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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은 원칙이다

A의 세부적인 디테일이 우리를 물먹일 지라도,
A의 제거가 대원칙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면
할 수 없이 물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김규항씨 왈 "한국 사회는 우경화된 게 아니라 민영화되었다"고.
"정치가 사라졌다"는 표현도 들었다.
그 말들은 맞다.
사투리가 극심한 사람을 공교육 현장의 교사로 계속 둘 수 있느냐,
해고 추진을 전제로 보이콧을 할 수 있느냐를 가지고 식구들과 약간의 논쟁을 벌였을 때,
학교도 기업이나 마찬가지며

효율성이 최우선되어야 한다는 20대 청년의 말을 들으며 그것을 실감했다.
(심지어 한평생 보수 성향의 낼모레 환갑 부부도 청년의 그 발언엔 우려를 표시했다;)

선생의 사투리가 엿같이 심해 수업 듣는 애들이 물을 먹어도,
표준어와 사투리가 우열의 규정이 아닌 편의적 대표성의 규정인 이상,
공교육 현장이 지역성을 차별해서는 안되는 이상,
사투리를 이유로 그를 교사로 존속시키는 데에 문제가 있어선 안된다고 나는 얘기했다.
안그러면 원칙이 훼손된다고.


이 얘기에 동의하는 사람을 만나진 못했다.
일단 현실적으로,
수업을 도저히 알아먹기 힘들 정도로 심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교사란 존재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심한 사투리라 해봐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강의 뜻은 알아들을 수 있고,
뭐 월등한 차별점을 지니는 사투리라면 제주도 사투리 정도일 터이나,
임용고시를 치를 정도의 교육 과정과 사회화 과정을 지나게 되면
엔간한 교사 지망생들은 현실적 여건 상
자신의 언어가 타지역에서 소통이 어려울 정도인 채로 두지는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존재하지 않는 일에 대해 얘기를 하려니

'그런 이상한 놈은 있을 수가 없지'에서 출발하여
'있을 수가 없단 건 불가능하단 얘기고,
불가능하단 건 그런 사람은 가르칠 능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채용시에 다 걸러진단 얘길거고
그렇다는 건 심한 사투리는 교사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나 같지'
...의 경로로,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의 생각은 진행되더라.


하지만 제시된 논쟁은 일종의 사고 실험이었다.
사투리가 심한 교사가 이미 존재하는.
그리고 저런 식의

'A가 존재하지 않는다 → A는 부적합해서일 것이다 → 따라서 A는 나쁜 요소이다' 진행은
A가 정말로 필드에 등장했을 때 A의 박멸이 올바른 행동 지침이라는 근거를 보장해주진 않는다.
'나쁘기에 없다'역시 인과에 의한 것이 아닌 느슨하고 쉬운 추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드에 A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일 수 있다.
정말로 A가 나빠서일 수도 있지만, 오해 때문일 수도, 불리하게 지급된 조건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을 원칙적으로 검증해내는 건 현실적 경쟁 우위와는 별도의 문제인 거다.
필드에 A1, A2, 또는 A-ㄱ이나 A-ㄷ1같은 문제들이 등장할 때마다 번번이 헛갈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물론, 논쟁시에 문제가 된 것은 수업 효율성 뿐만이 아니라
표준어와 사투리라는 규정이기도 했다.
표준어도 공교육도 사실상 제정/행위 주체가 비슷하기 때문에
'나라에서 정한 교육 시키는 건 나라에서 정한 말로 시켜야지'로 나가기 시작하면
그런 수준으로 족하는 주장에 대해선 정말 대꾸해 줄 말이 없으나.
표준어라는 것이 바르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같이 '평등한' 애들 가운데에서 반 대표할 반장 뽑아놓는 것과 비슷한 문제이며
더 솔직하자면 그냥 건국 무렵에 국가 권력의 중심이 어느 지방에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라는-
-그런 것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만일 '공교육은 당빠 공적인 언어로'란 명제를 옳다고 해 준다면
지금 현재 실존하는 수많은 사투리 구사 교사들은 다 짤릴 명목을 충분히 갖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면 얼만큼 심하냐의 문제이지 않냐는 반론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 시점에서 결국은 다시 원칙 문제로 돌아와야만 하게 되는 거다.
사투리가 심한 것이 해고의 명분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
즉, 지역적 성향이 강한 것이 공적 영역에서 배척받는 요인으로 작용해도 되냐-는
다원성, 평등성 원칙의 문제로.


나는 그러한 평등과 다원주의 원칙의 문제로 이 사투리 교사 얘기가 환원된다고 보며,
특히나 공적 영역에서- 더더군다나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가르친다는 공교육 현장에서-
그 원칙을 보장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는 해고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설사 그의 수업에 익숙하지기 전까지 애들이 조낸 짜증이 난다고 해도,
-이미 이 사투리 교사가 존재하는 마당에는-
그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애들에게 수업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교사 자격이 없는 거지,
라고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다들 얘기했다.
아이들의 수업권은 어떻게 되냐는 거지.
그 결론은 손쉽다.
또 그 얘기 자체로서는 옳은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상 일은 다층적이다.
고민하지 않았다간 모르는 새에 원칙이 무너지고,
그러면 존폐를 달리할 부당함이 발생했을 때에 조차 호소할 근거가 사라진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사투리 심한 교사를 짜를 때
신체 장애가 발생한 교사를 아이들의 수업권을 근거로 교단에서 떨궈내기도 더 쉬워진단 얘기다.
내겐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효율성 증진보다 훨씬 중요하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게 사회란 걸 애들이 체화하는 것 역시도,

당장 교과서 내용 머릿속에 넣는 것만큼이나 애들이 학교란 데에서 배워야 하는 거다.


사실... 액면가만 보자면 진짜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내겐 ~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다른 것이 훨씬 중요하고, 그들은 그게 원칙이라고 생각할테니까.
결국, 어떤 세상을 원하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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