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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출판사 6시간제 - 노동자가 주인이 되지 못한 정책의 한계

강요받은 행복과 불행할 자유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詩)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善)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저는 그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멋진 신세계』 중에서

 

『멋진 신세계』를 읽지는 않았지만, 어느 책에 인용된 저 구절을 보면서, 대체 내가 왜 보리출판사를 감옥보다 끔찍하게 여기는지 깨닫게 되었다. 감옥에서 나는 충분히 불행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감옥 안의 삶이 불행하다는 것에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리에서는 나는 내 불행을 이야기 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행복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가장 먼저 윤구병 사장이 그걸 요구했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올라 차 있는데, 사장이라는 사람은 인터뷰마다 “보리에는 스트레스 받는 직원이 한 명도 없습니다.”라며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세상도 마찬가지였다. 보리 노동자들의 문제제기는 어느덧 배부른 자의 투정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리를 배부르게 해달라고 한 게 아닌데,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받아야할 대우에 대해 이야기 했을 뿐인데, 아무도 우리가 이야기하는 우리의 불행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6시간제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6시간제 시행 이후에 우리는 불행할 권리마저 빼앗겨 버렸다.

 

6시간제는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회사가 일찍 끝나는데 당연히 좋지 않겠나. 자녀가 있는 직원들에게는 특히나 좋은 게 많았다. 그래서 6시간제에 만족하는 직원들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나는 6시간제도가 온전히 노동자를 위한 제도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꼭 6시간제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인간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도구였다. 책을 만들기 위한 도구였다면 좀 더 괜찮았을까? 나는 윤구병 사장의 자아실현을 위해 쓰이는 도구였다. 좋게 말하면 윤구병 사장의 노동시간 단축의 실험 도구였고,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윤구병의 개인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다. 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되고 싶었다. 불행마저도 누릴 권리가 있는 인간. 그렇기 때문에 언론에 6시간제 이야기가 나오거나 윤구병 사장의 인터뷰가 나올 때마다 나는 모욕감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언론에 보도되는 이야기는 과장과 왜곡이 지나쳤고, 윤구병 사장은 온갖 인터뷰에서 뻔뻔하게도 거짓말을 잘도 해댔다.

 

보리 6시간제에 대해 있는 그대로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 부담되기도 한다. 노동시간 단축은 그야말로 모든 노동자들의 열망이고, 실제로 살인적인 노동 시간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이 많이 있는데, 보리출판사 6시간제를 비판하는 것이 자칫 노동시간 단축을 반대하는 것처럼 되어 버릴까봐 걱정이 된다. 하지만 오히려 보리 6시간제도의 명과 암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 사회의 노동시간 단축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게 되었다. 보리에서 6시간제가 도입되는 과정과 도입된 까닭을 면밀하게 살펴본다면,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우리 모두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조심해야하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글은 보리출판사 6시간제도의 어두운 면만을 주로 담을 것이다. 효과나 성과는 이미 언론을 통해서 수도 없이 과장되어 나갔기 때문에 내가 다시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보리출판사 6시간제도 도입 과정

 

윤구병 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보리출판사 6시간제도가 1년 동안 모든 직원이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준비했다고 이야기한다. 거짓말이다. 보리출판사에서 6시간제를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이야기가 나온 것은 2011년 12월 초였다. TFT가 구성된 게 2012년 1월 초였고 두 달을 준비해서 3월 달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실제 준비 기간은 길게 잡아도 3개월인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윤구병 사장이 6시간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우습게도 회사 밖에 있는 사람에게 전해 들었다. 윤구병 사장이 회사 밖에서 “보리는 앞으로 6시간제를 시행해서 2교대로 일을 할 것”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여러차례 건너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2011년 5월쯤에 모든 직원에게 이후출판사에서 나온 『8시간 VS 6시간』을 나눠주었다. 그러고는 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할 거라고 했다. 토론은 가을에 했다. 직원들을 모둠을 나누어 모둠 별로 두세 차례 토론하게 했고, 마지막에는 전직원이 모여서 토론을 한다고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회사가 이 책을 나눠주고 읽으라고 하는 까닭을 확인하지 못했다. 심증으로는 윤구병 사장이 6시간제를 실시하려한다고 생각했지만, 회사 경영진 어느 누구도 확실한 말을 안 했다. 참다못해 6시간제를 하려고 이 책을 읽는 거냐고 물어도 조병범 상무이사를 비롯한 경영진들은 죄다 자기들도 모른다고 했다. 전체 토론하는 날은 처음으로 윤구병 사장과 이 사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였다. 하지만 다른 일로 노조와 갈등하고 있던 윤구병 사장은 막상 전체 토론 날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언론보도에는 전 직원이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다고 나와 있지만, 우리는 한 번 뿐이었던 전체토론 자리에서 6시간제가 아니라, 이 토론회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을 했다. 그게 11월이었다.

 

그리고 아까 밝혔던 대로 윤구병 사장이 12월 초에 공식으로 6시간제와 2교대 근무제를 시행할 계획이 있음을 공지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윤구병 사장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바뀌는 중요한 결정들을 노동자들과 이야기해서 결정한 적이 없었다. 6시간제도 역시 노조에 협조를 구한다는 말로 포장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통보였다.

 

당시 노조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노조에서 조합원 간담회를 12월 말에 했는데, 6시간제를 받아들이자는 의견도 있었고, 6시간제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6시간노동제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윤구병 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마치 6시간 노동제에 우려를 표하는 노동자들이 임금이 깎일까봐 그런다는 식으로 말했다. 임금이 생존권과 직결된다는 걸 모르는 사장님의 현실인식은 둘째치더라도, 나를 비롯해 6시간제 도입을 반대한 노동자들의 생각을 심하게 왜곡한 발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실 보리의 문제는 노동시간이 아니었다. 6시간제를 시행하기 전에도 보리는 다른 출판사에 비해 노동시간이 아주 짧았다. 부서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내 경우는 야근 하는 날이 거의 없었다. 보리출판사의 문제는 모든 정보를 회사가 독점하고 모든 결정을 대표이사가 내리는 것, 다시 말해 비민주적인 회사 운영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스스로 진단하고 있는 문제점도 6시간제와는 별 상관이 없어보였다. 회사는 살림살이의 문제, 즉 경영난을 이야기 했다. 『8시간 VS 6시간』에 나오는 켈로그처럼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공장이라면 모를까, 출판사가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2교대제를 시행한다고 해서 생산력이 높아질 리가 없었다. 당시 어느 조합원은 이렇게 표현했다. “아픈 다리는 놔두고 엉뚱한 다리 긁는 기분이다”

 

간담회에서는 아주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걱정도 있었다. 이 제도가 노동자를 위해 도입되는 것이 아니고, 윤구병 사장 개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것일 뿐이며, 나중에 노동자들에게 독으로 작용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TFT가 구성되어 2달 동안 6시간제 시행 초안을 만들고 그것을 이어 받아 단협에서 논의를 했다. 몇 가지가 쟁점이 됐다. 노동조합에서는 딱히 엄청난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회사에서 의무로 규정하는 교육에 대해서 회사일로 인정하라는 것이나 휴일근무를 했을 때 수당으로 받을지 대체휴가를 쓸지 결정권이 노동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그야말로 노동법에 규정된 권리를 주장했다. 대부분 타협점을 찾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윤구병 사장은 노동조합의 요구에 대해 6시간 노동제를 없던 일로 하고 8시간제를 계속 시행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어이가 없었다. 6시간제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것을 무기 삼아 노동조합을 공격한 것이다. 앞으로 6시간제가 어떤 방식으로 노조에 대한 공격에 쓰일지 알 수 있었다. 

 

6시간제를 시행하기 직전까지, 이왕 하는 거라면 좀 천천히 시행하더라도 제대로 준비를 많이 하자고 했지만, 윤구병 사장은 뭐가 급한지 빨리 하자고만 하였다. 결국 두 달(1~2월) 동안 준비해서 3월부터 예비시행을 하기로 했고, 예비 시행을 시작하자마자 회사는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뿌렸다. 그리고 많은 언론들에서 보리 6시간제를 다뤘다. 어느 날인가는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를 보며, 자기(윤구병)가 우려한 일이 있어났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보도자료를 뿌리면서 기자가 찾아올까봐 두려웠다니, 가증스러웠다.

 

6시간제가 시행된 지 일 년이 넘었다. 과연 보리 6시간제는 제대로 안착했을까? 나는 부정적이다. 오히려 실질적인 측면에서는 준비기간이 짧은 것을 고려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시스템이 정착이 되었다. 하지만 보리가 가지고 있던 문제들, 비민주성이라든지, 재정난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애초 시작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겠다. 6시간제도가 실패라고 여겨지는 가장 큰 까닭은, 윤구병 사장이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고 책도 낸 6시간제도의 의미가 사실상 보리출판사에서는 구현되지 않았기 대문이다. 노동자들이 행복한 회사라는 말은 언론용 이미지 관리 멘트였을 뿐이다.

 

또 하나 6시간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은 갖는 이유는, 그것이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올해 단협에서도 노동조합이 시간적립제 보완하는 수정안을 내자 그러면 8시간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고, 급기야 근로시간 중 조합활동 내용을 가지고 다투면서는 회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8시간제로 돌아간다는 협박성 태도를 계속 취했다고 한다. 6시간제 시행규칙에 시간적립제에 대해서는 2013년 단협에서 재조정할 수 있다고 적혀있고, 그 문구가 아니더라도 단협에서 이야기 못할 것이 아니다. 내가 다닐 때도 그러하더니 여전히 그러고 있는 모양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 안의 인간이 우선이 되어야지 제도가 우선이 되면 안 된다. 법이나 제도 이런 것은 결국 사람이 만들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혹 지금 완벽하더라도 상황이 변하면 그 상황에 맞게 수정해 나가야 한다. 이미 그 자체로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한 영역이 되어버렸다면 그 제도는 그 순간부터 순기능보다는 부작용들이 커져가는 게 당연하다. 

 

복지, 노동자가 싸워 얻은 권리일 때와 권력자가 베푼 시혜일 때의 차이

 

노동시간 단축은 모든 노동자들의 염원이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싸워 얻어낸 권리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권력자들이 주도해서 만든 제도는 심한 경우에는 보리출판사의 경우처럼 노동자를 위한 제도가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무기로 돌변하기도 하다.

 

꼭 노동시간 단축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한동안 복지라는 단어가 온 나라에 유행처럼 번졌다. 대통령 선거 때는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복지를 이야기 했다. 나는 그게 못내 걱정이 됐다. 권력자들의 의지로 도입된 복지 정책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보리에서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경우 그 제도는 모래 위에 쌓은 성이나 다를 바가 없다. 권력자의 심기가 불편해지면 하루아침에 사라질 게 뻔했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 권력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진정 노동자를 위한다면,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정치인이라면, 혹은 회사의 경영진이라면, 노동자를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라고 말하고 싶다. 노동자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하루 8시간 이상을 보내는 직장에서 자기 노동에 대해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은 결코 노동자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노동자가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될 때만이, 노동자를 둘러싼 온갖 불합리한 현실이 개선될 수 있다. 노동자들 스스로가 개선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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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사원과 비정규직2 - 비정규직은 나쁜 제도이기 때문에 비정규직 직원 자르겠다고?

나는 2012년 9월 말에 보리출판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그 몇 달 전부터 그만두려고 했었다. 그때마다 번번히 나를 말리고 잡는 동료 가운데 한 명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감옥에서보다 회사에서 훨씬 더 많은 모욕을 느꼈어요." 동료는 놀라면서 그 정도냐고 반문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감옥에서는, 교도소장이 자기가 평생을 재소자 인권 운동을 눈 밖에 둔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되니까요." 

 

바로 전 글(http://blog.jinbo.net/stego/605)에서 나는 윤구병 사장이 우리를 공격하는데, 혹은 우리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진보적인 가치를 들먹인다고 쓴 적이 있다. 내가 받는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은 이 때문이었다. 맘에 안 드는 직원 징계하고, 못 살게 굴어서 쫓아내고, 수습사원 맘대로 해고하는 거는 나쁜 일이지만, 대한민국 많은 사장들이 하는 짓이다. 물론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윤구병 사장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노동자로서 분노할만한 일이지만, 원래 무딘 성격에 스트레스 잘 안 받는 내가 그것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내가 보리출판사를 다니면서 주로 분노한 것은 윤구병 사장이 하는 나쁜 짓 때문이 아니라, 나쁜 짓을 하면서 자기를 진보적인 사람으로 포장하는 위선과 나쁜짓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진보적인 가치를 들먹이 것이 너무나 역겨웠기 때문이다.

 

자기가 내린 (우리는 납득할 수 없는) 업무지시에 의문을 제기한 직원을 징계위를 열어 해고하려고 하면서, 바로 그때 yes24와 한 인터뷰에서는  "상사가 시키는 것도 바른 일이면 하지만, 바르지 않은 일이라면 하지 않도록 해야죠. 근데…… 상사를 안 두는 게 최고야. 위에도 밑에도 두지 않는 게 제일 좋아요" 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위에 예로 든 사건과 더불어, 이번에 이야기할 것도, 내가 회사를 다니며 가장 화가 났던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을 겪고 난 뒤로, 나는 윤구병 사장에 대해서 모든 판단을 정리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어찌어찌 잘 하면 보리출판사가 좀 더 좋아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일이 있은 뒤로는 윤구병이 사장으로 있는 한 보리출판사는 점점 끔찍한 곳이 될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2011년 11월 어느날. 직원 한 명이 나를 찾아와서 회사가 비정규직 직원과 재계약을 안 할 거라는 사실을 말해줬다. 이유를 물으니 회사가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다.  그런데 그게 비정규직 직원 때문인가? 회사 경영진이 경영을 못해서 어려워진 것을 왜 비정규직 직원에게 책임을 묻는가. 그리고 보리는 일 년 매출이 수십 억인 회사다. 직원 하나 자른다고 회사의 재정이 갑자기 풍부해질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노동조합에서 회사에 공문을 보냈다. 회사가 어렵다는데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모르니, 회사의 재정 상황을 공개하라고 했다. 그리고 재정 상의 어려움은 노사가 같이 풀어갈 방법을 찾자고 했다. 회사는 답이 없었다. 재차 답을 재촉했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 와중에 6시간제 관련한 처음이자 마지막 전체 토론 자리가 잡혔다. 조합원들은 저마다 A4 용지에다 재계약에 나서라는 요구를  담아와서 들고는 토론회에 참석했다. 윤구병 대표이사는 우리와의 자리가 부담스러웠는지 변산으로 도망가고 참석하지 않았다. 노조의 공문에 회사가 왜 답을 하지 않느냐고 조병범 상무이사에게 물었지만, "답이 없는 게 답"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대답만 들었다. 

 

우리는 회사 밖으로 알리고 직접행동을 준비하기로 했다. 각자가 쓴 손피켓을 사진으로 찍어서 영상을 만들어 SNS를 통해 뿌렸다. 많은 분들이 호응해주셨다. 뒤늦게나마 그 당시 마음과 힘을 보태주신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린다. 12월 한 달 동안 어떻게 싸워나갈지 계획도 짜고, 노조 긴급 총회를 열어서 그 내용을 공유했다. 

 

한편 변산으로 도망쳤던 윤구병 사장은 회사 인트라넷에 글을 남겼다. 아마도 윤구병 사장이 다른 사장들처럼, 그냥 해고했으면, 끝까지 회사가 어려워서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으면, 이렇게까지 열이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구병 사장은 그 글에서 끝까지 위선을 부렸다. 자기는 비정규직 제도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비정규직이 50%가 넘는 이 나라는 막 되어 먹은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규직에 비해 차별을 받는 비정규직은 나쁜 제도고, 보리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에 비정규직으로 계약을 연장하는 것은 보리에서는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회사 살림이 어렵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비정규직이 나쁜 제도기 때문에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기 위해, 비정규직을 해고하겠다는 기막힌 논리였다. 

 

그러면서 책임을 교묘하게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 돌렸다. 보리는 신간 매출율이 낮다고 질책을 했는데, 당연한 게 아닌가. 편집자들에게 기획할 권리를 주지 않고 자기 혼자 꼭 쥐고 있는데, 어떻게 신간이 순풍순풍 나온단 말인가. 보리 재정은 유리처럼 투명한데, 경영진이 대체 어떤 낭비를 더 줄이냐고 했다. 하지만 그 유리창, 노동자들에겐 투명은커녕, 무슨 퇴폐업소 창문마냥 하나도 들여다 볼 수 없는 유리창이었다. 업무상 기밀이라면서 편집자들에게 계약서도 잘 안 보여주려고 하던 회사가 아닌가. 계약직은 나쁜 제도인데, 노조가 계약직으로 계약 연장하자고 주장하면 노조차원에서도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왔다. 가장 화가 나고 어이가 없는 것은 마치 이 일들이 노동자들이 이기적이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말을 한 것이었다. 6시간제를 토론하자고 했더니 노동자들이 임금삭감을 가장 먼저 걱정한다면서, '비정규직 철폐'가 다 빈말처럼 들린다고 했다. 

 

이 사람과는 대화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합리, 이성, 대화, 토론, 설득, 양보, 타협 이런 말이 들어설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회사의 치부를 밖으로 알리고 드러내는 것에 부담이 있었는데, 더 이상 회사 안에서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 밖으로 알리고 적극 행동을 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헌데 이 일은 예상치 못하게 중간 결말을 맞게 되었다. 노동조합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틈을 윤구병 대표이사가 파고 들어왔던 것이다. 때마침 노동조합 집행부 임기가 끝나게 되어 집행부를 새로 뽑는 투표를 했다. 12월 1일로 기억한다. 초대 분회장이었던 내가 임기가 끝나고 새 분회장이 선출되었다. 우리는 새 분회장 임기가 언제부터 시작하는지 아직 생각을 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날 윤구병 사장이 새 분회장을 불렀다. 그리고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던 그때까지와 다르게 비정규직 직원의 계약을 우선 한 달(12월) 연장하고 그동안 대안을 찾자고 제안을 해 왔다. 노조로서는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그 제안은 내가 분회장일 때 우리가 회사에 했던 제안이었다. 

 

회사와 맞서 싸우려고 모았던 의지들이 한 풀 꺾이게 됐다. 결국 그 의지가 다시 모으긴 힘들었다. 회사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안을 들고 나왔다. 해당 부서를 독립법인으로 만들어 해당 직원과 또 다른 계약직 직원에게 맡긴다는 거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거는 손 안대고 코 풀려는 거였다. 계약직 직원들은 1년 만 더 계약을 하면 정규직으로 자동 전환이 되는데, 법인을 따로 만들어서 보리가 그 책임에서 벗어나겠다는 속셈이라 생각했다. 법인을 따로 만들어서 운영하면서도, 1년 동안 보리에서 임금을 준다고 하니, 정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생각했다. 보리에서 월급을 받고, 보리출판사 건물에서 영업을 하는데, 보리직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한차례 기세가 꺾인 우리는 이 안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윤구병 사장과 경영진들은 이후 보리는 비정규직이 없는 회사라고 회사 밖에다 자랑을 하고 다녔다. 나는 그 꼴이 너무나 역겨웠다. 

 

이 눈 가리고 아웅이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2011년 11월에 쫓아내려고 했던 그 직원은 1년을 더 계약직으로(법적으로 보리 직원이 아니게 되었으니, 보리 분회 조합원으로 누리던 많은 권리들이 다 사라진 채) 일하다가 2012년 말에 그만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 뒤여서 그 직원이 그만둘 때 상황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듣기론 그 직원 입에서 그만두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하려고 꽤나 치졸하게 굴었던 거 같다. 

 

이 일은 굉장히 화가 많이 나고 피가 거꾸로 솟는 일이기도 하지만, 후회와 반성도 많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 당시 우리가 노동조합 집행부 교체 시기와 임기에 대해 좀 더 대비를 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우리가 그 당시 회사 밖으로 더 알리면서 싸움을 크게 가져갔다면,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다쳤을 거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당시 치부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점점 더 상처가 곯았던 것은 아닐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때 회사의 치부를 크게 드러내서 한바탕 싸워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후회가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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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다시 생각하다

'윤구병 효과'라는 게 있다. 뭐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말은 아니고, 요새 나와 몇몇이 즐겨 쓰는 말이다. 운동권이던 사람을 사장말 잘 듣고 복종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운동권이 전혀 아니던 사람을 사장 말에 복종하지 않는 저항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게 바로 윤구병 효과다. 

 

이런 말이 나온 까닭은, 보리 출판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했던 경험 때문이다. 우리가 노동조합을 만들 때, 가장 열심히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거의 평직원이었다. 이들은 노동조합 경험은커녕, 노동자 집회도 안 나가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진보정당 당원도 아니고, 촛불집회도 안 가봤고, 보수적인 신학교 출신의 목사 지망생이었던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사회과학 서적 한 번 안 읽어본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하다못해 과대표 같은 것을 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보리에서 진보 물 먹어봤다 하는 사람들은 주로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나이로는 386 세대였는데, 대학 다닐 때 어느 정도 운동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자처했다. 이분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진보정당 열성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노동자 투쟁에 연대를 열심히 하는 분도 있었다. 강정 마을에, 홍대 청소 노동자들 투쟁에, 희망버스에 확실히 일반 직원들보다 열심히 싸우러 다녔다. 이 사람들은 평직원들을 정치 의식 없고 노동자 의식 모자란 사람들로 보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가르치고 했다. 작은책 강좌를 듣게 하고, 변산 공동체에 가서 일을 하면서 보리가 가진 철학(진보)을 배우라 했다. 노동조합을 만들 때는 노동자의식도 없는 애들이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 댄 것이 내 귀에 흘러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정 반대의 태도를 보였다. 대표이사 눈밖에 나서 해고 당할 위기에 조합원이 처해도 간부들은 대부분 침묵했다. 아니 오히려 징계위원회 사측위원으로 들어와 중징계를 주장하기도 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인사발령이 내려져도 늘 침묵했다. 그러다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는 회사 결정이 날 때면 굉장히 열성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회사 안에서 대표이사의 폭력과 권력에 맞선 것은 늘 평직원들이었다. 운동권 출신 간부들에게 정치의식 없고 노동자 의식 없다고 무시받는 평직원들은 거창한 이데올로기 같은 것 없이, 뛰어난 사회과학 이론 없이, 그저 자기가 가진 상식과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 결과는 저항이었다. 물론 사회 운동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서툴고 실수투성이였지만 말이다. 

 

나는 진보가 무엇인지, 진보를 삶의 가치로 품고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 간부들을 이미 철지난 기억을 추억삼아 살아가는 그런 386 세대로 치부해버리면 모든 문제가 단순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간부들 가운데 몇몇은 지금도 활발히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또 그런 분석은 저 사람들을 비판하기에는 좋아도 나에게는 아무런 시사점도 주지 못하니까. 

 

양심적 병역거부에 찬성하면,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면 진보인가? 희망버스를 탔으면, 밀양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면 진보인가? 맑스주의자거나 코뮨주의자면 진보인가? 진보신당 당원이거나 녹색당 당원이면 진보일까? 그렇다면 윤구병을 비롯한 보리 경영진과 간부들은 죄다 진보다. 윤구병에 맞서는 노동조합보다 훨씬 진보다. 하지만, 비정규직 직원을 마음대로 해고하려고 하고, 수습 사원을 맘대로 해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진보가 어디있다는 말인가. 우습게도 윤구병 사장이 우리를 공격하거나 우리의 공격에 반격하는데 써 먹는 것도 진보적인 가치였다. 

계약직 직원을 해고하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계약직은 차별적인 나쁜 제도라서 보리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에 보리는 계약직 형태로 계약을 연장할 수 없다." 고 말한 것이나 홍대 청소노동자들에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을 이야기 하면서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를 마치 이기적인것처럼 말한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사회적인 기준들은 보리에선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내 동료들은 진보에 질려하기 시작했다. 회사 밖에서 하는 말과 회사 안에서 하는 행동이 너무 다른 것이 마치 진보의 표상인 것처럼 되었다. 우스겠소리처럼 말하지만, 보리에서 한 때 가장 인기없는 정당이 진보신당인 적도 있을 정도니까. 나는 아니라고, 훌륭한 진보주의자들도 많다고 항변해봤지만, 나 스스로도 대체 진보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진보의 가치를 품고 사는 게 무엇인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냉소에 빠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진보라는 이름 따위는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곳에서 가장 집중해야할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보리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각각의 사람들이 거기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봤다. 그 사람의 사회적인 배경이나, 과거에 어디서 무얼 했는지 따위는 다 지워버렸다. 결국에는 대표이사에 복종하는 사람들과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로 나뉘었다. 복종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나는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는 아주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 생계형으로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윤구병을 정말로 존경해서 그러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냥 귀찮아서 지금 보리에서 주는 혜택을 받으면서 조용히 편하게 회사 다니고 싶어서 침묵으로 복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유심히 생각했다. 맑스를 읽은 적도 없고, 추방과 탈주와 혁명을 이야기 하는 그린비 책을 읽은 적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 하는 불복종과 저항. 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내가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아주 거창한 이론도 아니고, 위대한 사상도 아니었다. 상식과 양심,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지는 마음. 이게 전부였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동료가 부당한 처우를 받을 때 함께 분노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거기에 변증법 같은 철학도 거창한 계급 의식도 필요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나는 양심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해봤다. 분명 윤구병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사람들 가운데도 이성의 판단으로는 윤구병 대표의 회사 경영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가 내리는 인사발령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권력에 복종하지 않고 저항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하는 것은 양심아닐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상식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인간의 마음정도면 된다. 푸코나 맑스를 몰라도,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뭐가 문제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다. 아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 그건 양심의 힘이다. 모두가 알아도 모두가 그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라들이, 양심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진보의 가장 큰 조건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가 남았다. 실제로 윤구병을 존경하는 사람도 있기때문이다. 이들은 자기의 행동과 말이 자기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사람들도 보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대게 인정했다. 그런데 그게 윤구병 대표 때문이 아니라, 그 밑에서 일하는 몇몇 경영진들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이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건 뭘까? 왜 이사람들은, 자기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영진을 임명한 것도 윤구병이고, 문제의 그 경영진이 문제가 되는 행동을 해도 눈 감아줘서 그 행동에 정당성을 주는 것도 윤구병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일까? 

 

이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소 성급하게 지금 시점에서 결론을 내리자면, '권력'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윤구병 대표가 책과 언론 인터뷰에서 떠들어 대는 좋은 말과 좋은 철학만 보고, 현실에서 대표이사로서 휘두르는 권력은 보지 못하거나, 애써 피하거나 일부러 보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닐까? 다시 말해 '권력'을 직시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성찰하지 않은 거라 생각한다.

 

확실히 현실을 직시하는 것, 특히 현실의 권력을 직시하는 것은 상당히 고단한 일이다. 그걸 좋아하는 권력자가 없기때문에 권력자의 눈밖에 나고, 사는 게 퍽퍽해지겠지. 그러고보면 윤구병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철학자 윤구병' '농사꾼 윤구병' 이런 이름을 보지 않고, 자기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사장 윤구병'이 우리가 얼굴 마주하고 있는 윤구병이라는 개인의 실제 모습이라는 걸 알고, 윤구병을 (윤구병이 가장 싫어하는 이름인) 사장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말하는 것'과 더불어 '현실을 직시하고, 특히 권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바로 진보라고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는 진보적인 철학, 진보적인 정치 성향, 혹은 진보적인 활동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권력을 직시하며,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는 복종하지 않는 것, 그게 진보의 참내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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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사원과 비정규직1 - 분회장으로서 가장 잘못한 일

글을 쓰면서 윤구병 대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윤구병이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나쁜 사장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까닭은 윤구병이 나쁜 사장이라는 걸 폭로하는 게 아니다. 내 글은 나를 향하고 있고, 내가 겪은 일을 함께 느끼며 그걸 바탕으로 노동자들이 좀 더 행복하게 일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을 향해있다. 오늘도 마음을 다잡는다.

 

보리는 확실히 일반적인 회사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반회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일어나지 않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보통 회사들에서 가장 약자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은 보리에서도 마찬가지로 약자였다. 수습사원과 계약직 노동자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두 편에 나눠서 할 거다. 먼저 수습사원 이야기다.

 

수습사원 해고를 겪으면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글을 이미 썼다.(http://blog.jinbo.net/stego/598?category=6) 이게 2009년 8월말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윤구병 대표는 자기가 다 책임지겠다며 다시는 수습사원이 정직원이 되지 못하고 계약해지 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반 년 만에 또 한 명 수습사원이 정직원이 되지 못한 채 그만두게 되었다. 해고가 아니라 제 발로 나간 거였지만, 어찌 보면 해고보다도 더 악랄하다고 느꼈다. 해고 통보는 그냥 깔끔하기라도 하지, 이건 자기 발로 나갈 때까지 스트레스를 주고 괴롭힌 거니까 말이다.

 

2009년에 보리출판사는, 낸 책보다 새로 뽑은 직원이 더 많을지도 모를 정도로 사람을 많이 뽑았다. 내가 들어오기 전에도 7명을 충원했는데, 내가 들어온 이후로도 계속 사람을 뽑았다. 12월 달에는 잡지 편집부와 단행본 편집부 충원이 있었다. 그때 20살을 갓 넘은 어떤 분이 지원을 했다. 대학 전공은 디지인과였지만 편집자로 지원했다. 윤구병 대표는 이 사람을 마음에 들어했고, 모두가 반대하는데도 꼭 뽑자고 했다. 단행본 편집부가 반대하자 디자인팀에 뽑으라고 했다. 디자인팀에서도 반대하자, 결국 잡지디자이너로 뽑게 되었다. 그리고 수습기간 3개월을 다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스스로 사표를 내었지만, 분명히 회사가 쫓아낸 거나 마찬가지다. 당사자한테는 말을 안 했지만, 잡지 편집장은 다른 직원들에게 그 친구는 정직원 채용을 하지 않을 거라고 이미 말한 상황이었다. 그 친구도 그런 회사의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잡지 편집장은 그 친구의 업무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같이 일을 안 해본 내가 업무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야근하고 주말근무 하고 최선을 다해 업무 관련 수업까지 들은 직원을 그런 식으로 내보낸다는 게 화가 났다. 뽑을 때는 막 뽑고선 뒷감당은 노동자 개인들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꼴이니.

 

아무튼 반 년 사이에 수습사원이 정직원이 되지 못하는 일을 두 번이나 겪으면서, 새로 만들어질 보리 노조의 핵심적인 과제 하나가 확실해졌다. 바로 수습사원 보호였다. 단협을 맺을 때도 수습사원을 보호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수습사원 때부터 조합원이 되게 해서 노조에서 보호하려고 했지만 회사의 반대가 심했다. 회사는 수습사원은 언제든 계약해지 할 수 있는 직원이라고 생각했다. 수습사원에 대한 인사권에 노동조합이 조금이라도 개입하려고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노동조합이 물러섰다. 수습사원의 노동조건에 관련된 부분만 조금 개선했다. 휴일근무수당 지급(이건 단협 전 노사협의회에서 정했던 걸로 기억난다), 수습기간 임금에 대한 부분들이 개선되었지만, 수습사원은 여전히 쉽게 잘릴 수 있는 처지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한 명 수습사원이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편집장이 그 직원의 업무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편집장과 갈등도 있었다. 결국 수습평가 때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무기력하기보다는 비겁했다. 그 직원은 노동조합에 도움을 요청했다. 언론노조에 법적인 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노동조합 대의원들이 모여서 그 직원 이야기도 듣고 대책을 논의하기도 했다. 역시나 법적으로는 구제할 방법이 없었다. 법으로 보호가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단협에 수습사원 보호 조항을 넣으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지만 싸우기도 전에 이미 마음이 져 있었다. 싸울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6개월에 걸친 단협을 막 끝낸 상태에서 회사와 전면전을 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에게 싸우자고 말하기도 두려웠다. 결국 노동조합은 최소한의 항의와 의견 전달을 하기로 했다. 해당 직원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된 모습을 보이겠다고 하는데, 그럴 기회도 안 주고 계약해지 하는 건 너무하다는 취지로 의견을 전달했고, 회사가 수습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항의했다. 애초에 그런 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 면죄부를 주기 위한 형식적인 제스쳐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대의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분회장인 나는 적어도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다 알고 있는 채로 그런 결정을 내렸다. 결국 싸울 각오가 되어 있던 그 직원은 무기력하게 회사를 떠나야 했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 혼자서 싸우는 것은 얼마든지 싸울 수 있지만, 노동조합이 회사와 싸운다면, 윤구병 대표의 성격상 노동조합을 끝장내려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의 생계가 위협받는다. 나 혼자 생각으로 많은 조합원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다.' 지금에 와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조직을 보존하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건데, 내가 바로 그 일을 한 게 아닌가' 솔직히 모르겠다. 어떤 판단이 정답인지. 분회장이 아닌 나는 좀 더 쉽게 싸우는 입장을 택했을텐데... 분회장인 나는 어떤 판단을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끝없이 부끄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동조합을 위해 수습사원의 해고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져갔다. 그나마 노동조합을 위해서 그랬다면, 덜 부끄러웠을 거다. 나는 노동조합을 핑계 삼았다는 걸 얼마 뒤에 깨달았다. 그 직원이 해고당하고 보름도 안 되어 또 다른 건으로 다른 직원에 대해 징계위원회가 열렸다.(http://blog.jinbo.net/stego/600) 나는 이때 마치 내 일처럼 여기고, 최후의 순간에는 싸울 생각을 했다. 이 둘의 차이가 나를 참을 수 없게 부끄럽게 만들었다. 둘의 차이가 뭘까? 법적으로 이길 수 있는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 차이가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법은 내 판단의 근거가 아니라 내 행동에 대한핑계였을 뿐이었다. 해고당한 수습사원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는데, 징계위에 회부된 직원과는 아주 친한 사이였다. 만약 해고당하는 수습사원이, 나랑 친한 그 직원이었다면, 나는 그래도 똑같은 판단을 하고 행동을 했을까? 아니 그렇게 갈 필요도 없다. 만약 내가 수습사원 당사자였다면?

 

병역거부 운동을 하면서 어떤 조직도 한 개인보다 소중하지 않다는 걸 배웠다. 대한민국보다 김선일 씨의 목숨이 중요하고, 국익보다 파병을 거부했던 이등병 강철민의 양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어야 한다. 적어도 나에겐. 하지만 또한 소위 운동의 지도부가 필요없이 강경한 투쟁만 하다가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는 것이 나쁘다는 것도 배웠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집행부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위원장이나 분회장 같은 대표자들. 아마도 나와 같은 갈등 상황을 수없이 겪었을 거다. 당시 내 판단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 없다. 판단을 이끈 내 속마음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 마음이 없었더라도 어떤 판단을 내렸을지 모르겠다. 만약 당시에 회사와 전면전을 해서 보리 노조가 산산조각 났다면? 그게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도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다만 언제나 그렇듯, 내 경험이 지금 노동조합을 하는 사람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도 나처럼 갈팡질팡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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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창립과 단협2-임금협상

우리는 임금협상이 이렇게 파탄날 줄 몰랐다. 인사권이나 경영권 관련된 논의는 첨예하게 대립하더라도 임금은 그리 어렵지 않게 합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전 해 임금이 한 푼도 오르지 않았고, 노조를 만든 뒤 처음하는 임금 협상이니 만큼 회사가 조금은 부드럽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예측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금교섭은 결렬되어 지방노동위원회 중재 과정까지 거쳤다. 액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노사간의 신뢰가 깨졌고 감정 싸움이 심각해졌다. 보리 분회에서는 감정 싸움을 피해보려고 언론노조에 교섭권을 반납했고, 언론노조에서 와서 교섭을 진행했지만 다 소용이 없었다.

 

임금 협상의 과정은 우리로서는 사측의 불성실과 무지,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질려가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처음 제시안 임금안은 굴직한 것만 이야기 하자면 기본급 20만원 인상이었다. 협상을 하면서 낮아질 것을 고려해 원래 목표치보다 세게 불렀다. 사측은 첫 임금 협상 자리에 빈손으로 들어왔다. 임금에 대해 어떤 의견도 없이, 하다못해 그 해 임금 총액이 얼마인지 조사도 안 해보고 그냥 들어왔다. 사측의 성의 없는 모습에 화가 났지만, 우리가 준비를 많이 했으니 대화의 주도권을 우리가 잡을 수 있겠다 생각하고 교섭을 진행했다. 헌데 윤구병 대표가 우리의 요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우리도 놀랐지만, 사측 교섭위원들이 깜짝 놀라며, 다음 교섭 때 사측의 임금 요구안을 준비해오겠다고 했다.

 

다음 교섭 때 사측이 들고 온 안은 놀랍게도 기본급 3만원(총액 48만원 인상) 인상이었다. (조병범 상무이사는 사측 임금안이 기본급 4만원 인상이라고 계속 우겼는데, 이는 상여급까지 포함시킨 거라서 그렇게 되면 총액 64만원 인상으로 사측 안 보다 높아진다고 알려줘도 계속 우겼다.) 노조는 어이가 없어서 "물론 노조 안대로 될 거라 생각은 안했지만, 20만원 인상을 받아들이겠다고 하고선, 어떻게 일 주일 만에 3만원 인상을 주장하냐"고 물었다. 윤구병 대표이사의 대답은 우리를 경악하게 했다. 지난 교섭 때는 회사가 흑자가 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적자라는 것이다. 기본급과 상여금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무이사, 회사가 흑자인지 적자인지도 모르는 대표이사가 우리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라니. 정말로 실망을 넘어서 절망을 했다. 

 

절망은 계속 되었다. 다음 교섭은 아예 열리지 못했다. 사측이 회사 안을 받지 않으면 교섭이 의미가 없다며 교섭 불참을 통보했다, 의견이 다르니 교섭을 하는 거고, 교섭 자리에 들어와서 조율해야 한다고, 교섭 불참은 부당노동행위라고 이야기 했지만 사측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 다음 교섭이 시작되기 전에 분회장과 대표이사가 독대를 했다. 교섭 자리에서는 서로 체면 차리느라 양보하지 않을 거 같아서였다. 그 자리에선 이야기가 잘 풀렸다. 물론 대표이사가 굶어 죽는 북한 동포와 홍익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의 임금을 들먹이며, 보리 노조가 이기적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통에 짜증이 살짝 났지만 말이다. 대표이사는 회사가 전년도 인건비보다 6% 인상된 액수로 인건비를 책정하겠다고 했고, 자기는 산수를 못한다며 조병범 상무이사와 이야기하라고 했다. 임금 인상 총액이 노조에서 목표했던 것과 비슷해서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임금교섭은 제대로 파탄나기 시작했다.

 

조병범 상무이사가 회사의 안을 정리해 왔다. 그런데, 윤구병 대표이사가 우리에게 말한 것과 다른 게 아닌가. 윤 대표는 우리에게 회사의 인건비를 6% 늘리겠다고 했는데, 조병범 상무이사가 가져온 안은 우리의 임금이 6% 올라간 거였다. 액수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우리는 회사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분노했다. 왜 대표이사와 상무이사의 의견이 다르냐고 따졌다. 헌데 윤구병 대표이사는 오히려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대표이사와 분회장의 독대에서 서로 합의한 것대로 해 갔는데 노조가 이걸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윤대표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노조가 서로 합의한 것을 깨고 다른 소리를 한다고 말이다. 문제는 조병범 상무이사였다. 조 상무가 악의적으로 윤대표가 제안한 것을 살짝 바꾼 뒤 노조가 말을 바꾼 것처럼 몰아갔는지, 아님 윤 대표와 분회장이 합의한 사안에 대해 이해를 잘 못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병범 상무이사가 회사 임금안을 정리하면서 윤구병 대표와 분회장이 합의한 것과는 다르게 정리를 했고, 그 틈에서 노사 양쪽 모두 오해가 쌓이며 감정싸움이 격하게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지금 당시로 시계를 돌이킬 수 있다면, 윤구병 대표가 조병범 상무와 이야기 하라고 했을 때, 그걸 거절하고 계속 분회장과 대표이사가 이야기를 하자고 할 것이다. 꼭 임금 협상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노사 관계에서 조병범 상무이사가 중간에 끼면 말이 이상하게 왜곡되고 바뀌어서 일을 그르치는 경험을 그 뒤로도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교섭은 고성이 오가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윤구병 대표는 이 교섭 때 노조에게 질문한다며 A4 두 장에 질문을 7개를 뽑아왔다. 질문이라기 보다는 공격이었다. 노동조합에서 낸(그리고 그 시점에선 사측도 합의한) 단체협약에 월 근로시간이 209시간으로 되어있었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주 5일 사업장의 소정 근로시간을 적은 것이다. 헌데 윤 대표는 자기가 세어봤는데 한 달에 근로시간이 209시간이 안 된다며, 노조가 계산을 잘못했다고 했다. 법에 그리 정해진 것이라고 했는데, 그건 법이 잘못되었다며 우겼다. 나중에 따져보니, 주 5일 만근하면 하루의 유급휴가가 주어지는데, 윤구병 대표는 그걸 모르고 모두 무급인 날로 계산한 것이었다. 암튼 이 교섭의 대부분은 이런 식의 대화였다. 우리는 더이상 교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교섭권 반납을 통보하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 

 

교섭 자리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배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장이 꼬인 것이다. 낙천적이고 스트레스 안 받기로 유명한 나였는데, 단체 행사에 사람이 안 와도 허허 웃고, 기자회견에 기자들이 한 명도 안 와도 실실 웃던 내가 스트레스로 장이 꼬이는 경험을 하게 되다니. 나도 놀랐지만, 주변 사람들도 놀랐다. 

 

언론노조가 와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회사는 갑자기 지금까지 정액 인상안을 뒤바꿔서 정률 인상안을 가지고 왔다. 보리는 단 한번도 임금을 정률 인상 한 적이 없어서 우리는 의아했다. 회사는, 지금까지 정액 인상으로 상박하후가 너무 심해져 오래 다닌 나이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인 차별을 받는다며 정율인상을 주장했다. 덧붙여 노조의 인상요구안이 정당한 절차를 거쳤느냐며, 노조 안에  반대하는 조합원이 있으니 노조의 요구안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률제 주장이야 뭐 그렇다쳐도 노조 총회를 거쳐 확정한 안을 인정할 수 없다니. 그냥 노조 안을 받을 수 없다고 했으면 열 받지 않았을텐데, 노조의 안이 정당성이 없는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처사라고 생각했다. 바로 반박했다. 노조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 되었고, 혹 반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정리한 안을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지만, 회사는 앵무새처럼 반대하는 조합원이 있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조합원 가운데 부장 한 명이 자기는 정액 인상을 반대하고 정률로 올라가는 게 좋다고 사석에서 대표이사한테 말했는데 그걸 가지고 윤구병 대표가 트집을 잡은 거였다.

 

회사가 정률제를 그 시점에서 들고 나온 것은 정말로 정률제를 관철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노조의 정당성을 흠짓내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하고 서로 양보하고 합의를 하기 위한 게 아니었으니 교섭이 잘 될리가 없었다. 언론노조에서는 싸우기보다는 정률제를 받고 정률제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걸 제안하자고 했다. 회사가 제안한 것은 직급에 따른 차등 정률제였다. 회사의 제안대로 계산을 해보니 전 직원이 평균 8만원이 인상되는 안이어서 일단 기본급 8만원 인상을 요구해보고 안 되면 정률제를 받을 생각으로 교섭에 들어갔다. 언론노조에서 온 분이 노조의 안을 설명했다. "노동조합에서 정액 12만원 인상에서 8만원 인상으로 양보안을 내왔습니다." 윤구병 대표이사가 바로 대답했다. "양보안이 아닙니다." 언론노조 분은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노동조합의 안을 안 받아도 된다. 그건 차차 논의해보자. 그렇지만 12만원에서 8만원으로 내린 건 양보 아니냐?"고 물었다. 윤구병 대표는 "이미 회사가 더 많은 것을 양보했다. 노동조합의 안은 양보안이 아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언론노조에서 먼저 보리 분회에 교섭 결렬 선언하고 지방노동위원회 가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고, 임금 교섭은 지방노동위원회 중재를 거쳐 차등 정률 인상으로 결정이 됐다. 

 

이제 끝인 줄말 알았다. 반 년에 걸친 단협이 이제 마지막 남았던 임금 협상 까지 합의안이 나왔으니 말이다. 교섭을 할 때마다 각 조항들에 합의하고 싸인을 했던 걸을 갈무리해서 보리출판사 첫 단체협약에 최종사인만 남은 시점이었다. 나는 조병범 상무이사에게 쓸데없는 호의를 베풀었다. 노무사한테 한 번 검토라도 받아보시라고. 노무사에게 검토를 받은 뒤 갑자기 조병범 상무이사는 우리가 맺은 단협에서 많은 부분이 후퇴안 안을 가지고 왔다. 보리 단협이 근로기준법보다 좋게 맺은 게 많았는데 그걸 다 근로기준법에 맞춰 돌리자는 안이었다. 우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이미 합의 한 것을 돌리자는 거냐고 따져 물으니 조병범 상무는 노무사의 의견이 이렇다는 거라고 대답했다. 그럼 회사의 의견은 노무사의 의견과 다르냐고 했더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반 년 넘게 어렵게 맺은 단협을 처음부터 해야하나 열불이 났다. 결국 경영지원실장과 회계담당 직원을 조합원에서 제외하는 것만 합의를 해 주고 원래대로 단협을 맺게 되었다. 이 부분은 회사가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고, 실제로 인사 노무 회계를 총괄하는 부서장이 노조 조합원인 경우는 다른 회사에 없기도 했기때문이었다. 

 

단협은 맺었지만, 우리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임금 협상에 아무 준비도 안 해오고, 임금표가 없다며 노조에게 임금 표를 달라고 하고, 회사가 적자인지 흑자인지도 모르고, 노동법에 대해 전혀 모르면서 우기기만 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회사 경영진들의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봤다. 

 

우리가 승리한 단협이었을까?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동조합이 목표로 했던 것을 거의 다 단협에 넣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 회복되지 않을. 그리고 그렇게 자랑스럽던 단협은 현실에선 잘 지켜지지 않았다. 회사는 때로는 단협 내용을 몰라서(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떨 때는 대놓고 무시했다. '이사회가 열리면 그 결과를 공지한다' 같은 조항은 심지어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승리한 단협은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구절을 많이 넣은 단협이 아니다. 단협을 맺은 뒤에도 회사가 그걸 잘 지키게 하는 게 승리한 단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성과가 없던 것은 아니다. 단협을 맺은 뒤 한 달이 지나서 징계위원회(이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했습니다. http://blog.jinbo.net/stego/600)가 열렸다. 회사는 그 직원을 해고 하고 싶었지만 단협을 잘 맺은 덕에 우리는 그 직원을 지킬 수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본다. 그 당시로 돌아가면 어디서부터 되돌릴 수 있을지. 노무사 검토를 말하지 말걸 그랬나? 마지막에 정액제와 정률제를 가지고 싸우지 말 걸 그랬나? 조병범 상무가 들어올 틈을 주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면 우리 태도가 문제였을까? 우리가 너무 회사와 윤구병 대표를 몰아부쳤나? 하지만 아무리 여러 번 생각해도, 단협이 파탄 난 근본 원인은 윤구병 대표가 사실은 노조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태도, 요구안, 조병범 이사의 무지와 왜곡, 노동조합의 판단 미스와 전략 미스. 이런 것들은 노사 관계를 파탄으로 좀 더 빨리 데려갔을 뿐이다. 이 모든 게 없었다고 해도, 결국 노사관계는 파탄이 났을 거라고 생각한다. 파탄이 나지 않으려면 노조에서 윤구병 대표에게 납짝 업드리는 방법 밖에 없다. 우리는 당신과 동등하지 않다고, 동등한 대화 대신 선처와 시혜를 요청했다면 관계가 아주 평화롭게 유지 되었겠지. 

 

첫 단협에서 배운 것은 많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쓴 깨달음이었다. 단협 준비하면서 만난 오마이뉴스 지부장의 말이 단협 내내 계속 생각났다.  "회사의 바닥을 볼 것이다" 이 말은 절반은 맞았지만 절반은 틀렸다. 온전히 다 맞기 위해서는 이렇게 바꿔야 한다. "회사의 바닥을 볼 것이다. 하지만 바닥의 끝은 볼 수 없을 것이다. 바닥이라고 생각한 바로 다음에 더 깊이 파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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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창립과 단협1

 

2010년 7월 27일 언론노동조합 보리출판사 분회 창립총회를 했다. 보통 창립총회를 하고 나서 외부 손님들을 초대해서 축하받는 자리를 따로 만드는 거 같은데, 우리는 한꺼번에 진행했다. 언론노조, 창비, 작은책, 출판노협 들에서 축하를 하러 와 주었다. 덕분에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손님들한테 많이 보여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이 터져나왔을 때, 그걸 판단하기 위한 준거가 회칙이 될텐데, 아직 의결하지 않은 회칙이 유효한지 같은, 그야말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들이 터져나온 거다. 우왕좌왕하긴 했어도,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논의를 해서 잘 처리해 넘겼다. 대부분이 노동조합 결성을 반기는 분위기였기때문에 잘 풀어갈 수 있었지, 만약 나쁜 마음을 가지고 노동조합을 방해하려는 사람이 한 명만 있었어도 총회가 파행으로 치달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창립총회는 회칙 인준, 집행부 선거, 공연(초대 가수와 조합원들 공연), 축하인사 들로 이루어졌다. 당시는 아직 단협을 맺기 전이라 오픈샵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수습사원과 계약직 직원을 제외한 모든 평직원이 가입했다. 간부급(부장 이상) 이상에서는 경영지원실장만 가입서를 냈고, 노동조합을 만드는 동안 계속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부장과 실장들은 가입하지 않았다. 간부급들은 나중에 단협에서 유니온샵 규정이 통과되면서 자동으로 가입이 되었고, 계약직 직원은 역시 단협에서 노조와 회사가 조합원 범위를 합의하면서 가입하게 되었다.

 

총회를 준비하면서 작가들에게 노동조합 창립축하 메세지를 받았다. 보리와 작업을 하는 작가들 뿐만 아니라, 보리와 책을 낸 적은 없어도 조합원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작가들에게도 연대 메세지를 받았다. 박노자, 이계삼, 서정오, 하민석, 김수박, 김성희, 박건웅, 서선미 같은 작가들이 창립축하 메세지를 보내주었다. 이거는 참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의 방패막이가 되어달라는 요청이나 마찬가지였다. 막 출범하는 노동조합이 무슨 힘이 있겠나. 작가들이 공개적으로 지지해주면 회사 밖으로도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고, 혹시나 불안해하는 조합원이 있다면 그 마음을 다잡아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밝힌 작가들도 있었다. 작가들 역시 생활인이기 때문에 그 판단을 존중해주자고 노조 준비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다. 

 

보리출판사 분회를 만든 뒤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단협 준비였다. 단협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조언을 들었다. 그 가운데 오마이뉴스 노조 지부장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보리와 비슷한 규모(10명은 넘고 100명은 안 되는)에다가 회사가 나름의 진보성을 표방하는 곳이어서 들을만한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다. 당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고, 단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지금은 딱 한마디 밖에 기억이 안난다. 막상 단협이 시작되면 회사의 바닥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말... 그 말은 150% 진짜였다. 

 

본격으로 단협 준비를 시작한 것은 10월로 기억한다. 우리는 신생노조여서 단협을 하기 위해 단체협약 초안부터 만들어야 했다. 조합원들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보리 노조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단협을 맺는데 무엇을 중점적으로 맺는 게 좋을지 등을 물었다. 많은 의견이 모였다. 외박을 해야 하는 회사 의무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인사 발령, 그리고 수습사원에 대한 처우 같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조합원들 의견을 바탕으로 단체협약 초안을 만들어야 했다. 음으로 양으로 다른 출판사 노동조합들의 단체협약을 다 모으고, 언론노조에서 단체협약사례집도 받았다. MBC나 한겨레처럼 언론노조 안에서 노동조합이 활발한 곳들 단체협약과, 언론노조에서 만든 모범 단체협약, 다른 출판사의 단체협약들을 살피면서 가장 좋은 것들을 추리되, 보리의 실정에 맞게 수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단협 자리에서 합의를 하면서 양보를 해야할 것이기에 일단은 최선의 안을 만들자고 했다. 

 

대의원들이 수차례 회의와 토론을 하면서 단협 초안을 만들었다. 이때는 참 즐거웠던 거 같다. 우리가 노력하기에 따라 이 회사가 더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말에 따로 시간을 내 대의원들이 모였는데도, 모두들 싫은 기색이 없었다. 단체협약 초안을 만들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은, 노동조합이 회사의 경영권과 인사권을 견제하는 부분이었다. 복지와 관련된 것들은 지금도 과히 나쁜 수준이 아니기때문에 회사에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구병 대표이사가 거의 회사 결정의 전권을 휘두르고, 주주들이나 이사들이 윤구병 대표이사를 견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대표이사의 막강한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인사권 같은 경우는 조합원들이 바로 직접적인 피해를 볼 수 있는 사안이라서 더더욱 신경을 쓰고 우리 힘을 이곳에 집중시키자고 했다. 실제로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에 보리 직원들이 회사를 단체로 나갈 때 표면적으로 드러난 문제도 대표이사의 인사발령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인사권 견제는 이상적인 선언이라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자는 현실적인 측면이 더 컸다. 

 

단협 초안을 완성하고회사에 단협을 시작하자고 공문을 보냈다. 2010년 12(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안 남)에 보리출판사 노사가 첫 모임을 가졌다단협은 예상 외로 길어졌다우리는 사실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윤구병 대표이사가 진보인사로 이름난 자기 명예 때문에라도 밖에다 자랑할 수 있는 단협을 맺어줄 거라고그리고 노조가 생기고 처음 하는 임금협상인데다 작년에 한 푼도 임금이 오르지 않았으니 이번 임금협상은 크게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우리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단협에 들어가면 회사의 바닥을 볼 수 있을 거라던 오마이뉴스 지부장의 이야기가 딱 맞았다.

 

2011년 1월 12일에 첫 단협을 해서, 5월 13일까지 10차에 걸쳐 단협을 했지만끝내 결렬되어 지방노동위원회 중재까지 가게 되었다그 과정을 간단하게 복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단협 처음부터 갈등이 심했던 것은 아니다노사가 의견이 다른 부분도 있었고목소리를 높여 싸우기도 했지만,서로 양보하면서 절충안을 찾아가고 있었다복지나혹은 세세한 부분들은 거의 이견이 없거나한두 번 토론으로 합의점을 찾았다주로 의견이 충돌했던 부분은 역시나 우리가 가장 중점적으로 준비한 부분바로 인사권과 경영권에 대한 조항들이었다그동안 합리적이지 않은 인사발령이 많았기 때문에노동조합에서는 노동조합이 최소한 징계성 인사발령이라도 막을 수 있게 단협에 넣으려고 했다문구 하나하나를 가지고 여러 차례 토론을 했다. ‘모든 인사발령으로 할지 징계성 인사발령으로 할지노동조합과 합의해야한다로 할지, ‘협의해야한다로 할지징계와 해고에 대해서도 날선 토론이 이어졌다회사는 조금이라도 해고의 여지를 두려고 하고노동조합은 해고의 여지를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했다징계에 있어서도 징계를 내릴 수 있는 사안을 엄격하게 제안하고징계의 절차도 까다롭게 하려는 노동조합과 사유나 절차 모두 좀 열어두려는 사측이 끊임없이 대립했다인사권만큼은 아니지만경영권에 대한 부분도 토론이 활발히 이루어졌다우리는 회사의 정보를 노동조합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려고 했고회사는 기밀이라면서 그것을 차단하려고 했다결국 관련 법령을 보여주고 나서야 우리 뜻대로 조항을 삽입할 수 있었다또 회의 구조가 투명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투명하게 하려고 한 부분에서도 노사가 대립했다.

 

아무튼 단체협약을 만드는 일은 10차에 걸친 단협 가운데 5차 만에 모두 끝났다차수로는 5차지만 4차 단협이 사측의 불참으로 결렬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네 차례에 걸쳐서 단협을 맺은 것이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노동조합 입장에서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 

 

단협 과정에서 자잘한 기싸움도 많았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통크게 양보해줘도 될 거를 기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뭐 결과로 보자면단협을 잘 맺었으니 좋은 전략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필요 이상의 기싸움은 노사 모두에 안 좋은 거 같다지금 드는 생각은 싸움은 최소로제대로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다자잘한 거 싸워서 이겨봤자내 기분 좋은 거 말고는 남는 게 없는 것 같다모든 싸움이 그렇듯 잘 지는 게 단협에서도 정말 중요하다.모든 걸 노조의 뜻대로 할 수는 없다회사와 싸워 이겨 무언가를 따 내는 것만큼이나회사에 양보하고 져 줄 것을 잘 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게 말로는 쉽지만 지금 다시 단협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없다. 막상 단협에 들어가면, 피부로 느끼는 공기나 회사의 태도 이런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거 같다. 그리고 이것은 노조 혼자서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회사와 노조 양쪽 모두 감정 싸움을 자제하려고 노력해야 그나마 겨우겨우 피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간혹 노동조합이 서툴다며 질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로는 맞는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도 그게 맞는 거 같지는 않다. 노동조합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회사와 동등한 입장이라면 노조가 서툴게 임하는 것이 단협에 큰 영향을 끼치겠지만, 현실에서는 회사가 훨씬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회사의 의지가 단협의 성패에 영향이 큰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태도만을 문제 삼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힘을 아끼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나는 그래도 에너지가 넘치는 편이라 회사와 싸운다고 지치지 않았는데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르다다른 사람들은 단협에 임하는 책임감부터 분회장과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장 후회되는 것은물론 그리해서 좋은 단협을 맺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내가 너무 많은 발언을 독점했다는 것이다언론노조에서 교육 받을 때도 한 사람만 너무 말을 많이 하지 말고돌아가면서 역할을 맡아서 말을 해야한다고 들었다그런데 실제 단협에서는 순발력 있게 치고나가거나 법 같은 정보를 들먹어야 하는 상황이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말을 다 하게 되었다단기적으로보면 그게 그 싸움에서는 좋을 수 있지만노조를 장기적으로 볼 때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조직은 건강할 수가 없으니까.

 

다음 글에서는 임금 협상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그런대로 수월하게 진행되었던 단협이 임금협상을 하면서 급속도로 파탄났다. 아마 지금 다시 그 시점으로 돌아가도 결과는 똑같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당시 왜 단협이 파탄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은 어땠는지 살펴보고 싶다. 지금 노동조합을 열심히 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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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패한 노동조합 간부였다

 

징계위원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 회사는 해당 직원을 해고하려 했지만, 결국 해고는 못 하고 대기발령을 내린 뒤 부서를 이동(업무는 몇가지를 빼앗아가고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게 9월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날 점심을 먹고 난 뒤 사무실 책상에 앉아 원고를 보는데 이상하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불안한 기운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던 걸까?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2009년 초에 회사를 그만둔 사람들이 쓴 사직서를 인트라넷에서 찾아보고 있었다. 윤구병 대표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사직서들을. 

“형, 모레 저녁에 시간 돼?”

A가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모레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안 돼.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야 늘 있지.”

A의 대답이 서럽게 들린다. 왜 우리 회사는 바람 잘 날이 없을까? 정말 그랬다. 내가 들어온 뒤 단 한 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조금 뒤 A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형 지금은 시간 돼?”

“어, 괜찮아. 휴게실에서 보자.”

휴게실로 가는데 안 좋은 생각이 든다. ‘서두르는 성격이 아닌데, 무슨 일이지?’ 내려가 보니 A가 먼저 와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이야기 한다.

“상의할 게 있어서……. 사실 상의도 아니지, 이미 마음 정했는데……. 나 회사 그만 둬.”

올 것이 왔다. 이런 말이 나올까봐, 떠오른 생각들을 애써 밀쳐냈는데,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딱 들어맞는다더니, 제기랄.

“맡은 일은 마무리 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노조도 그렇구……. 마음 정하고 나니까 형 생각이 먼저 나더라. 형한테 미안해.”

“미안하긴…….”

A는 평소에도 굉장히 신중하고 침착한 친구다. 잠깐 울컥하는 일이 있다고 사표를 쓸 친구가 절대 아니다. 게다가 A는 사람들이 회사 욕할 때도 그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 회사가 가진 장점들을 먼저 보려는 친구였다.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영혼이 파괴되는 기분인 거야?”

“어…….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한 마음도 들고, 근데, 내가 먼저 살아야겠더라구.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잡을 수가 없었다. 영혼이 파괴되는 기분은 바로 내가 요새 느끼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질문은 A에게만 던진 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던진 거였다. 징계위원회를 거치면서, 그 뒤 대기 발령과 컴퓨터를 빼앗는 치졸한 회사를 겪으면서, 반성문을 강요하는 폭력을 겪으면서 우리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던 거다. 노조도 만들었는데 우리가 열심히 하면 회사도 바뀌지 않겠냐고 말 할 수 없었다. 나도 확신이 안 서는데 누굴 설득할 수 있겠나.

 

노조 만들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노동조합 창립하고 나서  1년 2개월 동안 9명이 나갔다. 직원 수가 고작 서른 명 살짝 넘는 회사에서 말이다. 그 가운데는 자기 꿈을 찾아 새로운 곳으로 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사에 지치고 치여서 떨어져 나갔다.

가장 슬픈 건, 노조 활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들부터 나간다는 거였다. 함께 교섭위원 했던 사람들이 나갔고, 대의원 했던 사람들이 나갔다. 단체교섭을 하면서, 회사와 갈등을 겪으면서, 일반 조합원들보다 더 심하게 감정싸움을 하다 보니, 안보고 살면 좋을 추악한 모습들은 너무 많이 보다 보니 견딜 수 없었던 거다. 2010년 봄에 교섭위원을 하던 대의원 한 명이 회사를 그만두었고,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던 A는 9월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A가 그만두고 한 달 뒤 영업부 대의원을 하던 팀장도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가 민주적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부터 가장 먼저 상처받고 그만두었다. 어느 회사나 그렇지만 노조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회사일도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꾸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노조뿐만 아니라 회사에게도 커다란 손실이다. 회사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면서도 상관없다는 건지, 그냥 두 손 놓고 있었다.

 

A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자리에 올라와 곰곰이 생각해봤다. 우리는 회사가 좀 더 민주적으로 운영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노조를 만들었다. 저마다 노조에 동참하는 뜻은 조금씩 달랐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더불어 회사를 부당하게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 실제로 우리는 대표이사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했다고 해고당할 뻔 했던 직원을 노동조합의 힘으로 보호했다. 하지만 해고당하지 않은 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이 자꾸만 많아졌다. 우리는 겨우 해고를 막았는데, 사람들이 이 회사에서 몸과 마음이 떠나는 것까지 붙잡을 능력이 없었다. 

 

나는 이 무렵 지독한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대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왜 노동조합을 만들었던 것일까? 조합원들이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게 하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는 많은 조합원을 잃고 있었고, 그만큼 노동조합의 힘도 약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보호한 건 누구였지? 우린 대체 무엇으로부터 조합원을 보호하려고 했던 거지?’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내 스스로 실패한 노동조합 간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무력감과 열패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참 슬프게도 타인의 아픔이었다. 어느 술자리에선가 쌍차 해고노동자 이창근 씨를 만나게 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료를 잃었다 해도, 그이들이 회사를 나갔을 뿐 얼마든지 얼굴 보고 술 한 잔 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쌍차 노동자들은 동료를 잃는 다는 건 다시는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기운빠져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곰곰히 생각해본다. 당시에, 징계위원회에 회부 되었던 직원에 대한 징계가 불발이 되고 회사가 그 직원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안기며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면서까지 괴롭힐 때, 우리가 밖으로 드러내면서 싸웠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A는 그만두지 않았을까? 영업부 팀장도 계속 회사에 다녔을까? 아니면 우리가 두려워했던 일, 결국 회사와 노조가 전면전을 하게 되고 윤구병 대표이사는 평소에 자신이 공언한 대로 보리의 책을 빼 가고 그래서 회사는 오히려 더 기울게 되었을까? 모르겠다. 당시에 우리가 싸웠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당시 우리 판단은 이 일로 싸우는 것은 노조의 명운을 걸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우리가 아는 윤구병 대표이사의 성격상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어차피 해고는 막았으니 더 이상 싸움을 키우지 말고, 일단 노조 내부를 단단하게 하자고 생각했었다. 이게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안다. 노동조합이 만능이 아니라는 거 잘 안다.  노동조합은 만드는 것보다 만들고 난 뒤 잘 운영하는 게 더 어렵다는 것도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배워서 알게 됐다. 어쩌면,조합원들이 회사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 두는 건, 노동조합 차원에서 어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좀 더 오랫동안 이 회사에서 함께 즐겁게 일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함께 할 사람들이 떠나는 마당에 노동조합에서 어찌 할 수 없는 문제라고 결론 내버리는 건 참 쉽고 무기력하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정답은 없겠지만, 만약 지금 다시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나는 싸우는 쪽을 택할 거다. 싸워서 노동조합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회사가 망하더라도, 싸우겠다. 물론 분회장이라면 훨씬 더 신중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싸웠을 거 같다. 사람들이 다 나가고 난 뒤에는 대체 노동조합을 해서 뭐하냐는 생각때문이다. 물론 싸우지 않았을 때의 결과를 알고, 그게 너무나 답답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다. 열패감은 이제와서 더 이상 없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실패한 노동조합 간부라고 생각한다. 이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동 조합을 만들고 나서도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그만두었으니까. 그리고 나조차도 그만두었으니까. 

 

누군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있을까? 그냥 내 이야기를 발판 삼아서, 당신은 실패한 노동조합 간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 밖에 할 게 없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당신들을 응원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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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 노동자에 복종을 요구하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백수로 지내며 시간이 많다보니 이런 생각을 한다. 이번 글은 내가 생각하기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행동에 대한 글이다.

 

원래는 노조 만든 뒤 단협을 맺은 과정에 대해 쓰려고 했는데, 그린비 회사가 편집 상의 실수와 직장 질서 문란을 이유로 조합원을 징계한 것이 자꾸 떠올라 글 순서를 바꿨다. 표적 징계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편집 상의 실수는 사실 노동자의 잘못이 맞다. 그렇기 때문에 그린비 노동조합에서도 그 부분은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문제는 직장 질서 문란이다. 나는 회사가 요구하는 것이 실수에 대한 책임 추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회사가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가 무릎 꿇고 잘못했습니다, 이런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10년 7월쯤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대표이사가 전 직원에게 보리 책 리스트를 나눠주며 읽은 책에 표시를 해서 제출하라는 업무지시를 내렸다. 이 조사를 왜 하는지, 이 자료가 어떻게 쓰일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다.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직원들이 반발한 까닭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책을 읽었다는 것을 기계적으로 조사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싸구려 프로그램에서 독서왕 가리듯 하는 조사에 책 만드는 사람의 자부심으로 반발심이 생긴 거다. 두 번째는 이 자료가 어떻게 쓰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내가 보리에 들어가기 직전, 윤구병 대표이사가 취임하고 나서 납득할 수 없는 인사발령을 내리고 그로 인해 보리를 오랫동안 다닌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나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교정교열 숙제 비슷한 것을 해 오라고 하면서 갈등이 심해졌다고 들었는데, 그런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조합에서 이런 위기의식을 공유했지만, 당시 단협이 끝난 바로 뒤라, 공식 대응은 하지 않고 개개인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인트라넷에 이 조사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물었다. 윤구병 대표이사는 보리 직원 모두가 보리 책을 홍보해야 하는데, 누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알아야 홍보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고 대답했지만, 전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결국 각자 알아서 대응하기로 했다. 어떤 사람은 최대한 성의껏 작성해서 내고, 어떤 사람은 대충 작성하거나 거짓으로 작성해서 내기도 했다. 이런 조사의 문제와 대표이사의 업무지시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편지를 써서 같이 낸 사람도 있다. 그 가운데 백지로 낸 사람이 있었다.

 

대표이사는 백지로 낸 직원에게, 정말로 한 권도 안 읽었다는 건지, 아니면 업무지시를 거부한 것인지 경위서를 쓰라고 했다. 그 직원은 자기가 왜 백지를 써서 냈는지 편지를 써서 내고 경위서도 냈다. 회사의 대응은 징계위원회 출석 요구서였다. 단협 28조(징계) 4,5,6,항을 어긴 것이 징계사유라고 했다. 참고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4. 타인에게 성희롱 또는 언어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했을 때.
  • 5. 근무에 관한 신고, 제출을 허위로 하거나 직무를 현저하게 태만히 했을 때.
  • 6. 고의나 과실로 회사에 막대한 재산 손실을 끼쳤을 때.

 

하지만 출석요구서 어디를 봐도 그 직원의 어떤 행동이 위의 조항을 위반했는지 적혀있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조병범 상무이사에게 찾아가, 어떤 행동이 징계 대상인지 밝히라고 했다. 조병범 상무는 그건 징계위원회에 들어오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해당 직원한테 소명서를 제출하라고 하면서, 대체 무슨 행동이 잘못인지 이야기 하지 않으면 어떻게 소명을 하느냐고 따졌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징계위원회 구성상 노동조합이 반대하면 중징계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징계위원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징계위원회에는 윤구병 대표이사와 사외 이사 둘, 그리고 사내 이사 한 명이 사측으로 참석했다. 그 직원의 무슨 행동이 문제냐고 물으니 대표이사에게 언어폭력을 행했다는 것이다. 어떤 표현이 언어폭력이냐고 물었더니, ‘기계적 충성도 조사’ ‘쌩뚱 맞은 업무지시’ ‘강압적이다’ 이런 표현에 윤구병 대표이사가 심한 모욕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다소 감정이 섞인 표현에 기분이 나쁠 수는 있지만, 그게 언어폭력이라니. 평소에 입바른 소리 잘 하고, 노측 교섭위원으로 맹활약 한 그 직원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을 했다. 내 생각에 힘을 실어준 건 사측 징계위원들의 입장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해당 직원을 정직 또는 해고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단협 위반이 아니라 ‘대표이사가 그 직원과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윤구병 대표이사가 그 직원이 싫으니 쫓아내려는 것이었다. 애시 당초 노조에서 반대하면 중징계는 불가능하다. 회사도 그것을 알고 있다. 아마 징계위원회에 회부 하는 거 자체를 징계로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중징계는 노동조합의 반대로 부결 되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정말 폭력적인 일들은 그 다음부터 일어났다. 징계위원회가 끝난 다음 날, 회사는 해당 직원을 갑자기 대기발령을 내려 일을 빼앗아 갔다. 징계성 대기발령이라고 항의했지만 회사는 9월에 개편이 예정되어 있어서 그런 거라고 했다.(그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9월에 인사 개편을 단행했다.) 그러더니 조병범 상무이사가 그 직원의 컴퓨터를 빼앗아갔다. 나는 그것을 글쓰기교육연구회 여름 연수를 가는 차 안에서 전해 들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때 그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노트북을 가져와서 쓰니 왜 회사에서 개인물품을 쓰냐고 노트북도 쓰지 못하게 했다. 인격적인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일단 참자고 했다. 해고는 막았으니까. 컴퓨터를 쓰지 못하니 책을 읽고 있는데, 이번에는 회사에서 왜 다른 회사 책을 읽느냐고 책을 못 읽게 했다. 그러면서 보리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 내라고 했다.

 

한편으로는 노조의 동의 없이도 가능한 징계, 경위서 제출을 요구했다. 컴퓨터가 없으니 손으로 써서 냈다. 그런데 조병범 상무이사가 다시 쓰라고 했다. 반성의 기미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경위서가 아니라 반성문이었다. 이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일단 표현을 바꾸어서 다시 냈다. 그랬더니 또 다시 쓰란다. 이런 상황이 된 것에 유감을 표한다고 했더니, 유감은 경위서에 쓰일 수 있는 표현이 아니라며 다시 쓰라 했다. 그래서 그 표현을 바꾸어서 다시 냈더니 또 다시 쓰라고 했다.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첨삭을 했다. “이러이러 해서 잘못했습니다.”라는 표현을 적으라는 것이다.

 

윤구병 대표이사가 바라는 것은 경위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반성을 바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복종을 바라고 있었다. 우리가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에게 진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가 마음으로는 반성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양심의 문제였다.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을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개인의 양심을 회사가 폭력으로 짓밟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문득 병역거부가 떠올랐다. 병역거부를 하면서는 내 양심에 어긋나는 대답을 강요받은 적이 없었는데, 회사 다니면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되다니. 쓴 웃음이 났다. 나는 절대로 회사에 복종의 뜻을 밝힐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당 직원도 회사에 복종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결국 경위서를 다시 쓰기는 했지만 회사가 원하는 내용을 넣어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노조는 언론노조의 도움을 받아서 반성을 강요하는 경위서는 양심의 자유 침해라는 대법원 판례를 모아서 회사에 전달했다. 회사는 노조가 잘못된 예를 든다고 하며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더 이상 경위서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보리에서 노사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어쨌든 아무리 지지고 볶고 싸워도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대화는 결국 동등한 대상끼리 하는 게 아닌가. 윤구병 대표이사가 노동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복종이라면 그는 우리를 동등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도 어쨌든 노동조합은 사측과 결국에는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조직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윤구병이 대화 자리에 나오도록 힘으로 강제해야한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꼭 윤구병 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복종은, 경영진들이 가장 바라는 게 아닐까? 출판계 노사갈등을 보면, 노동조합이 어떤 문제를 제기하면 회사는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감정싸움으로 번지다가, 결국에는 회사가 노동조합을 길들이려고 하거나 복종을 요구하게 된다. 우리교육, 나라말이 그랬고, 보리가 그러고 있고, 그린비도 그런 쪽으로 가고 있는 거 같다. 회사가 노동자를 징계하는 까닭은 노동자가 잘못을 해서 그럴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노동자가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스스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윤구병 대표이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진심이 담긴 충성도 아니고, 이윤을 창출하는 근면하고 성실한 노동도 아니고, 그저 복종이었다. 사실 복종만 하면 회사는 평화로워질 게 분명했다. 우리가 복종만 하면 적당한 떡고물이 주워질 거고, 복지나 임금도 오히려 더 좋아질 수도 있었다. 분회장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해 봤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분회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복종을 한다. 강한 권력이 두려워서 그러기도 하고, 맞서 싸우는 것이 귀찮아서기도 하고, 그냥 지금 누리는 것들이라도 지키고자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 복종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나에게 납득시키려면, 다른 거는 다 양보해도, 임금이니, 복지니 이런 건 다 회사에 양보해도, 복종만은 할 수 없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그것은 복종을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불복종이 아닐까? 기회가 되면 이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다.

 

* 예전에 이 일과 관련해서 인권오름에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에는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실명을 쓰지 않았다. 

http://sarangbang.or.kr/bbs/view.php?board=hrweekly&id=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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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을 만들다2-노동조합 준비 과정

수습사원이 해고당한 일을 겪고 나서, 자연스레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우리는 조심스레 서로 의견을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노동조합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해(2009년) 겨울 쯤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뜻에 찬성하는 사람들 7~8명이 우리 집에 모였다. 그때까지는 따로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잠깐씩 나누었는데, 처음으로 다 같이 모이게 된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가 그날 우리 집에서 비공개로 모인 것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 그런 식으로 비공개로 몇 명만 모인 것은 잘못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과론이지만, 어차피 얼마 안 가서 노동조합 만드는 사실을 아예 오픈해서 진행해도 큰 문제가 없었는데, 처음부터 지나치게 보안을 신경 쓰면서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소외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출판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 부분을 이야기 해 주고 싶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아예 비밀로 할 것이 아니라면, 그냥 처음부터 확 공개해서 동네방네 노동조합 만드는 과정을 다 떠들고 다니라고. 그 편이 노동조합이 힘을 갖기도 쉽고, 회사가 방해하기도 어렵고(물론 교묘하게 방해하겠지만) 조합원들이 모두가 더 적극으로 노동조합에 참여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물론 당시에 조심한 까닭이 있었다. 윤구병 대표이사가 진보인사로서 체면 때문에 대놓고 노동조합 만드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노동조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윤구병 대표이사는 내가 회사에 들어가기 직전에 보리 노동조합 출범을 축하하는 글을 썼다. 당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준비하고 있던 것을, 이미 만들어졌다고 잘못 알고 쓴 글인데, 그 글이 노동조합에 대한 윤구병의 시각을 보여주었다. 윤구병은 노동조합을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노동자들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자기 잇속만 차리는 이기적인 행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글에서 그는 보리출판사의 자본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이 아니며 이윤이 나면 주주들이 가지는 게 아니라 사회로 돌리는 그야말로 '공익'이라면서, 노동자들을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보리 주식의 98%를 가지고 있다는 '공익위원회'(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가, 보리가 살림을 잘못해서 공익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돈 되는 책의 출판권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나는 윤구병의 글이 노동조합을 축하해 주는 게 아니라, 책을 바깥으로 빼 갈 수도 있으니 너네 노조 하려거든 알고 해라, 이렇게 협박하는 글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보리출판사 매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던 ‘달팽이 과학동화’와 ‘개똥이 그림책’ 전집을 다른 출판사에 넘기는 것을 보았으니 그 협박이 단순한 협박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노동조합에 대해 공식적으로 이야기가 된 건, 우리 집에서 모이고 얼마 지나지 않은 회사 엠티 때였다. 2009년 윤구병 대표이사가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 두었고, 그 자리에 들어온 신입사원이 수가 제법 되었다. 신입사원들끼리 엠티에 가서 보리정신에 대해 토론을 하고 오라고 엠티를 보내준 것이다. 우리는 실체가 없는 보리정신에 대해서 토론하는 대신 노동조합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대부분이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공감했고, 우리는 노동조합을 본격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회사 인트라넷에 노동조합을 만들자며 전체 모임을 공지하고 첫 공개 공식 모임을 가졌다. 사람들은 모두들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공감했고, 그 자리에서 부서별로 노동조합 준비위원을 뽑았다. 준비위원회는 몇 차례 회의와 토론을 거치며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갔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드는지, 필요한 건 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기업별노조와 산별노조, 유니온샵과 오픈샵의 차이점, 기업별 노조와 산별 노조의 차이점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우리가 보리에 들어오기 직전에 보리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다가 회사를 나간 선배도 만나고, 다른 출판사 노동조합이나, 노동조합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때마침 작은책에서도 노동조합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작은책은 보리에서 독립해 나가 보리와 관계가 밀접하기도 하고, 대주주가 사실상 같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나서도 여러 가지를 공조하기로 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나는 이때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대학 다니면서, 노동법 한 번 읽어보지도 않고 후배들한테 노동자 계급이니 혁명이니 떠들어 댔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주장하면 경제투쟁이라 얕잡아봤는데,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준비위원회 안에서 어느 정도 공부가 끝난 뒤로 예비조합원들 교육을 계획했다. 노무사를 불러 예비조합원들과 노동법 교육을 받기도 하고, 창비 출판사 노조 분회장을 불러 출판사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회사의 협조를 받았는데, 업무시간에 회사 공간에서 교육을 진행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줬다.

 

노동조합 결성이 수월하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우선 회사 운영위원회에 들어가는 부장급 이상 간부들을 노조원으로 받아들일지에 대해 의견을 정하지 못했다. 간부들을 경영진으로 봐야할지 노동자로 봐야할지 판단하기 어려웠고, 이 사람들이 노조에 들어와서 노동조합을 위해 활동할지 윤구병 대표를 위해 활동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간부들이 노동조합에 들어오면 평직원들이 할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했다. 결국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을 막지는 않지만, 적극 권유하지는 않기로 했다.

 

윤구병 대표이사가 먼저 유니온 노조를 제안하면서 간부들도 노동조합 준비모임에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우려는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 간부들은 대놓고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조합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노동조합을 꼭 지금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묻기도 하고, 노동조합은 쟁점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쟁점이 뭐냐고 묻기도 했다. 이미 노동조합을 만들기로 뜻을 모으고 추진을 하는 중에, 논의를 되돌리는 듯한 질문을 하는 의도가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 부서장은 자기 부서 신입 사원들만 불러 불러서 노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용석이 하자고 해서 하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고 한다. 간부들이 방해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리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그리 행동했을 거고, 자신의 행동이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방해하는 거라는 걸 몰랐을 거라 생각한다. 보리의 경우는 처음부터 노동조합이 기정사실처럼 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흔들리지 않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노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이 훨씬 지난했을지 모른다.

 

노동조합 준비 과정을 돌이켜보면 아쉬운 점이 두 가지 떠오른다.

 

먼저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이 생겼다는 거다. 물론 일부러 소외한 것은 아니었다. 사소한 오해가 쌓이기도 했고, 우리가 많이 못 챙기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직원이어서 그랬던 게 부끄럽다. 친한 사람이었으면 내가 개인으로라도 챙겼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그 직원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다. 노동조합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부분을 가장 신경써야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의 힘은 단결에서 나오는 건데, 조합원이 노조가 자기를 소외시킨다고 느낀다면 큰 문제가 아닌가.

 

그리고 회사 간부를 조합원에 포함시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결과론이다. 나중에 자세히 쓰겠지만, 간부들은 조합 안에서 우리의 뜻보다는 윤구병 대표이사의 뜻대로 움직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윤구병 대표이사가 노조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회사 간부를 노조에서 무조건 빼야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마다 간부들의 업무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딱 정해진 정답은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굉장히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상적으로 생각했다. 잘 되는 경우를 가정했다. 결과적으로 간부들을 조합원에 포함 시킨 것이 노조에게도 그 간부들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배제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함께 가는 것이 서로에게 더 좋을지, 아니면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게 서로가 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꼭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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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을 만들다1-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계기

 

나는 2009년 7월 하순에 보리출판사에 입사했다. 근로계약서에는 입사일이 8월 1일로 되어 있는데, 그건 행정편의상 그렇게 작성한 거고 실제로는 7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출판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몰랐고, 편집자가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전과자를 받아주는 업계가 출판계라는 이야기를 듣고 원서를 냈는데 아주 운좋게 한 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나 노동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으며 다니자는 생각이었다. 보리에 노동조합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출판사들에 노동조합이 이렇게 드물다는 것도 몰랐다. 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이나 편견도 그런 생각에 한몫을 했다. 노동조합 운동은 재미없어 보였고, 무겁게 느껴졌으며, 너무 위계적이고 조직적이라 답답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병역거부 운동 초창기에 대체복무제도 서명을 받으러 노동자 집회 다니면 "남자라면 군대에 가야지!" 같은 말을 하며 서명을 안 해주는 노동자 아저씨들이 많았는데 그 경험 탓도 있으리라. 아무튼 그때만 해도 내가 노동조합 활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된 사건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당시 보리 직원들은 절반이 넘게 그 해 봄부터 들어온 신입사원들이었다. 윤구병 대표이사가 취임한 뒤로 많은 직원들이 회사를 나갔고 그 자리에 사람을 계속 뽑았던 것이다. 다들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서로 서먹서먹하기도 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바닷가로 2박3일 엠티를 간다고 했다. 엠티 준비팀이 꾸려지고 그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엠티 준비를 했다. 나는 그때 입사한 지 한 달 밖에 안 된 신입사원이었기 때문에 적응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회사 다닐 때였다. 

 

엠티 가기 하루 전날, 회사 안이 웅성웅성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서 선배한테 물어보니, 나보다 두 달 먼저 들어온, 8월 말에 수습평가 예정이던 직원이 짤렸다는 것이다. 낯선 회사에서 친구 하나 없는데, 나한테 탁구 치자고 먼저 말해줘서 참 고마웠던 동갑내기 직원이었다. 그날 퇴근한 뒤 서울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몇몇 선배들과 모였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이리저리 전화를 해 봐도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뒤숭숭한 기분으로 엠티를 갔다. 

 

엠티에 가서 첫날인지 둘째날인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윤구병 대표이사와 회사 직원 전체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당연히 바로 전날 짤린 직원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윤구병 대표이사는, 그 직원이 수습사원이기 때문에 계약해지이지 해고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직원은 보리출판사가 새롭게 기획중인 사업을 위해 뽑은 직원이었다. 중간에 그 사업이 중단되고, 그 사업을 맡고 있던 사람이 나가게 되었는데 그 직원은 이 사람이 데려왔던 직원이라면서 보리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말했다. 내 귀에는 그게 그 직원이 남아있음 회사 기밀을 유출할 수 있으니 잘라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사실 보리는 정보가 잘 공유되지 않는다. 많은 결정이 이사회에서 내려지지만 단 한 번도 이사회 회의 결과가 제대로 공지된 적이 없다.(심지어 나중에 단협으로 이사회가 열리면 결과를 공지하기로 했는데도 말이다) 때문에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노동자들이 알지 못한다. 이사회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회사가 어디에 돈을 쓰는지, 어떤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스파이 노릇을 하고 싶어도 아무 정보가 없다. 게다가 그런식으로 직원을 의심한다면 우리 모두 의심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쫓겨난 그 수습사원은, 자기가 맡은 일이 없어지면 다른 부서로 옮겨서 일해도 좋다고 이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한 상황이었다

 

우리는 바로 반박했다. 계약해지나 해고나 노동자 처지에서는 똑같은 거다. 인트라넷에 기밀이 될만한 정보는 없고 앞으로도 그런 것들은 비밀글로 올리면 되지 않냐. 대표이사 말대로라면 그 수습사원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스파이 노릇할 수 있는 거 아니냐. 그 수습사원이 엠티 준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엠티 하루 전날 자르는 것은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여기에 대해서는 엠티를 다녀와서 사람들과 정이 들면 계약해지 당했을 때 상처가 더 클 수 있다며, 정말이지 눈물겨운 배려심 돋는 대답을 했다) 많은 직원들이 그 자리에서 윤구병 대표이사에게 따졌지만, 윤구병 대표이사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다 제 책임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물론 그 뒤로도 내가 보리를 나오기 전까지 수습사원이 정직원이 되지 못한 사례는 두 차례나  더 있었다. 그리고 윤구병 대표이사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회사가 사업을 하다가 중간에 여러 이유로 그 사업이 중단될 수는 있다. 실패할 수도 있다. 그 책임은 당연히 그 사업을 주도했던 경영진이 가장 크게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 보리에서는 수습사원이 잘리고 그 수습사원을 데리고 있던 부장이 감봉 되는 것 말고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 사업을 시작했던 대표이사는 입으로만 책임을 졌고, 맡아서 진행하던 상무이사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것이 내 생애 최초의 회사에서, 들어간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겪은 최초의 해고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부당해고가 명백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실제로 그런 걱정도 들었다. 저리 쉽게 수습사원을 자르는데, 누구든 저렇게 잘려 나갈 수 있지 않은가. 물론 내가 잘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별로 두려운 건 없었다. 윤구병이 나를 자른다고 해도 윤구병과 맞서 싸우는 게 두렵지 않았다. 

 

나한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진보 인사로 이름난 윤구병이지만, 나 또한 내 병역거부자 친구들과 인권활동가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이 나를 도와줄 거라는 생각에 무섭지 않았던 거다. 회사 밖에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생각은 이후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비폭력 트레이닝 덕분에 나는 권력자들에게 겁을 잘 먹지 않게 되었다. 엄청나게 대단해 보이는 권력(자)들이 사실은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약자가 싸워서 권력을 이기기는 쉽지 않겠지만,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다면 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는, 대표이사가 단협하면서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협박을 해도 쫄지 않았다. 

 

이 일 하나 때문에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보리에 노동조합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처음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었던 선배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스스로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어쩌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활동을 하게 됐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병역거부자인 내가 노동조합 활동가가 된 데 어떤 연결 지점이 있지 않을까? 고민을 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희미하게나마 평화와 노동을 이어주는 고리를 떠올렸다. 열쇳말은 바로 '폭력'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평화운동이란 모든 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경영진이 노동자에게 행사하는 여러 종류의 폭력을 직간접으로 겪었다.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지만, 물리력보다 약한 폭력을 쓴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적나라하고 때로는 교묘했다. 때로는 괴롭힘이었고, 때로는 협박이었고, 때로는 쫓아내는 거였다. 그 수습사원의 해고는 이곳의 권력도 폭력을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평화주의라면, 모든 폭력에 저항하려면, 회사가 노동자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맞다. 물론 그 방법이 꼭 노동조합 활동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그 당시 나는 노동조합을 떠올렸던 것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내가 그동안 노동조합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많이 달라졌다. 어떤 것은 내 생각이 맞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내가 오해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노동조합의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번에 글을 써 가면서 이런 생각들을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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