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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오해들에 대하여

몇 가지 오해들에 대하여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

 

성노동자 운동에 참여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우리는 주변으로부터 이런 저런 진심 어린 충고와 문제제기들을 받고 있다. 문제제기는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성찰하게 하므로 매우 기쁜 일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조직하고자 했을 때 부딪혔던 오해들을 접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입장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힐 수 있었다.

 

먼저, 여성주의에 반대하거나 적대시하는 것 아니냐? , 남성권력의 입장에 서 있는 것 아니냐? 는 오해에 대해.

우리는 여성주의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거나 적대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정리하고 말아버릴 만큼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분노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성의 분노를 말하는 게 아니다. 왜 성노동자들은 여성주의에 분노할까? 당연하게도 성매매특별법이 성노동자들을 분노하게 만들 만큼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은 누가 만들었는가? 주체는 명확하지 않은가? 이에 대해 성노동자들이 어리석다고,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여성주의를 무차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음을 밝힌다. 우리는 새로운 여성주의가 필요하다고 느끼며, 성노동의 쟁점화를 계기로 여성주의가 새롭게 구성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성노동자 네트워크에 함께 하는 여성주의의 새로운 구성적 흐름이 이미 존재한다. 우리는 이 진행 중에 있는 여성주의를 지지하며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여성주의의 지지가 이 운동에 매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런 지지에 대해 여성주의를 편가르는 책략이라고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편가를 능력도, 의무도, 정치적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모든 여성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며, 성노동자와 여성주의간에 형성된 적대적 상황을 돌파해나가 새롭게 구성될 여성주의를 지지한다.

 

구매자 입장에서 성노동을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에 대해.

우리로서는 구매자를 범죄시하는 것에 대해 성노동자를 범죄시하는 것만큼이나 반대한다. 동일하게 구매자의 대부분인 남성도 분명 성별권력 관계 내에서 보자면 권력자이지만, 성적제도의 측면에서의 소외자나 다른 사회적 관계에서 희생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권력자인 한 우리는 구매자 남성의 남성성이 개혁되길 원한다. 하지만 구매자들의 개혁은 결국은 성노동자들이 이 운동에서 얼마나 권리향상을 이뤄내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우리는 거래자체가 범죄가 아니라 거래의 사회적 양태를 바꾸어야 한다고 믿는다. 개인적,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는 거래활동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 거래가 딱히 사랑(이 사회의 사랑은 상대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소유권의 표현이다)에 의한 거래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유희여도 좋고, 자신의 다른 어떤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소득을 올릴 목적이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거래가 어떤 사회적 체계와 맥락 속에 있느냐가 문제이고, 거래의 사회적 양태를 보다 인간적으로 꾸준히 변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양성평등을 추구하느냐?는 오해에 대해.

우리는 양성평등이란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에서 두 개의 성이 서로 평등하게 금욕적일 것을, 또한 동일하게 권력에 종속될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 양성평등의 개념은 여성차별적 현실을 은폐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 내리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개의 성 어느 한쪽에 사회적으로 할당 받고 그 체계에 종속되고 싶지 않고 모든 성이 될 자유를 원한다. 성별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면 또한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성을 선택하고 새롭게 구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은 군대에 가야 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남성이 아닌 다른 성을 선택할 자유를 추구할 것이다. 모든 여성은 가사노동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여성이 아닌 다른 성을 선택할 자유를 추구할 것이다. 우리는 성별규정적 체계와 역할분담, 그리고 모든 것에 있어서의 남녀차별이 없는 공평한 부담 등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해방과 동일시 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보기에 현재의 성노동 운동에서 양성평등을 찾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노동에 있어 남성일반의 권리나 남성성욕의 권리가 박탈당해 고통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생산자나 판매자가 아니라면, 구매자인 남성은 어쨌거나 성노동에 있어 소비자이자 화폐소유자이자 남성권력으로 늘 우월한 위치에 있다. 앞서 우리는 구매자 개혁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만약 현재의 성산업에서 구매자 개혁이 필요 없다고 한다면,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다. 구매자 남성의 개혁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한 개혁은 현재 성 산업의 부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당연하게도, 남성은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성노동자를 찾는 구매자이기 전에 이미 형성된 남성성욕이라는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노동자들 그리고 이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차이는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논쟁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체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 적대적인 차이보다 공통적인 것을 더 많이 발견했다. 우리로서는 성노동자 주체성의 긍정적 발현이라는 차원에서 보다 협력적인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 성노동 자율공동체를 위한 연대는 여러 쟁점에 대해 토론 중에 있으며, 확실한 것 하나는 성노동에 대한 성노동자들의 자율관리를 지지하며 성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알리는데 서포터즈가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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