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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운동이 필요하다.

비판사회학회에 제출된 글의 요약문입니다. 게시판이라 각주 생략했습니다. ----------------- 

 새로운 지식운동이 필요하다.

 

들어가면서.

 

언제부터인가 이론이 비판능력을 상실하고 단지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대학과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만 상품으로서 생산되고 소비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현실에 대한 개입능력은 최소한으로 그치고 있다. 계급사회에서의 인간해방에 기여하지 못하는 이론은 오로지 무익하거나 사적소유에 기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과도한가? 나는 순수한 학문의 세계라는 관념은 순수한 영혼과 같은 맹랑하고 허구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오히려 학문은 가치중립이 아니라 피억압자들의 입장에서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는 “편들기”에 가까우며 고매한 선비의 지성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전쟁터의 교본에 더 가깝다고 믿는다. 올바른 이론이란 언제나 비판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론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저항이론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운동이론이란 조직, 즉 집합적 행위자로서의 이론이다.

 

과거 학술운동이 연구자들의 실천적 사회운동이었다면 지식운동은 지식인*의 실천적 운동이다. 나는 이 글에서 과학이 지니는 본래의 속성인 실천적인 성격을 복원하자고 제안한다. 이를 위해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주의적 경향”을 지적하고 이론주의가 생성되었던 최초의 역사적인 오류가 있었으며 이와 분명히 단절하고 지식인의 과제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론주의

 

현실사회주의의 실패를 당시 구소련에서 생산된 이론을 비판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마찬가지로 주체사상의 이론체계를 비판함으로써 북한 정권이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순진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진한 생각이 1980~90년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다면 그 원인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오랜 단절의 시간 이후 다시 사회주의가 수입되는 그 순간부터 “이론”은 지나치게 그 의미가 과장되면서 결과적으로 “이론”과 “실천”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는 극복되지 못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문제는 지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지금의 운동의 총체적인 위기의 원인으로 주목받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이분법은 시작되었을까? 가장 분명한 구별은 카우츠키와 레닌에게서, 그리고 일정하게는 이미 엥겔스에게도 나타나고 있었다. 즉 사회주의 이론은 노동자계급에게서 생산될 수 없고 부르주아의 일원이었던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주 뛰어난 이론적 역량을 가진 부르주아 지식인이 생산할 수밖에 없으므로 사회주의 이론은 외부로부터 도입된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므로 진리이고 이 때문에 과학적인 이론 생산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분명 이론의 지위를 과도하게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유물론의 핵심은 인간의 인식 여부와 관계없이 사물은 자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논리학이니 변증법이나 하는 것은 인간의식의 대상에 관한 진술, 즉 인식론에 속한 것이며, 인식 바깥의 사물의 존재방식이 반드시 우리가 인식하는 방법과 일치한다고 보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엥겔스는 존재의 문제를 인식의 문제로 환원하여 그 둘을 동일시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엥겔스는 『자연변증법』이나 『반듀링론』에서 볼 수 있듯이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별하지 않았으며 이 잘못된 마르크스 해석이 스탈린주의의 독선주의의 철학적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적어도 하나 이상일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유물론은 존재가 곧 변증법이었으므로 존재에 대한 설명이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었고 다른 방식의 설명은 모두 기각되거나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러한 소비에트공식철학의 인식적 오류는 존재에 대한 오직 하나의 설명만이 진리라는 관념을 생산하였으며 이는 이론적 조류로만 머무르지 않고 더 나아가 입장이 다른 타자를 용납하지 않고 진리는 오직 프롤레타리아만이 전유할 수 있다는 그 악명 높은 선민의식과 결합한다. 이러한 인식방법은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이념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낳게 된다. 이러한 이분법은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일관된 경향성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대상은 우리들 자신이다.

 

이론의 식민지성과 운동이론의 소멸

 

전문 연구자들은 이중적 의미에서 식민지적 상황에 있다. 또한 학문 내용에 대한 식민화뿐만 아니라 대학과 비판적 지식인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깊숙이 안착했다는 의미에서 이 식민성은 이중적이다.

 

대학의 “자본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 대학의 재편은 김영삼 시절이었던 1995년의 “교육개혁방안”을 시발로 김대중 정권에 의해 완료되지만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대학을 기반으로 학술활동을 하는 지식인들이 운동이론을 학문이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생산해 왔다. 2000년대 이후는 상품화된 이론이 운동이론을 대체하고 대학의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지식노동자로 분명히 자리한다.

 

한편 서구의 선진이론은 자명하게 “보편적인 것”이며 한국의 사회현실은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사건들을 서구의 보편이론을 적용하여 설명한다. 서구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일반적인 이론 생산의 방법은 서구철학을 보편적인 것으로 ‘이미 주어진’것으로 이해하면서 한국의 현실을 실증주의적으로 적용하여 맞아 떨어지는 부분을 찾아내어 이론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한국의 사회현실에서의 다양한 경험들을 매개로 사유를 통해 추상화하고 재구성하여 총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이론을 “적용”할 대상으로만 고려하게 된다. “이는 현실로부터 이론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으로부터 현실을 연역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이 만들어 내는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사회의 실증적 자료가 지나치게 가볍게 취급되어 누적되지 않고, 서구사회와 한국사회와 공통된 것만을 이론화되며 한국사회의 고유한 부분은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사실 상 한국사회는 서구사회와 아주 가깝게 묘사되고 서구의 역사적 경험과 지식들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맥락 없는 거대담론만이 과도한 의미 확장으로 수용된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한국사회의 실재들은 역사적 맥락과 함께 분석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같은 역사가 어떻게 통치력의 강화와 국가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를 왜곡하고 기형적으로 강화시키는지에 대한 어떤 설명이나 대안도 만들지 못한다.

 

이는 한국사회, 정치, 제도, 국가에 대한 연구를 황폐하게 만들며 운동이론의 생산에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 학문 영역에서의 이 같은 규범화와 식민지화는 학문적 성과를 흡수하는 운동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연구자들의 사회비평과 논문이 공식화되면서 실천적인 운동이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2000년대 이후 사실상 실천적인 운동이론은 생산되지 않는다. 이는 사회변화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인 집합적 힘을 설명하는 이론이 생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험적 지식

운동이론은 사상사나 인물론처럼 대상화, 상품화되는 수입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실천, 특히 조직적 실천에 관한 이론이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회변형을 위한 가장 중요한 행위자인 집단적 운동주체(그 조직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의 저항행위를 이론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조직의 행위양식이나 존재방식의 이론이다. 즉 왜 우리는 이런 조직을 만들었고 이 조직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으며 사회변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포함한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노선이라고 부른다. 저항이론은 그 시대의 과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한다. 사회학과 정치학, 그리고 각종 인간과학에 대한 성과들을 흡수하며 생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항이론이 의지하는 것은 저항주체의 집합적 경험이다.

 

경험은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계기를 가진다. 경험적 지식은 총체적 지식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부분적이고 특수한 계기일 뿐이므로 인간은 사유를 통해 이 경험을 일으킨 인과적 실재와 기제, 더 나아가서 구조 등을 파악하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경험은 이론의 시작이며 계기이다.

 

여기서 경험적 지식을 염두에 두는 것은 첫째, 한국에서 이론이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하고 있는가라는 비판적 평가 속에서 경험적 지식으로부터 이론은 출발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과학의 대상은 실재이지 거장철학자의 이론이 아니다. 둘째, 경험적 지식이 발생하는 곳을 일상의 삶이며 현장이라고 한다면 일상의 삶과 현장을 어떻게 이론 속으로 녹여 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이분법에 의하면 실천과 이론은 기계적으로 분리된다. 즉 경험은 팩트, 과학적 사실이며 이론은 주관적 해석이라는 생각은 이미 오래 전에 파산한 실증주의의 시각이지만 여전히 암묵적으로 지지 받고 있다. 또한 현장에서 오래 활동한 활동가의 경우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하는 경향도 있다. 이런 현장주의/경험주의는 또 다른 권력화를 낳기도 했다. 이는 현장의 활동가들과 소통하지 않는 학문적 식민지성 덕분에 더욱 강화된다.

 

하지만 실재론적 입장에서 경험은 이론과 마찬가지로 실제 세계 그 자체가 아니며 객관적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의 산물이다. 경험은 “해석된 세계”이다. 즉 경험 또한 의식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경험은 인간이 객관적 대상에 대해 맺는 관계로서는 직접적이고 유일한 것이며 모든 지식은 경험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은 부분적이고 일면적이라는 단점을 가지므로 총체적 지식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론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이론적 사유를 통해 총체적 대상을 추론하고 재구성한다. 그러므로 지식이란 이론적 지식과 (암묵적 지식을 포함한) 경험적 지식의 총체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현실세계의 실재들을 다루고 있지 않은 정치사회 이론들은 우리의 사회적 지식 외부에 존재하며 경험적 지식을 검증하는 비교자료이거나 보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이론은 무엇일까?

식민지 경험을 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식민지 시기 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 둘씩 자각하는 과정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할 뿐이다. 전쟁도 비슷하다. 이런 역사적인 과정을 살아왔던 당사자들은 해방 이후에도 학살과 억압정치를 겪으면서 짓눌리고 부셔졌다. 이 세월이 지나치게 잔혹한 때문에 폭력의 흔적은 잠재의식 아래로 가라앉아 피해자답게 거저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니 한국에는 서구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만한 것들이 간혹 뿌리째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정치제도의 미성숙, 민주주주라는 관념과 체제로서의 경험이 아주 없는 민중들, 과도하게 발달한 통치시스템, 자식들에게 전승된 뿌리 깊은 트라우마, 아직도 땅 속에 묻혀 있을 학살의 증거들, 한 번씩 애초에 시민사회라는 것은 있어 본적도 없는 듯이 곧바로 제도화되는 각종 사회적인 것들.

 

서구에서 발원된 정치해방은 오랜 세월동안 지속되어왔던 신분사회를 깨뜨렸다. 비록 그것이 부분의 해방으로 그쳤지만 이 정치해방은 근대사회의 정신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천편일률적으로 전제하고 자본주의는 이 과정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한국을 포함하여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했던 지역이나 중국의 자본주의 도입의 과정은 또 다르게 나타난다. 한국의 경우 비록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통과하면서 하나의 세계체제로 통합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보다는 억압과 위계가 더욱 가까이 있었으며 이런 차이의 효과는 한국의 경우 지배적 보수정당이 범죄 집단과 다를 바 없고 서구적 합리성보다는 범죄적 자본주의가 일반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형 자본주의=일반, 서구자본주의=특수라는 도식은 생기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보편과 특수는 서로 대립적으로만 파악되지 않는다. 오히려 특수성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고 완성해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 국가의 연구자들은 그 지리역사적 특수성을 갖는 자국의 자본주의 형성과정을 분석하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역으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의 자본을 그야말로 자명한 사실로 전제하면서 한국에 적용하는 - 이게 토착화론이다 -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관점에서 한국의 지리역사적 특수성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다시 보편이론을 보강하고 성긴 개념을 조밀하게 만들면서 구체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총체화로 표현해도 좋겠다.

 

이런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정규직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를 대체하고 자본론에는 주체가 사라지며 노동자는 단지 한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구조의 담지자가 되며 자본주의는 더욱 더 견고하게 다가와 저항주체들의 절망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자본주의는 보편이며 한국자본주의는 특수라는 관념은 보편과 특수를 변증법이 아닌 실증주의로 각색한 개념일 뿐이며 마르크스의 이론을 서구중심적인 이론으로 더욱 견고하게 자리 잡게 할 뿐이다. 이렇게 보편과 특수를 이해하고 나면 자본을 둘러싼 역사주의니 논리주의와 같은 논쟁에 대한 일정한 답을 도출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한국사회의 실재를 분석하며 비로소 저항이론의 전략을 구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식인의 역할은 현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곧잘 이론은 실재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론은 실재들 중 의미화 할 수 있거나 해야만 하는 것에만 관심을 보인다. 대부분의 실재는 이론 속에 포함되지 못하며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고 과학적으로 해석해야만 하는 실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론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의 실재들과 정치적 사건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만 다루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아직 해석되지 않은) 사건들과 이것이 정치화되는 것을 방해하는 항시적인 제도적 강제력을 경험한다. 이는 시민사회와 국가가 더 이상 개념적 분리가 아니라 현실적 분리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사회운동은 그 자체만으로는 해방에 도달할 수 없다. 이미 마르크스는 고전적인 시민운동적 사회주의를 순진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정치는 사회와 분리되어 정치를 통하지 않는 사회운동만으로는 국가의 변형을 만들기는 어렵게 되었다. 제도영역의 국가는 사회와 분리되어 층화되어 나름의 기제(메커니즘)를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대중이 경험하는 사회적 사건은 세월호 참사와 같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지배적 권력에 의해 프레임화 되어 있고 정치화되지 않는다. 정부와 지배적 보수주의자들은 정치화를 막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 세월호는 이제 현장이 되었다.

 

진보적 지식인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과 실재들을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이렇게 찾아내거나 발견되는 의미를 가치화시켜 자신의 행위에 목적성을 부여한다. 이를 현장이라고 부르자. 현장은 의미 부여된 정치적 장소이다. 현장을 만드는 것은 저항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학술운동을 넘어서

 

학술운동이 연구자들의 사회운동이었다면 지식운동은 연구자들과 활동가들 그리고 우호적 시민들이 연대하는 운동이다. 학술운동(을 기치로 구성된 연구자들의 단체)이 놓치고 있는 지점은 첫째, 대학을 자신들의 현장으로 조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대학은 1990년 초반까지는 학생운동과 지역운동의 현장이었고 공공장소였으며 정치의 장소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대학은 지식인이 배출되는 공간이었음에도 기성의 교수들과 연구자들은 정작 자신의 현장을 방치함으로써 더 이상 의미 있는 지식인의 재생산의 장소로 기능하지 못하게 한다. 즉 현장의 재생산에 실패한 것이다. 둘째는 규율화 된 연구가 전체 운동에 어떻게 결과했는지를 성찰하지 못한 점이다. 지식인이 연구자가 되면서 개별화되고 관조적 시선으로 저항운동을 바라보면서 비평에만 의존하게 됨으로써 지식인의 비판 의식은 양비론이나 관찰자의 그것으로 퇴행한다. 기존의 사회학은 그것의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두 개인주의적 사회학으로 전락했다. 과학에 있어서의 노동의 속성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을 “복합적인 세계 속의 능동적 행위주체가 아니라 주어진 세계의 수동적 관조자로 보는” 소위 정통의 가치중립성을 바탕으로 하는 실증주의적인 누적적 과학관이 지금의 진보적 사회학자들의 배후에 있는 것이다. 

나는 연구자들이 학문적 성취로 자신의 세계를 축소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믿는다. 연구자들이 자신의 삶을 대면하지 못하게 하는 현실적인 조건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좋은 이론은 현실의 개입을 통해 체화되는 경험적 지식과 정치적 경험 없이는 생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지식은 사적으로 소유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과학자와 연구자들의 생산을 통제함으로써 가능한데 이는 준국가장치와 제도적 장치들로 효과적으로 조직된다. 이에 비해 저항적 지식들은 상식에 반하는 이론이며 표층적인 상식을 거부하므로 쉽게 조직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식인은 조직들에 참가하고 스스로 집합적 행위자로서 존재할 때만 비로소 운동이론의 생산에 직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지식은 노동자가 생산하는 어떤 생산물보다 더욱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지식은 언제나 선행하는 지식을 재료로 하여 생산되며 소비됨으로써 사회화된다. 이러한 지식의 사회적 성격 때문에 자본은 온전하게 지식을 소유할 수 없으며 쉽사리 균열을 만들어 낸다. 지적소유권은 이 균열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전통적 방법의 소유권으로는 공동자원으로서의 지식을 사유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지식운동은 지식의 사회적 성격을 온전히 실현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지식의 공동생산과 협업적 유통을 통해 그 동안 구축된 전문가주의를 허물고 노동자 평등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식운동은 지식인이 현실운동에 개입하는 조건을 만들고 지식의 사회적 성격을 실현하는 운동이다.

 

------------*여기서 지식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과 연구기관에 소속되어 있는 전문연구자를 포함하지만 약간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사회주의자는 포괄적인 의미로 지식인이며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비연구자도 포함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모순과 억압적 성격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저항해야하기 때문이며 투쟁을 통해 성장하려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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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역사에서 이론적 사고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것은 이론가들의 자연스런 결점이다. … 실재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는 그것이 과학적이든, 철학적이든, 심지어 신화적이든 간에,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망라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사회학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적 삶, 곧 비이론적인 또는 전이론적인 삶에서 '실재'라고 아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상'보다는 상식적인 지식이 지식사회학의 주된 초점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존재를 위해서 필수적인 의미의 구조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식이다."(피터 버거, 2013,”실재의 사회적 구성“ 문학과 지성,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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