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은 우리에게 집을 빌려준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월월세로 빌려준 건데, 갑을병에서 나는 병인 셈. 그를 알게 된 건 조약골 덕분이었다. 우리가 고양이를 키우기 때문에 어학원의 숙소를 사용할 수 없다고 걱정하자 조약골이 베를린에 사는 크리스티앙을 소개시켜주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내내 한국에서 지내면서 각종 좌파운동에 개입했다고 했다. 그리고 추ㅋ방ㅋ
아무튼 추방된지 5년이 지나서 그는 한국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잠시 한국에 온 크리스티앙은 나에게 자신의 집에서 지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좁은 집이긴 하지만 월세가 싸고, 장기체류가 가능하다고. 그 때는 그저 감사하게 받아들였는데, 뭐랄까 혼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의 특징인 건지... 영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추위에 떨면서 또 고양이들을 걱정하고 있는데, 그는 한사코 창문을 닫지 못하게 했다. 자기는 답답하고, 또 뭐가 춥냐는 식이었다. 고양이들을 걱정하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보호주의라고 우겼고. 고양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양이들이 새로운 집을 갖게 되면 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네들은 옷장이나 이불 속 등 어둡고 좁은 곳을 찾게 된다. 그것을 크리스티앙은 우리가 고양이들을 가둔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지금도 불안한 상태의 동거가 이어지고 있다. 문을 여전히 열려 있고, 고양이들의 습속에 관해서는 대화를 통해서 충분히 주의를 주었지만 외출할 때마다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다.
뭐 어쨌던 나는 을도 아닌 병이고...
이런 일만 없다면, 크리스티앙 자체는 무척 흥미로운 사람이다. 그는 베를린에 대해 때론 우리보다도 모른다. 그는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진짜다!), 그저 하루에 두 팩의 화이트와인을 마신다. 그의 집에는 아무 것도 없다. 책상, 낡은 메트릭스, 의자, 토스터, 약간의 식기, 티비, 싸구려 컴퓨터가 전부다. 독일에서는 전등을 직접 사서 들고 다니는 게 일반적인데, 크리스티앙의 집에는 스탠드 두개가 있을 뿐 어느 방에도 전등이 없다. 예전에 그는 지금보다 세배 정도 넓은 집에서 온갖 것을 갖춰놓고 살았다고 한다. 가족까지도. 하지만 한국에 가기 전에 모든 것을 처분했고,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삶에 만족하면서 산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사회운동이 재밌다고 한다. 그러니까, 독일에서는 더 이상 급진적인 사회운동이 없다는 것이다. 장애인 인권운동이나 철거민 운동은 그 개념조차 없어졌고, 안티-파시스트 운동이나 반핵 운동 정도가 남아 있는 운동의 전부라고. 70-80년대에 동독에서 민주화운동 - 물론 그것은 자유주의를 요구한 게 아니라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주장한 운동이었다 - 을 했던 그에게 한국은 어쩌면 그 때의 삶을 계속 살게 하는 곳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건 그는 바로 그 운동경력 덕분에 돈을 벌지 않고도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아서 연금을 받기 때문이다.
암튼 24일이면 그는 한국으로 떠나고, 25일이면 그는 명동에 도착할 듯 하다. 명동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그는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고, 명동 소식을 영어로 옮겨서 뿌릴 계획이라고 한다. 크리스티앙은 꽤나 옛날 사람이라서 최근 미디어 환경이 SNS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잘 이해를 못하고 있다. 그에게 익숙한 것은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거나, 프로파간다를 하는 홈페이지나 블로그지, 상호간 대화를 통해 운동이 조직되는 SNS가 아닌 것이다. 뭐, 이것은 그의 성격탓이 대부분이라고 나는 보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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