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08

‘남성성욕’ 운운, ‘양성평등’ 운운은 기본적으로 성노동자의 입장이 될 수 없다

 

1.

전효숙 재판관(이한 전재판관)이 헌법재판소 소장이 될 가능성이 유력해지면서 전재판관의 성매매 특별법에 대한 이전의 태도가 주목을 받고 있다. 전재판관은 남성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합법화의 길을 찾고 있다는 식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법체계 속에서 양성평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전재판관의 관점은 결국 성노동에 있어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요청하는 합법화를 위한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남성성욕 운운하고, 현재의 성별구도적 성노동에 있어 양성평등 운운하는 것은 성노동자의 입장과 대립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남성성욕 명분과 양성평등적 관점이 왜 이론적으로 틀렸는지, 왜 현실적으로 그것이 성노동자의 이해와 점점 반대되는 경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하고, 성노동 운동에 있어 어떤 원칙이 중요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한다.

 

2.

전재판관은 남성의 성적 욕구는 여성과 비교할 때 신체적인 구조에 있어서 차별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의 성욕 해소와 관련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 남성의 성욕해소 기회 박탈의 관점으로 성노동의 현실에 접근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얘기로 들린다. 그러나

 

전재판관의 남성성욕 운운이 과연 옳은지는 남성의 일반적 성욕이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확인해보면 된다. 우선 남성 일반은 그가 성노동자가 아니라면, 성매매 특별법 때문에 생존권에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는다. 남성 일반의 생존권과 성특법은 무관하다.

그렇다면 성욕의 해소 측면에서는?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다. 남성 일반은 성특법이 존재하건, 하지 않건 거의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유사 성행위 업소, 단란주점, 안마시술소 이런 곳이 번성하는 것을 보라. 남성의 입장에서는 성노동자가 어떻게 취급되든 성욕해소적 측면에서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현실에서 성욕을 해소할 수 없어 고통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성특법 때문에 성욕을 해결할 수 없어 자살했다는 남자 얘기를 들어본 바가 없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남성성욕을 강조하는 걸까? 한계레의 지면에서도 많은 합법론자들이 남성 성욕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왜 합법화론자들이 성노동자의 권리가 아니라, 남성성욕 운운하는지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부터 그런 억지논리가 어떤 사회적 맥락안으로 들어서는지 살펴보자.

 

3.

전재판관의 논리 구조를 살펴 보면 남성성욕의 특성을 성을 사는 것에 있는 것으로 본질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은 성을 사지 않은데 남성 성욕은 필연적으로 성을 사게 되어있다는 것과 같다. 이 논리의 문제는 성적 거래를 돈이 오가는 일반적 거래로 보지 못하게 하고, 남성적 특성으로 규정함으로써 성별적 차이로 인식하게 만든다. 또 하나의 문제는 마치 여성은 본질적으로 돈을 주고 남성과 성적거래를 하지 않는 것처럼 규정함으로써, 남성에게는 원죄의식을 동원시키고 여성에게는 성을 사서는 안 된다는 억압규범을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여성은 부득불 성을 팔 수 밖에 없지만, 성을 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 논리가 가진 두 측면 모두 철저하게 성적거래에 대해 몰역사적인 관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현실과 맞지도 않고, 몰역사적인 남성성욕 운운이 매춘의 합법화 공론에서 갖는 의미란 무엇일까? 도대체 왜 남성성욕을 들이대는가? , 합법화 논의에서 남성성욕이 갖는 효과에 대해 현실적인 그림을 그려보자. 남성이 원래 그러니까 남성성욕을 해소하는 길을 마련하자고? 필요악이라 이거지. 좋아, 거기에 얼마간 동의해준다고 하자. 그렇다고 무차별적으로 남성성욕을 해소해서는 안되고 성을 사지 않는 여성의 입장도 반영해야 하니까 국가가 강력하게 통제해야 하는 거 아냐? 결국 이러한 구도에서 합법화가 공론화될 뿐이다.

성노동자의 권리향상은 배제되고, 철저히 타인의 노동을 향유하는 사용자(남성) 중심주의 문제로 합법화 논의가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노동의 사회적 긍정성 논의는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게 되고, 단지 남성성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제해야 하는가? 라는 법체계적 관점만 자리잡게 된다. 합법화가 남성성욕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요청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어버릴 때 공창제, 혹은 공창제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강력한 규제주의적 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남성성욕과 성생활의 사회적 조건은 합법화 이전이나 그 이후나 실상 별로 달라질 건 없다. 아마도 현실적으로 눈에 띄는 가장 큰 변화는 매춘알선업 금지(혹은 규제) 및 노동허가제라는 형태의 저임금 일자리가 성노동자들에게 합법적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경찰의 단속보다 무서운 사회적 규제다.

 

4.

정리하자면, 남성성욕의 특징을 성을 사는 것으로 본질화함으로써 결국 그것을 하나의 성적인 차이로 용인하려는 양성평등의 논리가 나온다. 그리고 뒤따라 평등의 상호성논리에 입각해 성을 사지 않는 것으로 본질화된 여성의 입장을 반영함으로써 국가의 강력한 규제와 통제를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공평하고 매끄러운 논리적 과정인가! 완벽하게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점만을 뺀다면 말이다.

 

결국 남성성욕을 중심에 놓고 합법화 운운하는 논리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의한 합법화를 자연스럽게 요청하게 된다. 전재판관은 그것을 법체계적으로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노동자의 권리향상이라는 문제를 부차화시키며, 끊임없이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식으로 성노동자의 입장을 완벽히 배제한 채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입각한 합법화로 흘러가게 된다면, 여기에 이해관계를 같이 할 세력은 엄청나게 많아진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각 정당정치세력들(이들은 어떻게든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표를 갉아먹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으므로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의한 합법화로 공론화되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여성단체들, 보수적 도덕주의자들, 양성평등주의자들, 종교단체들, 심지어 성노동자는 괜찮지만, 매춘알선업자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등등. 아주 다양한 세력이 이해를 같이 할 수 있다.

탈성매매를 주장하는 여성단체들의 이해와도 일치할까? 현실적으로 일치한다. 왜냐하면 성노동자의 일이 저임금 일자리가 될 때 오히려 탈성매매가 촉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성노동자들이 돈을 너무 많이 버니까 그쪽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렇게 각 정치세력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입각한 합법화를 지지할 수 있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근거들을 각각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법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성노동자들의 입장만 빼고 모두 타협에 들어설 수 있다.

 

5.

바로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우리(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남성성욕의 해소양성평등을 주장하는 한국인권뉴스 (양성)평등연대와 입장을 같이 하지 않는다.

나는 당면한 현실에서 성노동자의 입장이라는 원칙을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노동자들에 의한 성노동의 자율관리제도라는 우리의 기본 입장에서 보자면, 성노동 네트워크에 모인 여성주의 그룹들의 매춘에 관한 모든 법률의 완전한 철폐에 입각한 비범죄주의 원칙을 지지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입법적 공론화 속에 성노동자의 입장과 성노동자의 자율, 그리고 이 분야에서 일하는 협력적 노동자의 자율을 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고 싶다. 남성성욕 운운과 양성평등적 개념은 현실을 왜곡시키며,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입각한 합법화를 공론화하려는 것일 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성노동 자율 공동체를 위한 연대(준)” 소개

“성노동 자율 공동체를 위한 연대(준)”


연대의 기초

1. 개괄
성노동 자율 공동체를 위한 연대(이하 ‘성자공연’)의 기초는 무엇보다 현행 ‘성매매특별법’(성특법)에 의해 불거진 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함께 하고 지지, 지원하는 것에서 그 기초를 찾는다. 성노동자들은 국가(그리고 여성가족부)와 법체계에 의해 ‘대상화’된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 주체적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따라서 성노동자들의 권리향상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매춘을 범죄시하고 성노동에 대한 사회의 긍정적 성취를 가로 막는 것이 비단 성특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성별권력관계, 가족 및 혼인제도를 비롯한 욕망의 해방을 억압하는 섹슈얼리티 규범 및 제도, 문화들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성별해방의 관점에서, 욕망해방의 관점에서 성에 접근하려는 모든 사회적 투쟁이 또한 이 연대의 기초가 된다.

2. 성노동에 대해
성노동의 개념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성노동은 정상적인 ‘직업’으로써,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법적 권리 확장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까지 비정상화의 범주로써 인식되던 영역을 정상화하는 첫걸음에 속한다.
다른 한편, 성노동의 개념은 ‘사회적 성’(주관화되고 개인화된 성이 아니라)에 대해 비로서 공통성을 파악하고 증진할 수 있는 사회적 장을 여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노동은 인간의 공통성을 촉진시켜왔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서로 협력적이 되었으며, 보다 창의적으로 변모했다. 이 공통성의 외적 표현형식이 ‘사회적 부’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아직까지 성을 통해 어떤 공통성을 촉진시키지는 못했다. 성은 언제나 은밀하고 개인화된 형태로 촉진되거나 혹은 국가와 제도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은 노동만큼이나 사회 협력적인 것에, 그리고 인간이 보다 창의적으로 변모하는데 큰 기여를 해왔고 또한 할 수 있는 잠재성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성을 그렇게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사용하는 것을 억압당해 왔다. 이런 측면에서 성노동의 개념은 사회가 성을 노동과 마찬가지로 공통성의 영역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성의 측면에서 부각된다.
성노동 개념의 또 다른 측면은 현대사회의 노동의 성격변화와 섹슈얼리티의 변용을 동시에 부각시키는 개념이다. 성노동이란 단어는 성적 활동과 노동간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는 노동의 성격변화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노동의 변화를 표현하는 언급들은 매우 다양하다. 감정노동(페미니즘 이론), 비물질적 노동(자율주의 이론), 그림자 노동(일리치), 정동적 노동 혹은 욕망 노동(들뢰즈와 가타리) 등등.
다음과 같이 설명적으로 노동의 변화상이 제시되기도 한다. 열역학적 노동에서 나노테크놀러지 노동으로의 변화, 근육을 사용한 육체노동에서 신체를 기반으로 한 정서와 감정 및 관념적(비물질적) 노동으로의 변화, 기계에 대해 반정립적이고 수동적이던 노동에서 사이보그화된 노동으로의 변화, 노동의 남성화에서 노동의 여성화 현상으로의 변화, 외화된 노동에서 내화된 노동(주체성 생산)으로의 변화 등등.
성노동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노동의 변화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또한 노동의 성애화 혹은 관능화로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는 점점 더 자신의 노동에 성적능력 및 성애, 관능적 능력을 동원하고 있다. 단순한 기계를 대면하고 있는 노동에서조차 기계에 대한 노동자의 성애가 존재하며, 관능적 관계가 형성된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노동에 있어서 노동자의 성애 및 관능적 능력이 더욱 요구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애나 관능적 능력이 모든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에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이 사회적 공통성을 촉진시켜왔음을 드러내주는 증거다. 우리는 이것을 노동하는 주체성의 측면에서 ‘노동의 관능화’로 표현한다. 노동의 관능화는 우리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변용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용은 오늘날 ‘성적 노동’(성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스트립댄서에서부터 포르노그라피 종사자, 매춘여성 등에 이르는)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노동의 관능화와 성적 노동 사이의 차별화와 위계화를 위해 애써 법적, 제도적 권력장치를 고안해내려고 한다.

3. ‘여성’ 젠더 정치에 대해
한국사회에서 성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성노동자 운동에 있어서 ‘여성’이라는 젠더적 관점에의 접근은 곧잘 적대적으로 비화한다. 현재까지 성노동자 입장에서 ‘여성’은 성노동자를 능욕하는 또 다른 권력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마치 정규직 여성과 비정규직 여성간의 대립이 재현이나 주부 여성과 매춘 여성의 대립이 재현 되는 듯 하다. 성노동자는 성노동자를 피해자화하고 구제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맥락에서 ‘여성’ 일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성노동자들이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처럼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존재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결단코 아니다. 피해자임과 동시에 오히려 자신들의 노동이나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능동성과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청소부라는 직업은 힘들고 위험하다. 그/그녀가 청소부가 되었어야 했던 것은 그/그녀들에게 물질적 필요에 접근할 수 있는 여타의 수단(돈, 학력, 연줄, 성 등등)을 박탈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그녀들은 피해자다. 그러나 그/그녀들을 피해자라고만 정의하는 것은 또한 모욕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력관계에 있어서는 분명 피해자이지만, 현실의 생산과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삶의 주체성 측면에 있어서는 능동적 구성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성노동자도 청소부와 다르지 않다. 청소노동이 사회적 삶 전체의 맥락에서 본다면 고귀한 노동이거나 활동일 수 있듯이 성노동 또한 그렇다. 어떤 면에서 삶과 욕망의 자율적 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모두가 회피하고자 하는 그 노동이야말로 더 높은 가치를 가져야 마땅하다. 우리는 결국 ‘여성’이라는 젠더 정치학이 성노동자들을 배제하거나 봉합하려 하지 않고 성노동자를 적극 지원할 때 여성운동에 새로운 활로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4. 포주와 구매자에 대해
속칭 ‘포주’와 성을 구매하는 자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성노동자를 범죄시하고 죄악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이들을 범죄시하고 죄악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먼저 포주에 대해서. 우리가 확인한 사실에 의하면, 포주들은 단순히 ‘포주’라고 하나로 명명할 만큼 포주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포주와 성노동자의 관계는 주인-노예의 관계도 있으며, 단순 노-사 관계도 있으며, 협력적 파트너 관계도 있다. 한편 성노동자가 포주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우리는 주인-노예관계가 폐절되길 원하며, 노-사 관계에서 노동자가 주도적 이길 원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우리는 ‘빈자’들의 협력성에 주목한다. 포주가 아니라, 그/그녀들은 협력적 관계에서 분명 노동자다. 포주가 정말 자본가라면 성특법이 추진되어 집성촌이 폐쇄되거나 말거나 생존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일과 관련하여 생존권이 달린 가난한 사람들을 포주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성 구매자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성 구매자는 남성이다. 그러나 이 지형도 분명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남성’으로써 성을 구매한다. 이 말의 의미는 성을 구매하기 때문에 그가 남성인 것이 아니라, 그가 ‘남성’으로써 모든 성활동을 하는 것처럼 구매할 때도 ‘남성’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매자인 남성을 개혁해야 한다. 성노동자들이 이 산업분야에서 얼마나 권리향상을 이뤄내는가에 의해 구매자인 남성의 개혁여부가 달려 있다. 그리고 구매자인 남성의 개혁은 실제로 이 산업영역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남성성욕의 개혁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을 구매하지 않겠다’는 따위의 ‘착한 남성’ 선언은 성노동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며, 사회적차원에서 형성된 남성성욕조차 문제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그저 ‘돈을 주고 하는 섹스에는 발기가 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공짜섹스에 대한 열망을 가진 남성성욕의 표현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타인의 필요에 의해 성을 제공하는 입장과 성을 사는 입장 두 모습 다 가지고 있다. 물론 그 ‘타인의 필요’에는 자본가적 필요도 있을 것이고, 여성의 필요, 남성의 필요 모두 포함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보다 성을 제공하는 입장에 있는 자(생산자)들이 더욱 유리한 조건이 되는 자본주의적 가치의 전복적 상태를 우리는 지향한다. 덧붙여, 우리는 성을 제공하는 자가 욕망에 기초하지 못하는 상황이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성을 제공하는 자가 욕망에 근거할 때 전복이 일어난다. 노동을 제공하는 자가 욕망에 근거하고 기쁨을 느낄 때 그것이 혁명이듯이.

5. 성노동자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우리는 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자유로운 성욕을 억압하는 섹슈얼리티제도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여성의 자유로운 성욕 증진과 관계가 있다고 파악한다. 여성들의 일이 사회화되거나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수록 여성들의 자기 성욕에 대한 자율성은 보다 확대된다. 결국 자유로운 성욕은 사회적 접촉의 기회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노동의 관능화는 점점 더 성별을 뛰어넘는 섹슈얼리티를 만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의 관능화와 노동의 여성화는 여성만이 결부된 문제가 아니라, 노동에 관계하는 여성과 남성 모두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성노동자들에 대해 ‘그녀들이 그 일을 즐기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즐기고 있지 않다’고 답하는 것에 반대한다. 상황에 따라 즐기지 못할 수도 있고,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담론의 차원에서 항상 노동이라고 해서 그것을 즐기면 안 되는 것으로 이론화하는가? 즐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편견이자, 자본가적 논리다. 그 일을 즐긴다면, 그게 더 큰 범죄라도 되는가? 성노동이 범죄라는 게 명확해지기라도 하는가?
노동은 특정한 관계와 상황에 따라, 그리고 노동이 자리하고 있는 그 사회의 성격에 따라 기쁨일 수도 있고, 고역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전면적으로 고역적이거나 전면적으로 기쁘지는 않다. 성노동이라고 해서 전면적으로 고역적이지 않다. 그것이 고역이라면 즐거울 수 있는 방향으로 촉진하려는 것이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욕망일 것이다. 그래서 안될 이유는 없다. 몇몇 노동자의 경우는 즐기기 위해 성노동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기쁨을 느끼니 단죄해야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성노동자들이 그 노동을 즐기고 있는지의 여부에 과도한 관심을 드러낸다. 쾌락의 여부가 성노동에 대해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결정적일까?
성노동에 쾌락이 없다고 답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정치적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성노동자들을 ‘특별히 색정적인 여성들’로 차별화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성노동자들을 피해자화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두 가지 모두 잘못된 반대를 기획함으로써 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강화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먼저, 색정적인 여성들로 차별화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불감증 여성들로 묘사함으로써 효과적인 대립논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두번째, 어떤 주체성을 피해자화함으로써 외부적 힘의 정당성과 ‘구제’논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목석 같은 존재로 사물화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권력의 작동방식이다. 기쁨과 욕망의 차원을 배제하는 이론화 작업은 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어떤 정당한 부분을 숨겨야 하는 내부적 억압장치를 가동시키게 만든다.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투쟁들에 함께 한다.
- 성매매특별법의 폐지와 성노동자의 권리향상을 위해 싸운다.
- 성노동 자율관리와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 사회의 지배적 성 규범 및 제도(섹슈얼리티)을 개혁한다.
- 성별 및 성애의 형태를 이유로 차별을 행하는 여타 제도의 철폐를 위해 노력한다.
- 사회에서의 여성의 성욕해방을 지원한다.
- 남성 구매자를 개혁하고 사회의 남성성욕을 개혁한다.
- 가족의 민주적 재구성과 성의 자율적 조직화를 지원한다.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는 위의 목적에 동의하는 성노동자 및 성노동에 있어 협력적 노동자 모두, 그리고 이 운동에 동의하고 서포터즈가 되길 원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들이 함께 할 수 있다.
우리의 임시홈페이지는 http://go.jinbo.net/commune/index.php?board=성자공연이다. 가입 시 하고 싶은 말에 ‘정회원’을 요청하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몇 가지 오해들에 대하여

몇 가지 오해들에 대하여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

 

성노동자 운동에 참여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우리는 주변으로부터 이런 저런 진심 어린 충고와 문제제기들을 받고 있다. 문제제기는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성찰하게 하므로 매우 기쁜 일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조직하고자 했을 때 부딪혔던 오해들을 접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입장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힐 수 있었다.

 

먼저, 여성주의에 반대하거나 적대시하는 것 아니냐? , 남성권력의 입장에 서 있는 것 아니냐? 는 오해에 대해.

우리는 여성주의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거나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정리하고 말아버릴 만큼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분노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의 분노를 말하는 게 아니다. 왜 성노동자들은 여성주의에 분노할까? 당연하게도 성매매특별법이 성노동자들을 분노하게 만들 만큼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은 누가 만들었는가? 주체는 명확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성노동자들이 어리석다고,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여성주의를 무차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음을 밝힌다. 우리는 새로운 여성주의가 필요하다고 느끼며, 성노동의 쟁점화를 계기로 여성주의가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성노동자 네트워크에 함께 하는 여성주의의 새로운 구성적 흐름이 이미 존재한다. 우리는 이 진행 중에 있는 여성주의를 지지하며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여성주의의 지지가 이 운동에 매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런 지지에 대해 여성주의를 편가르는 책략이라고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편가를 능력도, 의무도, 정치적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모든 여성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며, 성노동자와 여성주의간에 형성된 적대적 상황을 돌파해나가 새롭게 구성될 여성주의를 지지한다.

 

구매자 입장에서 성노동을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에 대해.

우리로서는 구매자를 범죄시하는 것에 대해 성노동자를 범죄시하는 것만큼이나 반대한다. 동일하게 구매자의 대부분인 남성도 분명 성별권력 관계 내에서 보자면 권력자이지만, 성적제도의 측면에서의 소외자나 다른 사회적 관계에서 희생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권력자인 한 우리는 구매자 남성의 남성성이 개혁되길 원한다. 하지만 구매자들의 개혁은 결국은 성노동자들이 이 운동에서 얼마나 권리향상을 이뤄내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거래자체가 범죄가 아니라 거래의 사회적 양태를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다. 개인적,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는 거래활동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 거래가 딱히 사랑(이 사회의 사랑은 상대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소유권의 표현이다)에 의한 거래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유희여도 좋고, 자신의 다른 어떤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소득을 올릴 목적이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거래가 어떤 사회적 체계와 맥락 속에 있느냐가 문제이고, 거래의 사회적 양태를 보다 인간적으로 꾸준히 변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양성평등을 추구하느냐?는 오해에 대해.

우리는 양성평등이란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에서 두 개의 성이 서로 평등하게 금욕적일 것을, 또한 동일하게 권력에 종속될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 양성평등의 개념은 여성차별적 현실을 은폐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 내리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개의 성 어느 한쪽에 사회적으로 할당 받고 그 체계에 종속되고 싶지 않고 모든 성이 될 자유를 원한다. 성별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면 또한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성을 선택하고 새롭게 구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은 군대에 가야 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남성이 아닌 다른 성을 선택할 자유를 추구할 것이다. 모든 여성은 가사노동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여성이 아닌 다른 성을 선택할 자유를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성별규정적 체계와 역할분담,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서의 남녀차별이 없는 공평한 부담 등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해방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보기에 현재의 성노동 운동에서 양성평등을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노동에 있어 남성일반의 권리나 남성성욕의 권리가 박탈당해 고통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생산자나 판매자가 아니라면, 구매자인 남성은 어쨌거나 성노동에 있어 소비자이자 화폐소유자이자 남성권력으로 늘 우월한 위치에 있다. 앞서 우리는 구매자 개혁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현재의 성산업에서 구매자 개혁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다. 구매자 남성의 개혁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한 개혁은 현재 성 산업의 부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당연하게도, 남성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성노동자를 찾는 구매자이기 전에 이미 형성된 남성성욕이라는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노동자들 그리고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차이는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쟁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체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적대적인 차이보다 공통적인 것을 더 많이 발견했다. 우리로서는 성노동자 주체성의 긍정적 발현이라는 차원에서 보다 협력적인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는 여러 쟁점에 대해 토론 중에 있으며, 확실한 것 하나는 성노동에 대한 성노동자들의 자율관리를 지지하며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알리는데 서포터즈가 되고자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정희진의 안티 성노동자적인 시각을 비판한다

 

정희진은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될 때 한겨레신문의 지면을 통해 <성매매, 생존권 투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매매가 ‘직업’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여성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과 (남성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에게 성 판매는 사회적 노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성매매의 폐해는 매매 행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본인의 선택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정희진은 참으로 이상한 논법을 구사한다. ‘직업’으로서의 성매매를 분석하는 것과 ‘매매 행위’ 자체에서 오는 성매매의 폐해를 논리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둘을 동일시한다. 성노동을 인정하는 것과 성노동에 따르는 어떤 폐해가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런 구분은 비단 성노동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에서 행해지는 구분이어야 할 것이다. 즉, 정희진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노동시장의 성차별 근절’이라고 할 때의 그 ‘노동’도 문제인 것이다. 그 ‘노동’이 뭔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노동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 노동에 착취와 폐해가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성매매의 폐해가 뭔지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성노동이 아닌 KTX 여승무원의 노동이나 방직공장 여공의 노동을 보자. 정희진의 말처럼 우리가 그녀들이 그 노동을 택한 것이 개개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그 노동에 따르는 폐해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여승무원의 노동과 여공의 노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정희진의 논법대로라면, 여승무원의 노동과 여공의 노동도 성노동처럼 성별 권력관계의 문제이고 그 노동에 폐해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하므로 인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논법을 구사하던 정희진은 매춘여성들이 성노동자임을 스스로 선언하고 투쟁에 나서자, 다시 한겨레 지면을 빌어 <성노동권 유감>이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동안 여성들은 승진, 고용, 숙련, 위험도, 산재 등 노동 시장에 전제된 남성 기준에 도전하면서 동시에 공적 영역 중심의 기존 노동 개념을 확장, 재구성해 왔다. ‘감정 노동’이나 ‘성 노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그 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성과 사랑은 노동이고, 노동이어야 한다. ‘가사노동’, ‘성 노동’의 정치적 의미는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 사회화하기 위한 것이다. 즉, ‘여성의 사회 진출’처럼, ‘사적’ 영역의 노동에 남성들도 진출하여 남녀가 함께 성별 분업을 극복하자는 것이지, 여성이 계속 ‘성 노동’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섹스는 노동이고 몸은 자원이라는 주장이 전혀 아닌 것이다.”

<성매매, 생존권투쟁?>에서의 주장보다 성노동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노동자의 권리 향상에 대해서 유감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이번에도 이상한 논법을 구사한다. 정희진의 논법대로라면, 성노동은 노동이고 심지어 ‘노동이어야’하는데 그것이 단지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 사회화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하는 것과 성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대립된다는 말인가?
게다가 갑자기 뜬금없는(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논리적 맥락과는 전혀 다른) ‘여성이 계속 성노동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언급은 왜 삽입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속 성노동을 하겠다는 게 물론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계속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다. 이것은 모든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결국 정희진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성노동은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하기 위한 것이지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이때 도대체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한다는 것이 무슨 현실적 의미를 갖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희진은 <성매매, 생존권 투쟁?>과 <성노동권 유감>이라는 글에서 내내 “노동시장의 성차별 근절 노력”을 강조했으며, “성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했다. 이런 정희진의 주장에 공감 못하거나 동의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정희진의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 정희진 스스로의 개념 속에서 어떻게 항상 성노동자 운동과 대립되는 것으로 등장하는지 그게 의문일 뿐이다.
우리는 정희진이 “성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할 때 그것의 의미가 설마 성노동이 아닌 다른 노동을 통해 생존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아마도 모두가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생존의 토대를 만들자는 얘기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질문은 그것이 아니라,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왜 유독 성노동만이 범죄화되어야 하는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노동이 아니면 당장 생존을 해결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 생존권 투쟁의 문제이고, 노동자들의 권리향상을 위한 투쟁일 수 있는 것이다.

정희진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성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권리”는, 성노동이라고 하는 이 부문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로 정희진 자신도 노동을 하지 않고(정희진이 무슨 구체적 노동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 할 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고 투쟁할 때 성노동자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정희진의 주장은 현실도피성 발언에 불과할 뿐이다.
정희진의 ‘안티 성노동자’적인 시각은 뿌리깊은 ‘성매매=성폭력’ 본질론으로부터 비롯된다. 실제로 성매매를 성폭력과 동일시하는 담론을 다음과 같이 구사하고 있다.

“성매매는 도덕이나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집요한 남성 중심 정치권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사안이다. 만일, 여성의 성이 판매된 시간과 그 수치만큼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몸을 판다면, ‘매춘’이 가난과 상관없이 백인 중산층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도 ‘자유로이 선택’하는 직업이라면, 연쇄 살인사건의 주된 희생자들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니라면, (성을 파는 여성이 아니라) 성을 사는 남성을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런 존재로 규정한다면…. 이런 상황 이후에야, 성매매는 성별 권력 관계와 관련 없는 문제가 된다. 그전까지, 성매매의 본질은 성 상품화도 아니고, 성 보수주의와 성 자유주의의 대립도 아니다. 성매매는 가장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일 뿐이다...(중략)...성매매 반대가 그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매매 제도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여성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모든 여성들과 모든 남성들의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성매매와 성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편견은, 남성의 성은 억제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근거한다. 남성의 성이 인간의 성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와 인격은 신체로 환원되고, 여성의 외모와 성은 ‘자원’이 된다.”(<성매매, 생존권 투쟁?>)

이 대목에서 정희진은 성매매에 대한 논쟁에 ‘성폭력’의 문제를 슬쩍 끼워 넣는 센스를 발휘한다. 이것이 성노동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의도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런 식의 무차별적 언급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된다.
물론 정희진은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해 직접적인 반대를 표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노동 종사자들의 권리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즉, 정희진은 성노동자를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피해여성’으로 대상화할 뿐이다. 또한 인용문에서는 남성에 대해서도 마치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글에서 성을 구매하는 남성은 지극히 혐오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정희진이 주장하듯 성매매가 불가피하다는 편견은 남성의 성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이 전혀 아니다. 정희진의 이런 논법 자체가 사실은 지독한 편견에 불과하다. 사회는 성매매를 불가피하게 채택할 필요도, 남성 성욕만이 아니라 모든 성욕을 반드시 억제해야 하는 것으로 여길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불가피하건 하지 않건, 억제하건 하지 않건 문제는 할 수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적 제도에 의해 미리 규정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성욕을 억제하지 않는다고 해서 강간과 같은 성폭력으로 귀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욕에 대한 지나친 희화화다. 그리고 신체와 성이 자원이 되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는 남성도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이 점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논점 자체가 현실에서의 성노동과 성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위한 투쟁의 쟁점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성노동을 인간에 대한 폭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노동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그런 규정을 내릴 때에야 그 함의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성노동만이 갖고 있는 무슨 특수한 신비적 개념에 의해서만 폭력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을 사회적으로 부과된 인간에 대한 폭력이라고 규정할 때 조차도 노동과 노동자를 ‘피해자’로만 개념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노동 그리고 노동자들 또한 피해자 일 텐데 정희진의 논법대로라면 이 넘쳐나는 ‘피해자’들을 누가 어떻게 ‘구제’해주어야 하는지의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노동자가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정치로 귀결될 것이다. 성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여길지라도, 그 노동 속에서 세상과 사회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려는 주체성을 확장하기 마련이다. 성노동과 성노동자들에게 이런 힘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뜯어고쳐야 할 사회적 편견이자, 소수자적인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 진보넷에 만든 공동체입니다.

http://go.jinbo.net/commune/index.php?board=성자공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성노동은 노예노동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노동을 노예노동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인신매매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신매매와 성노동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곧잘 매춘여성들이 인신매매에 의해 성노동을 강제 받았다는 신화를 굳게 믿고 싶어한다. 이런 신화에 대한 믿음은 ‘노예선’과 ‘새우잡이 어선’을 동일시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며, 성노동자들의 권리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맑스적 의미에서 본다면 노예노동과 농노의 노동, 그리고 노동자의 노동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노동력은 바로 노동자의 노동이다. 매춘부를 노예노동자라고 믿는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가장 먼저 주인-노예관계의 노동으로부터 탈피한 것이 바로 매춘부라는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국가에 의해 직접 관리된 ‘관비’나 ‘위안부’형태의 성노동 형태를 제외하면 매춘부는 일찍이 가장 자유로운 노동력이었다.

성노동과 매춘여성은 인격적이고 신체적인 예속의 측면에서 분명 자유로운 노동력이다. 이것은 가사노동자인 주부와 비교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주부는 가부장에 의해 인격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분명히 예속되어 있으며(과거에는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이야말로 자유롭지 않은 노동력 즉 노예노동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금이야 가사노동의 대부분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그 노동력도 상품화되어 주부들이 가부장이 아닌 타인을 위해 가사노동서비스를 수행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부의 성노동은 어떤가? 그것은 여전히 인격적이고 신체적인 예속의 측면에서 가부장에게 봉사하는 노예노동이다.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매춘여성이 아니라 주부가 바로 노예노동자인 셈이다. 최근 들어 주부에게도 남편과의 섹스를 거부할 의사가 있음이 법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주부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섹스를 할 자유가 인정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가부장인 남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성적 노예상태가 있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의 가족제도에 잔존하고 있는 특질일 것이다. 그러므로 매춘여성이 노예노동의 상태에 있다고 하면서 혼인계약관계를 모델로 하는 성적 거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라보는 그릇된 인식은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 결국 혼인계약관계 모델을 정상화 규범으로 놓고 매춘여성을 비정상화라는 틀로 바라보기 때문에 엉터리 같은 ‘매춘=노예노동’이라는 도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매춘을 ‘장기매매’와 비교하는 어리석은 논자들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악의적인 동일시다. 성노동은 다른 노동자들처럼 신체를 파는 것이 아니라, 성노동자의 노동력을 파는 것이다. 성노동은 어떤 물질적 형태의 소비재나 내구재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르게 감성이나 쾌락, 정신적인 것 등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예술가들이나 배우들, 탤런트, 스포츠 스타들의 경우 자신들의 가치를 '몸값'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정말 '몸'을 판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노동들이 신체적 양식에 기반한 노동이라는 의미다. 오늘날의 노동은 정보, 소통, 정서를 생산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이것들 대부분은 인격과 의식, 감정 등 신체적 양식을 기반해 생산된다. 즉, 매춘은 오래 전부터 예술과 같은 엔터테인먼트적 노동이었고 예술적노동과 성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매춘여성들과 예술가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를 매매한다는 그릇된 정의에 의해 성노동 종사자에 대한 인식은 천편일률적으로 왜곡되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비생산적 노동’으로 끊임없이 폄하되고 있는 것이다.

성노동에 대한 또 다른 그릇된 유비의 결정판은 아동노동착취와의 비교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빈곤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과 아동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극심한 빈곤이 여성을 성매매의 영역으로 유인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빈곤이 사실이라고 해서 곧바로 성매매가 타당한 것은 아니다. 빈곤의 문제가 심각한 나라에서는 아직도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고 아동의 노동자성 인정과 노동권 확보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회당)
이런 비사회과학적 인식이 변혁을 지향한다고 자임하는 정치정당의 주장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빈곤한 나라에서의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의 형태는 해당 나라의 (성인)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동원된다. 즉, 가난한 성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동들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저임금 노동력을 손쉽게 구하려는 것이기에 우리는 아동노동에 대한 금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아동노동의 범주 일반을 문제 삼게 되면 가사 일을 돕는 아동노동이나 농촌지역에서 농사 일을 돕는 아동노동 일반을 모두 금지해야 한다는 엉터리 주장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빈곤이 여성을 성매매의 영역으로 유인한다고 주장하는 맥락도 분명 성노동을 다른 노동일반으로부터 떼어내 특수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노동력을 노동시장으로 유인하는 요소가 빈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노동일반을 성노동처럼 불인정하거나 노동자의 권리가 불필요하다고 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노동이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선택되어지는데 유독 성노동만이 특수화되어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뭘까? 역시 그러한 인식의 전제를 이루는 것은 ‘성을 사고 파는 것은 죄악’이라고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물론 성노동자들의 도덕적 규범은 사회당과 다르다. 성노동자들의 자기 일에 대한 도덕적 규범은, 빈곤 때문에 성노동을 하고 있지만 성노동이 가난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며, 모든 노동에 착취가 존재하는 한 이 부분에서의 노동자 권리 향상 또한 필수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는 사회가 될 때 성노동 또한 인간 본연의 자유롭고 호혜적인 활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 진보넷에 공동체를 만들었어요. 놀러오세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