기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대개 약식으로 이루어지거나 사실상 자동연장 되는 경우가 많고 재능지부에서도 이미 그런 예가 있었다.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제기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종탑에 올라가 교섭 공문을 띄우면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 저의가 의심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소수로 남은 조합원들 중에서 또 몇 명을 배제하고도, 지금까지 헌신적으로 투쟁해온 기존 연대단위들을 버리고도 종탑 농성 같은 극한투쟁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종탑 농성전술 자체가 완전히 기회주의적인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혹이 있지만 일단 교섭국면을 다시 열기 위해 사측을 더욱 강하게 압박하고자 한 다수 조합원들의 열망이 반영된 전술로 바라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물론 지금까지 서비스연맹의 행태와 일부 조합원들의 지나치게 정치적인 움직임으로 보았을 때 후퇴한 안을 수용하고 투쟁을 마무리 짓는 성격의 투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심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끝없는 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심과 상호불신이다. 중간에서 한쪽을 대변하는 척하는 몇몇 사람들은 이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여러 복잡한 사정과 사태들 때문에 흐려지고 있긴 하지만 결국 논란의 본질은 “단체협약 복원, 해고자 전원복직”라는 원칙을 확고히 붙잡고 계속 투쟁할 것이냐, 일단 사측이 제시한 전향적인 안을 가지고 교섭을 시작할 것이냐의 문제로 보인다. 이는 원칙의 문제라기보다는 전술적 판단의 문제이다. 사실 2000일 넘게 투쟁을 해온 상황에서 투쟁의 원칙이라는 것도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77일 동안 목숨을 건 공장점거 투쟁 끝에 결국 사측의 희망퇴직 안을 받았을 때, 기륭전자와 동희오토 해고자들이 기나긴 농성 투쟁 끝에 결국 단계적 복직 안을 수용했을 때, 그것을 두고 기회주의라고 비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이런 결과들이 “승리”로 치장되는 것은 문제이겠지만 투쟁을 시작하지도 않는 관료들의 투쟁과 수백 수천일 최선을 다해 투쟁한 노동자들에게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런 판단과 결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는 함께 투쟁을 해 왔던 동지들과 집단적으로 판단하고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리 이른바 법·제도적인 절차에 하자가 없다 해도 계급운동의 전통에서 그것은 직권조인이고 어용행위인 것이다. 하지만 재능지부의 투쟁과정에서는 어느 순간부터 정상적인 의사소통 구조가 깨졌으므로 지도부를 뒤엎고 그동안 전술논의가 중심적으로 이루어져 온 공대위 체계를 부정하는 일종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누구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가?

비대위 측이 제기하는 조합원과의 소통 단절에 대해서는 유명자·강종숙 지도부가 해명해야 할 문제이다. 아무리 감정적 골이 깊다 해도 노조 내부에서 조합원들과 소통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지도부는 문제가 있다.

한편 비대위는 기존의 의사결정 구조인 공대위를 배제하고 조합원들끼리 배타적으로 논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도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위해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했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전술의 결정은 오랫동안 함께 투쟁해 온 연대단위 동지들과 함께 공유하고 논의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투쟁의 걸림돌로 기능해온 서비스연맹과 종탑 농성전술을 결정해서 지도부를 몰아내고 기존 연대동지들을 배제한 과정은 결국 종탑 농성이 교섭을 위한 술수가 아니었냐는 의심을 낳을 수밖에 없는 행동이다.

상호간에 제기되는 문제의 핵심이 이런 것임에도 이에 대해서는 양측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똑같은 얘기만 반복하고 있다.

이른바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에 기준한 정당성은 어찌됐건 조합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종탑 측이 좀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투쟁의 원칙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누구도 강종숙·유명자 지도부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연대단위 다수가 강종숙·유명자 지도부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유빠”라서, 혹은 온정주의에 빠져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견지해온 원칙성에 대한 존중 때문이다.

양측이 이 두 가지 자기 근거를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며 모든 논의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제 이 두 가지가 과연 절대적인 기준인가를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비타협적인 투쟁이 절대적인 원칙인가

재능지부 투쟁에서 인적 갈등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사태의 발단이 되었던 이현숙 등 전임지도부 간부들이 해고되어 농성장에 결합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강종숙·유명자 지도부가 조합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렇다면 불과 2년 사이에 조합원들의 관계가 역전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는 결국 뭐라고 말해도 지도부의 책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2007년 학습지노조와 재능지부 지도부를 겸하고 있는 이현숙을 끌어내리고 새롭게 지도부를 세울 때, 유명자 동지와 오수영 동지는 지부장과 사무국장으로 나란히 러닝메이트로 출마한 사이였다. 오랜 진통 끝에 2009년 학습지노조 위원장을 다시 정식으로 선출했을 때는 강종숙과 유득규가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 이들은 모두 전임 이현숙 지도부를 타도하는 투쟁에서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 이들마저 강종숙·유명자 지도부에 등을 돌린 걸 전부 이현숙, 통진당, 서비스연맹의 농간으로 돌리는 건 무리한 얘기이다.

비대위를 구성하고 있는 조합원들의 발언이나 글을 보았을 때 어느 정도 과장을 감안한다 해도 그동안 강종숙·유명자 지도부의 언행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강종숙·유명자 지도부가 배제되는 과정에 적지 않은 부당함이 있었고 투쟁의 원칙이라는 문제에서 정당성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지지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는 것은 이에 대한 자기반성과 성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임기 문제 역시 지도부가 적극적으로 조합원들을 소집해서 논의하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이를 문제가 될 때까지 방치해 온 것은 조합원들의 의사를 무시해온 지도부의 오만과 독단이 자초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비없세의 중재가 실패하고 학습지노조 선거에서 패배한 뒤 강종숙·유명자·박경선 3인 명의로 제출된 “재능교육지부 5년 투쟁의 과정과 종탑농성의 문제에 대하여”라는 글은 이 상황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조합원들에 대한 폭로였을 뿐이었다. 종탑 쪽 동지들로부터 사실 자체에 대한 반박이 나오지 않는 걸로 볼 때 이 글은 많은 부분 사실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안타깝게도 당사자들의 생각과 달리 읽는 사람들에게 별로 설득력을 가지기 어려웠다. 이글 대부분은 “저들은 투쟁을 접고 싶어 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불성실한 사람들이다, 저들은 자기 생계를 위해 투쟁을 소홀히 한 사람들이다”라는 고발과 인신공격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연 5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투쟁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다는 심리가 그렇게 엄청난 죄인가? 생계문제 때문에 투쟁을 소홀히 한 것이 과연 그렇게 엄청난 죄인가? 조합원들이 지쳤을 때 이를 안고 가는 것도 지도부의 역할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투쟁해온 사업장에서 당위적인 투쟁원칙을 가지고 조합원들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래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토론이 되지 못하며 결국은 대화의 단절로 끝나고 말 것이다.

강종숙·유명자 지도부가 투쟁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은 당연히 높이 사야하겠지만 건강한 관계 맺기와 의사소통에 있어서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개인의 어렵고 힘듦을 호소하는 것이 운동의 대의에서 벗어난다는 사고방식, 보다 더 센 투쟁을 옹호하는 과도한 투사적 운동문화가 결국 두 명의 조합원을 종탑으로 내몰고 강종숙·유명자 지도부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쟁점이 되고 있는 재정 문제도 강종숙·유명자 지도부는 재능지부에 모인 후원금들은 연대 동지들이 투쟁하라고 준 돈이니 이 투쟁이 끝나면 다른 투쟁사업장에 인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맞다. 그렇게 사용되면 참 좋을 것이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러나 그 돈의 사용방식에는 지금까지 함께 투쟁해 온 재능지부 조합원들의 권리도 있다. 지도부 두 사람이 일방적으로 좋은 곳에 쓰자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이 노동자민주주의인가

서비스연맹과 통진당 같은 조합주의자들은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이 절대적인 원리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종탑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논리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조합원 다수가 지지하는 노조체계와 투쟁전술을 왜 소수가 따르지 않는가라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

강종숙·유명자 지도부 역시 똑같이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 문제를 제기한다. 시청 측은 자진 사퇴한 임원이 1년 동안 피선거권을 가질 수 없다는 규정을 들어 규약·규정상 유득규·오수영 조합원을 임원으로 선출한 비대위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여기 대해 비대위 측의 강경식 조합원은 이미 조합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그런 규약·규정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비대위 측이야말로 규약·규정을 근거로 강종숙·유명자 지도부를 몰아내지 않았는가?

이런 식의 규약·규정 놀음은 투쟁하는 노동자의 방식이 아니라 노조관료들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관료들조차 자기들이 유리할 때는 서슴없이 규약·규정을 위반한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사례에서 눈으로 똑똑히 보아왔다.

문제의 핵심은 이미 재능지부의 투쟁이 재능지부 해고자만의 투쟁이 아닌지 오래됐다는 것이다. 재능지부 농성투쟁은 애초부터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으로부터 버림받은 투쟁이었다. 2010년 9월 공대위가 결성된 뒤 재능지부 투쟁의 전술은 항상 연대단위들과 함께 논의되어 왔다.

재능지부처럼 수 년 간의 장기투쟁 끝에 투쟁하는 조합원이 손에 꼽을 만큼 소수화되고 연대단위들에 의존성이 큰 투쟁사업장에서 노조체계의 절차성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조합주의자들이 노동자민주주의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은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일 뿐 노동자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노동자민주주의는 노조의 규약·규정에 제약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항상 투쟁하는 이들의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운동의 역사에서 투쟁은 자주 조합원의 울타리를 넘어 확대되곤 했다. 그러나 조합주의자들과 관료들은 늘 투쟁을 제약하고 연대를 외부라는 명목으로 배제하며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을 근거로 의사결정의 범위를 제약하려 해 왔다. 하지만 이는 “제 3자 개입 금지” 같은 자본의 논리와 다름없는 발상이다.

과연 재능지부 투쟁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조합원들만의 힘이었는가? 싸울 때는 필요한 동지지만 중요한 결정은 우리끼리만 하겠다는 건 얼마나 우스운 논리인가? 연대와 주체를 선명히 가르고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이 우리에게 있으니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식의 조합주의 논리는 운동의 발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동자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서비스연맹 관료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이 기존 공대위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협소한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을 근거로 투쟁하는 사람들의 더욱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대단위들 다수가 종탑에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다른 모든 상황과 맥락을 삭제하고 오직 절차적인 합법성을 근거로 상대의 의견을 억누르는 일방적 논리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이미 유명자·강종숙 지도부 및 연대 단위들은 여러 차례 종탑 측에 조합원들과 연대단위 및 개인들이 공동의 의사결정을 통해 투쟁의 방향을 논의하자고 제기한 바 있다.

이미 종탑 농성투쟁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비대위는 사측으로부터 변화를 끌어내기 위한 전술로 종탑 농성을 선택했다. 그 전술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면 이러한 극한투쟁을 계속 하는 것은 소모적인 일일 것이다. 비대위 측은 “단협 원상회복, 해고자 전원복직” 요구에서 후퇴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밝힌바 있는데, 그런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 소위 노조의 절차적 합법성이라는 빈약한 근거를 가지고 동지들의 제안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재능지부 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해고 조합원들이 다시 단결하고 이를 중심으로 흩어진 연대 대오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 지금처럼 양측으로 갈라져 분란이 계속되고 연대 단위들의 외면을 받는다면 어느 쪽도 투쟁의 전망은 없다.

종탑 농성투쟁의 끝이 다시 논란과 상호 비방으로 얼룩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향후 투쟁의 방향과 수순, 재정 문제 등이 수도권 운동진영 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새로운 의사결정 구조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비대위 문제 같은 노조의 체계문제가 과도하게 쟁점이 되고 있는 면이 있지만, 그것은 현행 자본주의의 법·제도적 한계로 말미암은 형식적인 문제일 뿐이다. 지부장이 누구냐, 교섭권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들보다 양측 모두 구속력 있다고 합의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선결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새로운 의사결정 구조는 재능지부 투쟁에 참여한 연대 단위 및 개인들에게 폭넓게 열려져야 할 것이다. 시청에 연대하던 종탑에 연대하던 소속과 상관없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여 투쟁의 전망을 놓고 평등한 발언권과 투표권을 가지고 모든 문제에 대해 수평적인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런 민주적 총회의 방식으로 투쟁과 교섭의 주요한 전술적 논의가 결정될 때만이 어느 한 쪽이나 개인의 독단적 결정을 막고 다수결 같은 민주적 의사결정 장치들이 다시 구속력 있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조합주의 논리에서 벗어난
투쟁하는 자들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재능지부 문제의 해결은 어느 일방만의 논리가 아닌 투쟁하는 자들의 민주주의로 해결되어야 한다. 만약 이미 너무 커져버린 감정적인 골들 때문에 양측의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주변의 연대단위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자신의 입장들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혼탁한 논쟁을 보고 주체가 아닌 연대 세력들이 너무 나선 게 문제라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빈대 몇 마리 때문에 집을 몽땅 다 태워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이다.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일부세력들은 보다 광범위한 연대의 의지로 자정되어야 한다. 대다수의 건강한 연대 동지들과 단위들이 너무 말을 아끼고 주체의 문제로만 맡겨 놓고 방치해 온 것이 오히려 문제를 키워왔던 것이 아닐까.


이태영
 

*그동안 재능 투쟁에 대한 여러 글들이 필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최덕효 씨에 의해 자극적인 제목과 멋대로 편집으로 난도질당한 것이 문제제기 되어왔다. 사노신은 이미 오래전에 최덕효 씨가 그런 식으로 남의 기사를 옮기는 행위에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 이 글 역시 그렇게 이용되는 것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며 (어떤 식의 이름과 명의를 쓰든) 최덕효 씨에 의해 이 기사가 무단으로 전제·배포·복사·수정·인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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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슬, 끝나지 않는 이야기2 : 대한민국의 탄생신화

이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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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주도에 대해 잘 모른다. 심지어 가본 적도 없다. 어디 돌아다니기 싫어하는 게으른 성격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갈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 두 가지는 늘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하나는 92년 대선 후에, 고(故) 정운영 선생이 수업시간에 들려준 이야기로 당시 백기완 후보 득표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제주도였는데 아마도 4·3항쟁의 영향이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제주도에 친척을 둔 친구가 해준 얘기였는데, 정부가 신정이라고 해서 양력으로 설을 쇨 것을 권장할 때 다른 지방에 비해 제주도에서 양력설을 쇠는 비율이 아주 높았다는 얘기였다. 이유는 나라 말을 거스르면 큰일 난다는 생각 때문이라는데 이 역시 4·3의 영향인 것 같다고 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한 지역에 행해진 국가 폭력의 상흔이 얼마나 깊고 오래가는 것이었는가를 예증한다.

<지슬>이 다루는 제주도 4·3항쟁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탄생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비극이다. 해방 이후 일제경찰을 그대로 중용하는 등 실정을 저지른 미군정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불만은 1948년 4월3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 실시에 반대하는 봉기로 이어졌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국가 정통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판단하여 강경진압에 나섰다.

정부는 산으로 숨어들어간 남로당 중심의 무장대 뿐 아니라 제주도민 전체를 잠재적 반란자로 규정하고 1948년 10월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지역을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11월 계엄령이 선포되자 해안으로 이주하지 않는 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산간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실시되었다. 제주도민에 대한 국가적인 학살은 한국전쟁 종전 이후인 1954년까지 이어져 3만 명 가까운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공(反共)의 공화국 대한민국은 이렇게 빨갱이로 몰린 제주도민들의 피를 자양분 삼아 탄생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지슬>은 진압군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어갔다가 결국 학살당한 어느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초혼제의 형식을 빌려 풀어내는 영화이다.

4·3항쟁 같은 무거운 역사적 비극에 굿과 같은 제의의 형식을 차용해서 접근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시도가 될 수 있다. 자칫 역사의 무게를 떨쳐버리고 섣부른 화해와 용서로 이야기를 내몰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밀 쿠스트리차가 <언더그라운드>에서 그랬고 황석영의 <손님>도 그런 함정에 빠졌다. 이 작품들은 역사의 비극 속에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원한을 한 판의 굿과 잔치를 통해 살풀이처럼 털어버리자고 달콤하게 속삭인다.

그러나 희생된 자들의 무수한 한이 서린 역사의 무게를 과연 누구의 권리로 털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전두환을 용서할 권리가 과연 김대중이나 살아남은 광주시민들에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런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자들의 한이기 때문이다. 간혹 지나치게 성숙한 예술가들이 보이는 함부로 용서하고 멋대로 화해하는 용기는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지슬>의 큰 미덕 중 하나는 제의라는 형식을 빌려오면서도 결코 용서하려고도 화해하려 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가해자들을 악마로 만들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용서하지도 않는다. 말없던 어린 신병이 아편쟁이 김 상사를 솥에 삶아 죽일 때 <지슬>은 자신이 회색의 영화가 아니라 흑백의 영화임을 명확히 선언한다.

어느 평론가는 <지슬>의 영화적 논리가 허술하고 이야기와 이미지가 따로 논다면서 영화는 사진집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허나 돌이켜 보면 영화의 역사는 늘 서사논리와 이미지의 투쟁의 역사였다. 관객들을 향해 쇄도하는 기차,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삭발한 여인의 얼굴, 눈알을 도려내는 면도날 같은 강렬한 이미지들은 언어논리로 가둘 수 없는 그 자체의 힘을 가지고 있다. 서사논리는 언제나 이런 이미지들을 이음매 없이 매끈하게 이야기 속으로 붙잡아 넣으려 한다. 그것이 실패할 때 이야기를 뚫고 나오는 이미지의 강렬함이 한 영화의 전부가 되어 버릴 때도 간혹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에게 기억은 늘 이미지로 나타난다. 꿈이란 기억되었지만 언어화되지 못하고 의식 밑으로 깊이 가라앉은 이미지들이 우리가 잠든 틈을 타 느슨해진 의식의 표면으로 비집고 올라오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꿈속에서 체험하는 것은 사실 비논리적인 이미지의 연속이다. 꿈에서 깨어나 글로 기록하거나 말로 설명하고자 그것들을 언어논리로 포획하려 들 때 우리는 오히려 그 이미지들의 신비한 인상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처럼 대부분 흘러나가 버리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언어논리로 구성된 역사적 기록이나 사회과학적 분석은 이미지가 주는 생경한 충격을 오히려 빛바랜 것으로 만들 때가 많다. 반대로 이미지가 주는 생경한 충격이야 말로 화석화된 글과 말을 넘어 영원한 기억으로 각인될 때도 있다. 광주항쟁을 기록하고 분석한 그 어떤 글보다 신입생 때 멋모르고 학생회실이나 동아리실에 굴러다니던 광주항쟁 사진집을 펼쳐보았을 때 받은 충격이 더욱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흔한 경험일 것이다. 광주항쟁을 주제로 했던 무수한 세미나와 토론들과 읽었던 글들이 거의 다 머릿속에서 사라져간다 해도 그 이미지들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야기와 분리되어 마치 혼령처럼 부유하는 <지슬>의 이미지들은 그것이 가진 상기의 힘을 빌려 기록과 서사 같은 언어논리로는 표현하기 힘든 오래전에 망각된 혼령들의 한을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지금 여기로 불러들인다. 그래서 그것은 죽어간 혼령들의 한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영화 바깥의 맥락과 조우하여 여전히 국가 폭력이 계속되고 있는 제주도의 현실을 환기시키기에 이른다.

물론 아름답고 세련된 <지슬>의 이미지는 광주항쟁의 잔혹한 사진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그만큼 아슬아슬하다. 예컨대 능욕당하는 여성의 신체에 비유되는 제주도 대지의 이미지는 아름답긴 하지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을 뿐더러 진부하고 유치한 문법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거기 홀려 길을 잘못 접어들 수 있는 위험에 있기에 항상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나치를 피해 국경을 넘으려다 자살한 어느 유태인 미학자는 파시즘은 정치를 예술화하지만 공산주의는 예술을 정치화해야 한다고 썼다. 끔찍한 정치논리를 도취적인 미적 숭고로 포장하는 파시즘에 대해 공산주의 예술은 미학적 자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예술제도 속으로 끝없이 오그라들려하는 예술을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말이다.

미적인 것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나치스가 만들어낸 <의지의 승리>나 <올림피아>는 그 얼마나 아름다운 영화들인가? 그러나 이 영화들이 봉사한 정치논리는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던가? 레니 리펜슈탈은 자서전에서 자신은 나치스 지지자가 아니라 단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정치적인 예술은 의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그 의도가 정치적으로 급진적이었다고 해도 자신의 영화들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닿지 않음에 절망했던 고다르의 영화들처럼 그저 지식인들의 지적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영화관에서 나오면 까맣게 망각되는 휘발성 소비재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결국 정치 예술의 성공은 보는 사람의 태도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관객이 집에 돌아가서 그 영화가 던진 문제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정치적 실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면 그것은 미학적 성취와 무관하게 성공한 정치영화가 될 것이다.

<지슬>을 단지 하나의 작품으로 환원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흑백화보집에 불과할 지도 모르며, 부유하는 혼령들은 결코 땅으로 내려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부유하는 혼령들을 불러와 빙의하여 다시 한 번 강정을 생각하고 국가의 폭력에 대해 고민한다면 <지슬>의 헐거운 이야기는 진정으로 초혼의 의미를 지니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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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특집]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②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적 구성의 변화는 사회변화를 지향하는 세력들에게 저항의 주체를 어떻게 재구성하느냐의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1968년을 전후해서 유럽과 북미, 일본에서 벌어진 혁명적 투쟁들은 그전까지 분배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되던 여성·환경·인종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1970년대 이전까지 사민주의든 공산주의든, 전통적인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사회의 진보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그러나 사회진보의 담지자로 상정된 공업노동자들은 오히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그 결과는 급진 정치의 분열로 나타났다.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공업노동자 운동의 보수화는 1980년대 이들을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반대운동의 주체로 세우는 데 실패한 것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억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흔히 노동계급이 신자유주의에 투쟁해야 하는 주요한 근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은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기술진보로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면 생산성의 향상으로 총 노동자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필요 노동력이 줄어들면서 이들 부분에서 총임금은 줄어들게 된다.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줄어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정정도 유지시키면서 생산을 지속시키는 것이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 오히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길들이고 산업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더욱 싸게 먹힐 것이다. 

1980년대 서구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벌어졌지만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대응전략은 구조조정을 인정하고 남은 노동자들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980년대를 거치며 대규모 작업장의 조직노동자들과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격차는 상당히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임금저하 경향은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임금이 하락했다기보다는 광범위한 저임금 노동자층의 창출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게 올바를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규모 작업장을 중심으로 한 조직노동자들과 여타 분야의 노동자들의 이해는 크게 달라졌다. 90년대 들어 많은 나라들에서 조직노동자와 정부의 협약에 의해 비정규·불안정노동자들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제조업 고용의 노동량이 줄면서 9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이 시행되었지만 이는 노동유연화의 확대와 직결되며 정규직과 나머지 노동자들에게 차별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그 속에서 대규모 작업장은 마치 불안정 노동자들의 거대한 바다에 뜬 작은 섬들처럼 고립된 별천지가 되었다. 

공간적으로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산업 국가들에서 대규모 작업장은 폐쇄적인 지역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 결과로 대규모 작업장의 입지조건과 노동자들의 의식상태는 19세기 농민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대규모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19세기 자영농민들처럼 사회적 변화에 둔감하고 개인의 경제적 이해에 집착하는 경향을 뚜렷히 드러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90년대 주식투자 같은 재테크를 통해 재산을 증식하며 자본가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노동자본가(worker capitalists)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국에서도 최근 대규모 산업단지에서 보수정당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는 사례에서 보듯이 대공장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은 퇴행적 측면을 보이고 있다. 

80년대 이후 저항 담론은 다양하고 분산된 영역에서 저항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주요한 문제로 제기했다. 이런 상황은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등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들의 문제의식이 세계를 풍미하는 현실적 배경이 되었다. 전통적 좌파이론이 여전히 보수화된 공업노동자들에게 집착하고 있을 때, 개인의 저항에 기초한 포스트구조주의는 보다 급진적이고 새로운 운동의 이념적 좌표를 가리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은 구체적인 위치에서 저항을 하다보면 어쩌다가 집단적인 투쟁이 된다는 식 이상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개별적인 탈주의 선들이 어느 순간 접합해서 흐름이나 덩어리가 된다는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이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조업이 축소되고 기존의 노동운동은 쇠퇴하고 있으나 종래의 공업노동자계급을 대체할 동질적인 사회집단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시대적 한계의 반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위적 정치정당으로 집약되어 그의 지도를 받는 동질적인 노동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결국 유일하게 가능한 저항 운동은 개별화된 운동의 연합일 뿐이라는 생각이 득세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앙드레 고르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계급이 아닌 새로운 사회집단이 광범위하게 창출되지만 이들은 “은행·관공서·청소서비스업체·공장 등 어디에서 일하건, 무차별적 직무에 일시적으로 고용되어 있는 비(非)노동자”이며, 집단적 주체로 등장할 수 없는 “특수한 개인성”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래서 고르는 그들이 미래 사회 전체적인 전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어떤 역사적 사명의 부여받았다고 상상한 과거의 계급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 끝에 그가 제시한 대안은 국가의 지배력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3장 "사회주의를 넘어서"를 보라) 

완고한 맑스주의자들도 이런 상황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80년대 초반, 포스트주의자들에 맞서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 중심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90년대 들어 평조합원 전략을 포기했다. 대신 이들은 자신들이 비판해 마지않던 반전·반세계화와 같은 인민전선 운동의 새로운 버전으로 후퇴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맑스주의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80년대 “계급 없는 계급투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사실상 객관적 실체로서의 계급 개념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즉자계급”이라고 표현한 객관적 계급관계는 그가 “대자계급”이라는 말로 표현한 의식적 계급 형성의 바탕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리바르는 실체로서의 계급을 부정하고 이를 사회적 투쟁의 효과로 환원시켰다. 그것은 결국 전통적 노동계급의 개념을 넘어 계급의 확대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급진적 맑스주의자로 아우토미아 운동가였던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네그리는 사회적 노동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노동계급의 개념을 대단히 광범위하게 확대시켰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풍부하게 흡수한 네그리는 결국 “계급”이나 “노동자”라는 개념을 사실상 포기하고 “다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기했는데, 그에 의하면 다중은 과거의 공업노동자 계급과 달리 서로 다른 문화, 인종, 종족, 젠더, 성적 지향 및 상이한 노동형태와 생활방식, 세계관, 욕망 등과 같은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루어져 있어 결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이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차이의 정치와 맑스주의의 절충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런 입장에서는 동질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단일한 전망을 가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외양적인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사민주의적 전망에 흡수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네그리 역시 여전히 코뮤니즘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그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네그리가 <제국>에서 제시한 전지구적인 시민권, 사회적 임금, 지식정보 공유권 같은 요구를 볼 때, 그 역시 다중으로부터 급진적 민주주의 이상의 공통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다중 이론은 90년대 들어서 활성화된 반세계화 운동, 반전 운동에 대한 이론적 반영물이다. 반세계화·반전운동은 멕시코 농민들로부터 전통적인 맑스주의 정치조직들까지 매우 다양한 구성요소를 포괄했다. 이 투쟁들은 전통적인 조직노동운동의 참여가 높지 않는 대신 개별적인 참여가 높은 특성을 보였다. 노조나 정당 같은 기존의 조직운동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은 매우 격렬한 투쟁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 속에서 모종의 동질적인 사회집단을 지시하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불안정한’(precarious)이라는 형용사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신조어인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유럽 반세계화 투쟁의 중심으로 부각되었던 이탈리아에서 2003년경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진 이 단어는 이후 유럽의 메이데이 행사에서 기존의 조직노동운동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행사를 상징하는 용어로 널리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000년대 고이즈미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프리타가 양산된 일본에서도 2006년 메이데이부터 프레카리아트 행사가 기획되기 시작했으며 한국에서도 올해 메이데이에서 프레카리아트 총파업 행사가 개최되었다.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은 앙드레 고르가 신프롤레타르라고 부르고, 90년대 들어 비정규직 혹은 불안정노동자라고 불리던 사회집단의 최신 명명법이다. 모두 다 전통적인 공업노동자와 다른 무언가가 하나의 사회적 실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현실을 지시하고 있는 개념이지만, 특히 이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는 기존에 상대적·부분적·비정상적인 개념으로 정립되던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이 사회다수적인 새로운 사회집단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로 불리고 있는 사회집단이야말로 전통적인 조직노동자들보다 오히려 초창기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에 더 가까운 사회집단이다. 1840년대 영국과 유럽에서 사회적 용어로 떠오른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당대에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달라진 경제현실은 언론인과 사회평론가들이 ‘빈민(pauperism)’과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라는 용어를 많이 쓰게 된 세태에서도 엿볼 수 있다. 빈민이니 프롤레타리아니 하는 말은 뿌리 없고 재산도 없는,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동자들로 정규직 일자리를 갖지 못하고 사회안전망의 보호대상도 되지 못하는 층을 뜻하는 말이었다. 칼 가는 사람, 구두장이, 재단사, 비숙련공, 직물노동자 등 실업 또는 불완전 고용 상태의 노동자들이 라인란트 일대 중소 도시로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 쾰른 같은 도시에서는 인구의 20~30퍼센트가 빈민 구제 대상이었다. 독일 사회이론가 로베르트 폰 몰은 현대의 공장 노동자 - 도제 훈련을 받거나 장인이 될 가능성도 없고, 재산을 물려받은 것도 없으며, 기술을 습득할 기회도 없다 - 를 ‘수레바퀴에 묶인 농노’와 비슷한 존재라고 묘사했다. 정치개혁가 테오도르 폰 쇤은 프롤레타리아라는 표현을 ‘집이나 재산이 없는 사람들’과 동의어로 사용했다. (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 평전>, 이광일 옮김, 글항아리, p.99) 


2011년 초, <프레카리아트 : 새로운 위험계급>이라는 책을 쓴 영국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전 지구적 변환이 초래한 최근의 사회·경제 위기가 보여주는 핵심적인 특징이다. 불안정한 직업들을 전전하면서 불안한 노동 생애를 날마다 보내고 있는 프레카리아트는 전세계적으로 수십억 명에 이른다. 대부분은 ‘도시 유목민’처럼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미래에 어디에 있을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이들은 정체성도 없고, 일정한 직업도 없고, 자기 인생의 미래를 설계하지도 못한다. 프레카리아트는 일자리를 갖고 있어도 사내 복지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며, 국가가 제공하는 공적연금 복지도 제한적으로만 받는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비정규직으로 서비스 섹터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 이들은 하루 일을 끝내고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채팅을 하고 축구 경기에 광적으로 흥분하면서 여가를 보낸다. 극도의 불안정으로 인해 자기 삶을 설계할 수 없기 때문에 인터넷과 축구와 같은 스포츠에 여가를 많이 의존하는 것이다. 현대판 ‘빵과 서커스’(로마시대에 민중에게 먹을거리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정치와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든 정책)라고 할 수 있다. … 프레카리아트는 비정규직 범주와 다르다. 프레카리아트는 단순히 고용형태나 임금수준 등을 넘어 사회와 공동체, 삶의 안정과 불안 등의 측면에서 폭넓게 노동자 집단을 파악하는 개념이다.


19세기 중반의 프롤레타리아트와 21세기 초의 프레카리아트는 150여 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상당히 유사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가이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라는 개념이 용역·계약직·일용직 등 종래의 비정규직과 거의 유사한 의미이지만 프레카리아트는 고용형태뿐만 아니라 생활양식, 그들이 공유하는 ‘불안정’이란 측면에서 범주화되는 보다 적극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뜬 구름 잡는 다중이 아니라 “저임금”과 “불안정”이라는 코드를 공통점으로 19세기 중반의 프롤레타리아트처럼 명확한 실체를 가진 동질적인 사회집단이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영향 받은 여러 담론들이 제기하고 있는 탈노동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이런 새로운 빈곤 인구들이 고용이 불안정한 저임금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이들 생존조건이 불안정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와 함께 스스로 프레카리아트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투쟁도 서서히 등장하고 있다. 2011년 세계를 휩쓴 미국의 아큐파이 운동을 본격적인 프레카리아트 투쟁의 출발점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점차 사회 인구의 다수를 점해가고 있는 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가 어디로 갈지는 아직 매우 유동적이다. 


프레카리아트는 소득 불안정으로 인해 삶의 방식도 극도의 불안정성을 보인다. 대다수 프레카리아트는 창의적이고 안정적인 삶을 가져다주는 윤리규범을 결여하고 있다. 사실 프레카리아트는 외국인이나 이주노동자, 경제적 약자 등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다. 이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침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회보장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이 불안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 예컨대 외국인과 이주노동자에게 적대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 전세계적으로 프레카리아트는 청년과 여성층에서 많아지고 있다. 인종적 소수자가 새로운 노동인구로 유입되면서 이 층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들은 유연한 저임금 노동력의 원천이다. … 특히 주목할 대목은 프레카리아트가 되기를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자녀·친척·친구들이 프레카리아트가 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경우 포퓰리즘과 정치적 극단주의의 구호에 휩쓸리기 쉽다는 점이다. 이것이 지금 세계 경제위기가 직면한 가장 두려운 측면이다. 불안정의 진창에 빠진 프레카리아트들은 자신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프레카리아트의 공포”를 이용하는-인용자] 선동가 혹은 극단주의자를 지지하게 될 것이다. (<이코노미 인사이트> 5호, 「21세기 위험계급 ‘프레카리아트’(가이 스탠딩 교수 인터뷰)」) 


현재로서 이들은 아직 독립적인 계급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에 종속되고 있다.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요구보다는 “1%에 맞서는 99%” 같은 추상적인 구호로 대표되거나 상대적으로 안정된 고용위치에 있는 중장년층과 달리 노동시장에 새롭게 참여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불안정성이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88만원 세대” 같은 세대담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소위 프레카리아트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주로 비교적 학력이 높은 20대에 한정돼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은 흔히 이 운동을 비계급적인 운동 또는 중간계급 운동으로 폄하하기도 한다. 물론 지금 현재 이 운동에 한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불안정·저임금 노동자들의 주체화로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지, 조직노동계급의 결합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운운하는 낯익은 레퍼토리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하나마나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가이 스탠딩을 비롯해 앙드레 고르나 제레미 러프킨 등 이런 새로운 빈곤층의 등장에 주목한 진보적 학자들은 대부분 기본소득제도를 지지하고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모든 국민에게 일정 금액의 화폐를 나누어주어 임금노동의 불안정화·저임금화로 빚어지는 사회적 불안을 무마하고 저소득계층의 소비력을 진작시켜 유효 수요를 창출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케인즈주의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급진좌파들은 기본소득제에 대한 요구가 자본주의 체제를 침식하고 사회 혁명의 가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기본소득제도는 이미 알래스카 등지에서 시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제도의 법·제도적이고 국가의존적인 성격 때문에 사회 변혁의 성격을 가지기 보다는 프레카리아트를 새로운 정치기반으로 만들려는 의회주의 사민당의 정치 슬로건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누가 어떻게 대변할 것인가에 따라 미래 운동의 지형이 바뀔 것이다. 이들을 포섭하거나 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지배계급과 사민주의자들의 기획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여전히 공업노동자들에 매달리며 이들을 여전히 중간계급, 혹은 반(半)프롤레타리아로 배제하거나 조직노동운동이 보살펴야할 부차적인 영역으로 취급하고 있다. 


 

중공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부분 서비스산업에서 창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은 자본주의 초기 공업에 대한 중농주의자들의 태도와 별 다를 것이 없다. 중농주의자들은 공업은 “아무런 가치도 창조하지 못하며 다만 가치를 변형시킬 뿐”이기 때문에 농업만이 생산적인 산업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비슷하게 대다수의 맑스주의자들은 서비스노동이 가치를 생산하지 않으며 물질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만이 가치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철학적 노동개념을 기초로 한 노동가치론에 대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노동을 인간에게 고유하게 잠재된 추상적 에너지로 보고 인간의 노동행위는 자연에서 채취한 물질에 그 에너지를 투여하여 가치를 부여한다는 논리를 취한다. 이는 사실 17세기 존 로크나 윌리엄 페티 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부르주아들의 소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논리였다. 

헤겔 철학의 영향이 많이 남아있던 초기 맑스 저작에도 이와 유사한 인간주의적 노동가치론이 드러나 있다. 특히 1844년의 <경제학·철학 수고>에는 그것이 상당히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이 무렵의 맑스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제시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자본주의적인 소외를 노동의 소외와 극복으로 바라보았다. 헤겔에게 있어 자연에 대한 파악은 정신의 발전에 의한 것이었으나 초기의 맑스는 노동으로 그것을 대체했다. 즉, 자연을 파악하고 그것과 동일성을 회복하는 철학적 매개는 정신이 아니라 노동이며, 자본주의에서 인간의 소외는 노동의 소외로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철학적 노동 개념은 자연에 대한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이른바 “물질적” 노동생산물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한다. 여기서 성(性)노동, 감정노동, 돌봄노동 등은 공업노동에 비해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헤겔 철학의 영향은 맑스와 엥겔스가 1845~6년 <독일이데올로기>를 쓸 무렵부터 극복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그들에게 소외 같은 철학적 범주는 더 이상 중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소외라는 문제의식은 더 이상 철학적인 개념에서가 아니라 잉여가치의 착취라는 경제학적 개념으로 제기되었다.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생산적인가, 비생산적인가하는 문제는 그것이 어떤 물질적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냐 아니냐와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맑스는 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에 대한 정의를 검토하며 스미스가 농업노동이든 공업노동이든 상관없이 자본과 임금노동이 직접 교환되고 자본가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면 생산적 노동이라는 것과 특정대상이나 팔 수 있는 상품에 구체화된 노동이 생산적 노동이라는 두 가지 규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적 노동이란 그것이 산출하는 것의 물질성과 무관하게 자본과 교환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명확히 규정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의미에서의 생산적 노동은, 가변자본 부분(임금으로 지출되는 자본부분)과 교환되어 이 자본 부분(즉 그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을 재생산할 뿐 만 아니라 그밖에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도 생산하는 임금노동이다. 오직 이것 때문에 상품 또는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되며, 자본으로 생산된다.

예컨대 연극배우나 어릿광대도, 만약 그가 자본가(기업가)에게 고용되어 그에게 임금 형태로 받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그 자본가에게 돌려준다면 그는 생산적 노동자이지만, 수선 재봉사가 자본가의 집에 와서 자본가의 바지를 고쳐주고 자본가를 위하여 사용가치만을 창조하여 준다면 그는 비생산적 노동자이다. 전자의 노동은 자본과 교환되는 것이며 후자의 노동은 소득과 교환되는 것이다. 첫째 종류의 노동은 잉여가치를 창조하며 둘째 종류의 노동에서는 소득이 소비된다.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은 여기에서는 언제나 화폐 소유자인 자본가의 입장에서 구분되어 있으며 노동자의 입장에서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이 때문에 가닐 등등은 어리석게도 사태의 본질을 얼마나 이해 못하였던지 매춘부, 하인 등등의 노동 즉 봉사 또는 기능은 화폐를 가져 오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작가가 생산적 노동자인 것은 그가 사상을 생산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출판하는 서적상을 부유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어떤 자본가의 임금노동자인 한에서 생산적이다. (칼 맑스, <잉여가치학설사>, 아침, p.165, 171)


이에 따르면 생산적 노동이냐, 비생산적 노동이냐 하는 문제는 오로지 자본과 관계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잉여가치학설사>의 관점과 달리 <자본론>은 아마포처럼 기계가 도입된 제조업에서 가치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다루고 있을 뿐, 불변자본의 비중이 낮은 서비스 부분은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 <자본론>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산업자본의 운동이었다. 이는 아마 <잉여가치학설사>에서 제기한 “연극배우, 어릿광대, 매춘부” 등등의 노동은 제조업에 비해 사소하고 부차적인 영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잉여가치학설사>의 생산적 노동에 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이후 제조업의 확대 발전과 함께 맑스주의는 극히 공업중심적인 이론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자본의 유통을 다룬 <자본론> 2권에서 맑스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밝힌 견해와 언뜻 보기에 모순된 견해를 개진했다. 여기서 그는 자본이 유통과정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인적·물적 비용을 유통비용이라고 부른 다음, 그것이 순수유통비용·보관비용·운수비용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이중 순수유통비용에는 상업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과 부기노동자를 고용하는 비용이 포함되는데, 이 경우 그들이 받는 임금은 자본가의 비생산적 지출이며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자본가가 획득한 잉여가치에서 공제되는 비용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보관비용과 운수비용은 생산과정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여기에 드는 노동은 가치를 추가하는 노동이라고 했다. 

<자본론> 2권의 이 부분은 이후 맑스주의자들이 사무·유통·서비스노동자들을 비생산적 노동자로 간주하는 단초가 되었다. 스위지와 바란은 <독점자본>에서 이러한 분야들을 경제잉여를 흡수하기 위한 비생산적인 부문으로 파악했으며, 에른스트 만델 역시 기본적으로 그 주장을 받아들여 <잉여가치학설사>와 <자본론> 2권이 모순적이며 후자의 해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만델은 <자본론> 2권을 근거로 맑스가 결국 자본과 교환되는 노동은 모두 생산적 노동이라는 주장을 사실상 포기하고 “물질적인 상품의 생산에 참여하여 있고 따라서 가치 및 잉여가치의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를 생산적인 노동자로 규정”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 그는 “후기자본주의에서의 서비스 부문의 확대는 기껏해야 작은 악(惡)일 뿐”이라는 현실의 전개과정과 상반되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 영역은 총잉여가치량 증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이윤을 쫓게 되는 자본의 운동에 의해 자가용, 텔레비전, 비디오처럼 서비스 제공 기능을 가진 물질적 상품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맑스가 살던 시대에는 만델이 말한 대로 부기노동이나 유통노동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다. 당시 공장 모델은 수십에서 수백 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기업주와 소수의 인원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구조였다. 브레이버맨이 지적한 대로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규모가 큰 사업장에서도 대개 여섯 명을 넘지 않았으며, 기업주의 친척과 친지인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당시 사무실 직원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예비 경영자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상업, 특히 소매상업은 소규모였으며 지금 같은 대규모 유통산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맑스가 이러한 부분들을 자본가 전체의 지출부분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영역을 자본가 개인의 필요에 의해 자본가의 수입과 교환되는 비교적 작은 부분으로 상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부문들 역시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 자본가에게 이윤을 확보하는 독립적인 산업으로 확립되었다. 여기에 다양해진 서비스 부문까지 합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부분은 고용은 물론 경제적 비중에서도 이미 공업 부분을 압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정도로 거대한 부분을 비생산부분으로 설정한다면 현실 파악에 곤란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이런 주장을 펼치는 논자들이 대개 이 공제되는 비용을 개별자본의 것이 아닌 일종의 사회적 공비로 취급하면서 난점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이토록 거대한 부분이 공비로 잉여가치에서 공제되고 있다는 관념은 비현실적인 생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적인 노동이냐 비생산적 노동이냐는 그것이 산출하는 결과가 물질이냐 서비스냐가 아니라 맑스의 말대로 자본과 관계로 설정되어야 마땅하다. 자본의 입장에서 이윤을 추출해낼 수 있는 노동이 생산적인 것이다. 

18세기 중농주의자들이 공업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본 것은 농업생산은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지만 공산품은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진 않은 사치품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공주의자들이 살던 시대에서 불과 3백 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공산품이 없는 삶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회적 필요는 인간 사회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 3세기 전에는 공산품이 인간에게 꼭 필요하지는 않은 영역으로 생각되었으나 지금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공업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필요를 창출하고 마침내 그것을 인류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산업 생산력의 발전이 전통적인 서비스 영역을 넘어 사회 및 대인 서비스를 필수불가결한 사회적 필요로 만들고 상품화하고 있다. 이 속에서 제조업은 자본주의의 등장 이후 농업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회적 생산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맑스주의자들은 비제조업 부분의 증가를 자본주의 쇠락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농업 생산력의 발전이 산업사회가 발전할 사회적 여력을 준 것처럼, 제조업 생산성의 발전으로 사회의 노동력 전반이 공장 노동에 투입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은 사회의 발전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우리는 서비스 없이 살아가는 사회를 상상하기 어렵다. 공업노동만을 생산적인 노동으로 특화시키는 논리들은 제조업 비중이 축소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래 사회가 공장 노동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기묘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따라서 산업화되어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서비스 분야의 노동 역시 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이다. 그러나 비생산적이라는 인식, 부차적인 영역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오히려 자본으로 하여금 이들을 저임금으로 묶어두는 사슬이 되고 있다. 이런 노동이 성인 남자의 가족 부양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여성, 청년, 청소년 같은 사회 잉여층의 부차적 노동이라는 인식이야 말로 이 노동의 가치를 낮게 묶어두는 인식적 장애로 기능하고 있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공업중심주의자들은 제조업이 높은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제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들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제조업 자체가 고임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제조업 노동이나 서비스 노동이나 자본과 결합할 때 동일한 노동인 것이다.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은 사회적 가치와 인식인 것이며 그 역시 변화하는 것이다. 

자본은 이러한 인식과 불안정 노동자들의 특수한 존재양식을 최대한 이용하여 극악한 노무관리를 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이 특유의 불안정성으로 말미암아 작업장의 단결을 통해서 자본에게 직접 권리를 요구하기 어렵다는 현실, 파트타임으로 노동시간이 분산되어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강제하기 어렵다는 현실, 이런 존재양식 자체가 또 다시 이들의 저임금·불안정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에 빠뜨리고 있다. 지금 미국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은 8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월마트이다. 월마트 같은 대형 유통업체는 서비스 산업에서 비교적 대규모의 집약된 현장을 갖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이며 1962년 창사 이래 지금까지 무노조 사업장이다. 미국 디트로이트의 자동차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이 6만 달러(약 7천만 원) 이상의 연봉을 받고 있는데 반해 월마트 노동자들이 받는 평균연봉은 미국 1인당 국민소득에도 크게 못 미치는 1만8천 달러에 불과하다. 

임금소득이 보편화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단지 임금소득의 여부를 가지고 계급을 따지기 어렵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본가들마저 임금소득자의 외양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사회는 일반 노동자들의 수백, 수천 배에 이르는 고임금을 받는 극소수의 자본가들과, 블루칼라냐 화이트칼라냐 무관하게 안정된 고용을 바탕으로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는 중간계급, 그리고 광범위한 불안정·저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물론 중간계급의 성격 상 이들의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위 역시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현재적인 의식이 중산층의 그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위 맑스주의자들이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들을 가리키기 위해 간혹 사용하는 반(半)프롤레타리아트라는 용어는 부분적인 임금소득자들을 지칭하는 개념이지 전적으로 임금소득에 의존하고 있으면서 고용의 단속성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사회집단을 지칭하는 개념일 수는 없다. 오히려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들이야말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이나 “노동자”의 정체성으로 조직된 중간계급들은 자신들이 이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와 동일한 정체성과 이해, 예컨대 동일한 노동자계급, 동일한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과거 부르주아들이 그랬듯이 이들을 동원하고 통제하며 독자적인 이해로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의 담지자가 되고 있다. 이들의 전반적인 저임금은 자본주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는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이다. 인구 다수부분의 저임금화에도 불구하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에는 지난 십여 년 간 주식·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높게 유지되면서 소비력을 지탱해 왔다. 공산품 가격의 전반적인 하락도 이들의 생활수준을 일정정도 유지시켜 주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로 자산 거품을 유지해왔던 마지막 지렛대인 부동산 거품이 폭발하자 이들은 곧바로 당장 의식주마저 보장받기 힘든 집단으로 전락했다. 기본소득제도와 같은 극단적인 케인즈주의 정책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능성과 잠재성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은 제조업에 비해 현장에 집약된 노동자들이 아니다. 대규모 유통업체처럼 밀집한 사업장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소수이며 이러한 사업장들 역시 수천, 수만이 일하는 제조업 대공장의 집약성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전반적으로 이들의 존재양식은 파편적·분산적·유동적인 성격을 지닌다. 

세계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이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 지 20여 년이 넘었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논의의 역사는 최소한 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조직화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가입률은 2.8% 밖에 되지 않으며,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15만 조합원 중 사내하청노동자는 5000여 명에 불과하다. 이 미미한 조직조차 대개 기존의 정규직노조에서 조직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금속대공장에서 사내하청운동을 일구고 노동조합을 건설한 것은 대개 민주노총과 적대적인 좌익 정파의 활동가들이었다. 

대공장 노동자들은 그 집약성과 사회적 파급력 때문에 흔히 노동계급의 대표자로 인정받아 왔다. 하지만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불안정성을 배경으로 고용과 고임금을 보장받고 있는 조직노동운동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요구는 전통적으로 노동계급 공통의 요구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의 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정규직노동자들에게만 유리하고 노동유연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기제로 활용되어 왔다. 이런 현상은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연장으로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들의 운동을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장에 집약되지 않고 분산적이고 유동적인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존재양식으로 말미암아 이들을 기존의 노동조합 모델로 조직하기는 매우 어렵다.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여전히 공장의 집약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68년 혁명에서 나타난 것처럼 개별화된 인자들의 투쟁은 폭발했다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푸코, 들뢰즈 등 프랑스의 포스트구조주의 이론들은 이런 경험의 현학적인 표현이었으며, 맑스주의자들은 그 이론들의 실천적 무력함에 대해 줄곧 비판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공업노동자들에 대한 맑스주의자들의 신뢰가 포스트구조주의자들보다 결코 더 많은 것을 보여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최근 십여 년 간의 경험은 전통적 공업노동자들과 그들의 조직에 속하지 않는 개별적인 인자들의 투쟁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전·반세계화 투쟁들은 소위 조직노동자들의 질서정연하고 정형화된 투쟁이 아니라 무정형적이면서 더욱 격렬하고 폭력적인 투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경향은 2001년 9․11 사태가 빚은 국제적 공안국면과 이어진 세계경제의 호황으로 주춤했다가 2008년 위기 이후 극적으로 폭발했다. 

일방적인 매스미디어를 대체하고 있는 소셜 미디어의 발전은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투쟁들이 보다 쉽게 확산되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발생한 중동의 민주화 투쟁,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의 투쟁, 미국의 아큐파이 투쟁은 모두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공간의 집약성은 여전히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러한 투쟁들이 입증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사람들이 새롭게 발전한 매체의 지원을 받아 어떻게 실물적이고 집단적인 투쟁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지 이들 투쟁은 잘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러한 투쟁을 바탕으로 어떻게 일상적인 조직과 실천을 만들어가며 그것을 기반으로 보다 급진적인 의식을 형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연적인 폭발이나 계기만을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힘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선진적인 부분이 필요하며 그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사전조직화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양식은 일정정도 안정된 직장을 가진 층을 기본 조직 대상으로 상정한 기존의 노조와 정당을 뛰어 넘는 모델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등장하여 노동조합의 주요한 형태가 된 산별·업종·기업별 노조 등 전통적인 조직 모델들은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는 틀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최근의 시도들은 대개 기존 노동조합의 특성보다는 생활 공동체적인 측면들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결국 단일한 현장에 모여 있지 않고 유동적이고 분산적인 노동자들에게 “지역”과 “생활”이라는 것이 주요한 코드로 떠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공동체들이 친목단체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의식, 정치적 운동과 직접 결합될 필요가 있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현장에 집약되지 않았다는 상황은 흔히 약점으로 지적되지만 이는 반대로 현장과 노조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들을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공장노동자들의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관계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커다란 딜레마의 하나였다. 맑스가 활동하던 시대부터 노동자들의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관계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독일의 라쌀레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이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며 오직 정치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프랑스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생디칼리스트들은 정치투쟁은 부르주아 국가주의에 포섭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총파업과 같은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에 기초해서만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양자가 모두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며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은 현실에서는 독일 사민당의 예처럼 당과 노조의 기계적인 분업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노조는 경제투쟁을 담당하고 노조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정치투쟁을 담당하는 이러한 활동방식은 노동자들을 표를 찍는 대중으로 수동화 시키고 정치와 경제의 부르주아적 이분법을 재생시키는 효과를 불러왔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러시아 볼셰비키는 합법적인 노동조합이 허용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불가피하게 비합법적인 정당이 직접 현장의 당 조직을 통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결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1890년대 러시아 맑스주의자들 내부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의 선전과 교육 중심의 활동에서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경제투쟁에 직접 개입하고 지원하는 활동으로 운동방식을 전환했다. 상대적으로 산업이 발전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분트 활동가 크레머가 쓴 <선동론>은 이런 운동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투쟁이 격렬해지면 자연스럽게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정치투쟁을 배타적으로 강조한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준 강렬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사실 이런 노선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적이 없었다. 그의 경제주의 비판은 정치노선이라기보다는 조직노선 상의 논쟁에 더 가까웠다. 1890년대 말이 되자 러시아 각지에는 레닌과 마르토프의 페테르스부르크노동자해방투쟁동맹을 필두로 사회주의적 지식인과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결합한 활동가조직들이 많이 생겨났다. 경제주의자들은 대개 러시아 산업지대에 분산된 활동가조직들을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키거나 혹은 그 자체로 좋다고 생각했던 반면 레닌은 이를 중앙집권적인 정당으로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맑스는 정치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이해를 일반적으로 사회에 제기하는 투쟁도 정치투쟁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레닌은 그런 정치투쟁을 노동자들의 자생성에 굴종한 조합주의적 정치투쟁이라고 규정했다. 경제투쟁 자체로부터 자연적으로 자라나는 정치는 조합주의적인 정치로 귀결되지 국가권력을 타도하거나 민주주의의 문제의식으로 제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닌이 제시한 해결책은 공장 외부에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공장의 노동자들로 정치의식이 불어넣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노선은 조직의 문제로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정당은 직접 노동자들의 흔히 공장세포로 불리는 현장의 기초 당 조직을 통해 경제투쟁을 지원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정치선동으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각성시켜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오해와 달리 레닌이 주요하게 제기한 정치적 선동의 내용은 제2인터내셔널과 별반 다르지 않은 민주주의적 요구들이었다. 

이러한 노선은 러시아 혁명 이후에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달리 노동조합이 하나의 제도로 확립된 서구 노동운동에 코민테른 조직노선을 이식하기 위한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공장세포는 독립적인 정치조직체라기 보다 노동조합 활동의 배후정치로 전락했다. 스탈린주의에서 당-세포-노조의 전달벨트 이론은 이를 정식화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사실 현장에서 정치선동과 경제선동을 직접적으로 수행한다는 공장세포 원래의 의의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이 보여준 것처럼 초기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은 민주주의의 확대를 주요한 요구로 내걸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 받아 제2인터내셔널에서도 보통선거권에 대한 요구가 가장 중요한 실천적 요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에서 일반적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보통선거제가 도입됨에 따라 8시간 노동제와 더불어 사민주의 운동의 두 축을 이루었던 민주주의적 정치투쟁의 요구가 사실상 기각되었다. 그 결과 코민테른의 전술은 정치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실제적인 매개를 상실하고 오로지 노동조합적 요구들을 가장 전투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으로 경사되었다. 코민테른 3차 대회가 제출한 「전술에 대한 테제」는 이러한 노선을 명백히 천명했다. 


자신들의 부분적 요구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는 자동적으로 전체 부르주아 및 그 국가기구와 투쟁할 수밖에 없다. 부분적 요구를 위한 투쟁이나 개개의 노동자그룹의 부분적 투쟁이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전반적 투쟁으로 확대되어감에 따라 공산당의 슬로건도 또한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고, 일반화되어 마침내 직접적인 적의 타도를 호소하는 슬로건에 이른다. (코민테른 3차 대회, 전술에 관한 테제 (1921년 7월9일))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은 이러한 코민테른의 전술을 그대로 강령으로 정식화한 것이었다. 독일 사민당의 강령이 사회주의적 이상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실천의 분리를 만들어냈다고 비판한 트로츠키는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요구를 배제하고 노동자들의 생활적 요구를 중심으로 강령을 구성했다. 이는 결국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이 정치적 제 요구를 기각하고 이른바 “생산의 정치”로 함몰되도록 만드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경제투쟁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에서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되더라도 레닌이 조합주의 정치로 규정한 노동조합 요구를 법제화해서 정부에 요구하는 투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반대로 1968년에 나타난 것처럼 공장 외부의 사회적 위기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끄는 경우가 더 많았다. 

프레카리아트 운동은 차티스트 같은 초기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처럼 현장의 자본가에 대한 요구보다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이슈에 반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들의 요구는 “1%에 맞서는 99%”라는 슬로건에서 보이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사회경제적 대안보다는 급진적인 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 이들이 독자적인 사회경제적인 계급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인 위기의 심화가 필요하다. 다가올, 혹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위기에 맞서 지속적으로 투쟁할 주체로서 형성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실천과 구체적인 요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들의 존재 조건에 대한 더 깊은 연구와 직접적인 실천의 경험이 더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 운동의 경향으로부터 일반적으로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유럽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1차 대전 이후, 우리에게는 87년 이후 기각된 민주주의적 요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불안정노동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세계화된 자본의 힘이다. 그 앞에서 사회구성원들의 이해를 일정 조율하는 역할을 하던 국민국가의 대의제 합의구조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었다. 국가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된 자본에 종속되어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들조차 후퇴하고 있다. 대의제 합의구조를 보완하던 코포라티즘 체제 역시 세계화 된 자본의 요구를 조직노동운동이 추인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점차 사회적 인구구성에서 다수의 위치를 점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대변하는 제도 정치세력은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세계화 속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인 인식은 한국에서의 촛불 투쟁이나 아큐파이 투쟁에서 나타나듯이 민주주의, 그것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끌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직접 민주주의 의식을 유러코뮤니즘 같은 국가개조론의 방향이 아니라, 구체적인 요구들과 폭로를 매개로 하여 보다 직접적인 민주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체제에 대한 요구로 이끌어야 한다. 

거리와 광장에서의 해방감이 일상적인 정치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터에서의 경제적인 차별에 대한 요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요구가 지금까지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조직노동운동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예컨대 노동조합의 전투적 재편과 같은 요구들은 전체 임금노동자들의 채 10%도 되지 않은 조직노동운동에나 적용되는 요구이지 노동조합조차 설립하기 어려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와 요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시간 단축 같은 요구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일반적인 요구를 넘어 불안정·비정규직노동자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더욱 구체적인 요구들이 정식화되어야 한다. 

여성, 청소년 등 우리가 흔히 주변부 노동력이라고 이야기하는 구성요소들을 대거 포함하고 있는 불안정한 노동자들은 대개 일터와 생활에서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고 있다. 공업노동자들을 배타적으로 기반 하려한 맑스주의자들이 대부분 여성, 환경 및 여타 소수자 운동에 대해 그 중요성을 폄하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조직하려는 대상이 주로 남성노동자들이란 점, 경제투쟁을 이들을 조직하는 중심 고리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진보에 뒤처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저임금과 불안정성이라는 일반적인 공통성 아래에 다양한 소수자적 정체성을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6년 일본에서 프레카리아트 메이데이 행사 광고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뿔뿔이 해체되면서 전쟁 상황을 강요받고 있다. 노숙 생활자는 차별과 배제 속에서 생존을 위협받으며 ‘자립’을 강요받고 시장에서 방출된다. 장애인들은 사회보장 혜택도 받지 못하면서 ‘자립지원 법’이라는 명목 하에서 자기 책임으로 일할 것을 강요받는다. 여성 파트타임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도 못하고 정규직은 꿈도 못 꾸는 노동만 하고 있다. 이주 노동자는 인간성을 유린하는 지문 날인 따위의 치안 관리에 휘둘리면서 주변부 노동자로 혹사당한다. (아마미야 가린, 같은 책, p.25) 


이러한 주체 구성 때문에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주변부, 소수자들의 이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에 대한 투쟁으로 일상적인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된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을 기본 모델로 현재 사회주의자들이 제출하고 있는 강령들과 달리 이런 부분들을 소위 ‘부문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에 억지로 끼워 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요구들을 중심에 놓고 이를 극복한 사회적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요구들을 기각할 수는 없지만 정치와 이데올로기로 중점을 이동하고 민주주의·여성·환경 등 과거에 부차화 되어 왔던 문제들을 일상적인 실천의 요구로 적극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 

 

낡은 전략·전술과 단절이 필요하다

투쟁에 대한 이론은 투쟁의 경험에서 나온다.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초반 유럽 각지에서 벌어진 대중파업의 경험은 이전까지 생디칼리스트들의 구호이던 총파업과 노동자통제를 사회주의자들의 전술과 요구로 받아들이게 했다. 1917년 러시아의 경험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실천을 중요시하는 코민테른 전술을 만들어냈다. 이것들은 모두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나름의 타당성을 가진 전술들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산업 국가들을 휩쓴 세 차례의 국제적인 반정부운동, 즉, 68년, 99년, 2011년의 투쟁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은 투쟁의 주체로 서지 못했다. 68년 혁명은 포스트구조주의를, 99년 이후 반세계화 투쟁은 다중이라는 담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2008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와 점령운동은 프레카리아트라는 용어와 광장 점령을 새로운 유행으로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현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전술의 대부분을 여전히 규정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1920년대 코민테른에서 정식화된 노선들이다. 프레카리아트라고 불리는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들,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주체화시키기 위해서는 코민테른 노선으로 대표되는 대공장/정규직/남성중심의 전략·전술과의 단절이 필요하다. 우리가 맑스와 엥겔스, 레닌 저작들의 오타쿠가 아니라 진짜 현실을 분석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유물론자들이라면 이른바 “맑스주의의 역사와 전통”보다는 현실을 중심에 두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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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특집] 탈공업화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①

새로운 주체를 위한 노동계급 역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이정인 (사노신 독자회원)
 




* 작년 노동자대회에 발간된 <붉은글씨>에 실린 글입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대공업을 자본주의 생산의 집적과 집중의 필연적 결과물인 동시에 세상만물의 가치를 창출하는 물질적 생산의 중심이자 계급의식이 집약된 혁명 혹은 사회진보의 기지로 상정해왔다. 그러나 지난 십여 년 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 촛불투쟁, 희망운동의 경험들은 이러한 가정이 단순히 환상이나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공통된 역사적 경험이다. 객관적인 계급과 당위적인 계급 사이에는 언제나 커다란 차이가 있었으며, 특히 2차 대전 이후 세 번의 주요한 국제적인 반정부투쟁, 즉 68혁명, 90년대 반세계화 운동, 그리고 2008년 경제위기 이후의 대중투쟁들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은 보조자나 주변부에 머무를 뿐 무대의 주인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공업노동자계급이야말로 자본주의 최후의 순간 분기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힐 메시아라는 철석같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연 이러한 믿음이 정당한 것이었는지 역사적 고찰을 통해 다시 점검해 봐야할 시기에 서 있다.


 

대공장의 등장과 노동자의 보수화

1885년 엥겔스는 가장 산업화한 영국의 노동운동이 왜 사회주의적인 운동이 되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처음으로 “귀족화된 노동자”, 즉 노동귀족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지속적인 개량은 노동자 계급 중 보호 받는 두 부류에게서만 볼 수 있다. 그 중 첫 부류는 공장 노동자들이다. 이들을 위하여 적어도 비교적 합리적인 표준 노동일이 법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그들의 건강 상태는 상대적으로 회복되었고 정신적 우월성을 가지게 되었는바, 이 정신적 우월성은 그들이 한 장소에 집결되고 있는 관계로 더욱 강화되었다. … 둘째는 대형 노동조합이다. 이것은 성인 남자의 노동만이 사용되거나 또는 그러한 노동이 지배적인 노동부문의 조직이다. 여기에서는 여성노동과 아동노동의 경쟁도 기계의 경쟁도 지금까지 그 조직적 역량을 타파할 수 없었다. 기계공, 목공, 소목, 건축 노동자들은 각각 그 자체로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으며 그리하여 건축 노동자의 경우와 같이 그들은 기계 도입에 대해서도 성공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그들의 처지는 1848년 이래 의심할 바 없이 현저히 개선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는, 지금까지 15년 이상이나 고용주들이 그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고용주들에게 매우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노동자계급 중에서 귀족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엥겔스는 노동귀족이 생기는 원인을 영국 공업의 독점적 위치에서 찾았다.


영국의 공업 독점이 지속되는 한 영국 노동자 계급은 어느 정도 이 독점의 이익에 참여하였다. 이 이익도 노동자들 사이에 극히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 대부분은 특권을 가진 소수가 차지하였다. 그러나 광범한 대중도 때때로나마 일시적으로 한 몫을 얻곤 하였다. 바로 이것이 오언주의의 몰락 이후 영국에 사회주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독점이 무너지면 영국 노동자 계급은 그 특권적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그들 전체가 ― 특권적이고 지도적인 소수들도 포함하여 ―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과 같은 수준에 처하게 될 날이 닥쳐올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회주의가 영국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처지 독일어 제2판 서문」, <맑스·엥겔스 저작선집> 6권, 이수흔 옮김, 박종철출판사, p.385)


엥겔스가 예측한 대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 미국과 독일 같은 새로운 산업국가의 도전에 의해 세계시장에서 영국 산업의 독점은 붕괴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국 노동운동이 급진화 되진 않았다. 오히려 20세기 초 노동운동의 보수화가 서유럽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대규모 제조업의 등장과 궤를 같이 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경향으로 대공업의 발전을 예측했지만, 당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한 장소에서 일하는 대공장은 아직 미래의 것이지 현실의 문제가 아니었다. 

맑스가 <자본론>을 집필하고 있던 1850년대와 60년대에는 영국에서조차 공장 규모는 수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자본론>이 아마포를 예로 들어 상품생산을 설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주도적인 산업은 면방직 공업이었다. 

공장제 도입을 이끈 직물업에서 기계의 도입은 아동노동과 여성노동 같은 미숙련 노동을 광범위하게 사용할 여지를 만들었다. 이들 공장에서 성인 남성 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50%도 되지 않았으며, 나머지 부분은 값싼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으로 채워졌다. 

당시 공장 노동자들의 처지는 엥겔스가 1845년에 쓴 <영국노동계급의 상태>에 잘 드러나 있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 형태는 파괴되었다. 조그만 쪽방 하나에 온 가족이 거주하며 부모와 아이들 모두 공장에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맑스와 엥겔스가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른 집단은 바로 이런 상태에 있는 노동자들이었다. 

이로부터 맑스는 성별분업에 기초한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은 점차 사멸할 것이며 이는 기계제 공업의 발전으로 여성/아동과 남성 성인의 육체능력의 간극이 좁혀짐에 따라 사회성원 전체의 노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운 사회로 발전하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종래의 가족제도의 붕괴가 아무리 무섭고 메스껍게 보일지라도, 대공업은 가정의 영역 밖에 있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생산과정에서 부인·미성년자·남녀 아동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가족과 양성관계의 더 높은 형태를 위한 새로운 경제적 토대를 창조하고 있다. … 또한 남녀노소의 개인들로 집단적 노동그룹이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것의 자연발생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적 형태[…]에서는 부패와 노예상태의 해로운 원천으로 되지만, 적당한 조건 하에서는 이와 반대로 인간적인 발전의 원천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도 명백하다. (칼 맑스, <자본론 I (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제 2개역판), p.656)


따라서 맑스는 원칙적으로 여성과 아동의 노동참여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아동노동 일반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가 초기부터 일관되게 자본주의적인 아동노동의 폐지와 교육과 생산의 통일이라는 요구를 지지했음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맑스가 <자본론>의 집필을 완결지은 1860년대 이후 그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경향으로 제시했던 생산 규모의 거대화 즉, 공장 규모의 거대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이 시기 영국 자본주의 생산의 중심은 면방직 같은 소비재 산업에서 점차 철강·기계·조선·철도 같은 중공업으로 이동했다. 이와 함께 비로소 오늘날의 대공장처럼 같은 작업장에서 수천, 수만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대규모 사업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산의 집적과 집중이 강화됨에 따라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강화되고 노동자운동이 정치적으로 급진화 될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산업 변화에 따라 제조업에서 여성과 아동 노동력은 점차 축출되었다. 중공업의 발전과 함께 소위 ‘가족임금’이 등장하여 노동자 가정도 부르주아 가족과 유사하게 남성노동자 1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형태가 되었다. 노동계급의 여성은 가사노동으로 돌아갔고 아이들은 새롭게 등장한 보통교육제도에 의해 학교로 흡수되었다. 엥겔스가 1880년대 영국의 “귀족화된 노동자”에 대해서 썼을 때, 그가 노동귀족으로 보았던 집단은 전자본주의의 유제로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는 수공업적인 노동자들과 새롭게 등장한 공장노동자들이었다. 

영국에서 19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던 산업의 이동, 즉, 2차 산업혁명이라고까지 불리는 철도·조선·탄광·철강·공작기계 산업의 상호 연관된 발전과 생산단위의 거대화는 북서유럽국가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일반화되었으며 이들 산업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들은 대략 1880년대에서 1920년대 사이에 단일한 조직적·정치적 계급으로 형성되었다. 생산의 대규모화와 산업구조의 변화, 기계에 의한 숙련의 대체 등에 의해 장인·직인·숙련공 중심의 노동운동이 몰락하고 대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매우 동질화된 반숙련·미숙련 육체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노조·정당·공제조합·협동조합·소비조합·취미클럽 등을 통해 ‘노동자 문화’라고 불리는 독특한 하위문화를 형성하며 동질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노동자들의 새로운 세대는 전 시대에 제기되었던 보통선거제의 실질적 확대를 쟁취하며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을 구성했으나, 보통선거제의 점진적 확대와 생활수준의 전반적 향상과 함께 자신의 정치행위를 평화적인 시위와 투표행위로 제한하고 작업장 투쟁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 결과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분리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맑스와 엥겔스가 1840년대 영국에서 목도한 “잃을 것이라고는 노예의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 밖에 없었던 전투적이고 정치적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후예들은 여전히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그들과 달리 더 이상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영국과 달리 독일을 중심으로 대륙에 새롭게 등장한 노동운동은 맑스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삼았고 사회민주당과 인터내셔널로 정치적으로 조직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륙의 노동운동이 엥겔스가 생각한 것처럼 영국의 노동운동보다 급진적인 운동이었는가는 꽤나 의심스럽다.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노동운동의 형성 초기부터 국가, 가족, 여성에 대한 입장에서 상당히 보수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맑스는 1875년 고타 강령이 나오자 “자유로운 국가”라는 강령의 요구가 라쌀레주의 국가관에 타협한 것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실은 맑스 파라고 불렸던 아이제나흐 파, 즉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의 강령 역시 그 제 1조에 “자유로운 인민 국가의 수립”을 목적으로 한다고 버젓이 밝히고 있었다. 국가주의적 경향은 엥겔스가 당시까지 나온 강령들 중 가장 맑스주의적인 것이라고 논평한 1891년의 에르푸르트 강령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카우츠키가 쓴 에르푸르트 강령 해설은 여전히 “미래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제2인터내셔널은 아동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금지와 여성노동에 대한 제한을 주장했다.

사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실천적으로 노동조합 운동과 결합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었으며 이념의 혁명적 성격과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이미 엥겔스가 살아있을 때부터 사민당 지도부에 의해 맑스·엥겔스의 저술에 대한 왜곡과 조작·누락이 나타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죽기 얼마 전 <프랑스에서 계급투쟁>에 붙인 새로운 서설에서 19세기의 혁명 전술이었던 도시 바리케이드 투쟁이 더 이상 적절한 전술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문서는 상당 부분이 삭제되면서 폭력투쟁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지게끔 편집되었다. 그 결과 이 글은 독일 사민당에서 엥겔스를 의회주의적 평화주의자로 해석하는 주요한 근거로 사용되었다. 

1895년 엥겔스가 사망하자 사민주의 운동은 곧바로 수정주의 논쟁에 휩싸이며 내적으로 분열되었다. 엥겔스의 공식적인 후계자이자 당내 가장 권위 있던 이론가였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로의 변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수정주의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독일 사민당의 실천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서유럽 노동운동의 실체는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제2인터내셔널 회원 단체들은 전쟁 이전에 이미 반전운동을 결의하고 있었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노동자들을 사로잡은 애국주의 열풍에 굴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은 전쟁공채 투표를 반대했지만, 당의 공식적인 이론적 지도자 카우츠키는 전쟁공채에 조건부 찬성 입장을 내놓았다.

서유럽 사민주의 운동의 변질에 충격을 받은 레닌은 이 변질 과정을 제국주의 분석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그는 엥겔스의 노동귀족 이론을 더욱 확대하여 서유럽 전반에 적용시켰다. 레닌은 세계를 분할하고 있는 주요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주민에 대한 초과착취를 통해 자국의 노동계급 중 일부를 매수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로 유럽 노동운동의 전반적인 보수화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분열

엥겔스와 레닌의 노동귀족이론은 당대 노동운동의 보수화라는 현실에 직면하여 이를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노동귀족이론은 몇 가지 난점을 가지고 있다. 어디까지 노동귀족이고 어디까지 노동자계급인가는 애매한 문제로 남았다. 특히 레닌의 노동귀족이론은 식민지에서 뽑아낸다고 상정된 초과이윤을 실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자칫 산업국가 중심부에서 혁명의 전망이 없다는 논리로 귀결될 여지가 있었다. 이에 대한 맹아적인 문제점은 부하린과 레닌의 미묘한 차이에서 나타났다. 1차 대전 발발 이후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볼셰비키 이론가 니콜라이 부하린은 “조직자본주의”라는 개념과 함께 소위 “약한 고리론”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런 논리가 잘못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을수록 혁명이 일어나기 쉽다는 논리가 될 가능성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래서 레닌은 대신 흔히 알려진 것처럼 “약한 고리”가 아니라 이와 구별되는 “중간정도의 약한 고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노동운동이 보수화된 서구도, 자본주의가 미발달한 동양도 아닌 러시아처럼 어느 정도 산업이 발달하고 노동자들이 중첩된 모순에 고통 받고 있는 중간 정도의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레닌은 제국주의 분석을 기초로 이 혁명은 일국의 혁명에 제한되지 않고 즉시 세계혁명으로 전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간정도의 약한 고리에서 시작된 혁명은 서유럽의 공업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사회주의 혁명과 동양 식민지의 민족해방 투쟁과 결합하여 세계혁명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런 레닌의 전망은 민족해방 투쟁 일반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고 적대시한 서유럽 좌익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식민지의 민족해방 투쟁에 상대적인 중요성을 두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1968년 이후 자국의 노동자들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한 급진적 좌파운동은 유럽이 아니라 제3세계 해방투쟁에 중심을 두었다. 

그러나 이런 논리들은 보다 전통적 맑스주의자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이단적인 것으로 비추어졌다.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에게 노동귀족이론은 일반적으로 기각되었다. 스탈린주의적인 유럽의 공산당들은 여전히 노동조합을 기본으로 한 운동을 계속했다. 반면 보다 좌익적 맑스주의자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운동의 보수화를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들의 중심성을 방어하기 위해 노조관료이론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기했다. 이런 논리를 특히 정교하게 제시한 것은 토니 클리프를 위시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이론가들이었다. 

한국에서 노동귀족론과 노조관료론을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노조관료이론은 이론사적 관점에서 볼 때 노동귀족이론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적 장치였다. 이 이론은 사실 맑스주의 역사에서 이질적인 전통을 수용한 것이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과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창시자인 토니 클리프는 레닌과 엥겔스의 논의가 아니라 베버를 시조로 하는 부르주아 사회학적 분석의 틀을 도입해 노조관료이론을 만들었다. 주로 독일 사민당에서 활동했던 이탈리아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제의 발달에 대한 막스 베버의 분석을 독일 노동운동에 적용했다. 그는 1911년에 쓴 <정당사회학>을 통해 독일의 노조와 사민당 모두에서 관료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그 결과 이들 조직에서 일반 노동자들의 이해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서술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만든 노조관료이론은 베버와 미헬스의 분석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이런 이론적 경향은 결국 이들이 서유럽 노동운동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엥겔스나 레닌의 주장처럼 영국이나 서유럽의 공업노동자들이 노동귀족이라면 이들 나라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고자 하는 정치 세력은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집단이라고 상정된 노동귀족을 대상으로 조직화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토니 클리프를 비롯한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이론가들은 유럽에서 전통적인 산업노동자들의 투쟁이 크게 벌어졌던 1920년대와 1960~70년대 투쟁을 근거로 노동귀족이론으로는 영국 같은 선진 산업국가에서 벌어진 대규모 노동자 투쟁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대신 자본주의 사회의 노사관계에서 일상적인 교섭을 담당하는 노조관료층이라는 특수한 사회적 집단이 등장했으며 이들은 일상적 시기에 일반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겉보기에 보수화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일반 노동자들은 여전히 잠재적인 혁명성과 투쟁성을 가지고 있으며 특정 시기에 일반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과 결합된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은 노조관료라는 자본주의 완충장치를 뚫고 나와 이들을 다시 혁명적 계급으로 조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1920년대 영국 총파업이나 1960~70년대 벌어졌던 숍스튜어트 투쟁 같은 일반 노동자들의 투쟁에 주목했으며, 그것은 반관료 평조합원 노선으로 정식화되었다.

그러나 노조관료이론은 사실 전통적 공업노동자에 대한 혁명적 신뢰 이상,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관료주의는 일반 조합원들의 조합주의에 의해 지탱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노조관료들은 조합주의의 인격적 화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미 1950년대부터 산업노동자들의 부르주아화 되었다는 주장이 등장했고 특히 지난 40여 년간 주요 산업 국가들에서 벌어진 주요한 반정부 투쟁에서 제조업 대공장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형성된 공업노동자계급은 2차 대전 이후 급속하게 보수화되었다. 1950년대 장기호황 이후 노동조건이 급속히 개선되었으나 이러한 투쟁은 공장 밖의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미래의 산업노동자들은 48년간의 고용보장, 연간 48주, 주 48시간의 노동시간이라는 세 가지 48을 기대할 수 있었다. 호황에 따라 실질임금은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며, “1950년대 말이 되면 사회학자는 부르주아화한 노동자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메그나드 데사이, <마르크스의 복수>, 김종원 옮김, 아침이슬, p.380)”

60년대 말, 서유럽 국가에서는 학생들의 투쟁이 불러일으킨 전사회적 위기에 호응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의 물결이 휩쓸었다. 북미에서 1950년대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의 생활개선이 서유럽에서는 대중투쟁의 성과로 급격히 개선되었다. 1968~1970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영국에서 파업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예년에 비해 두 배 가까운 임금인상을 획득했다.

2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와 북유럽 3국, 네덜란드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 존재하던 국가관료·기업관료·노조관료의 3자 협의체인 코포라티즘 체제가 1970년대 들어 서유럽 국가들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제도주의자들은 코포라티즘을 케인즈주의, 포디즘과 함께 장기호황을 가능하게 한 제도적 양식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코포라티즘은 사실 68~72년 사이에 유럽을 강타한 노동자 대중투쟁을 포섭하기 위한 대응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노동자투쟁은 70년대 들어 빠르게 퇴조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주목했던 영국의 평조합원 운동도 흔히 ‘불만의 겨울’로 불리는 1978년 말 대규모 투쟁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1980년대 몰락했다. 70년대 불황이 강타하자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과 노동조건을 지키는데 급급했고, 80년대 정치적 반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맑스주의자들은 사실상 이러한 현실에 대해 눈을 감았다. 유럽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조직노동운동의 경제주의를 정당화시키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클리프 류의 노조관료이론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전통적인 공업노동계급의 혁명성을 관념적으로 정당화하고 그들의 보수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맑스주의자들이 공업노동자들의 보수화라는 현실에 눈을 감으려 하고 있을 때, 부르주아 사회학에서는 70년대 초 이를 반영하여 내부노동시장이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부노동시장이론은 대규모 작업장을 중심으로 노동시장의 경쟁에 제약받지 않는 폐쇄된 노동시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1980년대 들어 노동계급의 분절화 이론, 이중 노동시장 이론으로 발전해 들어갔는데 그 핵심은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폐쇄된 노동시장이 존재하며, 여기서 배제된 하층 노동자들의 노동시장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되린저와 피오르가 처음 제기한 내부노동시장이론은 공장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소위 기업특수적인 숙련에서 원인을 찾았다. 기업 특수적 숙련이란 공장의 기계설비에 고착된 모종의 숙련이 있다는 가설을 전제로 했다. 하지만 기술혁신으로 공업 부문에 전반적으로 탈숙련화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노동시장은 건재했다. 되린저와 피오르는 미국 현장 특유의 직무급제를 내부노동시장 형성의 중요한 기제로 파악했지만 직무급제를 받아들이지 않은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대규모 제조업에서 내부노동시장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제조업 대공장의 폐쇄적 노동시장이 숙련이나 제도의 문제라기보다는 대공장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런 폐쇄성의 형성은 엥겔스가 지적한 대로 대규모의 인적 집결성이라는 대공장 자체의 잠재력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20세기 초 공장규모가 일반적으로 확대되는데 주요한 계기를 제공했던 포디즘 체계는 그 형성 초기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유인하는 경향을 보였다. 1914년 헨리 포드는 ‘T-모델’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일일 작업 8시간 당 5달러를 지불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당시 일반적인 공장 노동자들이 받는 금액의 세 배에 가까운 임금이었다. 대공업의 단순 반복적인 업무와 인적 집약성으로 인한 조직화 가능성은 비교적 초기부터 상대적으로 좋은 노동조건을 제시하게 했다. 

이런 포드 유형의 대공장은 대규모 기계 설비를 놀리지 않기 위해 안정적인 고용관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포드 유형의 대공장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풀타임 노동자, 소위 말해 정규직 고용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고용관계의 안정성은 다시 노동조합의 조직을 이전에 비해 용이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조직노동운동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 고용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고용이 안정적인 공공부문과 대규모 제조업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장기 호황 국면에서 높은 조직률을 가진 서구의 노동조합은 안정적으로 노동조건을 개선해 나갔다. 

90년대 이후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확대되었다고 흔히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노동유연화에 의해 내부노동시장이 해체되었는가? 여러 연구 결과들은 전통적인 화이트칼라 분야에서는 노동유연화의 진행과 함께 내부노동시장이 일정정도 붕괴되었으나 대규모 제조업에서는 축소된 형태긴 하지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노동유연화는 탈공업화와 함께 새롭게 창출된 산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추진되었다.



탈공업화와 계급논쟁

1973년 이후 서유럽과 북미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제조업 고용이 뚜렷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유럽 좌파와 맑스주의자들 내부에서 여러 가지 논쟁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들은 대개 탈공업화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보다는 전통적인 계급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었다. 

19세기에 중간계급, 즉 맑스주의 용어로 쁘띠부르주아는 임금이 주요 소득이 아닌 자영농민과 수공업자를 의미했으며, 프롤레타리아는 일반적으로 임금소득자와 동의어로 여겨졌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공무원, 기술자, 감독자, 사무직, 판매직 노동자 등 임금소득이 주수입이면서도 전통적인 공업노동자와 출신성분, 생활환경, 정서, 의식에서 큰 차이가 있는 새로운 계층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이미 이 당시 사민당 내부에서 이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인지 아니면 중간계급에 속하는 자들인지 논쟁이 벌어졌다.

베른슈타인은 제2인터내셔널 주류의 계급양극화 이론을 비판하며 이런 부류의 임금고용인들을 중간계급이라고 간주했다. 그는 이를 근거로 자본주의 하에서는 계급 양극화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계급이 늘어나며 오히려 사회가 안정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카우츠키를 위시로 한 독일 사민당 주류는 임금소득자들은 결국 양극화 경향을 피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는 집단으로 간주했다. 이 두 경향은 사실 1970년대 논쟁을 예기하는 것이었는데, 논쟁과 무관하게 독일 사민당은 비(非)공업노동자 당원들이 증가하며 점차 “국민” 정당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계급의 범위에 관련된 논쟁은 러시아 혁명의 승리와 함께 공장노동자만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우세해지면서 끝이 났다.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는 당의 기반을 공장에 두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새로운 임금소득자들은 동맹의 세력도 계급적 연대의 대상도 아니었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에는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일 수밖에 없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에 있어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혁명은 봉건세력에 맞서는 노동자와 부르주아적인 중간계급의 동맹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에서조차 혁명의 주체는 공업노동자와 농민들이라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공장노동자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는 독일처럼 중간계층이 발달하지 못하고 대규모 작업장이 외자유치를 통해 이식된 러시아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주도성이 강화된 1차 대전 이후 국제 사회주의 진영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공장노동자와 동일한 개념으로 수용되었다. 이런 경향은 1930년대 들어 하급 사무직 근무자들이 파시즘의 지지자로 드러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공장노동자들의 보수화와 제조업 비중의 축소에 따른 정치적 실천의 변화가 제기되며 유사한 계급 논쟁이 부활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제조업 생산의 거대화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친 뒤 활짝 꽃을 피웠다. 두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산업의 변화는 2차 대전 이후 서유럽과 일본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에 일반화되어 내구소비재, 전자산업, 자동차, 철강, 석탄, 석유생산 산업이 상호 연관된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산업의 융성은 이중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의 호황 동안 생산이 확대되고 생산규모가 거대화되며 제조업 고용이 증가했지만 비제조업의 고용은 더 빨리 증가했던 것이다. 미국의 좌파 학술 잡지 <먼슬리 리뷰 (Monthly Review)>의 대표적 이론가 폴 스위지와 폴 바란은 1966년에 발표한 <독점자본>이라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현상을 전통적인 독점자본주의와 연관시켰다. 그들은 독점자본 시대에 등장한 생산의 거대화는 대규모의 경제잉여를 창출하고 이 경제잉여를 처분하기 위해 커다란 비생산 영역이 창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2차 대전 이후에 서구 사회에서는 공공부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한편 거대해진 생산을 기획·관리하고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상품을 광고하고 유통하는 영역이 비대하게 발전했다. 스위지와 바란은 이를 대규모 경제잉여를 처리하기 위한 자본의 노력으로 규정했다.

1970년대 계급 논의는 주로 이런 부분은 일하는 임금소득자, 흔히 화이트칼라라고 명명된 사회집단의 성격에 대한 논쟁으로 집중되었다. 전통적인 공업노동자를 놓고 경쟁하던 사민당과 공산당,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은 새롭게 늘어나고 있는 화이트칼라를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를 놓고 다양한 논의를 시작했다. 사민당들은 베른슈타인과 유사하게 이들로 중심을 옮겨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반면 공산당은 여전히 공장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유지하며, 이들이 노동계급이 아니라 새로운 중간계급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유럽 공산당들은 반독점민주주의라는 폭넓은 전선 하에서 이들과 동맹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유럽 공산당의 전략을 주도한 그리스 출신 사회학자 니코스 풀란차스의 계급론은 반독점 민주주의 전선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자계급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말과 마찬가지로 공산당과 사민당 모두의 정치적 우경화로 귀결했다. 

이 두 경향과 다른 제3의 이론을 제기한 것은 스위지와 바란과 같이 <먼슬리 리뷰> 그룹에 속한 해리 브레이버맨이었다. 그는 1976년에 <독점자본>의 분석을 현대 자본주의 계급분석에 적용시킨 <노동과 독점자본>이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브레이버맨은 제조업 뿐 아니라 다른 산업 영역에서도 단순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창출되고 있으며 이들의 성격은 제조업 노동자들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브레이버맨의 주장과 달리 이후의 연구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의식은 상당히 이질적이라는 사실을 시사했다. 무엇보다 비제조업 화이트칼라 임금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제조업에 비해 훨씬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1980년대 들어서자 서구 산업 국가들의 탈공업화 경향은 더욱 분명해졌다.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은 산업공동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좌파 사회학자 앙드레 고르는 1980년 선견지명적인 통찰력을 담은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책을 통해 이제 전통적인 공업노동자의 역사적 역할이 끝났다고 대담하게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노동계급은 이제 특혜 받은 소수층일 뿐이다.” 앙드레 고르는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전통적 노동계급에 속하지 않는 신(新)프롤레타리아가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들은 다른 어떤 계급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않고 스스로도 동일성을 가질 수 없는 비(非)계급이다.

인구의 대다수가 후기산업사회의 신프롤레타리아에 속한다. 이 신프롤레타리아는 불안정한 지위의 보조직·기간직·구(舊)기술의 노동직·대체직·파트타임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일도 그다지 멀지 않은 미래에는 자동화 때문에 상당수 폐기될 것이다.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이현웅 옮김, 생각의 나무, p.110)


이러한 주장에 대해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견해를 고수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1972년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 이론가였던 에른스트 만델은 <후기자본주의>라는 책에서 본질적으로 비생산적 분야인 서비스산업의 팽창은 한계가 있으며, 결국 그것은 기술발달에 따라 상품 산업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예컨대 “교통 서비스는 자가용에 의해, 극장이나 영화 서비스는 개인 텔레비전 세트에 의해서 대체되며 장래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교육훈련이 비디오 카세트에 의해서 대체될 것이다. (에른스트 만델, <후기자본주의>, 이범구 옮김, 한마당, p.396)”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은 앙드레 고르의 <프롤레타리아트여 안녕>에 대한 답변으로 공업노동자들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제3세계 국가로 이전되고 있을 뿐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북미와 서유럽에서 제조업이 축소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대만 등 신흥공업국의 등장으로 전체 공업노동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탈공업화 경향이 단순한 이전이나 정체가 아니라 역전불가능한 자본주의의 경향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해졌다. 2003년 발표된 미국 알리안스 자산관리의 세계 20대 경제국 고용 동향 분석에 따르면 1995~2002년까지 제조업분야의 일자리는 2200만여 개가 줄어들어 11%가 넘는 감소를 기록했다. 이 기간 미국의 제조업 고용은 11.3% 하락했으며 일본은 16.1% 하락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이론가들이 공업노동자 증가의 예로 제시한 브라질과 중국, 한국에서도 제조업 일자리는 각기 19.9%, 15.3%, 11.6% 감소했다. 이런 결과는 그들이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창출의 진원지라고 주장한 신흥공업국가에서도 제조업의 비중이 계속 줄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90년대 후반 전통적인 맑스주의 이론가들이 여전히 탈공업화를 부정하고 있을 때, 탈공업화 논의를 넘어 인간의 노동력 사용 자체가 종말 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다고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95년 출간된 미국의 사회비평가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과 1996년에 나온 프랑스 작가 비비안 포레스테의 <경제적 공포>는 제조업의 축소를 넘어 인간노동의 종말을 예상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은 자동화의 진전이 결국 인간 노동력 사용에 종말을 고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비단 제조업뿐 아니라 농업과 서비스업 등 모든 산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런 유의 주장이 옳다면 당연히 실업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주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실업률은 1975년에서 1985년 사이에 급속히 증가했다가 1990년대 이후 정체되거나 심지어 미국의 경우에는 감소세를 보였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경제위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마찬가지였다. 

공업노동자들의 절대적 숫자가 감소 혹은 정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비제조업 노동자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사회적 필요가 등장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일자리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탈공업화는 노동의 종말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과 노동방식을 창출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탈공업화의 배경이 된 1970년대 북미와 서유럽의 경제침체는 이윤율의 저하 때문이라는 것이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합의되었다. 이로 인해 맑스주의 이론진영에서도 종래의 과소소비설에서 맑스가 <자본론> 3권에서 제시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 새삼 자본주의 위기의 주요한 원인으로 부각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의 구성에서 불변자본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윤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기술이 진보할수록 잉여가치를 낳는 노동자의 수는 불변자본 요소의 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본은 노동생산성을 계속 상승시켜서 경쟁자들에 비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확보하고자 노력하므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갈수록 고도화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업의 변화는 이윤율의 저하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근래의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특성으로 많은 논자들이 금융화를 꼽고 있다. 현재 세계경제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금융부문의 팽창이 생겨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금융의 팽창이 완전히 새롭고 특이한 현상은 아니었다. 적절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화폐자본이 생산으로부터 유리될 때 일반적으로 금융적 팽창이 형성되었다. 이런 금융의 과도한 팽창은 높은 이윤율을 보장하는 새로운 산업, 새로운 투자처가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해소되곤 했다. 문제는 1970년대 이후 이렇게 웃자란 자본을 흡수할 만한 제조업의 확대가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소위 제1부문과 자동차를 비롯한 내구소비재 부문의 발전이 경제성장과 고용확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40여 년 동안 제조업에서 그에 상응할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휴대폰,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제조업 영역이 창출되고 있지만 이들이 지난 시대의 기계·철강·자동차산업처럼 경제성장을 이끌기 역부족으로 보인다. 일단 이들은 그것들에 비해 비교적 값싼 소비재일 뿐 아니라 새로운 제조업 부분에 보다 쉽게 적용되는 기술혁신은 전보다 훨씬 줄어든 노동자로 필요한 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브레너는 <혼돈의 기원>에서 1965년에서 1973년 사이 제조업에서의 이윤율 저하 때문에 금융부분의 팽창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이 시기 이후 비제조업의 이윤율이 상대적으로 제조업에 비해 높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레너는 맑스의 이윤율 경향적 저하 법칙이 지나치게 단순한 모형이라고 비판하며 제조업 분야의 이윤율 하락 원인을 과잉축적과 구조조정의 지연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브레너는 자동화 혁명의 영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위기 자체는 제조업 분야의 과잉축적으로 촉발된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 직후 트랜지스터와 반도체의 개발로 출발한 소위 극소전자 혁명,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기술혁신이 70년대 이후 모든 제조업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맑스가 제시한 대로 상대적 잉여가치 창출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산업자본가들의 대응이었다. 기술혁신은 제조업에 필요한 노동자들을 줄이고 선진산업국가에서 제조업의 이윤율을 전반적으로 더욱더 하락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능한 것이 분명하다. 

지난 40년 동안 모든 주요 산업국가에서 서비스 산업의 고용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제레미 리프킨이 주장한 대로 기술의 발전으로 서비스 영역에서 퇴출되는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그가 자동화의 결과로 노동력 사용이 줄어든 서비스분야의 예로 제시한 전화 교환수, 우편 서비스, 일반사무직, 유통업과 같은 부분들은 공공서비스, 사무, 유통 등 2차 대전을 거치며 급증한 서비스산업의 보다 전통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서비스영역에서 고용이 감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서비스산업 종사자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전체 임금노동자의 60~70%를 차지하기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서비스산업을 넘어서는 또 다른 확대과정이 벌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비제조업을 비생산영역으로 바라보는 사고로는 이 부분들의 팽창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서비스산업의 낮은 노동생산성과 따라서 여전히 제조업이 경제성장에 중요하다는 논리들로는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른바 서비스 사회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하나의 유력한 가설은 제조업 이윤율보다 서비스산업의 이윤율이 높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비스산업의 노동생산성이 낮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고정자본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에 이윤율이 높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고정자본의 비율이 낮은 산업은 당연히 생산성은 낮겠지만 이윤율의 저하 경향에서는 자유로울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즉, 기계 설비를 사용하는 제조업에 비해 노동력 사용이 중심일 수밖에 없는 서비스산업은 노동생산성은 낮으나 이윤율은 높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된 제조업으로부터 금융부분의 팽창을 거쳐 가변자본 비율이 높은 비제조업, 특히 대인 서비스 산업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재의 변화를 설명하는데 있어 합리적이다. 맑스의 <잉여가치학설사>에는 “농업에서 이윤율은 공업에서의 이윤율보다 떨어지므로 자본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동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현상이 최근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라는 책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필리프 프티는 제레미 리프킨이나 비비안 포레스트의 주장이 기우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그녀에 따르면 기술혁신의 영향으로 제조업이나 기존의 서비스산업에서 노동력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보 과학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공동생활의 한 분야가 있다”고 한다. “육체적·정신적, 지적으로 아이들·청소년들·노인들·병자들·장애인들, 그리고 심지어 생산 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성인들을 돌보는 것, 가르치고 보살피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 사람들의 요구는 무한하다. 따라서 이른바 일자리의 광맥도 무한하다. (도미니크 슈나페르, <노동의 종말에 반하여 - 필리프 프티와의 대담>, 김교신 옮김, 동문선, p.75)” 

그녀는 앞으로 이런 일자리들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최근의 자본주의는 이런 분야들을 지속적으로 상품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들어 부쩍 돌봄 노동, 감정노동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 역시 전반적인 실업 사회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가 제3부문이라고 이름붙인 자발적인 사회봉사의 영역에 국가가 사람들을 고용하고 일정정도의 소득을 지급해 줄 것을 제기한다. 자발적인 사회적 서비스의 영역을 저소득층이 일하는 저임금 일자리로 만들자는 리프킨의 위험한 아이디어는 하지만 이미 사적 자본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나 필리프 프티는 사회서비스 영역의 노동화가 인간에게 기본적인 생활보장과 함께 새로운 사회 참여의식을 고양해 줄 것이라고 낙관하지만, 2006년 일본 메이데이 프레카리아트 행사 광고의 글귀는 이런 노동이 지금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고용주 측은 “노동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친구 같은 동료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같은 감언이설을 남발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이 싼 시급으로 불평 없이 일해주길 원하고 때로는 기꺼이 무급으로 노동해주기를 바란다. 커뮤니케이션 서비스나 감정, 대인 서비스같이 사람의 생 자체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경우, 잠시 착각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자기실현’의 기회를 기대하고 하찮은 작업에서 ‘보람’을 발견, 감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직업인이 된 듯한 기분’도 ‘사이좋은 클럽’에 대한 기대도 곧 배신당한다. 일하는 장소는 수시로 바뀌고, 그때까지 손에 익은 기술은 곧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오후에 낚시를 하고 밤에 토론을 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멀고 집에 돌아가면 녹초가 된다. 그런데도 “일할 의욕이 없다, 엄살이다.”와 같은 비난 세례를 받고 있다. 문제는 항상 이것이 개인의 자질 탓이라며 ‘인간력’을 높이라고 참견하는 설교가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비정규직인 사람들은 이런 적의나 조소와 겨루고 있다. 이 전망 없고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생존의 위협을 견뎌야 한다. (아마미야 가린,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 김미정 옮김, 미지북스, p.24)


이러한 일자리들은 과거 인격적으로 종속된 신분사회에서 하인노동이라고 불리었으며, 신분사회의 붕괴와 함께 예속적인 기능에서 풀려나 자발적인 사회봉사의 영역으로 존재하던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변화는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공통체적 본성에 기인한 자발적인 영역이던 사회서비스, 혹은 인간서비스의 영역을 자본이 이윤을 찾아 상품화시키고 있는 걸로 보아야 한다.

제조업에서 노동유연화가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데 반해 노동유연화의 확대와 서비스 노동의 확대가 서로 중첩되어 일어나고 있다는 현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후발 공업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대규모 작업장에서 사내하청이라는 전근대적 고용관계가 초기부터 존재했고, 90년대 이후 급속히 증가하여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포디즘에 기초한 대규모 작업장의 형성과 함께 정규고용을 중심의 노사관계가 확립된 서구의 경우 신자유주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에서 노동유연화의 확대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유연화는 법률과 조직의 보호를 받는 이들 부분을 비껴나 대개 비제조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유동적이고 분산적인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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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글씨][쟁점] 다시 ‘소련’을 말하다 ②

3.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과 이론적 혼란



1920년대 초 볼셰비키 정권은 이미 진정한 혁명적 대중 권력기관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물리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의 자발적인 무장력은 내전을 겪으며 불가피하게 훼손되었고 그 후에도 민병제는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물리적․문화적 후진성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옛 차르체제의 장교들도 편입된 적군에서 그 지휘와 통제는 점차 관료적으로 변해갔다. 또한 그 자체가 입법과 행정이 통일된 국가기구이자 직접민주주의의 표상이어야 할 소비에트는 내전 동안 실질적으로 붕괴되었고 이후 의회적인 감시기능으로 역할이 국한된 채 하향식으로 재건되었다. 더욱이 네프에 따른 자본주의로의 퇴행 속에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은 사실상 국가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당에 의해 그 혁명성을 보증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노동자대중이 더 이상 국가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집단적인 통제력을 상실한 객체로 전락해가고, 또한 세계혁명의 전략에 종속되어야 할 러시아 혁명이 오히려 그 자신의 안정과 번영을 세계혁명보다 앞세우며 일국사회주의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게 될 때, 국가기구를 주도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한 반혁명의 귀결은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의 역사에서 소위 ‘위대한 전환의 해’로 일컬어지는 1929년은 이런 의미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로 요약되는 스탈린의 급격한 정책전환은 일국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집행한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공업과 농업의 불균형 속에서 인민경제의 발전과 관련해 공업독재와 부농해체로 상징되는 트로츠키의 좌파적 노선과 공업발전을 농민경제에 의존하는 부하린의 우파적 노선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이론적 투쟁이 아닌 정치적 투쟁이었지만 그 승리자는 다름 아닌 당 중앙기관에 의지하며 당원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기반으로 삼은 스탈린이었다.

 

레닌 사후 네프를 실질적으로 총괄했던 스탈린은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으로 비치기도 했지만 정작 그것은 스탈린 자신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보자면 문제될 게 없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세계혁명을 이유로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가능성을 부정한 좌익 기회주의자로, 또한 부하린은 일국사회주의론을 형식적으로는 인정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과 방법을 부정한 우익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혔을 뿐이다.

 

사실, 네프는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양보이자 후퇴로 시작되었지만, 세계혁명과 절연된 일국사회주의에 충실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게는 국가권력 그 자체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1926년경에 이르러 농업총생산이 전쟁 전의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되고 권력이 안정화되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부농에게 더 이상의 양보를 중단하는 등 네프를 이제 적극적인 정책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7년 영국과의 외교 및 무역관계 단절 등 국제정세가 긴장을 맞게 되고, 그해 하반기부터 곡물조달의 위기가 심각해지자 스탈린은 이미 국가기구의 주도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그 해결책으로 일국사회주의 건설을 전면에 내걸고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를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그 이전부터의 누적적인 추세를 반혁명으로 완결지은 공세였다.

클리프 역시 『소련』에서 이와 유사하게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된 1928년을 중요한 분기점으로 설정한다. “이때 처음으로 관료층은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하면서 급속히 자본을 축적하려 했다. 달리 말하면, 관료층이 부르주아지의 역사적 사명을 되도록 신속하게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이때였던 것이다. (토니 클리프,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정성진 옮김, 책갈피, 2011, p.168)”


클리프는 1928년 이후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보다 정확히 말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명명한다. 이와 더불어 소련의 관료층은 노동계급에 기생하고 있는 신분에서 인격화된 자본인 지배계급으로 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소련 사회에 대한 이 같은 분석은 1948년에 정립되었는데, 당시 소련은 히틀러를 패퇴시키고 이른바 ‘대조국수호전쟁’에서 승리하며 동유럽 전역에 스탈린주의 체제를 이식하는 등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소련을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서구의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타도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은 가히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에 내재한 이론적인 혼란과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닌 선명하고 분명한 주장은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말하다


클리프가 자신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정식화한 과정은 사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트로츠키주의 운동 내부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던 이론적 논쟁과 맞물려 있었다.

클리프가 제출한 국가자본주의론은 원래 소련이 아니라 종전 후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 성격을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4~45년 ‘인민민주주의’의 슬로건 하에서 대체로 동유럽이 소련의 감독 밑에 놓이게 되자 트로츠키가 건설했던 제4인터내셔널은 이들 국가들에 대해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리프는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주장한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에 동조했지만, 그러나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 성격에 대한 이 같은 방침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사회 성격이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 클리프는 양자 모두 퇴보한 노동자국가임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되면서 클리프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소련 역시 그 사회 성격이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은 우왕좌왕 하였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이 등장할 무렵인 1947~48년부터 소련과 미국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되자 그 완충지대에 있었던 동유럽 국가들은 강력하게 소련을 닮아가기 시작했고 불과 몇 년 만에 사회경제적으로 급격한 전환을 이루었다. 그러자 제4인터내셔널은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동유럽 국가들도 소련과 동일하게 퇴보한 노동자국가이며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임을 중단했다는 수정된 견해를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클리프와 제4인터내셔널의 입장이 공존할 수 있는 여지는 더 이상 없었다.

당초 트로츠키는 전쟁의 비극을 다시 한 번 지켜보면서 이 전쟁이 전세계 노동계급에게 새롭고 결정적인 시험대이자 노동자혁명을 촉발시킬 것이라 확신했다. 자본주의가 최종단계에 들어서게 되었고 생산력의 정체와 사회적 쇠퇴 속에서 지배계급조차 새로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특유의 파국적인 정세인식은 이를 뒷받침해주었다.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 역시 이러한 압력 속에서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물론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오래된 격언처럼 그 반대의 가능성(“그러나 현재의 전쟁이 혁명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쇠퇴를 가져온다면 다른 대안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즉 독점자본주의는 더욱 부패할 것이고 국가와 더욱 강력하게 융합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가 그나마 남아 있는 곳도 전체주의로 대체될 것이다. 노동계급이 사회의 지도력을 장악할 능력이 없을 경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보나파르트적 파시스트 관료집단으로부터 새로운 착취계급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체제는 모든 징후로 보아 문명의 쇠락을 의미할 것이다.”(트로츠키, 「전쟁에 돌입한 소련」,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이장수 옮김, p.54))도 제기되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곧 닥쳐올 세계혁명과 그것에 대한 준비였다.

그러나 기대되었던 세계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새롭게 활력을 보여주었고, 스탈린주의 체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안정적임이 입증되었다. 트로츠키의 예측은 맞아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트로츠키에 따른다면 소련의 관료층은 이제 새로운 착취계급으로 스스로 등장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은 변화된 세계정세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고집스럽게 또 다른 정치적 격변의 시기가 임박했음을 주장했다. 그것은 트로츠키가 그의 입장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1930~40년대의 시대적 맥락을 고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또한 소련 사회에 대해서도 자본주의로의 복원 가능성을 부정하며 과거 트로츠키가 했던 방식처럼 전면적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이유로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했다. 향후 혁명의 과제 역시 사회혁명이 아니라 기생적인 관료집단을 타도하는 정치혁명으로 한정되었다. (트로츠키는 본래 소련에 대해 개혁주의 전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소련이나 다른 곳에서 공산당을 없애고 새로운 혁명정당을 만드는 것이나 코민테른 대신 새로운 국제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의 집권과 이에 대한 스탈린주의 관료층의 묵인과 방조를 목격하면서 당과 국가를 개혁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트로츠키는 스스로 문제를 만들었는데,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의 분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소련의 현실과 부합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도 악용될 수는 중대한 문제였다.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될 수 없듯이 당연히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의 2월 혁명 이후 <피난소바야 가제타>라는 언론은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구분하고, 정치혁명은 단 하루만에도 일어날 수 있으나 사회혁명은 수십 년 내에 행해질 수 없다고 협박하며 노동자와 농민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권력이 장악된 2월 혁명만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명백한 사실을 숨기려 하였다. 그러자 레닌은 정치혁명과 사회혁명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이를 반박했다. “모든 정치적 격변은 단순한 파벌의 변화가 아니라면 사회혁명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계급이 그 사회혁명을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다. 1917년 2월 27일 혁명은 니콜라스가 이끄는 봉건지주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그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주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사회혁명이었다.”(레닌, 「인민을 놀라게 하려고 자본가들은 어떻게 애쓰고 있는가」, <레닌저작집 7-1>, 레닌출판위원회 옮김, 전진출판사, 1991, p.409))

트로츠키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을 정통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은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의문을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대중 스스로 국가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러한 국가가 노동자국가가 될 수 있는가? 또한 어떻게 노동자국가가 노동계급의 주도적 역할도 없이 동유럽 국가들처럼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위로부터 형성될 수 있는가? 이 때문에 트로츠키주의 운동 안에서 클리프를 비롯해 반대 조류가 출현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러한 입장을 따른다면 소련의 방어를 주장해야 했다. 193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목격한 트로츠키에게 ‘발전하는 사회와 쇠퇴하는 사회’의 구별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전쟁에서 소련의 방어를 호소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이유로 소련 사회를 두고 노동자국가의 변종이자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로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이는 트로츠키의 견해를 왜곡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1936년 소련이 사회주의에 도달했다는 스탈린과 달리 소련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예비적 체제임을 명확히 했다. 물론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보다 진보한 사회체제였다는 점에서 양자의 주장은 공통된다. 그 근거도 대부분 소련 사회에서 존재한 전면적 국유화와 계획경제로 집중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스탈린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가지고 그 사회를 사회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혁명 이후 사회화를 위한 첫걸음으로 기능할 뿐이며,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이 전사회적으로 획득․점유되어 생산이 더 이상 개별단위에게 맡겨지지 않고 전사회적으로 조직되는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계급의 폐절과 국가기구의 사멸을 전제로 하며, 가치법칙 역시 소멸하게 된다.

 


“사회가 생산수단을 보유하고 그것을 직접 사회화하여 생산에 이용한다면, 각인의 노동은 그 특유하게 유용한 성격이 아무리 상이하더라도 처음부터 직접 사회적 노동으로 된다. 그렇게 되면 생산물에 들어 있는 사회적 노동의 양을 확정하기 위해서 우회로를 거칠 필요조차 없다 ; 날마다의 경험이 평균적으로 얼마만큼의 사회적 노동이 필요한가를 직접 알려주게 된다. … 따라서 이제 사회가 생산물에 투입된 노동량을 직접적이고 절대적으로 알고 있는 이상 그 노동량을 … 제3의 생산물로 표현하겠다는 생각이 사회의 머릿속에 생겨날 리가 없다. … 그러므로 사회는 위에서 말한 전제에서는 생산물에 어떠한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엥겔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최인호 외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3, pp.338~339)


그러나 정작 소련에서 상품생산의 일반적 성격은 제거되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는 일국사회주의라는 전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이유에서 상품생산의 현실을 ‘사회주의적 상품생산’으로 호명하며 현실을 인정하는 대신 이론을 왜곡하였다. 1952년 「U.S.S.R.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에서 스탈린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를 잘 보여준다.

 


“때로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가치법칙이 존재하고 작용하는지 여부가 질문된다. 그렇다, 그것은 존재하고 작용한다. 상품 및 상품생산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가치법칙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다. … 가치법칙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경제법칙인가? 아니다.” (스탈린, 「U.S.S.R.에서의 사회주의의 경제적 문제들」, <스탈린선집 2>, 서중건 옮김, 전진출판사, 1990, p.240, 255)


 

하지만 엥겔스는 “가치법칙은 바로 상품생산의 기본법칙이며, 따라서 또한 상품생산의 최고 형태인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법칙이기도 하다(엥겔스, 앞의 책, p.342)”라고 분명히 했다. 스탈린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소련 사회에서 가치법칙의 존재를 자인하는 것이자, 소련이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일례로 스탈린이 소련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선언한 그 무렵 트로츠키는 “루불화는 대중의 경제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도구가 되었다(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김성훈 옮김, 갈무리, 1995, p.106)”고 밝혀 소련에서 화폐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소련 사회가 사회주의가 아님을 명백히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소련이 노동자국가로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1936년 『배반당한 혁명』에서 민병제가 상비군으로 대체되고 관료제가 부활했으며, 당의 퇴보와 소비에트의 무력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그리고 소련의 국가기구는 사멸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유례없는 끔찍한 강제기구로 변했다고 증언했다. 트로츠키 그 자신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겼던 국유화와 계획경제도 노동자대중의 통제력에서 벗어나 도리어 그 위에서 군림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 주도되었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모습은 소련 사회가 아무리 퇴보했다고 해도 더는 코뮌국가로 볼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향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등장하게 될 코뮌국가의 구체적인 방침을 미리 재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등장한 다음과 같은 방책은 분명히 확인될 필요가 있다.

 

““경찰과 상비군이 폐지되어 보편적으로 무장한 인민으로, 즉 인민의용군으로 대체되고; 모든 공무원이 선출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거인들의 다수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소환에 응하고; 예외 없이 모든 공무원이 유능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초과하지 않는 수준의 급여를 받고; 의회 대의기관들이 점차적으로 입법기관 및 행정기관의 기능을 겸비하는 (다양한 계급과 직업 출신의, 또한 다양한 직업 출신의) 인민 대표자들의 소비에트로 대체될 보다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바로 코뮌국가인 것이다.” (레닌, 「당 개정에 관한 자료들」, <레닌저작집 7-2>, 레닌출판위원회 옮김, 전진출판사, 1991, p.36)

 

오히려 트로츠키가 묘사한 소련 사회의 적나라한 현실은 소련이 부르주아 국가로서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20년대 초 레닌은 이미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엄밀히 말해 당시 사회경제적인 조건을 고려한다면 그것 역시 코뮌국가의 일종으로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으로부터 분명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퇴보한 노동자국가’라는 개념을 트로츠키가 그것도 1920년대 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보여준 반혁명의 최종적 귀결 이후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코뮌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클리프를 포함해 당시 트로츠키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반대자들에게 소련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이론적 해명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선택한 것은 바로 국가자본주의 이론이었다. 

 

클리프 이전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역사


지난 1990년대 초반 남한에 클리프의 『소련』이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국가자본의론은 클리프가 주도하여 창건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이하 SWP)의 이론적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서구에서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해명하려는 노력은 클리프의 이론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있었고, 국가자본주의론은 이미 상당히 인기 있는 이론이었다. 물론 이러한 인기의 그 배경에는 국가자본주의론이 역사에 대한 단선적인 도식, 즉 ‘봉건제→(국가)자본주의→사회주의’와 친화성이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이에 따라 소련 사회를 관료적 집산주의를 비롯해 ‘제3의 체제’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살펴볼 것처럼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의 유형에 속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에 부합하기 때문이지 사회주의도, 노동자국가도 아니라서 자본주의로 규정한다는 편의적 사고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국가자본주의론은 소련 사회의 성격 문제를 위해 고안된 이론이 아니었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의 역사는 10월 혁명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의 국유화와 사회복지정책이 실시되자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도 이를 소위 국가사회주의 정책이라 부르며 지지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그러자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하여 이들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부르주아 국가의 팽창이 ‘국가사회주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에게 불리하게 세력균형을 바꿈으로써 ‘국가자본주의’로 귀결될 것이라 주장했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처음부터 어떤 분석적인 의도를 갖고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국가자본주의라는 개념이 독일에서 생겨났다는 것은 독일이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그만큼 강하게 규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이후 국가자본주의의 개념은 더욱 정교해졌다. 특히 독일의 전시경제에서 나타났던 기업에 대한 생산의 강제, 소비재의 분배 규제, 최소가격의 고정 등은 국가자본주의의 기본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대해 부하린은 “자본주의적 ‘국민경제’는 비합리적인 제도에서 합리적인 조직으로 변화했으며, 주체 없는 경제에서 그 자신을 경제주체로 전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금융자본주의 성장, 부르주아 경제조직과 정치조직의 결합”이었다. (부하린, <과도기 경제학>, 황수정 옮김, 백의, 1994, p.21) 따라서 “금융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재편성은 국가자본주의적 조직화로 나아가는 길이었으며, 그것은 상품시장의 폐지, 화폐가 계산단위로 전화되는 것, 생산이 국가적 규모로 조직되고, 모든 ‘국민경제’ 구조가 세계적 경쟁이라는 목적에, 특히 전쟁 목적에 종속되는 전 과정과 더불어 진행”된다고 보았다. (부하린, 앞의 책, pp.48~49)


당시 국가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부하린처럼 자본주의 발전의 더 높은 새로운 국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인식은 1918년 상반기 러시아의 볼셰비키당 내에서 벌어진 국가자본주의와 관련한 논쟁에서도 반영되어 있었다. 레닌은 10월 혁명 직후의 사회적 혼란이 수습되자 경제를 국가운영의 최우선적 과제로 놓으며 기업의 노동규율 확립, 경영의 단독책임제 도입, 독립채산제의 실시, 부르주아 전문가 활용, 경쟁의 조직화 등 일련의 경제조치를 내세웠다. 레닌 스스로도 파리코뮌의 원칙으로부터 일보 후퇴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당내에서 좌익적 경향을 대표하던 부하린, 오신스키 등은 이러한 정책을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부르주아 세력의 부활 가능성을 우려하는 한편,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도권은 미리 박탈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강화 속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독점이 확고해질 때 도입된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는 노동자국가에 봉사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좌익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에 있는 러시아 경제의 독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18년 5월 「좌익 유아성과 소부르주아적 심리」에서 레닌은 “현재 러시아에서는 (소농 중심의-옮긴이) 소부르주아적 자본주의가 만연하고 있는데, 그것을 대규모 국가자본주의로 혹은 사회주의로 이끄는 것은 양자 모두 완전한 동일한 과정이며, 또한 이 과정은 ‘생산과 분배에서의 국가적 계획과 통제’라는 완전히 동일한 중간 역을 거친다”고 했다. (레닌, 「좌익 유아성과 소부르주아적 심리」, <좌우익 기회주의 연구>, 이민희 편역, 아침, 1988, p.282) 이는 그만큼 러시아에서 우선적인 과제로 대규모 생산의 발전, 즉 국가자본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단호한 사회화’를 주장할 때, 레닌이 이를 ‘국유화나 몰수’와 혼동해서는 안 되며 사회화를 위한 계산과 분배능력의 결여라는 당면한 현실을 고려해야 함을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1918년 중반 이후 내전의 본격화는 레닌의 국가자본주의적 구상을 사실상 기각하며 국가자본주의에 관한 논쟁도 일단락시켰다. 이후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는 네프 시기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좌익에 속한 호르터, 판네쿡, 륄레 등이 1920년대 초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비판은 보다 근본적인 것이었다. 당초 이들은 10월 혁명에 열광하고 지지했지만 이후 그것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재규정하였다. 오토 륄레에 따르면, 볼셰비키당은 봉건제에서 사회주의로 직접 나아감으로써 하나의 역사적 시기를 건너뛰려 했지만 결국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고 말았다. 즉, “러시아 혁명은, 주어진 역사적 환경에서, 오직 부르주아 혁명일 것이다. (마르셀 판 데르 린던, <서구 마르크스주의, 소련을 탐구하다>, 황동하 옮김, 서해문집, 2012, pp.59~60에서 재인용)” 이러한 견해는 일국차원에서 10월 혁명을 처음부터 부르주아 혁명이라 비난한 카우츠키를 제외한다면 소련 사회를 가장 먼저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경우였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국가자본주의의 개념은 독일의 전시경제에서 비롯된 만큼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개입을 주된 특징으로 하는 시장경제로 폭넓게 해석되었다. 그것은 자본의 생산규모의 거대화와 맞물려 국유화를 통한 사적 자본주의의 지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소련 사회의 성격에 대한 논쟁에서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의 역할을 하는 경제라는 개념으로 예전에 비해 협소한 뜻을 갖게 되었다. 이는 1920년대 말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해 추진된 전면적 국유화 조치와 관련이 깊다.


트로츠키의 경우 이를 근거로 파시즘 국가와 소련 사이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이렇게 자랑한다 : ‘내가 이탈리아에서 국가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를 원한다면 필요하고 적절한 객관적 조건들은 전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하나의 조건이 결여되어 있다. 즉 자본가계급 전체의 생산수단 전부를 국가는 아직 몰수하지 않았다. 이 조건을 실현하려면 파시즘은 계급투쟁의 바리케이드에서 노동자 편으로 넘어가야 한다. … 자본가계급의 생산수단 전부를 몰수하는 일은 다른 사회세력, 다른 지도자, 다른 중핵들을 필요로 한다.”(트로츠키, 앞의 책, p.251)) 그러나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연구 작업은 그 후에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은 그중 하나였으며, 그의 이론은 그 출발에서부터 꼼꼼한 독해를 요구한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① :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혼란스런 이해과 이론의 왜곡


클리프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모델로 삼은 만큼 <소련>에서 먼저 소련의 현실을 파악하는데 주력한다. 이는 소련에서 혁명이 어떻게 파괴되어 있는지 생생한 사례와 구체적 통계를 통해 환기시켜주는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클리프는 10월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재확인한다. “차르 체제의 몰락을 재촉한 제1차 세계대전은 교전국들 각각의 생산력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세계 수준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물질적 조건들이 무르익었음을 나타내는 것(클리프, 앞의 책, p.156)”이라고 함으로써 10월 혁명의 의미를 일국차원으로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들이 마련되기도 전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 비극은 10월 혁명에 직접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과격 정파의 지도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대변하는 계급의 지배와 그 계급지배가 함축하는 여러 조치가 실현되기에는 시기가 성숙되지 않은 때에 한 정부를 어쩔 수 없이 떠맡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딜레마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 한 마디로 그가 어쩔 수 없이 해야 대변해야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정파나 계급이 아니라 지배를 위한 제 조건이 성숙된 계급이다.”라고 한 바가 있다. (엥겔스, 「독일농민전쟁」, <독일 혁명사 2부작>, 이종훈․김용우 옮김, 소나무, 1988, pp.122~123))

이를 토대로 클리프는 소련이 국가자본주의로 전환됨에 있어 1928년의 제1차 5개년계획을 그 기점으로 놓는다. 소련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도 이때부터는 명확하게 자본축적을 지상과제로 삼게 된 자본가계급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클리프가 소련 사회의 국가자본주의적 특성을 본격적으로 제시하기 이전 <소련>에서 주요하게 문제 삼는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규정은 대단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또한 소련을 통해 노동자국가에서 국가자본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입증하려는 과정에서는 맑스주의 국가이론에 대한 왜곡과 그 일반화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클리프가 소련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트로츠키였고, 트로츠키의 입장에 대한 반박이 곧 자신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클리프는 트로츠키가 <배반당한 혁명>에서 피력한 견해(“국가자본주의가 경제 전체를 지배할 경우 이 이윤균등분배 법칙은 자본들간의 경쟁이라는 우회로가 아니라 국가 회계라는 방식을 통해 직접 그리고 즉시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지금까지 존재해본 적이 없으며 자본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심대한 모순 때문에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더욱이 국가가 자본주의적 소유형태의 보편적 담지자가 되면 사회혁명의 대단히 매력적인 대상이 될 것이다.”(트로츠키, 앞의 책, p.250))처럼 국가자본주의의 실현 불가능성을 인정하였다. “국가자본주의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더라도, 사적 자본주의가 진화적 발전을 통해서 실제로 사회의 모든 자본이 하나의 수준에 집적되는 상황까지는 결코 이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클리프, 앞의 책, pp.170~171)”

하지만 곧이어 클리프는 “집권한 노동계급이 타도되고 난 후에 전통적 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가 부활할 가능성도 배제하는가?(클리프, 앞의 책, p.171)”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의도는 분명했다. 소련 사회를 통해 국가자본주의의 존재가 현실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그렇다면 클리프가 제기하는 국가자본주의의 존재양식은 자본주의의 자연스런 발전으로는 성립할 수 없는 특수한 경우일 수밖에 없다. 소련처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패퇴시킨 반혁명에 의해 등장하게 되는 국가자본주의를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성격을 서술하면서부터는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이론적 극한이라고 규정한다. 이에 따라 국가자본주의는 노동자국가와 함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과정에서 한 단계로 격상되기까지 한다. (이러한 이유는 클리프가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하린은 국가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가장 절대적인 형태로 판단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물구나무선 국가자본주의, 즉 국가자본주의 자신의 대립물로 변증법적으로 전화된 것이라 주장한다. “사회세력들 간의 상관관계라는 점에서 볼 때 국가자본주의는 부르주아지의 지수형(한 곱 더 올라간) 권위를 나타내며, 여기에서 자본의 지배는 극치에 달하여 정말로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서, 국가자본주의는 부르주아지 독재로 표현되는 자본의 지배 하에서 적대적 생산관계를 토양으로 하는 생산과정의 합리화이다. … 사회주의 독재 체제는, 만약 국가사회주의라는 말이 일반에 통용되는 과정에서 더렵혀지지만 않았더라도 그것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으로서, 국가자본주의의 변증법적 부정, 대립물이다. 여기에서 생산관계의 유형은 근본적으로 바뀌며 자본주의 종주권은 폐지된다.”(부하린, 앞의 책, pp.140~142))

이러한 입장은 앞서 국가자본주의가 존재하기 위한 제한적인 조건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클리프는 “소련은 통상적인 표준(즉, 독점자본주의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한 국가자본주의 개념)과는 다르다”며 “자본주의의 기초 위에서 점진적으로 진화한 국가자본주의보다 소련 경제가 이 개념에 훨씬 더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보다 분명하게 말한다.(클리프, 앞의 책, p.186) 이렇게 될 경우 클리프가 트로츠키와는 달리 국가자본주의를 입증하기 위해 소련 사회를 통해 설정했던 예외적인 가능성과 그 양식은 이제 스스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 클리프의 자기논리는 서로 충돌하게 되어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한편, 트로츠키는 국가자본주의의 실재 뿐 아니라 소련 사회의 자본주의로의 변질 역시 부정했는데 그 근거 가운데 하나는 폭력적인 반혁명의 부재였다. 이와 관련해 트로츠키는 “소련 정부가 프롤레타리아 정부에서 부르주아 정부로 점진적으로 변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개혁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클리프, 앞의 책, p.199에서 재인용) 클리프 또한 소련의 반혁명 과정에서 노동자권력을 해체시키기 위한 폭력적인 양상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클리프는 노동자국가의 관료가 지배계급으로 바뀌면 경제적 부활과 정치적 부활은 떼려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국가는 점진적으로 노동자대중과 절연된다고 주장했다. “관료가 대중의 통제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과정은(1928년까지는 대중이 어느 정도 관료를 통제할 수 있었다)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혁명적인 질적 변화의 단계에 이르렀다.(클리프, 앞의 책, p.199)” 뿐만 아니라 이를 다음과 같이 일반화하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이 평화적으로 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관료와 상비군이다. 그러나 노동자국가에는 관료도 상비군도 없다. 그래서 이러한 제도들이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국가에서 그것들이 존재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평화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클리프, 앞의 책, p.200)


 

그러나 소련 사회에서 반혁명의 귀결이 일견 점진적인 이행으로 비친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 1918~1920년의 내전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내전을 거치며 10월 혁명의 코뮌국가로서의 의미는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그 결과 노동자대중이 정치권력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1920년대 말 권력을 움켜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의한 반혁명의 최종 공세는 오히려 문화혁명으로 둔갑하며 모든 사회질서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새로운 정책은 사회 전체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또한 대중운동에 적극성을 더해주었으며 전투성을 동반하게 했고 분위기를 고양시키고 기대감을 일깨웠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 전반을 60년대 중국의 경우에 빗대어 ‘문화혁명’이라 불렀다. 이러한 파악방식은 수백만에 이르는 희생자를 낳은 강제와 억압 외에, 다수의 당원과 대학생 혹은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 그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의 상당 부분, 그리고 노동자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집단(혹은 계층)이 스탈린의 폭압적 정책을 지지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들 지지집단은 국가지도부가 급속한 공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통해 마침내 정치적 주도권을 회복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이때를 계층이동, 즉 신분상승의 시기로 체험했다.(헬무트 알트리히터, <소련 소사 1917~1991>, 최대희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7, p.76)”) 하지만 클리프는 내전을 경과하면서 확연해진 혁명의 퇴화를 주요하게 고려하지 않은 까닭에 소련의 퇴행과정을 노동자국가에서 자본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으로 묘사하고 이를 일반화하는 이론적 왜곡까지 했던 것이다. 클리프의 주장처럼 정말로 ‘1928년까지 대중이 어느 정도 관료를 통제’했다면 노동자국가에서 자본주의로 퇴행하는 과정에서는 노동자권력을 방어하기 위한 대중의 집단적인 저항과 조직적인 투쟁이 존재했을 것이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②: 현실과 괴리된 소련 자본주의의 특수성에 대한 강조
<소련>에서 클리프는 기본적으로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부하린과는 다른 새로운 견해를 밝히고 있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해 부하린은 ‘자본주의 전시경제’와 ‘자본주의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의 저장고가 되는 단계’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면서 양자의 개념을 각각 ‘국가독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로 구별한 것이다. 이에 대해 클리프는 “둘 사이에 근본적인 질적 차이는 없지만 혼동을 피하려면 둘을 구분하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클리프, 앞의 책, p.222) 하지만 클리프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는 ‘근본적인 질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클리프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의 기본법칙인 가치법칙이며 그것의 규정을 받지 않는 사회를 더 이상 자본주의라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따지고 보면 맹목적인 경제력에 좌우되는 것이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목적의식적 의지나 결정에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 따라서 비록 경쟁과 가치법칙이 왜곡되기는 하지만,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도 따지고 보면 가치법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클리프, 앞의 책, pp.222~223)
"소련 경제 내부의 관계들을 세계경제와의 연관을 고려하지 않고 살펴보면, 생산의 동력자이자 조정자인 가치법칙이 소련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클리프, 앞의 책, p.229)


 

이러한 판단은 1920년대 말 이후 소련의 전면적 국유화와 계획경제에 기초해 국가자본주의 개념이 협소화된 것과 관련되어 있다. 1940년대 C.L.R 제임스와 두나예프스카야의 경우 소련 사회가 모든 자본이 하나의 거대 자본주의 기업으로 결합된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다수자본 간의 경쟁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인 까닭에 그들이 소련을 ‘하나의 공장’으로 보면서도 출구로 찾은 것은 바로 세계시장이었다. 세계시장에서 소련이 다른 국가 자본과 경쟁하는 것을 통해 가치법칙은 소련에서 계속 적용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C.L.R 제임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스탈린주의 경제는 임금으로 조정되었고, 그러한 임금은 가치법칙에 따라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근대 세계에서 계급 사회가 초래하는 엄청난 비용, 즉 생산의 끊임없는 기술 혁명에서 다른 국가에 뒤지지 않을 필요와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 (생산 비용에서 엄청난 증가를 감수하는) 자립 경제냐 아니면 세계 시장으로의 침투(그리고 그럼으로써 그것의 모든 변동에 종속되는 존재)냐의 선택, 제국주의적 투쟁과 후진적 경제라고 하는 이 모든 것 때문에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노동을 독일에서와 똑같은 취급해야 했다. 즉, 그는 노동을 상품으로 취급해야 했고, 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의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마르셀 판 데르 린던, 앞의 책, p.147에서 재인용))

클리프도 이러한 입장에서 소련의 국내 경제에서는 상품경제와 가치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소련과 국제경쟁 사이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클리프는 소련이 세계시장에서 상품을 매개로 경쟁한 것이 아니라 군비라는 형식의 사용가치를 매개로 경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련>에서 클리프는 소련 사회의 실상을 통해 ‘관료의 부실경영’을 평가하면서는 소련 경제가 계획경제라기보다는 ‘관료적 지령경제’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서로 다른 공장들이 조정되지 않고 발전이 일치되지 않아 가격의 발작적인 등락이 나타나고 심지어는 개별 공장 간 물물교환 협정을 알선해주는 중개인 집단마저 출현했기 때문이다. 클리프의 말마따나 소련의 관료지배와 경영의 자유재량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이론화하는 부분에 가서 정작 클리프는 이를 간단히 무시한다. “소련에서 기업들 간의 관계는 얼핏 보면 전통적 자본주의 나라들의 기업 간 관계와 다를 바 없는 듯하다. 그러나 겉보기에만 그렇다. … 소련에서는 개별 기업과 경제 전체가 모두 계획적 생산 규제를 따라야 한다. (클리프, 앞의 책, p.223)”

그러나 실제로 소련 경제는 중앙집권적인 통제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공장 체제가 아니었으며, 굳이 세계시장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상이한 생산단위들 간의 관계는 애초에 클리프가 실증하였듯이 다수자본의 경쟁관계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느슨하였다. 이는 소련 내부의 생산부문이 가치법칙에 기초한 상품․화폐 관계로 매개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프랑스 경제학자 베뜰렝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소련에서-옮긴이) 사회적 자본은 통일된 모습을 띠지만(이는 주로 계획 체제와 국가 소유의 법률적 형태가 조장하는 환상이다), 현실에서는 사회적 자본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복수의 경제 단위들로 분할되어 있다. 사회적 자본의 파편화가 국가적(혹은 집단적) 소유의 외피 하에서 전개된다. … 개별 기업은 단지 ‘단일한 국가트러스트’의 단위들(혹은 거대 국영공장의 ‘작업장’)이 아니다. … ‘당 자본주의’(party capitalism)는 사회적 자본이 파편화되는 특수한 방식이다. … 소련 경제에서 자본들 간의 경쟁은 분리된 생산단위들과 상업의 존재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단위들은 실제로 상당한 자율성을 갖고 있는 기업장들의 관할 하에 놓여 있다. … 투자와 생산 및 혁신과 관련된 모든 결정이 중앙에 의해 ‘지령’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러한 결정의 대다수는 기업장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성진, 「소련 사회의 성격: 마르크스주의적 설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한울아카데미, 2006, p.188에서 재인용)

 

소련 경제를 세계시장과 관련지어 살펴본다 해도 클리프의 주장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클리프는 자본주의에서 군비증강의 실질적인 이유를 간과하고 있다. 클리프는 1930년대 소련의 대외무역 규모가 저조했던 것을 이유로 세계시장에서 소련에 강제되었던 경쟁이 상품경쟁보다는 군비경쟁의 형태를 취했다고 하면서 군비경쟁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앞뒤가 뒤바뀐 주장이다.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군사경쟁은 부르주아들의 이윤창출과 자본축적을 둘러싼 경쟁의 연장인 까닭이다. 물론 자본주의 세계질서에서 정치군사적인 갈등과 경쟁이 경제적인 사안만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를 절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군비경쟁 역시 일국사회주의로 합리화한 자신의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유지하며 급속히 추진된 중공업의 확대와 맞물려 군수산업을 통해 이윤창출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국제경쟁이 주로 군사적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소련에서 가치법칙은 자신의 대립물, 즉 사용가치의 추구로 나타난다는 클리프의 분석은 다양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클리프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통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특히 전시경제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이미 밝힌 것처럼 전시경제에서도 가치법칙은 관철되었고 사용가치가 생산의 목적으로 사회질서 전반을 규정할 수는 없었다. (이와 관련해 영국 사회학자 퓌레디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사용가치의 생산은 가치법칙에 훨씬 종속되었다. 영국 지배계급이 잘 알듯이, 영국은 그들의 무기를 공짜로 얻지 않았다. 가치법칙의 원칙은 영국이 미국에 진 부채를 충당하기 위해 팔아야 하는 중요한 해외 자산의 상실을 통해 영국 자체에 가장 고통스런 부담을 주었다.”(마르셀 판 데르 린던, 앞의 책, p.320에서 재인용))

그럼에도 클리프가 소련 경제가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모종의 사용가치 생산을 지향한다고 한다면, 이는 소련의 자본주의에 대해 매우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앞서 소련 사회가 세계시장과 연관되지 않는다면 가치법칙이 부재하다는 것과 맞물려 세계시장 속에서 가치법칙이 관철되더라도 적어도 상품의 생산과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자본주의의 형태보다는 진일보한 사회로 여기게끔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련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소련과 관련한 자본주의 경제공황에 대한 판단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클리프는 자본주의 공황론 중 불비례설에 입각해 국가자본주의가 공황을 해소할 수 있다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부하린의 국가자본주의적 설명이다. 부하린은 “각종 생산 분야의 생산물들에 대한 수요 뿐 아니라 소비자들의 수요, 즉 자본가와 노동자의 수요도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국가자본주의 경제에서 일반적 과잉생산 공황 따위는 있을 수 없”고 “특별히 급속한 생산발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클리프, 앞의 책, p.246에서 재인용)

둘째, 러시아 경제학자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이다. 투간-바라노프스키는 “사회적 생산을 확대할 수 있는 한(생산력이 이것을 충분히 받쳐 준다면), 사회적 생산이 균등하게 배분되면 이에 따라 수요도 증가할 것”이며, 관건은 생산수단 부문과 소비재 부문 사이의 비례성으로 이것만 유지되면 “사회적 소비가 감소하더라도 과잉생산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리프, 앞의 책, p.247, 249에서 재인용) 이에 대해 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따라서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은 세계자본주의와 비교해서 후진적이고 생산수단이 부족해서 경제의 주된 요구가 기계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기계 생산인 경우의 국가자본주의에서 실현 가능한 방법이다. 그런데 기계 생산이 국가자본주의 경제를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하면, 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과잉생산에 봉착하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하나뿐이다. 그 경제는 사실상 정체하리라는 부하린의 대답이 그것이다." (클리프, 앞의 책, pp.251~252)

 

결국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에서 공황은 그 사회의 발전수준과는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클리프의 규정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클리프는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이론적인 극한’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공황에 관한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을 살펴보면서는 이것이 후진적 국가자본주의에서 실현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는 국가자본주의가 사회경제적인 발전수준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클리프가 국가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기준과 잣대는 더더욱 혼란스럽게 된다.) 그런데 클리프에 따르면 소련은 부하린과 투간-바라노프스키의 해결책을 따르지 않더라도 공황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군비경쟁에 따라 ‘전쟁경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 경제의 실상은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서구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경기순환과 경제공황은 소련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는 소련의 경제성장이 1970년대 이후 사실상 정체되고 1980년대에는 구조적인 난국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그 시기만을 특정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소련 사회에서 경제공황은 과잉축적에 의해 야기된 부족공황이라는 도착된 형태로 주기적으로 발생해왔다.

예를 들어 베뜰렝은 소련 경제에서 공황의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속적인 공업화가 종료된 후 소련의 경제발전은 순환적이었다. … 소련에서 경기순환은 다음과 같은 계기적 국면들로 이루어진다: 가속적 팽창 및 투자-호황-경기둔화(혹은 정지)-불황-새로운 가속적 성장 국면으로의 이행. 경기순환은 축적률이 증대되었다가 감소하고 다시 증가하는 시기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경기순환은 과잉축적 경향에 근거하며, 이는 다시 기업 경영자들의 자립적 의사결정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이들이 계획 목표를 달성하거나 자기 확장을 목적으로 물적 및 인적 자원을 전반적 경제균형을 위해 요청되는 수준 혹은 현실적으로 이용 가능한 수준을 초과하여 배치하기 때문이다. … 과잉축적 경향이 과도하게 되면 금융 및 은행 당국이 투자 고삐를 조인다. 그리하여 일시적으로 부분적인 제약이 과잉투자와 성장에 부과된다. 그러나 가장 현저한 부족 현상이 제거되면 통제가 이완되고 새로운 경기순환의 상승국면이 다시 시작된다.”(정성진, 앞의 책, pp.193~194에서 재인용) 이른바 중앙의 계획은 소련의 경제전반을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③ : 이론의 수정과 국가자본주의론의 일반화


소련 사회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모습을 지녔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의 일반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런데 클리프의 이론은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귀결되고 있다. 클리프를 따르자면 소련 사회의 성격은 분명 자본주의이지만 가치법칙이 부재하거나 그 규정을 받더라도 생산의 목적이 사용가치의 추구로 나타나며 경제공황도 부재한 사회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란은 SWP 안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었고, 특히 소련 사회에서 임금노동의 존재를 놓고 내부 논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임금노동과 자본 간의 관계는 서로를 전제하고 제약한다는 점에서 임금노동 없이는 자본주의를 말할 수는 없는 만큼 논쟁이 지닌 의미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클리프는 소련 사회가 일국차원에서는 상품경제와 가치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상품화도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클리프는 “소련에는 상품의 필요조건들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노동력”이라고 말하지만 “만일 고용주가 한 명 밖에 없다면 ‘주인 바꾸기’는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자신을 주기적으로 파는 일’도 단지 형식적인 일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리프, 앞의 책, p.227, 228) 이것은 맑스가 제기하는 임금노동의 전제조건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자, 소련 사회에서 직접생산자들이 겉으로는 등가교환이지만 사실은 부등가 교환으로 잉여가치를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클리프는 세계시장을 고려하면서 소련 국가는 다른 기업들과 경쟁하는 자본주의 기업 소유주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말하지만 노동력의 상품화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반 SWP 당원인 피터 빈즈와 마이크 헤인스는 관료적 집산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임금노동이 자본주의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놓았다. 이는 클리프의 이론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소련 사회의 유일한 고용주는 국가라는 클리프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곧바로 SWP의 다른 당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누가 보기에도 맑스주의 이론과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빈즈와 헤인스는 물론 클리프의 이론까지 정면으로 비판했다. 캘리니코스는 클리프의 주장대로라면 소련의 노동자는 경제외적 강제를 받는 노예나 농노에 더 가깝게 된다고 반박하며, 소련의 노동자는 단일한 공장이 아니라 상이한 생산 활동들이 접합된 국민경제 체제에 속해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소련 자본주의와 서구 자본주의 사이에서 실질적인 차이는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우리가 소련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소련에서도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기업들은 노동자를 놓고 경쟁하며, 자기 기업에서 일하도록 설득하려고 온갖 종류의 불법 상여금을 제시한다. 노동자들의 선택 폭은 상당히 넓다. 그들은 특정 공장에서 일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이 점에서 소련 자본주의와 서방 자본주의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는 없다. 소련 노동자가 스스로 조직할 권리나 그 밖의 민주적 자유권을 전혀 누리지 못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칠레나 남한의 노동자들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소련에서 사실상 완전고용이 존재한다(비록 중국과 유고슬라비아 같은 다른 국가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않지만)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맑스의 산업예비군 개념은 실업자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제3세계가 서방 자본주의를 위한 값싼 노동력의 저수지 역할을 했던(특히 서방에서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던 1950년대와 1960년대) 것처럼, 유럽러시아의 농업 인구는 소련 국가자본주의 초기의 50년 동안 비슷한 구실을 했다.” (캘리니코스, 「임금노동과 국가자본주의」, <소련>, p.402)


그 결과 1980년대 SWP 내부 논쟁 이후 클리프의 이론은 중대한 수정을 겪게 되었다. 자본주의에 비해 소련 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하던 클리프의 이론은 이제 그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에 따라 클리프가 구분했던 국가독점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의 차이도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국가자본주의의 적용을 소련과 이와 유사한 사회체제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더 확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상품경제와 가치법칙이 존재하는 가운데 국민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주도 양상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대체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크리스 하먼은 “전체 경제가 국가 통제로 나아가는 경향은 스탈린주의에 특유한 그 무엇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 걸쳐 발생하고 있는 경향이었다(하먼, 「폭풍이 인다」,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 이원영 편역, 갈무리, 1995, p.89)”고 말하였다.

하지만 국가자본주의 개념의 과도한 일반화는 소련 사회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소련 자본주의와 서구 자본주의 모두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기본적 성격을 지니고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등장하고 발전해온 양상마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중국,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국가들은 소련과 함께 사회주의 블록에 속해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그 발전과정에서는 소련과 또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국가의 개입 여부를 잣대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소련을 동일하게 국가자본주의로 한데 뒤섞는 것은 클리프의 이론과 비교해 일종의 역편향이라 할 수 있다.


즉, 클리프가 소련의 국가자본주의를 사적자본주의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놓으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서 필수적인 한 단계로 일반화한 것과는 정반대로 이번에는 소련에서 나타난 매우 독특한 사회형태들마저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관료가 맑스주의를 왜곡하며 스탈린주의와 그 변종이론들을 국가통치이데올로기로 삼고 자본주의 발전이 낙후된 지역에서 자본축적을 강제한 것은 분명 소련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4. 나가며


 

오늘날 소련 사회에 대해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입장은 과거에 비해 점차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 규정일 것이다. 트로츠키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아무도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이점이 있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여전히 타당한 지적으로 보인다.

클리프의 이론에서처럼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지금까지도 그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혹은 대단히 일반화되어 적용되고 있다. 때문에 소련 사회를 자본주의로 규정한다고 했을 때, 이와 함께 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붕괴되고 변질되어 갔던 그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과 구체적인 판단이다. 노동자대중의 집단적인 힘과 열정이 어떻게 소진되어 갔고 결국은 해체되었는지에 대한 면밀한 고려 없이 소련 사회를 단순히 국가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의 일변종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련 사회를 그것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이론적 규명에 머무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소련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함으로써 지금의 대중운동에서 새로운 정치적 전망과 새로운 권력을 향한 그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자리매김해야 한다. 오히려 소련 사회를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로 또는 노동자국가의 변종으로 파악하는 퇴행적이고 낡은 이데올로기야말로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고 그 가능성을 제약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직접 목격하며 누구보다도 혁명을 지지했지만 또한 이를 냉철하게 검토하며 독일의 노동계급을 각성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 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여전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혁명이 걸었던 길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러시아 혁명 사례에 대한 존경과 매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러시아 혁명 사례만이 독일 대중의 숙명적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독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각성시키는 일은 독일 사민당의 후견적인 정신 아래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그 일은 ‘최고위원회’나 ‘러시아의 사례’와 같은 완전무결한 권위에 의해서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아울러 혁명적인 열기를 창출해내는 것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즉, 독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각성시키는 일은 우려되는 모든 심각한 사태 및 그것과 연관된 과제에 포함된 복합성을 통찰할 때에만 가능하며, 정치적 성숙과 정신적 자립의 결과로써, 또한 대중의 비판적 판단능력 - 대중의 비판적 판단능력은 수십 년 동안 사민당에 의해 여러 가지 구실로 조직적으로 압살되어 왔다. - 의 결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역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진정한 능력이 독일 노동계급에게 생기는 것이다. 제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러시아 혁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독일과 국제 노동계급이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최상의 훈련방법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러시아혁명」, <로자룩셈부르크주의>, 편집부 옮김, 풀무질, 2002, p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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