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사노신

[붉은글씨][쟁점] 다시 ‘소련’을 말하다 ①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

|김성렬 (사노신 독자회원)


* 작년 노동자대회 때 발행된 <붉은 글씨> 창간호에 실린 글입니다. 온라인 상 가독성을 위해 각주를 삭제하거나 본문에 포함시켰습니다.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리석은 짓이에요! 당신들이 계획하고 있는 게 혁명이란 걸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요. 혁명이에요! 어째서 그것이 어리석죠?”
“어리석어요. 왜냐하면 혁명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 당신이 말하는 우리가 아니고 나의 우리 - 혁명이 마지막 혁명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이후에는 어떤 혁명도 있을 수 없어요.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죠….”
- 예브게니 자마찐, <우리들> 중에서

 


1. ‘상실의 시대’ 그 이후



소련은 무엇이었는가? 소련은 어떤 사회였는가? 역사의 무대에서 소련이 사라진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의 규정에 따르자면 소련의 붕괴는 이른바 ‘단기(短期) 20세기’의 종료를 알리는 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서부터 사실상 시작된 지난 20세기는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의해 본격화 되었고, 이후 그것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 만큼 10월 혁명에서의 승리와 환희를 뒤로 하고 후퇴와 변질의 역사적 단절을 통해 등장한 소련 역시 전쟁과 혁명, 그리고 냉전으로 점철된 20세기의 세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한 축을 형성했다.

때문에 지구 영토의 1/6을 점한 그것도 ‘현실 사회주의’라 불린 소련의 붕괴가 미친 충격은 대단했다. 세계사의 한 시대가 마감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역사의 종언’을 운운하는 우익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앞에 대부분의 좌파세력은 무기력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동조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러시아 혁명은 역사적인 실수로 매도당했고, 맑스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며 매장당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승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회주의를 향한 전망과 정치는 역사의 오류를 답습하는 구시대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하지만 소위 ‘상실의 시대’는 영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필요충족이 아닌 이윤추구의 경쟁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본색이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사회주의를 절대악으로 보는 전통적인 우익세력이나 사회주의의 실현불가능성을 외치는 자유주의 세력 모두 일반화된 상품생산 사회로서 자본주의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점에 대해서는 하나 같이 속수무책이었다.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가 분리되어 생산과 소비 역시 일반적으로 분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를 매개로 한 생산과 소비의 사슬에서 어느 한 쪽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위기는 발생하고 늘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08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인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IMF 경제위기’로 기억되는 지난 19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미국 등 세계경제의 호황에 힘입은 수출호조로 일시적인 극복이 가능했지만 현재 가중되고 있는 경제위기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경제위기의 진원지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미국이다. 때문에 중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출하고 미국 등은 일방적으로 수입하는 ‘글로벌 불균형’이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른 것 아니냐는 비관적인 전망마저 나올 정도로 세계경제는 구조적인 위기에 봉착해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스스로 붕괴된다거나 파국에 이르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이는 여태껏 경험한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세기 전반기의 대공황을 비롯해 자본주의 체제가 그간 겪었던 수많은 경제위기의 역사가 예증해준다. 오히려 지금의 위기국면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때 이른 낙관도 성급한 비관도 아닌 점차 확산되고 있는 대중의 자각과 정치적 각성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직접 발언하고 직접 행동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난 2011년은 유럽과 미국, 중동 등 세계 각지에서 경제위기의 고통을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권력에 맞서 대중의 직접행동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해로 기억되고 있다.


새로운 대중운동의 가능성과 역동성은 고장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성찰로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에서는 맑스의 <자본론>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대가 도래했고, 남한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관심과 목마름이 감지되고 있다. 그만큼 과거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역시 더없이 중요해지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세기 동안 존재했고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있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진단과 판단 없이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급의 폐절로 집약되는 사회주의는 오직 ‘지나간 미래’로서 대중의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날의 ‘불편한 진실’은 결코 우회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다.

이러한 점에서 토니 클리프의 <소련은 과연 사회주의였는가>(이하 <소련>)가 남한에서 1993년에 이어 2011년에 재출간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지난 1993년 당시 <소련>이 출간되었을 때의 충격과 놀라움이야 지금에 와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소련>이 맑스주의 운동에서 고전으로서 지닌 역사적인 가치는 아직 유효하다.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서 소련 문제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미래를 기획하고 고민하는 데 있어 여전히 그 방향을 설정하는 시금석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소련을 말해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2. 1917년 10월 혁명 : 과연 혼돈의 기원인가



소련 사회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에 대한 재검토부터 필요할 듯하다. 사실 10월 혁명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로 삼을 만큼 오래된 쟁점이다. 역사 속에서 10월 혁명은 레닌의 볼셰비키당과 노동계급의 혁명적 열정과 행동으로 권력 장악에 성공했지만 경제적으로 낙후되어 있고 압도적인 농업국가인 러시아에서 발생했던 탓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양립하기 힘든 극단의 평가를 동시에 받아왔다. 혁명의 성격은 새롭게 등장한 사회체제가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준다는 점에서 10월 혁명과 소련 사회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더욱이 소련 사회를 놓고 모종의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였다고 규정한다면 10월 혁명과의 연관성은 한층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곧바로 다음과 같은 의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면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한 러시아는 왜 그토록 빠르게 자본주의로 변질되었는가? 그렇다면 10월 혁명은 처음부터 세계사에서 일탈해버린 잘못된 행동이거나 기껏해야 부르주아 혁명에 불과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소련 사회에 대해 살펴보기도 전에 숙명적인 무기력증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태적인 사고로는 1917년 당시 10월 혁명의 본모습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10월 혁명과 세계 혁명

19세기 후반 이후 등장한 제국주의 세계질서는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인식되었다. 자본주의의 자유경쟁과 달리 독점자본이라는 거대한 힘과 국가라는 거대한 힘이 서로 유착된 제국주의 열강들이 출현했고, 이들 사이의 알력과 갈등은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벌어졌다. 국제적인 정치경쟁은 이윤 극대화에 혈안이 된 경제경쟁의 양상과 맞물려 전개되었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은 사상 초유의 대규모 세계전쟁으로 전례 없이 유럽 한복판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곧 전유럽은 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 광란에 의한 대량살육이라는 비극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러나 참혹한 전쟁의 깊은 수렁은 불과 1년도 채 안 되어 대중의 의식을 애국적 열정에서 변모시켰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각성된 대중은 전시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빵’을 공공연하게 직접 요구하기 시작했다. 레닌이 1915년 이후 유럽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혁명적 정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판단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가장 반동적인 차르체제의 러시아에서 최대의 혁명적 정세가 성숙하리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혁명 전략과 관련된 레닌의 구상은 과거 1905년의 러시아 혁명 때와 비교해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1905년 혁명기에 레닌은 러시아에 있어 부르주아 혁명을 제기하며 사회주의 혁명은 농민의 지지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외적 조건에 좌우되며 그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라 주장했다.

이 같은 시각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을 전후한 시기까지도 이어졌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의 과제가 여전히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보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러시아의 혁명적 위기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의 증대하는 위기가 서로 결부되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만큼 이 결합이 직접적임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을 관철시킨다는 것이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이제 서구 사회주의 혁명의 서곡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분한 구성부분이 된 것이다. (레닌, 「러시아의 패배와 혁명적 위기」, <사회주의와 전쟁 外>, 오영진 옮김, 두레, 1989, pp.211~212)”

실제로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시작으로 유럽 곳곳에서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혁명의 깃발이 높이 올랐다. 무엇보다 1918년 당시 세계 제2의 산업대국이자 유럽 최강국이던 독일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자 세계혁명은 더 이상 헛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것으로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이때 10월 혁명은 세계혁명이라는 거대한 전쟁에서 이제 겨우 첫 전투에서의 승리를 의미했다. 그것은 모든 나라에 있어 혁명의 발전과 지원, 그리고 각성을 위하여 러시아라는 일국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으로 레닌과 볼셰비키의 전술은 당시 유일한 국제주의적인 전술로 입증되었다.

이런 까닭에 10월 혁명은 애초부터 러시아의 일국혁명이 아닌 세계혁명이란 전망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1917년 2월 혁명 이후 등장한 이중권력은 통상적인 부르주아 혁명보다는 더 나아갔지만 아직 노동계급과 빈농의 순수한 독재에는 도달하지 못한 과도적인 국면을 의미했다. 이러한 이중권력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병사들의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을 장악해야 했고, 우선 대중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화부터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전쟁과 기아의 고통에 놓인 수많은 대중들의 당면한 요구를 즉각 해결하기 위한 각종 혁명적 민주주의의 방책들이 시급하게 실행되어야 했다.

예컨대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 직전까지도 러시아 부르주아 권력의 반동적 관료주의에 맞서 혁명적 노동계급에 의해 지도되는 민주주의의 혁명적 독재를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요구를 제출했다. “⑴모든 은행들의 단일 은행으로 합병, 그 활동에 대한 국가 통제, 또는 은행들의 국유화 ⑵신디케이트들, 곧 가장 대규모의 독점적 자본주의적 기업연합들(설탕, 석유, 석탄, 철 및 강철 그리고 그밖의 신디케이트들)의 국유화 ⑶상업적 영업비밀의 철폐 ⑷생산업자들, 상인들 및 고용주들의 강제적인 신디케이트화(즉, 강제적 연합체로의 합병) ⑸소비자 조합으로의 주민의 강제적 조직화, 또는 그러한 조직의 장려, 그리고 조직 통제 행사”(레닌, 「임박한 파국 그리고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레닌의 세계사회주의 혁명이론>, 淺原正基, 한유승 옮김, 다락방, 1990, p.347)

하지만 그러한 조치들은 러시아에서 직접적인 사회주의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향한 한 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과거 1980년대 남한의 PD 강령과 그 방침은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민중민주주의’라는 또 하나의 단계를 설정하고 이를 정식화 했지만 그것은 10월 혁명의 의미를 단순히 일국혁명의 차원으로 협소하게 재단한 결과 나타난 이론적, 실천적 왜곡이었다. 오히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이후 1921년까지 계속된 세계혁명의 시기에서 그 출발점이자 구성부분으로 보아야 하며 세계혁명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될 수 있었다. 일국적 잣대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으로 제한될 수 없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로의 전진은 물론 사회주의의 완성은 바로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보증되고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좌절된 세계 혁명, 포위된 러시아 혁명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유럽 각국의 혁명적 정세는 분명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 장악을 요구했다. 세계혁명의 붉은 물결은 유럽 곳곳에서 넘실거렸다. 그러나 1921년 3월을 기점으로 세계혁명의 고조되던 분위기는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볼쉐비끼당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사민주의에서 분화한 유럽 공산당들의 경우 대중의 자생적인 파업과 가두투쟁을 넘어서서 대중을 혁명으로 이끌기 위한 임무를 사려 깊게 수행할 능력은 아직 충분히 갖추지 못했음이 곧 드러났다. 특히 세계혁명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독일혁명에서 독일 공산당이 보여준 좌충우돌과 반복되는 오류는 혁명적 정세를 유실시키기 일쑤였다.


문제는 러시아 혁명의 운명이 국제적인 혁명운동의 성패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10월 혁명 이후 레닌은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사회주의 공화국’이라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노동자권력 하에서 이제 막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로 들어섰고 또한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의 볼셰비키 그 누구도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와 지원 없이 사회주의를 향한 이행기를 끝낼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 않았다.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에 속했다.

이는 자본주의 그 자체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대공업적 팽창은 더 이상 소규모의 고립분산적인 지역적 시장이 아니라 서로가 연결되고 통합된 세계시장을 창출해냈다.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로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혁명도 그 자체로 세계혁명이고 또한 세계혁명이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일 뿐 아니라 일국에서 노동계급이 권력 장악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세계혁명으로 확산되지 않고 고립된다면 필연적으로 반혁명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령 국민국가 단위로 노동자권력이 살아남는다 해도 그러한 사회는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 속에서 궁핍이 일반화되어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 수 없는 등 지극히 퇴행적인 형태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혁명의 지연 속에서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이 겪는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독일혁명의 잇따른 패배는 이러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 현실적으로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까닭에 세계혁명을 표방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계적인 생산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국가들에서 혁명의 승리가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전쟁 전에 이미 대공업의 주요 부문과 은행, 무역 등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르익었고, 전쟁 동안에는 생산과 분배의 조직화와 집중화가 강화된 유럽에서 정작 기대되었던 사회주의 혁명은 무위에 그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본주의 국가들로 둘러싸인 ‘포위된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자신의 모든 노력과 전쟁 이후 유럽이 경험한 사회적, 정치적 동요에 불구하고 그들이 고립을 탈피하지 못했다는 결코 달갑지 않는 현실에 마주해야 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차츰 ‘정상 체제’를 회복하고 있었다. 물론 1914년 이전처럼 팽창하는 시장과 자유무역으로 대표되는 전지구적 경제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와 달리 일국적 자본주의가 규준이 되는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을 비롯해 유럽 주요 국가들에서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그렇다고 지배질서마저 위협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같은 혁명의 고립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정권의 장기적 전망과 그 방향은 아직 미결의 상태로 열려 있었다. 레닌은 전쟁 이후의 국제관계를 일종의 ‘계급간 휴전상태’로 판단하며 식민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승전국과 패전국으로 나뉜 서구 제국주의 열강간의 대립과 반목, 그리고 중국과 인도 등지에서 피억압 민중들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불가피하게 터져 나올 또 한 번의 ‘군사적 대결’을 전망하며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또한 혁명을 지탱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몰두했다. 러시아 혁명의 미래는 여전히 세계혁명에 대한 기대와 전망 속에서 고찰되었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혁명과 괴물의 탄생


분명한 것은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장기적으로 지연될수록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또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봉쇄 한가운데서 언제까지나 온전히 존속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이후 러시아 혁명의 비극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스탈린주의 체제의 등장을 놓고 그 원인을 불발된 세계혁명만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혁명의 실패가 곧 10월 혁명에서 스탈린주의 체제로의 변질을 자동적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단선적인 도식은 현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반혁명 중에서도 역사상 유례없이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국가관료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며 자본주의적 축적을 강제한 스탈린주의 체제가 소련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이를 가능하게 한 내적 원인에 대한 규명 역시 필요로 한다.

실제로 1921년 무렵 러시아 혁명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와 있었다. 1918~1920년의 내전을 거치면서 볼셰비키 정권은 여전히 권력을 유지했지만 10월 혁명을 만든 계급의 기껏해야 잔영뿐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끔찍한 경제위기와 공장폐쇄 속에서 도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해체되어 갔고,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노동자대중의 자연적 지도자로 부상한 수많은 젊은 노동자들과 볼셰비키들은 내전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레닌은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탈계급화 되고 있음을 시인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내전 중에 강요된 식량 징발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다수를 점점 더 볼셰비키 정권에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볼셰비키 정권은 내전기의 처참한 경제적 상황에 의해 강제된 ‘국유화의 가속화와 국가통제의 강화’를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 즉 계급이나 국가가 없는 사회주의를 위한 당장의 실행조치로 혼동하며 지나치게 멀리 나아갔던 전시공산주의(1921년 3월 신경제정책이 채택된 이후 그해 4월 레닌은 소책자 「식량세론」에서 처음으로 전시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인용부호로 묶어 사용했다. 이 용어는 한때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보그다노프의 개념이었다. 보그다노프는 전쟁 중 서구 여러 나라에서 등장한 새로운 현상에 주목하며 대체로 군대란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소비코뮌이며 전쟁의 영향으로 생산과 분배에 대한 국가통제가 확립됨에 따라 전시․소비공산주의가 군대에서 사회 전체로 확산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보그다노프는 전시공산주의가 계급투쟁의 결과는 아니기 때문에 서구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현상을 사회주의와 동일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서구의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 또한 부정하였다.)의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시적 후퇴로써 정책적 방향을 네프(NEP, 신경제정책)로 선회했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변함없이 중시된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강화였다. 이는 탈계급화한 프롤레타리아트와 다수의 소부르주아 농민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다음번의 세계혁명까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고, 네프 시기 농민에게 경제적 이익추구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국가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불가피했고 또한 필요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문제는 노동자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참여에 기초한 소비에트 권력 그 자체가 내전이라는 반혁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미 대단히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나날이 강화되어 가는 국가권력과는 대조적으로 혁명의 활력은 급속도로 퇴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오직 자신을 방어하고 세계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국가를 이용하고 강화할 수 있을 뿐 궁극적인 목표는 계급과 국가권력의 사멸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 했다. 하지만 내전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중앙집권화되고 군사화된 볼셰비키당의 등장이었다. 국가방위와 권력유지를 명분으로 한 군사적인 방법들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의미를 지녀야 했지만, 막상 현실에서는 당과 소비에트, 노동조합의 운영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었다. 이는 곧 인민에 대한 전면적인 강제의 일상화와 노동계급의 혁명적 자발성의 위축을 가져오는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정권과 대중 사이의 이러한 균열 양상은 네프 도입 이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네프 초기 가장 주된 쟁점은 자본주의로의 후퇴와 양보의 한계였으며(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로의 급격한 전환을 주도했던 레닌은 후퇴의 한계가 어디인지는 현실이 가르쳐 줄 것이라 공언했지만 네프의 시작과 더불어 투기가 만연해지고 당 안팎에서 부패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1922년 제11차 당대회에서는 후퇴의 중단을 외치며 당 대열의 재정비를 요구했다. 실제로 네프 시기 자본주의로의 퇴행은 사회경제적으로 여러 면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자유로운 물품교환의 욕구는 너무나 필사적인 것이어서 일단 어떤 상거래가 합법화되자(1921년 3월) 그것은 눈덩이처럼 커져 모든 제약을 쓸어버릴 정도였다. … 사적 상인들은 점차 거의 모든 종류의 상거래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 사회주의로 도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화폐를 폐지하자는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국영공업과 국영상업은 경제적 혹은 상업적 회계(khozraschyot, 독립채산제) 위에서 운영하기로 하였다. 이윤을 남기고 손실을 피하는 것이 운영의 기준이 되었다.”(알렉 노브, <소련경제사>, 김남섭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8, pp.94~98)) 상당한 위험이 내재해 있었던 만큼 당의 결속은 더욱 더 강조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전시공산주의 시기와는 다르게 노동의 탈(脫)군사화가 추진되었음에도 정치적 독점을 확고히 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여전히 엄격한 위계질서와 군대화 경향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제10차 당대회에서 당내 분파형성이 금지되고 1921년 후반에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진행된 것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레닌이 1918년 초부터 우려했고 생애 마지막까지 싸워야 했던 관료주의는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민들에게 국가 형태는 그들과는 괴리되어 있는, 곧 국가와 결합된 당의 독재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 결과 레닌은 당시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두고 이른바 ‘관료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로 규정하기도 했다. 따라서 네프 시기 국가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볼셰비키 정권이 자본주의로의 후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를 뒷받침할 집단적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와 그들의 굳건한 계급의식이었다. 노동자대중은 반혁명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해야 했지만, 그러한 국가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내전을 경과하며 프롤레타리아트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심지어 소멸되어 가는 상황에서 혁명의 물결은 급속히 그 힘을 다해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압도적 다수의 독재가 아니라 단호한 소수의 독재로 변화하게 되었다. (실제로 1920년대 초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볼셰비키당의 독재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당의 일각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었으며 1923년 제12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노동계급의 독재를 볼셰비키당의 독재와 동일시하는 테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레닌 역시 내전 때 국가와 당의 관계가 바뀌자 그 이전과는 다르게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 볼셰비키당원들이 곧 국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트로츠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 볼셰비키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의 독재로 대체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당의 독재를 관료주의의 독재로 대체한 것에 대해 주요하게 문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10월 혁명의 이듬해인 1918년부터 발발된 내전과 그 후과에 대한 면밀한 판단과 고려는 매우 중요하다. 소련 사회에서 발생한 혁명의 변질과 퇴락, 즉 혁명적인 노동자국가에서 부르주아 계급 국가로의 전환을 놓고 대개 스탈린주의의 궤적을 따라 1937년(대숙청)이나 1928년(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집단화), 1927년(좌익반대파의 패배와 트로츠키의 축출)을 짚거나, 혹은 그 이전인 1921년(크론슈타트 반란 진압과 네프의 도입)에 주목하는 등 두드러진 연도와 관련해 설명되고 있지만, 사실 대중의 혁명운동에의 참여가 실질적으로 퇴조하게 되고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경직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내전 시기가 미친 전사회적인 영향력은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볼셰비키 정권이 곧바로 권력을 포기했다면 볼셰비키당은 제국주의 열강들과 결합된 부르주아 반혁명 세력에 의해 혁명적 야당은 고사하고 철저하게 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세계혁명의 좌절과 내전을 거치면서 본격화된 볼셰비키 정권과 노동자대중 사이의 균열 속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강화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결국은 세계혁명의 꼬리표마저 떼어내고 허울뿐인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만을 영속적으로 주장했을 때, 그 귀결은 일국사회주의로 치장된 또 다른 반혁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볼셰비키 정권이 어떻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독재’를 행사하게 되었는지 그러한 누적적인 과정들을 주요하게 살펴보는 것은 분명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는 <러시아 혁명의 진실>의 저자로 잘 알려진 빅토르 세르주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르주는 10월 혁명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파악하면서도 대중의 혁명참여가 퇴조한 것이 1918년 말부터였다고 파악한다. 이 책의 원제가 ‘Year One of the Russian Revolution’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등장한 코뮌국가가 불과 1년여 만에 당 독재의 국가로 전환되었다며 내전을 비롯해 그것을 가능하게 한 누적적인 역사적 과정들에 주목했다. 그럼에도 세르주는 내전 기간 내내 볼셰비키 정권을 계속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부르며 그 생존을 위해 앞장섰는데, 이는 사회경제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서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focus] 벼랑 끝에 선 투사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3/05/23 19:42
  • 수정일
    2013/05/27 12:03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진 않은가
 



(* 이 기사는 5월1일 사노신이 발행한 격월간지 <포커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편집자])

 

박근혜의 당선으로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소위 멘붕에 빠졌다고 한다하지만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박근혜 당선 이후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최강서 열사이운남 열사,윤주형 열사 
 

처지와 조건은 다르지만 최근 목숨을 끊은 동지들은 대부분 기나긴 투쟁을 하고 있던 해고노동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조직노동운동과 현장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박근혜 정권의 등장이 주는 실망감이 생명을 끊는 절망감의 원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장기투쟁이 빚어내는 인간관계의 파괴와 고립감도 그러한 선택에 일조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곁에 있던 동지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커다란 회한을 남긴다하지만 이것이 개인적인 회한에 그쳐서는 안 된다이런 상황을 만든 운동문화와 구조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야 한다그러지 않고서는 끝없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계속되는 장기투쟁


지난 수년간 노동운동의 특징은 비정규직과 해고자 중심의 장기투쟁이 투쟁전선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수 백 일 동안 계속된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들과 한국통신 계약직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었다하지만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수백 일을 훌쩍 넘는 장기투쟁은 이제 일반적인 일이 되고 있다백일 정도 투쟁한 정도로는 장기투쟁이라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까?
 

한국 노동운동 역사는 노동에 대한 탄압의 역사였다박정희 정권 이후 노동법은 집단적노사관계법의 개악을 통해 노동조합의 건설을 어렵게 만드는 대신 개별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근로기준법을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식으로 설계되었다그러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외침에서 알 수 있듯이 노동자들의 집단적 저항이 법제도적으로 봉쇄된 상황에서 그것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군사정권의 통제 속에 현장에서는 작업장을 군대처럼 운영하는 병영통제가 횡횡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폭발하자 정권과 자본은 뒤늦게 노동운동을 포섭하려 했다그러나 이미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트렌드는 이미 합의와 포섭보다는 노동을 파편화하고 배제시키는 신자유주의로 기울고 있었다. YS정권의 노동법 개악 시도는 결국 신자유주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시도였으며결국 87년의 거대한 집단적 기억을 잊지 않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저항에 직면했다조직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은 정권을 무력화시켰고 정권 교체를 불러왔다하지만 97년 총파업 이후 이어진 자유주의 정권의 십년 집권은 시민운동을 제도화함으로써 이른바 민주화 세력을 체제내로 흡수하고 노동운동을 고립시켰다.
 

IMF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전방위적 공세 속에서 1998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를 통해 민주노총 합법화·노조의 정치참여 보장·복수노조 도입 등 조직노동운동의 제도적 운신의 폭을 넓혀주는 집단적 노사관계법의 수정과 근로자파견제·정리해고제 등 노동유연화 악법이 도입되는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개악을 바꾸는 합의를 해주었다이는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이해와 비정규직·불안정노동자의 증가를 합의하는 신자유주의 코포라티즘의 변형된 형태였다.
 

98~2000년 구조조정 공세 속에 노동운동은 다른 사회계층으로부터 전혀 지지를 받지 못한 채 패배했다자유주의 정권 십년 동안 노동자 투쟁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노동유연화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조직노동운동의 이해와 비정규직의 증가를 맞바꾸는 협약은 구조조정이 휩쓸고 지나간 단사 현장에 그대로 반복되었다대공장노조들은 정규직 고용을 보장받는 대신 비정규직 증가를 합의했고이는 노동운동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갈라놓았다.
 

구조조정 이후 급속한 경기회복은 금속대공장과 공공사업장 조직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빠르게 회복시켰다사회양극화 속에서 조직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지위는 상승했다구조조정 이후 자본은 대규모 작업장의 정규직노동자들에게 고용과 안정적인 임금인상을 보장하고 산업평화의 안전판 역할을 하게한 대신 비정규직노동자들과 중소사업장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높은 이윤을 확보했다.
 

이 속에서 지난 십 년 동안 민주노조 운동의 양축을 이루었던 금속대공장과 공공부문 대규모 사업장 상당수가 어용노조로 넘어갔다그러나 어용으로 넘어가지 않은 사업장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2000년대를 경과하며 작업장에서 어용 대 민주노조의 전선구도는 붕괴했다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태도는 어용이든 민주노조진영이든 다르지 않았다형식적으로 진행하던 임단협 파업마저 2000년대 중반부터 자취를 감추고 무분규 타결이 관례화되기 시작했다금속대공장과 공공부문 대규모 사업장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노동운동은 구조조정 분쇄 투쟁 이후 사실상 투쟁전선에서 이탈했다.
 

하지만 생존권이 악화된 중소사업장과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들은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이에 대해 자유주의 정권들은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극악한 탄압으로 일관했다김대중 정권을 계승한 노무현 정권의 노동정책 역시 마찬가지였다노무현은 초기에 반짝 유화적 노동정책을 쓰는 제스처를 펼치다가 반년도 안 돼 탄압으로 돌아섰다비정규직노동자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노무현의 말은 이 시기 건설된 무수한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탄압과 파괴로 나타났고 현장에 안착한 노조는 별로 없었다많은 노조들이 장기투쟁으로 내몰렸다.
 

장기투쟁의 양상은 다 비슷하다투쟁에 나섰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은 별로 많지 않다대개 농성장을 설치하고 복직투쟁에 들어간다정당한 노조활동혹은 노동조건에 대한 요구는 복직요구로 좁아진다하지만 자본은 현장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의 요구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초기에는 상급단체에서 몇 번 형식적인 집회를 박아주기도 하지만 오래되면 그것도 없다길거리 투쟁이 수십 일에서 수백 일 계속된다대다수의 조합원들은 투쟁에서 이탈하고 소수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투쟁이 이어진다성과가 없기 때문에 투쟁을 접기도 어렵다그래서 투쟁은 한없이 길어진다.
 

87년 이후 최초로 이전 정권보다 보수적인 정권의 집권이었던 MB시대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따라서 지난15년간 금속과 공공 등 조직노동운동 핵심부위의 형식적인 투쟁을 빼면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탄압이 계속되어 왔다하지만 탄압받는 노동자투쟁에 대해서 조직노동운동의 태도는 방관과 무시였다.
 

이는 대규모 사업장 자신에 대한 공격에도 마찬가지였다. 98~99년 구조조정 공격에 대한 대공장노조들의 투쟁은 적어도 처음에는 전공장 파업의 성격을 띠었다그러나 한진중공업과 쌍용자동차에서 애초부터 전공장 투쟁의 조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해고자들의 명단이 확정될 때까지 투쟁은 차일피일 미루어졌고결국 해고자 명단이 나오자 해고당사자들 중심의 싸움이 되었다해고자들이 밀려난 현장은 어용노조에 의해 장악되었고해고된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다른 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거리로 내몰렸다해고가 되고 나서야 노동자는 하나가 되어 투쟁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졌다.


심화되는 갈등과 무너진 의사결정 구조
 

2001년 이랜드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260일을 넘겼을 때 모두가 놀랐다. 2002년 한국통신 계약직노동자들의 투쟁이 500일을 넘겼을 때는 더더욱 놀랐다그러나 기록 갱신은 계속되었다기륭전자 노동자들은 1895일을 투쟁했다현재진행형인 재능교육교사노조의 투쟁은 1900일을 넘기고 있다.


오랫동안 조직노동운동의 상징은 주먹을 불끈 쥔 투사의 얼굴이었다이는 금속대공장의 남성노동자를 전형화한 것으로 전노협과 민주노총의 전투적 조합주의를 상징한다. “질긴 놈이 승리한다”, “끝까지 투쟁한다는 구호들무척 귀에 익은 말이었다우리 운동은 언제나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굳건한 철의 노동자가 될 것을 요구해왔다하지만 아무리 강철로 만들어진 투사라 해도 수 년 동안 계속되는 투쟁에는 장사가 있을 리 없다무한정 길어지는 투쟁은 노조체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내부의 인간관계도 산산조각 나게 만든다.


올해 목숨을 끊은 활동가들 중에는 소위 현장이전을 한 의식적인 활동가도 있었다현장투신은 8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였으며 200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2000년대 초 의식적인 활동가들은 대개 취업이 비교적 용이한 대공장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그렇게 현장에 들어간 이들은 커다란 개인적 희생과 헌신을 통해 대공장 사내하청투쟁의 기반을 만드는데 일조했다하지만 지금 그런 동지들 중에 현장에 남아있는 동지는 별로 없다.거의 대부분 해고되었다.


장기투쟁에서 끝까지 남아 노동자들 중에는 이런 의식적인 활동가들이 많다이들은 높은 정치의식과 헌신성으로 열악한 해고생활을 감내하며 투쟁전선이 유지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그런데 이런 동지들마저 절망감에 목숨을 끊고 있다는 것은 지금 운동의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투쟁이 길어지면서 투쟁주체들 사이에는 생계 등 물적 조건이 부족함에도 당위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강제하다가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 많다운동에 대한 긍지가 높은 의식적인 활동가들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자신들의 물적·심적 조건에 대한 고려보다는 이른바 운동적 전통과 원칙을 앞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인 활동가들이 주도성을 쥐게 되는 장기투쟁 사업장의 특성상 누가 투쟁을 더 헌신적으로 더 원칙적으로 더 전투적으로 했냐가 정당성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운동에서 이탈하거나 전술적으로 후퇴하는 동지들을 보고 너무나 쉽게 나약함에서 기인한 기회주의로 낙인을 찍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왔다과장된 투사성을 운동의 이상형으로 삼아 나약함을 죄악시하는 문화는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다힘들어도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 없고투쟁일수가 길어질수록 점점 더 극한적 투쟁을 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내부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노조체계가 파괴되면서 갈등을 해결할 의사결정 장치가 무력화되고 있다는 점이다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수백 수천이라면 별다른 논란 없이 다수결 같은 민주주의 기제들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전술에 대한 견해에 이견이 나타날 경우 투쟁하는 조합원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선동하고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하지만 이미 투쟁 주체들이 명 단위로 소수화 된 투쟁에서는 그런 기제들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전술상 갈등이 개인들 사이의 문제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다전술에 대한 이견은 흔히 활동가들 사이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대립으로 발전한다그 속에서 오랜 기간 열악한 상황에서 쌓여온 사소한 마찰과 갈등들이 극대화되며 소통은 중지되고 불신이 쌓이게 된다기존의 의사결정 장치들은 작동을 중단하고 개별인자들 간의 고립과 갈등이 심화된다.


장기투쟁에 뒤따르는 생활고와 스트레스에 이런 갈등적인 문화가 주는 고립감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절망과 우울의 늪으로 빠뜨리고 있는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이런 문화가 극단적인 선택의 주원인은 아니라 해도 아예 무관하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주체와 연대의 경계를 허물고 투쟁의 책임을 나누어야


노동운동이 위기를 넘어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높다새로운 운동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그러나 새로운 운동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존재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아니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그 무엇보다 우리 운동에 소중한 자신이다하지만 이들이 살아서 투쟁하며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관성에 얽매인 운동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 여러 가지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과거의 운동에서 주체와 연대의 경계는 선명했다. 90년대 후반 민주노총 주류가 소위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론을 들고 나와 사회개혁투쟁 노선을 제기했을 때전투적 노동투사들은 이를 비판하며 현장권력 쟁취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현장중심 전술현장사안을 통한 노동자들의 직접투쟁을 옹호했다그들은 연대는 있으면 좋지만 부차적인 것 뿐 기본적으로 현장노동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요구를 쟁취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과연 지난 한진중공업 투쟁에서 주체는 누구고 연대는 누구였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금속노조나 한진중공업지회가 과연 이 투쟁의 주체였는가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온 수 천 명의 사람들은 연대대오였는가이 투쟁의 주체였는가이처럼 최근의 투쟁들에서 주체와 연대의 위치가 때로는 뒤바뀌기도 하며 경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물론 이것이 기존 노동운동 체계가 몰락하면서 나타나는 양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운동방식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직노동운동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희망버스 운동 이후 흔히 사회적 연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87년 이후 점진적으로 체제로 흡수되었던 민주주의 운동은 보수 정권의 등장과 함께 촛불투쟁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대중투쟁으로 등장했다일부의 냉소적인 평가와 달리 촛불이 열어 놓은 의식은 투쟁하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그리고 이는 미약하나마 장기투쟁 사업장에 대한 연대와 희망버스 운동으로 이어졌다.


회적 연대는 과거 연대운동이 단체들이나 학생들이 주축이던 것과 달리 다양한 배경의 노동하는 개인들로 확대되고 있다연대방식 역시 다양해지고 있으며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연스레 주체와 연대의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실제로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모든 전술이 연대단위들과 공유되고 공동으로 결정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중요한 고비에서 주체들이 연대단위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따를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연대단위들 역시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은 부담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다하지만 이제 더 이상 투쟁주체에게만 모든 짐을 떠맡기지 말고 보다 의식적으로 주체와 연대의 경계를 허물고 투쟁의 책임과 의무를 분담할 필요가 있다.이는 이미 의미를 잃고 박제화 되고 있는 노조질서의 절차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함께 투쟁하는 자들의 민주주의로 우리의 사고를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 노동운동의 가장 훌륭한 전통으로 꼽힌 총회민주주의는 교섭권 위임 같은 관료적 절차를 인정하지 않는 투쟁하는 자들의 직접 민주주의였다물론 그것은 당시 대공장의 기업별노조라는 형태를 띠었지만지금에 있어 투쟁하는 주체는 더 이상 노조내지는 노동운동이라는 틀로 한정될 수 없다오래 전에 투쟁의 장애물이 된 조직 노동운동의 관료적 질서보다 연대하고 투쟁하는 자들을 진정한 주체로 보아야 한다투쟁은 이미 더 이상 소위 주체들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특히 비정규직과 불안정노동이 일반화된 시대에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이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볼 때도 더욱 그러하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총회민주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이른바 주체와 연대가 모두 함께 하는 대중총회 같은 방식의 새로운 의사결정 구조를 형성하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구조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이를 위해서는 이제 주체는 연대를 대상화하지 말아야 하고연대도 스스로를 연대라는 이름으로 침묵하거나 주변화하지 말고 주체로 나서야 한다그리고 그 속에서 함께 새로운 투쟁주체로 성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함께 살아서 투쟁하기 위해


지금까지 장기투쟁의 목적은 현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현장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당연한 목적이다그러나 활동가들에게 있어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활동가들의 현장복직의 의지는 생계문제만이 아니다돌아가서 운동을 하기 위해서이다돌아가서 현장의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조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현장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대개의 경우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알던 그 현장이 아닌 경우가 많다이제 현장복직만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투쟁을 그것을 향한 지난하고 힘든 과정으로만 생각 할 것이 아니라 이 투쟁을 통해 연대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운동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민주적이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새로운 투쟁의 형태를 만들어나가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투쟁의 힘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여러 투쟁사업장에서 가열 찬 투쟁 뿐 아니라 그 이전까지는 잘 몰랐던 다양한 분야의 투쟁하는 사람들과 문화일꾼들과 교류하고 함께 즐기는 보다 풍부한 투쟁문화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런 투쟁 분위기 속에서는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자신들을 현장의 벽에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연대와 지원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꿋꿋하게 전선을 지켜온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성과다이제 앞으로는 또 다시 수백 일을 투쟁해서 그런 지원을 간신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네트워크를 확대시켜 보다 생존가능하고 지속가능한 조건 속에서 투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강철로 생각하는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오랜 투쟁으로 상처 입은 투사들을 트라우마 운운하며 금치산자로 몰아가기보다모두가 주체가 되어 그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 그들의 심신이 얻은 상처를 치유할 시간과 여유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focus] 장기투쟁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과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3/05/23 19:37
  • 수정일
    2013/05/23 19:37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투사들에게도 힐링이 필요해



(* 이 기사는 5월1일 사노신이 발행한 격월간지 <포커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편집자])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나 해고노동자들은 투쟁이 길어짐에 따라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주체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하면서 투쟁의 전망을 계속 잡아나가야 하는데 싸움이 진행될수록 주관적객관적 상황이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사측이나 공권력과 대치하며 항상 긴장상태에 있어야 하고 각종 징계나 고소고발·가압류벌금과 구속·수배 등의 위협에 시달린다모든 일상이 투쟁일정으로 꽉차있기 때문에 정서적인 여유를 가지기 힘들다신분보장기금 등 노조나 산별연맹의 제도적인 지원금이 없다면 생계문제도 닥친다.


이러한 다양한 압박은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적인 문제가 되면서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투쟁력과 조직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준다이로부터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가족이나 동료 등 가까운 사람들과 감정적으로 충돌하거나 관계가 단절되는 일을 겪기도 한다.


투사에게도 힐링이 필요해


그러나 지금까지의 운동문화 속에는 투쟁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들을 마땅히 감내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의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싸움을 그만두거나 쉬고 싶은 마음을 주위 동지들에게 표현하는 것은 나약한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철저하고 강고한 투쟁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때문에 자신이 겪는 문제들을 표출하지 못한 채 쌓이다가 운동을 그만두거나 돌파구를 찾기 위한 극단적인 선도투쟁을 선택하고 투쟁을 마무리 짓고자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언젠가부터 투쟁이 시작되면 장기화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만큼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도 더욱 커졌다이러한 문제를 더 이상 개인에게 맡겨둘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노동자가 노동하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투쟁하는 기계도 아니다체력과 감정을 소모하면 쉼도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2011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 심리치유센터 <와락>이 개소했다. <와락>을 전후로 오랫동안 투쟁하거나 자본과 공권력의 폭력에 노출된 노동자들에게 심리적·정서적·의료 지원을 하기 위한 단위들이 생기고 있다유성기업지회 노동자 등 용역깡패에게 시달렸던 노동자들과 가족들 역시 이러한 프로그램을 받고 있다.

이 외에도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노동자의품>, <인드라망 공동체>, 조계종 노동위원회에서 운영하는<템플스테이등이 투쟁하는 노동자 및 저항하는 다양한 주체들을 지원하기 위한 인프라를 넓히고 있다.


작은 연대들이 모인다

한편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단위도 있다과거에도 투쟁사업장에 투쟁연대기금을 모아주는 경우는 많이 있었지만 일회성에 그쳤다면 최근에 나타나는 움직임은 일상적이고 생활에 좀 더 밀착된 방식으로 기획되고 있다. <진보마켓>의 경우 물건을 사면서 적립되는 금액을 소비자가 지정한 투쟁사업장 노동자나 가족을 지원하도록 하고 있다현대차 아산 성희롱 피해자 농성장이나 대한문 쌍용자동차 농성장에 정기적으로 음식을 제공한 밥셔틀’, 집회현장에 등장하는 진보신당 밥차’ 등이 그것이다.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은 후원회원들의 회비를 모아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연대는 투쟁하는 현장에 찾아오는 것과 함께 그들의 삶을 나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물적 지원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문화연대>, 조직인 아닌 개인들이 모여 투쟁현장에 연대하는 <작은연대>도 있다.


 

지난 3월29일 해고자의 날을 맞아 열린 
<해고에 맞선 투쟁의 역사와 전망> 토론회

 

 

지원 프로그램의 네트워크 형성이 시급해


자발적 혹은 단체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되고 있지만 여기에도 아쉬움은 있다우선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모아지는 관심도 수도권 투쟁사업장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때문에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주로 민주노총 등의 산별연맹 차원의 지원에 의존해야 하고 그마저도 없으면 고립되기 일쑤이다.

또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과 단체들의 활동이 서로 연계되지 않거나 개별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막상 참여하려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 지역별로주제별로 어떠한 단체와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는지 정보를 구축하고 연계시켜줄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이러한 체계를 전국적으로 형성하고 투쟁사업장과 소통할 수 있는 인력과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당장 어느 곳에서 이러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 지는 정할 수 없지만 총연맹이 실질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체계와 계획이 부족한 상황에서 네트워크를 어디서 어떻게 총괄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운동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이 우선해야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투쟁하는 것도 하나의 삶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투쟁이 길어져도 절망하거나 피폐해지지 않고 숨을 고르며 전망을 찾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서로에게 보다 전투적인 모습을 요구하며 더욱 수위 높고 치밀한 일정만 기획한다면 결국 지치고 말 것이다.

단시간에 승부가 나는 싸움이 아니라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주변의 장치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재정적·정서적 지원은 이러한 방향에서 사고해야 한다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딱하고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투쟁하는 동안 다치지 않고 투쟁이 일단락 된 이후에 후유증을 줄이고 일상적인 삶을 살기 위한 준비이다.

지원 프로그램이 접근하기도 쉬워야 하지만 투쟁하는 주체나 활동가들 역시 투사에게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필요 없다는 거부감이나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만이 휴식과 치유가 필요하다는 오해로부터 탈피할 필요가 있다우리의 투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함께 투쟁하는 동지들의 상황이 어떠한지 돌아보고 자본을 타격하는 만큼 스스로를 보살피는 것도 중요하다는 인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번역] 중국과 일본의 제국주의 충돌

  • 분류
    국제
  • 등록일
    2013/05/23 18:25
  • 수정일
    2013/05/23 18:25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 이글은 국제적인 좌익공산주의 조직인 ICC(국제공산주의흐름)이 2월에 쓴 기사를 번역한 것으로, 5월1일 사노신이 발행한 격월간지 <포커스>에 실린 기사입니다. 기사를 번역해 주신 국제코뮤니스트전망(ICP)의 이형로 동지에게 감사드립니다. 번역 기사는 사노신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필자| ICC
번역| 이형로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2년에 시작된 센카쿠 열도(열도는 대만의 북동쪽 약 200km, 일본 오키나와의 400km 남서쪽, 중국의 동쪽 대략 400km에 있다)를 둘러싼 분쟁은, 극동아시아 최대의 양국 간 적대적 야망과 긴장을 초래했다. 세계 최고의 인구를 갖고 있으면서 세계 2위의 경제력을 지닌 중국, 그리고 세계 3위의 경제력을 가진 일본, 두 나라는 서로 이 제도(諸島)를 둘러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병력을 동원해왔다. 대만 또한 이 섬을 둘러싸고 일본과 충돌했다. 이것은 일본과 중국,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 전체에 있어서 분명히 심각한 문제다. 


이 양 거두(巨頭)뿐만 아니라 대만도 이 제도(諸島)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센카쿠 열도는 바위투성이로 거주 불가능한 땅임에도, 그 전략적 가치와 잠재적인 유전, 천연 가스원, 풍부한 어장의 존재가 이 제도의 영유권 주장을 결정적으로 강화시키고 있다. 

 

중국 - 신흥 제국주의 대립


중국이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과 충돌하고 있는데, 이곳이 이웃 제국주의와 대립하고 있는 유일한 분쟁지대는 아니다. 최근의 경제 성장 이후, 중국은 점점 자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위험을 안게 되었다. 자국 선박 수송의 80%가 센카쿠 열도 주변을 통과한다. 아시아에 있어 어떤 해협의 봉쇄도 중국을 심각하게 방해한다. 게다가 중국은 본토를 넘어 바다 건너까지, 특히 남중국해(South-China-Sea)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주요 경쟁자인 인도와 직면하게 된 중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각각 전초 기지를 설치하려 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의 공격을 무릅쓰고 이란과 시리아를 지원해 왔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평화적인 경제발전을 바라는 한편 동시에 군사력 증강에 투자를 계속해 왔다.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은 이미 중국이 아시아에서 최대의 경쟁자라 인식하고, 군사적 중점을 동아시아로 옮기는 것을 결정했다. 미국은 2020년까지 해군력의 60%를 동아시아 지역에 배치할 예정이다. 

게다가, 증대하는 자원 수요, 특히 에너지 자원 수요는 중국의 남중국해에서의 자원 탐사 및 채취권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 중국의 지금까지 남중국해에서의 대립과 이번 일본과의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대립은, 중국이 엄청나게 자원을 갈망할 뿐 아니라, 제국주의 서열(계층)의 재편성에 나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그 동맹국의 지배적인 역할을 끝내고, 자국 영토를 넘은 지역에서 이익을 방어하기 위한 세력이 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 중국의 대립은 극동아시아에 있어 증대하는 제국주의 국가 간 긴장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본: 자기 야심에 집착하는 쇠약해진 제국주의


일본은 지금까지 센카쿠 열도의 영유권을 주장해, 자신의 능력을 예전의 제국주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찾아내려 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이미 일본 자본은 대만, 동중국해 섬들 그리고 한국 침략의 야망을 품고 있었다. 현재 일본 정부는 1894년 센카쿠 열도 점령의 역사적 정당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이 미 제국주의에 패배함에 따라 이 열도는 미국의 관리로 넘어갔지만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다. 물론 일본은 이 땅에 매장된 에너지 자원을 중국에 양도할 생각도 없고, 제국주의 서열을 바꿀 생각도 없다. 이 땅은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한다. 2차 세계대전 패배 후, 일본은 미국의 우산 아래 들어갔다. 격렬한 폭격(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와 도쿄 다른 지역까지 공습) 후, 미국의 관리하에 놓였다. 일본은 외국에서의 충돌에 군사력 사용이 허용되지 않는 헌법을 제정할 것을 강요당했다.

하지만 1950년대 초 냉전 상황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에서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과의 대결 시 지원을 받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강요했다. 북한의 정기적인 일본, 미국, 한국에 대한 무력행사 협박과 중국의 증가한 힘 때문에, 일본은 스스로 모순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의 의존에서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북한과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서는 자국을 미국의 군사력의 아래 두고 싶은 것이다. 1989년 이래 일본은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약간의 행보를 시작했다. 자위대는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에서 최초의 ‘해외파병’을 경험했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미국 주도의 전쟁에서 병참 일부를 담당했다. 일본은 인도, 베트남과 함께 말라카 해협과 남중국해에서의 군사 행동에 참가했다. 앞서 일본은 지부티(아프리카 북동부 아덴만 기슭에 있는 국가의 수도)에서 최초의 군사기지를 설립했다. 이 자위대는 최신 무기를 갖추고 있다. 중국군의 현대화와 확장은 일본에 군사력 투자를 한층 더 재촉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게 중국과 센카쿠 열도는 유일한 분쟁지역이 아니다. 일본은 한국과도, 일본이 1905년 한국으로부터 획득한 타케시마(독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두려워하고 있고, 장래 일어날 수 있는 남북한 통일을 더욱 큰 위협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일본은 중국 제국주의의 번창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느끼고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과 중국은 이 지역에서 양대 제국으로서 대립해 왔다. 수년 동안 중국 대부분을 점령하고 수많은 국민을 학살한 처참한 전쟁을 감행한 일본에 대해, 중국의 지배계급은 항상 일본에 대한 복수의 애국주의적 감정을 이용했다. 이에 대해 일본 아베 내각은, 중국에 대해 더욱 공격적인 자세를 취한다고 밝혔다.

일본, 중국 간의 긴장의 고조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에 기름을 붓는 격이며, 양국과 그 동맹국이 대립하고 있는 다른 지역에서의 긴장을 한층 더 발전시킨다. 아시아 양대 강국의 경쟁은 전 세계로 번지게 될 것이다!



민족주의적 견제에 머물지 않는 중국과 일본의 충돌

일부의 경우, 특히 2012년 가을, 중국의 일부 도시에서, 센카쿠 열도에서의 일본 군사력에 대해, 일본계 상점을 불태우거나, 일본계 기업의 공장을 공격하는 등의 항의가 있었다. 중국 정부는 분명히 이러한 시위를 환영하고, 아마도 직접 조직까지 했을 것이다. 다른 정권과 같이 중국 정부도 경제 성장 문제, 환경 오염, 지배 세력의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 등 심각한 사회 문제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돌리는 것에 집중했다. 당국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폭동’의 회수는 지난 몇 년간 증가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항의를 국수주의-애국주의의 틀로 왜곡시키고 있다. 일본과의 충돌은 사람들을 국가에 재결집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중국은 지난 몇 년 동안 세련된 애국 선전을 젊은 세대의 머리에 주입해 왔다. 오랜 세월 불황에 고통받고, 후쿠시마 재해와 쓰나미의 참극에 직면한 일본 정부도 똑같이 사람들을 민족주의로 끌어들여, 국가 아래 단결시키고 싶어했다. 확실히 지배세력이 이러한 항의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지만, 이 대립을 단순히 경제, 사회, 환경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한 민족주의의 책략이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최대의 양국이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충돌해,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이 이 분쟁에서 적과 아군을 정하는 과정에 들어가면, 제국주의 국가 간의 긴장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로 퍼질 것이다.

양국 모두 서로의 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상태에서, 앞서 말한 충돌 때문에 교역이 심각하게 감소했는데, 왜 지배자들은 ‘이성적’으로 민족주의 경향을 억제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원래 지배자들은 ‘이성적’인가? 사실 군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불치병이다. 자본주의는 일개 국가의 힘보다 훨씬 강력하다. 자본주의는 평화적으로 경제 경쟁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자본주의 시스템은 인류를 점점 야만스럽게 만드는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장은 유럽이었다. 아시아는 이 시점에 아직 전장에서 약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주요 전쟁터가 되어, 몇 천만의 생명을 앗아갔다. 베트남 전쟁에 앞선 한국 전쟁은, 1950년대 가장 처참한 대립의 하나였다. 소련의 붕괴와 미 제국주의의 쇠퇴에 따라, 중국 제국주의가 영향력을 얻어 아시아의 제국주의 경쟁에 도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의 중국의 경쟁자들(일본, 한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 등)은 중국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바라고 있다. 중국, 일본의 최근 충돌은 이 지역 전체로 확대되는 일련의 긴장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정부의 민족주의적 정책에 따라 대량 학살에 대비해야 할까?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민족주의, 국수주의, 애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무덤이다. 극복할 수 없는 경제위기, 끝없는 전쟁으로 가는 길, 배타주의, 노동자계급의 빈곤화, 지구환경 파괴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민족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다. 민족주의의 함정에 빠지면 인류는 도태될 것이다. 20세기에만 2억 명이 끝없는 일련의 전쟁 때문에 살해되었다. 이 사회가 현재의 생산양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우리를 야만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 계급, 특히 젊은 세대의 노동자 계급이 각 나라의 사회운동에 보내야 할 메시지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참사에 대한 수많은 항의가 있었고, 경제위기의 참상에 대한 분노도 늘어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믿기 어려운 끔찍한 착취와 무서운 환경오염에 대한 수많은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고 있다.

아랍의 봄, 스페인, 미국, 그리스, 방글라데시 등, 높은 실업률, 빈민화와 직장에서 증가하는 중압에 시달리는 노동자 계급이 많은 나라에서는, 국가 아래 단결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계급투쟁이 해결책이다. 우리는 이 위기와 야만을, ‘외국의 경쟁 상대’가 소유한 상점이나 공장을 불태우거나, 외국 경쟁사들의 상품 불매를 호소하거나 구매를 제한하는 것으로 극복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계급 대 계급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슬로건은 언제나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이다!

제1차 대전이라는 대살육을 노동자 계급이 끝낼 수 있던 것은 이러한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경을 넘어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호소한- 레닌,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와 주위의 혁명가들은 국제주의의 입장을 지켰다. 공장과 전선에 있는 노동자들을 고무시키고, 마침내 혁명적 봉기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종결로 이끈 것은, 강고한 국제주의 입장이었다. 1937년의 중일 전쟁 당시 소규모 좌익 공산주의 그룹 <빌랑(Bilan)>의 국제주의자들은 이러한 입장을 지켜냈다.

 

“이 전선의 양측에는 노동자를 학살하는 것이 목적인 탐욕스러운 지배적 부르주아가 있다. 이 전선의 양측에는 대학살을 한 노동자들이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노동자들이 혁명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먼저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중국의 노동자와 잠시라도 함께 ‘싸우는’ 부르주아가 있다고 믿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되었다. 제국주의는 어느 장소든지 확장하며 중국은 다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혁명적 투쟁을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노동자들이 계급 단결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급투쟁에 돌아와야 한다. 그들의 동맹은, 착취자들에 대한 동시적 공격을 공고히 할 것이다. ( … ) 국제 공산주의 좌익분파만이 수많은 배신자, 기회주의자에 대항하여 혁명투쟁의 깃발을 높게 내걸 수 있다. 이러한 세력만이 아시아에서 아비규환을 가져온 제국주의 전쟁에서 착취자에 대한 노동자의 인민 전쟁 - 중국과 일본 노동자의 단결, ‘국가전쟁’의 전선 파괴, 국민당에 대한 투쟁,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 노동자를 제국주의 전쟁으로 동원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투쟁 - 으로 전환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좌파 잡지 <빌랑 (Bilan)> 제44호, October 1937, p1415)


우리는 이러한 국제주의자의 전통을 이어 민족주의의 감옥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한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국제주의자들 사이에 연계를 놓고, 세계 곳곳에서 국제주의자들의 공통 입장을 지키기 위한 필요조건이 창출되고 있다. 지배자들이 검열, 인터넷 검열, 탄압, 국경 폐쇄 등의 어떠한 수단을 이용한다 해도- 우리는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중국, 일본의 지배자들이 특히 젊은 세대를 민족주의 유혹에 빠트리려 하는 가운데, 우리는 확고한 우리의 대안- 계급투쟁- 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태도야말로 지배자들 간에 매일 협박하고, 똑같이 전쟁 선전을 부추기는 북한과 한국의 노동자와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네 번째 정기토론회] 파시즘

박근혜는 파시즘인까? 일베는 파시즘일까?

5/3 금 저녁 7시 고려대 미디어관 411호에서 토론회가 진행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북한의 3차 핵실험과 반복되는 한반도 전쟁위기

  • 분류
    The FocuS
  • 등록일
    2013/04/05 19:06
  • 수정일
    2013/04/05 19:18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북핵을 둘러싼 동북아 지배권력의 위험천만한 전쟁위협에 맞서

‘전쟁 반대! 모든 핵 반대!’의 목소리가 절실하다

 



 

 

지난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이후 20여년 만에 최고 수준의 전쟁위기가 한반도 상공을 뒤덮고 있다. 북한은 정전협정 백지화, 남북불가침합의 폐기를 앞세워 연일 강경한 언사를 쏟아내고 있다. ‘1호 전투근무태세’ 명령을 발동하고 남한을 포함한 미국 본토까지 핵선제 타격을 공언하고 있다. 남한과 미국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정대로 한미 연합훈련 키 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을 강행했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전략 핵폭격기 B-52, 스텔스 폭격기 B-2의 잇단 공개는 대북 무력시위의 화룡점정이라 할만 했다.
 

얼마 전에는 그동안 북한정권이 언급을 자제해오던 개성공단마저 폐쇄할 수 있다고 위협하면서 불안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한반도의 긴장수위가 급속도로 높아지면서 자칫 남북간 우발적 충돌이 대규모 무력충돌로 비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점차 커지고 있다. 그야말로 춘사불래춘(春似不來春), 한반도의 봄은 꽁꽁 얼어붙고 있다.

하지만 실제 전면전이 발생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는 점에서 지금의 위기국면이 종국에 가서는 북미협상을 재개시킬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제1, 2차 북핵위기도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는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지만 결국 협상을 통해 위기가 봉합되는 모양새를 취한 바 있다. 그러나 현재 최악으로 치닫는 한반도 정세가 쉽사리 대화국면으로 전환될 것 같지는 않다.
 

지난해 12월 북한의 은하3호 발사→올해 1월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2월 북한의 3차 핵실험→3월 유엔 안보리의 추가 대북제재 결의로 이어지는 도발과 제재의 악순환 속에서 지금의 군사적 대결양상은 위기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북한의 도발이나 위협 이후 일정한 냉각기를 거쳐 협상 테이블이 형성되었던 과거의 패턴을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북한의 3차 핵실험과 게임 체인지


무엇보다 북한의 3차 핵실험이 결정적이었다. 이는 기존 북핵문제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전환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선 북한은 미국에 대한 핵전략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22일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제 결의 직후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의 종말을 선언하며 하루 간격으로 ‘외무성-국방위원회-조국평화통일위원회’로 이어지는 성명을 이례적으로 발표했다. 대외관계-국방정책-남북관계에서 대결적 자세를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때 핵심은 “미국을 겨냥한 높은 수준의 핵실험을 진행할 것”이란 엄포였다.
 

그동안 북한은 핵보유의 명분을 수세적 차원의 ‘자위적’ 핵억지력의 수단으로 내세웠다.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의 유훈이었고 김정일도 약속한 것이었다. 물론 김정일 시대에도 북한은 핵보유국의 지위를 노리는 발언을 자주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화법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는 미국을 직접 위협할 수 있는 ‘공세적’ 핵보유국으로서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이미 김정일의 대표적인 유훈으로 핵보유를 내세우고 있는 가운데 개정 헌법에도 이를 명시한 바 있다.
 

북한의 이러한 단절적인 태도는 핵능력의 향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난 2월12일 3차 핵실험 직후 <조선중앙통신>은 “폭발력이 크면서도 소형화, 경량화된 원자탄을 사용하여 … 다종화된 핵억제력의 우수한 성능을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이번 핵실험이 고농축 우라늄을 저효율로 사용한 소형 핵탄두 실험이었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국제적으로도 공인받고 있다. 2009년 5월 2차 핵실험 이후 그해 6월 우라늄 농축선언을 발표한 지 4년 만에 북한은 플루토늄 핵 뿐 아니라 소규모의 핵시설로 생산 및 은닉이 가능한 우라늄 핵마저 보유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은하3호의 발사 성공으로 핵물질의 장거리 운반수단도 확보된 상황이다.
 

그 결과 북한의 벼랑끝 전술 또한 이제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과거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미국을 압박하고 협상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위기조성용으로 벼랑끝 전술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번에 북한은 미국 오바마 2기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켜보지도 않고 3차 핵실험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했다. 4년 전 북한의 2차 핵실험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내세운 오바마 정권의 강경한 태도 앞에서 되레 북미관계의 경색을 초래했던 만큼 북한이 또다시 오바마 2기 행정부의 출범 직후부터 북핵위기를 자초하지는 않을 것이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2013년 1월18일자 본지 <북한의 은하3호 발사와 동북아 권력재편>)
 

오히려 북한은 협상에 치중하고 안 되면 도발하는 것이 아니라 핵능력을 극대화한 상황에서 협상 여부를 결정하라는 매우 공세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고농축 우라늄을 통한 핵물질의 다량확보와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에 근접한 로켓기술을 앞세워 지금까지 한반도 질서를 규정한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게임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매년 3월이면 연례적으로 시작되는 한미 연합훈련에 맞서 북한이 국가급 대응훈련으로 맞대응하며 한반도의 전쟁 발발 가능성을 고조시킨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북한의 이 같은 입장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다급해 보이며 북한사회 내부의 복잡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회생을 위한 김정은의 ‘거대한 도박’

 


 

김정은 체제 들어 북한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 중 하나는 선군(先軍)정치에서 선당(先黨)정치로의 전환이다. 그 배경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경제난이 자리 잡고 있다. 그동안 북한은 김일성 출생 100년을 맞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원년으로 선전해왔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민생문제는 아직 열악하기만 하다. 반면, 김정일의 선군정치 시대를 거치면서 ‘과대성장’한 북한 군부는 온갖 특혜 속에서 국가자원을 독식해왔다. 따라서 경제재건을 위한 국정운영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선군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당중심의 체제확립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지난해 4월15일 태양절 행사에서 김정은은 “인민들이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이후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정책적 행보를 뚜렷하게 보였다. 그 출발점은 군부의 각종 경제적 이권을 당으로 이전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시장자본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있는 북한에서 국가중심의 경제재건은 체제존립의 이유와 직결되어 있는 중대한 문제였고, 그러자면 우선적으로 국가재정의 확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군부의 반발이나 동요가 없었다는 점은 북한의 지배층 전체가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결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김정은의 첫 경제조치이자 기업 자율성 제고, 배급제와 시장가격제 혼합 등의 내용을 담은 ‘6.28 방침’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실제로 지난 한해 북한경제는 일부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곡물생산량이 10% 가량 증가했고, 경공업 뿐 아니라 금속과 화학공업 등 기간산업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나타냈다. 하지만 이미 피폐해진 경제현실에서 자구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면적인 경제회생을 위해서는 결국 ‘종자돈’ 마련이 필수적이다. 더구나 에너지의 90%, 소비재의 80%, 식량의 45%를 현재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제현실도 마냥 지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북한과 이란의 핵 비즈니스 연계설이다. <시사인>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핵개발 의혹을 받고 있는 이란은 북한과 핵무기 관련 기술을 놓고 김정일 사망 이후부터 협상에 들어갔고, 전체 인수금액으로 약 200억 달러를 제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3차 핵실험으로 북한의 향상된 핵능력이 검증된 가운데 북한과 이란의 핵 비즈니스는 언제 성사되느냐 하는 시간만 남았다는 관측이다. 이렇게 될 경우 북한은 말 그대로 거액의 종자돈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는 북핵의 대중동 확산으로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해 두 차례의 북미 비밀접촉의 전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북한과 이란과의 핵 커넥션을 포착한 미국은 지난해 4월과 8월 북한과의 비밀접촉을 통해 북한이 이란에 핵기술을 넘기기 않을 경우 300만㎾ 상당의 화력발전소 제공과 마그네사이트 광산개발 및 판매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1월7일 자원개발에 관심이 많은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북한을 방문하고, 곧이어 1월10일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미국 기업대표단과 북한 투자유치기관 간에 화력발전소 건설과 관련한 접촉을 가졌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더 나아가 최근에 미국은 북한이 핵문제를 해결하면 버마처럼 고립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버마 사례’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의 협상안을 곧이곧대로 신뢰하기보다는 일단 3차 핵실험까지 감행한 다음 이후 추이를 살펴보려고 한 것 같다. 제1차 북핵위기를 봉합한 1994년 10월의 제네바 합의 때도 미국은 200만㎾급 경수로 건설을 북한에 약속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북한이 이란에 핵기술을 넘기지도 않을 것 같다. 북한이 원하는 바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점에서 북한은 이란과의 핵 커넥션마저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북한이 더는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만성적인 경제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체제유지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체감할 수 있는 경제적 성과를 달성해야 한다. 그만큼 현 국면에서 북한은 미국을 향해 강경한 자기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초조한 미국과 답답한 중국


사실 미국은 북한의 핵능력을 누구보다도 궁금해 해왔다. 지난 1월말 북한이 핵실험을 예고했을 때 <뉴욕타임즈>는 미국이 북한의 핵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로 3차 핵실험을 기다리고 있다는 보도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은 이미 두 차례나 핵실험을 한 북한에 대해 핵개발 포기나 저지를 금지선으로 설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북한의 핵능력이 미국의 안보를 실질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이상 북한의 핵개발을 기정사실화하며 북핵의 비확산을 실질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3차 핵실험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게 북핵 그 자체는 주요한 변수가 되지 못했다.
 

반면, 지난해 1월 ‘아시아 복귀’를 표방한 미국 오바마 정권에게 핵심과제는 대중국 포위전략이었다. 아시아를 넘어 패권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중국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미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견제를 더 강화하고 있다. 과거 북한위협론을 근거로 동아시아에 대한 정치군사적인 개입의 명분을 마련했다면 이제는 중국을 향해 노골적인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중국이 공세적인 팽창전략을 본격화하며 주변국들과 영토분쟁도 불사하자 그만큼 중국위협론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이 북한위협론이라는 우회로를 굳이 거치지 않고도 중국과 직접 맞대응할 수 있는 안보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의 이 같은 대중국 대립전선의 이면에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도 빼놓을 수 없다. 2008년 이후 장기적인 경기침체 속에서 미국 군산복합체는 무기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동아시아를 주목했다. 종전의 이라크나 아프간은 고가의 첨단무기 시장으로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2012년 한해는 북한을 비롯해 동아시아 일대에서 사상 유례없는 동시적 권력교체기를 맞고 있었다. 경제위기 속에서 자국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국가주의가 대두되는 가운데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영토분쟁은 그것이 직접적으로 맞부딪친 결과였다. 미국은 이 사태에 직접 개입하며 동이사아 군비경쟁의 격화 속에서 무기시장의 판을 키우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전반에 군비확대 바람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지난해 12월 북한의 은하3호 발사는 미국의 입장에서 여러 모로 호재였다. 미국은 중국견제를 위한 북한카드마저 되살아나면서 오랜 숙원사업인 한미일 MD(미사일방어) 구축 등 다분히 중국을 겨냥한 대응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미국은 이제 슬슬 초조한 기색을 보이고 있다. 다크호스처럼 등장한 북한의 도발을 가지고 한바탕 굿판을 벌였지만 개운치 않은 모습이다. 전환점은 바로 북한의 3차 핵실험이었다. 미국은 북한의 핵위협 수준을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북한과 이란 간의 핵 커넥션에 잔뜩 긴장하고 있다. 이란의 핵보유는 미국이 가장 마주하기 싫은 선택지로 어떻게 보면 지금의 국면에서 시험대에 오른 건 북한이 아니라 미국일 수도 있다.
 

한편,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아무래도 중국이었다. 현재 중국의 최대 외교현안은 일본과의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이다. 지난해 여름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에 강경대응하며 제5세대 지도자로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한 중국의 시진핑에게 그것은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런데 북한의 3차 핵실험은 중국의 대외현안을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에만 집중하지 못하도록 전선을 분산시켰을 뿐 아니라 북핵사태를 빌미로 미국의 대중국 강경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로 만들어 버렸다. 더구나 북한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중국에게 달라진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주문하는 국제사회의 요구도 중국을 곤혹스럽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중국은 사전에 모든 외교채널을 가동해 북한의 3차 핵실험을 결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누가 봐도 그것은 중국에게 악재였다.
 

북한은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북중관계에서 미묘한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에 있어 국경을 맞댄 북한은 여전히 완충지대이자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자산이다. 북한변수의 안정적 관리를 우선시하는 중국의 기존 방침은 앞으로도 큰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남한에 대해서는 박근혜의 집권을 계기로 관계개선을 시도하려는 것 같다. 미국의 중국견제가 확대되고 일본과의 갈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남한마저 이명박 정권 때처럼 노골적인 친미주의로 흘러갈 경우 안보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실시한다고 중국에 통보한 사실을 과거와 달리 남한에 바로 알려준 중국의 태도 변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박근혜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미국의 견제


지난 대선시기 박근혜는 자신의 대북정책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로 집약했다. 남북신뢰를 기초로 국제사회의 협력을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명박 정권과의 차별화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더라도 인도적 대북지원과 대화창구는 유지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이 보기에 박근혜의 대선공약에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말 그대로 미사여구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북한의 핵․미사일의 무력화를 위한 억지력 강화’가 핵심이었다. 이는 공세적인 군비강화를 통해 상대를 힘으로 굴복시키겠다는 것으로 남한의 군비확대가 결국은 중국견제를 위해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박근혜의 집권을 안심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근혜가 막상 집권하자 미국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명박 같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친미정권의 수장을 바랐지만 박근혜는 그런 기대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이명박이 임기 말까지 공들여 미국과 맺은 천문학적인 규모의 미제 무기구입 약속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당선인 신분시절 특사를 중국에 먼저 보내기도 했다. 심지어 취임 후 첫 해외일정으로 4월 중국 방문을 검토하고 있다고 언론에 흘리기도 했다. 북한문제의 공동대응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이전의 친미일색에서 확연히 벗어난 모습이었다. 지난 2010년 천안함 사태 이후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남북간 경제협력을 일괄중단한 ‘5.24 조치의 해제 또는 완화’ 가능성을 내비친 것도 독자적인 대북행보를 준비하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박근혜의 대외기조가 이른바 ‘친중비미’(親中非美)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가운데 한미원자력협정 개정협상은 미국과의 갈등을 더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박근혜가 당선인 시절부터 무려 23기의 원전에서 나오는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 권한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내려 했기 때문이다.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가 핵폐기물 관련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핵산업계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다. 하지만 재처리 과정은 그 활용도가 1% 안팎에 불과하며 문제가 되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대부분은 여전히 남게 된다. 주장과 다르게 경제성이 없을 뿐더러 사용후핵연료의 포화상태가 문제라면 원전 자체의 폐기가 우선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주목하는 것은 박근혜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남한의 무기급 핵물질 추출 가능성이다. 미국은 남한내 일부 보수세력의 핵무장론도 단지 대북 이데올로기 공세로 치부하기보다는 실제로 강한 의혹을 품고 있다.
 

박근혜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않고 있는 미국은 북한의 3차 핵실험 국면을 오히려 기회로 삼았다. 북한위협론을 고리로 박근혜의 외교안보 노선을 한미일 3각동맹의 구조 속으로 편입시키려는 압박을 본격화했다. 지난해 무산된 바 있는 한일 군사협정을 재추진하라고 공공연하게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대북․대중정책에 있어 박근혜의 독자노선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는 뜻으로 ‘박근혜 길들이기’에 나선 것이다. 게다가 한미 연합훈련 과정에서 핵무기 장착이 가능한 B-52 폭격기를 공개한 것도 사실은 박근혜 정권과 일부 보수세력을 향해 내놓은 일종의 연출이었다. 한미원자력협정 개정협상에서 다른 생각을 품지 말라는 의미였다. 결국 박근혜의 첫 방문국이 5월 미국으로 정해진 것은 이 같은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박근혜는 한반도 정세가 아직 엄중하지만 북한의 위협을 대북정책과 직접 연계시키지 않고 있다. 지난 3월22일 민간단체의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첫 승인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박근혜가 보수정권으로서 대북정책의 주도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을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것 같다. 정부조직법 파행, 인사파동 등 정권 출범 직후부터 온갖 악재에 시달리면서 오히려 대북정책을 국면전환용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미국의 견제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공약이행 의지를 밝힐수록 북한문제와 관련해 현실적으로 중국과의 관계강화가 필수적이지만 이는 미국이 원치 않는 그림인 까닭이다. 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중국과의 신냉전 구도 속에서 한미일 3각동맹의 강화이며 이 속에서 남한을 어디까지나 자기통제 하에서 관리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간의 대결구도 속에서 좌우되는 한반도 질서


확실히 북한은 이전 김정일 체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김정일 시대에 북한은 도발이나 위협을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했고, 이른바 출구전략까지 넌지시 내비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북미 평화담판이냐, 전쟁이냐’의 양자택일만을 말하고 있다. 지난 3월30일 북한이 ‘정부·정당·단체 특별성명’을 통해 남북 전시상황 돌입을 선언하며 “김정은 시대에는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북한문제가 불거질 때면 흔히 거론되는 중국의 대북특사도 이번에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북미관계는 물론 북중관계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북한은 지금 이대로는 더 이상 못 살겠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아버지와 아들의 스타일 차이 또는 김정은의 치기어린 모험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북한이 수령제로 집약되는 권력체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김정은의 선택을 독단적인 자기판단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체제유지를 위해서는 현재 김일성 일가의 세습정권과 공동행보를 취할 수밖에 없는 북한 지배층의 이해관계 역시 김정은으로 투영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 목적은 결국 미국과의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대규모 경제적 지원에 있다. 
 

여차하면 이란과의 핵 비즈니스를 성사시키겠다는 위협도 이런 목적에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북한은 지난해 12월 은하3호 발사 이후 일관되게 공세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단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한반도 정세를 긴장국면으로 그것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시키는 과정에서 북한은 마치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듯 권력기관 전체가 매우 계산된 행동을 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동아시아 일대에서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구도 또한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동북아 각국의 지배권력 교체가 마무리된 직후 북한문제가 본격 제기되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미국의 오바마 2기 행정부와 중국의 시진핑 체제가 내부적으로 새로운 진용을 갖추기도 전에 은하3호 발사와 3차 핵실험을 강행한 것은 신냉전 질서가 고착화되는 현 상황에서 다시금 북한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북한문제의 비중이 점차 축소되는 것을 반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여기에 남한과 미국이 대규모 무력시위를 통해 강경하게 맞대응한 것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극대화하려는 북한의 전략이 제대로 통했음을 입증해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은 한반도의 긴장조성이라는 자신의 1차적인 목표는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한반도에서 극단적인 군사적 대결양상이 지속되는 것은 관련국 모두에게 부담이다. 이는 북한이 더 잘 알고 있다. 장기간의 전쟁위기 상황의 피로도는 경제여건상 북한에 더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서해상 무력도발 가능성이 끊이지 않고 제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김정은으로 상징되는 북한 지배층이 자신의 강경한 언사에 대내외적으로 힘을 싣기 위해 실제 제한적인 무력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국지적 도발은 언제든 전면전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때문에 남한내 일부 운동진영에서 제기되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요구는 사태의 엄중함 속에서 일면 호소력을 갖고 있다. 전쟁에 반대하고 결코 타협할 수 없는 평화의 가치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문제는 북한도 의식하고 있듯 동아시아의 신냉전 질서다. 미국과 중국 사이의 대립과 갈등구조는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역학구도를 형성시키고 있다. 남북간 군사적 대치가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 질서가 곧 동아시아 역내 질서를 좌우하고 대변하던 시대가 마감되고 오히려 미국과 중국의 동아시아를 둘러싼 파워게임 속에서 한반도가 강한 규정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시진핑이 한반도 전쟁위기를 제쳐두고 국가주석 취임 이후 첫 외교행보로 러시아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상황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의 대중국 포위전략에 맞서 러시아와의 전략적 공동행보가 북한문제보다 더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미국 또한 외교안보 차원의 대응을 넘어 일본을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 끌어들이고 유럽연합과 TAFTA(범대서양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중국의 고립을 노리는 서방권의 대동단결을 추구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북핵사태가 오는 5월 한미 정상회담과 이후 각종 정치일정으로 외교적 해법이 모색되고 심지어 북미간 평화체제 협상이 본격화된다 하더라도 한반도를 둘러싼 대외여건은 여전히 불안정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에서 남한 내에서 주장되는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요구는 그 당사자가 실질적으로 북한을 비롯한 부르주아 지배권력 사이의 약속과 합의라는 점에서 전쟁과 모든 핵에 반대하는 대중의 목소리를 온전히 담아내는 데 한계적이다. 또한 한반도에서 유령처럼 배회하는 전쟁의 그림자가 남북관계 또는 북미관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미국과 중국 간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지금처럼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고 남북간 무력충돌마저 우려되는 상황에서는 일관되게 ‘전쟁 반대! 모든 핵 반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필요하다. 북핵을 놓고 위험천만하게 전쟁위기를 가중시키는 동북아 지배권력에 맞서 평화를 위한 우리 스스로의 행동과 자발적인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글 : 김성렬 tjdfuf@jinbo.net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기토론회> 파시즘

일베는 파시즘일까? 박근혜는 파시즘일까? 사노신 네번째 정기토론회 <파시즘>에서 함께 얘기해보아요~ 4월4일 저녁7시 장소는 확정되는대로 다시 알려드릴게요~

함께 읽을 책 - 마크 네오클레우스, <파시즘>, 정준영 역, 이후
더 읽으면 좋은 책 - 케빈 패스모어 , <파시즘>, 강유원 역, 뿌리와 이파리
- 장문석, <파시즘>, 책세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장소변경공지!] 사노신 정기토론회 <앙드레 고르,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시간은 그대로! 2월 15일 금요일 늦은 7시

장소는 노들장애인야학 다용도실입니다. 4호선 혜화역  2번출구 마로니에 공원 뒷쪽 알과핵 소극장 건물 2층입니다.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 
문의 : 010-7647-707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번역]사회주의노동자당 : 좌파의 성차별주의

  • 분류
    여성
  • 등록일
    2013/02/07 15:52
  • 수정일
    2013/02/07 18:40
  • 글쓴이
    사노신
  • 응답 RSS

 

사회주의노동자당 : 좌파의 성차별주의(SWP : Sexism on the left)

 

출처 : http://workersparty.org.nz

필자 : Daphne Lawless (2013년 1월)

 

  최근 영국의 운동진영은 우리에게도 매우 잘 알려진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당 ( Socialist Workers Party)> 내부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과 그에 대한 SWP의 잘못된 대응에 대한 논란으로 들끓고 있다. 마치 지난 해 통진당 사태 때처럼 SWP에 대한 집당 탈당이 이어져 이 조직이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이른바 “맑스-레닌주의자”들의 여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외국이나 남한이나 별 다를 바는 없는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남한의 운동진영에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이런 문제에 대한 오랫동안의 문제제기와 투쟁들이 벌어져 왔지만 변화는 사실 생각보다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페미니즘이라면 눈을 벌겋게 하고 달려드는 반(反)여성주의자들이 운동사회에 버젓이 횡행하며 여러 온라인 사이트나 SNS에서 정신건강을 해롭게 하는 언사들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근 SWP에서 벌어진 사건은 사회주의자들의 이런 태도가 변화하지 않는 한 운동 뿐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조직 보위”에도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사회주의노동자신문은 이 사건을 다룬 해외좌파의 여러 기사 중 비교적 상황과 쟁점을 자세히 정리한 기사를 골라 번역 게재한다. [편집자]

 

 *기사의 입장은 본지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영국에서 가장 큰 혁명조직이며 영어권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조직 중 하나다. 지금 이 조직은 혁명운동 내부에서의 민주주의 문제와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 및 성차별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부각시키는 커다란 위기에 휘말려 있다.

 

사실관계

 

사건의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인터넷 상 모든 급진좌파진영들이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서술했기에 앞으로 서술할 내용은 간략한 요약에 그칠 것이다. SWP의 한 여성 당원(W동지)가 “델타 동지(comrade Delta)”라고 알려진 중앙위원회의 고참 남성 활동가와 교제 중이었다. W는 델타가 성희롱을 일삼다가 강간까지 저질렀다고 고발했다. 최근에는 다른 여성 동지가 또 그와 유사한 문제를 제기했다.

 

SWP는 이러한 제기를 분쟁위원회를 통해 내부적으로 해결할 것을 고집했다. 이 위원회는 델타를 잘 알지만 W는 전혀 모르는 조직의 고참 활동가들로 구성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 중 몇몇은 당이 W에게 경찰에 고발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한다.

 

조사과정에서 W는 개인적 인간관계나 술버릇 등 사생활에 대한 훈계조의 질문들을 들어야 했고, 이는 W에게 또 다시 트라우마가 되었다. 결국 분쟁위원회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연례 대회에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결론 내린 보고서를 제출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분쟁위원회가 대회에 제출한 보고서는 근소한 차이로 통과되었다. 논쟁 과정에서 사건 처리 전반에 대한 매우 강한 비판들이 제기되었으며 그것을 기록한 서기록은 SWP에 비판적인 좌파 블로그(1)에 유출되었다.

 

대회 이후 중앙위는 델타 동지가 "혐의를 벗었다"고 주장하며, 조직 내에서 사건에 대한 모든 논쟁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논란은 마무리되기는커녕 폭발했다. ‘레닌의 무덤(Lenin's Tomb-leninology.blogspot.com)’이라는 블로그의 운영자이자 SWP에서 가장 유명한 실천적 지식인인 리처드 시모어는 공공연하게 중앙위의 결정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리처드 시모어는 SF작가인 차이나 미에빌 같은 SWP의 다른 유명 당원들과 함께 SWP 대회의 재소집 및 중앙위 위원의 전원 사퇴, 그리고 다음 지도부가 민주적으로 당을 운영할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보증할 만한 쇄신조치들을 요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외부 좌파들에 완전히 통일된 입장만을 내보이던 조직에서 이렇게 내부로부터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급진적 블로그들은 W의 신원에 대해서 익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델타의 신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궁금한 사람들은 구글링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델타는 중앙위로부터는 퇴출되었지만 그리스에서 열린 반파시즘 대회에 파견된 SWP 대표단 중 여전히 주도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반대파의 요구 중 하나는 가해자가 거기서도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토론을 금지하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분쟁 위원회의 모습과 의심스러운 사건 처리 과정은 모든 혁명가들에게 추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 분명했겠지만, 중앙위는 이 주제에 대한 토론을 막으려 했고 이는 결국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갔다.

 

SWP에서는 공식적인 분파 형성은 전국 대회 3개월 전에만 허용된다. 몇몇 동지들은 페이스북에서 자신들을 분파로 선언하는 게 필요한 일인지 토론을 벌였다. 중앙위는 “음모적 분파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들 중 네 사람을 축출하는 것으로 이에 화답했다.

 

이에 대응해서 두 개의 분파가 형성되었다. 이 분파들의 이름 ― ‘민주 반대파(Democratic Opposition)’와 ‘민주 집중파(Democratic Centralists)’ ― 은 지금 SWP 내부의 진정한 핵심 이슈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활동가들은 중앙위가 반대파 그룹의 형성을 억압했을 뿐 아니라 델타의 혐의내용에 대해서도 당원들에게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SWP는 정치는 물론 진실을 희생해서라도 “지도부를 보위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반대 조류들이 94년에 던진 문제제기들은 지금도 낯익은 것들이다.(2)

 

2007년에 SWP가 범좌파 리스펙트 연합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SWP 내부의 리스펙트 지지자들이 기습적으로 축출되었다. 당원들은 이 논란이 평당원들과 특히 고참 중앙위 멤버인 존 리즈에 대한 “마녀사냥”이라고 비판하며 결집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IS의 뉴질랜드 지부인 <사회주의 노동자(Socialist Worker)>는 그 당시 이렇게 비판했다.

 

정말 (추방된) 동지들이 중앙의 노선에 맞서 다른 정치적 대안을 제기한 것으로 인해 희생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해도, 지금의 상황은 겉보기에 명백히 그들을 피해자로 만들고 있다. 심지어, 최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를 사용하자면 마녀사냥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3)

 

당시 과정을 함께했던 일부 SWP 당원들은 델타를 옹호하려는 중앙위의 현재 행동과 과거의 일 사이에 유사성을 발견할 것이다.

 

사회주의자와 경찰

 

이번 사건에 대한 글 중 몇몇은 SWP가 이 사건을 “내부적으로” 해결하려는 바람직한 태도를 취했다는 시각을 비추기도 했다. 사회주의자들이 경찰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경찰이 여성에 대한 성폭력 혐의를 섬세하고 진지하게 처리할 것이라 믿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분쟁위원회의 해당 보고서는 SWP 역시 이점에 있어 형편없기는 매 한가지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부르주아 법원은 성폭력 생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법원조차도 감히 피고인의 동료들로 하여금 판결을 내리도록 하진 않는다. 경찰 조사에서 원고는 훈련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SWP에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전문가가 최소한 한 명은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W를 돕기는커녕, 피해자를 심판하는 측에 속해있었다.

 

사건을 경찰로 가져가는 것은 국가권력에 우리의 조직을 파괴하고 우리 회원들을 음해할 명분을 주는 것이라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외부자들 앞에서 조직 내부의 문제를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매우 문제 있는 태도다. 비밀주의는 권력의 남용을 부추긴다. 경찰은 힘없는 사람들로부터 힘 있는 사람들을 보호한다. 그러나 SWP의 분쟁위원회 역시 똑같은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 경찰보다 덜 전문적인 방식으로 행했을 뿐이다.

 

페미니즘

 

W동지의 지지자들은 중앙위와 델타동지의 지지자들이 그들에 대한 중상모략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주장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러한 비난 중 하나는 “스멀스멀 내부로 스며들어오는 페미니즘”에 대한 비난이다. 이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2006년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사회주의당(SSP) 내부 투쟁에서 SWP를 추종하는 SSP 당원들은 SWP가 이미 80년대에 단절해버린 “페미니즘적 사고”에 상대 분파가 물들어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이상하게 들리는 주장이 왜 제기되었을지 알기 위해서는 SWP의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70년대 말, SWP는 <여성의 목소리 (Women’s Voice)>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이는 성장하는 페미니즘 운동과 교류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런데 80년대 초, 당내 <여성의 목소리> 지지자들이 맑스주의를 포기했다는 논란이 벌어지며 내부투쟁이 벌어졌다.

 

SWP의 창당멤버이자 핵심지도자였던 고(故) 토니 클리프는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은 서로 상충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로, SWP와 다른 IS경향의 조직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노선을 견지해왔다. 지난 30년 동안 이런 노선은 3세대 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 등 최근의 이론적 발전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고수되었다.

 

2008년 뉴질랜드의 ‘사회주의 노동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SWP의 강경한 노선을 비판했다.

 

점점 더 많은, 특히 젊은 여성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인식하고 있다. … 가장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태도는 이 여성들을 토론에 끌어들이고 어떻게 자본주의가 이 문제들의 근간에 있는 것인지 이야기해야한다 … 그리고 바라건대 마찬가지로 그들한테서 배우는 것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 때때로, 여성들에게 개방적이지 못했고, 여성들의 문제를 주변화 해왔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에게도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4)

 

좌파의 성차별주의

 

SWP에는 물론 여성 관련 이슈에 대한 입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선은 도덕주의적인 편향을 띠고 있다. 최근 진행된 “문란한 문화”, 즉 성상품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은 여성의 자유로운 성적 표현의 권리를 방어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한 블로거의 표현을 빌자면 “뽕브라를 입는 노동계급 여성을 비웃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지금은 탈퇴한 SWP 당원이 <스파크(The Spark)지(紙)>에 말한 것처럼 이러한 정치적 태도는 도덕주의적이고 반동적이며 억압적이다. 이는 남성동지들에게 “성차별주의”에 대한 영원히 경계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러한 경계는 사실 유머 없는 품위를 강제했으며 위선을 가리는 겉모습이었을 뿐이었다.

 

위선에 대해 말하자면, 델타 동지의 행동이 영국 SWP 내에서 새로운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앞서 인용한 블로거는 2007년에 SWP를 겨냥하여 아래와 같은 내용의 신랄한 발언을 했다.

 

찝쩍거리는 손은 하나만 있어도 나쁜 일일 것인데, 두 손 다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고참 핵심당원이 있다.… 하나 둘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젊은 여성동지들이 한 고참 핵심당원 옆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노골적으로 상대의 가슴골을 보면서 말하는 그의 습관 때문이다.

 

그 단체에는 조직적인 배제의 문화가 있다. 그곳에서는 여성에 대한 고려가 없으며 여성들의 발언이 적다.(5)

 

또 다른 전 SWP회원은 <스파크 지(紙)>에 90년대 초반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말해주었다.

 

SWP 중앙위원회 성원 중 한명이 내 친구 중 한명을 성폭행했다. (가해자가 술에 취해서 그랬다면서 장황하게 자기 잘못을 시인했기에 이는 ‘증거불충분’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맞서 싸웠고, 결국 그의 활동을 중단시켰다. 이 여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문제를 계속 밀고나가고 싶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얼마 후에 SWP에서 탈퇴했다. 지역조직자로서 나는 중앙위원회에 가해자 교육에 대한 요구는 없었지만 가해자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러나 중앙위는 “자본주의 하에서 이런 문제는 벌어지게 마련”이라고,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7)

 

이러한 것들은 가장 충격적인 사례일 뿐이다. 델타(나이 많은 남성 간부)와 W(젊은 여성 평당원)와 같은 관계는 용인되어 SWP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만약 노동현장에서 델타가 W의 고용주였다면,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조차도 그것이 성희롱이라는 것, 적어도 건강하지 못한 권력관계의 작용이라고 인지했을 것이다.

 

실수

 

레닌이 말했듯이, 사회주의자들은 실수를 하지 않는 것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실수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평가된다. 영국 SWP는 델타와 W사건에서 저지른 실수에 대해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도부를 보위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문제제기하는 동지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자기 당파의 특권과 권력을 여성해방과 민주주의의 원칙보다 우위에 놓고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자는 이러한 태도를 “종파주의”라고 부른다.

 

‘반격(Fighback)’(구(舊) 노동자당(Workers Party))은 좌파내부의 성적으로 폭력적인(predatory) 행동에 대해 도전했다.(8) 그리고 정치 조직을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토론들을 진행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권력관계와 성희롱에 대한 이슈를 자기 조직 안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페미니스트들과 퀴어 운동들과 연대를 건설해야 하며 여성들이 활동가로서 성장, 활동하기에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엄격한 기준에 맞지 않는 어떠한 지도부도 배격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은 현실세계의 성차별적인 행동양식이나 권력의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마법의 공간(magic circle)”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의 임무는 어떤 일이든지 상관없이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 해방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가지고 억압적, 폭력적, 착취적인 행동을 폭로하고 뿌리 뽑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를, 또한 전체 운동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각주

 

(1)

Newman, Andy. “SWP Conference Transcript: Disputes Committe Report. Socialist Unity, 7 January 2013. http://www.socialistunity.com/swp-conference-transcript-disputes-committee-report/

 

(2)

Wilson, Andy. “IS Group: Discussion Document of ex-SWP Comrades (1994).” Unkant Publishing, 24 December 2012. http://www.unkant.com/2012/12/is-group-discussion-document-of-ex-swp.html

 

(3)

Lawless, Daphne. “The crisis in Respect: a letter to the British SWP”. Unity blog, 31 October 2007. http://unityaotearoa.blogspot.co.nz/2007/10/crisis-in-respect-letter-to-british-swp.html

 

(4)

Potts, Anna. “How Marxism and feminism work – together”. Unity journal, March 2008, pp 111-16. Not currently online.

 

(5)

Splintered Sunrise blog, 17 December 2007. “I am not a number!” http://splinteredsunrise.wordpress.com/2007/12/17/i-am-not-a-number/

Personal communcations.

 

(6)

Ditto

Hartendorp, Kassie. “Safer Spaces in Political Organising.” Workers Party, 10 August 2012. http://workersparty.org.nz/2012/08/10/safer-spaces-in-political-organising/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노신> 세번째 정기토론회 : 앙드레 고르_프롤레타리아여 안녕

2월 15일 금요일 늦은 7시 5호선 영등포시장역 사회주의노동자신문 사무실 

 
누구나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 
문의 : 010-7647-7076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