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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4/07/27
    집개.. 들개..
    free-vahn
  2. 2004/07/18
    양심적 병역거부?
    free-vahn
  3. 2004/07/18
    김선일씨 부고를 접하며...
    free-vahn
  4. 2004/07/18
    전여옥 여사님 (그만) 테러리스트가 되시와요...
    free-vahn
  5. 2004/07/18
    송두율 교수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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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07/18
    커트가 그립다
    free-vahn
  7. 2004/07/18
    ►◄ 침통한 심정
    free-vahn
  8. 2004/07/18
    수다쟁이와 나 (386세대와 X-세대의 비교)
    free-vahn
  9. 2004/07/18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2
    free-vahn
  10. 2004/07/18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1
    free-vahn

집개.. 들개..

나는 왜 통조림만 보면 화가 날까

통조림에 대해서 경배하라 (통조림이 훈계한
다) 어차피 그대가 기다리는 세상은 오지 않
는다 통조림이 되는 일만이 성불이다 영광이
다 애국애족이다 세상이 아무리 부패해도 통
조림은 결단코 부패하지 않는다 (나는 먼 산을
바라 본다) 생명에 절대가치를 부여 하지 말
라 만물은 통조림이 되기 위해서 존재할 뿐
가죽을 벗겨내지 않으면 뼈를 발라내지 않으
면 내장을 뽑아내지 않으면 어찌 통조림을
만드나 눈물은 비천하다 통조림은 거룩하다
(산 너머로 해가 진다) 이제 세상은 온통 통
조림으로 가득차 있다 통조림이 통조림을 만
들고 통조림이 통조림을 먹는다 (어둠이 성큼
성큼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다) 영혼의 존재
를 믿지 말라 그대가 애송하는 시들도 통조림
이 되었고 그대가 숭배하는 신들도 통조림이
되었다 아는가 단지 통조림이 되지 못한 그대
하나 때문에 아직도 세상이 완전무결하지 않다
는 사실을 (객석을 가득 메운 통조림들을 향해
나는 씨팔이라고 소리친다 황급히 막이 내린
다)

李外秀


통조림

개성이 없다.
컨베이어 밸트에서 획일적으로 양산되는.. 하지만 포장만은 잘 된 소모품, 그러므로 독자적 정체성도 없다.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특징은 자유, 퍼스널리티.. 이런거 주장하고 다니지만 일정한 틀에서 양산되는 천편일률적인 붕어빵 뿐이다. 모두가 비슷한 기호, 비슷한 이즘, 비슷한 상품가치... 통조림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가? 익명성에 자신을 감추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가? 왜? 책임질 필요가 없거덩.. (자신의 독자적 실존 마저도..)

생명력이 없다.
참치캔에 고등어를 넣는다 해도 소비자는 잘 속아준다. (만두 사태 봤쥐??) 타자는 껍데기를 볼 뿐이지 그 내용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하다 못 해 재래시장에서 꽁치를 한 마리 사도 그 신선도와 영양 상태, 질량을 따지지만 통조림은 그것을 따질 수도 없거니와 따질 필요도 없다. 중량 100g ..


집개

주인이 시간에 맞춰 먹이를 주면 먹으면 될 뿐이다. 대신에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고 '난 당신의 사랑스런 애완견이예요..' 하는 제스춰를 해야 한다.
낯선 사람이 등장하면 쫄지 않고 짖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단순히 '관상용'이 아닌 주인의 자산을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이 있음을 확인 시켜야 한다.
목걸이를 걸어야 한다. 길들여짐... 목걸이란 자유의 제한이다. 하지만 어쩔텐가 알아서 밥 주는데....
"가죽을 벗겨내지 않으면 뼈를 발라내지 않으면 내장을 뽑아내지 않으면" 될 수 없다.
주인의 논리에 맞춰 '살아주기만 하면 된다.!!'


들개

이외수 선생님의 묘사를 빌리자면 "누구에게 사육되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뿐 아니라 외로운 방황, 맑은 배고픔, 적당한 야성"을 갖추고 있다. - 소설 [들개]
어디든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지만 먹이를 손수 구해야 한다. 들개는 그 존재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 된다. 왜? 자유, 방황, 야성 같은 소중한 의미를 사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 엄밀히 말하면 사회가 던져주는 먹이 이외의 다른 먹이를 먹는 존재만으로 "아직도 세상이 완전무결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던져주는 먹이 보다 더 양질의 먹이가 있다는 것.. 이것은 사회의 큰 위협이 된다.
하지만 모든 취사선택, 가치 설정의 주체는 자신이다. (사회가 아니라..)
따라서 결코 편하지 않다. 하지만 '살아있다!!'


기질

정말 노력도 해봤는데.. 남들이 좋아하는 효리, 헐리웃 영화, 쇼프로, 어서 빨리 중산층이 되서 인생을 즐겨봤으면 하는 생각, 섹시한 여자 만나 인형 같은 자식 낳아 행복해야지 하는 생각, 적당히 야비하고 적당히 위선되고 적당히 비굴하고 적당히 영악하고..(이들은 절대 이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젠장... 난 도무지 이렇게 살아지지 않더라..
통조림이 얼마나 편한지 나는 아주 잘 안다. 내가 불편한 만큼 비례해서 편할 것이다.
로뜨 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란 시집이 있다. 거기서 화자는 남들과 같은 미소를 얻기 위해 자신의 입을 귀밑까지 찢는다. (마치 [배트맨]의 조커 처럼...) 하지만 외견상 그들의 그것과 유사해졌는데 내면적 자아는 여전하대더라...
나는 집개의 인생을 결코 가치하락해서 판단하지 않는다. 아마도 왕따(들개) 비슷하게 살아온 나의 경험으로 습득된 본능적인 방어기제일 것이다. 각자 자신의 가치대로 움직일 따름...  그러니 날 좀 내버려다오.. 먹이 찾아 사냥하기도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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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거부?

우선 단언컨데 난 이들의 종교에서 기인한 양심적 병역거부에 불만이 없으며 그들과 같이 적절한 대체복무제가 하루 빨리 시행되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일단, 좀 이들을 씹을 필요도 있으니까 이 점을 명확히 하고 들어가야겠다.

하지만 난 니네들이 양심과 신앙을 혼용하는 혹은 신앙을 양심으로 은닉시켜 언론 플레이 하는게 못 마땅하다.
사견으론 신앙은 양심의 부분집합니다.
더구나 일년에 500-700명에 해당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대다수가 특정 종교인임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제 '양심'의 문제를 들먹일게 아니라 종교적 신념 vs. 분단 국가에서의 의무병역 제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즉 이 문제의 촛점은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전쟁을 부정하고 반대하는 종교 집단을 의무 징병제 국가에서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문제인 것.

사실 이 양심적 병역 거부 (conscientious objection)의 용어는 일찌기 있었으며 유럽을 시작으로 종교적, 도덕적, 신념적 이유로 무기를 접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것으로 인한 병역거부의 인권 선언이다.
전쟁을 많이 저질렀던 이들이 이제 가해자도 피해자도 되기 싫고 너와 내가 무기를 잡지 않는다면 과거의 피의 역사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각에서 기인되었으며 이런 평화주의가 보편화 되어감에 따라 퀘이커(Quaker) 같은 기독종파에서 공식적으로 군역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많은 민주국가의 젊은이들이 병역 대신 그에 상응하는 오스피스 봉사자나 보조 간호사와 같은 자비행과 관련된 고된 대체 의무를 하고 있다.
즉, 이들은 종교, 양심, 신념에 의해서 병역거부를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에 있어서는? 일단 상황이 이들처럼 평화적인 상황도 아니거니와 오로지 '신앙적 병역거부'라고 해도 될 만큼 신앙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대부분인 상황이다.
그러니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부분집합이고 좀 더 확실하게 논의 할 수 있는 신앙 vs. 의무복무제에 대해서 말하자는 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굳이 양심이란 단어를 넣고 싶다면) '신앙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니들도 솔직히 말해라... '양심'들먹이지 말고 '신앙'을 말해라...

또 하나 이상하게 여론적 뉘앙스가 전쟁 긍정론자 vs. 평화 수호자 이런 대치로 흘러서도 안될 일이다.
헌재에선 '양심을 어떤 일들에 옳고 그름을  판단함을 있어서 그렇게 판단하지 않고 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 라고 정의하고 있다.
누가 사람을 난장질하고 머리에서 뇌수가 흐르는 걸 즐기고 총알받이 되는걸 즐기겠는가?
나도 나와 똑같이 귀중할 수 있는 인생을 죽일 생각은 없다 내가 무슨 조물주라고...  그게 내 '양심'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건 '냉전 위주의 고착화된 판단' 또는 '군국적 병역모집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지 양심의 문제가 아니다.
니네들 아닌 특수부대 근무해서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과정을 겪은 사람에 대해 니들은 어떻게 말 할 거냐?
그들은 양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니네들 같은 종교가 없어서다.. 그니까 '양심' 말하지 말자...


노자는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군자가 사용할 물건이 아니다. 할 수 없이 사용하게 될 경우에는 담담하게 쓰는 것이 제일 좋다. 또한 이겨도 좋아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좋아한다면 살인을 좋아하는 것이니 천하를 얻을 수가 없다."(도덕경 31장) 했고 .. 군자의 기구가 아니니 날카로운 기구라도 멀리 두라.. 모 이런말도 있다.
하지만, 총 몇백발 쏘고 대검으로 찌르는 거(총검술) 몇일 한다고 살인 무기가 되서 언제든 살인할 수 있는 살인병기가 되나?
나도 똑같은 훈련 받았지만 전시에는 못 할거 같은데...
니네들이 진짜 신앙이 돈독하고 그래서 '양심에 의해' 총 안 잡겠다는거 이해하지만 좀 오버라고 본다.
그러니까 극단적이지 말고 좀 현명하게 현실을 사는게 어떨까..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종교인이라면 사회와 조화하고 만약 사회의 논리가 종교적 논리에 반한다면 교화해야 하는게 옳은 입장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교육(쇄뇌?) 받았든 양심의 발로에 의해서든 그것 마저 '멀리하고' 싶어하는 것에도 불만은 없다.


그렇다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은? .... '대체복무제도' 참 좋은 제도다.
난 이거 옹호한다. 자신의 가치판단에 의해서 '양심을 어떤 일들에 옳고 그름을  판단함을 있어서 그렇게 판단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를 따르고 싶다?
이 권리를 찾아야 한다. 대체 복무 제도...

왜 대체 복무가 안되지?
정말 궁금한데... 이런 이유도 있는거 아닐까? 대한민국 군인들의 노동 수준을 정량적으로 산출할 수 없다는거..
일반 업무에 관한 노동수준이야 어느정도 뽑을 수 있다쳐도 내부반에서의 구타, 성희롱, 인격적 모욕, 스트레스...
이런걸 어떻게 산출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 한들 군 당국이 이런 내용을 인정하지도 않겠지만..
군대 이상 힘든 일, 그리고 그 정도 의 시간 이상의 비용을 요하는 일을 설정해서 대체시켜야 하는 일이 필요하다. (굳이 '이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정도 혹은 초과적이지 않으면 양심 때문인지 스티붕 같은 이유 때문인지 판단키 힘들 것이므로..)
난 이게 싸워야할 주적이라고 본다.


나도 평화를 사랑한다. 니네들 입장 이해한다.
하지만 적을 똑바로 해야한다. 신앙양심을 수용하지 못 하는 국가인가? 아니면 니네들과 다른 양심을 갖는 사람들인가?
헌법적 가치의 재정의가 문제이지 '군대 안가겠다 vs. 가야한다.'의 논쟁은 거부되야 한다. (여기에 스티붕 유 얘기까지 나오면 정말 인내심이 필요한 논쟁이 된다.. :) )
그리고 대체복무제가 군대 간 것과 비등한 역할과 비용을 그들에게 물으면 되는 것이다.
이게 이 문제의 key point라고 난 생각한다.  꼭 총을 들어야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담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국방의무가 신성하다면 모두가 자신의 신념에 의해 의무를 담당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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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씨 부고를 접하며...

정말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한 사람의 죽음을 먹이로 온갖 개때들이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챙기고 있다.

온누리교회(난 당신들과 같은 기독교인인게 부끄럽다.) , 유가족, 노빠, 안티 노빠, 할 일없고 말 하기 좋아하는 논객들, 최고의 개때인 언론 ....

집단 최면 종교 의식에 빠진 사람들 처럼 피아 구별없이 고인을 소제로 게임의 법칙을 만들고 있다.

도대체 이 사건이 우리에게 뭐란 말인가? 서해교전 전사자들 얘기도 있지만 난 김선일씨 죽음을 생계형 빚 독촉에 시달려 자살하는 사람과 비등하게 본다.

믿었던 친구의 보증을 서준 바람에 하루 아침에 집 날리고 장기 마저도 위협받는 자가 마지막으로 선택했던 것, 자살.. 극단적인 자살이란 선택을 하게 된 원인에는 사회적 안전장치 마저 부재한 국가의 방만함도 함께 있다.
굳이 이 생계형 빚 독촉으로 인한(특히 위에 예시한 것과 같은) 자살자와 김선일씨 죽음의 유사성은 친구의 부도, 이라크 해방군에 의한 생명의 위협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내린 것과 그러다 봉변을 당한 것 (부채 위임, 참수) 이란 형태상의 유사함 때문이다.
단지 다른건 엽기적인 홀로코스트가 공개됐느냐? 안 됐느냐? 는 것...
본인도 밝힌 바지만 그는 선교와 고소득을 목적으로 전쟁터에 갔다. 그것도 선교사도 군인도 아닌 가나 무역 직원으로...

하지만 여론은 마치 전태일 열사의 죽음 이상으로 고김씨의 죽음을 미화했고 정치적 단체,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했고, 유가족과 교회는 이런 여론 몰이에 편승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했다.
사실 난 김선일씨 죽음 보다 이 현상이 더 엽기적으로 보여진다. (마치 사람을 죽이는 장면 보다 네크로필리아나 신체절단 도착증자에 의해 벌어지는 시체유린 장면 처럼..)

난 이들이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 이런 말을 할 때 마다 불쾌해진다. 마치 편지의 형식적 인사와 같은 "친애하는 XX에게" 식의 의미 없는 립서비스....
그리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김선일씨 죽음과 무관한 자신의 이익, 목적 달성을 위한 얘기들...
니들이 고인을 위한다고 하니, 내가 그 방법을 알려줄께 ....

         "시끄러!!"


애초에 이 문제는 김선일씨란 고유명사(개인)이 아닌 이라크 파병의 희생자인 대명사로 접근 했어야 했다. 피랍 및 참수 과정에서 국가가 과연 제대로 자국민 보호 기능을 행했는가에 대한 진상규명, 그리고 죽음에 대한 적절한 보상, 무엇보다도 이라크 파병에 대한 여론 흡수 및 현명한 결정 등이 쟁점이 됐어야 했다.

        시체갖고 장난치면 안된다.



                                               김선일씨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길 바라며.. (장례라도 어서 지냈으면..) 그리고 이라크 파병이 철회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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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옥 여사님 (그만) 테러리스트가 되시와요...

탄핵 당일날이다. (그니까 2004.3.12) 밥 먹으면서 sbs [이것이 여론이다]란 방송을 보고 있더랬다.
워낙 기분이 상해있던 터라 진정을 찾으려 노력하며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상황이 발생했다. 미숙아?             (미숙아 !! 어디있니?)
너무나 황당한 논리를 펼치는 전여옥이라는 사람 보다 저런 사람을 패널로 출연시킨 sbs가 수상했다.
'토론 프로그램 첫 방송에 저런 사람을 출연시키다니...' , '이게 토론이야???'

전여옥 여사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도 [일본은 없다]를 읽었으므로 유재순씨와 전여옥 여사간의 표절 시비에 대해서 알고 있었었다.
그래도 모...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 방송은 전여옥 여사의 말 그대로 환골탈태해서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다시 돌아온 서막이었다... 정말 한국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무에게나 장난질쳤던) 레리 프린트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뇌리를 스쳤던건 전여사가 쓴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라는 책..
정말 전여사는 테러리스트가 되어있었다.


테러리스트

원래 테러리즘은 프랑스 자코뱅당의 공포정치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면 지금의 테러리즘은 사회, 정치, 문화, 종교적 약자 집단이 기득집단에게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해 공포와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약자가 강자에게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불특정 다수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확실히 전여사는 테러리스티가 됐다. 전여사의 사자후는 정말 여러사람 정신건강에 장애를 주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주장하고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어느정도 사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을것이다.

테러리즘의 형태는 저격수를 연상하면 알맞다. 비가시 장소에 엄폐하여 표적이 나타나면 '탕 !'
숨어서 남 뒤통수 치는 것은 아주 쉽고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전여사는 당당한 제1 야당의 국회의원이다.
남 비꼬고 독설을 퍼붙는건 누구나 잘 한다.. 하지만 표적이 됐을 때 흠 많고 결함 많은 당신을 보지 못 하는가?
이제 테러리스트 그만 하시길 간곡히 호소한다. 타고난 독설?로 남 씹는 것 그만하고 제발 정책도 좀 발표하고 정치적 활동도 하고...
지난 3개월을 돌이켜 봤을 때 전여사의 의정 활동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기쁨 못준 국회의원은 물러나길... 그녀는 국회의원이 되지않는 것이 좋았다...


페미니스트

한때 그녀의 슬로건이 페미니즘이었다. 아니, 페미니즘이란 상표를 좋아했던거겠지..
어느정도 여성 지식인이 대부분 페미니즘 노선을 걷고 있고.. 그래서 그 '지식인' 그룹에 합류하고 싶었던게지..
하지만 전여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아니 !! 여성으로서 마초 시스템에 아주 잘 최적화 시켜 힘 없는 사람들에게 쓰레기 취급 하고 힘있는 사람에게 굴종하는 태도로 페미니스트를 사칭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생각해보라.. 할 말을 하는 조선일보가 페미니스트를 컬럼니스트로 고용하겠는가 ????
또는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외모를 상품화 시키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경계하고 부정한다. 따라서 남성에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시킨다. '얼굴 못 생긴 대통령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페미니스트의 심리를 난 이해하지 못 하겠다.


스타일리스트

그렇다. 어떤 미학적 가치를 통해 타인의 스타일, 외모를 평가하는 것은 어느정도 평가자로서 자격을 갖춰야 한다. 또는 그 자신도 자격있는 우아함을 갖춰야 할 것이다.
한때 딴지일보에 전여옥의원 패션 제안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전여사의 옷차림 마음에 드냐고?, 난 관심없다
그래 신경 끄고 관심을 끊는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하지만 관심을 갖지 않기엔 너무 영향력있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골목 뒤에 숨어서 뒤통수 치는 동네 깡패가 아닌 이제 엄연히 전쟁터 선봉을 맡을 장수로 전여사는 성장해 있다. 우리 간곡히 이렇게 호소하자...
전여사님... 이제 그만 테러리스트가 되시와요 .........



에필로그

사실 내가 전여옥이란 인물을 못 마땅해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니힐리즘이라고 해야 하나? 전여옥의 논리 전개는 나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일관성이 없으며, 도발적이고, 전혀 논리적이지 않으며, 상식에 가까운 개념, 단어들을 과도하게 끌여다 쓰며... 그래 아래 딴지일보 기사에서 표현한 꼴라주 스타일...
나는 내가 이렇게 논리적으로 허약하다는게 싫다. 생각에 굵은 선이 없고, 주장, 지식 자체가 개론에도 못 미친다는걸 아주 잘 알고 있다.
나와 똑같은 스타일의 구멍투성이 복서가 (내가 뻔히 솜방망이고 유리턱인거 아는데..) 링 위에서 활개치고 다니는게 왠지 기분나빴다고 할까??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돈 없어서 나도 김밥 많이 먹는다. 누구처럼 선거때만 정치적 선전용으로 김밥 먹는게 아니라 ... 그런 주제에 김밥에 신물난다고 공공연히 선전하고 다니는 건 나처럼 '돈 없어서' 1000원짜리 김밥 먹는 사람을 두번 죽이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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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 [투고] 전여옥, 무식의 폭발
http://www.ddanzi.com/new_ddanzi/139/139ex_017.asp?nil_profile=g&nil_News=3

[투고] 전여옥, 무식의 폭발

2004.3.15.월요일
딴지 편집부


한나라, 민주당도 짜증나지만 유시민과 토론하는 전여옥을 보면서 "저 인간이야 말로 정말로 짜증나는군!"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전여옥을 분노에 찬 눈초리로 째려봤던 유시민에 졸라 공감이 갔다.

내가 본 전여옥은 이렇다.

1. '일본은 없다'의 저자.
2. 지난 대선 때 정몽준 지지
3. 보수 + 페미니스트 이미지

전여옥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할까? 자기의 논리 속에 엄청난 공백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일본은 없다'를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전여옥의 논리는 우선 하나의 강한 정서를 표출하고 거기에 논리를 갖가지 갖다 붙히는 형식이다. 나는 이러한 식의 논리전개를 "꼴라주(학교 미술시간에 다들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종이나 판위에 잡다한 여러가지 소재를 갖다붙이는 표현 양식이다)식 논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즉 "일본이 싫다"라는 하나의 강한 감정적 정서는 그냥 자연적으로 전여옥이 느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는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여옥은 거기에다가 개연성이 있거나 또는 없는 갖가지 논리들을 갖다 붙인다. 이것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게 생각난다. 누더기.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현상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혹은 아전인수식의 해석과 그것보다 더욱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해결책이다.

'일본은 없다' 따위의 단순무식한 논리는 한때의 센세이션은 될 수 있겠지만 일본이나 한일 관계를 연구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진지한 하나의 관점으로 결코 고려될 수 없다.

전여옥이 이제껏 좃선일보같은 곳에 기고한 의견을 보면 이렇다. 그녀는 우선 노무현이 싫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노 대통령은 물러나야"한다는 것이다(그녀는 노무현의 임기초부터 노무현이 퇴진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렇게 세상이 단순하게 돌아가고, 해결책이 그렇게 단순하다면야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건 꼴보수들의 논의에 엄청난 먹잇감만을 던져주고 있는 것일 뿐 실상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의견으로는 아무 효용가치가 없다. 자신이 오피니언 리더로써 담론 형성의 주체가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로지 좃선의 총알받이로 철저하게 이용되는 견해만 생산할 뿐이라는 거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지난 대선때의 정몽준 지지다. 지난 대선 때 그녀가 TV토론에 나와서 펼친 정몽준 지지의 이유는 내가 보기에는 정몽준에 대한 호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몽준의 경력, 인물, 국제감각들을 열거하며 정몽준이 대통령감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졌던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철회의 해프닝은 정몽준이 실제로는 얼마나 '노브레인'인가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그에 따라 나에게 전여옥은 정말로 위험한 단순무식의 논리를 가진 사람으로 비춰졌다. 대선이라는 것이 갖는 의미, 보수/진보들이 가진 논리와 그 근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없이 단순히 "대통령감은 멋지고 잘나고 뽀대나야 한다"라는 식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전여옥의 단순무식한 논리는 차라리 한나라당 지지자보다 더욱 위험해 보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전여옥은 페미니스트들을 욕먹이고 있다. 그녀가 보여준 페미니스트적인 관점 또한 위에서 열거한 것과 관계된 강한 정서의 표출과 그에 따른 꼴라주적인 논리전개라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페미니즘이 사회와 관계하면서 갖는 다층적인 의미/전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전여옥식의 단순무식 논법은 이번 SBS토론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유시민은 단핵안 가결 토론회에서 정당한 논리의 구축 없이 쓸데없는 반노무현 정서를 늘어놓는 전여옥을 향해...

"대통령을 비난하는 이유 잘 안다. 그 비난이 다 잘못됐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대통령 험담하러 나온 자리가 아니고,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탄핵 소추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고 정당하냐는 게 문제의 초점"

...이라고 꼬집었다. 유시민은 정확했다. 전여옥은 무엇을 토론하는 자리인지도 모르고 토론장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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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 석방...

나중에 작정하고 데리다의 '차연'에 대해서 정리할 계획인데...
한국에서 '다르다'(차이)의 의미는 이성으로서 납득하기 힘든 부조리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성애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비전향 양심수들 그리고 페미니즘.... 등등 상당히 여러 형태로 '다름'에 대한 폭력이 만성화되어있습니다.

위해성이 없고 공리에 해를 주지 않으며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 물론 이 자유를 구속하려는 사람들은 질서에 위해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

목신의 오후란 카페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자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밥을 먹는 사회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사회는 모두에게 오로지 밥 위주의 식생활을 헌법으로 규정했다고 치자. 하지만 그 집단에 속한 몇몇 개인이 "쌀은 싫다! 난 라면 먹겠다!"라고 자꾸 주장할 때 (라면 안 먹게 해주면 굶어죽겠다는 비장함까지 보이면서) 사회에서 "그렇다면 니들은 라면 먹어라" 하는 겁니다. ..."

여기 이 여러 '자유' 중 사상의 자유때문에 감금되어있는 송두율 교수가 있습니다.
촌극에 가까운 지난 일년간의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다름'에 대한 관용?, 인식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전 송두율 교수가 석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보다 더 조국 통일에 관심을 갖고 여러 연구와 활동을 한 그 입니다.

아시다시피 독립운동가 중에는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등등 여러 이즘들이 혼재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숙원은 우선 '독립' - 지금으로선 통일 - 이었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버나드 쇼는 '사상의 자유는 그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터무니없다고 할지라도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다'라고 말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가 로자 룩센브루크는 '나에게 자유란 언제나 정치적 반대자의 자유를 의미한다'라고 합니다.
전 이 사회가 다채로움 속에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합의를 통해 구성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랑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 이런 냉전적 문화는 우리가 버려야할 독재적 이대올로기의 소산입니다.

암튼... 송두율 교수는 석방되어야 합니다.. ^^;

 

http://bbs2.hani.co.kr/Board/ns_labor/list.asp?sTable=NSP_005002000"> 한겨레 토론 마당 : 보안법 철폐 토론방

http://freesong.jinbo.net/maybbs/list.php?db=freesong&code=statement">
http://freesong.jinbo.net/kr//images/logo.gif">>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40528165008&s_menu=사회">
 송두율, 잊혀지는가? 
  <시론> "그를 가두는 것은 우리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출처 : 관점이 있는 뉴스 프레시안 에서.. 

  
  격동의 와중에 놓여 있는 한국사회에서 <송두율>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잊혀지고 있는가? 그의 귀국이 몰고 왔던 충격파에 비해 오늘날 그가 영어(囹圄)의 몸이 된 현실에 관심을 돌리는 이는 참으로 적다. 사상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각질 두꺼운 무감각의 소산이다.
 
  냉전시대의 독소적 지배 장치인 국가보안법의 족쇄에 묶인 그의 처지는 한국사회의 정신적 좌표가 여전히 넘지 못하고 있는 경계선의 진상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해왔다는 것이 소모적이고 적대적인 분열을 낳아온 우리 현대사의 모순을, 이제는 청산하고 다음 단계로 가야 함에도 과거의 논리와 법의 주도권은 난공불락(難攻不落)같은 구시대의 파수병이 되고 있다.
 
  국가보안법, 냉전시대의 독소적 지배장치
 
  분단시대의 갈등을 조화로운 통일의 영역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어려운 해외생활 속에서도 치열한 사상적 고뇌를 해온 한 뛰어난 지식인의 인생과 가치는 돌아온 조국에게 이렇듯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다. 송두율은 그에 대한 비난의 근거로 지적되고 있는 북한 노동당 가입, 북한의 자금 수수와 관련하여 당시의 사정을 내세우지 않고 실정법 위반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를 이미 밝혔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는 이 나라의 법정신과 정치이념은 그의 내재적 이해에 따른 북한체제 연구를 “반체제적 위험물”로 인식하고 있다. 통일의 미래를 내다보는 이 나라 민족 성원이라면 그 누구라도, “상대의 자리에 서보는 내재적 이해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기존질서가 용인하는 “일방적 관점”을 옹호하지 않으면 송두율과 동일한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것은 “정치사상적 이견자”에 대한 탄압과 침묵의 강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국가보안법의 반인권적/반민주적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분단현실이 존속하는 한, 남쪽 체제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일단, 그리고 우선 지지해야 한다는 전제가 담긴 일방적 관점 이외의 것은 법적으로 허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북한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을 모두 먼저 부정하라는 이야기이다. 이는 어느 하나가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든지 아니면 모두 공멸하는 데까지 가보자는 무서운 상극의 논리이다.
 
  상대에 대한 내재적 이해를 적대시하는 것은 상극의 논리
 
  국가보안법은 바로 이 상대에 대한 절대부정을 통해 남쪽 체제의 안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며, 그 안전이라는 것도 서로가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평화적으로 통일하려는 이들의 안전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통일 이후에도 그대로 연장하려는 자들의 안전이다.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상대를 점령, 지배하려는 전략의 변형일 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제거해야 할 “체제의 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법체계가 기본질서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남과 북의 진정한 대화와 이해의 과정을 위해 노력하는 지적 진실성과 열정은 기대할 수 없다. 그 결과는 상대에 대한 무지요, 그로 인한 오해와 갈등의 심화이다. 통일의 길은 그렇게 해서 자꾸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두율>의 의의는 너무도 중차대하다. 그것은 이 문제와 관련한 그의 사상적 투신이 무의미한 대립과 소모적인 충돌, 그리고 상극으로 치닫는 상대에 대한 부정을 차단하고, 남과 북의 보다 심화된 정신적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앞서 열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회는 송두율의 그러한 노력과 헌신을 높게 평가하고 그에 기초한 남북간의 내재적 이해의 쌍방성을 심화시키기 위한 작업을 해나갈 일이지, 이렇게 법의 굴레를 그에게 뒤집어 씌워 그의 마음과 육신에 깊은 멍이 들게 하고 비탄의 절규를 할 일이 결코 아니다. 이건 명백한 반문명이다.
 
  송두율의 손과 발을 묶고 그의 입을 봉하게 하는 사회는 기존체제의 논리만 발언권을 가지겠다는 반민주적 사회이며, 인식론적으로 외눈박이 사회이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이 나라의 지적 역량을 빈곤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자, 필요하면 언제든 하나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겠다는 전체주의적 야만의 정치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송두율을 가두는 사회, 자신의 미래를 가두는 사회
 
  그 정치의지가 법으로 무장하고 있을 때, 그 희생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없이 크다. 일단 걸리면 법의 포박을 벗어나기란 어렵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이 사회는 진실의 전모를 볼 수 없는 철학적 후퇴를 강요당하게 된다. 그 철학적 후퇴는 분단시대 이후의 미래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의 고갈을 뜻하는 것이다.
 
  통절한 마음으로 부르짖는다. 부디 송두율을 옥에서 풀어내라. 분단시대극복을 위한 사상적 모색에 한 평생을 바쳐온 한 지식인을 이런 식으로 가두는 것은 곧 이 나라의 미래를 가두는 것이다. 지식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그의 신체를 수인(囚人)되게 하는 것을 허용하며 침묵하고 있는 사회의 양심은 이미 병들었다. 우린 그런 우리를 이대로 방치하고 말 것인가?
 
  한때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몸담았다는 이들이 허다하게 정치인이 되었는데, 그들은 송두율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 온당치 않다. 무엇을 사리는가?
 
  어느새 6월의 태양이 저만치 떠오르고,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 6.15 선언을 하면서 손을 굳게 잡은 날이 다시 다가오는데 바로 그런 현실이 오라고 자신의 생애를 바쳐왔던 한 지식인은 지금 차가운 철장 뒤에서 속히 지나가지 않는 밤을 뒤척이며 가슴을 찢고 있다. 그런데도 우린 그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편안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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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가 그립다




흔히 그를 그런지의 영웅이라고 한다.
90년대 세계를 funk rock의 광란으로 몰았던 장본인...
그는 영웅이었고, 돈과 추종자들과 마약에 쩔어있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찾으려는 모습이 존경스럽기 까지 하다.

요새는 커트가 그립다.... 왤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잘 생긴 외모였지만 고등학교때 같이 파티가고 싶지 않은 남자 10위에 링크될 정도로 그는 폐쇠적이었고 어눌했던 것 같다.
비례해서 그는 지독히 고독했을 것이다.

쑥스럽지만 날씨탓인지 요즘은 고독하다........ ^^;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런 생각이 든다.
"이미 각오했던건데..."
"남들 처럼 살지 못 할거라는건 이미 예측했던 것 아닌가..?"
하면서 여느때 처럼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물게 된다....

그렇다.. 세상은 낭만적이지 않아서 약간의 trade-off를 요구한다.
신념을 획득하는 대신에 고립을 감수해야 한다.

이 권태와 지지부진함이 언제쯤 종결될까...?

사실 얼마전까지 철저하게 스스로를 학대하며 살았다... 지독하게도 감기까지 걸려 맥주에 감기약을 타먹던 장면에 "이제는 마약까지 손을 댔냐.."던 친구의 말에 오버랩 되어.. 왠지 요새는 커트가 그립다....





------------ 순수한 영혼 커트 코베인의 유서 ---------------




To Boddah


베테랑급 바보라고 말하는 것 보다 명확하게 고집이 없는 불평꾼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친다면 여기에 써있는 내용이 이해하기 쉬우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최초에 우리들 공동체의 독립심과 용인을 지지하고 있던, 그래 윤리라고 할까... 그것에 접해 있던 이래 몇 년에 걸쳐 펑크록 101코스로부터 파생된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만드는 것에 대해 흥분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나는 뭘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백스테이지에 있고 쇼를 알리는 표시로 객석의 불이 꺼지고 관객들의 열광적인 환성이 들리기 시작해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 프레디 머큐리처럼 그 것을 사랑하고 관객들이 바치는 애정과 숭배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나는 되지 않는다.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그가 정말 존경스럽다.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여러분들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 한 사람 속이고 싶지 않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공정하지 못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범죄는 거짓을 통해 마치 내가 100퍼센트 즐기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모두에게 돈을 뜯어내는 일이다.나는 때때로 무대를 내려오기 전에 시간 기록기를 한방 먹이고 싶은 감상이 들곤 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있는 노력을 다했다. 정말 노력하고 있다. 믿어주기 바란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나는 내 자신이 그리고 우리가 많은 사람에게 영향받고 즐거움을 제공 받았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나는 아마도 잃어버린 순간에 그것의 고마움을 깨닫는 소위 나르시스트 타입인가 보다. 너무 신경이 예민하다.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정열을 다시 찾기에는 조금은 둔감해 질 필요가 있다. 가장 최근에 치렀던 3번의 투어 동안에 나는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로부터 너바나의 팬에 이르기까지 주변 사람 모두를 예전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 안에 있는 부담과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선의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나는 단지 단순히 지나치게 사랑했으므로 이렇게 처량한 신세가 되버렸다. 한심하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물고기자리(별자리)의 되게 재수없는 녀석이 된거다. 왜 아무 생각 없이 즐기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 나도 더이상 모르겠다. 나에게는 야심과 배려가 넘치는 여신같은 아내와 너무나도 어린 시절의 나를 닮은 딸이 있다.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프랜시스는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에게나 키스를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선하고 그녀에게 위험을 가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어떻게 손 쓸 수 없을 정도의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나는 프랜시스가 나처럼 한심하고 자기 파괴적인, 죽음으로 달려가는 일만을 생각하는 인간이 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즐거웠다. 매우 좋은 인생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크게 감사하고 있다. 일곱 살 이후, 인간이라고 하는 것 전부에 대해 증오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너무도 쉽게 타협하고 서로에 대해 공감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공감! 분명 그것은 단지 내가 너무나도 모두를 사랑하고 미안한 기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몇 년 간 편지를 보내주고 염려해 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타서 진무른, 토할 것 같은 뱃속 바닥에서부터 감사를 표하고 싶다. 나는 손 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정상을 벗어난 변덕쟁이 갓난 아기다. 이미 나에게는 정열이 없다. 그리고 기억해 주기 바란다. 점점 소멸되는 것보다 한꺼번에 타 버리는 쪽이 훨씬 좋다는 것을...

Peace, Love, Empathy.
Kurt Cobain

프랜시스 그리고 커트니,
나의 모든 것을 그대들에게 바친다.
계속 전진하길 커트니, 프랜시스에게 건배.
내가 없다면 더욱 온화하고 행복해질 그녀의 인생을 위해.


I LOVE YOU, I LOVE YOU!











2003/04/30 목신의 오후에서 http://cafe.daum.net/logic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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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58;&#9668; 침통한 심정

침통한 심정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루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곡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음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3.12일 어제는 정신적 패닉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갑자기 김지하의 이 시가 생각나는건 왜 일까
비열하게 웃으며 탄핵 가결을 발표에 박수치는 의원들의 모습에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봤다.
눈물 흘리며 애국가를 부르던 열우당 의원의 오열하는 모습에서 민주주의의 죽음을 봤다.

2004년 3월 12일 어제는 5.16, 12.12를 걸친 우리나라의 치욕적인 하루며 잊지 말아야할 하루다..
민주주의...
아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와 관련하겠지만 그 본질은 다른데 있다.
정치인들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적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정치는 대립관계에서 생존감을 갖게 된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반목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친일-항일의 대립관계였으며, 해방 시대에는 이데올
로기를 기반한 남-북의 대립관계를 갖았다.
박정희 시대로 접어들면서 처음엔 남-북의 구도를 계승하더니 김대중(선생)의 지지율이 높아지므로 정치적 위협을 느
끼자 동-서의 대립관계로 판을 바꿨다.
이를 그대로 계승한 삼김과 삼김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노무현 정부의 출범으로 새로운 대립구도를 갖게 됐다.
우익과 좌익, 보수와 진보...
일단 의미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정치적 토양이 척박한 우리나라에선 이런 분류법이 무색할 뿐더러 정체 자체
의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극우, 보수, 수구, 우익들을 싸잡아 보수라 하겠다.

갑자기 정치적 지형이 바꼈다.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그들의 '게임의 법칙'이 붕괴되고 보수와 진보의 대치관계가
되다보니 한나라, 민주, 자민련의 정치색이 같아졌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가 스스로 해제한 3권 분립, 탈권위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놓은 듯한 시국으로 치닫게 됐
다. 그리고 검찰의 정치자금 조사와 더불어 떨어지는 정당 지지도... 이런 여러가지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변수들이
이 사태의 배경에 있다.
그러므로 작금의 이 싸움 혹은 이 쿠데타의 배경은 다시 보수와 진보의 관계에서 헤게모니를 가진 -헤게모니를 곧 빼
앗길- 집단과 헤게모니를 해체하려는 시대적 요구와의 갈등관계로 봐야할 것이다.

내가 어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살의를 느끼기까지 했던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된 것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우리의 정의가 난도질 당한 것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분노 때문이다. - 그리고 왜 우리의 인생의 선배들이 자기 인
생 망쳐가면서 까지 민주화 운동, 학생운동을 했었는지 공감이 갔다.
그들의 논리를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언제나 그들은 민의를 표방하지만 그들의 민의는 국민 30%의 민의였고 그들은
민주주의 수호를 주장하지만 그들이 한 행위는 민주주의 말살이었다.
그래서 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우당과 대치된 그들이 아닌 정의와 민주와 원칙, 형평성을 무시한 그들, 모순과 부조
리와 집단이기적 그들에 분노한다.
여기서 한가지 명백해야할 것이 있다. 우리가 이 사태에 대한 '관전 포인트'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부패와 부조리에 대한 '그들'의 식별이지 노무현 대통령과 열우당과 대치된 '그들'로 봐선 안될 일이다.
이것은 냉전 시대의 단순한 이분법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어제 내가 여의도에 갔던 이유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말도 안되는 탄핵을 가결한 국회를 규탄하기 위해서지 노사모
집회에 참석하러 간게 아니었다.
하지만 점점 분위기가 정치색을 강하게 띄면서 부터 있을 이유를 찾지 못 했다.

국회의원이란 이상한 존재다. 또한 그들을 착하게 믿고 있는 '우리들'도 이상하다.
직접 민주주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의 정치를 선택한거고 그 '선택'된 자들이 국회의원이다.
그들이 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저들의 당리, 당략이라는건 어린 아이도 아는 사실이거니와 그들은 확실히 '대의'정
치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직무유기로) 처벌받아 마땅하다.
다시 또 후회할 투표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번 16대 국회 같은걸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 총선은 어느
때 보다 신중해야한다.
여하튼 민의가 정치적 대리인에 의해 무시당한 이 상황에서 시민의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집회에 참가해서든 게
시판을 통해서든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어필이 필요할 때이다.
'한 줌도 안되는' 국회의원 193명에 의해 유린당한 우리의 권리를 탈환해야한다.

또 하나의 비참한 생각........ 국회의사당 앞에 있는 한나라당 당사에 경제를 살리겠다는 플랜카드가 붙여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폭락한 주가 하락과 외자자들에 대한 눈치를 보고 있다. 그래.. 경제 살려야한다.
하나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정의가 중요한가 경제가 중요한가
또... 그들이 말하는 경제가 실업자와 신용불량자, 극빈빈농층, 노숙자들을 위한 경제인가 있는 자들이 배부르기
위한 경제인가


끝으로 진심으로 부르짖고 싶다. 민주주의여 만세.


2004 3 13 탄핵 다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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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쟁이와 나 (386세대와 X-세대의 비교)

수다쟁이님과 나와의 정치적, 문화적, 세대적 지형의 차이를 살펴보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입니다. 386 세대, 혹은 모래시계 세대라고 불리는 그의 세대와 X-세대라고 불리는 나의 세대간의 수식어의 어색함만으로도 세대간의 차이를 크게 느끼게 합니다.

사실 나는 그의 세대를 동경했습니다. 뭔가 투쟁할 것들이 산재해있었고 진지한 문제의식과, 이데올로기가 살아있었고 건강한 젊음의 피냄새를 맡는 듯 했습니다.
그의 캠퍼스엔 강제 입대, 강제연행, 의문사, 고문경찰, 수배자 ... 같은 단어들이 을씨년스럽게 등장하지만 나의 캠퍼스엔 최루탄 냄새가 없었습니다. 부조리는 여전하지만 저항의지 조차 없었습니다. - 이제 생각해보면 웃긴 기억인데 당시 이공대 학생이면서 동기들과 이념논쟁을 시도했던 나는 '미친 짓'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기득권을 갖고 있던 수구, 우익 세력의 전략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혈기왕성한 대학생들을 통제할 효과적인 방법, 그것은 강제입대도, 제적처리가 아니란걸 경험적으로 알게 됐으며 결과적으로 좁은 취업문을 선택함으로써 학생들을 통제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좀 더 총체적으로 살펴봐야 할 겁니다. 사견이지만 386세대와 X-세대간의 근본적인 시대적 격차의 키워드를 경제와 IMF로 찾고 싶습니다.

좀 더 상황설명이 필요한데 386세대는 그 이전 '해방둥이'세대와 그 전전 세대가 산업계획의 미명아래 착취당해온 경제적 성장의 수혜자였던 반면 (물론 대학생이었을 때를 기준해서) 나의 세대는 386세대가 목숨걸고 획득한 민주와 인권신장의 수혜자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그의) 세대가 만들어논 개선된 정치적 상황에 있었던 것일 겁니다. - 그래서 나의 세대는 문화적인 다양성을 많이 갖습니다. 물론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생존과 민주(or 양), 문화(or 질)의 관계는 이렇게 한박자를 주기로 전제하는 듯 합니다. ( 그래서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찬성함. )

여하튼 386세대에는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 편입할 수 있을만큼 인력pool이 모자랐지만 (혹은 대학생으로서 희소가치를 가질 수 있었지만) 나의 경우는 IMF 한파와 맞물려 청년실업이 큰 위협이었을 겁니다. (난 이를 제2의 문화정책 혹은 3S라고 봅니다.)
때문에 386세대의 가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상서의 부제 만큼 우리들은 TOEFL, TOEIC 책을 가지고 다녔나봅니다.
하지만 단지 취업문을 좁히므로서 애들을 말 잘 듣게 했다고 단언하기 힘듭니다. 전술했듯이 총체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수다쟁이님 세대 못지 않게 나의 세대도 파란만장한 시대적 변화에 있었습니다. 수능 1세대였으며 교복부활 1세대였고 신군부 종식과 3김세대를 잇는 청문회 세대였습니다.
또한 내가 대학 들어갈 당시 95년에는 해외여행이 자유로왔으며 4달만 알바를 해도 배낭여행을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제대 즈음에 국제금융기구의 구제금융을 받게 됐지만...

이 세대가 갖는 또 하나의 키워드, '문화'의 다양성이라고 봅니다. 물론 여러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이 시대의 문화운동은 허구가 많습니다.
이 시대 부터 본격적으로 연예인들이 양아치화 됐으며, 이 시대 무터 연예인들이 부층으로 편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홍대와 신촌 일대를 거점으로 여러 장르의 Rock씬이라던가 HipHop, 인디 문화가 들어왔습니다. 또한 다른 문화적 다양성과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습니다. (이것도 역시 기득권의 문화정책이라 보지만..)
반면에 수다쟁이님 시대의 문화는 내 기억으론 민중가요와 Folk 밖에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 Rock이 제일 꽃폈던 시기일 수 있겠지만 물량으로 따지면 그렇습니다.

할 말이 많았는데.. 글빨 딸려 이쯤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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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2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 - 2
[분배의 문제]

죽은 사람에 대한 평가는 되도록이면 조심해야할 것이다. 산 사람이야 변명이나 항변을 할 여지라도 있지만 죽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이런 가정에서 조심스럽지 않은 평가는 폭력이다.
더더욱 자살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조심해야할 것이다. 경우 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얼마나 괴로왔으면 자살했을까?

근래 들어 자살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한국 제일의 황태자라 할 수 있는 정몽헌회장의 자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자식까지 내던지는 사건이 있었다. 여러 말들이 많지만 착안하고 싶은 대목은 가난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식을 던졌을까?
대기업에 들어가 엥벌이를 하면서 더욱 안티해졌다. (말로만 듣던) 한국이 이렇게 살기 힘든 나라인줄 절감에 절감을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 1%를 위해 나머지 99%가 아니 적어도 80%가 피를 빨리고 있다.
(한계레 21의 '죽음이 드리운 그늘진 동심'(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3/07/021003000200307300470038.html)과 '지금 그들은 한국에 없다'(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3/07/021003000200307300470027.html) 참고..)
더욱 한심한 작태는 시스템의 오류를 알더라도 개선은 커녕 그 1%에 가까이 가기 위해 아귀다툼이다.
이런 상황을 한탄하면 오히려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아마도 일반적인 서민이 두, 세번의 봉변을 당한다면 누구나 기사에 나오는 사람들 처럼 될 것이다.
한국은 이렇게 불안한 나라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한국을 떠난 이유는 단순이 돈을 구걸하는 깡패들 때문만은 아닐꺼다..

사실 오류를 개선하는 것 보다 오류에 적응하게 사는게 더 편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 - 1'에서 재화의 한계와 인간의 무한한 욕심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이런 환경이기 때문에 분배와 배분의 문제가 중요하게 된다.
아마도 모든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상가가 경제 시스템 부터 적립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 거다.
분배는 공평하고 정교해야 한다는건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고 문제는 노동가치 만큼의 분배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자본논리는 겉은 그럴듯 하지만 기실은 그렇지 않고 있다.
모든 자본 논리가 가진자들의 세계에서 나왔기 때문에 약자는 항상 당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먹이사슬의 법칙으로 인정되고 있다.
아담 스미스나 경제적 측면의 신 자유주의, WTO체제는 번지르르한 사기로 없는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완벽하게 GATT체제 아래서 대기업만 성장시켰던 모델이었다. 국민들은 고가의 질나쁜 대기업 제품들을 소비해줬고, 저임금으로 대기업 및 대기업에 대한 하청 작업을 해주면서 대기업을 공룡으로 만들어 줬다. (아시겠지만 7,80년대 우리 노동자 부모님들은 100 hour week로 병걸려가며 일해줬다.)
대기업의 부실이 대한민국의 부실로 이어지고 여러가지 형태(국민연금, 의료보험, 신용카드...)로 국민들은 대기업의 부채책임을 양도하고 있다. IMF당시 부채의 대부분은 기업이었던 반면 현재의 부채는 개인 부채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이제 2003년에 와서 가난해서 자식과 함께 자살하는 소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래도 오류 시스템의 적자이고 싶은가? 당신이 패자(敗者)가 된다하더라도 이 시스템을 인정할 것인가?
분배의 문제에 심각해져야 하고 노동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남들은 제자식을 아파트에서 던져버리든 말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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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1

시스템에 대한 위계적 고찰 - 1
[존재가 존재할 수 있기까지..]

주목할 만한 사상가들이 시스템을 만들 때 반드시 고려해야하는 변수가 소유에 대한 것일겁니다.
사실 저는 곙제나 사상에 대해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않아서 수다쟁이님 처럼 레퍼런스들을 나열하긴 힘들지만 아마도 맞을 겁니다.

이유는 두 가지 요소일 겁니다. 재화의 한계와 인간의 욕심...
역사를 더듬어 보면 몇몇 예외적 사례를 제외하고 욕심의 분량만큼 재화를 획득하려는 전쟁들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다투는데 부터 시작해서 얼마전 있었던 이라크 학살에 이르기 까지..
사실 여기까진 진부할 정도로 공감하는 내용일겁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소유를 위해 삽니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인간은 생존, 소유, 명예, 존재를 위해 산다고 합니다.
이 형태도 여러가지여서 - 인간의 욕심은 신기하게도 - 이것 중 하나를 위해 사는게 아니라 복합적으로 네 가지 가치들에 대해 우선순위를 매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프롬의 예가 아니더라도 사회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인간의 욕구는 생리적 욕구, 경제적 욕구, 권력욕, 명예욕이라고 한다니 어느정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 부터 도가 사상에 대한 환상을 갖았습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신선 처럼 살기, 적어도 내가 어떤 가치를 위해 살아야 할지 정의하기, 세상이 제시한 기준이 아닌 내가 도덕, 율법, 자유, 존재의 의미.. 같은 것들을 정의해 보기..
그렇기 때문에 프롬의 '존재'를 더욱 값지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기하게도 가장 무난한 존재 획득의 조건이나 방법은 그 전의 세 가지를 획득하는 것 입니다. 생존에서 소유로, 소유에서 명예로... 그리고 존재로 계층적인 발전.
하지만 이 방식은 잘 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무리한 방식입니다. 더러 생존의 문제로 싸워야 하는 사람에겐 만용이기 까지 합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가장 안전하게 존재에 도달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제한된 제화의 체제에선 몇몇 혜택받은 사람들에게만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정신을 차리고 길을 모색한다면 다른 세 가지 변수와 무관하게 존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전자의 방법 보다 더 가혹한 수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주로 이런 길의 모색은 종교의 형태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제시한 종교의 교의 자체가 존재의 획득하기 보단 존재를 획득한 것 처럼 느끼게 하는 경우가 상당합니다. 마치 박카스를 먹으면 피로가 해소됐다고 느껴지는 것과 같습니다. (스팀팩을 맞은 마린은 당장 힘이 배가되지만 생명은 줄어들죠.. )

종교와 유사하게 사회라는 조직이 주는 박카스가 더 무섭습니다. 종교의 경우 어느정도 자의적 선택을 보장하지만 사회/국가라는 조직은 출생과 함께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를 이렇게 만듭니다. 존재 = 명예, 존재 = 소유, 존재 = 생존..
하지만 존재는 이외의 것과 무관한 종류입니다. 설령 존재의 본질이 위와 같은 도식이라 하더라도 이 도식을 짤 수 있는 주체는 '나'이어야 하지 국가나 사회가 아닙니다. 이것은 폭력입니다.

제일 불쾌한 일 중 하나가 존재에 대한, 가치에 대한 결정권이 박탈당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박탕당했습니다. 입시제도라는 성적표에, 돈이라는 모호한 형태의 가치에, 도덕이라는 불합리성에.. ) 존재의 결정권을 착취당했다는 것은 노예의 직인이 찍힌 셈이 됍니다. 조그만 치즈 하나를 위해 수없는 미로의 벽들을 헤쳐나가야 하는 생쥐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가 먹고 싶은 치즈가 무엇이고 내가 건너야 할 벽이 무엇인지 정도는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이 결정을 위한 고민의 자유를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답안을 작성하지 못 하더라도, 적어도 존재의 답안을 작성할 수 있는 기회라도...
그리고 첨언하여 프롬의 질문을 자신에게 해야겠습니다.. 소유냐? 존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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