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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 소식1-비두 동지

방글라데시에서 돌아온지 두달이 다 되어간다.

 

12월 19일에 몸은 돌아왔지만

마음은 다카 거리를 달리던 릭샤 위에서 한참을 헤매고,

정신없이 맞이한 2006년은 너무나 다사다난하여

 

이제서야 동지들의 소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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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두 동지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머리가 하얗게 된 비두씨,

아저씨 다됐네~ 라고 놀렸다.

이거 다 외국인 보호소에 있을 때 이렇게 된거야... 그 때 정말 힘들었다... 고 했다.

 

2003년 10월 26일 전국비정규직 대회.

이용석 열사의 죽음 앞에서 아수라장 같았던 그날 투쟁

대오의 가장 앞선 곳에서 싸우던 비두.

경찰들의 방패 사이로 빨려들어가는 그를 우리는 놓쳤다.

옷이 벗겨지고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수십명의 경찰들에게 깔려,

수갑이 채워져 끌려가면서도 분노로 절규하던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나.

멀리 여수 외국인보호소에서 70여일간 그를 구금하던 대한민국 법무부는

2004년 1월 1일 새해 벽두, '한국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붙여 방글라데시 법무부에 그를 넘겼다. 국가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위험한 행동을 했던 그는 방글라데시 교도소를 거쳐  재판을 받고, 방글라데시 정부기관의 감시를 받게된다...

 

 

< 비두 동지의 방 - 투쟁사진, 동지들의 편지가 걸려있다>

 

나 정말 마음 많이 아펐어요.

한국에서 투쟁하다가 떠나면 끝인가요?

비두씨가 말했고,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8년 만에 테러리스트가 되어 돌아간 방글라데시.

교도소에 구금되고, 재판을 받고, 막대한 벌금을 내야했던 그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한국의 동지들을 가족들은 탓했고, 가족들의 고통 앞에 비두씨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방에만 갖혀지내는 몇달간의 생활이 너무나 힘들었다. 무언가 해야했다.

방글라데시 노동조합 사무실도 찾아가 보고, 이른 아침 공장으로 출근하는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무작정 만나기도 했다... 한국의 동지들은 연락이 없고, 혼자 버텨야했던 외로운 시간들...

 

 

 

노동조합 활동 아니면 투쟁 아닌가요?

밥굶고 죽어가는 사람한테 지금 싸우러 가자고 할 수 있나요?

돈이 없어 학교 못가는 어린이들 공부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일단 시작했죠!

 

비두씨가 태어나고 자란 농촌 마을 '문시곤즈 죠스롱 유니온'에서 그는 젊은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같이 뜻을 모아 작은 단체를 만들자고 했다.

정부의 무관심과 가난한 가족의 냉대 속에서 죽어가는 장애인들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거리에 방치되어 교육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지역 권력자들의 비리에 맞서 싸우고 싶었다.

몇 달 간의 조직화와 회의 끝에 2005년 초 이 단체는 만들어 졌다.

 

 

<죠스롱 유니온 프로그레시브 숑고톤>의 깃발

- 죠스롱 유니온 지역의 진보조직 이라는 뜻

 

나보다 동생들이 너무 열심해 해서 제가 힘 많이 받아요~

사람들이랑 함께 하니까 기쁘죠...

30명쯤 되는 회원은 한달에 30다카(한국돈으로 500원)씩 회비 내고요,

후원금도 받아요. 돈이 더 많이 필요하지만, 이제 시작이니까...하지만 잘 될 거에요!

특유의 낙천적인 웃음을 짓는다

 

그랬다. 당장 생명이 위급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장애인을 지원하고, 가난한 학생들을 보조하는 지역단체로 시작되었다. 작지만 활동이 알려지면서 뜻있는 젊은이들이 속속들이 모이고 비두씨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이 단체를 이끌어갈지 고민하고 있다. 어디서든 고통이 있는 곳에서 파다닥 움직이지 않고는 버티지 못하는 그에게 이제는 농촌지역운동으로서의 정체성과 전망을 고민해야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한국 동지들이 이 활동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 궁금해요.

어떤 동지는 노동운동 아니라고 뭐라고 하지만, 제가 그랬어요.

방글라데시에 한 번 와서 상황보고 얘기해 달라고...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떤 순간에도 억압받는 자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면,

현실의 고통과 깊이를 인간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말과 머리로부터가 아닌 몸의 움직임으로부터 출발한 운동이라면,

그 움직임은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믿는다.

단지 우리에게 남는 과제는

이제 막 산업화의 길로 접어든 방글라데시 상황에 접목할 수 있는 남한 운동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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