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글의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나는 아마도 (1)에 속할 것 같다.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구분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인권변호사 시절의 일종의 정치적인 실천가 노무현을 포함하여 정치인 노무현'들'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거슬러 올라가 추출한 모습을 현재의 다른 사안들에 어떻게 접속을 시킬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꽤 했는데(그의 죽음이 슬퍼서 그런 것은 아니고, 현상이 나타나니까 나름대로 생각을 해 본다는 것이......), 어쩌면 말이 '역사적'일 뿐 결국에는 '탈역사적'인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될 수도 있겠구나(노무현'들'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노무현'들'을 잘 구분해 내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자신이 없어지는군......(^-^;)). 최악의 경우에는 MBC 같은 방송에서 과거의 노무현으로부터 시작해 죽음을 맞이한 노무현까지 연속해서 보여 주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덕분에 좋은 생각을 얻었어(^-^)-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데리다의 논의에 기대어 애도를 이야기하면서 복수의 노무현을 이야기하면서, 그 복수의 노무현을 하나씩 분리하는 작업도 너의 구분 방식을 빌리면 (1)과 어느 정도 겹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전개되는 애도도 결국 '탈역사-탈정치'의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할 수 있는 건가?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을 통하여 애도를 하는 작업이 반드시 '원형'을 '발굴'하여 고인의 좋은 점을 계승하고 발전시키자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물론 네가 분석한 것은 애도의 담론 자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노무현의 죽음을 둘러싼 애도의 담론이지만, 글을 읽다보니 궁금한 것이 생겨서 말이야(^-^).
음. 좀 뒤늦게 답글을 달자면.. 일단 무연도 말했듯이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죽음이나 애도 전반에 관한 문제는 아니야.(사실 5월이 가기 전에 한번쯤 91년 5월을 다루며, 죽음과 정치의 문제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어느새 6월이네.^^;; 내년엔 반드시..ㅎ) 사실 노무현에 대한 부분도 포스트-히스토리에 대한 글을 쓰다 생각나 덧붙인 성격이 강해서 좀 더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일단 데리다는 잘 모르기에 조심스럽지만, 추측하자면 데리다가 말한 복수의 대상에 대한 애도라는 말은, 애도의 대상이 어떤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것에 문제제기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사실 여기서 더 나아가자면,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은, 그의 복수성을 인정하는데서 더 나아가, 애도의 대상이 되는 이조차 모르고 있던, 그의 것이었으나 동시에 그에게 속하지 않은 무엇을 애도하는 것일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네.(애도의 대상은 이미 없기에 애도라는 행위는 언제나 남겨진 주체의 몫이거든.) 그렇게 따지자면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노무현 그 이상을 애도해야 하는 것이겠지.
사실 이러한 탈중심화는 애도를 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 누군가의 죽음은 내 안에 있지만 나도 미처모르는 어떤 부분, 즉 나와 타자와의 기존엔 인식하지 못했던 연결성과 '나'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사건이기에, 결국 애도란 건 되돌려줄 수 없는 타자의(그러나 송신자에게 귀속되지 않은) 어떤 메세지와 나도 모르는 나의 외밀한 어떤 부분의 불가능한 단락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물론 반농담이고, 나는 이런 공허한 말장난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단지 내가 흥미로운 건, 이런 모호한 감정을 정리하는 애도사가 그 대상에게 어떤 자리를 배정해 주는가와 관련된 지점이야. 이는 동시에 애도의 주체가 차지하는 자리를 배정하는 것이기도 하지. 마치 한국 사회 운동의 담론에서 애도의 대상을 "열사"로 지칭할 때, 애도의 주체는 자연스레 "전사"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무연의 말처럼, 노무현의 원형을 거슬러 올라가 발견해 애도하는 방식이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애도사가 어느새 집권자로서의 노무현의 위치를 은밀히 삭제하고, 노무현에게 반민주화 세력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의 위치를 배정하고 있기 때문이야.(그렇다면 이 때 애도의 주체들에게 배정되는 주체-위치는 어디일까?)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내가 보기에, 소위 민주화운동 세력이 지난 집권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민주화담론을 활용한 방법과 정확히 일치하지. 즉, 김대중-노무현 정권동안 이들은 자신이 이미 "지배계급의 분파"임에도,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은밀히 삭제한 채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한국 사회의 가장 "보편적" 적대인 "민주화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믿었거든". 그간 민주화담론이 여타의 사회적 적대들을 전치시키는 텅 빈 담론으로서 기능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인데, 난 사실 지난 대선에서 "민주 대 반민주" 담론이 무력화되면서 이러한 환상이 이제 소멸단계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아.
노무현의 죽음을 통해 확실해진 것은, 이러한 텅 빈 "민주화"라는 전선이 다시금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고, 불행히도 난 이러한 부활을 그다지 환영할 수 없어. 오히려 이 부활한 "민주화"라는 거대한 비이야기가 좀 더 급진적인 목소리들이 나올 수 있는 공간을 협소하게 만들거나 구체적인 사회적 적대들을 다시 한번 재흡수하는 기능을 할까봐 걱정하는 편이지. 암튼 술먹고 쓰니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군.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만나 해보자. 그나저나 메일이나 다시 보내달라니까..-.-;
이런 글이 있었었다니 깜짝 놀랐습니다ㅎㅎ 저도 개인적으로 1년 정도 과반에서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세미나를 할 때마다 이것이 하나의 지식, 교양으로 흡수되어 몸집을 불리는 데에만 쓰이면 무슨 쓸모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교양주의라 부르고 다녔었는데 이 글을 보니 정말 반갑군요.
여러가지 논점이 뒤섞인 리플에 깔끔한 정리답플에 감사드립니다. "시간의 불균등성의 인정" 부분은 정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었습니다. 발터 벤야민이 해방될 후손들에 대한 기대보다는 오늘날의 지배적 서사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던 과거의 사건, 가능성들에 중점을 둔 것도 대중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가정(믿음)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스트히스토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세밀한 관점에서 역사의 종말의 불가능성, 그리고 동물화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되지 않나 싶군요. 개인적으로는 발리바르의 텍스트에서 그런 작업들이 이뤄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름붙이기의 이론적인 유혹을 경계하고 거기에서 아포리아를 찾아내는 그의 작업은 '동물의 시대'라는 개념으로 현 정세를 투명하고 정적인 방식으로 규정하는 히로키와 대비했을 때 방법론적인 덕목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히로키 자신이 교수신문 인터뷰에서 그 점에 대해 흔히 '오해'받고 있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만 일단 제가 아는 한에서의 히로키는 위의 혐의를 벗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원 씨의 글을 보면서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고 있다는 인상을 막연히 가지고 있었는데 캐즘 님의 지적을 보니 갈증이 확 풀리는군요ㅎㅎ지젝의 논의도 이렇게 적용해서 들으니 새롭구요. 스스로의 태도를 다시금 반성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건 캐즘 님이 설명하실 부분이라기보다는 지젝의 몫이겠지만 '분석'과 '행위'와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에 인정한다해도 양자 사이의 불투명한 간극이 없다고 말을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분석의 자족적 성격에 대한 두려움이 나오는 것이고요. 리플과 포스트 모두 감사히 너무도 잘 읽었습니다. 아 그리고 논문도 잘 읽었습니다ㅎㅎ덕분에 생각을 진척시켜나가는데 있어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충분히 지나지 않았기에 분석에 곤란이 따르는 위의 어려운 문제는 일단 차지하고서라도 저는 브라운의 주장과 관련하여 이 포스트에 다른 리플을 남겨보고 싶습니다. 제 질문은 "정치적 도덕주의"의 등장이 과연 대중의 실제적 곤란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보정치를 고민하는 좌파진영의 곤란에 태어난 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즉, 브라운은 현재의 자신(과 동료들의) 정치적 곤란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의 사회 일반에 어떤 '정치의 계절'이 있었다고 낭만주의적 환타지를 품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죠. 정리본만을 보고 이런 주장을 무리하게 덧붙이려는 욕심의 근저에는 브라운에 대한 불만보다는 최근 저 자신의 정치에 대한 생각에 대한 반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제 자신이 어쩌면 제 세대(혹은 그저 저 자신)가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지각이 뚜렷한 상태로 명확한 정치적 방향성을 가진)진보적 대중운동이라는 것이 실제 당시의 시점에서는 그렇게 뚜렷한 자각을 가진 채 진행되었던 것만은 아닌가 싶더군요. 오히려 그러한 '완벽한 대중운동' 자체가 사후적으로 환타지로서 구성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자신의 정치적 무력감을 그 환타지를 향유하며, 사실 이상적 운동이란 없으며 도덕주의든 감상주의든 뭐든 불안정하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분출되는 것 자체가 '정치'의 본질이라는 걸 인텔리적 감각 아래에서 '부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구요. 이는 윗 리플에서 말한 지젝의 글을 읽으며 느낀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특히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을 듣다보니 이런 생각이 보다 더 강하게 들더군요. 그리고 이런 개인적인 반성의 논리들은 대중의 수동성 혹은 탈정치성을 강조하는 일련의 '포스트히스토리'담론들(이런 거친 일반화의 대상이 과연 무엇인지 의문시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에 적어도 '혐의'로서는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치적 도덕주의'에 대한 담론 자체가 전과는 딱히 다를 게 없는 '몰반성적'인 대중을 더 이상 이끌어나갈 자신감을 상실한 좌파 진영의 곤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보다 정치해지고 있는 포스트히스토리 담론 자체가 분석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만 대중을 향한 '생떼'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하는 조금 과도한 의심을 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의 혁명적 성격을 물신화하고 자신의 책임을 모두 방기하는 봉기주의가 이런 입장과 교묘히 짝을 이루는 '정치로부터의 회피'라는 동전의 뒷면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그렇다고 포스트히스토리담론들이 actuality를 상실한 사변적 구성물이라고까지는 말하고 싶지는 않고 또 그렇게 말할 능력도 되지 않는다만, 담론 자체의 당파성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 뒤따르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덧붙여 봅니다.
이 문제는 따로 글을 남기지 않고 댓글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몇가지 지점들이 섞여 있어서 정리하면서 얘기드릴께요.
1.아마도 포스팅에서 언급한 웬디 브라운이든 누구든, 정치의 한 본질이 비합리성 혹은 반이성이라는 것을 부정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정치의 본질로서 "신화"를 이야기한 소렐은 말할 것도 없구요.^^ 말씀하신 부분은 오히려 하버마시안들에게 어울리는 지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통에 대한 추모의 물결에서 보듯이, 공식적으로는 이해관계에 따른 합리적 선택일 뿐이라는 투표 행위에조차 "끈적한 어떤 것"은 항상 붙어다니기 마련입니다. 이런 부분을 단지 탈정치성으로 간과한다면 "정치공학"이 아닌 "정치"에 대한 담론은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비합리성의 계기적 중요성을 이야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합리성이 발현되고 코드화되는 "형식"에 대한 분석입니다. 아마도 이 부분이 웬디 브라운의 고민이 아닐까 싶군요.
2.웬디 브라운의 일차적인 분석 대상은, "정치라는 것"을 둘러싼 정치철학적 담론들입니다. 물론 말씀하셨다시피 그렇다고 이것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정치에 대한 상상력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학자들의 정치담론이라는 것도, 결국 현실 속의 입장을 좀 더 세련된 언어와 좀 더 정교한 체계로 구성한 것일 뿐이고, 또 아카데믹 담론과 현실 담론은 순환하기 마련이니까요.
3.포스트-히스토리 담론의 혐의로 지적한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포스트-히스토리 담론이 당파성을 가지기 위한 핵심은 시간의 불균등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도 역사를 살고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 혹은 역사의 생기가 지금도 가능하다는 것을 가정하지 않으면, 포스트-히스토리 담론은 후쿠야마 주장의 좌파적 뒤집기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이야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잠이 와서 댓글이 좀 두서가 없군요.ㅎ
"노무현의 정치적 입장 혹은 과오를 떠나, 인간 노무현과 그의 진정성 만은 존경한다"에 대한 비판은 마치 저를 향해 보내진 편지처럼 느껴지는군요.ㅎㅎ노무현을 한국식 보나파르티즘의 원형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고인에 죽음에 안타까워해야 할 것만 같아서 '수치심'이라는 도덕적('윤리적'이라는 시크한 용어로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덕목을 강조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 식의 태도를 취해봤던 데에는 먄약 노무현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다면 제 자신이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지젝이 언젠가 "Why cynic are wrong?"이라는 글이 말했던 것처럼 결론적으로는 정치와 무관한 관조적 분석가의 입장에 자리잡아 공부로 '소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말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의 죽음이 오늘날의 정치적 지형 내에서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나갈 수 있느냐는 물음일텐데 확실히 긍정적인 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질문같습니다. 그와 함께 정치적 도덕주의도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나면 세속주의/실용주의가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괜히 앞질러 가는 것이 아닌가 싶군요. 발리바르가 90년대 초반에 유럽의 상황에서 일찍이 진단했던 내셔널리즘적 반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동아시아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도덕주의라는 대용물도 잃은 정치적 정체성의 공백이 어떤 정세적 효과를 낳을지에 대한 논의가 긴급하게 요구되는 이론적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