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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에서의 ‘소외’의 개념에 대하여
소외(Entfremdung)라는 개념은 자주 다양합니다. 소외는 개인을 대상을 삼을 수도 보편적 인간을 대상을 삼을 수도 있으며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용어일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맑스, 헤겔 이외에 포이에르바하, 루소나 베버, 하이데거, 싸르트르, 루카치도 에리히 프롬 등과 더불어 까뮈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대부분 뻔질나게 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소외’가 담고 있는 의미의 폭은 무척이나 넓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헤겔은 소외라는 개념보다는 외화(Entnaußerung)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의미적으로는 비슷합니다. 단지 소외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감성적이고 심리적인 의미로는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맑스는 소외라는 개념을 초기저작에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지극히 헤겔적인 어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는 상품들을 보다 많이 창조하면 창조할수록 더욱더 값싼 상품으로 된다. 사물 세계의 가치 증식에 인간 세계의 가치 절하가 정비례한다. (…) 노동의 생산물은 하나의 대상 속에 고정된, 사물화된 노동인바, 이는 노동의 대상화이다. (…)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서, 전유는 소외로서, 외화로서 나타난다. (…) 대상의 전유는 너무나 심하게 소외로 나타나서, 노동자는 대상들을 보다 많이 생산하면 할수록,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더욱더 적게 되며, 더욱더 그의 생산물의, 즉 자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 노동자가 더 힘을 들여 노동하면 할수록, 그가 자신에게 대립되도록 창조한 낯선 대상적 세계는 더욱더 강력해지며, 그 자신, 즉 그의 내적 세계는 더욱더 가난해지며, 그에게 그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는 것은 더욱더 적어진다.
(…) 국민 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 틀림없다. 노동은 부자들을 위해서는 기적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궁핍을 생산한다. 그것은 궁전을 생산하지만 노동자를 위해서는 움막집을 생산한다. (…) 노동의 외화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 노동은 어떤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그의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 외적 노동, 즉 그 속에서 인간이 외화되는 노동은 자기 희생의 노동, 고행의 노동이다.’
인간은 자연 속의 존재입니다. 동시에 인간 자신의 외부세계, 자연을 대상으로 노동하여 무엇인가를 생산합니다. 헤겔은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생산물을 생산하는 이 과정을 외화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사용(투영)하는 것, 즉 내 힘을 바깥으로 내미는 것을 외화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생산물(대상)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에게 속한 것입니다. 생산자는 자신의 생산물, 즉 대상이 나에게 낯선 대상입니다. 여기에서 소외가 발생합니다.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은 이렇듯 소외된 노동입니다. 사적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원인입니다. 즉 소외는 역사성을 가진 개념입니다.
<경철초고>는 1941년에 쓴 맑스의 박사 학위논문인 <데모크리토스롸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를 제외하면 맑스의 가장 젊은 시절의 단행본이었습니다. 맑스는 약관의 나이로 경철소고를 집필하면서 이 원고에 전혀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거나 유물론적 변증법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이 원고는 헤겔에게 대단히 의존적입니다. 맑스는 이 원고를 끝까지 완성조차 하지 않았고 1932년에야 출판되는 원고입니다. 다시 말해서 출판되기를 꺼려했다는 거지요. 맑스도 사람인 이상 인식이 발전해가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터인데 일부 맑스를 절대시하거나 맑스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은 <경철초고>의 개념, 특히 소외론을 절대시합니다. 소외론은 맑스주의 철학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잘 드러내 주는 개념임에는 틀림없으나 소외론을 전개한 <경철초고>에서의 소외론은 헤겔의 사변적인 방법을 그 전개에 도입하므로 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소외론의 좋은 측면의 의미를 반감시킵니다.
헤겔은 소외를 외화, 대상화와 완전히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논리를 전개합니다. 부정이라는 개념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외 개념은 외화, 대상화 같은 몰시간적 개념이 아니며 반대로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무차별적으로 사용합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자연(대상)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키며 자연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동물과의 본질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노동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삶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은 필연적으로 소외된 노동이며 소외된 노동은 인간이 단지 생존을 위해서만 노동하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소외된 노동은 (1) 인간으로부터 자연을 소외시키고 (2) 자기 자신, 즉 인간 자신의 활동 기능, 생명활동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므로 이 노동은 유(類)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 ……(3)…… 소외된 노동은 인간으로부터 자신의 육체, 외적 자연, 인간의 정신적 생활 그리고 인간적인 삶을 소외시킨다. …… (4) 결국 인간이 자기 노동의 산물, 자기 생명활동, 자기의 유적 생활로부터 소외되는 데서 초래되는 직접적인 결과는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이다. ……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유적 생활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명제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또 양자가 다같이 인간 생활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 자기 자신과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의 모든 자기소외는 인간이 타인과 자기 자신, 그리고 자연 사이에서 가정하는 관계에서 나타난다’
맑스주의에서의 소외는 이와 같이 역사적인 소유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맑스는 헤겔처럼 대부분 외화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컨대
‘인간은 상품, 화폐, 자본의 형식으로 자신의 경제적 행위의 산물들을 소외시키며, 더 나아가서는 국가, 법률, 사회제도 등의 형식으로 자신의 사회활동에서 얻어진 산물들을 소외시킨다’.
라고 쓰면서 소외를 헤겔처럼 외화라는 개념과 동일시 합니다.
맑스는 <경철초고>에서 ‘소외’라는 단어를 일관되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헤겔적 의미로만 사용하며 극히 일부분은 심리적인고 감정적인 상태를 일컫는 의미로도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맑스는 <경철초고>에서 인간의 노동과 그것의 소외를 역사적으로 파악한다기 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노동 그 자체의 성격으로 파악하기도 하는데 즉 인간의 본성에 의해 노동은 자신의 생산물을 소외(생산)시킨다는 헤겔식의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미에 ‘사적소유가 인간노동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호작용하기도 한다’ 라고 적어놓기도 합니다. 알튀세르가 <경철초고>의 서평에서 “맑즈로부터 가장 동떨어진 맑스”라고 평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맑스가 사적소유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자연을 대상화시키고 자신을 소외시키는 노동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탄생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경철초고의 앞의 여러 장에서와 문맥상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앞의 여러 장들의 국민경제학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의식 때문에 각 개념들간의 연관을 철학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시도합니다. 맑스는 소외개념이 이 문제를 푸는 단초라고 생각하고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옳았습니다만 헤겔을 차용하는 바람에 논리적 오류에 빠져버리고 말게 됩니다.
<경철초고>는 헤겔의 언어로 그 문제의식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실패하는 과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원고를 적다 말고 처박아 두었는데 나중에 발굴(!)된 거지요.
<경철초고>에서 결론적으로 맑스는 소외 개념을 이중적으로 사용하고 결과적으로 그 문제 의식을 해결하는 데는 실패한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따라서 소외라는 단어는 맑스의 후기 저작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소외라는 개념을 개인적이고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같은 실존주의의 공세를 거쳐간 곳에서의 소외의 개념은 실존주의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는 충분한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 없이 소외에 대한 개념을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자들은 맑스의 소외개념을 싸르트르나 하이데거에서 잘못 배워 개인적인 심리상태로 만들어버립니다.
인간의 실존은 소외되었으므로 해서 신에게 반항을 하자 혹은 열심히 살자^와 같은 개인적인 수준의 결론을 내는데 소외론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소외론은 인간주의을 부르짖게 됩니다. 소외론은 인간주의의 이론적 근거입니다. 싸르트르의 <공산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차라리 건강한 인간주의입니다. 이처럼 맑스가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심리적인 어법의 소외론으로 맑스주의를 해석하면서 인간주의적인 맑스주의의 근거로 소외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소외개념이 비맑스적인 개념이거나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적 본질에 대하여
포이에르바하가 헤겔의 절대정신이라는 관념성에 대한 비판을 위하여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인간의 구체성입니다. 즉 인간은 현실적이며 감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적 원리는 헤겔의 하늘로 올려놓은 인간과 자연을 복권시키는데 있었으며 그것을 위하여 인간을 유적존재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제대로 능력을 발휘한다고 하면서 고독과 유적존재를 대비합니다. 고독은 유한이며 제한이고 사회성은 무한이며 자유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개별자로 존재할 때는 참으로 보잘것없지만 사회적으로 존재할 대는 신적인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 포이에르바하는 현실적입니다 독일고전철학에 있어서의 인간개념은 비로소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포이에르바하의 유적존재라는 개념을 차용해서 맑스는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의미보다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인식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포이에르바하를 조금 뒤튼 것이기도 하지만 개념적으로 확장한 것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헤겔적 방법으로 되돌아간 것이기도 합니다.
<경철초고>에서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용어인 유적본질이라는 말이 난무하는데 이 용어가 포이에르바하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공허하게 들리는 말입니다. 유적본질이란 있는 그대로 해석하자면 ‘인간으로서의 본질’ 이라는 뜻이므로 참으로 공허하고 동어반복적인 말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맑스가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 즉 종차는 무엇일까?
인간이 유적 존재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노동’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존재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인간이 자기자신을 재생산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자연, 타자)을 상대로 자기의 전유물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보편적인 것은 인간만이 타자(자연)를 노동을 통해 전유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현실에서의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원래의 노동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소외된 노동을 극복하고 인간을 유적존재로 실현하는 것을 공산주의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숙기의 맑스라면 어떻게 인간의 본질을 표현할까?
비록 맑스는 아니지만 1876년의 엥겔스의 표현은 헤겔의 군더더기를 완전히 제거한 세련되고 과학적인 문장으로 완전히 대체됩니다. 인간이 보편적이라는 언명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철학에서 과학으로의 전화
많은 논자들이 수고에서 나타난 헤겔주의적인 변증법을 비판하고 자본론의 성숙기의 맑스와 구별합니다. 맑스의 이론적 발전과정은 결국 인간주의, 헤겔주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의 발전과정입니다. 인간주의/헤겔주의는 결국 유토피아주의이며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맑스는 결국 과학으로 철학을 재구성합니다. 『자본』이 그 재구성의 실증적인 결과물이며 젊은 시절의 <경철수고>에서 나타난 비과학적인 것, 헤겔주의적인 것들에서 완전히 벗어납니다. <경철초고>의 철학적 미숙함은 발표 이후에 맑스주의를 표방한 인간주의적 맑스주의자들에게 지겹도록 이용당합니다.
맑스의 열망은 헤겔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이고 유토피아주의적인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로 전화시키는 것에 있었습니다. <경철수고>와 『독일이데올로기』가 철학적 고찰이었다면 그 이후의 저작들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한 저술들입니다. 그것의 결론적 서술이 『자본』입니다.
인간주의는 역사적으로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도출되었습니다. 대부분이 스탈린의 맑스주의의 도식적, 기계적 맑시즘과 전체주의적 사회체제로부터 논의를 진행시켜왔습니다. 때문에 스탈린 시대의 만들어진 것들을 일단 거부하고 보자는 식으로 발전되어 왔으며 <경철초고>의 소외론은 인간주의자에게 괜찮은 교재였던 것입니다.
맑스주의에서는 분명히 인간주의적 관점이 내제되어 있습니다. 굳이 소외론이 아니더라도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물음을 끝없이 던지고 그것이 맑스주의의 낙관론 혹은 진리관을 구축해왔습니다. 우리가 인간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인간주의자들이 맑스주의를 인간주의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혹은 휴머니즘을 위해, 지옥 같은 현실을 거부하고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운동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만이 의미적 존재이며 특별하므로 역사는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주의는 결국 맑스주의의 과학성 대신에 이데올로기로 그 자리를 채웁니다. 맑스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만 기능합니다. 당연히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맑스주의에서 과학성을 포기하면 이데올로기만 남는데 그것은 결국 맑스주의의 핵심과는 더욱 멀어지기만 합니다. 모든 학문이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계급적 관점에 따라 진리는 바뀐다는 식의 상대주의도 인간주의의 결과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학문 – 개별 과학까지도 –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별로 무리없는 말입니다. 실제로 개별과학에서 관찰자과 그 대상의 관계에 의해 물리적 법칙이 바뀌는 현상들이 증명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과학성을 포기하는 근거로는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관찰자가 개별과학의 대상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객관성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역사가 우연성을 매개로 필연성이 관철되듯이 모든 과학은 상대성 속에서 절대적 진리가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주의는 맑스주의 속류화로 귀결됩니다.
맑스주의에서 소외, 유적생활, 유적 행위, 유적 본질이라는 헤겔적인 개념들은 그것이 과학성과 구체성을 획득할 때만 가치있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맑스는 철학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연구의 필요를 자신의 철학적 견해로부터 도출하는데 그 과정에서 <경철초고>, 『독일 이데올로기』와 같은 다소 철학적인 저작이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철학으로부터 과학을 재구축하는데 성공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자본주의라는 분석의 대상이 실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아직 그 대상이 우리 인식의 바깥에 맴돌고 있을 뿐이며 따라서 사회주의이론은 또다시 철학의 방법을 빌려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철학이라는 이름의 과학이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1』, 박종철출판사, 2003, pp. 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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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김수행 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국부론>안녕하세요? 도서출판 두리미디어입니다.
청소년 교양 시리즈 출판의 새로운 저변을 확산시키고 있는 두리미디어에서 이번에 마르크스 경제학의 최고 권위자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전 서울대 교수) 님이 쓰신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과 <청소년을 위한 국부론>을 출간했습니다!
김수행 교수님의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은 국내 최초로 <자본론>을 완역한지 20여 년 만에 마르크스 경제학의 대중화를 위한 초석으로 기획됐습니다.
<국부론> 역시 완역한 바 있는 김수행 교수는 <청소년을 위한 국부론>을 통해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경제학의 고전’을 올바로 전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습니다.
<청소년을 위한…>이란 주제를 잡고 있지만, <자본론>과 <국부론> 원전의 정확한 개념과 이해를 얻고자 하는 성인 독자들에게도 관심 있을 저작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새로운 경제학과 미래 사회의 대안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청소년을 위한 자본론·국부론>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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