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슨이 노스탤지어 영화는 동시대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시도라고 했던가요?(기억이 가물가물..ㅎ) <박하사탕>이나 최근의 <오래된 정원> 같은 영화는 동시대 문제를 회피하려는 패스티쉬라고 간단히 처리하기보다는, 그것이 반영하는 역사적 무의식을 여러 사회-정치적 맥락과 연결시켜서 좀 더 정교하게 파헤쳐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런 점에서 김선아 씨의 글은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518기념비 얘기를 듣고 딱 떠오른 게 지젝이 종종 예로 드는 "기도하는 물레"였답니다. 어찌나 그리 잘 맞아떨어지는지..ㅎ
아......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논의로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군요. 저는 일련의 탈역사적 영화들을 보면서 프레드릭 제임슨의 '노스탤지어'를 떠올려 본 적은 있습니다만, 코제브를 생각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캐즘(님의 선배)님 덕분에 좋은 생각꺼리를 얻었습니다(^.^)! 저는 일전에 이창동의 <<박하사탕>>을 다시 보면서 주체의 윤리를 묻지 않고 구조와 상징적 아버지에게만 모든 잘못을 돌리는 것 같아서 이창동이 역사를 생각할 때 가지는 윤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또한 현대사를 다루지만 사실 역사로부터는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동시에......). 음, 그런데 새로운 '민족-국가 만들기'의 기획상 설경구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여러 영화들에서 국민 국가에 관한 알레고리가 여기저기에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흠, 그런데 광주는, 좀 씁쓸하네요. 기념비로 외상을 은폐하고 봉합하려고 하다니 말입니다. 피해 간 줄 알았던 부메랑이 틀림 없이 다시 돌아와 등짝을 찍어 버릴 지도 모를텐데 말이지요......
가슴이 뜨끔하네요;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책이 어느새 내 대신 생각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여기에 '그래! 내 논리의 전개상 이게 내가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지!'같은 식의 환상까지 더해지면 사태가 심각해 지는 것이겠죠(제가 좀 이런데ㅠ.ㅠ). 철학자에 대한 팬덤은 진리에 대한 환상이 섞여 있어 더 헤어나올 수 없게끔 강화되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무한한 연습/ 어쩌면 지젝이 가진 약점은, '법' 외부에서 사유하려는 이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약점인 것 같기도 해요. 들뢰즈 역시 파시즘적 사유라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하잖아요.
하지만 지젝에 한정지어서 무한한 연습님의 말처럼 지젝의 혁명에 관한 사유가 그의 이론적 곤궁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이론적 곤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가 또 다른 논쟁의 영역이 될 수 있겠죠. 손쉬운 답변으로는, 링크한 글에서 샤비로가 슬쩍 흘리는 것처럼, 지젝 본인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이 가진 양가적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긴 하네요.
링크한 사이트들은 모두 유용한 사이트들이니 혹시 모르셨다면 참고하시면 좋을 거에요. 특히 첫번째 링크한 샤비로의 사이트에는 좋은 글들이 꽤나 올라와서 종종 들르는 곳이죠. 그나저나 파전에 막걸리라니 정말 조만간 무한한 연습님을 오프에서 한 번 뵈야겠네요.^^
덩야핑/ 영화 자체는 너무*3 기대할만한 영화는 아니지 않나 싶어요.^^ 물론 영화의 미학에 대한 지젝의 설명은 정확해요. 영화 전체가 굉장히 인공적인 느낌이 들거든요. 그 느낌만으로도 한 번 볼만한 영화인 것 같긴 합니다. 그리고.. 꼭 되십시오.하하.
아앙 ㅠㅠ 삼백 되게 보고싶었는데;ㅁ; 글을 읽으니까 혼자 가서 볼 걸 후회막심이에요 나중에 비디오를 볼 때 이 글을 생각하게 되겠죠 어떤 영화일지 너무너무너무 기대됩니다>ㅅ<
글구 번역문 감사해요>ㅆ< 1년 가까이 지젝의 글을 읽지 않았는데 간만에 봐도 흥미진진합니다'ㅁ' 아직까지 해체/재구성에 이렇게 새로운 사람은 못 봤어요 내가 돼야지
lacan.com에 올라 온 글이었군요. 영화 <<300>>을 보질 않아서, 이 영화에 관한 글을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더니 지젝이 이런 글을 썼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게다가 깔끔한 번역까지(^.^). 마오와 로베스피에르 선집의 지젝 서문은 제가 찾아서 읽어 보아야지요. 후후후).
(아도르노가 말러의 음악에 관해서 말했던 것처럼) 세상과 어설프게 화해하느니 차라리 자폭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젝의 혁명에 관한 사유가 (그가 들뢰즈를 비판했던 것처럼 오히려) 그의 이론적 곤궁의 다른 표현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어요. (캐즘님께서 저보다 훨씬 잘 아시겠지만) 지젝의 방식이라면 현실 정치에서 혁명가와 알-카에다가 어떻게 구분이 될 수 있는지도 미심쩍고요. 과연 지젝의 글을 읽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적대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적대의 지점에서 안티고네 식으로 투쟁을 할 수 있을지...... 지젝의 글을 읽으면 속이 시원한 것을 넘어서 아주 가끔은 피가 끓기도 하는데 말이죠(그래도 "규율과 희생정신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라는 말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무섭기는 해요(^.^;)).
하여튼 덕분에 지젝 글 잘 읽고 갑니다. 캐즘님께서 링크해 주신 다른 사이트도 들어가 보아야겠어요. 아- 그나저나 비가 오니, 김치전이나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네요(^.^)-
물론이죠. 누굴 공부하느냐가 여기서 중요한 거라 보진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론,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편가르기(?) 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도 괄호 안에 "그리 크진 않겠다"고 쓴 거고요. 단순히 소심함(?)의 표현은 아닌 셈이죠 ^^a
Scanplease/
앗. 스캔플리즈님이시군요. 저도 님 블로그에 종종 가고 있습니다. 앞으론 댓글도 좀 남길게요.ㅎ 그리고.. 듣고보니 스캔플리즈님의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EM/
역시 저의 팬 EM님이시군요.^^ 소주 한 잔 좋지요, 근데 물건너 멀리 계시잖아요.ㅎ
헤겔과 초기 맑스의 사상을 중심으로 최근의 현상들을 분석하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아요. (둘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사실 헤겔이나 맑스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사상가들 아니겠습니까. 핵심은 누굴 공부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문제의식에서 공부하느냐인 것 같아요. 제가 푸코나 지젝을 더 공부한 건 최신 유행을 좋아하는 제 얄팍한 취향 때문이라는..-.-;
김강/
반가워요 김강님. 글에도 썼지만 전 그냥 공부하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잠시 사정상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는 항상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 김강님의 말처럼 동일성의 해체는 고통의 과정일 뿐 아니라 기쁨과 열락의 과정이기도 하지요. 푸코도 동일성의 외부가 가진 치명적인 유혹적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고, 정신분석학에서도 자신의 욕동에 충실할 때의 주이상스에 대해서 강조하지요.
제가 글에서 동일성의 해체가 가진 어두운 성격을 강조했던 건, 일종의 막대 구부리기라고나 할까요?^^ 최근들어 자신의 동일성의 해체가 가진 생성과 창조의 과정에 초점이 더 맞춰지면서, 그 파괴적 성격 혹은 적어도 그 양가적 성격은 잊혀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론 한국에서 타자의 철학이 크게 보자면 들뢰즈의 생성의 철학, 특이성의 철학으로 수렴해가고 있는 것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포스팅할 기회가 있겠지요.)
이야.. 이거 늘 블로그에 글 올라올 때마다 감탄하게 됩니다.^^ 뭐하는 분이실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이번 글도 아주 동감이 갑니다.
그런데 약간 다른 생각이 있다면, "동일성의 해체"를 논하는 철학이 띄게 되는 정조가 반드시 그렇게 '어두움', '죽음'이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동일성을 붙드는 철학이야말로 니체식으로 말하면 새로운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의 철학이요, 죽음의 철학이 아닌런지요.
동일성의 '해체'가 해체이가만 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생성의 과정일 수도 있다면, 그것은 죽음과 어두움의 정조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쁨과 생명의 정조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