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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성산업인연대'와의 간담회 (9월15일)

 

“성산업인들이 정당한 성산업과 민주적 제도에 대해 입을 열었다!”

-민주성산업인연대와의 간담회 정리-


‘민주성산업인연대’라? 아마도 이 이름은 당신에게 무척이나 낯설게 여겨질 것이다. 성산업인이라니? 게다가 앞에 ‘민주’가 붙는다? 이 사회는 성산업인을 ‘포주’라 부르고, 포주는 애시 당초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먼 범법자에 지나지 않는 존재들이라 여겨왔다. 때문에 ‘민주성산업인연대’라는 단체는 ‘성산업이 정당하게 존재할 수 있고 성산업이 민주화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당신을 당혹스럽게 만들거나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민주성산업인연대’는 그 자체가 당신의 고정관념을 해체시키는 실험이자, 당신이 암묵적으로 배제해왔던 존재의 권리선언이다. 성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서포터즈인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준비모임. 이하 ‘성자공연’)는 성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민주성노동자연대’와 ‘민주성산업인연대’와 간담회를 기획했다. 그 기획의 일부로 먼저 ‘민주성산업인연대’와의 간담회 내용을 소개한다. 그들은 무슨 이유에서 성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무엇을 주장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정당하며, 이 사회가 자신들을 왜곡하고 있으며, 성매매 특별법은 성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물론 성산업을 더욱 왜곡시키고 기형적인 형태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이 간담회는 15일 오후 평택 집창촌 내에서 이뤄졌다. 간담회 참석자는 ‘성자공연’에서 2명이 참석했고, 그 중의 한 명은 본 필자다. ‘민주성산업인연대’에서는 3명(위원장, 감사, 前대표)이 참석했다. 이 글은 간담회에서 오고 간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 신승철 <성자공연(준) 회원>



‘민주성산업인연대’라는 조직은 아직 한국에서는 유령과도 같습니다. 운동주체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민주성노동자연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고 있는데요. ‘민주성산업인연대’의 결정과정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민주성산업인연대’는 성노동운동의 출범과 괘를 같이 합니다. 그 전에 ‘한터’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만, ‘한터’는 업주들의 전국적 친목 단체적 성격이 짙었습니다. 우리도 ‘한터’에 속해 있었지만, 성노동자 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방향으로 가야하는 게 맞는 게 아니냐는 판단이 들어서 결국 ‘한터’에서 떨어져 나오게 된 것이죠. ‘한터’는 성노동자라는 주체를 인정하지 않고, 성노동운동에 동의하지 않으니까....작년에 성노동자 출범식을 했는데 그때 업주들은 가만히 있을 것이냐, 우리도 성노동운동에 동참을 하자니까 ‘한터’에서는 반대를 했어요. 성노동자를 인정하면 업주들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이유를 들며 반대한 거죠. 그래서 여기(평택지역)만 따로 떨어져 나와 ‘민주성산업인연대’를 결성하게 된 겁니다. ‘한터’는 현재 유명무실해진 단체가 되어버렸더군요.


‘민주성산업인연대’의 원칙적인 강령과 규약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직 특별한 강령과 규약은 없습니다. ‘민주성노동자연대’와의 단체협약을 이행하는 것이 현재의 규약이랄까....


‘민주성노동자연대’와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협약을 맺으셨나요?


뭐 일반적으로 노사협약의 내용인 휴가, 근무시간, 소득분배 등과 관련된 것이죠. 문서가 있으니까 뽑아드릴게요.

(현재 평택은 ‘민주성노동자연대’가 노동조합으로 ‘민주성산업인연대’와 노사협약을 체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민주적 성산업이란 게 무엇입니까?


민주적이라는 건 여러 사람 의견이 모아져야 되는 거고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지는 거죠. 앞으로는 성노동자들의 원하는 것이 더 많아지겠죠. 우리(성산업이 인정되고 성노동자의 권리가 인정되었을 때)가 인정이 되었을 때 말이죠. 우리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계속 협의해 나갈 생각입니다. 성노동자와 우리가 함께 싸워서 얻는 이익을 서로 나누고, 서로 간에 민주적으로 타협하면서 말이죠.  

일례로 노동시간을 10시간으로 정했는데, 그건 성노동자들의 요구에 의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실제로는 10시간 이하로 해도 상관없으며 단, 10시간이 넘어서는 안 된다는 제한적 규정인 거죠. 휴일도 5일 이상을 쉴 수 있도록 했어요. 5일 보다 많이 쉬어도 되지만, 적게 쉬는 건 안 되죠.


평택만 그렇게 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니까 다른 지역도 하는 수 없이 많이 따라왔어요. 노동시간, 휴일, 임금부분 등도 점차 평택 수준에 근접해지고 있어요. 예를 들어 5 : 5의 소득분배의 관행도 깨어지고, 성노동자 : 성산업인 배분율을 6 : 4로 바꾸어냈습니다. 어차피 평택에 있는 노동자들이 다른 지역에도 가고 이동이 잦으니까, 그런 경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지요.

아까 성산업 민주화에 대한 얘기를 하다 말았는데, ‘민주성산업인연대’라는 우리 단체를 전국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성산업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아무나 같이하지 않겠다는 거죠. 우리 방향에 동의하는 부분...성노동자 인정하고, 성노동운동 지지하고 그런면 함께 하겠다, 이런 거죠.


어떤 면에서는 ‘민주성산업인연대’라는 단체에 대한 법적, 사회적 인정을 요구하는 것이겠군요. 그렇다면 단체의 정체성을 특징짓고 민주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멤버쉽 규약이 앞으로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민주성산업인연대’가 지향하는 바에 따르는 사업같은 것은 없나요?


지금은 여건이 안 되지만, 성노동자들의 자활활동이나 복지기금 마련이나 성노동자들의 은퇴 후의 대책을 지원할 사업 같은 걸 고민하고 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해볼게요. 요즘 성매매특별법 이후 오히려 '전국이 사창화'되었다는 표현을 많이 쓰게 되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원래는 공창과 대별되는 것이 사창이지만, 우리나라에 공창은 없으니까 결국 언론보도에서 얘기되는 사창의 의미는 단순히 음성적인 성거래를 말한다고 보여 집니다. 우리에게는 음성적인 것과 양성적인 것의 구별이 매우 중요한데요. 우리는 성거래를 하겠다고 하는 거고 드러내놓고 하는 거고, 음성적인 데는 숨어서 아닌 것처럼 하고서 하는 거죠. 술 판매를 목적으로 하면서 성거래를 하는 것...그런 것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음성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음성적인 부분을 막으려면 양성화해야 한다는 생각인 거죠.


그렇다면 음성적인 부분은 성산업으로 볼 수 없다는 건가요? 술을 판매하기 위해서 성을 이용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거고...물론 음성적인 부분에서 일하는 분들도 성노동자는 아닌 것이고...


그렇죠. 술3종 업소같은 곳은 술을 팔아 이익을 내려고 성을 이용하고 성매매를 강요하는 거죠.


‘민주성산업인연대’가 있기 전까지 성산업이나 성노동은 어떻게 관리되어 왔나요? 예컨대 고객이 지불해야 할 비용의 책정이라는가....


과거에는 ‘한터’가 했지요. 업주들 모임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논의해왔습니다.


성산업하면, 사람들이 ‘인신매매’나 ‘선불금’과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인신매매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신매매 정의를, 예를 들어 우리가 성노동자에게 선불금을 주면 그걸 가지고 사람을 매매한다고 인신매매라고 그러는데, 이게 인신매매입니까? 난 인신매매를 본인의사와 무관하게 납치해가지고 봉고차 같은 데에다 태워서 팔아먹고 이러는 것을 인신매매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일례로 지금 법으로 인신매매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직업소개소를 통해 아가씨를 소개받고 소개비를 소개소에 주면 인신매매가 되어버립니다. 아가씨가 선불금을 달래서 주면 인신매매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인신매매로 처벌받게 되는 겁니다. 그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런 것을 다 인신매매라고 규정해버리고, 언론에서 ‘인신매매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니까 일반 시민들은 여전히 납치하고, 감금하고 그러는 줄 알아요.


일테면 내가 직업소개소에서 파출부를 소개받으면 인신매매가 아니지만, 성노동자를 소개받으면 인신매매가 되어버리는 거네요. 지금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는 그냥 통용되는 일이 결국은 이 일이 불법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신매매로 정의되는 것일 뿐이로군요.


사회적으로 성산업과 관련해 인신매매라고 유포되는 것이 다 그런 겁니다. 그걸 인신매매라고 부르는 거죠. 사람을 팔아먹고 이런 것은 글쎄요, 모르겠어요. 섬이나 이런 고립된 곳에 그런 게 잔존하거나 어디 음성적인 곳에서는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집창촌) 같은 데서는 가능할 수가 없어요. 순찰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다니고, 개인 휴대폰 다 가지고 있지 어떻게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사람을 잡아둘 수 있겠어요?

혹 20년, 30년 전이라면 그런 일이 있었을지 몰라요. 제가 이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는 여기에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어요. 우리가 본 적은 없고, 그저 들은 거죠. 영화에서나 보게 되는 일이지....(‘민주성산업인연대’ 회원 중에 이 사업에 뛰어든 지 가장 오래된 업주가 17년이라고 한다. 오래된 경우가 15년 정도, 대부분이 10여년 안팎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여성들을 가둬두고 자물쇠를 채워둬 참사를 당했던 사건이 언론에서 보도되잖아요?


대전 유천동과 성남, 군산 등에서 벌어진 일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런 곳은 집창촌이 아닙니다. 그런 곳은 술3종 즉, 술을 파는 업소지 성거래를 하는 집창촌은 아닙니다. 사건이 일어난 그쪽은 제가 알기로는 집창촌에서 문제를 일으켜 쫓겨난 여성들이 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곳과 집창촌을 싸잡아서 같은 것으로 몰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집창촌에다 적용시키면 안 되죠. 여기 있는 성노동자들 입장에서는 그런 조사가 말이 안 되는 거거든요. 여기는 아까도 말했지만 감금이 있을 수가 없어요.


결국 집창촌과 다른 곳에서 행해지는, 음성적이라고 얘기되는 곳과의 차이를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그리고 ‘선불금’이라는 건 정확하게 뭡니까?


선불금이란 게 뭐냐면, 여성들이 사실 이쪽으로 들어올 때면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을 선택한 거거든요. 절박하고 다급한 상황이란 거죠. 큰 빚을 졌던가, 가족들 중 누가 다쳐서 병원비가 필요하다던가, 사채를 썼다든가...어쨌거나 빚에 몰려서 여기로 들어오거든요. 처음에 여기 올 때는 빚을 까야 되겠다고 해서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집창촌에서 급하다니까 미리 돈을 성노동자들에게 주는 거죠. 그걸 선불금이라 부릅니다. 


대부분은 선불금이라든가, 이 산업에서 주고받는 돈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냐 하면 성노동자를 돈 주고 사고, 또 다른 업주에다 팔아넘기는 수단으로 생각하거든요. 몸값 같은 것으로 말이죠.


뭘 사고팔아요? 업주가 파는 게 아니고, 성노동자가 필요한 돈을 갖다 쓰는 거죠. 업주가 성노동자의 몸값을 두고 다른 업주와 흥정하는 경우는 없어요.

못 믿겠다면, 평택으로 와서 단 며칠만이라도 가까이서 관찰해보세요.


그러면 TV같은데서 보도되는 여성들의 옷이나 화장품을 업주들이 사서 여성들에게 강매하고 옷값과 화장품 값 뭐 이런 것들을 과도하게 떠넘긴다는데...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우리가 옷 장사하는 사람들입니까? 옷이나 화장품을 노동자들에게 강매할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는 오히려 성노동자들에게 아끼라고 말하는 편입니다. 노동자들에게 돈을 빌려준 업주 입장에서 생각해보더라도 하루라도 빨리 빌려준 돈을 받아야지 왜 자꾸 빚을 지게 만듭니까? 언제 되돌려 받으려고 그런답니까? 노동자 입장에서도 그렇고...빚을 빨리 갚고 서로 마음 편하게 일하는 게 좋지...

요즘 해외 성노동자 여성들 있잖아요...


러시아나 다른 해외에서 온 이주 성노동자들 말인가요?


아뇨. 해외에 나가 성노동을 하는 한국 여성들요. 그 여성들 성매매특별법 때문에 엄청 고통 받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일했던 여성들 중에도 외국으로 나간 여성들이 있는데 전화가 와서는 약 좀 보내달라고 그래요. 거기 가서 병원 한번 못 가봤다고요. 여성들이 왜 외국으로 나갔겠습니까? 성특법 이후 선불금을 무효화하고 불법화해놓으니까, 업주들이 선불금을 안주죠. 그런데 이쪽으로 들어오려는 여성들은 당장 큰돈이 필요한데 돈을 어디서 구합니까? 은행에서 그냥 꿔준답니까? 결국 사채를 얻어 쓰거나 선불금 주는 외국으로 나가는 거죠. 사채 쓰면, 보증인도 구해야 하고 5부 이자 정도로 부담도 엄청 커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더 큰 빚더미를 안는 거죠. 일수 찍느라 정신없죠.

외국 나가도 불법체류자가 되거나 숨어서 하니까 비용이 더 듭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노동자들 보니까 다 빈털터리 되어서 와요. 무엇보다 병원에도 못 가고...일본에 갔던 여성들은 그쪽 일본 업주가 성형수술을 하라고 강요하더래요.

성매매특별법이 성노동자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죽이고 있는 겁니다. 빚을 더 가중시키고 있는 게 성특법 입니다.


선불금은 이자가 없었나요?


집창촌 선불금에는 이자가 아예 없었어요. 그냥 신뢰관계에서 꿔주는 거죠. 매스컴에서는 선불금에 대해 왜곡과 흑색선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외국 나가는 성노동자들에게 불법체류자가 되느니 그러지 말고 우리와 함께 여기서 싸워서 정당하고 떳떳하게 권리를 찾아 일을 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성산업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성매매 특별법이 결국 술3종 업소의 업주들 배만 불려주고 음성적인 부분을 확대했고 집창촌의 업소 업주들은 더 열악한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도 큰 것 같은데요. 그런 부분에 대한 갈등이 느껴집니다.


네, 그런 갈등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면 술3종 업소는 성산업이 아니고 다르게 바라봐야 된다는 여러분의 의견이 좀 더 명확해지고 마찬가지로 성노동자들의 입장이라 할 수 있는, 성매매특별법이 술3종 업소에서 음성적인 성거래가 이뤄지게 만듦으로써 성노동자를 더 열악한 상황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인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대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공창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희는 공창제에 반대합니다. 노동자들이 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원하는 성노동자는 없습니다. 국가에 의한 과도한 세금, 이런 건 둘째치고라도 우선 등록을 해야 한다는 것이 굉장한 부담으로 작용합니다. 성산업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죠. 아무도 등록을 하려하지 않으면 결국 공창제를 하는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세금을 내고 법적으로 단지 범죄가 아니라고 정의된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낙인, 일테면 어디 가서 자랑하듯 내세울만한 직업이라고 말하기까지는 아직 멀었죠.

우리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특정구역 비범죄화’입니다. 우리는 전국이 사창화되는 현상에 대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비범죄화’는 매춘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당하거나 단속의 대상이 되거나 처벌받는 일은 없어야하고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잖아요. ‘특정구역 비범죄화’와 일반적으로 모든 매춘행위에 대한 비범죄화와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이론적으로는 우리는 모든 매춘행위에 대한 비범죄화에 반대할 이유가 없어요. 단지, 우리는 이기기 위한 싸움을 하고 싶어요. 우리나라에서, 이 상태에서 일반적으로 비범죄화해서 싸워서 이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하지만, 성특법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도 얼마 없고 이 산업의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국민 여론이 받쳐주지 않는다는 거죠. 성특법을 비판하는 국민 여론이 ‘성매매 사창화되고 있다’고 하는 것인데, 과연 전국을 비범죄화하자고 하는 주장이 먹힐 것인가? 누가 호응해 줄 것인가? 현실성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특정구역을 비범죄화하자, 성산업을 민주화하고 성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부분에서부터 사회적 합의를 해나가자는 거죠.

성노동자들이 ‘특정구역 비범죄화’를 주장하니까 그게 집창촌 업주들의 이익 때문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분위기도 있는데 사실, 성산업을 민주화하려는 의지가 없는 업주들은 음성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성특법 때문에 영업이 힘들어지니까 음성적인 곳으로 가서 얼마든지 영업을 하잖아요. ‘특정구역 비범죄화’와 같은 걸 위해 싸울 필요가 없죠. 성특법 때문에 성노동자들만 더 힘들어졌어요.

우리가 얘기하는 특정구역은 평택처럼 성노동자 인정하고 협약을 맺고 민주적으로 영업을 하는 곳을 인정해달라는 것이지, 집창촌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아무나 인정해주자는 것이나 지금처럼 음성적으로 영업하던 것을 다 인정하자는 게 아닙니다.

자, 그 구체적 형태는 정부, 시민(시민단체), 성노동자(성노동자단체), 성산업인(성산업인단체) 이렇게 4자가 모이는 성산업관리위원회 같은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정부는 성산업 분야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사회적 책임성을 가져야 하고, 시민단체는 성산업을 감시하고 이 산업 내에서의 민주적 성과를 평가하고, 성노동자와 성산업인은 노동자의 권리 향상과 성산업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주체로 각각 참여해서 구체적 기준을 합의하고 관리하자는 거죠.

여러분(‘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을 지칭)이 주장하는 ‘자율관리제도’와 거의 비슷한 것을 주장하는 거죠.


(* ‘성자공연’(준)은 애초에 넓은 의미에서의 매춘 비범죄화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합법화=공창제라는 도식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매춘의 비범죄화는 말 그대로 모든 형태의 매춘에 대한 법률을 폐지하고, 다른 모든 일에 적용되는 일반 법률을 따르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범죄화 전략 자체를 성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다른 단체들처럼 중심적인 전략으로 다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합법적인 일자리들이 그렇듯이 노동법의 적용을 받는다고 해서 노동자의 권리가 실질적으로 향상되거나 그 산업이 민주화되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개인 성거래를 한 여성이 상대방으로부터 서비스에 대한 요금을 받지 못했다던가, 폭행을 당했다던가 했을 때 경찰서로 들어가 그 고객을 고소하거나 신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개인이 그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지수다. 업주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과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여건이 되겠느냐하는 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을 보면 일반적인 일에 적용되는 현행 법률이란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저런 이유로 ‘성자공연’(준)은 다른 모든 일에 적용되는 법률을 이 산업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대응책이라 생각하며, 단지 범죄가 아니라는 사실만을 의미하게 될 뿐 사회적 낙인과 성노동자의 권리향상의 측면에서 기대할 것이 굉장히 적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산업 및 성노동에 대한 자율관리 제도’를 입법화하는 것이 핵심적인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자율관리제도란 쉽게 말해 성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 성산업인이나 성노동자들의 민주적 참여에 의해 성산업 전반을 통제함으로써 이 부분을 점점 더 민주화시켜나가는 것을 말한다. 정부와 시민의 책임과 역할은 이 산업에서 인권침해와 노동착취 등의 문제가 사라지도록 지원체계를 갖추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성산업을 점점 더 민주화시키는 부분에 대해 사회적 보조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최근에 성적 표현의 자유와 관련된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섹스포와 같은 사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성인용품을 파는 사람들이나, 동영상, 포르노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도 바로 성산업인이니까 얼마든지 연대할 수 있습니다. 성에 대한 토론이 활성화되지 않고 국가가 정한 풍속법 같은 것에만 매여 있는 폐쇄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다양한 성 담론과 성적 표현의 자유를 위한 싸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적표현의 자유가 진전되어 사람들의 성규범과 성 관념이 변화될수록 성노동운동도 더욱 발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성거래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지요?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경우는 길거리 성노동자들 즉, 개인영업자의 경우를 위해 특정한 구역에서의 개인영업을 따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일명 박카스아줌마나 트랜스젠더 성노동자들의 권리향상과 인권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정보센터를 구축하여 거리의 성노동자들이 폭행을 당했다든지, 인권침해적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신고하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센터가 있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특정구역 안에서 보다 안전하게 거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성산업인이 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얘기해주십시오.


돈을 벌기 위해 집창촌에 들어왔죠. 옷가게를 하면서 유흥업소 아가씨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마침 옷가게도 잘 안되었고 의기투합이 되었죠. 그래서 큰 언니 역할을 하면서 집창촌으로 같이 들어왔어요. 여기 들어올 때 뱃속에 아이까지 있었어요. 아이(성노동자)들은 언니와 함께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고, 저도 성노동자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같이 나누어 먹고 살자는 것이었죠.

가족들의 반대가 가장 힘들었어요.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더군요. 그래도 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시간이 좀 지나고 곁에서 이 사업을 지켜보더니 결국에는 가족들도 다들 인정을 하더군요.

(‘민주성산업인연대’ 감사의 경우는 이전에 한번 들어와서는 망해가지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케이스라 한다. 처음에는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고 극구 부정도 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인신매매’가 횡행하고 깡패들만 있는 곳으로만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돈이 없어 이 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막상 들어와 보니 생각했던 것과 당연히 틀렸던 것이다.)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성노동운동을 하면서 가장 크게 변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떳떳해졌어요. 물론 개인 차원에서는 이 일을 하면서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가족들 몰래 사업을 시작했고, 지금도 가족들이 모르는 경우도 있어요. 사회에서 ‘포주’라고 손가락질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떳떳해졌어요. 가족들에게 내가 이 산업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 성노동운동을 하면서 가장 크게 변한 점이 그거예요.


모두들,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 후기: 사실 ‘민주성산업인연대’라는 단체는 국제 성노동운동의 경험 속에서는 이례적인 것에 속한다. 해외의 사례를 보아도 대체로 업주들은 성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큰 위기감을 느끼며 성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억압하려 들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민주성산업인연대’처럼 적극적으로 성노동운동에 결합하려는 특출난 사례가 있었던가? 내 기억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성산업과 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정부, 시민, 성노동자, 성산업인 4자가 참여하는 관리 제도를 두자는 것으로 요구하는 경우도 내가 알기로는 없다. 정치적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관리제도는 ‘성자공연’(준)이 애초에 생각하고 있었던 ‘성노동 자율관리제도’와 분명 흡사하다.

우리는 사실, 성산업 분야만이 아니라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산업분야가 단순히 사적이익만을 위해 경주하는 거대산업체이기를 멈추고 성노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관리제도 아래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어떤 산업도 그 산업과 이해관계를 갖는 모든 정치적 경제적 주체들을 포괄하여 민주적으로 협의해가는 관리제도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업이 환경파괴를 해도, 노동자의 인권을 마구 유린해도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 노동자와 시민은 그런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정부는 그런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모든 산업들은 합법적으로 인정받으며 비범죄화된다.

우리는 성산업이 불법화되어 있는 현실적 조건 때문에 다른 어떤 산업보다 더 빠르게 직접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에 의해 사회 공통의 이익에 기여하는 방향에서 전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민주성산업인연대’를 지지하며 보다 사회 공통의 이익에 협력적으로 될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원래는 ‘민주성노동자연대’와의 간담회를 먼저 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바쁜 일정 때문에 ‘민주성산업인연대’와의 간담회 뒤로 미뤄졌다. 오는 24일에 ‘민주성노동자연대’와의 간담회가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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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짓기의 문제

 

 

지난 워크샵(민성노련 1주년 기념 워크샵)에서 성노동자들의 '특정지역 비범죄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이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특정지역'에 대한 집착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성노동자들은 그 부분에 대해 강조했는데, 나는 그것을 소위 말하는 '3종 업소'에 대한 성노동자 스스로의 차이짓기로 읽었습니다. 왜 성노동자는 집창촌과 술3종 업소를 차이짓는가? 아마도 성노동자들의 경험으로부터 그런 차이짓기가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문득, 성노동자들이 규정하고 있는(경험적으로든, 개념적으로든) '성산업' '성노동자'가 일반인이 생각하고 있는 '성산업' '성노동자'에 대한 규정과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령, 언론매체에서 마치 성산업 업소처럼 다루고 있고 일반인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룸싸롱'이나 '단란주점'이 성산업에 포함되는 것일까요? 성노동자들은 아니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성노동을 하고 있겠지만, '성노동자'인 것일까요? 성노동자들은 아니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산업을 합법화하고 성노동자에게 노동자로서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한다면, 역시 성산업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개념 규정(법적 정의를 포함한)이 필요하고 성노동자는 누구인지에 대한 개념 규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차후에 있을 여타의 쟁점과 성노동자 운동의 방향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예를 들어 '포르노의 제작'이나 '성인 사이트'를 성산업이라고 했을 때 그 산업의 합법화와 그 속의 성노동자의 권리까지를 포괄하는 투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룸싸롱'을 성산업이 아니라고 규정한다면 현재 '3종 업소'에서 성행하고 있는 성노동의 강요는 그야말로 업주의 불법행위로 간주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성산업과 성노동자의 규정에 따라 운동의 주체와 목표, 방향 등이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산업이 무엇인지, 성노동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하고 연구된 결과도 드물며 그런 논쟁도 별로 없었던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크샵에서 성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경험적 현실에 기초해 어떤 한계를 그으며 개념들을 규정했다는 것이 제 판단이며, 나는 많은 사람들이 성노동자들의 판단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그 부분에서 더 발전된 연구를 진척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워크샵에서의 성노동자들은 '길거리 매춘, 그리고 출장매춘형태들과 집창촌의 형태'를 성산업에 속한다고 보고,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성노동자라고 정의했다고 보여집니다. '3종 업소'는 성산업에 속하지 않으며, 그 속에서 일하는 접대서비스 노동자는 성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겠죠. 주부도 성노동이나 매춘을 하고, 일반 회사원도 때에 따라 성노동을 하거나 매춘을 하겠지만 그 형태가 성산업은 아니고, 그 주체성도 성노동자는 아니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다고 보여집니다.

모두가 성노동을 한다는 측면에서 성노동이나 매춘은 범죄가 아니라는 하나의 근거가 되고, 또한 우리 모두가 성노동을 하고 있으므로 공통적이며 그것이 서로 다른 주체성들이 연대하는 토대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성노동자인 것은 아니겠죠.

 

나로서는 '3종 업소'에서 일하는 접대서비스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어떤 주체성으로 부를지, 그리고 자신들의 권리를 어떤 주체적 권리로 제기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것에 따라 달라질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그 노동자들은 성노동자가 아니라 접대서비스 노동자로 자신들을 인식하고 있으며 성노동을 강요받는 성착취의 상태에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술을 팔기 위한 업주의 목적에 종속되어 매춘을 강요 받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재활센터를 찾는 노동자들의 대부분도 '3종 업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며, 성착취를 호소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도 결국 그녀들인 것이 아닐까요? 성매매특별법을 지지하는 언론매체의 보도 관행에서도 '3종 업소'에 있는 여성들을 다루지 집창촌에 있는 여성들을 다루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는 미묘하지만, 현재 성노동 운동에 있어서는 무척 중요하게 다뤄야 할 사안이라 생각됩니다. 나는 이런 차이를 예민하게 다루는 쪽이 성노동자이며, 오히려 성산업이나 성노동자에 대한 규정을 포괄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다루는 쪽이 연대단체들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른 한편, 워크샵에서 성노동자들은 '섹스행위 이외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에 대해서 성노동으로 규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포르노 배우들이나 성인 사이트와 관계되어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어보였습니다. 포르노 배우는 성노동자인가요? 아닌가요? 포르노가 아닌 에로영화는 어떻습니까? 에로배우는 어떤 존재인가요? 성산업과 성노동자입니까, 아닙니까? 성인 사이트에 글을 기고하는 필자들과 소위 야설작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성인용품을 제조하거나 파는 산업과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요? 성산업과 성노동자를 규정하려는 순간, 갑자기 갖가지 의문과 혼란에 휩싸입니다. 주위로부터 '직접 성을 팔지 않으니까 업주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는데,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이라면 포르노 감독이나 포르노 제작에 참여하는 스탭들은 무엇이며, 야설작가는 무엇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들도 성노동자라 불릴 수 있을 듯 한데, 성해방의 뉘앙스를 풍기는 '남로당'이라는 사이트를 방문해봤더니 성노동자와 성노동 운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더군요. 이것은 '민성노련' '성적표현의 자유나 성 정체성의 자유'에 대해 무관심한 것만큼, 그쪽에서도 비슷한 정도로 성노동 운동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분명 모두 성산업이고, 또한 성노동자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죠. 얼마 전, '섹스포'라는 섹스 엑스포 행사가 온갖 검열과 제재에 걸려 흐지부지 된 적이 있는데요. 이런 것에 대해 투쟁하는 것을 매개로 성노동 운동을 확대해나가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매춘부'가 아닌 '성노동자'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의미가 점점 사라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각설하고, 현재 우리에게는 성산업과 성노동자에 대한 정리된 개념규정조차 변변치 못합니다. 아마도 집창촌을 사수하고 생존권을 사수하는 문제가 일차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노동 운동이 계속 되는 한, 그리고 계속 되어야 한다면 성산업과 성노동자에 대한 개념이 토론되어져야 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이 운동의 구체적 목적과 방향, 그리고 연대의 밑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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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욕’ 운운, ‘양성평등’ 운운은 기본적으로 성노동자의 입장이 될 수 없다

 

1.

전효숙 재판관(이한 전재판관)이 헌법재판소 소장이 될 가능성이 유력해지면서 전재판관의 성매매 특별법에 대한 이전의 태도가 주목을 받고 있다. 전재판관은 남성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형태의 합법화의 길을 찾고 있다는 식의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법체계 속에서 양성평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전재판관의 관점은 결국 성노동에 있어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요청하는 합법화를 위한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남성성욕 운운하고, 현재의 성별구도적 성노동에 있어 양성평등 운운하는 것은 성노동자의 입장과 대립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

남성성욕 명분과 양성평등적 관점이 왜 이론적으로 틀렸는지, 왜 현실적으로 그것이 성노동자의 이해와 점점 반대되는 경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지를 분석하고, 성노동 운동에 있어 어떤 원칙이 중요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한다.

 

2.

전재판관은 남성의 성적 욕구는 여성과 비교할 때 신체적인 구조에 있어서 차별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의 성욕 해소와 관련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 남성의 성욕해소 기회 박탈의 관점으로 성노동의 현실에 접근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얘기로 들린다. 그러나

 

전재판관의 남성성욕 운운이 과연 옳은지는 남성의 일반적 성욕이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확인해보면 된다. 우선 남성 일반은 그가 성노동자가 아니라면, 성매매 특별법 때문에 생존권에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는다. 남성 일반의 생존권과 성특법은 무관하다.

그렇다면 성욕의 해소 측면에서는?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다. 남성 일반은 성특법이 존재하건, 하지 않건 거의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유사 성행위 업소, 단란주점, 안마시술소 이런 곳이 번성하는 것을 보라. 남성의 입장에서는 성노동자가 어떻게 취급되든 성욕해소적 측면에서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현실에서 성욕을 해소할 수 없어 고통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성특법 때문에 성욕을 해결할 수 없어 자살했다는 남자 얘기를 들어본 바가 없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남성성욕을 강조하는 걸까? 한계레의 지면에서도 많은 합법론자들이 남성 성욕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왜 합법화론자들이 성노동자의 권리가 아니라, 남성성욕 운운하는지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부터 그런 억지논리가 어떤 사회적 맥락안으로 들어서는지 살펴보자.

 

3.

전재판관의 논리 구조를 살펴 보면 남성성욕의 특성을 성을 사는 것에 있는 것으로 본질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은 성을 사지 않은데 남성 성욕은 필연적으로 성을 사게 되어있다는 것과 같다. 이 논리의 문제는 성적 거래를 돈이 오가는 일반적 거래로 보지 못하게 하고, 남성적 특성으로 규정함으로써 성별적 차이로 인식하게 만든다. 또 하나의 문제는 마치 여성은 본질적으로 돈을 주고 남성과 성적거래를 하지 않는 것처럼 규정함으로써, 남성에게는 원죄의식을 동원시키고 여성에게는 성을 사서는 안 된다는 억압규범을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여성은 부득불 성을 팔 수 밖에 없지만, 성을 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 논리가 가진 두 측면 모두 철저하게 성적거래에 대해 몰역사적인 관점에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현실과 맞지도 않고, 몰역사적인 남성성욕 운운이 매춘의 합법화 공론에서 갖는 의미란 무엇일까? 도대체 왜 남성성욕을 들이대는가? , 합법화 논의에서 남성성욕이 갖는 효과에 대해 현실적인 그림을 그려보자. 남성이 원래 그러니까 남성성욕을 해소하는 길을 마련하자고? 필요악이라 이거지. 좋아, 거기에 얼마간 동의해준다고 하자. 그렇다고 무차별적으로 남성성욕을 해소해서는 안되고 성을 사지 않는 여성의 입장도 반영해야 하니까 국가가 강력하게 통제해야 하는 거 아냐? 결국 이러한 구도에서 합법화가 공론화될 뿐이다.

성노동자의 권리향상은 배제되고, 철저히 타인의 노동을 향유하는 사용자(남성) 중심주의 문제로 합법화 논의가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성노동의 사회적 긍정성 논의는 완벽하게 자취를 감추게 되고, 단지 남성성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제해야 하는가? 라는 법체계적 관점만 자리잡게 된다. 합법화가 남성성욕에 대한 국가적 통제를 요청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어버릴 때 공창제, 혹은 공창제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강력한 규제주의적 제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남성성욕과 성생활의 사회적 조건은 합법화 이전이나 그 이후나 실상 별로 달라질 건 없다. 아마도 현실적으로 눈에 띄는 가장 큰 변화는 매춘알선업 금지(혹은 규제) 및 노동허가제라는 형태의 저임금 일자리가 성노동자들에게 합법적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경찰의 단속보다 무서운 사회적 규제다.

 

4.

정리하자면, 남성성욕의 특징을 성을 사는 것으로 본질화함으로써 결국 그것을 하나의 성적인 차이로 용인하려는 양성평등의 논리가 나온다. 그리고 뒤따라 평등의 상호성논리에 입각해 성을 사지 않는 것으로 본질화된 여성의 입장을 반영함으로써 국가의 강력한 규제와 통제를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공평하고 매끄러운 논리적 과정인가! 완벽하게 현실을 왜곡하고 있는 점만을 뺀다면 말이다.

 

결국 남성성욕을 중심에 놓고 합법화 운운하는 논리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의한 합법화를 자연스럽게 요청하게 된다. 전재판관은 그것을 법체계적으로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에 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성노동자의 권리향상이라는 문제를 부차화시키며, 끊임없이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식으로 성노동자의 입장을 완벽히 배제한 채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입각한 합법화로 흘러가게 된다면, 여기에 이해관계를 같이 할 세력은 엄청나게 많아진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각 정당정치세력들(이들은 어떻게든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표를 갉아먹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으므로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의한 합법화로 공론화되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여성단체들, 보수적 도덕주의자들, 양성평등주의자들, 종교단체들, 심지어 성노동자는 괜찮지만, 매춘알선업자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등등. 아주 다양한 세력이 이해를 같이 할 수 있다.

탈성매매를 주장하는 여성단체들의 이해와도 일치할까? 현실적으로 일치한다. 왜냐하면 성노동자의 일이 저임금 일자리가 될 때 오히려 탈성매매가 촉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성노동자들이 돈을 너무 많이 버니까 그쪽으로 가는 게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렇게 각 정치세력은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입각한 합법화를 지지할 수 있는 정치적 이해관계와 근거들을 각각 가지고 있는 것이다. 법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성노동자들의 입장만 빼고 모두 타협에 들어설 수 있다.

 

5.

바로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우리(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남성성욕의 해소양성평등을 주장하는 한국인권뉴스 (양성)평등연대와 입장을 같이 하지 않는다.

나는 당면한 현실에서 성노동자의 입장이라는 원칙을 거듭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노동자들에 의한 성노동의 자율관리제도라는 우리의 기본 입장에서 보자면, 성노동 네트워크에 모인 여성주의 그룹들의 매춘에 관한 모든 법률의 완전한 철폐에 입각한 비범죄주의 원칙을 지지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입법적 공론화 속에 성노동자의 입장과 성노동자의 자율, 그리고 이 분야에서 일하는 협력적 노동자의 자율을 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고 싶다. 남성성욕 운운과 양성평등적 개념은 현실을 왜곡시키며, 국가의 강력한 통제에 입각한 합법화를 공론화하려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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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 자율 공동체를 위한 연대(준)” 소개

“성노동 자율 공동체를 위한 연대(준)”


연대의 기초

1. 개괄
성노동 자율 공동체를 위한 연대(이하 ‘성자공연’)의 기초는 무엇보다 현행 ‘성매매특별법’(성특법)에 의해 불거진 성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함께 하고 지지, 지원하는 것에서 그 기초를 찾는다. 성노동자들은 국가(그리고 여성가족부)와 법체계에 의해 ‘대상화’된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 주체적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따라서 성노동자들의 권리향상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매춘을 범죄시하고 성노동에 대한 사회의 긍정적 성취를 가로 막는 것이 비단 성특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성욕을 억압하는 성별권력관계, 가족 및 혼인제도를 비롯한 욕망의 해방을 억압하는 섹슈얼리티 규범 및 제도, 문화들에 있다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성별해방의 관점에서, 욕망해방의 관점에서 성에 접근하려는 모든 사회적 투쟁이 또한 이 연대의 기초가 된다.

2. 성노동에 대해
성노동의 개념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성노동은 정상적인 ‘직업’으로써, 이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법적 권리 확장을 의미한다. 이는 지금까지 비정상화의 범주로써 인식되던 영역을 정상화하는 첫걸음에 속한다.
다른 한편, 성노동의 개념은 ‘사회적 성’(주관화되고 개인화된 성이 아니라)에 대해 비로서 공통성을 파악하고 증진할 수 있는 사회적 장을 여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노동은 인간의 공통성을 촉진시켜왔다. 노동을 통해 인간은 서로 협력적이 되었으며, 보다 창의적으로 변모했다. 이 공통성의 외적 표현형식이 ‘사회적 부’일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아직까지 성을 통해 어떤 공통성을 촉진시키지는 못했다. 성은 언제나 은밀하고 개인화된 형태로 촉진되거나 혹은 국가와 제도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은 노동만큼이나 사회 협력적인 것에, 그리고 인간이 보다 창의적으로 변모하는데 큰 기여를 해왔고 또한 할 수 있는 잠재성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성을 그렇게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렇게 사용하는 것을 억압당해 왔다. 이런 측면에서 성노동의 개념은 사회가 성을 노동과 마찬가지로 공통성의 영역으로 다루어야 할 필요성의 측면에서 부각된다.
성노동 개념의 또 다른 측면은 현대사회의 노동의 성격변화와 섹슈얼리티의 변용을 동시에 부각시키는 개념이다. 성노동이란 단어는 성적 활동과 노동간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는 노동의 성격변화를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노동의 변화를 표현하는 언급들은 매우 다양하다. 감정노동(페미니즘 이론), 비물질적 노동(자율주의 이론), 그림자 노동(일리치), 정동적 노동 혹은 욕망 노동(들뢰즈와 가타리) 등등.
다음과 같이 설명적으로 노동의 변화상이 제시되기도 한다. 열역학적 노동에서 나노테크놀러지 노동으로의 변화, 근육을 사용한 육체노동에서 신체를 기반으로 한 정서와 감정 및 관념적(비물질적) 노동으로의 변화, 기계에 대해 반정립적이고 수동적이던 노동에서 사이보그화된 노동으로의 변화, 노동의 남성화에서 노동의 여성화 현상으로의 변화, 외화된 노동에서 내화된 노동(주체성 생산)으로의 변화 등등.
성노동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노동의 변화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또한 노동의 성애화 혹은 관능화로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는 점점 더 자신의 노동에 성적능력 및 성애, 관능적 능력을 동원하고 있다. 단순한 기계를 대면하고 있는 노동에서조차 기계에 대한 노동자의 성애가 존재하며, 관능적 관계가 형성된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노동에 있어서 노동자의 성애 및 관능적 능력이 더욱 요구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성애나 관능적 능력이 모든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에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이 사회적 공통성을 촉진시켜왔음을 드러내주는 증거다. 우리는 이것을 노동하는 주체성의 측면에서 ‘노동의 관능화’로 표현한다. 노동의 관능화는 우리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변용시키고 있다. 이러한 변용은 오늘날 ‘성적 노동’(성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스트립댄서에서부터 포르노그라피 종사자, 매춘여성 등에 이르는)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노동의 관능화와 성적 노동 사이의 차별화와 위계화를 위해 애써 법적, 제도적 권력장치를 고안해내려고 한다.

3. ‘여성’ 젠더 정치에 대해
한국사회에서 성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성노동자 운동에 있어서 ‘여성’이라는 젠더적 관점에의 접근은 곧잘 적대적으로 비화한다. 현재까지 성노동자 입장에서 ‘여성’은 성노동자를 능욕하는 또 다른 권력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마치 정규직 여성과 비정규직 여성간의 대립이 재현이나 주부 여성과 매춘 여성의 대립이 재현 되는 듯 하다. 성노동자는 성노동자를 피해자화하고 구제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맥락에서 ‘여성’ 일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성노동자들이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처럼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존재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결단코 아니다. 피해자임과 동시에 오히려 자신들의 노동이나 행위를 통해 적극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능동성과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청소부라는 직업은 힘들고 위험하다. 그/그녀가 청소부가 되었어야 했던 것은 그/그녀들에게 물질적 필요에 접근할 수 있는 여타의 수단(돈, 학력, 연줄, 성 등등)을 박탈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그녀들은 피해자다. 그러나 그/그녀들을 피해자라고만 정의하는 것은 또한 모욕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력관계에 있어서는 분명 피해자이지만, 현실의 생산과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삶의 주체성 측면에 있어서는 능동적 구성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성노동자도 청소부와 다르지 않다. 청소노동이 사회적 삶 전체의 맥락에서 본다면 고귀한 노동이거나 활동일 수 있듯이 성노동 또한 그렇다. 어떤 면에서 삶과 욕망의 자율적 구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모두가 회피하고자 하는 그 노동이야말로 더 높은 가치를 가져야 마땅하다. 우리는 결국 ‘여성’이라는 젠더 정치학이 성노동자들을 배제하거나 봉합하려 하지 않고 성노동자를 적극 지원할 때 여성운동에 새로운 활로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4. 포주와 구매자에 대해
속칭 ‘포주’와 성을 구매하는 자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성노동자를 범죄시하고 죄악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이들을 범죄시하고 죄악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먼저 포주에 대해서. 우리가 확인한 사실에 의하면, 포주들은 단순히 ‘포주’라고 하나로 명명할 만큼 포주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포주와 성노동자의 관계는 주인-노예의 관계도 있으며, 단순 노-사 관계도 있으며, 협력적 파트너 관계도 있다. 한편 성노동자가 포주 일을 동시에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우리는 주인-노예관계가 폐절되길 원하며, 노-사 관계에서 노동자가 주도적 이길 원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우리는 ‘빈자’들의 협력성에 주목한다. 포주가 아니라, 그/그녀들은 협력적 관계에서 분명 노동자다. 포주가 정말 자본가라면 성특법이 추진되어 집성촌이 폐쇄되거나 말거나 생존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일과 관련하여 생존권이 달린 가난한 사람들을 포주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성 구매자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의 성 구매자는 남성이다. 그러나 이 지형도 분명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남성’으로써 성을 구매한다. 이 말의 의미는 성을 구매하기 때문에 그가 남성인 것이 아니라, 그가 ‘남성’으로써 모든 성활동을 하는 것처럼 구매할 때도 ‘남성’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구매자인 남성을 개혁해야 한다. 성노동자들이 이 산업분야에서 얼마나 권리향상을 이뤄내는가에 의해 구매자인 남성의 개혁여부가 달려 있다. 그리고 구매자인 남성의 개혁은 실제로 이 산업영역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남성성욕의 개혁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을 구매하지 않겠다’는 따위의 ‘착한 남성’ 선언은 성노동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며, 사회적차원에서 형성된 남성성욕조차 문제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그저 ‘돈을 주고 하는 섹스에는 발기가 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공짜섹스에 대한 열망을 가진 남성성욕의 표현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타인의 필요에 의해 성을 제공하는 입장과 성을 사는 입장 두 모습 다 가지고 있다. 물론 그 ‘타인의 필요’에는 자본가적 필요도 있을 것이고, 여성의 필요, 남성의 필요 모두 포함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화폐소유자 보다 성을 제공하는 입장에 있는 자(생산자)들이 더욱 유리한 조건이 되는 자본주의적 가치의 전복적 상태를 우리는 지향한다. 덧붙여, 우리는 성을 제공하는 자가 욕망에 기초하지 못하는 상황이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성을 제공하는 자가 욕망에 근거할 때 전복이 일어난다. 노동을 제공하는 자가 욕망에 근거하고 기쁨을 느낄 때 그것이 혁명이듯이.

5. 성노동자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우리는 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자유로운 성욕을 억압하는 섹슈얼리티제도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여성의 자유로운 성욕 증진과 관계가 있다고 파악한다. 여성들의 일이 사회화되거나 여성들이 직업을 가질수록 여성들의 자기 성욕에 대한 자율성은 보다 확대된다. 결국 자유로운 성욕은 사회적 접촉의 기회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노동의 관능화는 점점 더 성별을 뛰어넘는 섹슈얼리티를 만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의 관능화와 노동의 여성화는 여성만이 결부된 문제가 아니라, 노동에 관계하는 여성과 남성 모두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성노동자들에 대해 ‘그녀들이 그 일을 즐기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즐기고 있지 않다’고 답하는 것에 반대한다. 상황에 따라 즐기지 못할 수도 있고, 즐길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담론의 차원에서 항상 노동이라고 해서 그것을 즐기면 안 되는 것으로 이론화하는가? 즐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편견이자, 자본가적 논리다. 그 일을 즐긴다면, 그게 더 큰 범죄라도 되는가? 성노동이 범죄라는 게 명확해지기라도 하는가?
노동은 특정한 관계와 상황에 따라, 그리고 노동이 자리하고 있는 그 사회의 성격에 따라 기쁨일 수도 있고, 고역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전면적으로 고역적이거나 전면적으로 기쁘지는 않다. 성노동이라고 해서 전면적으로 고역적이지 않다. 그것이 고역이라면 즐거울 수 있는 방향으로 촉진하려는 것이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욕망일 것이다. 그래서 안될 이유는 없다. 몇몇 노동자의 경우는 즐기기 위해 성노동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기쁨을 느끼니 단죄해야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성노동자들이 그 노동을 즐기고 있는지의 여부에 과도한 관심을 드러낸다. 쾌락의 여부가 성노동에 대해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결정적일까?
성노동에 쾌락이 없다고 답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정치적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성노동자들을 ‘특별히 색정적인 여성들’로 차별화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성노동자들을 피해자화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두 가지 모두 잘못된 반대를 기획함으로써 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강화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먼저, 색정적인 여성들로 차별화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불감증 여성들로 묘사함으로써 효과적인 대립논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두번째, 어떤 주체성을 피해자화함으로써 외부적 힘의 정당성과 ‘구제’논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극히 수동적이고 목석 같은 존재로 사물화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권력의 작동방식이다. 기쁨과 욕망의 차원을 배제하는 이론화 작업은 성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어떤 정당한 부분을 숨겨야 하는 내부적 억압장치를 가동시키게 만든다.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투쟁들에 함께 한다.
- 성매매특별법의 폐지와 성노동자의 권리향상을 위해 싸운다.
- 성노동 자율관리와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 사회의 지배적 성 규범 및 제도(섹슈얼리티)을 개혁한다.
- 성별 및 성애의 형태를 이유로 차별을 행하는 여타 제도의 철폐를 위해 노력한다.
- 사회에서의 여성의 성욕해방을 지원한다.
- 남성 구매자를 개혁하고 사회의 남성성욕을 개혁한다.
- 가족의 민주적 재구성과 성의 자율적 조직화를 지원한다.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는 위의 목적에 동의하는 성노동자 및 성노동에 있어 협력적 노동자 모두, 그리고 이 운동에 동의하고 서포터즈가 되길 원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들이 함께 할 수 있다.
우리의 임시홈페이지는 http://go.jinbo.net/commune/index.php?board=성자공연이다. 가입 시 하고 싶은 말에 ‘정회원’을 요청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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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오해들에 대하여

몇 가지 오해들에 대하여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

 

성노동자 운동에 참여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우리는 주변으로부터 이런 저런 진심 어린 충고와 문제제기들을 받고 있다. 문제제기는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성찰하게 하므로 매우 기쁜 일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조직하고자 했을 때 부딪혔던 오해들을 접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입장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힐 수 있었다.

 

먼저, 여성주의에 반대하거나 적대시하는 것 아니냐? , 남성권력의 입장에 서 있는 것 아니냐? 는 오해에 대해.

우리는 여성주의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거나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정리하고 말아버릴 만큼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분노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의 분노를 말하는 게 아니다. 왜 성노동자들은 여성주의에 분노할까? 당연하게도 성매매특별법이 성노동자들을 분노하게 만들 만큼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은 누가 만들었는가? 주체는 명확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성노동자들이 어리석다고,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여성주의를 무차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음을 밝힌다. 우리는 새로운 여성주의가 필요하다고 느끼며, 성노동의 쟁점화를 계기로 여성주의가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성노동자 네트워크에 함께 하는 여성주의의 새로운 구성적 흐름이 이미 존재한다. 우리는 이 진행 중에 있는 여성주의를 지지하며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여성주의의 지지가 이 운동에 매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런 지지에 대해 여성주의를 편가르는 책략이라고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편가를 능력도, 의무도, 정치적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모든 여성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며, 성노동자와 여성주의간에 형성된 적대적 상황을 돌파해나가 새롭게 구성될 여성주의를 지지한다.

 

구매자 입장에서 성노동을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에 대해.

우리로서는 구매자를 범죄시하는 것에 대해 성노동자를 범죄시하는 것만큼이나 반대한다. 동일하게 구매자의 대부분인 남성도 분명 성별권력 관계 내에서 보자면 권력자이지만, 성적제도의 측면에서의 소외자나 다른 사회적 관계에서 희생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권력자인 한 우리는 구매자 남성의 남성성이 개혁되길 원한다. 하지만 구매자들의 개혁은 결국은 성노동자들이 이 운동에서 얼마나 권리향상을 이뤄내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거래자체가 범죄가 아니라 거래의 사회적 양태를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다. 개인적,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는 거래활동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 거래가 딱히 사랑(이 사회의 사랑은 상대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소유권의 표현이다)에 의한 거래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유희여도 좋고, 자신의 다른 어떤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소득을 올릴 목적이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거래가 어떤 사회적 체계와 맥락 속에 있느냐가 문제이고, 거래의 사회적 양태를 보다 인간적으로 꾸준히 변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양성평등을 추구하느냐?는 오해에 대해.

우리는 양성평등이란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에서 두 개의 성이 서로 평등하게 금욕적일 것을, 또한 동일하게 권력에 종속될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 양성평등의 개념은 여성차별적 현실을 은폐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 내리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개의 성 어느 한쪽에 사회적으로 할당 받고 그 체계에 종속되고 싶지 않고 모든 성이 될 자유를 원한다. 성별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면 또한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성을 선택하고 새롭게 구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은 군대에 가야 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남성이 아닌 다른 성을 선택할 자유를 추구할 것이다. 모든 여성은 가사노동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여성이 아닌 다른 성을 선택할 자유를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성별규정적 체계와 역할분담,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서의 남녀차별이 없는 공평한 부담 등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해방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보기에 현재의 성노동 운동에서 양성평등을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노동에 있어 남성일반의 권리나 남성성욕의 권리가 박탈당해 고통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생산자나 판매자가 아니라면, 구매자인 남성은 어쨌거나 성노동에 있어 소비자이자 화폐소유자이자 남성권력으로 늘 우월한 위치에 있다. 앞서 우리는 구매자 개혁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현재의 성산업에서 구매자 개혁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다. 구매자 남성의 개혁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한 개혁은 현재 성 산업의 부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당연하게도, 남성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성노동자를 찾는 구매자이기 전에 이미 형성된 남성성욕이라는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노동자들 그리고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차이는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쟁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체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적대적인 차이보다 공통적인 것을 더 많이 발견했다. 우리로서는 성노동자 주체성의 긍정적 발현이라는 차원에서 보다 협력적인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는 여러 쟁점에 대해 토론 중에 있으며, 확실한 것 하나는 성노동에 대한 성노동자들의 자율관리를 지지하며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알리는데 서포터즈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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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안티 성노동자적인 시각을 비판한다

 

정희진은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될 때 한겨레신문의 지면을 통해 <성매매, 생존권 투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성매매가 ‘직업’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여성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것과 (남성은 그렇지 않지만) 여성에게 성 판매는 사회적 노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성매매의 폐해는 매매 행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본인의 선택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다.”

정희진은 참으로 이상한 논법을 구사한다. ‘직업’으로서의 성매매를 분석하는 것과 ‘매매 행위’ 자체에서 오는 성매매의 폐해를 논리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둘을 동일시한다. 성노동을 인정하는 것과 성노동에 따르는 어떤 폐해가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런 구분은 비단 성노동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에서 행해지는 구분이어야 할 것이다. 즉, 정희진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노동시장의 성차별 근절’이라고 할 때의 그 ‘노동’도 문제인 것이다. 그 ‘노동’이 뭔지 모르겠으나 그것을 노동으로 인정하는 것과 그 노동에 착취와 폐해가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성매매의 폐해가 뭔지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성노동이 아닌 KTX 여승무원의 노동이나 방직공장 여공의 노동을 보자. 정희진의 말처럼 우리가 그녀들이 그 노동을 택한 것이 개개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그 노동에 따르는 폐해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여승무원의 노동과 여공의 노동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정희진의 논법대로라면, 여승무원의 노동과 여공의 노동도 성노동처럼 성별 권력관계의 문제이고 그 노동에 폐해라고 할만한 것이 존재하므로 인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논법을 구사하던 정희진은 매춘여성들이 성노동자임을 스스로 선언하고 투쟁에 나서자, 다시 한겨레 지면을 빌어 <성노동권 유감>이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동안 여성들은 승진, 고용, 숙련, 위험도, 산재 등 노동 시장에 전제된 남성 기준에 도전하면서 동시에 공적 영역 중심의 기존 노동 개념을 확장, 재구성해 왔다. ‘감정 노동’이나 ‘성 노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그 관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노동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성과 사랑은 노동이고, 노동이어야 한다. ‘가사노동’, ‘성 노동’의 정치적 의미는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 사회화하기 위한 것이다. 즉, ‘여성의 사회 진출’처럼, ‘사적’ 영역의 노동에 남성들도 진출하여 남녀가 함께 성별 분업을 극복하자는 것이지, 여성이 계속 ‘성 노동’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섹스는 노동이고 몸은 자원이라는 주장이 전혀 아닌 것이다.”

<성매매, 생존권투쟁?>에서의 주장보다 성노동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역시 노동자의 권리 향상에 대해서 유감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이번에도 이상한 논법을 구사한다. 정희진의 논법대로라면, 성노동은 노동이고 심지어 ‘노동이어야’하는데 그것이 단지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 사회화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하는 것과 성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대립된다는 말인가?
게다가 갑자기 뜬금없는(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논리적 맥락과는 전혀 다른) ‘여성이 계속 성노동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언급은 왜 삽입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속 성노동을 하겠다는 게 물론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계속 성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다. 이것은 모든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닌가? 결국 정희진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성노동은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하기 위한 것이지 노동자의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이때 도대체 여성의 노동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한다는 것이 무슨 현실적 의미를 갖는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희진은 <성매매, 생존권 투쟁?>과 <성노동권 유감>이라는 글에서 내내 “노동시장의 성차별 근절 노력”을 강조했으며, “성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했다. 이런 정희진의 주장에 공감 못하거나 동의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정희진의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 정희진 스스로의 개념 속에서 어떻게 항상 성노동자 운동과 대립되는 것으로 등장하는지 그게 의문일 뿐이다.
우리는 정희진이 “성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할 때 그것의 의미가 설마 성노동이 아닌 다른 노동을 통해 생존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아마도 모두가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생존의 토대를 만들자는 얘기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질문은 그것이 아니라,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왜 유독 성노동만이 범죄화되어야 하는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성노동이 아니면 당장 생존을 해결할 수 없는 노동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분명 생존권 투쟁의 문제이고, 노동자들의 권리향상을 위한 투쟁일 수 있는 것이다.

정희진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성노동을 하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는 권리”는, 성노동이라고 하는 이 부문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로 정희진 자신도 노동을 하지 않고(정희진이 무슨 구체적 노동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 할 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주장하고 투쟁할 때 성노동자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정희진의 주장은 현실도피성 발언에 불과할 뿐이다.
정희진의 ‘안티 성노동자’적인 시각은 뿌리깊은 ‘성매매=성폭력’ 본질론으로부터 비롯된다. 실제로 성매매를 성폭력과 동일시하는 담론을 다음과 같이 구사하고 있다.

“성매매는 도덕이나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집요한 남성 중심 정치권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사안이다. 만일, 여성의 성이 판매된 시간과 그 수치만큼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몸을 판다면, ‘매춘’이 가난과 상관없이 백인 중산층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도 ‘자유로이 선택’하는 직업이라면, 연쇄 살인사건의 주된 희생자들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아니라면, (성을 파는 여성이 아니라) 성을 사는 남성을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런 존재로 규정한다면…. 이런 상황 이후에야, 성매매는 성별 권력 관계와 관련 없는 문제가 된다. 그전까지, 성매매의 본질은 성 상품화도 아니고, 성 보수주의와 성 자유주의의 대립도 아니다. 성매매는 가장 일상화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일 뿐이다...(중략)...성매매 반대가 그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매매 제도의 문제는,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여성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모든 여성들과 모든 남성들의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성매매와 성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편견은, 남성의 성은 억제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근거한다. 남성의 성이 인간의 성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와 인격은 신체로 환원되고, 여성의 외모와 성은 ‘자원’이 된다.”(<성매매, 생존권 투쟁?>)

이 대목에서 정희진은 성매매에 대한 논쟁에 ‘성폭력’의 문제를 슬쩍 끼워 넣는 센스를 발휘한다. 이것이 성노동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의도인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런 식의 무차별적 언급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된다.
물론 정희진은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에 대해 직접적인 반대를 표명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노동 종사자들의 권리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즉, 정희진은 성노동자를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 ‘피해여성’으로 대상화할 뿐이다. 또한 인용문에서는 남성에 대해서도 마치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글에서 성을 구매하는 남성은 지극히 혐오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정희진이 주장하듯 성매매가 불가피하다는 편견은 남성의 성욕을 억제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이 전혀 아니다. 정희진의 이런 논법 자체가 사실은 지독한 편견에 불과하다. 사회는 성매매를 불가피하게 채택할 필요도, 남성 성욕만이 아니라 모든 성욕을 반드시 억제해야 하는 것으로 여길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불가피하건 하지 않건, 억제하건 하지 않건 문제는 할 수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적 제도에 의해 미리 규정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성욕을 억제하지 않는다고 해서 강간과 같은 성폭력으로 귀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욕에 대한 지나친 희화화다. 그리고 신체와 성이 자원이 되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는 남성도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이 점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논점 자체가 현실에서의 성노동과 성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위한 투쟁의 쟁점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성노동을 인간에 대한 폭력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노동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그런 규정을 내릴 때에야 그 함의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성노동만이 갖고 있는 무슨 특수한 신비적 개념에 의해서만 폭력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을 사회적으로 부과된 인간에 대한 폭력이라고 규정할 때 조차도 노동과 노동자를 ‘피해자’로만 개념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노동 그리고 노동자들 또한 피해자 일 텐데 정희진의 논법대로라면 이 넘쳐나는 ‘피해자’들을 누가 어떻게 ‘구제’해주어야 하는지의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노동자가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노동자들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정치로 귀결될 것이다. 성노동자들은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비천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여길지라도, 그 노동 속에서 세상과 사회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려는 주체성을 확장하기 마련이다. 성노동과 성노동자들에게 이런 힘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뜯어고쳐야 할 사회적 편견이자, 소수자적인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 진보넷에 만든 공동체입니다.

http://go.jinbo.net/commune/index.php?board=성자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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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은 노예노동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성노동을 노예노동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론 인신매매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신매매와 성노동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곧잘 매춘여성들이 인신매매에 의해 성노동을 강제 받았다는 신화를 굳게 믿고 싶어한다. 이런 신화에 대한 믿음은 ‘노예선’과 ‘새우잡이 어선’을 동일시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며, 성노동자들의 권리향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맑스적 의미에서 본다면 노예노동과 농노의 노동, 그리고 노동자의 노동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노동력은 바로 노동자의 노동이다. 매춘부를 노예노동자라고 믿는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가장 먼저 주인-노예관계의 노동으로부터 탈피한 것이 바로 매춘부라는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국가에 의해 직접 관리된 ‘관비’나 ‘위안부’형태의 성노동 형태를 제외하면 매춘부는 일찍이 가장 자유로운 노동력이었다.

성노동과 매춘여성은 인격적이고 신체적인 예속의 측면에서 분명 자유로운 노동력이다. 이것은 가사노동자인 주부와 비교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주부는 가부장에 의해 인격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분명히 예속되어 있으며(과거에는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이야말로 자유롭지 않은 노동력 즉 노예노동적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금이야 가사노동의 대부분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그 노동력도 상품화되어 주부들이 가부장이 아닌 타인을 위해 가사노동서비스를 수행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부의 성노동은 어떤가? 그것은 여전히 인격적이고 신체적인 예속의 측면에서 가부장에게 봉사하는 노예노동이다. 정확하게 구분하자면 매춘여성이 아니라 주부가 바로 노예노동자인 셈이다. 최근 들어 주부에게도 남편과의 섹스를 거부할 의사가 있음이 법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주부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섹스를 할 자유가 인정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가부장인 남편에게도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성적 노예상태가 있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의 가족제도에 잔존하고 있는 특질일 것이다. 그러므로 매춘여성이 노예노동의 상태에 있다고 하면서 혼인계약관계를 모델로 하는 성적 거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라보는 그릇된 인식은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다. 결국 혼인계약관계 모델을 정상화 규범으로 놓고 매춘여성을 비정상화라는 틀로 바라보기 때문에 엉터리 같은 ‘매춘=노예노동’이라는 도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매춘을 ‘장기매매’와 비교하는 어리석은 논자들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악의적인 동일시다. 성노동은 다른 노동자들처럼 신체를 파는 것이 아니라, 성노동자의 노동력을 파는 것이다. 성노동은 어떤 물질적 형태의 소비재나 내구재를 생산하는 것과는 다르게 감성이나 쾌락, 정신적인 것 등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생각해보라. 우리는 예술가들이나 배우들, 탤런트, 스포츠 스타들의 경우 자신들의 가치를 '몸값'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정말 '몸'을 판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노동들이 신체적 양식에 기반한 노동이라는 의미다. 오늘날의 노동은 정보, 소통, 정서를 생산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이것들 대부분은 인격과 의식, 감정 등 신체적 양식을 기반해 생산된다. 즉, 매춘은 오래 전부터 예술과 같은 엔터테인먼트적 노동이었고 예술적노동과 성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는 매춘여성들과 예술가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를 매매한다는 그릇된 정의에 의해 성노동 종사자에 대한 인식은 천편일률적으로 왜곡되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비생산적 노동’으로 끊임없이 폄하되고 있는 것이다.

성노동에 대한 또 다른 그릇된 유비의 결정판은 아동노동착취와의 비교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빈곤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과 아동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극심한 빈곤이 여성을 성매매의 영역으로 유인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빈곤이 사실이라고 해서 곧바로 성매매가 타당한 것은 아니다. 빈곤의 문제가 심각한 나라에서는 아직도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고 아동의 노동자성 인정과 노동권 확보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회당)
이런 비사회과학적 인식이 변혁을 지향한다고 자임하는 정치정당의 주장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빈곤한 나라에서의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의 형태는 해당 나라의 (성인)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동원된다. 즉, 가난한 성인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아동들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저임금 노동력을 손쉽게 구하려는 것이기에 우리는 아동노동에 대한 금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아동노동의 범주 일반을 문제 삼게 되면 가사 일을 돕는 아동노동이나 농촌지역에서 농사 일을 돕는 아동노동 일반을 모두 금지해야 한다는 엉터리 주장으로 이어지고야 만다.
빈곤이 여성을 성매매의 영역으로 유인한다고 주장하는 맥락도 분명 성노동을 다른 노동일반으로부터 떼어내 특수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노동력을 노동시장으로 유인하는 요소가 빈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노동일반을 성노동처럼 불인정하거나 노동자의 권리가 불필요하다고 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든 노동이 빈곤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선택되어지는데 유독 성노동만이 특수화되어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뭘까? 역시 그러한 인식의 전제를 이루는 것은 ‘성을 사고 파는 것은 죄악’이라고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물론 성노동자들의 도덕적 규범은 사회당과 다르다. 성노동자들의 자기 일에 대한 도덕적 규범은, 빈곤 때문에 성노동을 하고 있지만 성노동이 가난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며, 모든 노동에 착취가 존재하는 한 이 부분에서의 노동자 권리 향상 또한 필수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는 사회가 될 때 성노동 또한 인간 본연의 자유롭고 호혜적인 활동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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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성노동자 해방

성노동자 해방

깨철이


1.


매춘여성들의 '노동자' 주장은 욕망의 미시정치적 수준에서 확실히 횡단적이고 작동합니다.

매춘여성들의 성 노동자 선언으로부터 자극 받은 일군의 소집단들이 있습니다. 우선, 계급운동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사람들과 집단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 젠더 정치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여성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 섹슈얼리티와 성 욕망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세계화된 규모에서 진행되는 전쟁과 기아와 빈곤에 저항하는 힘을 바탕으로 재편성되는 인권의 지향을 가지고 접근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나는 이 각각의 소집단들의 주장과 특정 관점에 대해 약간씩 경계하면서, 차이를 무화 시키지도 않으면서 이 소집단들이 서로 섞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매춘여성들의 운동, 그들의 '노동자'선언은 분명 이 모든 각각의 경계들을 횡단하고 있으니까요. 이 운동은 횡단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횡단의 필요성은 성 노동자들에게 매우 직접적입니다. 그들의 주체성은 하나가 아니며, 자기 환경에 근거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유용한 무기를 재빨리 선택해서 싸우고, 필요에 따라 다른 주체성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의 선언에 자극 받은 소집단들 또한 자신들의 경계를 허물고, 의식적으로 함께 횡단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여성과 여성주의 운동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카스트화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노동운동은 완전히 카스트화되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노동현실문제의 개입과 대응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처럼 여성주의도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스트화는 점점 더 현실의 살아있는 주체성들을 고립적으로 만들고, 점점 더 권력적으로 변모하고, 점점 카테고리 안에 들지 않는 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주변화하거나 식민지화합니다. 모든 운동은 카스트화됨으로써 끔찍하게 변모했습니다.

이것을 현실을 직시하는 것, 그리고 횡단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은 아마도 카스트화된 곳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횡단화는 주변으로부터 소수자들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성'으로부터 출발하는 페미니즘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매춘여성으로부터 출발하는 페미니즘은 없습니다! 가족구도를 중심으로 엄마와 자매들의 역할 분석으로부터 사회분석으로 확장하는 이론은 많지만, 일찍이 가족구도로부터 떨어져 나온 외부의 매춘여성들로부터 페미니즘을 정초하는 이론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맑스주의 정통적 담론 안에서 실업자와 가사노동자인 여성, 그리고 이주노동으로부터 출발하는 이론이 드문 것과 같습니다. 산업노동자 중심의 노동이론에서 그들 실업자, 이주노동자, 빈곤층들은(매춘여성까지 포괄하여) 거의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산업예비군'(때로는 노동자계급에 적대적이기까지 한)으로 위치 지워집니다.

자, 이런 식의 주변화와 식민화는 여성운동에서도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횡단성은 주변화와 식민화를 피하면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소수자 운동의 특징이 됩니다.

성 노동자에 대해 말한다면, 그들에게는 노동의 현실이 있으며 젠더적 현실이 있으며 섹슈얼리티적 현실이 다 있습니다. 운동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은 현실적 설득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굳이 한 방향이어야 한다면 성 노동자 해방일 것입니다.

성 노동자 해방이란 그 일이 모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자유로운 일이 되고, 자신을 위한 일이자 동시에 사회 공통선을 위한 일이 되고, 어떤 억압도 착취도 없는 인간적인 노동이 되거나 즐거운 활동이 되는 그런 상태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화되자면 주체성의 측면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강제된 성별화, 강제된 섹슈얼리티에서 벗어나는 주체성, 그리고 사회의 물질적 생산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주체성, 사회권력체와 단절하려는 주체성 등등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성 노동자 '선언'은 시작이며, 첫 발걸음을 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노동자 해방운동은 많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보자면 당장의 현실에서 세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 성노동자는 누구이고, 어떤 권리를 인정받아야 하는가?
- 구매자는 누구이고, 그들은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가?
- 소위 '포주'란 누구이고, 그들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이러한 기초적인 쟁점에서조차 우리 사회의 성을 교환하는 방식의 변화를 요구하는 욕망과 마주칩니다.


2.


우리 사회에서 성을 교환하는 방식은 결혼과 결혼관계를 연습하고 모방하는 자유연애적 커플 딱 두 가지 형태입니다. 결혼이든 커플이든 성의 교환 방식은 그 사회의 지배적 경제적 교환과 분배방식의 필요에 따라 종속되어 왔습니다. 매춘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성의 교환 방식이 성 욕망의 필요에 따라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물질적 생산의 형식에, 그 사회 경제시스템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형식에 종속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욕망은 시스템 바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부족경제의 부족간 여성 교환, 봉건적 씨족경제의 씨족간 여성 교환, 자본제적 핵가족 경제에서의 자유연애적 교환 등등은 모두 가족조직을 구성하는 핵심이었고, 이들 가족조직은 사회의 물질적 경제 시스템을 지탱하는 노동조직이자, 노동력 재생산 조직, 그리고 분배를 할당 받고 소비하는 조직의 기초였습니다.

가족조직은 어느 시대나 성 욕망과 쾌락을 위한 조직이 아니었고 부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 측면에서 여성들의 성욕은 수동적으로 남성들에 의해 공짜로 갈취 당하는 것(부수적인 서비스)이었습니다. 성 욕망은 부차적으로 취급 당하고 억제되거나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사회체 바깥에서 활로를 찾게 됩니다.

매춘은 각 체제의 한계점이자 각 체제가 포괄할 수 없는 구멍, 여백, 잔여 등으로 늘 주변화되어 존재했습니다. 반복하자면 리비도 경제학(성 욕망의 생산과 교환)과 성별경제학(성별의 생산과 교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경제학은 늘 체제를 지탱하는 물질적 부의 경제학의 필요에 따라 사회적으로 부과, 강제되어 왔으며 결코 강제될 수 없는 한계지점은 사회체 바깥에서 불륜이나 매춘현상과 같은 '금기/범죄화'된 현상들로 가시화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진행되는 매춘의 일반화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매춘의 일반화는 역설적으로 리비도 경제학이 더 이상 여성 교환으로 가능하지 않게 된 상황, 리비도 경제학이 마비된 상황을 말해줍니다. 가족해체적 경향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 매춘의 일반화는 성별 경제학이 물질적 부의 경제학의 종속과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된 형태로 전개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물질적 부의 생산, 교환, 분배를 위해서 남성은 바깥 일을, 여성은 가족유지를 위해 필요한 가사노동을 하는 성별분업시스템이 유지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리비도 경제학의 마비와 분리화, 성별 경제학의 분리화는 사회의 물질적 부의 경제학 시스템의 무능을 말해주는 것이며, 체제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는 리비도 경제학과 성별 경제학이 자본주의 시스템과의 재조정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 사회가 관용을 보여주든 보여주지 않든 간에 매춘의 일반화 현상은 확대될 것이며, 한편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현상과 모든 부분에서 점차적으로 성별화가 사라지는 현상 또한 확대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물질적 부의 경제학이 지닌 무능을 사회권력 체제의 강화를 통해 리비도 경제학과 성별 경제학을 원격 조정함으로써 만회하려는 방향으로 선회합니다. 여기서 모든 중심적 운동의 권력체 속으로의 편입과 카스트화가 진행되는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를 거부하거나 혹은 포섭되지 않는 사회집단은 완전히 격리됩니다. '테러리스트화'나 '비정상화'나 '쓰레기나 버러지'로 취급되며 '사회 악'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숨어서 이러저러한 은밀한 방식으로 일하는 온순한 매춘여성은 아마도 '눈 감아주는' 방식으로 허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매춘여성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려고 나서려고 한다면 격리될 것입니다. '성특법'이 갖는 효과는 이 둘을 갈라내는 것이라 해도 좋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불순한 것을 걸러내고 순화시키고 사회권력체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성특법'이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고, 선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주노동자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법체류자는 그가 불체자로 숨어서 이러저러한 은밀한 상태에서 노동을 하는 것은 역시 '눈 감아주는' 방식으로 허용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격리되고 추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체자들을 압박하고 순화시키기 위한 기습적 단속이 횡행합니다.

저는 운동집단들이 대부분 카스트화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권력체에 의한 이 분리를 조심스럽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온갖 분리와 차별화와 카테고리화에 갇혀 무능을 조장하기까지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운동의 다양성과 무관합니다. 그것은 각자가 대면하고 있는 장벽 속에 갇히는 지옥화, 폐쇄적인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운동집단에는 희망이 없으며, 결국 대중들의 주체성과 긴박한 요구로 되돌아가 운동집단, 운동방식, 운동형식 모든 것을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장벽을 넘어서 실험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또한 주체성의 변화를 요구 받는 당면 이유입니다.


3.


물질적 부의 생산 시스템으로부터의 리비도 경제학의 이탈현상, 성별 경제학의 이탈현상 앞에서 사회권력의 재조정은 신체이미지와 감성과 지성과 같은 인격적 이미지를 포함한 기호적 노동을 통해 포섭합니다.

여성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는 이 기호적 노동(확장된 매춘도 분명 이 노동에 속하며, 이 노동에 의한 영향을 받습니다)을 통해 착취하고 있습니다. 가족조직이 아니라, 사회체 위에서 전통적인 육체적 노동과 기호적 노동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그것의 효과는 전통적 육체노동의 가치 하락과 기호적 노동의 가치 하락입니다.

사회체 위에는 여전히 성별화가 존재하며, 또한 더 이상 금기가 되지 못하는 비공식경제(그러므로 비공식 착취)가 증식합니다. 성 욕망은 공식적으로는 신체이미지를 담은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를 통해 간접적으로 충족(그러므로 또한 억제이기도 한)되며, 비공식적으로는 비공식경제의 영역에서 탈출구를 찾습니다.

여성들은 더 이상 수동적일 수 없기 때문에(그들의 지닌 노동이 수동성이 아니라, 사회체에 의해 능동적일 것을 요구받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의 능동적 주체가 됩니다. 따라서 여성들 또한 자신의 성욕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상품을 소비하고, 비공식경제의 영역에서 탈출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성 노동은 이제 단순히 개개의 사적인 이익을 만족시켜주는 그런 노동이 아니라, 완벽하게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노동이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된 상황에서 성 노동을 범죄시하고, 불법화시키는 것은 성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착취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임과 동시에 사회체 위에 새로운 차별화, 구획화를 시도함으로써 사람들을 더욱 쪼개고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허용과 관용의('눈 감는 방식'의) 분위기가 있고, 철저하게 격리하고 추방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격리되고 추방당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따라서 성노동자 운동에서 무엇보다 긴급한 것은 '성노동자들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자기 삶을 이야기하고 자기 삶을 가지고 사람들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노동자들의 말하기와 글쓰기는 매우 중요한 투쟁무기입니다. 전통적으로 그것은 얼굴을 드러내기 어려웠던 소수자들의 요구와 욕망을 전달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었습니다.

공식석상에서, 지면에서, 인터넷에서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투쟁, 요구들을 말하기 시작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론적 담론들이 대변할 수 있는 것보다 운동에 더 큰 영향과 대중적 지지를 모을 수 있습니다. 그를 위해 의식적으로 성노동자들과 대중들이 만나는 장을 넓혀 나가는데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사회와 만나느냐, 아니면 철저하게 격리되느냐의 싸움입니다.

저는 성 노동자들이 주체가 된 다음의 행동들을 활성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1.성노동자들의 직접적 말하기와 쓰기.
2. 인터뷰를 대대적으로 조직하기, 인터뷰어가 되기
3.잡지 만들기, 홈페이지 만들기, 블로그 만들기
4.성교육 캠페인, 성 치료사 되기, 상담가 되기
5.성노동자와 다른 대중들이 함께 섞여서 할 수 있는 실험적 조직과 행동을 만들기
6.이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배포하고 유통시키기

이를 지원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가들이 결합해야 하며, 자원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위의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조직을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적'을 판별하고 '적'과의 전투에서 조급증을 갖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성특법'은 물론 분쇄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회체가 변화하지 않으면 성노동자 해방은 없습니다. 적과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은 성노동자들이 격리화되고 게토화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저는 적 따위는 잊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을 파괴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특법'이 없다고, '여성가족부'가 사라진다고 해서 성노동자들의 자유가 보장되고 해방될까요? 아마도 다른 규제가 만들어지고 다른 권력이 개입할 것입니다.

나는 적과의 투쟁에 대한 지향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정립적 규합운동보다, 자기 정당성에 근거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사회와의 접촉 면을 끊임없이 만들고 재창조하는 생산적 운동을 원합니다. '이 일과 나는 정당하다, 그러므로 사회가 틀린 것이다'여야 합니다. 적을 파괴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이어야 합니다. 특정한 적을 비판하는 말 보다, 사회에 호소해야 합니다!

성노동을 둘러싼 여타의 상황을 고려해보자면, '적'은 성노동자 자신들의 가족일 수도 있으며 외부 사람들 그 전부를 의미하기도 하고, 사회 관념과 제도형식들 기타 등등 그 모든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은 항상 여기저기서 불쑥 새롭게 등장합니다.

물론 전선을 긋고, 이러저러한 현실투쟁적 필요에 의해 적을 명확히 하는 것은 필요하며 그것에 대해 우리는 지지를 보내고 필요하다면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 그것이 권력화된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해방이나 혁명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권력은 필요합니다. 단지 그러한 운동의 한계, 그러한 권력이 가질 수 있는 한계를 냉정하게 인식해야 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운동은 대중과 무관하며,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이나 정부나 여성가족부가 하는 행위와 하등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좋게 말해 기존의 것과 조금 다른 여성주의의 세력화, 무슨 무슨 주의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로 끝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운동에서 가장 큰 도전과 모험은 성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이 성노동자가 되어보고, 업주(포주/성산업인)가 되어보고, 손님이 되어보는 주체성의 실험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전이에서 오는 각각의 기쁨과 슬픔을,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하고, 그 경험을 전달하고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관계성들을 구축하려 할 때 이 운동은 패배할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입니다.


(위 기고문은 지난 21일 한국양성평등연대 간담회에서 발표한 깨철이님의 발제문 전문입니다. 성노동자 운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필자의 폭넓은 고민에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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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res not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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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권력을 잡기 위한 운동, 권력을 향한 운동은 '도덕'을 필요로 하지만

해방을 향한 운동은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덕'에 꿈쩍도 못하는 자, 권력을 추구하는 자이며 그에 합당한 권위를

사람들에게 요청하는 자이다.

 

운동은 언제부터인가 '도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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