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사실 일본 사회를 일종의 모성 사회(maternal society)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건 그리 새로운 관점은 아닙니다. 이미 일본문화론 쪽에서 상당한 연구들이 나와있고, 더 거슬러올라가자면 일본에서 천황이 갖는 의미가, 유럽에서의 아버지-군주의 의미와는 달리 일종의 모성적 존재와 같은 것이었다는 주장도 일반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니까요.
흥미로운 건 이러한 일본 사회의 모성적 성격으로 꼽히는 특성들(텅빈 중심, 약한 초월성, 강한 네트워킹, 정동 노동, 유아적 주체, 생권력의 절대적 작동)이 오늘날 첨단 자본주의의 지배적 모델이 되고 잇다는 것이죠. 농담이지만, 코제브가 예언한 전세계의 일본화가 이런 것이었나란 생각도 듭니다.:-)
말씀하신 <이노센스>의 장면을, 저는 오시이 마모루의 지속적인 테마, 즉 인간과 동물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해 묻기 위한 장치 중 하나로 봤는데, 산책님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분명한 건 오시이 마모루는 앞서말한 일본 사회의 특징들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어보면서 작업하는 사람 중 하나라는 것 정도겠죠.
저는 오시이 마모루의 <이노센스>에서 <공각기동대>의 여전사 쿠사나기가 <이노센스>에서는 수호천사로 불리며, 바토가 자신의 애완견을 매우 아끼는 모습등을 보면서, 이것역시 다른 모습의 모성에의 회귀같은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수호천사는 더이상 성적 결합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영화속의 대사, "네가 나의 네트에 접속할때는 나는 늘 너와함께할것" 처럼, 서로 하나됨을 암시?하고 있다고 보여지기도 하고말이죠.. <에바>를 꼼꼼히 보지못했지만, 상징계로 진입하는것을 거부하고, 억압된 것이 감춰진 상태,상상계?에 머문다해도, 지금의 사회에서는 전혀 문제될게 없을뿐 아니라, 오히려 자잘한 이익들, 이를테면 소소한 일상의 기쁨같은것으로 곧잘 표현되는, 그런것들을 향유할 수 있기도 하고 말이죠... 애완견에 대한 애정도 그렇고요. 암튼, <이노센스>를 보면서, <공각기동대>보다 보수적인 색채가 강해진게 아닐까 생각을 했었더랩니다.... <에바>에 대한 글을 읽으며 이런 뜬금없는 댓글을 달고 있군여.-.-
반갑습니다.:) 오래된 글이지만 이 글을 쓸 때 산책님이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네요.
산책님 말씀을 들으니 예전에 한창 아침형 인간이 유행할 때, "아침형 인간에 반대한다"(?)인가 하는 비슷한 제목의 책이 나왔던 게 기억납니다. 성기완씨나 듀나 같은 분들의 느긋한(?) 생활에 대한 글을 모아놓은 책이었는데요. 표면적으로는 정반대로 보이는 아침형 인간론과 반-아침형 인간론이, 실제로는 동일한 "자기"의 개념과 자기-관리하는 주체 그리고 창의성 등등의 담론들을 공유하고 있었죠.(서동진씨가 자신의 박사 논문에서 비슷한 분석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만약 오늘날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면, 이와같이 표면적으로 대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주장들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공통의 전제와 환상 차원을 지칭하는 의미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 글의 주장이기도 하구요.:-) 앞으로 종종 놀러오세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글을 읽으면서, 어딘선가 들었던 픽사(Pixar) 회사건물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노동시간과 여가시간이 구분되야만 했던 것과는 달리,이곳에서는 모든 여가시간조차, 노동의 질을 높이는 밑받침이 된다고 말하는것 같더라구요. 창조적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해, 각자 자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마련해준다고 하는데, 그 환상적인 조건이 동시에 공포스런 소리로 들리더군요. 이젠 정말 아무것도 하지않고 그냥 있는것은 불가능한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것도 하지않는것은 이제 더이상 노동하지 않는 게으름벵이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더욱더 생산적인 것을 하기위한 전제로 읽혀진다는..아니 읽혀져야만 할테니 말이죠.
쓰고보니,엉뚱한 덧글이긴 하네요. 암튼 글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음.오늘 처음온게 많이 티나죠?^^)
(그냥 깜짝 놀라게 하는 것 말고) 제대로 된 공포는 확실히 사회적인 코드를 갖춘 것 같아요. 프랑코 모레티같은 경우는, 잠깐 지나가면서 "복지국가적 공포"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신자유주의적 공포"같은 개념도 억지는 아닌 셈이죠.:) 그런 면에서 최근 한국 공포 소설에 소재로 자주 사용되는 해리성 인격장애나 신체 훼손의 코드 같은 경우, 단순한 유행을 넘어 자아와 신체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반영하는 하나의 사회적 징후로도 볼 수 있겠죠.
그나저나 <사랑과 전쟁>이 공포물이라는 사실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특히 결혼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는 것 같아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