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독회를 마쳤습니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영국, 특히 프랑스에서의 역사적 앎들의 투쟁에 관한 부분은 열심히 읽기는 다 읽었다만 그 시각을 체화시키지는 못하고 마지막 "biopolitique"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 정도로 읽었습니다. 텍스트를 독해하는 데 있어서 일종의 목적론적인 방법을 택했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이 글을 읽고 푸코의 역사관과 방법론에 대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할 따름이고, 여기저기 퍼가 벗들과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오. 재밌는 주제로 논문 쓰시네요. 완성되면 저한테도 살짝 보여주심이.:-) 세상 좁고 학계 자체가 그닥 넓지 않으니 언젠가 뵙겠죠.(그런데 서로 오프라인 이름을 몰라 그냥 지나칠지도..;;;) 그 때 같이 술이나 한 잔 해요~ (뭐. 사실 그 전에라도 메일만 주시면 언제라도 가능해요.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감사합니다!
얼마 전 멜랑콜리와 신비주의에 관한 소논문을 하나 발표 했었는데, 이번엔 멜랑콜리와 문화정치 영역에 관한 글을 하나 쓰려고, 어디 부터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캐즘님의 글이 제게 많이 도움이 되었네요. 언제 뵈면 술이라도 한잔 사야 할까봐요. :)
추천 감사합니다.^^ The Psychic Life of Power는 푸코 부분만 찔끔 들춰봤는데 이번 기회에 완독을 해볼까봐요.ㅎ
벤야민의 개념들이 대부분 그렇듯, 알레고리적 멜랑콜리에 대한 벤야민 자신의 "체계적인" 정리는 드물지만, 최근 번역된 <독일 비애극의 원천>이 알레고리와 멜랑콜리에 대한 개념을 잡는데 도움이 될 거에요. 이차 문헌이긴 하지만, 애도에 반대하는 벤야민의 역사에 대한 입장은, Martin Jay의 "Walter Benjamin, Remebrance, and the First World War"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인터넷에서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거에요.:-)
번역이 아마도 안되었을것 같긴 하지만...9/11 이후에 쓴 Precarious Life: The Powers of Mourning and Violence 에서는 <젠더트러블>에서 제기한 젠더멜랑콜리를 일반정치(?) 영역으로 확대합니다.
그보다 훨씬 먼저 쓴 The Psychic Life of Power에서는 좀더 철학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구요. 두권 다 재미있을 거에요. 다만 버틀러가 꿈꾸고 있는 "global community"는 좀 거시기합니다만...제게는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멜랑콜리"가 친숙하지 않은데요. 추천하실 만한 책이 있을까요?
오바마에 대한 사람들의 attachment의 기원은 어디일까요? 제가 미국 정치나 사회에 밝지 못해 조심스럽지만, 어쩌면 지난 몇년 간 상처받은 미국인들의 나르시시즘이 부시에 이어 다른 방식으로 오바마에 투사되고 있는 건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봄나물님의 말씀대로, 향후 오바마의 행보가 뭔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줄 것 같다는 것만은 확실하네요.:-)
봄나물님 오랜만이에요.:-) 저는 잘 지내요. 엄동설한에 뜻하지않게 이사를 하게 돼 요새는 이래저래 블로그를 할 시간이 없네요. 봄나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melancholy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은 저도 동감입니다. 저로서는 버틀러를 잘 모르기에, 저에겐 좀 더 친숙한 벤야민의 "알레고리적 멜랑콜리"의 예를 들었던 거구요. 이래저래 어설픈 애도의 몸짓과 post-history화가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서, melancholy가 퇴행이 아니라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반성과 의식의 모드가 될 수 있는 조건에 관심이 가네요. 최근에 <젠더 트러블>이 번역되었던데, 연말엔 버틀러라도 읽어봐야할까봐요.:-)
"변화"라는 단어가 가진 말의 힘이 과연 역사상 최초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대통령 당선이라는 실물이 되었네요.
가끔 만나 이야기하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학부 아이가, "macro level에서는 요즘 살만한데, micro level에서는 영..." 이라 이야기하데요. 요즘 오바마를 지지했던 모든 이들이 이런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기대와 요구를 가진 각계 각층이 모두 오바마만 바라 보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어야 할것인데...이 사회에서 약자가 누구인지 검증해 볼 향후 2년이 될것 같아요. 어쩌면 이미 드러나고 있는지도...
저는 커니의 On Stories만 읽었는데, 거기서도 비슷한 문제점이 발견되더군요. 그양반 왜 그리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암튼, "타자에게 적절한 자리를 재배정해줄 수 있는 서사의 붕괴가 우리의 시대적 조건"이라는 캐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혹은 애도가 형식적인 정치세레모니로 전락하고만 우리 현실을, "애도의 실패" 라는 형태로 영화가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에요. 다끝난 잔치처럼 회자되는 광주가 한 예가 될 수도 있겠구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히려 "애도"로 해결 될 수 없는 그 어떤 것, 피해자에게도 가해자에게도 악몽처럼 되풀이되는 불확실한 상실과 분노를 주시하며 오히려 "melancholy"를 끊임없이 우리의 자의식을 괴롭히는 반성의 모드로서, 정치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의식의 모드로서 제시하는 Judith Butler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건 그렇고...오랜만에 들러서 뒷북 치네요. 잘 지내시나요? 새해 복많이 베푸시고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