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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빈곤, 성적 소외, 성복지

 

"그녀가 남편과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흩트려 놓고 그를 차지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첫째로 남편은 아내에 의해 방해받고 싶지 않을 뿐더러, 더 이상 아내에 대해 관능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고백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녀 역시 남편을 더 이상 열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남자 친구와의 간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태는 암초를 지니고 있다. 즉 그녀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하며, 남편은 그 간통에 대해 알게 되면 곧바로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그녀에게 자세히 들려주며, 결단을 내릴 시간을 주었다. 몇 주 뒤에, 그녀는 결국 남자 친구와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였고, 남편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애를 썼으며, 최근에 나타났던 신경증 증상이 잠시 후에 사라졌다고 들었다. 자신의 도덕적 고려를 무시하라는 나의 성공적인 권고를 통해 그녀는 바로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법에 따르면, 나는 간통죄를 저지르도록 만들었다." (빌헬름 라이히)

 

 

결혼을 한 이성애 커플과 부부는 사랑을 영속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성욕을 배려하지 않으며, 상대가 성욕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여긴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는 커플관계에서도 사랑이 영속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혼인계약을 통해 서로의 신체적 자유를 속박하며, 성적자유를 구속한다. 그리고 커플연애를 통해 그 계약을 열심히 연습한다.

 

인간의 성은 이성애/동성애, 남성성욕/여성성욕 등등으로 결코 구획되지 않으며 잠재적인 모든 성이지만,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신체와 욕망에 대한 각종 규제들을 도입한다. 우리 사회의 성은 빈곤한 상태에 이르렀고 마비상태에 이르렀지 '과잉'되거나 '왜곡'된 것이 아니다. 왜곡되었다면 이성애와 동성애를 가르고 남성성욕과 여성성욕을 가르면서 차별을 두는 사회의 정상성 규범 자체가 왜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의 담론은 항상 성욕이 과잉되었다고 대중들을 위협한다. 결혼관계와 이성애적 관계를 떠난 모든 성욕은 과잉이라는 관념을 유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빈곤에 시달린다. 이상하다. 곳곳에 성의 상품화가 판치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빈곤에 허덕인다. 결국 자본은 욕망을 억압하고 성의 필요를 억제시키면서 성이 상품화될 조건을 만든다. 성빈곤이 가속화될 수록 성의 상품화는 촉진되며, 성의 상품화가 촉진될수록 성빈곤은 확대된다. 성은 오로지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의무로 전락하고 번식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상대를 소유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자유연애라는 개인의 영역속에서 명멸해간다.

 

노동자의 성적소외, 도시빈민의 성적소외, 농민의 성적소외, 남성의 성적소외, 여성의 성적소외, 동성애자의 성적소외, 장애인의 성적소외, 노인의 성적소외, 청년기에 있는 젊은이들의 성적소외 등등 성적소외가 넘쳐나지만 이 사회는 성빈곤에 무관심하다. 다른 물질적 재화의 부족과 빈곤에 대해 공공의 접근방식을 취하려는 노력과 달리 성의 부족과 빈곤에 대해서는 공공의 접근방식을 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은 언제나 부르주아적 개인주의 영역에만 남겨진다. 따라서 성에 대한 접근은 계급화, 성별화, 차별화된다.

 

성인남성은 다른 성적 소외자들에 비해 성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허용되지만, 그 대부분은 구매행위를 통해서 성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에게 죄의식을 갖게한다. 여성의 성욕은 체계적으로 인정되지 않거나 배제되며 오로지 상품으로 대상화될 뿐이다. 여성의 성욕은 스스로를 대상화함으로써 자기성욕으로부터조차 소외된다. 여성들은 패션, 화장품 산업,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 감성적이고 신체적인 이미지를 소비함을 통해 성욕의 충족을 대체한다. 그렇게할수록 점점 더 여성 신체와 성욕은 사물화를 향하게 된다. 욕망은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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