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하라는 '아이콘'에 대해 늘 가자미눈을 하고 바라보며 언젠가 이 불편함에 대해서 포스팅이라도 써봐야지 마음만 먹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특히 '관계' 때문에요. 누군가가 좋아한다고 말하면 싫다고 말하기 무서워지는 소심증^^;) 그냥 미뤄두기만 했거든요. 여기서 끄덕끄덕 공감할 수 있는 글을 만나다니 너무 반가워요. 게다가 오랜만의 포스팅이라니~
저는 무엇보다도 장기하 등장 이후 장기하라는 아이콘을 향유하는 '집단(의 정체성 내지는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특질?)'이 궁금해지더라구요. 분명 '만인'은 아니니 말이죠. 사실 주변에서 장기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공통점 같은게 몇 가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요. 대표적으로 포스팅에서 말씀하셨던바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겠죠, 뭐..
그래서 '계급론'이라는 다소 '낡은' 관점에서 읽어내고 싶었는데, 캐즘님의 글을 읽으니 다른 무언가가 잡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루저의 감수성을 소비할 수는 있지만, 실제 루저가 되기는 싫다"는 표현은 정말 뼈에 사무치도록 다가오네요. 얼마전 번역된 <뉴레프트리뷰>의 바디우의 글을 보았는데 그는 현시대를 공산주의적 가설의 두 번째 시퀀스(러시아혁명부터 문화혁명과 68년까지)와 앞으로 다가올 세번째 시퀀스 사이의 휴지기로 보고 있더군요. 그러면서 이 휴지기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로 기억이 정확치는 않다만 "모든 계층의 젊은이이 공유하고 있는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더군요. 먼저 바디우의 글이 개입을 의도해서 그런지 너무도 깔끔해서 놀랐지만, 뭐랄까 공산주의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정리된 이런 역사관을 보니 뭔가 희망이 생기는 것도 같더군요. 그의 말마따나 지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만 뭐랄까 개인적으로는 이런 폐쇄적 상황을 보면서 살면서 암울해지지 않기도 쉽지는 않은 일 같습니다..
주소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소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주제들에 대해서 보다 명료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네요. 정말 딱 제가 공부하고자 하는 주제들에 대해서 다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이 글은 <A.C.T> 2호에 실리는 건가요? 비슷한 고민을 가진 보다 많은 벗들과 인쇄물로 나눠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작년에 기고할 때 ACT 1호(창간호가 0호였으니 엄밀히 말하면 1호겠죠)에 실릴 것을 염두에 두고 기고한 글입니다.(웹진에 실릴 줄 알았으면 분량을 줄였을 텐데요;;) 다만 이후 경제위기 등 몇가지 요인(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으로 ACT의 오프라인 잡지 발간 계획이 중단되고 웹진으로 발간하는 길을 택한 걸로 압니다. 올해 안에 오프라인 ACT 재발간 계획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네요.
이 글을 쓸 때, 지젝의 '세 아버지론'(혹은 '두 아버지론')을 염두에 둔 건 사실입니다.:)
사실은 이 글은 확장판이 있는데, http://www.a-act.net/act/act.html 에 실린 "우리, 포스트모던 동물들!"이란 글이 포스팅 처음에 언급된 아즈마 히로키 책의 서평입니다. 작년 이 맘때 기고한 글인데, ACT 웹진 오픈이 계속 미뤄지면서 이제야 인터넷에 업로드 됏네요. 허허;;;; 비슷한 내용이긴 하지만, 이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혹시 관심이 있으실까 덧붙입니다.
굥!! 여기서 보니 반가우이. 그런데 여기 어떻게 알았어? 갑자기 실명이 나와서 깜짝 놀랐잖아.^^
도시사회학 전반은 잘 모르지만, "안전"이나 working poor의 "배제"랑 관련된 도시 계획 부분에는 당연히 관심이 많지. 나도 이번 사건 나고, 예전에 봉천3동 자료집 만들 때 모은 자료들을 다시 훑어봤는데, 이건 뭐.. 요새 돌아가는 분위기는 그 때보다도 더 악화된 것 같구나. 하선생님 제자면 믿을만한 사람일테니 한번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이번 주 주말에 학교에 갈 생각인데, 발렌타인데이라 너가 학교에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ㅎㅎ
이론의 이해에 있어서나 그를 통해 얻은 시각을 지금-여기에 다시 재맥락화하시는 센스에 대해서나 올 때마다 일련의 자괴감과 함께 탄복하게 되는군요. 글을 읽고 나니 『까다로운 주체』에서 지젝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떠올랐습니다.
"부성적 권위의 이런 붕괴는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한편으로 상징적 금지적 규범들은 점차로 (사회적 성공이라든가 멋진 육체와 같은) 상상적 이상들에 의해 대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 금지의 결여는 사나운 초자아 형상들의 재출현에 의해 보충된다. 따라서 우리는 극도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갖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불확실한 상상적 균형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서 지각한다(희생양 논리의 보편화를 예로 들어보자. 다른 인간과의 모든 접촉은 잠재적 위협으로서 경험된다. 타인이 담배를 피우면, 타인이 탐욕스럽게 나를 쳐다보면, 그는 이미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르시시즘적 자기-폐쇄는, 교란되지 않은 균형 속에서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게 해주기는커녕, 초자아의 즐기라는 명령의 부드러운 (것만은 아닌) 자비에 주체를 내맡긴다.(598쪽)"
승철아 잘지내냐? 요새 얼굴 못본지 좀 된 것 같네.
혹시 도시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없냐? 범죄쪽에 관심
있으면 도시나 공간이랑 같이 연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충보니까 cuny에 있는 하선생님(하비) 제자인 neil smith라는
사람이 gentrification(재개발?)의 문제에 대해서 '불균등발전'의 맥락에서
작업을 많이 한 것 같더라.
나도 요새 좀 그래서, 이걸 좀 비판적으로 접근해볼 수 있는 방식은
없나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거라 잘 모르는데.
혹시 재미있을거 같으면, 담에 같이 한번 공부해보지 않을래?
이론적으로도 의미있을 것 같고, 실증적으로도 파보면 의미있는
분야일 것 같아서...
그럼 잘지내고, 학교에서 또 보자.
반갑습니다.:-) 어차피 같이 읽었으면 해서 올린 글이니 출처만 밝히시면 퍼가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정치 관련 부분이 가장 인용이 많이 되지만, 사회적 적대 관계 속에서 각 세력들이 자신의 주장을 "내러티브화하는 방식"이라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본다면 앞 부분도 굉장히 흥미로우실 겁니다.(이 글의 주제와 연결되기도 하구요.)
게슴츠레님의 서재에도 재밌는 글이 많네요. 고민하시는 주제가 저랑 비슷하기도 하구요. 제가 자주 블로그 업데이트를 못하니, 차마 자주 놀러오시란 말은 못하겠고;;; 종종 놀러가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