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잡설(政街雜說)] 안철수, 박지원, 정동영...‘그들만의 고유성’-⓶
-일천한 경험과 대비되는 관록과 실력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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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선임기자 박정례]= 실패는 자산이 되고 위기는 오히려 전화위복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이를 모를 사람도 있을까. 역사에서 배우고 있는 법칙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다. 그런데 안철수 전 대표의 지지자들은 지금 나서지 않으면 세상이 끝날 듯이, 지금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마지막이 될 것처럼 굴고 있다. 공당의 힘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안철수 대표가 잠시의 공백도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소위 지자자라는 사람들이 안철수 전 대표를 잠깐 동안이라도 침잠의 시간을 갖도록 놔두질 않는다.

성서를 살펴보면 세례자 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요한은 유대인들과 예수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사촌언니인 엘리사벳이었는데 사제 가문의 즈가리야를 남편으로 두고 있었다. 어느 해 즈가리야는 당번사제로 뽑혀 제단에 나아가게 됐다. 즈가리야는 하느님으로부터 아들을 낳게 될 것이란 소식을 듣는다. 꿈에 그리던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너무 늙은 처지였으므로 긴가민가하다가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로 지내야 하는 벌을 받는다.

요한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함이나 안락함이 자신을 유혹하지 못하도록 사막에서의 삶을 택한 선지자였다. 잡다한 세상살이에 현혹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좇아 살 수 있는 고행의 길을 선택한 때문이었다. 신학자들은 ‘하느님을 만나려거든 사막으로 가라. 사막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막은 외로운 곳, 기도와 성찰로서 자신을 정화시켜 나가기 위한 훈련과 관련한 것들을 상징한다. 춘추시대 월왕 구천도 오왕 부차에게서 받은 굴욕을 되 갑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하면서 지내는데 이들 두 일화에서는 실력을 쌓아 때를 기다리기까지의 눈물겨운 노력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에서 맛있는 과일과 잘 여문 곡식을 얻기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수확기를 맞아 곳간을 가득 채울 수 있으니까. 자연은 그러니까 겸허한 기다림과 숙성의 기간을 요구하고,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한다. 그 어느 것도 거저 되는 일은 없다. 성장과 결실은 인내와 비바람 속에서 뜨거운 햇볕을 머리에 이고 견디는 인내의 시간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운다.’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안철수 전 후보도 인내와 담금질이 필요하다. 앞으로도 다르지 않다. 그에게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심이 담긴 쓴 소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반성과 성찰 그리고 숙려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안 전 후보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를 겸허히 수용하며 귀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5.9대선 전 후에 벌어진 일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정치 대선배인 박지원 전 대표와 정동영 의원에게서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안철수 전 후보는 이제 만 4년 정도의 정치 경력을 가진 신인이다. 이에 반해서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서 대변인, 비서실장, 장관을 거쳐 4선에 이른 사람이다. 정동영 의원 역시 명 대변인에 통일부 장관을 거친 4선 의원이다. 여기다 제 17대 여당 대선 후보를 지낸 이력이 더해진다. 그들은 엄혹하던 군사정권시대에도 논리면 논리, 경우면 경우로 시대와 맞서온 정치인들이다. 이러고도 그들 앞에 닥친 정치현실은 늘 녹록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욕을 먹고 손가락질 당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그럼에도 자신들 앞에 닥쳐오는 정치현실 앞에 늘 겸허한 자세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사람이 다 똑같지는 않다. 안철수나 박지원 정동영에게는 각자의 고유성이 있기에. 일천한 경험과 대비되는 관록과 실력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여기서 얼마나 빨리 극복하느냐의 문제가 생겨난다.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안 전 후보는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새로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하여 자숙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109명의 원외위원장들과 일부 지지자들의 권유를 믿고 다시 등판할지 말이다. 국민 모두가 나서서 정치를 할 순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특정 정치인을 좇아 투표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대의민주제를 한다. 그런데 지지자들이 일정 수준을 넘어 사사건건 목소리를 내다보면 올바른 판단이 실종될 수 있다.

쑥과 마늘만 먹으며 100일을 견뎌야 사람이 된다는 시험에서, 이를 통과한 쪽은 참을성 많은 곰이었다. 고생 끝에 뜻을 이루게 된 熊女, 사람이 되고 싶은 목적을 이뤄 환웅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다. 웅녀의 삶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안철수는 선택해야 한다. 끈기와 참을성을 발휘해 꿈을 이룬 곰이 될 것인가. 급한 성질로 인해 도중에서 꿈을 접은 호랑이의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은 자유다. 결정은 본인 몫이다. 지금 아니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어서 ⓷

*글쓴이/박정례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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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1 07:38 2017/07/31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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