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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15
    [펌] 민주노동당은 진보적인 성거래 정책 제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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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6/07/14
    내게 재봉틀에 대해 말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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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6/07/07
    진보진영의 성매매근절주의 입장에 대한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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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민주노동당은 진보적인 성거래 정책 제시하라

[성명]민주노동당은 ‘여성위’ 배제하고 진보적인 성거래 정책 제시하라
- 비범죄주의, 합법주의 당내 여론 무시한 민노당 ‘여성위’는 각성하라

민성노련


얼마 전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시기 성매매방지법 제정 과정에서 민노당 여성위가 주최한 당내 토론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약 절반정도 되는 참석자가 매춘여성의 인권을 위해서 합법화가 가장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인천 여성위원회에서는 2/3이상의 여성당원들이 매춘여성의 인권을 위해서 매매춘 합법화를 지지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민노당 내에서 성매매 특별법과 중산층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공공연하게 밝힌 바 있는 당원 ‘최병천’의 글에서 확인되었다. 그는 이 토론회에서 ‘최현숙 여성위원장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최현숙 여성위원장의 견해에 동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면서 성매매방지법을 반대하는 현장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전했다.


- 민노당원 절대 다수 성매매방지법 반대에도 지도부 독단으로 강행

“즉, 당내 여성당원들중에서도 매춘여성을 처벌하는 현재의 [성매매방지법](안)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현숙 여성위원장은 독단을 부리며 계속해서 매춘여성의 처벌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성매매방지법]의 제정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9월 22일에도 민노당 여성위는 사회양극화의 산물인 ‘자발적 성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짓밟는데 혈안이 돼있는 여성권력계의 주장을 그대로 복사한 듯한 성명을 민노당 명의로 발표한 바 있다. ‘성매매방지법 시행 1년을 맞이하여 강력한 법집행과 피해여성에 대한 적극적 지원대책을 촉구한다’ 는 제하의 문건이었다.

이에 민성노련은 9월 26일자 성명 ‘여성권력계 2중대인 민주노동당 여성위원회를 강력 규탄한다’를 통해 ‘원인과 결과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혼란의 늪에 빠져있는 여성위에게 동정심을 보낸다. 여성위는 비범죄주의와 합법주의에 대한 공부가 있어야 할 것’이라며 시대에 뒤떨어진 민노당의 무능과 위선을 강력하게 비판 대응했다.

그때도 우리는 믿기지 않는 정보를 접했었다. ‘여성위’가 민노당 이름으로 물타기를 한 것이며, 성명을 내는 과정 또한 여성위 내에서 비민주적인 작태가 연출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마 노동자와 서민의 정당이라는 민노당내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있겠는가 하는 회의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 민노당 여성위는 당원 견해 수렴 안되는 지도부 중심의 하향식 구조

민성노련은 이제 민노당원 최병천의 증언을 접하면서 ‘여성위’ 상층부가 민노당내 중산층 여성운동의 거점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또 ‘여성위’는 당원들의 견해가 민주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 상향식 구조가 아닌 몇몇 지도부 중심의 하향식 구조였다는 점, 그리고 타성에 젖은 ‘여성위’가 성매매방지법 추진이 자신들의 독점적 이슈인양 ‘민노당’ 이름으로 주류 여성계의 이해를 확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성노련은 민노당에게 권한다. 더 이상 논의구조가 민주적이지 않은 ‘여성위’의 논리에 끌려 다니지 말라. 민노당은 ‘여성위’가 성담론과 관련하여 다수 국민들이 원하는 진보적인 대안 정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여성’을 떠나 ‘인간’을 논한다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정책위원회’에서 다뤄주길 바란다.

그리고 ‘정책위’는 이미 ‘여성위’ 토론회에서 나온 주장들이 그러했듯이 비범죄주의를 채택한 다수 유럽 등 외국의 사례와 합법주의를 채택한 독일의 bundnis90(동맹90)과 녹색당 등이 추진한 진보적인 정당들의 성거래 입법사례를 충분히 참조해 한국 실정에 맞는 정책을 연구해주길 바란다.


- 민노당은 황우석 사태를 예고한 그 용기로 성담론 문제 풀어라

민성노련은 최근 사이언스 논문조작과 연구원 난자기증 및 매매 등으로 한국과 세계 과학계를 흔들어놓은 황우석 교수의 불행한 사태를 MBC PD수첩 방영 이전부터 사전에 감지하고 계속 문제를 제기해온 민노당에 갈채를 보낸다. 이는 민노당이 ‘정치적 부담’을 각오하고 ‘국익’이란 미명하에 몰려다니는 선정적인 언론들과 무지한 누리꾼들에 맞선 개가였다.

성매매 특별법은 빈곤한 자발적 성노동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며 또한 남성들을 예비 성범죄자로 규정한 세계적인 반인권 악법이다. 그리고 최대 2백만명에 이른다는 전업형 및 겸업형 성적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들과 그 가족들의 문제로, 이를 도외시한 채 민노당이 서민의 정당이라고 자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민노당이 황우석 사태에서 보여준 바 있는 ‘정치적 부담’을 각오한 그 용기로 오늘 여성권력자들의 전유물인 ‘성매매 특별법’을 분명하게 반대하고, 세계가 인정하는 수준의 진보적인 성거래 정책마련에 최선을 다해주길 기대한다. 아울러 민노당에 보수적인 성담론을 강요하는 ‘여성위’의 대오각성을 촉구한다. (끝)


2006. 1. 3

민주성노동자연대 (민성노련)
http://cafe.daum.net/gksdu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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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재봉틀에 대해 말하지 마라.

 
 
"내게 재봉틀에 대해 말하지 마라. 내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말하라."
 
아시아 성노동자들이 재활 프로그램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를 원함을 표현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성노동자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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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빈곤, 성적 소외, 성복지

 

"그녀가 남편과 다른 여자와의 관계를 흩트려 놓고 그를 차지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첫째로 남편은 아내에 의해 방해받고 싶지 않을 뿐더러, 더 이상 아내에 대해 관능적인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고백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녀 역시 남편을 더 이상 열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남자 친구와의 간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태는 암초를 지니고 있다. 즉 그녀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하며, 남편은 그 간통에 대해 알게 되면 곧바로 이혼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그녀에게 자세히 들려주며, 결단을 내릴 시간을 주었다. 몇 주 뒤에, 그녀는 결국 남자 친구와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였고, 남편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애를 썼으며, 최근에 나타났던 신경증 증상이 잠시 후에 사라졌다고 들었다. 자신의 도덕적 고려를 무시하라는 나의 성공적인 권고를 통해 그녀는 바로 이러한 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법에 따르면, 나는 간통죄를 저지르도록 만들었다." (빌헬름 라이히)

 

 

결혼을 한 이성애 커플과 부부는 사랑을 영속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성욕을 배려하지 않으며, 상대가 성욕이 없는 존재인 것처럼 여긴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는 커플관계에서도 사랑이 영속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혼인계약을 통해 서로의 신체적 자유를 속박하며, 성적자유를 구속한다. 그리고 커플연애를 통해 그 계약을 열심히 연습한다.

 

인간의 성은 이성애/동성애, 남성성욕/여성성욕 등등으로 결코 구획되지 않으며 잠재적인 모든 성이지만,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신체와 욕망에 대한 각종 규제들을 도입한다. 우리 사회의 성은 빈곤한 상태에 이르렀고 마비상태에 이르렀지 '과잉'되거나 '왜곡'된 것이 아니다. 왜곡되었다면 이성애와 동성애를 가르고 남성성욕과 여성성욕을 가르면서 차별을 두는 사회의 정상성 규범 자체가 왜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의 담론은 항상 성욕이 과잉되었다고 대중들을 위협한다. 결혼관계와 이성애적 관계를 떠난 모든 성욕은 과잉이라는 관념을 유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빈곤에 시달린다. 이상하다. 곳곳에 성의 상품화가 판치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빈곤에 허덕인다. 결국 자본은 욕망을 억압하고 성의 필요를 억제시키면서 성이 상품화될 조건을 만든다. 성빈곤이 가속화될 수록 성의 상품화는 촉진되며, 성의 상품화가 촉진될수록 성빈곤은 확대된다. 성은 오로지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의무로 전락하고 번식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상대를 소유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자유연애라는 개인의 영역속에서 명멸해간다.

 

노동자의 성적소외, 도시빈민의 성적소외, 농민의 성적소외, 남성의 성적소외, 여성의 성적소외, 동성애자의 성적소외, 장애인의 성적소외, 노인의 성적소외, 청년기에 있는 젊은이들의 성적소외 등등 성적소외가 넘쳐나지만 이 사회는 성빈곤에 무관심하다. 다른 물질적 재화의 부족과 빈곤에 대해 공공의 접근방식을 취하려는 노력과 달리 성의 부족과 빈곤에 대해서는 공공의 접근방식을 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은 언제나 부르주아적 개인주의 영역에만 남겨진다. 따라서 성에 대한 접근은 계급화, 성별화, 차별화된다.

 

성인남성은 다른 성적 소외자들에 비해 성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허용되지만, 그 대부분은 구매행위를 통해서 성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에게 죄의식을 갖게한다. 여성의 성욕은 체계적으로 인정되지 않거나 배제되며 오로지 상품으로 대상화될 뿐이다. 여성의 성욕은 스스로를 대상화함으로써 자기성욕으로부터조차 소외된다. 여성들은 패션, 화장품 산업,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 감성적이고 신체적인 이미지를 소비함을 통해 성욕의 충족을 대체한다. 그렇게할수록 점점 더 여성 신체와 성욕은 사물화를 향하게 된다. 욕망은 어떤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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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노동자 선언

성노동자 선언

 

제1차 인도 성노동자 전국회의

14-16 November 1997, Calcutta


새로운 유령이 사회를 떠돌고 있다. 수세기동안 지하로 내몰렸던 이 유령 생물체가 이제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 이것이 그토록 많은 공포를 불러일으킨 이유이다. 지난 몇 해동안 성노동자 운동은 우리에게 사회구조, 삶의 섹슈엘리티, 도덕적 옳고 그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맞서게 하였다. 우리는 우리 운동의 본질적 요소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서고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노동자 운동은 무엇에 대한 운동인가?

 

우리는 1992년 이래 소나가치에서 진행된 HIV/STD 통제 프로젝트에서 보건노동자로, 동료 교육자로 활동하는 것을 통해 집단화된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 성노동자들 사이에 상호지원망을 건설하고 자기 성찰을 촉진하고 집단화된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공간을 최초로 제공했다. 소나가치 프로젝트의 초창기부터 이 프로젝트를 출발시킨 사람들의 열정적인 지원을 업어 우리는 HIV와 성병 전염을 통제한다는 기본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결정적인 요소라는 것을 인식했다. 성적행위라는 관점에서만 우리를 바라보지 않고, 감정적인 요소와 물질적 수요를 가진 완전한 사람, 우리의 삶과 건강의 질을 결정하는 구체적인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맥락 내에서 살아가는 총체적인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예를 들자면, 안전하지 못한 섹스의 위험성에 대해 성노동자들을 계몽하고 의사소통의 기술이나 거래기술을 향상시키는 것만으로는 성노동자들의 성적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콘돔사용에 대한 홍보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곧 깨달았다. 그녀 자신을 가치있게 생각하지 않는 성노동자가 어떻게 자신의 건강과 삶을 보호할 행동을 감행할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성노동자들이 모든 성행위에 콘돔을 사용할 것을 손님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개별적인 성노동자들은 다른 성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손님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성병을 방지하기 위해 콘돔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도록 압력을 받지 않겠는가? 어떤 성노동자들은 착취적인 마담과 포주에게 너무 강하게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손님과 안전한 섹스를 협상할 지위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충분한 손님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대부분의 소득을 방세를 내고 마담 혹은 지방권력브로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성노동자가 굶주리고 있다면, 그녀는 콘돔 사용을 설득하기 힘든 손님을 거부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손님은 어떠한가? 남자는 여자, 특히 교육받지 못하고 '타락한fallen' 여자의 말에 순순히 따르고, 무엇인가를 배울 것인가? 남자가 매춘여서에게 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고 책임지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본질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는가? 이런 경우에 책임과 안전에 대한 개념은 매춘여성에 대한 그의 관계와 완전히 모순되지 않는가? '완전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그에게 콘돔은 불필요한 방해물을 대표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경우에 이 남자 손님은 그 자신이 가난한 난민이다. 그는 그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의 건강을 보호할 위치에 놓여 있는가?

 

그렇다면 손님과 기꺼이 콘돔을 사용하려는 성노동자들은 왜 그녀의 애인 혹은 남편과의 섹스에서는 안전한 섹스를 하려 하지 않는가? 상업적 거래와 사랑, 주의와 신뢰, 안전과 친밀함 사이의 미세한 균형은 그러한 행위들을 위험에 빠뜨리는가? 사랑과 가족 모성애의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모든 성적 행위에 어떻게 영향을 행사하는가?

 

이렇듯 별로 복잡하지 않은 듯 보였던 질문-성노동자가 안전한 섹스를 주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 이슈가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성노동자들의 섹슈엘리티와 삶, 그리고 운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구조, 우리의 가치를 형성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본질적으로 얽혀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많은 직업들과 마찬가지로 성노동은 하나의 직업이며, 중요한 사회적 수요를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직업일 것이다. 그러나 '매춘여성'이라는 용어는 성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집단을 가리키는 데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공중보건과 성도덕률, 사회적 안정, 시민사회의 질서에 위협을 가하는 여성들을 균질화시켜 기술하는 범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담론적 테두리 안에서 물질적으로건 상징적으로건 청소하고 살균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가 도덕을 강요하려는 지배집단의 충동의 타겟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치적 개발적 아젠다 안에서 우리가 고려될 때면, 우리는 구조하고 재활하고 개선하고 훈육하고 통제하고 단속하는 것을 목표로하는 담론적 활동과 프로젝트 안에 뒤섞여 들어간다. 자선 단체들은 우리를 구조해 '안전한' 집에 밀어넣고, 개발기구들은 빈약한 소득을 발생시키는 활동을 통해 우리를 '재활'하려하고, 경찰은 '부도덕한' 인신매매를 통제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들의 구역을 정기적으로 습격하곤 한다. 우리가 덜 부정적으로, 혹은 공감을 표시하는 지배적인 담론 안에서 묘사되는 순간에도, 우리는 낙인과 사회적 배제로부터 면제되지 않는다. 힘이 없는 사람으로, 아무런 자원을 갖지 못한 학대받는 희생자로, 우리는 동정의 대상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대중 문학과 영화에서 우리가 어렵게 번 소득을 우리의 손님에게 기꺼이 그리고 끊임없이 포기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부양하고 돌보는 자기 희생적 캐릭터로 묘사된다. 여기에서는 우리의 '죄많은' 길이 묘사되고, 마침내는 영웅이 대표하는 사회의 혹은 주인공의 풍요를 우리의 삶이 보장해주는 것으로 나온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정당한 시민 혹은 노동자로서의 참여가 부정되고 사회와 역사의 주변으로 밀려난다.

 

성노동자에게 배당된 억압의 종류는 정규 노동자들에게는 결코 부과되지 않는다.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노동은 진정한 노동이 아니라고 주장된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매춘이 성도덕률과 사회질서의 이면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성산업 노동자들의 요구와 그들이 필요한 것에 대한 토론에는 다른 직업들과는 달리 정당성이 부여되지 않고 폭넓게 다루어지지도 않는다.

 

우리의 복지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런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재활시킨다거나 매춘을 완전히 철폐한다는 것 이외의 어떤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매춘여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지워주는 것을 사회가 결코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성노동자를 '재활rehabilitate'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재활이 가능한가? 그것은 진정으로 바람직한가?

 

실업의 비율이 이렇게 높은 나라에서 그들 자신과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소득을 벌어들이는 직업에 종사하는 수백만명의 남성과 여성들을 강제로 밀어낼 이유는 무엇인가? 비슷하게 착취적인 직업 분야에서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일을 자신들의 직업구조 내부에서 할 수 있다면, 성노동자들은 성산업에 남아 그들의 삶과 일에 대해 훨씬 좋은 대우를 요구할 수 없는 이유란 무엇인가?

 

성에 관한 도덕률의 역사란 무엇인가?

인간의 다른 성벽과 욕망과 마찬가지로, 섹슈엘리티와 성적 요구는 인간의 조건에 필요하고 근본적인 것이다. 섹슈엘리티와 성적 행위에 대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생각은 사회적으로 조건지워져 있고 역사적인 맥락에 특수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에서 섹슈엘리티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가부장주의와 염세주의적인 도덕관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국가와 사회구조는 우리의 섹슈엘리티에 대해 편협하고 제한된 형태로만 승인한다. 쾌락, 행복, 안락함, 친밀할은 섹슈엘리티를 통해 그 모습을 표출한다. 한편으로는 문학과 예술에서 이것에 관한 내러티브를 엮어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회 규범과 규제시스템은 가족제도 내의 결혼관계라는 엄격한 경계안에서 남자와 여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성적 표현만을 허용한다.

 

섹슈엘리티를 우리는 왜 그러한 좁은 경계안으로 감금하고, 우리의 많은 표현방식과 표출형태와 경험들을 무시해야 하는가?

 

사적 재산에 대한 소유권과 가부장주의의 지속은 여성의 출산에 대한 통제권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소유권은 적자계승을 통해 유지되고, 남성과 여성들 사이의 성행위만이 출산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고, 자본주의적인 가부장제는 그러한 커플에게만 존재를 허용한다. 섹스는 기본적으로 그리고 거의 배타적으로 출산을 위한 도구로만 간주되고, 그것에 내재하는 쾌락과 욕망의 모든 측면을 부정한다. 이성애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동성애는 정당성이 부정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고 자연적이지도 않고 일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하여 섹스와 섹슈엘리티는 사회적으로 출산목적 이외에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성애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가? 우리의 직업, 혹은 우리의 사회적 상황이 정당한 부모로서의 자격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모성을 주장하고 아이를 임신하는 것이 우리 여성에게 무가치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한 아이를 임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에게 유일하고 가장 기본적인 목표로 모성을 부여하는 것을 통해 가부장주의는 여성의 재생산기능을 통제하고 사회적 성적 자율성을 제한하려 한다. 많은 우리 성노동자들이 어머니이다-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이다. 사회적 기준으로는 이 아이들이 법적으로 용인되지 않으며 - 사생아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들은 우리의 아이이며, 단순히 어떤 남자의 재산을 유지하고 가계를 잇게 해줄 도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면제되어 있다. 우리들에게는 가족과 가정, 공동생활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이 고통을 야기하는 영속적인 원천이다.

 

여성과 남성은 섹슈엘리티에 대해 동등하게 요구하는가?

성과 섹슈엘리티에 대한 사회규범은 여성과 남성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출산 목적이 아닌 성적 욕구가 승인될 때는 그것은 오직 남자들에게 뿐이다. 공동체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곳에서는 근대성의 이름으로 습속이 조금씩 변했지만,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고 다수의 성적 파트너를 추구할 권리를 향유했던 사람은 거의 남자였다. 여성들은 언제나 한 남자에게 충실할 것이 기대되었다. 고대경전에서 금지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사회관습은 여성의 섹슈엘리티을 표현하는 것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한 소녀가 사춘기에 달하면 그녀의 행위는 남자들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엄격하게 통제되고 감시됐다. '정숙함'과 '전통'의 이름으로 여자 선생님은 대학에 다니는 동안 의복을 그녀 자신이 선택해서 입는 것이 금지되었다. 아들을 위해 신부를 선택하는 동안 가족의 남자들이 신부후보들의 신체적 특성을 면밀하게 검사했다. 여성에 대한 포르노그래픽한 표현은 수백만의 남성들의 관음증적인 쾌락을 충족시켰다. 면도크림으로부터 목욕탕물품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묘사하는 광고를 통해 남자를 유혹해서 물건을 판매했다.

 

섹슈엘리티에 대한 이런 정치 경제적 구도하에서 여성 자신의 섹슈엘리티와 욕망을 표현할 공간은 거의 없다. 여성들은 남자들로부터 자신의 몸을 숨겨야하는 동시에 남자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옷을 벗어야 한다. 상업적 미디어에서 소비자로 표현되는 것을 통해 약간의 주체성이 부여되었을 때에조차, 이 역할은 상품을 살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정의되고,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주의적인 구속에 의해 규범이 부과된다.

 

우리의 운동은 반남성적인가?

 

우리의 운동은 절대적으로 가부장주의에 반대하지만 개별적인 모든 남성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마담과 랜드레이디를 제외한다면 성거래로부터 이윤을 취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 남성이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여성과 매춘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매우 강한 가부장적 가치관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을 약하고 의존적이고 부도덕하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지도와 훈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 모두 가부장적 젠더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받고 있기 때문에 성거래 통제와 성노동자 억압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승인한다. 이러한 도덕적 담론의 힘은 매우 막강해서 우리 매춘여성마저 우리 자신을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손님의 자격으로 우리에게 오는 남자들도 이런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다. 때로는 죄의식이 그들의 스릴감을 증대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변태행위로 이끌기도 하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기혐오감을 느낀다. 이런 감정으로 인해 안전하고 정직한 성관계가 행해지지 않는다.

 

'남성'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카테고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남성들은 계급과 카스트 인종, 그리고 여타 사회관계들에 의해 차별화된다. 많은 남성들에게, 지배적인 성규범에 집착하는 것은 비실용적일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다. 첫 성관계를 찾아나선 젊은 남자들, '다른' 여성과의 사귐을 추구하는 결혼한 남자들, 아내와 떨어져 사는 이주민 노동자들이 홍등가에서 온정과 우애를 열망하는 것은 모두 사악하다거나 변태적이라고 비난당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욕망과 친밀감, 욕구를 추구하는 인간의 전체 역사를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한 무시는 성적 쾌락에 대한 수요가 충족되지 못하는 상황을 창출하고, 이런 상황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부담이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여성에게 훨씬 더 무거운 짐이 된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동등하고 건강한 관계가 형성될 기반이 될 수있는 섹슈엘리티가 훨씬 더 심각한 불평등과 강고한 통제의 원천이 되버린다. 우리는 이것을 반대한다.

 

트럭 운전수들의 휴게실, 공장, 시장 주변에는 언제나 홍등가가 있었다. 동일한 체계의 생산관계 그리고 남자들을 촌락의 집을 떠나 타운과 도시로 떠나게 만드는 이윤 극대화의 논리의 압력을 받아서 여성들이 이런 남자들을 찾아 성노동한다.

 

개탄스러운 것은 이러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너무 깊게 뿌리박혀있고 집단으로서의 남성의 이익이 그것에 너무 강하게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문제가 주류의 사회정치 운동에서 거의 아무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착취에 대항해 그들 자신을 조직화했던 남성 노동자들은 성노동자들의 억압은 제쳐두더라도 젠더 억압이라는 이슈에 대해서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 급진주의적인 남성들 역시 여성들의 이익에 반해서 가족과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를 방어했다.

 

우리는 가족제도에 반대하는가?

사회의 일반적 인식에 따르면 우리 성노동자들 그리고 사실상 결혼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모든 여성들은 가족 제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우리에게 유혹되어 정도를 벗어난 남자들이 가족을 파괴한다고 말해진다. 종교에서부터 공적교육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가 우리에 대한 이런 공포를 되풀이하고 널리 퍼뜨린다. 여성들과 남성들 모두 이렇게 널리 퍼진 여성혐오주의의 희생자이다.

 

우리는 성노동자 운동이 가족제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도전하는 것은 가족 구조 내에서 권력과 자원의 불공평한 분배를 정당화하고 지지하는 '이상적' 가족이라는 지배적인 관념에 내재된 불공정과 억압이다. 우리의 운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정의롭고 공정한 가족구조이다.

 

다른 모든 사회제도와 마찬가지로 가족은 국가와 사회의 물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구조내에 놓여 있다. 이상적인 정상가족의 기반은 적법적인 상속인을 통한 상속이며, 다시말해 성적 충실성이다. 역사적으로 가족의 구조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체적으로 결합가족이 핵가족으로 대체되고 있다. 사실,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매우 많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많은 방식은 규범으로부터 이탈해있으며, 지배담론이 이상적인 것으로 승인해주지 않는 형태이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함께 있기를 원하고, 사회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은 행복하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들과 부부 사이에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가? 사랑이 없고 그 관계가 불평등과 억압에 기초한 가족들을 우리는 많이 알고 있지 않는가? 많은 합법적인 아내들이 음식과 집을 보상받는 댓가로 성노예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 않는가? 대부분의 경우에 여성들은 그러한 결혼과 가족에서 벗어날 자원과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때로는 남자들과 여자들 모두 사회적 압력때문에 공허한 관계의 덫에 빠져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바람직한가? 그것은 건강한가?


창녀와 마돈나 구분을 통한 분할 통치

 

억압적인 가족 이데올로기 내에서 부부 관계를 위협하는 주요 요소로 간주되는 것은 여성의 섹슈엘리티이다. 여성들은 아내로서 매춘여성과 경쟁한다. 여성들은 매춘여성과 대립되는 아내로서, 정숙한 여성과 부도덕한 여성을 대립되며 서로 동정받는다. 두 사람 모두 남자의 관심과 탐욕을 두고 싸우는 것으로 표현된다. 정숙한 아내에게서는 섹슈엘리티가 제거되며, 무성적인 모성과 가정적 성격만이 부여된다. 스펙트럼의 다른 한쪽 끝에는 가정적 성향과 '여성적' 감정에 전혀 구속받지 않는 섹스머신으로서의 '타락한' 여성이 위치한다. 여성의 선함은 섹슈엘리티를 통제하고 숨기는 능력과 바램에 근거해서 판정받는다. 옷을 잘 입는 이웃집 소녀는 선한 사람이 될 수가 없고, 모델과 여배우는 도덕적으로 부패했다고 여겨진다. 이 모든 경우에 기존의 섹슈엘리티 정치경제학을 재생산하고 남성의 이해를 보존하기 위해 여성의 섹슈엘리티는 가부장제에 의해 형성되고 통제된다. 남자는 가사를 돌보는 아내와 그의 아이들의 어머니, 야생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해줄 매춘여성에 대한 접근권을 갖고 있다. 여성의 성적 욕구는 중요하게 간주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 그 자율성이 부정되고 심지어는 그 존재자체가 제거된다.

 

아마도 남자들을 우리에게 끌고오는 고독과 소외와 욕망, 그리고 친밀함에 대한 열망을 매춘여성만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남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성적 욕구는 기계적인 성적 행동에 대한 것만이 아니며, '기본적인' 본능에 대한 화폐적 보상만도 아니다. 우리는 성적 행동에 국한되지 않고, 친밀함과 감촉 동료애와 연관된 광범위한 성적 쾌락을 제공한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그 중요성을 전혀 승인받지 못한 채 우리가 제공하고 있는 서비스이다. 매춘 체계가 아무리 호색한 적으로 보이고 부끄럽게 여겨진다 하다러다 최소한 남자들은 그들의 성적 욕구를 위해 우리에게 온다. 여성들은 그러한 수단에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여성의 섹슈엘리티의 자율성은 완전히 부인된다. 그들에게 열린 유일하게 가능한 한 가지 방안은 성산업에서 매춘여성이 되는 것이다.

 

여성들은 왜 매춘하게 되는가?

여성들은 그들에게 가능한 다른 생계수단을 선택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매춘을 선택한다. 우리의 이야기는 캘커타에서 인력거꾼으로 일하는 비하르 출신 노동자나 봄베이의 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캘커타 출신 노동자의 이야기와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우리들 중 일부는 이 산업에 팔려왔다. 우리를 구매한 마담에게 몇 년간 구속된 기간이 지난 후 우리는 성산업 내에서 일정한 독립성을 획득한다. 우리들 모두는 인생에서 많은 경험을 겪은 후에 - 때때로 마지못해, 매춘여성이 되는 것에 대한 함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 매춘 여성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 여성들 대부분은 언제 가족 내에서 혹은 가족 외부에서 선택할 기회를 가지는가? 우리는 자진해서 일상적인 가사 노동자가 되는가? 우리는 누구와 언제 결혼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하는가?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특히 가난한 여인들에게 그 선택은 거의 실질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왜 매춘에 머무르게 되는가? 이것은 매우 거친 직업이다. 일하는 동안 많은 손님들에게 성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요구하는 신체적 노동은 공장에서 일하거나 밭을 가는 것보다 덜 힘들지 않다. 이것은 절대 즐겁거나 환락적이지 않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임신, 고통스런 낙태, 성병위험과 같은 직업적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대부분의 홍등가지역에서 주거와 위생 상태는 지독히 나쁘고, 공간은 사람들로 가득 차있고, 대부분의 성노동자들은 매우 가난하고, 무엇보다 경찰이 추행하고, 지역폭력배들이 폭력을 행사한다. 게다가, 박탈과 곤궁이라는 물리적 조건에 덧붙여, 우리는 - '죄많은 sinful' 사람이라는 사회적 냉대, 사생아의 어머니가 되는 것, 아이들의 분노와 좌절감의 대상이 되는 것과 같은 낙인화와 주변화를 겪어야 한다.

 

우리는 '프리 섹스'를 주장하는가?

 

우리가 주장하고 바라는 것은 독립적이고 민주적이고 강압이 없고 상호간에 즐거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안전한 섹스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프리 섹스'는 무책임과 상대방의 삶에 대한 배려 부족을 함의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나 정치학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인지하고 수용할 의무와 필요를 함께 고려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섹슈엘리티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욕망을 존중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수행하면서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과 섹슈엘리티에 대한 건강하고 성숙한 태도와 실천을 탐색하고 형성하기를 원한다 - 이것은 또한 음란함과 천박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율적인 섹슈엘리티가 현실에 구현됐을 때 어떤 형태를 띠게 될런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 우리는 아직 완전한 그림을 구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일하는 사람이지, 점쟁이나 예언자가 아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계급 평등과 자본주의적 착취로부터의 자유를 설파했을 때, 흑인들이 백인들의 헤게모니에 항의했을 때,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종속을 거부했을 때, 그들 역시 그들이 갈구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정확하게 어떤 것일지 잘 알지 못했다. '이상적인' 미래에 대한 정확한 그림은 있을 수 없다 - 그것은 운동의 진전을 통해 등장하고 형성되는 것이다.

 

자율적인 섹슈엘리티에 대한 상상을 통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남자들과 여자들은 동등한 접근권을 가질 것이며, 동등하게 참여할 것이며, 'yes' 혹은 'no'라고 말할 권리를 가질 것이며, 심판이나 억압의 공간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이상적인 사회적 세계에 살지 않고 있다. 언제 이상적인 사회질서가 실현될지 혹은 과연 그렇게 될런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의 이상적이지 못한 세계에서 음식이나 건강에 대한 상업적 거래의 비도덕성이 용납된다면, 왜 돈을 받고 하는 섹스는 비윤리적이고 용납불가능한가? 물질적이고 감정적이고 지적이고 성적인 수요가 공정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해결되는 이상 사회에서는 아마 그러한 거래가 불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탐색하고, 그 근본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에 맞서고 도전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운동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 두르바르 마힐라 사마놔야 위원회의 회원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의 과정은 이제 막 시작했다. 우리의 운동은 두 가지 주요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투쟁 그 자체가 진행되는 과정 안에서 깨뜨려야할 젠더와 빈곤, 섹슈엘리티에 관한 전체 이슈에 대해 논쟁하고 정의하고, 재정의하는 일이다. 주변화된 집단은 아무리 작은 것을 얻어내려해도,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물질적 상징적 질서에 도전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 마힐라 사마놔야 위원회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다. 이 질서는 외부의 지배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이 질서가 성산업 내에서 우리의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재조정하는 방식을 역사적으로 조건짓는다. 이 장기적이고 복잡한 과정은 계속 될 것이다.

 

두번째, 지배이데올로기를 등에 업고 우리에게 행사되는 일상적인 억압에 대해 긴급히, 그리고 그침없이 저항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의 조건과 우리 삶의 물질적 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성노동자들이 성산업 그 자체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시작했다 — 오늘날 도시와 타운과 마을에 산재한 많은 홍등가에서, 우리 성노동자들은 커다란 매춘여성 공동체 사이에 연대와 집단적 힘을 창출하기 위해, 매춘여성으로서의 우리 자신에 대한 긍정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포럼을 조직화했다.

 

매춘 남성들 역시 우리와 함께 한다

두르바르 마힐라 사마놔야 위원회The Durbar Mahila Samanwaya Committee는 원래 소나가치와 그 인근의 홍등가에 사는 여성 성노동자들에 의해 건설됐고, 매춘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활동하기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후에 남성 성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다가왔고, 그들 자신의 주도하에 우리의 활동에 가담했다. 이 남성 성노동자들은 기본적으로 동성애 남성들에게 성서비스를 제공한다. 우리 사회는 동성애 혐오주의가 만연해있고, 상호동의한 성인 남성들 사이에서마저 삽입섹스를 이유로 법률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남성 성노동자들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지위는 훨씬 더 취약하다. 그래서 우리는 두 팔을 벌려 그들을 우리의 동지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참여가 성노동자 운동을 더욱 강고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노동자들을 대표할 수 있게 한다고 굳게 믿는다.

 

성노동자들의 운동은 진행되고 있다 - 그것은 진행되어야 한다. 섹슈엘리티에 대해 제기한 문제들은 우리 성노동자들에게만 적합한 것이 아니고 사회 전체와 그들 자신 내부에서 경험하는 예속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모든 남성과 여성들에게 적합한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이 운동은 평등하고, 정의롭고, 형평성이 유지되고, 억업으로부터 자유롭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게 행복한 사회적 세계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계급이나 젠더와 마찬가지로 섹슈엘리티는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불완전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적 불평등과 섹슈엘리티에 대한 통제는 여타의 많은 불평등과 착취를 발생시키고 영속화시킨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을 통해 그러한 모든 부정의의 근본을 뒤흔드는 상황에 마주해 있다. 우리는 이 전투와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우리가 승리해야하는 이유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 모두에게 젠더의 정의가 달성되고, 사회적으로 형평성이 실현되고, 정서적으로 충만하고, 지적으로 생산적이고 멋진 미래를 안겨주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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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의 성매매근절주의 입장에 대한 반론

>>성매매는 남성들의 성적 욕구 해결을 위한 필요악 아닌가요?

성매매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던 가장 오래된 직업이며, 필요악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과 같은 범죄들 역시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고 근절되지 않았지만, 인류는 그것을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근절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성매매가 필요악이라면, ‘누구의 필요에 의해 누가 피해를 입는 것인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남성들의 성적욕구를 위해 성매매를 인정하는 것은 여성차별과 여성(Gender)폭력을 인정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유산이며, 반드시 근절되어야 할 사회악일 뿐입니다. 

 

<반론>---> 매춘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던 가장 오래된 직업인 이유는 남성들의 성적 욕구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타의 이유로 남편을 잃은 여성, 가족에서 쫓겨난 여성, 죄를 지은 여성 등등 빈곤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생존수단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인도의 매춘을 봐도 알 수 있다. 빈곤이 사라지지 않고, 여성들에게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매춘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역사상 매춘이 사라지지 않은 단 하나의 이유다. 남성의 본능 운운하는 것은 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이는 자본의 권력과 축적비밀을 수요와 공급에서 찾는 것처럼 비사회과학적 인식의 전형을 보여줄 따름이다. 성욕문제가 초점이 아닌 것이다. 남성성욕의 문제는 생존수단을 선택할 때 고려할 수 있는 조건 중 하나이지 매춘의 존립근거와는 무관하다.

매춘이 가부장적 사회의 유산이라면, 가부장적 사회가 지독히도 잔존하고 있는 사회와 가부장제와 가장 거리가 먼 자유화된 여성이 많은 나라에서 하나같이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매춘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은 가부장제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데, 매춘이 갈수록 증가하는 현상도 설명할 수 없다. 또한 여성의 인권이 전반적으로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춘이 증가하는 것도 설명이 안 된다. 그 모든 현상을 모두 젠더 정치학으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를 가질 것이다.

또한 매춘을 살인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성노동자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다. 살인은 피해를 주며 타인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한편, 성구매자는 구매행위를 통해 자본축적을 하는 것도 아니요, 권력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가 얻는 이득이라고는 쾌락, 필요의 충족이다. 그는 빈곤에 의해 성노동자가 된 여성의 섹스를 소비한다.  

 

 

 

 

>>성매매가 왜 여성에 대한(Gender) 폭력인가요?

성매매는 남성중심의 성문화가 만들어내는 여성에 대한 폭력입니다. 남성들은 생물학적 본능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의 성을 파는 방식이 아닌 여성의 몸을 사는 방식으로 그 욕구를 해결하려고 해왔습니다. 이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남성지배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살 수 있는 성’ = ‘여성의 성’ = ‘남성에 의해 취득, 점유될 수 있는 성’이라는 이중규범이 작용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단적으로 식품위생법에서 (합법적인) 유흥접대부를 ‘부녀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에서도 보여집니다.

군대에서 회사에서 남성들의 성구매행위는 놀이문화로 접대문화로 공공연히 허용되고 있는 반면, 성판매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한 사회적 낙인과 매장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성구매자의 행위에 대한 사회적 허용도가 높을수록 한 여성의 성매매 경험을 더욱 매도하는 구조는 가부장제 이중성문화의 논리로써 설명될 수 있습니다.

 

<반론>---> 매춘이 남성 중심의 성문화가 만들어내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말은 뭔가 더 분석될 것을 남긴다. 성노동에 성폭력이 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석이 아니라, 단지 우리사회가 성노동을 바라보는 남성중심적인 시각에 의해 포착된 재현의 질서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이 맥락에서 '폭력'을 말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남녀거래에 있어 여성을 파는 쪽의 입장에 서게 강요 하는가 일 것이다. 여성이 불리한 위치에 선다는 것은 성뿐만 아니라, 남녀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거래에서 일반화된 관계성일 것이다. 이 불리함은 빈곤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여성들에게 사회활동의 많은 기회들이 닫혀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은 두가지 선택에 직면하곤 한다. 결혼에 의해 가족의 소유물화된다던지, 그렇지 않으면 자유로운 노동력이 되어 시장에 내던져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시장은 가족의 통제권과 소유권을 부여받은(또한 가족부양의 의무를 책임지는 제도적 대표성으로서의 남성권력) 남성간의 경쟁질서로 가득하다.

결혼에 있어서 여성은 프로포즈를 받는 쪽의 입장에 서게 되며, 성관계에 있어서도 요구받는 쪽에 서게 되며, 성거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관계성을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즉, 프로포즈자체가 폭력은 아니며, 요구하는 자체가 폭력은 아니고, 거래를 하는 것이 폭력은 아니다.

폭력은 항상 여성을 피해자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게 만드는 원인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생계를 박탈하고 있는 자본축적, 그리고 여성에게서 성욕을 박탈하고 '비여성'이게끔 통제해온 남성 중심의 소유권을 비롯한 가족제도 및 국가정책일 것이다. 매춘여성과 부인의 성이 다른 점은 매춘여성은 성욕이 박탈된 '비여성'이고, 부인은 성욕이 주종관계에 의해 생식수단(생식수단이 아니라 성욕이 성욕으로 인정받는다고 해도)으로 전락하고 가족구조안에 구속되고 통제되고 소유된 것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점의 차이다. 이러한 기본적 차이를 분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볼 때 '여성'들의 자유는 자유로운 노동력이 될 자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비여성'인 매춘여성들의 필요에 의한 자유는 인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성거래에 있어 구매자는 그렇게 형성된 사회질서속에서 향유하는 소비자로 나타난다. 구매자는 자신의 필요를 교환을 통해 충족한다. 우리는 여기서 성구매자가 상품생산사회 일반의 소비자와 똑같이 어떤 '필요'를 충족하는 소비자와 동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 거래가 폭력이 내재적인 것이 아니다. 폭력의 내재성은 그녀가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와 필요를 충족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사회적 질서다. 이렇게 폭력과 그것의 메카니즘을 분석하지 않고, 무한정 확대적용하는 한 폭력은 인간성에 본질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생태계 본질적인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성거래는 곧 성폭력이라는 도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런 인식은 아주 퇴보적인 조치들을 낳을 뿐이다. 모든 성거래가 성노동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그리고 성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노동과정을 통제할 수 있게끔 노동조건과 환경을 바꾸는 투쟁과 성노동자의 주체성에 중심을 두는 정치학이 필요하다. 이것이 지배적 거래형태를 변화시키기 위한 투쟁이고, 폭력으로서의 사회질서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매춘여성이 '비여성'으로 존재한다는 나의 생각은 가족구조안의 '엄마'로 대표되는 '대문자 여성'에 매춘여성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현실 속에서 '여성은 누구이고 무엇인가'에 대한 담론형성과정에 있어 매춘여성의 존재가 지속적으로 빠져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매춘여성은 '비여성'이고, 이들의 주체성은 대문자 '여성'안에서 인정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의 정책은 이러한 실례를 증명한다. 대문자 '노동자'가 '비노동자'를 배제하듯이, 대문자 '여성'은 '비여성'을 배제한다. 배제는 또한 포섭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표하는 것은 정규직노동자이며,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통제함으로써 권력과 교섭지위를 갖는다. 오늘날 이런 패턴은 대문자 '여성'의 정치에도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비노동자'를 낳고, '비여성'을 또한 낳는 과정이다. 우리의 현실은 비노동자와 비여성이 주위에 득실댄다. 여기에 비노동자로부터, 그리고 비여성으로부터 각각 출발하는 정치학이 탄생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 위의 질문과 성매매근절주의 입장속에서 나온 대답들은 사회당 홈페이지의 올려진 내용들이다. 그 대답밑에 나의 대답을 반박형태로 추가했다. 이것은 비단 사회당이라는 특정 단체의 입장만이 아니다. 주요한 논리는 모든 성매매근절주의 입장에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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