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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마징가Z와 메칸더V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아무리 마징가Z가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인조인간 로보트고 무쇠팔 무쇠다리 로케트 주먹'이라도 메칸더V는 '원자력 에너지에 힘이 솟'고 '용감히 싸운'다. ^^
원자력 에너지는 무쇠도 파괴한다. 그리고 마징가Z, 메칸더V ..... 알파벳에서 'Z'보다 'V'가 먼저다..
결론, 메칸더V가 더 싸움 잘 한다.
종교적으로 누가 옳고 그르다.. 라는 싸움.. .대부분 신앙의 대결은 믿음과 신념, 자신의 가치를 재료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서 처럼 논리나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옳고 그름이 명백치 않다.
불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보수기독교단과 여호와증인과 똑같다.
즉,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믿음'의 체계이기 때문에 이성의 칼로 난도질 하기에 너무 형체가 투명치 않다.
아퀴나스가 그랬던가? 종교는 이성(과학)과 신앙(믿음)이 양쪽 날개를 펴고 나는 새와 같다고...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이 '이성'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시론을 작정하고, 의지를 갖고 시작하려는 이유는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는 종교인(기독교인)이고 우리의 접근법, 논의, 교의를 똑같이 아끼기 때문이다.
퇴화되지 않으려면, 아니 더욱 정당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그것들에 대해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는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정의도 필요하고 질서도 필요하지만 "정의보다 우선되는 것은 질서"라고 밝히고 있다.
종교의 영역에선 질서보다 정의(진리)가 우선이다. 왜? 이것은 내세와 모든 질서의 근거가 되니까...
그리고 진리(정의)가 없는 신앙이 존재할까?
가령 내가 믿는 교의과 진리가 확실치 않은데 종교를 위해 목숨도 버릴 각오(순교) 가 가능한가?
난 우리가 믿는 신(하나님)이 기운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구태한 당위적 접근법에 반대한다. 그리고 근거를 알 수 없는 권위적 '율법'도 부정한다.
적어도 내가 아는 종교(기독교)란 수동적, 정적 메커니즘에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력이 적나라하게 들어나 있는, 살아 팔딱 뛰는 유기체라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역사적으로 본받을 만한 선진들이 바로 이렇게 살았으니까...
그래서 야심차게 해보고 싶은 것, 개혁, 수정, 보다 옳은 진리를 찾는 것...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져 과거의 메커니즘과 가치들만 붙든 채 점점 벌어지는 시대와의 간극을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이 타락했네.. 한탄하며 세상과 절연하고 살겠다는 비장하기까지 한 태도.. 그리고 초기 기독교 부흥기 때 있었던 개혁이니 진보니 하는 단어들과 거리가 먼 보수의 자리를 꽤차고 있는 우리의 현주소.
우리는 과거의 도그마를 인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악용/오인된 습속도 버리지 않는다.
이때 [넘버3] 보스가 하신 말 "세상은 눈깔 튀어나오게 팍팍 돌아가는데 넌 언제까지 재떨이 타령만 하고 있을꺼야....!! "
세상에 불화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남들처럼' 살길 바란다던 어머니 말씀이 또 생각난다. 하지만 비장하게, 대차게 가야지.. (기질이 이런 걸..)
ps. 제목에도 썼지만 이 문서는 초안이고 언젠가 체계를 갖고 진지하게 수정하겠다..
+ 정말 쪽 팔린 일련의 사건들..
화이트 앤젤, 기독교 극우 근본주의자들의 초등학교 단군상 참수 사건, 김선일씨 죽음을 둘러싼 온누리 교회의 태도... 그리고 이명박 시장의 서울 헌납... 그 외에도 조직적이고 개인적인 기독교인들의 스스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들...
정말 같은 기독교인인게 쪽 팔리다..
다른 사람이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면 러시아 정교나 루터교라고 말하고 다닐까?
최근의 전 세계적인 반전, 반부시 정서가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란 궁극의 갑빠와 결합, 마침내 초절정 정치적 올바름 영화의 화신처럼 되어버린 <화씨 9/11>이 드뎌 울나라에 상륙했다.
제목과 달리 당 영화, 9.11테러 자체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음이다. 2000년 미대선과 9.11테러, 아프가니스탄 공습과 이라크 침략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부시와 그 똘마니들이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 행한 광범위한 가라와 사실 은폐가 어떻게 진실을 왜곡했는가, 고걸 알기 쉽게 갈켜주는 게 당 영화의 목적되겠다.
그리고 느무느무 당연하게도 당 영화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정치적 효과는 마이클 무어 스스로도 주장하듯, 부시 쉐이를 백악관에서 끌어내리고, 혼자서 카우보이 놀이하며 자빠질 수 있게 텍사스로 돌려보내는 데 있다.
이 같은 주장을 위해 당 영화 대략 세 가지의 방식을 이용한다.
첫 번째, 다큐의 본래적 성격이라 할 수 있는 현실고발기능을 십분 발휘,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무척 궁금한 다양한 자료화면들을 통하여 빈 라덴 가문, 사우디 왕가, 탈레반 지도자들과 부시 가문간의 석유와 돈을 매개로 한 유착관계를 뽀록 낸다.
두 번째, 부시와 그 똘마니들의 무능과 가라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적재적소에서 편집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9.11 테러의 순간, 그 소식을 듣고도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부시의 모습을 시간 경과별로 자막까지 넣어가며 친절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라던가, 부시일파가 9.11의 책임을 이라크로 돌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이라크와 후세인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편집한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세 번째, 백악관과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전쟁광 쉐이들과 이들에 의한 피해자들간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고도의 정밀폭격으로 민간인 피해는 없을 거라는 럼스펠드의 인터뷰 뒤에 미군의 폭격으로 아수장이 된 이라크 민간인 지역의 처참한 광경과 가족을 잃은 이라크 여인의 절규가 이어지는 장면. 500여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고작 1명의 자식만이 참전한 미국의 의회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입대하는 것 외에 별 희망이 없는 미국 빈민가 모습간의 대비가 그것이다.
당 영화, 단순히 내용만 보면 졸라 진지하고 무겁고 지루할 것 같지만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이거 만든 마이클 무어란 넘 다큐멘터리 재밌게 만들기로 유명한 넘이다. 우덜이 좃선 데리고 놀 듯, 이 넘 주특기가 권력 가진 꼴통들 염장 달구기다. 당 영화에도 꼴통들 뻘짓하는 화면에 조롱 섞인 나레이션을 깐다거나, 법도 안 읽고 어처구니 없는 법을 통과시킨 의원넘들에게 직접 법을 읽어주는 이벤트를 감행하는 등, 이 넘 영화의 전매특허가 고스란히 살아있음이다.
무엇보다 이라크 파병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작금의 울나라 상황에서, 울나라 정부가 가담하려는 일이 뭔 짓인지 똑똑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 영화,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하겠다.
이런 전차로 당 영화를 온 국민 관람가 등급인 베스트에 봉하는 바이다. 이상.
베스트/워스트 선정 특별위원회
(movie@ddanzi.com)
7월 19일 (월) 맑음
공식일정이 없어 종일 의원실에 있는데도 시간이 모자란다.
찾아오는 기자들이나 손님들을 반갑게 맞지만 마음은 부담스럽다.
용산미군기지 이전비용에 대한 감사청구 기자회견을 22일 갖기로 최종결정했다.
언론들은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감사원 감사를 최초로 청구하는 데 모아져 있다.
일부 언론은 이전비용의 적실성과 한미간 부담 비율 등으로 관심을 넓히고 있다.
그러나 이 사안은 거기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런 것은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부일 뿐이다.
법사위 활동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역대 활동 자료에 대한 분석을 마치면 관련단체, 전문가 면담과 현장탐방을 추진키로 했다.
이 모든 것을 8월 초까지 마쳐야 한다.
영화 <화씨 9/11>을 관람하였다.
개봉 전 시사회의 성격을 갖기는 했으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릴 줄 예상하지 못했다.
연예부 기자들은 민주노동당이 <문화>를 통해 정치를 말하는 게 신기한 듯 묻는다.
사실 문화는 배부른 사람들의 관심사라는 생각이 아직 진보진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겠다는 진보정당에 있어서 문화와 문화적 접근은 전략적 중요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계급사회에선 <지배계급의 문화가 지배적인 문화이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이 <문화>를 자포자기하는 근거로 오용되어선 안된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 것은 <진실의 힘>이자 <예술의 힘>이다.
지하철에서 이 영화홍보전단을 나눠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민주노동당 동료들은 밀려든 관객의 열기에 고무되었다.
좌석이 모자라 통로에 앉고 일부는 서서 보는 상황이 되자 단병호의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벽 쪽 통로에 기대서서 관람하였다.
그의 결벽증에는 인간의 체온이 담겨 있다.
서서 보느라 혼났다는 아내와 함께 모처럼 일찍 귀가하였다.
올해도 여름휴가를 갖지 않을게 뻔해보였던지
아내는 처제들과 며칠 쉴 계획을 추진 중이다.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다.
성각스님께서 글씨를 보내 주셨다.
마음은 이미 남해 망운암 중턱에 올라선 듯 하다.
Key ‘스토킹 무비’의 대가 마이클 무어의 안티-부시 프로파간다 영화.
올해 칸영화제가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에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궁지에 몰린 영화미학에 돌파구를 마련해줄 대안적인 영화형식으로서의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에? 심사위원장이었던 타란티노의 궁색한 변명이야 어찌됐건 <화씨 9/11>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누가 뭐래도 확실히 정치적인 제스처였다고밖에는 달리 판단할 길이 없다. 무어는 화씨 911도가 “자유가 불타는 온도”라고 말했다지만, 생각건대 그것은 영화가 타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온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는 기꺼이 미학을 찢어발기고 논리를 포기하면서 프로파간다의 길을 선택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화씨 9/11>은 걸작의 반열에 오르기엔 한참 못 미치는 영화이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부시 대통령의 온갖 행태들에 반감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원할 법한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또 들려주는 영화다. 부시 가문과 빈 라덴 가문의 긴밀한 유착관계, 자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하기 위해 공화당 정부가 취한 온갖 비열한 술수들, 명분없는 전쟁에 투입됐다 죽거나 다친 젊은이들, 졸지에 집과 가족을 잃고 분노에 차 있는 이라크 민간인들 등등 <화씨 9/11>이 다루고 있는 이러한 것들은 조금도 새로운 것은 없지만 여하간 우리가 공적인 미디어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강도 높게, 또 선동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로저와 나>(1989)에서부터 이미 분명해졌듯이 그의 장기는 브리콜라주(bricolage)와 캐리커처(caricature), 그리고 무엇보다 스토킹(stalking)에 있다. 즉 뉴스화면, 극영화, 그리고 직접 촬영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조합하고, 특정 사안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 하나를 골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퍼부어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황색 저널리즘의 좌파적 전유라 할 만한 것이다. 또한 무어의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그 특유의 과장과 조롱, 풍자에 의해 변형되어 지극히 희극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화씨 9/11>은 (9·11 테러 자체를 직접 보여주는 대신 장시간의 암전 뒤에 뉴욕시민들의 놀란 표정을 하나씩 보여주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무어의 전작에 비하면 약간은 조심스러워졌고 또 신중해진 게 사실이다. <화씨 9/11>에서 무어가 제기하는 비판과 주장은 넓게 보면 대부분 수긍할 만한 것이다. 솔직히 감히 누가 그의 견해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어떤 점에서 무어의 논변은 전체적으로 볼 때 일종의 ‘우물에 독 타기’(poison in the well)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문제는 그의 견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개되는 방식에 있다. 무어는 <로저와 나>, <볼링 포 콜럼바인>(2002), 그리고 <화씨 9/11>에서 언제나 쟁점이 될 만한 핵심적인 문제를 곧바로 제기하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수다는 종종 지엽적인 것으로 향하고 또한 지엽적인 것을 과장함으로써 원래의 논지를 흐리곤 한다. ‘무능한’ 대통령 부시가 백악관 참모들과 결탁하여 9·11 사태에 뒤이은 대중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게 된 경위를 비판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여기엔 위험천만한 제노포비아(xenophobia)적 사고 또한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무어는 9·11 직후 미 정부가 빈 라덴 가문의 일원들이 국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치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해, 부시 가와 빈 라덴 가의 오랜 유착관계를 파헤치고 나서, 갑자기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이 미국 경제의 7%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협적인 것인가- 전형적으로 마이클 무어적인 치기어린 질문, “만일 그들이 돈을 다 빼내간다면 우린 어떻게 될까요?”- 를 강조한다. 결말부에 이르기까지 <화씨 9/11>은 9·11 사태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치의 역학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침묵한다. 대신 순박하고 애국적인 시민들이 국가권력의 거짓에 속아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가를 고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점에서 <화씨 9/11>은 미국인의, 미국인에 의한, 미국인을 위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보수적인 백인 민주당원임을 자처하는 한 여성이 이라크로 파병된 아들을 잃고 나서 백악관을 서성이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감동적이라기보다는 감상적이다. 무어 자신이 상원의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식들을 이라크로 보내라고 권유하는 것은 <화씨 9/11>의 논리적 허점들을 다분히 치졸한 방식으로 메워보려는 시도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화씨 9/11>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이 얄팍한 지성과 조우했을 때 초래될 수 있는 거의 모든 폐단을 안고 있는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일씨 피살사태 및 이라크 파병문제 등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재의 상황하에서라면 이 영화가 어느 정도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제 제작과정에서부터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화씨 9/11>은 이제 미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과연 이 작품은 부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겠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이때 마이클 무어의 반대자들이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들을 모아 영화제를 개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눈길을 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제는 미국 내 거물급 보수주의자들의 후원을 받아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올해 9월9일에서 11일까지 댈러스에서 열릴 예정이며 대략 24편 정도의 영화가 상영될 것이라 한다. 이 영화제를 기획한 이들은 텍사스에 거주하는 변호사 부부인데, 남편인 짐 허버드는 영화제를 구상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언제나 영화 속의 문화적, 정치적 메시지들에 흥미를 느껴왔다. 솔직히 영화 속에 나타난 그러한 메시지들은 언제나 진보주의적이었다. 근 40년 동안 좌파들이 독점해왔던 이러한 영화들에 대해 우리는 이의를 제기하려 한다.” 허버드가 현재 교섭 중인 작품 가운데는 <마이클 무어는 미국을 증오한다>(마이클 윌슨)와 <마이클과 나>(래리 엘더) 같은 영화들이 있는데, 이 두 영화의 연출자들은 모두 무어가 자신의 영화에서 그러했듯이 그와의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한편 마이클 무어는 이런 영화들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영화제에서는 노골적인 ‘안티-마이클 무어’ 영화들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들도 상영될 예정인데, 역시 영화제의 보수주의적 색채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작품들인 것처럼 여겨진다. 하여간 <화씨 9/11>이 불러일으킨 파장은 급기야 다큐멘터리 영화계에 대대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을 끌어들이는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된 것 같다. |
『Say it's carol singers』 캐롤 불러주는 사람이라고 말해요
『with any luck, by next year』 운이 따라준다면 내년엔
『I 'll be going out with one of these girls..』이 중에 한명과 사귀게 될거예요
『To me you are perfect』 나에게 당신은 완벽해
『and my wasted heart will love you』 그리고 헛된 마음인거 알지만 당신을 사랑할겁니다
『until you look like this...』 당신이 이런 모습이 될때까지...
『Merry Christmas』 메리 크리스마스
충분해...난이걸로 충분해...
러브액츄얼리 최고의 명장면중 하나. ㅋ 감동적인..!!! ☆이나엘http://blog.naver.com/jypark19퍼왔어요^^☆
괴벨스와 아줌마와 다름이 뭔가?
난 아줌마의 '무서운 무대포 몰아치기'가 더 무섭다.
언어관의 전환
전통적인 언어관은 근원주의, 토대주의라고 하는 언어관에 의해 체계를 이룬다. 언어를 하나의 대상에 대한 보편적인 언어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유명론이나 경험론, 실증주의등은 언어를 통해 '객관적인 실재의 반영'으로 보았으며 본질론이나 합리론, 현상학은 언어를 '우리의 의식안에 현존하는 관념의 표현'으로 본다.
이와 같은 언어관을 토대주의(a foundational theory of language)라고 말하며 언어의 의미가 외적 실재나 내면의 의식상태 혹은 언어외적인 근원에서 유래한다는 세계관을 갖는다. 데리다는 이러한 토대주의를 해체한 반토대주의(antifoundationlism)의 입장에서 언어 자체에 대한 의미부여, 본질 찾기가 아닌 용어들간의 관계(차이, 대립, 상관)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의 해체(deconstruction) 이론은 이와 같은 토대주의적 전통 철학의 서열적 모순을 까발리고 이를 전도(reversal)단계와 제거(displacement) 단계로 구성하여 설명한다.
소쉬르의 기호학적 관점인 빠롤( 능기 : 개별 발화자의 발화행위)와 랑그( 소기 : 언어사용의 사회적 규칙) 간의 고정된 구조( "모든 언어는 고정됐다!")를 해체하는 도구로 차연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용어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의미가 부여되며 이를 통해 그 구조(의미, 규칙)는 끊임없이 지속된다.)
차연(differance) - 스펠링 안 틀렸음.. ^^;
차연은 의미에 대해 기호들간의 공간적 차이(spatial difference)와 시간적 지연(temporal deferment)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고정적이고 완결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흐름, 관계에 따라 끊임없이 순환한다.
즉, 차연 = 차이 + 지연
왜 '차이'가 아닌 '차연'인가?
'차이'는 근본적으로 우열, 이분법 관계를 함의하고 있다. ( ex : SKY IS DIFFERENT!! - 스카이가 더 좋다는 의미를 내포) 즉, '차이'는 본질적인 두 개 이상의 대상간의 '우열' 혹은 '서열'의 세계관에 반해 '차연'은 시공에 대한 '다름'으로 전도시킨다.
아메리카 주변의 어느 작은 섬에선 부모가 50세가 되면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고 한다. 그것은 재화가 한정된 작은 섬에서 인구가 높아지면 재화에 대한 분배 문제로 불화가 생기기 때문에 종교를 빌린 인구 안정화 정책이다. (이들은 내세를 믿었으며 내세엔 죽은 형상 그대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따라서 적당히 건강한 수준의 50세) 우리나라나 일본의 고려장과 매우 유사하지만 서양인들이 이들의 습속을 보았을 때 경악했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 시간과 공간의 다름에서 오는 관념의 '차이'
개인적으로 나는 많은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어떨 땐, 사람들이 너무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어 내가 변탠가 착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다름'에 대한 토론은 곧바로 '우열'로 전이된다. 그래서 싸우게 된다. 냉전적 이분법..
'다름'에 대해 '우열'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자신을 '우'에 놓기 위해 싸우게 된다. (주관된 우열의 법칙을 객관화시키기 위한 에러상황이다.)
나는 데리다를 살짝 배웠으므로 싸우고 싶지 않다. 어떤 의사결정 상황이 있을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 난 평화주의자다..!
편 가르기 그리고, 회색빛 세상 보기
이게 불만이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택하라는 협박, 그렇다/아니다, 참/거짓, 적/아... 이렇듯 조급하게 규정하기를 강요하는 분위기..
이렇게 흑백TV 속에 사는 사람들(그리고 시스템)은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 선택의 이면엔 옳고/그름, 즉 '다름'이 악마처럼 도사리고 있다. (선택과 동시에 바람처럼 나타나서 줄곧 심판한다.) - 난 솔직히 4지선다에 자신이 없다.. ^^;
데리다의 차연에서도 보듯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흑과 백 사이에 수많은 회색들이 있다. 퍼지이론은 이 사실관계에서 시작한다. 1(true), 0(false)로 모든 연산과 표현으로 처리되는 컴퓨터를 통해 인간의 사고를 모방할 수 없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인공지능 분야의 이론이 Fuzzy 이다. 퍼지 이론에 따르면 모든 논리는 모호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1과 0 사이에 수많은 0.n을 인정하고, 어떤 규정이란 결국 근사 추론 (approximate reasoning)에 의해 정리된다고 한다. 차연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우리의 관념들은 해체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관념의 수단 또한 해체되어야 한다. 해체 작업이 진행되다 보면 언젠간 새로운 지평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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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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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보고 갑니다.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