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즘님 답변 감사해요. 덕분에 과장 좀 보태서 겁이 더 덜컥났다는...^^;;
위의 그런책이 있는지 몰랐었는데, 글을 써서 넘기기전에 알게되서 다행이예요. 캐즘님한테 여러가지로 (몰래몰래) 도움을 받네요..일단 얼렁뚱땅 완성되는대로 솔직-직설적 코멘트를 주신다는 조건하에 보내드릴테니 부탁드려요 ^^
(제블로그는 제게도 항상 애매한 in-between상태지만 --; 음악은 종종 업데되는 편이니 놀러 오시구요)
술 자주 마시는 거 아녀요? 살쪄요. ㅎㅎ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늘 한국사회의 실천과 지적인 단절을 수다거리로 삼았는데,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90년대 초반 이후로 추락 경향이 보이 잖아요. 이것 자체가 해명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개인적으로 예전에 자료나 논의를 보면, 한편으로 치열함과 그 수준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괴감과 안타까움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바디우를 읽던 70년대 학번 학출 선배가 마치 선도투쟁론 같다라는 재미있는 평을 하더군요. 물론 그 때와 조건이 너무나도 다르지만 무엇보다도 현재의 나를 너무 초라하게 한다고나 할까요. 그러한 성과들의 어깨 위에 올라 설 기회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희박해 진 세태는 정말 찌질하고요. 근데 이런 정서는 90년대 중반 이후 세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더군요 ㅎㅎ 그리고 파일은 엠팔 메일로 내일 보내 줄께요. 자료 보관하는 서버가 점검 중이네요.
오랜만이에요! euzi님. 전 euzi님 블로그에 종종 가는데요, 왠지 euzi님 블로그는 고즈넉한지라 댓글달기가 그래서 조용히 음악만 듣고 오네요.ㅎ 잘지내시죠?:-)
말씀하신 부분은 저보다 euzi님이 훨씬 더 잘 아실거라고 생각하지만, euzi님만의 인상은 아닐거 같아요. 물론 저 역시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그런 과감한 주장을 펼치는 글들은 그리 많이 보지 못했지만;;; 일상적 파시즘론의 등장과 다문화 담론의 확산은 확실히 모종의 공통된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지젝과 푸코를 버무려 말하자면, 일상적 파시즘론과 PC가 타자와의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테크닉들의 확산을 가져왔고, 관용/인정 등에 기반한 다문화담론과 정책은 이러한 거리를 고착화하거나 재조정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덧붙여서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야기되는 일상의 윤리나 관용, 다문화주의 등등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 역시 어느 정도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얼마전에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라는 책을 봤는데, 이 책에 실린 연구자들의 논문에서도 그런 의구심은 분명히 드러나거든요. 다만 연구자들 각각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의 구체적인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것 같더라구요.
한국의 사례를 다룬 구체적인 문헌을 접했다면 추천해드리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아는 한에서는 그다지 추천해드릴게 없네요.;;; ezui님이 선구적으로 잘 쓰시는 수밖에.ㅎ "글은 무조건 자신감!"이라고 제 지도교수님은 항상 말씀하셨죠.:-) 아. 그리고 내키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혹시 글이 완성되면 저도 살짝 보여주심이...:)
캐즘님 오랜만에 들렀네요. 요즘에 뭘 쓰다가 아무래도 맘에 좀 안들어 잠시 쉬는 중이었는데 이 글을 봤네요.
일상적파시즘론이 직간접적으로 지향하는 바, 즉 일상속에서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라는 것들이 90년대이후 차이의 담론과 소수자(에대한)담론이 대중적으로 전개되는 데 있어서 어떤 윤리적 틀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비소수자'의 '소수자'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 (예. 관용,인정, 수용, politically correct language 등, 그것들이 떄로 '연대'라는 말로 탈바꿈할지라도...)에 중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런식으로 등장하고 있는 한국의 다문화담론은 그것의 근본적 정치적 한계를 벗어날수 없다...뭐 대충 이런식의 주장을 하려다가 앞의 부분에서 이건 그냥 나만의 인상이 아닐까 하며 머뭇거리고 있어요... 이부분에 대한 연구들을 찾아보지 않은 게으름때문에 대뜸 이렇게 말할 자신이 없어졌다는게 정확한 표현이네요...ㅡㅡ;;
그렇군요. 사실 본문에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바디우의 글에 나오는 문화대혁명에서 충돌했던 두 입장(즉 둘이 하나가 되느냐/하나가 둘이 되느냐의 입장 차이)에 대한 설명 역시,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의 팜플렛에 그대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60년대 파리의 마오이스트들이 돌려 읽었을 팜플렛의 문구를 바디우가 99년에 그대로 살려서 쓴 것이죠. 뭐랄까.. 이것도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말씀하신대로 저도 바디우의 좀 더 정치적인 저작들을 우리가 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안타까운 것은, 사실 그런 논의조차도 "바디우"라는 프랑스 철학가의 후광을 등에 입고, 지나가듯 소비되지 않을까하는 점입니다. 저도 토스카노의 소개를 통해 마오이즘에 대한 바디우의 입장을 개괄적으로 접할 수 있었는데, 사실 그 정도의 평가는 한국에서도 극좌파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발견될 수 있는 내용이었거든요. 한국 운동사에 존재했던 레닌과 마오를 둘러싼 많은 논의들은 어느새 이론가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지젝이나 바디우 같은 이들을 통해 레닌과 마오에 대한 재평가를 들어야 한다는 게 어딘지 서럽네요. 아마도 술을 마셔서 그런가 봅니다.;;; 아. 그리고 파일 보내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좀 늦은 덧글이지만 덧붙이자면, 국내에서 소개되는 바디우의 작업은 80년대 중반 이후의 작업들은데, 그것도 주저들(<존재와 사건>와 <세계의 논리> 등)은 번역이 안되어 있죠. 뭐, 사실 영문판도 나온지 얼마 안 됬지만...그나마 제 생각에는 바디우의 책 중에서, <무한한 사고>가 번역되면 바디우의 이론적 골간이 좀 더 쉽게(그리고 짧게) 파악될 것 같고, <메타정치 소론>은 올해 여름 쯤에 나온다고 하니까, 짧지만 정치적, 이론적인 개입도 좀 더 명확해 질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이 양반(과 마오주의자들)의, 80년대 초반 이전 작업들이 소개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특히, <주체의 이론>(영문판도 없는 걸로 아는데)이 번역되면, 80년대 중반 이후 철학적인 후퇴(?) 보다는 보다 논쟁적인 내용들이 많이 알려질 것이고, 이런 논의들이 한국 사회에 여러모로 함의가 깊을 것 같아요. 바디우가 조금 더 잘 팔리면(?) 혹시 누가 할지도 모르겠네요. 매우 급진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불가능하겠지만. 여하튼 당연히, 이 당시 바디우는 매우 레닌적이라고 합니다. 물론 레닌으로 한정되지는 않지만(특히 라캉과 마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디우가 알튀세르의 제자란 점이죠^^;; 다행히, 최근에 영문으로 <주체의 이론>이 일부 소개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읽다 말았는데, 느낌은 "문건"같다고나 할까...포스가 느껴지더군요. 실린 저널은 positions 13:3 Winter 2005이고, 몇몇 글이 실려 있습니다. 정리를 해야하는데 시간이...ㅎㅎ^^;; ps: 혹시 파일이 필요신 분들은 보내드리겠습니다.
namunnib/ 저번 아즈마 히로키 책을 소개하면서도 썼지만, 오타쿠들은 단지 독특한 하위 문화 집단이라기보다는, 첨단 소비자본주의의 뉴타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00년대 들어 일본이 "쿨의 제국"이라 불리면서 주목받는 원동력이기도 하구요.
Thomas Lamarre같은 문화연구가는 오타쿠를 네그리와 하트의 multitude와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이건 좀 순진한(혹은 멍청한) 생각인 거 같아요.:-)
laron/ 예. 우리 말로 "댁은..."이라고 할 때처럼, 상대방과 약간의 거리를 둘 때 쓰는 존칭표현이기도 하죠. 아시겠지만, 그래서 오타쿠 연구자들은 그 단어에서 자신만의 집을 가지고 타자와 내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오타쿠들의 본질적 욕망을 읽어내기도 합니다.(그런데 "오타쿠"라는 단어의 기원은 한 칼럼리스트가 처음 사용해 미야자키군 사건으로 완전 정착되었다는 게 정설 아닌가요?)
모친 살해의 부정성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사실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에바>에서는 모친에 대한 욕망도 그를 살해하려는 욕망도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완전해서"라고 이야기하는군요.:-)
흠/ 그 약간 뻔한 결론이, <에반게리온>의 대중성의 근거겠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아이와 기존의 어른을 대비시켜서 성장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아사다 아키라의 분석에서 전제되는 것처럼, 주체성의 변환은 개인의 성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체제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카운터 스트라이크나 레드 오케스트라 같은 게임들을 즐기는 저로서는 신경계 정지에 가까운 충격이군요. 너무나 정확해서 말입니다.그런데 멋진 비유에도 불구하고, 헤세의 데미안에 나온 비유처럼, 결국은 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떠올려볼때, 결론은 약간 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지하다시피, 오타쿠의 어원은 "집"을 뜻하는 "宅"이다.
제가 알기로는 집을 뜻하기도 하고 동시에 상대방(2인칭)을 높여 부르는 것으로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렇다면 초호기의 첫 투입시점이 언제인지 알고 있습니까?"
"녜. 그렇다면 당신은 루크의 포스수치가 요다보다 얼마나 높은지 알고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_-... 오타쿠들 사이에서 '너'대신에 '당신(오타쿠お宅)'이라는 대명사를 통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결국 오타쿠라는 단어가 특정인들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바뀌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음... 위키를 비롯해 각종 검색을 해 보니 다양한 설이 많네요. 녜. ㅠㅠ)
이 글에서 "집 - AT Field - 오타쿠의 존재근거/방어선 - 오타구:집"이라는 회전의 흐름을 가져가려 한다면, 단어의 형태적 기원뿐만이 아니라 의미-사회적 기원에 대해서도 보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풀리지 않던 에반게리온의 의문을 풀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모친살해"의 모티브는 무엇에서 나올까요? 어미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아비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모친살해? 자아를 계속 유년상태로 머물게 하는 모친을 살해? -_-... 에반게리온 다시 봐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