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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은 노예노동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노동을 노예노동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인신매매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신매매와 성노동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곧잘 매춘여성들이 인신매매에 의해 성노동을 강제 받았다는 신화를 굳게 믿고 싶어한다. 이런 신화에 대한 믿음은 ‘노예선’과 ‘새우잡이 어선’을 동일시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며, 성노동자들의 권리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맑스적 의미에서 본다면 노예노동과 농노의 노동, 그리고 노동자의 노동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노동력은 바로 노동자의 노동이다. 매춘부를 노예노동자라고 믿는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가장 먼저 주인-노예관계의 노동으로부터 탈피한 것이 바로 매춘부라는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국가에 의해 직접 관리된 ‘관비’나 ‘위안부’형태의 성노동 형태를 제외하면 매춘부는 일찍이 가장 자유로운 노동력이었다.

성노동과 매춘여성은 인격적이고 신체적인 예속의 측면에서 분명 자유로운 노동력이다. 이것은 가사노동자인 주부와 비교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주부는 가부장에 의해 인격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분명히 예속되어 있으며(과거에는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이야말로 자유롭지 않은 노동력 즉 노예노동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금이야 가사노동의 대부분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그 노동력도 상품화되어 주부들이 가부장이 아닌 타인을 위해 가사노동서비스를 수행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부의 성노동은 어떤가? 그것은 여전히 인격적이고 신체적인 예속의 측면에서 가부장에게 봉사하는 노예노동이다.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매춘여성이 아니라 주부가 바로 노예노동자인 셈이다. 최근 들어 주부에게도 남편과의 섹스를 거부할 의사가 있음이 법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주부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섹스를 할 자유가 인정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가부장인 남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성적 노예상태가 있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의 가족제도에 잔존하고 있는 특질일 것이다. 그러므로 매춘여성이 노예노동의 상태에 있다고 하면서 혼인계약관계를 모델로 하는 성적 거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라보는 그릇된 인식은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 결국 혼인계약관계 모델을 정상화 규범으로 놓고 매춘여성을 비정상화라는 틀로 바라보기 때문에 엉터리 같은 ‘매춘=노예노동’이라는 도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매춘을 ‘장기매매’와 비교하는 어리석은 논자들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악의적인 동일시다. 성노동은 다른 노동자들처럼 신체를 파는 것이 아니라, 성노동자의 노동력을 파는 것이다. 성노동은 어떤 물질적 형태의 소비재나 내구재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르게 감성이나 쾌락, 정신적인 것 등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예술가들이나 배우들, 탤런트, 스포츠 스타들의 경우 자신들의 가치를 '몸값'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정말 '몸'을 판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노동들이 신체적 양식에 기반한 노동이라는 의미다. 오늘날의 노동은 정보, 소통, 정서를 생산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이것들 대부분은 인격과 의식, 감정 등 신체적 양식을 기반해 생산된다. 즉, 매춘은 오래 전부터 예술과 같은 엔터테인먼트적 노동이었고 예술적노동과 성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매춘여성들과 예술가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를 매매한다는 그릇된 정의에 의해 성노동 종사자에 대한 인식은 천편일률적으로 왜곡되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비생산적 노동’으로 끊임없이 폄하되고 있는 것이다.

성노동에 대한 또 다른 그릇된 유비의 결정판은 아동노동착취와의 비교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빈곤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과 아동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극심한 빈곤이 여성을 성매매의 영역으로 유인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빈곤이 사실이라고 해서 곧바로 성매매가 타당한 것은 아니다. 빈곤의 문제가 심각한 나라에서는 아직도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고 아동의 노동자성 인정과 노동권 확보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회당)
이런 비사회과학적 인식이 변혁을 지향한다고 자임하는 정치정당의 주장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빈곤한 나라에서의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의 형태는 해당 나라의 (성인)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동원된다. 즉, 가난한 성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동들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저임금 노동력을 손쉽게 구하려는 것이기에 우리는 아동노동에 대한 금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아동노동의 범주 일반을 문제 삼게 되면 가사 일을 돕는 아동노동이나 농촌지역에서 농사 일을 돕는 아동노동 일반을 모두 금지해야 한다는 엉터리 주장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빈곤이 여성을 성매매의 영역으로 유인한다고 주장하는 맥락도 분명 성노동을 다른 노동일반으로부터 떼어내 특수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노동력을 노동시장으로 유인하는 요소가 빈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노동일반을 성노동처럼 불인정하거나 노동자의 권리가 불필요하다고 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노동이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선택되어지는데 유독 성노동만이 특수화되어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뭘까? 역시 그러한 인식의 전제를 이루는 것은 ‘성을 사고 파는 것은 죄악’이라고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물론 성노동자들의 도덕적 규범은 사회당과 다르다. 성노동자들의 자기 일에 대한 도덕적 규범은, 빈곤 때문에 성노동을 하고 있지만 성노동이 가난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며, 모든 노동에 착취가 존재하는 한 이 부분에서의 노동자 권리 향상 또한 필수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는 사회가 될 때 성노동 또한 인간 본연의 자유롭고 호혜적인 활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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