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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8/16
    빨갱이..(1)
    free-vahn
  2. 2004/08/09
    [종교권력] 발기문(draft ver) (부제 : 조심해!)
    free-vahn
  3. 2004/08/05
    화씨 9/11
    free-vahn
  4. 2004/08/05
    나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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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08/05
    러브액츄얼리 최고의 명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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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08/04
    국가 정체성 이슈의 '정체'가 궁금함..
    free-vahn
  7. 2004/08/02
    over lap
    free-vahn
  8. 2004/08/01
    데리다의 해체
    free-vahn
  9. 2004/07/29
    기득권... 필요악인가?
    free-vahn
  10. 2004/07/27
    별 하나의 염세
    free-vahn

빨갱이..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레드 컴플렉스는 꺼지지 않았다. 빨갱이란 단어는 냉전을 벗어난 전후후세대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의 리트머스로 남아있다.
단순히 냉전적 사고를 떠나서도 이 '빨갱이'란 단어는 여지없이 적용된다.
'빨갱이'란 하나의 바로미터가 아니다. 빨갱이는 파쇼다..


아직도 여전한 리트머스
데리다를 놓고 말했지만, '그렇다/아니다'의 입장강요는 상당히 파쇼적이다. 바로 전에 있었던 친노/반노의 논쟁이 그렇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이 친노라고???
내가 인공언어로 증명해줄께 -(탄핵 옹호자) = 친노 , -친노 =  반노 = 탄행 찬성자, 그러므로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탄핵을 찬성한다' ............ 맞냐???
난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았는데 열라 탄핵 반대 했는데???

이번엔 자연언어로 증명해줄께..
자민련 유운영 아저씨의 논리다. ('SBS 대토론 이것이 여론이다' 참조) '반미를 외치니까 사회주의다.' 반미를 외치는 유럽권은 사회주의인가??

리트머스는 아주 유용한 화학 기제일 수 있지만 빨강/파랑 밖에 표현하지 못 한다. 화학에선 산성과 알카리성을 대분류할 수 있지만 사회는 오로지 두 가지 색깔만 있는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는 (전여옥 대변인이 발하는 것 처럼) '네/아니요' 로 답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가령 이런 질문 "대한민국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나요? 네/아뇨로 답해주셈~"

이런 흑백의 리트머스를 들이데는 논리는 냉전적 사고방식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 논리는 첨예한 기득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단정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빨갱이의 정체가 뭘까?

마녀사냥, 혹은 메카시즘

가끔 기독교인과 어떤 논쟁을 벌일때 접하는 경우다. "왜 욥의 시험과 상관없는 욥의 자녀는 아버지(욥)의 시험 때문에 죽어야 하나요?" 또는 "한국 기독교가 일제시대때 친일한거 아시나요??" 난 이거 무지 궁금하거든... 근데 이들은 곧바로 공격한다... 사실 공격도 못 하고 화를 낸다... 대부분 이런 논조다. 기독교를 시험하지 말라고... 아니 왜? 난 궁금했는데? 왜 나의 시험이 당신의 시험이 되는가? 그걸 떠나서 대답해달란 말이에요...!!

빨갱이를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빨갱이와 '파랭이??'를 구분할 줄 모른다. 더구나 그 구분이란 것 마저도 작위적이다. 내가 기독교의 예를 든 이유가 있다. 자신의 믿음, 신념이 바로 그 빨갱이의 기준이다. 지극히 작위적이다. 혹은 자기 해석적이다.

사실 '빨갱이'의 목적은 피아식별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응징..., 영화 [넘버 쓰리]에서 송강호의 논조와 똑 같다.
"니....니들..내말..자..자..잘들어...내..내가 하늘색깔이...빨간색..하면 그때부턴 무조건 빨간색이야....이..이..이건 노..노..노리끼리한 색이지만...내가..빨간색!! 하면 이것두 빨간색이야...응?..이 십새끼야...응?..내가 현정화라그러면..무조건. 현정화야...내말에....토.토.토.토토토토다는 새끼는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배반형...무슨말인지 알겟어?...앞으론 직사시켜버리겟어..직사!!.....

빨간색은 그들이 무조건 빨갱이라면 빨갱인거다... 그래서 '직사' 시키는 거다..

중세 때 마녀사냥이 그랬다. 어떤 질서가 흐트러지면 그 질서를 바로잡기위한 희생양 '마녀'가 필요했다. 그때 신부들이 진짜 그 마녀가 악마를 부르고, 부정한 동물의 피로 제사를 드려서 죽였던가? (대부분의 '마녀'는 종교의식과 아무 상관이 없는 과부들이었다.)
그냥 신부가 빨갱이라니까 빨갱이인거다. 그들은 빨간색, 파란색에 대한 분류 근거, 확인을 대지 못 한다.

미국의 메카시즘이 아주 대표적인 역사적 예이다...

그러니까.. 빨갱이는 단지 니네들이 빨갱이라면 빨갱이인거다....!!

왜 빨갱이인가???

아까 주제와 관련있지만 빨갱이의 목적은 자신의 철학적, 체제적, 논리적, 정치적... 이런 위기를 당했을 때 도망가기 가장 좋은 장치가 '빨갱이'이다.

즉, '빨갱이' 운운하는 사람은 자신의 논리가 허술하던가, 자신이 위기에 있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혹은 모 정당 처럼 '흠집내기' 위한 방법...

이 '빨갱이' 수법은 너무나 쉽게 잘 먹혀들어간다. 내 생각과 다르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고 물고문하고, 발톱뽑고 .. 하면 될 뿐이다. 그러면 알아서 빨갱이가 된다.


빨갱이 취급 많이 당한 자로서 바람..

제발 좀 이성과 논리 갖고 싸우자. 아니면 싸움의 법칙을 확실히 하자. (머리끄댕질 할지 논쟁을 할지..) 그리고 몰릴 때 어줍잖게 빨갱이 운운하지 말자...

난 빨갱이도 아니고 적그리스도도 아닌데.. 자꾸 '사상검증' 시키니까 짜증나자나.. 그럼.. 니네들도 사상검증해봐.. 이 빨갱이들아..!!


ps> 또 들린다. 나보고......... '역시 쟤 빨갱이었어..' 하는 소리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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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권력] 발기문(draft ver) (부제 : 조심해!)

마징가Z와 메칸더V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아무리 마징가Z가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인조인간 로보트고 무쇠팔 무쇠다리 로케트 주먹'이라도 메칸더V는 '원자력 에너지에 힘이 솟'고 '용감히 싸운'다. ^^
원자력 에너지는 무쇠도 파괴한다. 그리고 마징가Z, 메칸더V ..... 알파벳에서 'Z'보다 'V'가 먼저다..
결론, 메칸더V가 더 싸움 잘 한다.

종교적으로 누가 옳고 그르다.. 라는 싸움.. .대부분 신앙의 대결은 믿음과 신념, 자신의 가치를 재료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서 처럼 논리나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옳고 그름이 명백치 않다.
불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보수기독교단과 여호와증인과 똑같다.
즉,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믿음'의 체계이기 때문에 이성의 칼로 난도질 하기에 너무 형체가 투명치 않다.
아퀴나스가 그랬던가? 종교는 이성(과학)과 신앙(믿음)이 양쪽 날개를 펴고 나는 새와 같다고...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이성'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시론을 작정하고, 의지를 갖고 시작하려는 이유는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는 종교인(기독교인)이고 우리의 접근법, 논의, 교의를 똑같이 아끼기 때문이다.
퇴화되지 않으려면, 아니 더욱 정당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그것들에 대해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정의도 필요하고 질서도 필요하지만 "정의보다 우선되는 것은 질서"라고 밝히고 있다.
종교의 영역에선 질서보다 정의(진리)가 우선이다. 왜? 이것은 내세와 모든 질서의 근거가 되니까...
그리고 진리(정의)가 없는 신앙이 존재할까?
가령 내가 믿는 교의과 진리가 확실치 않은데 종교를 위해 목숨도 버릴 각오(순교) 가 가능한가?


난 우리가 믿는 신(하나님)이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구태한 당위적 접근법에 반대한다. 그리고 근거를 알 수 없는 권위적 '율법'도 부정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종교(기독교)란 수동적, 정적 메커니즘에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력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있는, 살아 팔딱 뛰는 유기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역사적으로 본받을 만한 선진들이 바로 이렇게 살았으니까...
그래서 야심차게 해보고 싶은 것, 개혁, 수정, 보다 옳은 진리를 찾는 것...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져 과거의 메커니즘과 가치들만 붙든 채 점점 벌어지는 시대와의 간극을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이 타락했네.. 한탄하며 세상과 절연하고 살겠다는 비장하기까지 한 태도.. 그리고 초기 기독교 부흥기 때 있었던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단어들과 거리가 먼 보수의 자리를 꽤차고 있는 우리의 현주소.
우리는 과거의 도그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악용/오인된 습속도 버리지 않는다.
이때 [넘버3] 보스가 하신 말 "세상은 눈깔 튀어나오게 팍팍 돌아가는데 넌 언제까지 재떨이 타령만 하고 있을꺼야....!! "


세상에 불화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남들처럼' 살길 바란다던 어머니 말씀이 또 생각난다.  하지만 비장하게, 대차게 가야지.. (기질이 이런 걸..)


ps. 제목에도 썼지만 이 문서는 초안이고 언젠가 체계를 갖고 진지하게 수정하겠다..

 + 정말 쪽 팔린 일련의 사건들..
화이트 앤젤, 기독교 극우 근본주의자들의 초등학교 단군상 참수 사건, 김선일씨 죽음을 둘러싼 온누리 교회의 태도... 그리고 이명박 시장의 서울 헌납... 그 외에도 조직적이고 개인적인 기독교인들의 스스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들...

정말 같은 기독교인인게 쪽 팔리다..
다른 사람이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면 러시아 정교나 루터교라고 말하고 다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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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9/11

나도 봤다.
추악한 부시의 이라크를 대상으로한 전 세계 유린/기만전을 낱낱히 폭로하고 있다.

종로나 신촌에 출몰하는 서양인들 팔짱끼고 다니는 '일부' 아가씨들(사실 난 이들을 속으로 양갈보, 양공주라고 비하한다.. 물론 '일부'다.. ^^;) 그 Mr.들하고 필히 관람 부탁 바람...!!

무고하게 미국 무기에 코가 깨지고 머리가 찢어지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조직적 테러를 목격하고 다시 한번 반전주의를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이렇게 상처받고, 친구와 가족의 죽음을 목격하고, 불구가 된 아이들은 미국인들의 차세대 주적이 될 차세대 알카에다 전사들이 된다. 이 끊을 수 없는 피비린내 나는 상속관계 !!

전쟁은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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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딴지일보 (http://www.ddanzi.com/new_ddanzi/movie/4074/mo4074_best_051.asp)

최근의 전 세계적인 반전, 반부시 정서가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란 궁극의 갑빠와 결합, 마침내 초절정 정치적 올바름 영화의 화신처럼 되어버린 <화씨 9/11>이 드뎌 울나라에 상륙했다.

제목과 달리 당 영화, 9.11테러 자체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음이다. 2000년 미대선과 9.11테러, 아프가니스탄 공습과 이라크 침략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부시와 그 똘마니들이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 행한 광범위한 가라와 사실 은폐가 어떻게 진실을 왜곡했는가, 고걸 알기 쉽게 갈켜주는 게 당 영화의 목적되겠다.

그리고 느무느무 당연하게도 당 영화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정치적 효과는 마이클 무어 스스로도 주장하듯, 부시 쉐이를 백악관에서 끌어내리고, 혼자서 카우보이 놀이하며 자빠질 수 있게 텍사스로 돌려보내는 데 있다.

이 같은 주장을 위해 당 영화 대략 세 가지의 방식을 이용한다.

첫 번째, 다큐의 본래적 성격이라 할 수 있는 현실고발기능을 십분 발휘,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무척 궁금한 다양한 자료화면들을 통하여 빈 라덴 가문, 사우디 왕가, 탈레반 지도자들과 부시 가문간의 석유와 돈을 매개로 한 유착관계를 뽀록 낸다.

두 번째, 부시와 그 똘마니들의 무능과 가라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적재적소에서 편집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9.11 테러의 순간, 그 소식을 듣고도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부시의 모습을 시간 경과별로 자막까지 넣어가며 친절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라던가, 부시일파가 9.11의 책임을 이라크로 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라크와 후세인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편집한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 백악관과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전쟁광 쉐이들과 이들에 의한 피해자들간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고도의 정밀폭격으로 민간인 피해는 없을 거라는 럼스펠드의 인터뷰 뒤에 미군의 폭격으로 아수장이 된 이라크 민간인 지역의 처참한 광경과 가족을 잃은 이라크 여인의 절규가 이어지는 장면. 500여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고작 1명의 자식만이 참전한 미국의 의회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입대하는 것 외에 별 희망이 없는 미국 빈민가 모습간의 대비가 그것이다.

당 영화, 단순히 내용만 보면 졸라 진지하고 무겁고 지루할 것 같지만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이거 만든 마이클 무어란 넘 다큐멘터리 재밌게 만들기로 유명한 넘이다. 우덜이 좃선 데리고 놀 듯, 이 넘 주특기가 권력 가진 꼴통들 염장 달구기다. 당 영화에도 꼴통들 뻘짓하는 화면에 조롱 섞인 나레이션을 깐다거나, 법도 안 읽고 어처구니 없는 법을 통과시킨 의원넘들에게 직접 법을 읽어주는 이벤트를 감행하는 등, 이 넘 영화의 전매특허가 고스란히 살아있음이다.

무엇보다 이라크 파병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작금의 울나라 상황에서, 울나라 정부가 가담하려는 일이 뭔 짓인지 똑똑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 영화,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이런 전차로 당 영화를 온 국민 관람가 등급인 베스트에 봉하는 바이다. 이상.


베스트/워스트 선정 특별위원회
(
movie@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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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회찬 난중 일기에서 '영화 <화씨 9/11>을 관람하였다' ( http://www.nanjoong.net/board/view.php3?club=&mode=view&id=866&page=1&num=85&nowpos=71&type=&sermun=&qu=§ion=election&tb_name=notice )

7월 19일 (월) 맑음


공식일정이 없어 종일 의원실에 있는데도 시간이 모자란다.

찾아오는 기자들이나 손님들을 반갑게 맞지만 마음은 부담스럽다.


용산미군기지 이전비용에 대한 감사청구 기자회견을 22일 갖기로 최종결정했다.

언론들은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감사원 감사를 최초로 청구하는 데 모아져 있다.

일부 언론은 이전비용의 적실성과 한미간 부담 비율 등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이 사안은 거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부일 뿐이다.


법사위 활동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역대 활동 자료에 대한 분석을 마치면 관련단체, 전문가 면담과 현장탐방을 추진키로 했다.

이 모든 것을 8월 초까지 마쳐야 한다.


영화 <화씨 9/11>을 관람하였다.

개봉 전 시사회의 성격을 갖기는 했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 예상하지 못했다.

연예부 기자들은 민주노동당이 <문화>를 통해 정치를 말하는 게 신기한 듯 묻는다.


사실 문화는 배부른 사람들의 관심사라는 생각이 아직 진보진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진보정당에 있어서 문화와 문화적 접근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계급사회에선 <지배계급의 문화가 지배적인 문화이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문화>를 자포자기하는 근거로 오용되어선 안된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것은 <진실의 힘>이자 <예술의 힘>이다.

지하철에서 이 영화홍보전단을 나눠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민주노동당 동료들은 밀려든 관객의 열기에 고무되었다.

좌석이 모자라 통로에 앉고 일부는 서서 보는 상황이 되자 단병호의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벽 쪽 통로에 기대서서 관람하였다.


그의 결벽증에는 인간의 체온이 담겨 있다.


서서 보느라 혼났다는 아내와 함께 모처럼 일찍 귀가하였다.

올해도 여름휴가를 갖지 않을게 뻔해보였던지

아내는 처제들과 며칠 쉴 계획을 추진 중이다.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다.


성각스님께서 글씨를 보내 주셨다.

마음은 이미 남해 망운암 중턱에 올라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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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씨네 21 리뷰 ( http://www.cine21.co.kr/kisa/sec-003100100/2004/07/040720121421014.html )
Key ‘스토킹 무비’의 대가 마이클 무어의 안티-부시 프로파간다 영화.

올해 칸영화제가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궁지에 몰린 영화미학에 돌파구를 마련해줄 대안적인 영화형식으로서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에? 심사위원장이었던 타란티노의 궁색한 변명이야 어찌됐건 <화씨 9/11>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누가 뭐래도 확실히 정치적인 제스처였다고밖에는 달리 판단할 길이 없다. 무어는 화씨 911도가 “자유가 불타는 온도”라고 말했다지만, 생각건대 그것은 영화가 타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온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는 기꺼이 미학을 찢어발기고 논리를 포기하면서 프로파간다의 길을 선택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화씨 9/11>은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엔 한참 못 미치는 영화이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부시 대통령의 온갖 행태들에 반감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원할 법한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또 들려주는 영화다. 부시 가문과 빈 라덴 가문의 긴밀한 유착관계, 자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하기 위해 공화당 정부가 취한 온갖 비열한 술수들, 명분없는 전쟁에 투입됐다 죽거나 다친 젊은이들, 졸지에 집과 가족을 잃고 분노에 차 있는 이라크 민간인들 등등 <화씨 9/11>이 다루고 있는 이러한 것들은 조금도 새로운 것은 없지만 여하간 우리가 공적인 미디어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강도 높게, 또 선동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로저와 나>(1989)에서부터 이미 분명해졌듯이 그의 장기는 브리콜라주(bricolage)와 캐리커처(caricature), 그리고 무엇보다 스토킹(stalking)에 있다. 즉 뉴스화면, 극영화, 그리고 직접 촬영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조합하고, 특정 사안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 하나를 골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퍼부어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황색 저널리즘의 좌파적 전유라 할 만한 것이다. 또한 무어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그 특유의 과장과 조롱, 풍자에 의해 변형되어 지극히 희극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화씨 9/11>은 (9·11 테러 자체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장시간의 암전 뒤에 뉴욕시민들의 놀란 표정을 하나씩 보여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무어의 전작에 비하면 약간은 조심스러워졌고 또 신중해진 게 사실이다.

<화씨 9/11>에서 무어가 제기하는 비판과 주장은 넓게 보면 대부분 수긍할 만한 것이다. 솔직히 감히 누가 그의 견해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어떤 점에서 무어의 논변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일종의 ‘우물에 독 타기’(poison in the well)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문제는 그의 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개되는 방식에 있다. 무어는 <로저와 나>, <볼링 포 콜럼바인>(2002), 그리고 <화씨 9/11>에서 언제나 쟁점이 될 만한 핵심적인 문제를 곧바로 제기하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수다는 종종 지엽적인 것으로 향하고 또한 지엽적인 것을 과장함으로써 원래의 논지를 흐리곤 한다. ‘무능한’ 대통령 부시가 백악관 참모들과 결탁하여 9·11 사태에 뒤이은 대중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게 된 경위를 비판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여기엔 위험천만한 제노포비아(xenophobia)적 사고 또한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무어는 9·11 직후 미 정부가 빈 라덴 가문의 일원들이 국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치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해, 부시 가와 빈 라덴 가의 오랜 유착관계를 파헤치고 나서, 갑자기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이 미국 경제의 7%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가- 전형적으로 마이클 무어적인 치기어린 질문, “만일 그들이 돈을 다 빼내간다면 우린 어떻게 될까요?”- 를 강조한다.

결말부에 이르기까지 <화씨 9/11>은 9·11 사태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치의 역학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침묵한다. 대신 순박하고 애국적인 시민들이 국가권력의 거짓에 속아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가를 고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점에서 <화씨 9/11>은 미국인의, 미국인에 의한, 미국인을 위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보수적인 백인 민주당원임을 자처하는 한 여성이 이라크로 파병된 아들을 잃고 나서 백악관을 서성이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감동적이라기보다는 감상적이다. 무어 자신이 상원의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식들을 이라크로 보내라고 권유하는 것은 <화씨 9/11>의 논리적 허점들을 다분히 치졸한 방식으로 메워보려는 시도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화씨 9/11>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이 얄팍한 지성과 조우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거의 모든 폐단을 안고 있는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일씨 피살사태 및 이라크 파병문제 등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재의 상황하에서라면 이 영화가 어느 정도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제

보수주의자들, 무어에게 이의를 제기하다

제작과정에서부터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화씨 9/11>은 이제 미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연 이 작품은 부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때 마이클 무어의 반대자들이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들을 모아 영화제를 개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제는 미국 내 거물급 보수주의자들의 후원을 받아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올해 9월9일에서 11일까지 댈러스에서 열릴 예정이며 대략 24편 정도의 영화가 상영될 것이라 한다.

이 영화제를 기획한 이들은 텍사스에 거주하는 변호사 부부인데, 남편인 짐 허버드는 영화제를 구상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언제나 영화 속의 문화적, 정치적 메시지들에 흥미를 느껴왔다. 솔직히 영화 속에 나타난 그러한 메시지들은 언제나 진보주의적이었다. 근 40년 동안 좌파들이 독점해왔던 이러한 영화들에 대해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려 한다.” 허버드가 현재 교섭 중인 작품 가운데는 <마이클 무어는 미국을 증오한다>(마이클 윌슨)와 <마이클과 나>(래리 엘더) 같은 영화들이 있는데, 이 두 영화의 연출자들은 모두 무어가 자신의 영화에서 그러했듯이 그와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한편 마이클 무어는 이런 영화들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영화제에서는 노골적인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들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들도 상영될 예정인데, 역시 영화제의 보수주의적 색채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작품들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여간 <화씨 9/11>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급기야 다큐멘터리 영화계에 대대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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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유

흔히 '리버럴'이란 입장을 보이면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의 '자유'를 얘기하지만 나에게 있어서의 자유는 ROCKER나 히피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적 자유다.


사실 나에게 자유란 실존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모든 개념과 대상에 대한 정의를 내가 내리겠다는 자유... 타인으로 부터 나의 사상과 관념을 나의 기호와 취사를 간섭받지 않고 독자적 울타리에서 주유하고 싶은 자유..

하지만 '신자유주의'적인 이 대한민국, 그리고 더 '신자유주의'적인 서울에서 자유주의자로 살기엔 너무도 답답하고 심신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다.

문화적, 사상적, 정치적, 경제적 일괄 시스템에서 자유주의자는 언제나 익셉션으로 처리된다.

아래 해체론을 말하면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이 일괄 시스템에서 '다름'을 주장하는 데엔 치졸한 보복이 따른다.
수능식 비효율적 걸러내기 필터를 거부함에 따른 보복, 신앙적 양심에 의해서 다른 형태의 복무의 의무를 담당하겠다는 집단을 깜빵 보내는 보복,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겠다는 경계인에게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때리는 보복, 직장에서 불합리한 상사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데 따르는 보복.... (이런 공감대로 인해 내가 요즘 이들에게 유달리 관심을 보였나 보다..)

버나드 쇼가 말한 "사상의 자유는 그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터무니없다고 할지라도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 로자 룩센브루크가 말한 "나에게 자유란 언제나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
이렇게 다양성과 이질성을 관용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다시 자연인으로서의 '자유'로 돌아가서... ^^;
락커는 자유를 찾기 위해 저항한다. 자유는 거기에 따른 투쟁이 따른다. 그러므로 자유는 흔히 말하는 것 처럼 말랑말랑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고생해서? 얻은 자유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목적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유로운 나'에 의미를 둔다.
그렇다면 이 자연인으로서의 자유란 무엇일까?
방해받지 않고 관여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탐닉할 수 있는 상태를 바랄 것이다. 이것은 나름대로의 열반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리버럴'이란 단어는 일반 통념적인 수식이 아니다.

나에게 자유는 빠삐용 가슴의 나비처럼 그냥 '나 나름 자체'로의 자유다..



이 형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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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액츄얼리 최고의 명장면!!!!

 


『Say it's carol singers』 캐롤 불러주는 사람이라고 말해요

『with any luck, by next year』 운이 따라준다면 내년엔

『I 'll be going out with one of these girls..』이 중에 한명과 사귀게 될거예요

『To me you are perfect』 나에게 당신은 완벽해

『and my wasted heart will love you』 그리고 헛된 마음인거 알지만 당신을 사랑할겁니다

『until you look like this...』 당신이 이런 모습이 될때까지...

『Merry Christmas』 메리 크리스마스


충분해...난이걸로 충분해...
러브액츄얼리 최고의 명장면중 하나. ㅋ 감동적인..!!! ☆이나엘http://blog.naver.com/jypark19퍼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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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영화 보면서 이 친구가 젤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남 좋아하는 거... 못 할 짓이다. 게다가 친구의 여친이라면...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어가냐?"란 말도 있지만 아직까진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남(그 여자의 남친)을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다. - 근데 진짜 죽고 못 살정도로 사랑한다면 ??


그나저나 이번 크리스 마스에도 동네 후미진 선술집에서 승봉/경원이랑 소주나 마시고 보내겠지... ㅠ.ㅠ


여하튼, 이 여자 웃는 모습 무지 예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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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정체성 이슈의 '정체'가 궁금함..

참고 기사 : 여야 정체성 논란 숨고르기 <== 클릭

sbs, 토론회 보셨습니까? - 각골명심 / jnbkorea <== 클릭

사실 요즘 사회문제에 대해서 별로 귀를 열어놓고 살진 않지만 각 방송사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정체성 식별'류의 토론을 벌이는 걸 보면 정체성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정체성의 접근법이 좀 외곡되고 있다고 본다.
'너와 다른 나', 경쟁, 사상의 차이, 우열, 옳고 그름.. 등의 상대적, 대결적 정체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도화선으로 여러 (정체성과 무관한) 의미부여가 난무하는 듯 싶다.

"난 당신과 달리 성장을 통한 분배 주의자다. 그리고 당신의 발본색원 태도보다 질서 속에서 안정, 합의를 좋아한다....."

이와같은 스탠스의 목적이 뭘까?
피아식별, 적과 나를 구분, 지지자 식별 및 확보.. 같은 것이 아닐까? 혹은 정쟁..

왜 정체성을 논할 때 상대를 개입시켜야 하나?
정체성이란 독자적 아이덴티티 아닌가?

'난 최상훈이구요.. 하얀색을 좋아하구요.. 바다가 좋아요.. 그리고, 실존주의자로 살고 싶구요......'

이런거 아닌가????????

난 모.. 그렇다~~
정체성 이슈, 정체성 논란의 정체가 궁금하다.. 그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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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lap

‘노무현대통령의 방주’에는 누가 탈것인가?

노무현대통령은 과거사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노무현표 역사세우기 작업이 ‘전면전’을
선포한 셈이다.


노무현대통령은 의문사진상위 문제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것이란 모든 방송의 예측을 깨고
의문사위는 모든 공권력의 피해를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빨치산 전력도 민주화 운동의 증거로,
간첩전력이 있는 사람이 전현직 군 장성을
조사한 것도 적절했다고 밝힌 셈이다.
방송도 놀랐을 발언이다.


노무현대통령은 이제 친일, 유신을 넘어서
모든 국가공권력은 곧 부당하고 부정하고
불의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려 하고 있다.
그야말로 나라의 뿌리를 흔들고
대한민국호를 침몰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은 무엇인가?
경제의 뿌리는 이미 뽑혀가고 있다.
시장경제는 크게 위협받고 있다.
정치의 체제도 지금 침몰직전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위협받고 있다.

이제 ‘노무현대통령의 방주’에는
과연 무엇이 실리며 누가 탈 것인가?
함께 타길 거부하는 국민들의 불행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노무현대통령의 ‘무서운 역사세우기’가
이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2004.  7.  31

한  나  라  당   대 변 인   전  여  옥


갑자기 오버랩되는 일화.............



나치 선전장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말이다.


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기에게 단 하나의 문장만 주면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예를 들어 누군가 "나는 아버지를 좋아한다.." 라고 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오직 아버지만 사랑한단 말인가.. 조국은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지금 위기에 처한 이  조국을 구하기 위한 민족의 군대는 사랑하지 않는단 말인가... 당신은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조국을 배신할 수 있는 자다..보내버려.. !!!!!!!!!!!! "



괴벨스와 아줌마와 다름이 뭔가?
난 아줌마의 '무서운 무대포 몰아치기'가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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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해체


언어관의 전환

전통적인 언어관은 근원주의, 토대주의라고 하는 언어관에 의해 체계를 이룬다. 언어를 하나의 대상에 대한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유명론이나 경험론, 실증주의등은 언어를 통해 '객관적인 실재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본질론이나 합리론, 현상학은 언어를 '우리의 의식안에 현존하는 관념의 표현'으로 본다.

이와 같은 언어관을 토대주의(a foundational theory of language)라고 말하며 언어의 의미가 외적 실재나 내면의 의식상태 혹은 언어외적인 근원에서 유래한다는 세계관을 갖는다. 데리다는 이러한 토대주의를 해체한 반토대주의(antifoundationlism)의 입장에서 언어 자체에 대한 의미부여, 본질 찾기가 아닌 용어들간의 관계(차이, 대립, 상관)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이론은 이와 같은 토대주의적 전통 철학의 서열적 모순을 까발리고 이를 전도(reversal)단계와 제거(displacement) 단계로 구성하여 설명한다.

소쉬르의 기호학적 관점인 빠롤( 능기 : 개별 발화자의 발화행위)와 랑그( 소기 : 언어사용의 사회적 규칙) 간의 고정된 구조( "모든 언어는 고정됐다!")를 해체하는 도구로 차연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용어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의미가 부여되며 이를 통해 그 구조(의미, 규칙)는 끊임없이 지속된다.)


차연(differance) - 스펠링 안 틀렸음.. ^^;

차연은 의미에 대해 기호들간의 공간적 차이(spatial difference)와 시간적 지연(temporal deferment)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고정적이고 완결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흐름,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순환한다.
즉, 차연 = 차이 + 지연

왜 '차이'가 아닌 '차연'인가?

'차이'는 근본적으로 우열, 이분법 관계를 함의하고 있다. ( ex : SKY IS DIFFERENT!! - 스카이가 더 좋다는 의미를 내포) 즉, '차이'는 본질적인 두 개 이상의 대상간의 '우열' 혹은 '서열'의 세계관에 반해 '차연'은 시공에 대한 '다름'으로 전도시킨다.

아메리카 주변의 어느 작은 섬에선 부모가 50세가 되면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고 한다. 그것은 재화가 한정된 작은 섬에서 인구가 높아지면 재화에 대한 분배 문제로 불화가 생기기 때문에 종교를 빌린 인구 안정화 정책이다. (이들은 내세를 믿었으며 내세엔 죽은 형상 그대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따라서 적당히 건강한 수준의 50세) 우리나라나 일본의 고려장과 매우 유사하지만 서양인들이 이들의 습속을 보았을 때 경악했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 시간과 공간의 다름에서 오는 관념의 '차이'


개인적으로 나는 많은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떨 땐, 사람들이 너무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어 내가 변탠가 착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다름'에 대한 토론은 곧바로 '우열'로 전이된다. 그래서 싸우게 된다. 냉전적 이분법..
'다름'에 대해 '우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자신을 '우'에 놓기 위해 싸우게 된다. (주관된 우열의 법칙을 객관화시키기 위한 에러상황이다.)
나는 데리다를 살짝 배웠으므로 싸우고 싶지 않다. 어떤 의사결정 상황이 있을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 난 평화주의자다..!

편 가르기 그리고, 회색빛 세상 보기

이게 불만이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하라는 협박, 그렇다/아니다, 참/거짓, 적/아... 이렇듯 조급하게 규정하기를 강요하는 분위기..
이렇게 흑백TV 속에 사는 사람들(그리고 시스템)은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 선택의 이면엔 옳고/그름, 즉 '다름'이 악마처럼 도사리고 있다. (선택과 동시에 바람처럼 나타나서 줄곧 심판한다.) - 난 솔직히 4지선다에 자신이 없다.. ^^;


데리다의 차연에서도 보듯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흑과 백 사이에 수많은 회색들이 있다. 퍼지이론은 이 사실관계에서 시작한다. 1(true), 0(false)로 모든 연산과 표현으로 처리되는 컴퓨터를 통해 인간의 사고를 모방할 수 없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인공지능 분야의 이론이 Fuzzy 이다. 퍼지 이론에 따르면 모든 논리는 모호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1과 0 사이에 수많은 0.n을 인정하고, 어떤 규정이란 결국 근사 추론 (approximate reasoning)에 의해 정리된다고 한다. 차연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관념들은 해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관념의 수단 또한 해체되어야 한다. 해체 작업이 진행되다 보면 언젠간 새로운 지평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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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 필요악인가?

독사의 실험

실제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본건데..
독사에게 생쥐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물려봤다. 그리고 사람 손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물리게 했다.
독사에게 위협(사람 손)을 줄 때 나오는 맹독의 농도와 독사가 먹이(쥐)를 잡을 때 나오는 맹독의 농도 와 질량 차를 비교해 보기 위한 실험이다.
결과는 흥미롭게도 사냥을 할 때의 맹독의 농도와 질량이 자신을 보호를 할 때의 그것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시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시민사회 이론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 Prison Notebooks》에서 계급간의 관계, 특히 부르주아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 행사하는 통제의 의미로서 헤게모니를 설명하였다. 그가 말하는 헤게모니는 한 계급이 단지 힘의 위력으로써만이 아니라 제도, 사회관계, 관념의 조직망 속에 동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이다. (http://kbank.nate.com/qna/KnowRead.asp?TableCode=16&questionID=89747 참조)

헤게모니는 사회관계에서 얻어지는 기득권을 말한다. 건전한 헤게모니란 구성원들간의 합의와 이해, 수용에서 자연스럽게 획득되며, 그 과정에서 정당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쉽게도 헤게모니를 잡은 집단, 개인은 위의 건전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없는게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집단간의 갈등은 이런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의 갈등으로 해석해도 불편하지 않다.

다시 그람시의 '시민사회'이론을 빌리자면 그람시는 좌파들에게 상황이 불리할 때에는 사회 곳곳에 진출해 진지전을 펴다가 결정적인 순간 기동전으로 전환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라고 한다.
오히려 헤게모니를 가진 우파?가 이 전술을 더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조용히 진지전으로 자신의 지지, 생존 기반을 다지다가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상황이 포착되면 여지없이 기동전을 펴 자신의 이권과 패권을 정당화한다.


지역주의 ???????

한국사회는 과거로 부터 첨예한 동과 서의 갈등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한국의 지역주의 계보는 박정희 정부의 경상도 개발 프로젝트에서 소외된 지역 그들 중 가장 힘이 있었던 호남지역이 권리찾기를 위해 뭉친다. 반사적으로 영남지역도 자신의 혜택을 뺏지기 않으려 뭉친다. 이렇게 형성된 연대의식은 더욱 응집력을 갖게 되고 정치인들은 이런 긴장관계를 더 부채질한다.
마치 십자군 전쟁의 본질은 종교간의 갈등이 아니듯 지역주의란 허울을 뒤집어쓴 체 빵을 위해 싸우는 형태이다.

다음은 한계레에서 홍세화씨와 최장집 교수의  [4·15 총선과 한국민주주의] 대담 내용중 일부이다.
(http://www.hani.co.kr/section-001065000/2004/04/001065000200404122153507.html)

"지역주의는 껍데기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가 진행될 때는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사회세력과 구질서로부터 혜택을 받거나 구질서를 지지했던 사회세력으로 뚜렷이 구분됐습니다. 민주화가 됐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더 강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지역주의는 이런 보편적인 갈등구조를 국지화하거나 분해, 전치시키기 위해 구질서를 옹호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동원된 면이 컸습니다. 권위주의냐 민주주의냐 하는 문제를 지역주의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면 문제가 왜곡되어 나타나고 실제와 다른 내용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민주화 이후의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큰 갈등과 균열이 있었는데 이것이 지역주의라는 해석의 틀을 거치면서 한 바퀴 돌아 지역간 갈등으로 뒤바뀌면서 균열 구도가 흐려졌다고 볼 수 있죠..."

4·15 총선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 사실이지만 헤게모니를 가진 집단의 완고한 기득권 사수 기동전은 내셔널 지오그래피의 독사의 실험을 연상케 한다. 우리는 너무도 생생한 정치쇼를 목도했다. 아니다. 우리는 시청자가 아니라 배우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더러는 적극적으로 더러는 소극적으로...
다시 상기할 부분은 기득권을 가진자들은 우리보다 더 적극적이었다는 것...

즉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는 의지(먹이를 위한 독의 양)와 서민들의 생존의지(보호를 위한 독의 양)의 차가 이 정도 되지 않을까?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관찰된 바에 의하면 소용자들에게 똑같이 빵과 우유를 나눠줬는데 1주일이 지나자 빵과 우유를 더 가진자와 덜 가진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분배의 문제? 어디든 불평등은 존재한다. 기득권이 필요악이라면 문제는 어떻게 불평등을 납득시키냐? 불평등을 최소화 하느냐? 정당한 불평등을 만드냐?의 문제...
즉 시스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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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하나의 염세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별 하나의 쓸쓸함과, 별 하나의 동경과.
별 하나의 시와, 별 하나의 염세, 염세, 염세...


내겐 그랬던 것 같다.
꼭 정량적으로 시간을 꼬집긴 힘들겠지만 1990년대 대략 10년간은 지독히 pessimism으로 일관했던 것 같다.
실어증 환자 흉내내는 것도 아니고... 어느 순간엔가 염세 마저 지겨워지던 때가 있었다.
누구나 가슴 한 켠엔 고독이란 화초를 키우고 살 것이다. 애써 그 화초를 은닉하고 밝게, 그렇게 살 것이다. (안 그러면 내가 더 억울하자나.. 씨~ 왜 하필이면 지금 월광 소나타가 들리는거야...??)

외로움은 환경이 주는 거고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는 거란다.
그렇다면 내 90년대의 편린, 아니 지금도 해방되지 않은 이 눅눅한 기분도 환경이 / 아니면 주체적으로 지고가는 것일까?

억지지만 [별 헤는 밤]에 이런 우울함을 이입해보면 아마도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는 까닭" 때문일거다. (나 아직 청춘이네..?? @.@)
어차피 세상이 익사이팅하고, 쿨하지 않을거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적막한 새벽 3시10분, 월광 소나타 같은 노래를 들으며 음침해지는 기분을 억제하기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다.


술도 다 깼는데.. 뭘 쓰고 싶었던거지???????????????????????????

맞다!!! 여기서 질문!! [레옹]에서 마틸다가 말 했던...

"어른이 되어도 이렇게 살기가 힘든건가요?"  (역시 난 아직 청춘!! 캴캴캴~)





별 헤는 밤

시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그래도 윤동주 시인에겐 패, 경, 옥이란 여친이라도 있었지....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린 이유를 창씨계명 이후 한국 이름을 (바닥에) 쓰고, 얼른 지웠으리란 추측이 있지만.. 지금 난 센티해진 자아를 황급히 정리해버린 걸로 해석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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