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A Letter to Martin Abern] 마튼 에이번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  

동지,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 하고 동지가 말했다는 소식을 캐넌 동지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는 1939년 12월 28일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동지가 작성한 문서는 이미 당내에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소수파 지도자 동지 두 명만이 이 문서에 대해서 명확한 논평을 내렸을 뿐입니다. 에이번 동지는 이 글의 제목과 첫 몇 단락을 읽고난 후 골드먼 동지에게,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캐넌 동지를 믿을만한 동지로 알고 있으며 그가 한 말의 진실을 의심할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동지는 그의 말이 "거짓말이다"라고 말합니다. 격렬한 투쟁 과정에서 이런 종류의 오해는 어느 쪽의 악의가 없이도 아주 자주 일어나는 법입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 나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캐넌 동지의 말이 진실인지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했느냐고 동지는 나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전혀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사적인 편지에서 동지의 발언을 사실로 인정하고 유포했다면 의리를 저버린 행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지가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고되었다"는 표현이 들어있는 나의 서한들을 공개했습니다. 결국 동지가 스스로 한 말을 확인하고 부인할 완전한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당내 토론에서는 이러한 확인 방식이 가장 좋다고 믿습니다.

동지가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과거 동지들이 자행했던 많은 거짓 발언들을 나는 그동안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지의 공개서한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주목할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등등. 그렇다면 "많은 거짓 발언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누가 거짓 발언을 했다는 것입니까? "다른 무엇보다도"는 또 무엇입니까? 어떤 종류의 내용을 의미합니까? 동지의 이런 표현들은 경험없는 동지들에게 일종의 애매한 암시로 이해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까? 나의 글 가운데 "많은 거짓 발언들"과 "다른 어떤 것들"이 있다면 정확하게 이 내용들을 밝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거짓 발언들을 내가 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많은 거짓 발언들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면 어떻게 "무시할 "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이 말은 동지의 당에 대한 무관심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조직이 분리되겠군"하고 말한 부분을 동지 스스로 딱잘라 부인하니 반갑습니다. 나는 동지가 편지에서 보인 힘찬 부인 의사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동지의 부인은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동지는 캐넌 동지가 인용한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동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조직 분리 행위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한 비열한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1940년 1월 29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24. Two Letters to Albert Goldman] 앨버트 골드먼 동지에게 보내는 2 통의 편지   

골드먼 동지,

동지의 2월 5일자 편지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에이번 동지의 조직 분리 발언을 내가 공개한 이유는 에이번 동지를 비롯한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명확한 발언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소위 숨겨진 의도가 아니라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등시민"에 대한 우스갯 소리를 이미 들었습니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에게 이렇게 묻고자 합니다: 다수파 그룹을 "캐넌 파벌" 또는 "보수적 관료들" 등으로 부른다면 소수파 동지들은 자신들을 이등시민의 지위로 격하시키려는 것인가? 모든 쁘띠부르조아 분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이들의 대단히 예민한 감성입니다. 이 점을 덧붙이고자 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섁트먼이 자신의 공개서한을 통해 나를 이등시민으로 만들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의 정신분석적 추측이 아니라 그의 사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일련의 오류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끝에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서로를 히스테리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파적 히스테리를 스스로 정당화하기 위해 대항 분파들이 아주 음험하고 기괴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인상입니다. 내가 캐넌 동지와 서한을 주고 받는 것을 음모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라고 이들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도 기가 막혀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쁘띠부르조아 히스테리에 대한 가장 좋은 치료약은 맑스주의적 객관화 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변증법, 맑스주의 사회학, 소련의 사회 성격, 전쟁의 성격 등에 대해 토론을 진행시킬 것입니다. 조직 분리를 유도하겠다는 황당하고도 범죄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원들의 중요한 부위가 우리의 주장을 확신하여 쁘띠부르조아적 입장에서 노동계급적 입장으로 넘어오는 것을 돕기 위해서 입니다.  

1940년 2월 10일

동지적 애정을 보내며

레온 트로츠키

동지,

소수파 대회는 전국 규모의 소위원회(caucus)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회가 개최되었다고 해서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직 분리를 위한 잘못된 길을 새로이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조직 분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수파 내부에는 조직 분리 문제에 대해 두 세 가지 경향이 확실히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소수파 대회의 목적이 이러한 경향들을 통일시키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기초를 바탕으로 통일을 하겠습니까? 어쩌면 일부 지도자들은 필사적인 감정 속에 조직 분리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수파가 당의 단합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식적으로 조직 분리 세력의 시도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동지가 속한 소위원회 아니면 전국위원회의 공식적 다수파 아니면 정치위원회가 당의 단합 문제만을 담은 서한을 소수파 대회에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서한에는 소련의 사회 성격이나 전쟁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소수파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포기해야 당에 남을 수 있다고 잘못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당과 제4인터내셔널에 대해 진정으로 헌신하며 규율을 준수할 경우 이들은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40년 2월 19일

레온 트로츠키

[25. Back to the Party!] 당으로 복귀합시다  

동지들,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아직도 우리의 이론적 또는 정치적 주장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의 일관되지 못한 주장이 다수파 동지들의 글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이제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게릴라전으로 이행한 것 같습니다. 게릴라전은 패배한 많은 군대들의 운명입니다. 골드먼 동지는 2월 12일자 회람을 통해 소수파의 새로운 전투 방식을 적절하게 묘사했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의 가장 기묘한 예를 맥다널드 동지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자유지(紙)(Liberty) 에 기고한 글을 그는 섬세하기보다는 용감하게 공격했습니다. 이 글에서 나는 소련의 모순적 성격과 적군의 "진보적 역할 "을 분석했는데 이 내용을 그는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크론슈타트 봉기를 분석한 논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당파평론지](Partisan Review)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최소한 부르조아 언론을 상대할 때는 내가 "실제로는" 소수파, 섁트먼 또는 자기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입장과 모순되며 스탈린주의에 투항하는 나의 선언문들은 캐넌 동지를 도우려는 목적으로 당내 토론집에만 실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새로이 발견했습니다. 맥다널드 동지의 새로운 발견들을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부르조아 언론에 영합하고 자유지의 독자들이 보기 좋은 글을 쓸 때는 트로츠키는 섁트먼과 똑같이 그리고 자기와 비슷한 입장을 가진 글을 쓴다; 그러나 당에 대해서 글을 쓸 때에는 지독하게 소수파를 비판한다. 당파평론지는 정신분석에 대해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맥더날드 동지가 자신에 대해 정신분석을 해보면 아마 자기의 무의식을 발견했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소련의 모순적 성격 그리고 적군의 모순적 역할을 소수파 동지들이 모든 글과 연설에서 분석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이 이 문제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이 결과를 모든 경우에 올바르게 적용할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자유지에 실린 나의 글은 소련의 사회 성격이 아니라 스탈린의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익명의 글이 멕시코의 부르조아 언론에 실렸습니다. 이 글은 내가 스탈린의 대외정책을 승인하고 있으며 스탈린과 화해를 추구하고 있다고 "트로츠키 측근 소식통들"을 인용하며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글들이 미국 언론에도 유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스탈린주의에 투항했다고 맥다널드 부류들이 끔찍하게 심각한 비난을 가했을 것이고 이 내용을 멕시코 언론이 나름의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세계 부르조아 언론이 당내 토론을 악용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 나는 국제정치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폭로하는 데 초점을 맞춘 글을 자유지에 실었던 것입니다. 이 글은 소련의 사회 성격에 대해 사회학적 분석을 전혀 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당시 좀더 시급하다고 생각한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순간에 필요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아마 이 글의 내용이 소수파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파의 주장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맥다널드 동지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우리가 골백번이나 주장한 내용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좀더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어 봅시다. 나에게 보낸 에이번 동지의 편지는 조직을 분리하겠다는 의지를 아주 확실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직을 분리하겠다는 그의 근거는 정말이지 한심하면서 동시에 경악스럽습니다. 이 표현은 그대로 나의 감정을 가장 누그러뜨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캐넌 파벌"이 당대회에서 다수파가 된다면 에이번과 그의 동료들은 "이등"시민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에이번은 와이스보드, 피일드, 오울러 등과 같이 일등시민들 가운데 일등시민이 되어 자기 왕국을 갖기를 더욱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당내에서 일등 이등 "시민들"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당만이 이것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이 어떻게 이런 결정들을 할 수 있느냐고요?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토론을 누가 주도했습니까? 에이번과 그의 부관들이 했습니다. 이 동지들이 글이나 말을 제한당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이번의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당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당과 제4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신망을 잃었습니다. 이들이 소중한 동지들이란 점에서 이러한 현상은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동지들은 이제 당활동을 열심히 진지하게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만 잃었던 신망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간, 인내심, 확고한 의지 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제4인터내셔널의 원칙들을 가지고서 당을 설득하는 작업에 대해 에이번은 희망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따라서 조직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일종의 조직 이탈행위가 됩니다. 에이번 동지의 논리가 너무도 한심스러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또한 경악스럽기까지 합니다! 노동계급적 다수파에 대한 쁘띠부르조아 분자들의 경멸감을 기저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파는 아주 능력있는 집필가, 연설가, 조직가들이며 다수파는 소양도 없고 소수파를 액면 그대로 평가할 능력도 없다. 그러니 고상한 인간들로 새로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 더 낫다!

제3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우리 좌익반대파는 하나의 분파로 남아있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스탈린주의 다수파는 우리를 박해했고 합법적 표현수단들을 박탈했습니다. 가장 지독한 비방을 자행했으며 소련 국내에서는 우리 동지들을 체포하고 총살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 당원들과 분리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할 때까지 우리는 분파임을 자부했습니다. 제3인터내셔널의 부패한 전체주의적 관료집단의 모든 만행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4인터내셔널이야말로 전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정직한 혁명조직입니다. 우리 당"기구" 는 강제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완벽한 당내 민주주의를 통해 모든 문제가 결정되며 모든 동지들이 평가됩니다. 다수파 동지들이 오류를 범한다면 소수파 동지들이 점진적으로 이들을 올바른 길로 교육할 수 있습니다. 다음 당대회 이전에는 안되더라도 그 이후에는 가능합니다. 소수파는 새 당원들을 조직하여 이후 다수파가 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에 대한 약간의 믿음, 노동자들이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나 현재 소수파 지도자 동지들은 스스로가 구축한 환경 속에서 히스테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이들은 부르조아 여론에는 영합하면서 제4인터내셔널의 발전에는 영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인내력 부족은 계급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즉 노동자에 대한 쁘띠부르조아 지식인들의 경멸감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에이번 동지가 표현한 조직 분리 경향이 너무도 경악스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에이번 동지는 증오심을 가지고 사태를 평가하고 미래를 조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 증오심은 정치에서는 혐오스러운 감정입니다. 에이번 동지의 태도와 그의 조직 분리 움직임은 소수파의 건전한 동지들 모두에게 혐오감만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동지들, 당으로 복귀합시다! 에이번 동지가 가리키는 길은 막다른 골목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4인터내셔널 이외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1940년 2월 21일

레온 트로츠키

코요아칸, 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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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1 21:37 2005/10/0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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