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로서의 certeau는 일상생활의 실천1,2권을 쓴, 그리고 68에 대해 발언하고 the possession at loudun에서 근대적 권력의 등장을 분석한 세르토겠죠.
세르토와 드보르의 비교는 가시성에 기반한 권력(파놉티시즘과 스펙타클)의 작동 그리고 일상적 저항에 초점을 맞추고 이루어졌어요. 세르토가 이야기하는 la perruque같은 비가시성의 실천에 관심이 많긴 했는데, 그 한계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에 debord랑 비교해 본거죠.:-)
spirituality에 대한 글은 쓰시면 꼭 알려주세요. 그러면 제 논문과 맞교환을..^^;;
아...이란혁명에 대한 보고서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군요. 역시 시간을 두고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겠네요.
de certeau 역시, mystic fable에서는 spiritual/contemplative tradition과 mystic을 확연하게 구분하지만 ("the term spirituels, contemplatifs or illumines are used when it is their experiences that is intended, and mystique is used in connection with thier form of discourse." MF, 114) 그의 다른 저서에서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보입니다. 만약 그가 mystic fable 2부를 완성하고 돌아갔더라면 좀더 확실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을 텐데요. 아쉽습니다.
spirituality 란 단어의 연원 (더더군다나 한국신학에서의 용례)을 따져 글을 한번 써보고 싶다고 몇년째 마음만 먹고 있는 중입니다. 언젠가...헤헤.
저는 오히려 문화연구자로서의 De Certeau가 낯설어요. 제게 익숙한 그의 책은 Mystic Fable, Writing of History, Heterologies정도 입니다. 캐즘님과의 대화가 좋은 공부가 되겠네요. 기 드보르와 쎄르토를 어떻게 비교연구하셨는지도 궁금하구요.
근데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이쪽으로... :)
정말 de certeau에 대해서는 언제 다시 한 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논문을 쓰면서 제가 보고자했던 세르토는 문화연구자로서의 세르토이지 신학자로서의 세르토가 아니었던지라, 사실 본인의 커리어에서 더 중요한 부분이었던 신비주의 연구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심히 지나가버린 아쉬움이 있네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제가 푸코의 영성을 언급할 때 염두에 두었던 건, 이란 혁명에 대한 푸코의 보고서에서 제기된 질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푸코는 혁명의 종교적 색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삶을 만들어내는" 생권력의 시대에 권력의 절대적 한계limit인 죽음의 위치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종교와 spirituality의 힘이 절대적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때 푸코가 염두에 두고 있는 spirituality 역시 consumerism과 결탁한 spirituality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문제가 좀 더 미묘하다고 말씀드린 것은, 푸코가 말년에 이야기한 자기-통치적 주체를 consumerism의 댄디즘으로 몰아가는 것이 설득력있는 이해이자 동시에 크나큰 오해이듯이, 이 생권력 시대의 영성의 문제도 상황적 조건을 고려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봄나물님의 관심 부분에 대한 연구가 이런 문제들에 빛을 밝혀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함께 읽어볼 만한 좋은 글이 있으면 같이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de certeau가 제시한 spirituality의 개념은 그의 마지막 저서인 Mystic Fable을 근간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같습니다.
16세기 모더니즘을 거치면서 다른 어떤 과학, 담론과 차별되어 발전한, 혹은 도태된 "mysticism" 이라는 "과학"은 그 파괴성과 일탈성, 이성의 부재성 등을 특징으로 가지며 사회내에 자리를 잡아가는 다른 담론에 대해 타자가 되기를 자처하게 되죠.
de certeau는 이 독특한 담론이 다른 규정화된 담론과 부딪히며 만들어 내는 파장과 파격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은데요...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누구나 떠들어 대는, consumerism과 살뜰한 화음을 만들어 내는 "spirituality"하고는 다른 차원의 spirituality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댓글로 언급하기는 역시 장황하군요. 언제 다시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사실 제가 관심갖는 부분은 spirituality라기 보다는 제도 종교와 제도종교에서 자라온 상징, 이미지들이 아직도 대중의 심리를 움직일 수 있는 힘입니다.
푸코가 spiritual power를 언급했던 부분, 브라질의 Dom Helder Camara 미사 또한 보편적인, 혹은 내면화한 "영성"이라기 보다는 제도종교에 녹아 있는 상징들이 생권력과 복잡하게 얽히게 될때 발생하는 호소력과 일탈성, 그 효과와 파괴력에 더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discipline을 위해 생산된 제도종교의 상징들이 system과 마찰을 일으킬때, 상징 안에 녹아 있는 또 다른 역사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며 오히려 저항의 기제로 작용할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고나 할까요.
그런의미에서 종교의 일상성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흠...제 생각이나 de certeau의 생각은 상대적으로 제도의 힘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카톨릭이나 불교에 더 상응하는 것 같네요.
언급하신 de certeau가 비가시적인 전술적 실천들의 소통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영성spirituality'을 언급한 적이 있지요.(그런 점에서 일종의 종교적 의미를 가진 '촛불'이나 '삼보일배'가 2000년대 들어 대중운동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건 그 자체로 연구할 꺼리이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de certeau의 비교적 단순한 접근보다는 biopower와 consumerism, 종교성 간의 관계는 좀 더 미묘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합니다만, 푸코 역시 생권력에 대한 저항이 어째서 종교적 spirituality에 의존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지요.(이 문제는 댓글로 정리하기에는 너무 장황하네요. 이 분야에 대해선 과문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정리해봐야겠어요.:-))
이번 사제단과 불교계의 개입이 어떤 효과를 낳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봄나물님의 말처럼 보편적 정치/윤리성을 향한 대중적 욕망의 발전의 계기가 될지, 아니면 consumerism과 영성이 맺고 있는 기존의 관계를 재확인하는데 그칠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전자이기를 바래야하는 것은 물론이구요.
우려하신 부분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더 나아가 이번 촛불 집회에서 표출된 '안전에의 욕망'이 다른 계기를 통해 이웃neighbor에 대한 공포와 분노로 전환되어 표출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어쨌든 촛불집회가 전례없는 흥미로운 양상들과 분석들을 쏟아 내리라는 것 만큼은 확실하네요. 저는 신학을 하는 사람이라 사제단 미사를 비롯, 각종 종단의 집회참여와 그에 따른 대중의 반응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21세기 첨단사회에서 종교가 갖는 상징과 제의의 힘(물론 사제단이 사용한 레토릭도 한 몫을 했지만)이 중세사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다니! (이런 현상은 christian/religious consumerism하고는 또 다른 형태인 것 같군요...어쩌면 보편적 정치/윤리성을 향한 대중의 욕망이 드러나는 틈새인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지젝아저씨가 다시 떠오르는 군요)
"설거지"와 관련하여...질문이라기 보다 우려는, 이 축제 이후 사라지지 않을 대중의 분노가 전화하게 될 형태입니다 (특히 사이버 공간에 노출된 수많은 영웅과 적들에게 가해질...). 한국 사회에 또다른 원죄의식을 낳게 되지 않을지.
무한한 연습/얼마전 알파걸의 조건을 분석한 신문 기사를 봤는데, 알파걸의 조건 중 하나로 당당히 "촛불집회 참여"가 추가되었더군요.^^ 물론 이는 극단적인 예이긴 합니다면, 이러한 표상은 각종 언론에서의 분석과 촛불 집회 참가자들의 자기-재현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표상을 분석하기에는 다중이나 역능 같은 개념들이 너무 느슨해 보이는게 사실이죠.:)
물론 축제 기간에는, 일차적으로 제대로 된 축제가 되기를 기원하고 노력하는 것이 맞겠지만, 축제가 끝난 후에는 아마도 기나긴 설거지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네요.:-)
봄나물/국내에서 michel de certeau를 언급하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은데, 오랜만에 이름을 들으니 정말 반갑네요.^^ 몇 년 전 얘기긴 하지만, 제가 학위 논문에서 다룬 두 사상가 중 한명이 세르토였어요.(다른 한명은 기 드보르였구요.) 그런데도 세르토의 주장을 촛불 집회에 적용해 볼 생각은 미처 못해봤군요.
세르토의 전술적 저항을 일종의 하위 문화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번 촛불집회의 풍경은 각종 하위 문화적 실천이 동시에 광장으로 쏟아져나온 집합소 같은 느낌이네요. 아마도 그 배경에는 유럽과 한국의 지형차이와 함께 지난 30년간 진화해온 사회의 네트워킹화도 한 몫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봄나물님이 제기하신 질문은 정확히 제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consumer citizenship의 요구에 담긴 욕망과 보편적인 윤리와 정치에의 욕망이 근본적으로 다른 계열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이들의 조우가 가능한 것인지, 가능하다면 어떤 조건에서 인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전자의 입장이었기에, 이번 촛불집회가 어떻게 귀결되고 어떤 효과를 낳을지 상당히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답니다.:-)
consumerism 과 8-90년대 투쟁의 산물인 집단적 결속력의 조합...분석글 잘 읽었습니다. De Certeau의 The Practice of Everydaylife가 생각나네요. De Certeau 는 소비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이 일으킬 수 있는 보다 산발 적인 저항으로서 소비자들의 tactical resitance를 제시했죠. 아마도 유럽과 한국, 지형의 차이일 것 같습니다. 제 질문은... consumerism과 결합될때 불가피하게 터져나올 수 밖에 없는 자유주의적 구호들이 어떻게 보다 절실한 생존의 문제, 약자의 권리, 타자에 대한 배려, 윤리적 가치와 결합할 수 있을까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