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⑨
-시베리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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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긴장했다. 그렇지만 우린 길을 잘못 들거나 헤맬 일은 없는 팀이다. 길을 잘 아는 러시아인 운전사와 현지에 사는 한국인 가이드가 동행하는 단체여행이기 때문이다. 얼마 있으면 장시간 동안 타게 될 기차역에 도착할 것이다.

뜻밖의 짐꾼들

온갖 생각으로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던가 보다. 차창 밖 풍경에 눈길을 준 사이도 없었는데 멈추고 보니 역 광장이었다. 35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캐리어가 바닥에 부려졌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금 사십시오.”라며 가이드가 광장 한쪽에 있는 마트를 가리킨다. 그러면서 여행사 직원과 함께 부리나케 달려가더니 5리터짜리 물통을 잔뜩 들고 나타났다. 아홉 개의 객실에 한통씩 들여 줄 생수다. 아차, 싶었다. 잠깐의 게으름 때문에 뭇 나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시발역의 생활용품장 구경을 놓쳤다 싶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열차가 특이한 것은 개찰이나 집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열차표나 입장권이 없어도 아무나 승강장에 들어갈 수가 있다. 역사를 거쳐 가지 않고 좌측으로 돌아 역 광장으로 올 수 있었던 이유다. 플렛폼으로 곧바로 진입하기 위해 육교 앞에 차를 세웠다. 대형 캐리어와 등에 맨 가방에 보조가방 셋을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힘에 겨운 상황에 처했다. “어떻게 육교에 오르나?” 그런데 순식간에 러시아인 몇이 한국인 가이드 곁으로 다가왔다. 짐꾼들이다. 돈은 좀 들었지만 그들의 도움으로 계단과 울퉁불퉁한 육교 위로 캐리어를 수월하게 운반하고서 플랫폼을 밟았다. 

현지가이드는 소박한 인상의 재러 한국인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갸름해 보이는 얼굴의 소유자, 이 선생이라고 부르는 가이드는 선량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IMF당시 러시아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부인은 회사 동료로 만난 처지라 했다. 당시 한국인은 러시아 여성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두 자녀를 뒀다”면서 “연료비가 저렴해서 겨울에도 추위를 모르고 잘 살고 있다.”며 자신의 근황을 재미나게 얘기했다. 가이드 이 선생은 이르쿠츠크 역까지 우리 팀과 동행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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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한국인들의 특징

한때는 해외여행지에서 맞닥뜨린 한국인들의 특징이라고 말해지던 모습이 있었다. 주머니가 잔뜩 달린 조끼패션을 입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면 영락없는 한국 사람들이라는 거다. 하지만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고 본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야 낯선 곳에 맞닥뜨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공통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보고 많이 살피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럴 필요는 없으리라.

요는 복합적인 거다. 비약해서 생각해보자면 한국사람의 경우 쇄국이라는 이름과 무관할 수도 없고 말이다. 구한말의 대원군만 쇄국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최근까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늘 쇄국 상태였다고 본다. 환경적으로도 그랬다. 언감생심 일반인들이 해외로 나가거나 유학길에 오르는 일은 꿈도 못 꾸며 살았잖은가. 최근에야 해외여행에 관한 각종 규제가 풀리고, 외국유학 역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고 보니까.

조선 조 500백 년 동안 나라 밖으로 나가 본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니 됐을까 싶다. 중국으로 가는 국책사절단 약간 명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그나마 사신으로 발탁된 사람들은 양반관료들과 일부 통역관 같은 특정인들이었다. 수백 년 동안 내내 그랬다. 근현대에 와서는 가난한 식민지시대를 거치고 6.25전쟁과 냉전시대를 7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위정자들에 의한 쇄국정책과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족쇄는 다양하게 존재해왔다.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유학 차 해외로 나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신세를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폐가망신에 이른 엄혹한 시대를 살기도 했다. 국민소득마저 시원치 않은 터였기에 거금을 들여서 바다 건너 남의 나라 땅을 밟아보기란 도무지 용이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다 외국 한 번 나갔다 온 사람들은 벼슬이나 한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티를 내기도 했다. 믿거나 말거나 필자가 어렸을 적까지만 해도 외국 한 번 나갔다 오면 그 중에는 대책 없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허다했다. 듣는 사람 쪽에서도 그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었지만, 하여튼 “미쿡 가 슬 때 저어말 저어말 차도 마코 빌딩도 노파서 놀라서어요.”하는 식으로. 예컨대 사고의 폭도 외연의 폭도 견문도 협소해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흔하게 유통되던 시기가 있었다. 이건 펙트다. 아무튼 지금은 해외여행정도는 더없이 자유로운 세상이 됐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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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객 폭증

해외여행 2천만 시대라고 한다.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2017년도 기준으로 지난해 우리나라는 2650만 명의 해외여행객 숫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전년보다 약 420만 명(18.4%)이 많은 숫자인데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사용한 카드 금액은 20조원에 육박했으며 비율로 따져도 19.7% 증가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출처 천지일보 2018.2.22.일) 폐 일언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 참 해외여행을 많이 간다. 인구수는 5100만 정도인데 국민의 절반이 넘는 해외여행객 숫자를 기록한 걸 보니 가히 국제화 시대를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우리 <대륙으로 가는 길>에서도 해마다 시베리아 바이칼 탐사 여행을 떠난다. 일종의 특화된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시작은 6년 전에 했다. 현재까지 5회 째 이어가는 여행이다. 그렇게 됐다. 맞춤형 여행이 활발해지고, 모집 주체도 다양한 현실 말이다. 시민단체와 언론사들도 회원들 모집에 나선다. 여행형태와 모집주체도 다양하고 복장이나 떠나는 모습도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스치는 생각들!

이야기가 길어졌다. 모든 것이 순간이다. 시간과 세월의 측면에서 보면 영겁과 찰나가 한 순간에 피고 지고 교차한다. 장구한 세월 동안 끈질기게 버티고 있던 것들도 사라질 땐 순식간이다. 기억도 이 같은 맥락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하고 많은 것들이 제아무리 많을지라도 내 것으로 주워 담지 않으면 기억의 창고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눈을 치켜뜨고 대상을 탐색하는 행위는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사냥감을 찾아서 광야를 헤매는 짐승처럼 어디엔가 잠복해 있던 유랑의 본색을 끄집어내어 바람처럼 부유하는 시간을 희구해본다는 것은 순간일망정 가치가 있다 하겠다.

하지만 생각은 혼자 달리다가도 멈추고, 멈췄다가도 다시 떠오른다. 그래 잊지 말자꾸나. 좁쌀처럼 작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된다. 홀로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어 고독하고 싶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고도 싶다. 그래서 갈래갈래 흩어 진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작별인사

눈앞에는 1940년대 증기기관차가 보였다. 검정과 빨강색이 주조를 이룬 기차가 멋진 인상을 줬다. 러시아인들은 의외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한다. 육교를 건너고, 짐을 들어올리고, 플랫폼에서 서성이던 기억 모두를 비비고 섞으면서. 서둘러 005기차 12차량 칸에 올랐다.

좁은 복도를 지나 몸체만한 캐리어를 밀면서 나아갔다. 8호실 침대칸 4인실을 찾아 들었다. 길다란 좌석이 있었다. 잠잘 때는 침대가 될 자리다. 밖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서였는지 다리가 아팠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조금 지체하다가 룸메이트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짐 가방을 열었다. 벌러덩 나자빠진 사람처럼 활짝 열린 가방에서 조그만 양푼과 세면도구를 꺼냈다. 실내화, 핸드폰 배터리, 세면도구 등등 3일 동안 필요한 물건들을 심사를 하는 기분으로 소지품을 점검했다.

기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고 있었다. 출발이 가까웠다는 신호다. 실(室) 안으로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정동영 의원이다. 작별인사를 하려는 가보다. 이 지점에서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이 갈릴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의 중심인물인 정동영 의원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민주평화당의 당대표 선거를 한 달 앞둔 시기라서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긴 것임에 틀림없다. 부득이하게 귀국을 결정한 측면이 농후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같이 극동연방대에서 세미나를 했는데 정 의원 혼자서 목적지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리게 되다니, 서운한 마음을 가득안고 손을 흔들어 배웅을 했다. “동행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서너 번이나 되풀이하는 모습에서 정 의원과 우리 남는 자들의 표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⑩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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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19:12 2019/04/1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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