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올바른 방향성으로!!

 

1.서론

 

생산하는 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핵심은 무엇일까? 생산을 담당하는 자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나서야 하며 그들이 권력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를 건설 할 때만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것이고, 평등으로 가는 첫걸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산하는 자들이 권력을 잡기 위한 과정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누구나 확답을 할 수 있는 절대자들이 아니며, 그것은 상황에 따라 객관적인 흐름에 이끌려 나갈 것이다. 중요한 명제는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나던지 상관없이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로 이끌려 나가야 하는 것이며, 노동자민주주의를 위한 형태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기본적인 민주주의 형식적인 틀을 가진 국가 권력을 그대로 이용을 한다면, 새로운 지배계급을 양산하고, 또 다른 자본주의로의 회기로 이루어 져 나가는 것이 우리가 봐왔던 역사의 흐름이었다. 소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로의 발전. 아직도 진행되어지고 잇는 남미의 민중들의 투쟁 속에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 못하고, 또는 대체세력으로서 계급사상을 제대로 답보하지 못하는 조직들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자칭 진보라고 하는 쁘띠부르주아들이 권력의 핵심에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회주의적인 요소, 즉 복지라는 카드를 도입하여 피지배계급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다.

 

2.무엇이 보이는가?

 

1970년대 세계적인 대공황에서부터 떨어지는 이윤율을 만회하고자 자본주의 국가들은 특히 여국과 미국으로 중심으로 하여 신자유주의 정책을 들고 나왔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의 이윤극대화로 인한 자본의 이동은 중국을 전 세계의 생산 공장 역할을 하게 만들었고, 중국의 높아지는 인건비 및 물류비용은 또 다른 나라에의 이동으로 나타나고 대체하는 나라로서는 아직은 항만 및 여타 시설이 미흡하지만 인도 및 남아시아의 나라들이 그 명맥을 이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유럽 및 아메리카, 일본 한국 등등의 세계에 경제를 담당하는 축에서의 노동자들은 자국의 생산설비의 이전과 자동화 설비의 확장으로 인하여 실업의 장기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중간의 축을 담담하던 전문 인력이라고 자처하던 노동귀족의 핵심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있다. 생산 설비의 공동화현상과 더불어서 설비의 자동화의 발전은 자본의 주요한 실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세계를 하나의 경제블럭으로 만들어 버린 상황에서, 자본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 더 좋은 조건을 찾아다니는 철새처럼 언제든지 자리를 박차고 갈 준비는 항상 하고 있는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은 이미 어느 한나라의 일이 아니며, 세계자본주의 경제의 한 축으로서 자리를 잡은 OECD국가들은 누구나 겪는 당연한 결과이다.

 

요즘 선진국이라는 국가들이 자국 내의 생산설비시설 확대 및 타국의 생산설비시설을 끌어 오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자국의 고용 없는 성장에 한계점이 보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미 자본주의의 성장의 한계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덫에 빠져 있다. IT산업의 발전은 자동화설비를 더욱 발전 시켰으며, 정리해고로 직장에서 사라지는 노동자의 수가 새로운 산업으로의 이전보다 더 빠르게 진척되고 있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설비의 자동화는 더욱 노동자들의 삶을 힘들게 만드는 조건으로 발전 했다. 세계적으로 경제는 만성실업, 과잉생산 과소소비의 모습으로 나타나,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으며, 대중들의 저항은 더욱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2012년 서부부터 시작되어지는 프랑스의 총파업과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그리스 등등에서 벌어진 대중투쟁의 열기는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세계적으로 빠르게 정치권들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대중들의 사고방식이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표해주기를 바라는 대리주의 표출이다. 어떠한 기대를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막연히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 대중들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자신의 선택으로 당선된 자들도 이전과는 특별히 다른 무엇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투표율이 떨어지는 이유의 핵심은 지배계급에 대한 반항심이다. 기댈 곳을 찾지 못한 대중들의 투쟁의 방식의 하나이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에게 대한 저항의 불꽃은 피어오르고 있지만 지역적인 차이는 자본의 불균등한 발전으로 인한 온도차이 때문이다. 쁘띠부르주아의 빠른 우경화의 모습은 더욱더 자본가계급에게 충성을 다하여 살아남고자 하는 그들의 위기의식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파시즘의 재등장을 위한 토대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떠한가. 이미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자본의 이윤극대화는 독점재벌이라고 칭하는 삼성의 가전제품의 생선설비를 중국으로 이전하여 생산을 시작했으며 국내생산의 라인을 대폭 줄여서 공장이 비어 있으며, 특히 수원시는 예전에 활기찬 모습을 잃어 갔으나, 현대는 미국의 앨라버마주에 자동차공장을 짓고 생산을 시작하여 앨러버마의 주민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중국 장가 항에 연산 60만 톤 규모의 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를 준공함으로써 세계 3대 메이저 스테인리스사로 도약할 것으로 예상되는 포스코 등등의 재벌 및 기업들은 이젠 자국 내에서 더 많은 이윤을 얻기보다는 이윤의 극대화라는 절대 명제를 쫒아 외국으로 생산설비를 수출 및 투자를 하고, 자동화설비의 증축으로, 불투명한 미래의 모습에서 유보금의 확충의 모습에서, 기업의 이윤이나 매출의 증가가 바로 산업인력의 확충이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고용 없는 성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문제인 양극화 현상을 국내에서 극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명박정권의 등장이후 실질임금과 명목임금의 차이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리먼사태, 즉 미국 발 금융위기 이후 과감한 환율 정책으로 그동안 싸게 공급되어 왔던 수입물가가 오르기 시작 되었고, 특히 전기 가스 석유제품의 가격인상으로 대중들은 삶의 무게가 더욱 고달프게 나타났다. 실질임금의 하락(명목임금도 떨어지기 시작했다)은 대중의 생활에 변화를 일으키면서 IMF 시대를 지나면서 급격하게 떨어진 가계 저축률을,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나타나, 미래에 나타날 충격에 대비를 못하게 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충격의 대표적으로 종합병원들의 적자가 시작 - 국세청 공익법인 공시자료에 따르면 빅5 병원은 지난해 서울대병원 287억 원, 가톨릭중앙의료원 116억 원, 연세의료원 66억 원, 삼성서울병원 11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고 서울아산병원만 유일하게 7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 되었고, 도소매 및 대형 백화점과 마트에서도 판매율이 떨어져 가고 있다. 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자본가들의 착취를 정당화한 현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를 가속화 시켰으며, 사회복지가 부족한 한국현실에 비추어 볼 때 생존의 도태로 벌어져 자살률이 OECD국가 중에 제 1위라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노동인력의 감소는 서비스업의 비대화 및 소규모 자영업의 확대로 나타났다. 가진 자들의 하녀나 기사로서 그들의 열망에 충실한 짐꾼의 역할로서 서비스업의 확대는 더욱더 처절한 양극화로 치달아 가고 있는 현실의 반영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자본의 유출과 공공기업의 사유화, 설비의 자동화를 통한 정리해고의 상시적 위협, 노노갈등으로 인하여 자본의 힘은 더욱더 강화가 되어가고 있다.

 

자신의 이윤을 더 높이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을 몰락시키면서 떠나는 그들은 이젠 한 지역의 한 나라의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이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여 자국의 시장을 개방화시키면서 자신들은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 피지배계급의 힘을 쥐어짜 탈진 상태까지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방법은 국가차원에서 기업차원으로 이전했다. 노동자간의 갈등 –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갈등, 정리해고의 상시적인 습격, 경기의 어두운 면을 강조하면서 경쟁 심리의 부축 등등의 모습으로 개인주의의 확산을 통한 분열로 대중의 결집을 분산 시키려고 노력을 다 함께 하고 있다.

 

자칭 진보라고 소리쳤던 이들은 알아서 그들 앞에서 설설 기면서 대중에겐 투쟁을 외치면도 투쟁의 힘의 강도를 조정하면서 강력한 힘을 비축하는 것보단 풍선의 공기를 빼서 터지지 않을 정도로만 유지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진보라고 외치는 통합진보당, 노동당(진보당과 사회당의 얼굴만 성형수술을 했기에)은 부르주아계급에게 자신을 유리한 값으로 흥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필요한 것이며, 그 이상의 투쟁은 중간에 서성거리는 자신들을 위해서는 좋을 것이 없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말로만의 총파업선언은 투쟁의 지침 및 투쟁하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자신만이라도 살고자하는 쁘띠부르주아들의 계급적인 속성으로 나타나서 현실에선 자신들의 힘은 분산되고 고립되어져 부르주아에게 각개격파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한다는 의미가 지배계급을 위해서, 지배계급에 의한 무한한 착취를 보장해주는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주저앉아있는 현실은 지배계급의 힘이 강력함과 더불어 그들을 지탱해주는 진보라는 쁘띠부르주아들의 지배계급의 에 대한 충성심으로 대중투쟁은 언제나 그 깃발을 내리게 만들었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선거에 매몰되어 있는 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대칭으로 노동자계급을 스스로가 분열시켜서 힘을 약하게 만들었으며, 정규직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배부름에 동참을 하기보다는 방관을, 그리고 자신의 이익이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행동으로 답을 보여주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연대가 아닌 비협조로서 반사적으로 부르주아의 이익에 보탬을 주고 힘을 실어주는 역할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지배철학의 핵심은 분열과 경쟁이다. 노노간의 갈등과 경쟁은 그의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의 축일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피지배계급의 투쟁은 아직도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사회주의라는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물결에 따라서 배의 방향이 유동적으로 바뀌고 있다. 자신들의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부르주아 지배체제를 부수어 나간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의미보다는 현재 존재하는 부르주아 체제를 개량 화하고, 선진화 시킨다는 명분으로 현재의 국가 체계를 그대로 이용하겠다는 어이없는 상태로까지 나타나 현실 안주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미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그들의 국가형태를 그대로 이용하겠다는 좌파적인 시각은 개량주의의 전초단계라기 보다는 현 시기의 좌파계열의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3.목적을 위해선 어떻게?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는 조직이라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현 자본주의 국가의 의회 내에서 권력을 잡아, 조금 더 발전된다면 행정부를 장악한다면 자신들의 뜻을 펼칠 것이라고 속으로 장담하고 있다. 국가의 권력이 무엇인지 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계급존재가 가지는 의미,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자신이 무엇이며, 자신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생각마저 과감히 내버린 전형적인 쁘띠부르주아들로서의 변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무엇이던가? 부르주아를 위한 부르주아를 의한 부르주아의 정치가 아니던가! 그런 국가권력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어디에서 실행하고 있는지는 대중들에게 제대로 선전선동하지 안하고, 선거라는 공간속에서 자칭 사회주의자들조차 마찬가지로 스스로가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표를 구걸하고 있는 모습, 방향성이라는 틀보단 한 순간 또는 한 시기를 무사히 자신들의 안위와 명성을 위한 모습은 이미 계급적인 기반을 포기하고 부르주아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대체 상품으로 전락했음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권력이라는 것은 행정수반을 차지했다고 틀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의회에 다수의석을 확보했다고 혁명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가능한 경우가 어디에 존재 했는지 역사에서 물어 보아라.

 

한국의 자본주의는 이미 OECD국가들과 당당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한국의 자본주의의 발전은 한국의 자본축적이 폭력적이었고, 현재도 선진자본주의보다 더 폭력적이고 경영권이 세습이 되어 천민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부류도 잇지만 이는 그 옛날 한동안 풍미를 했던 80년대 운동권의 변형된 주장일 뿐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자신의 직계를 비판을 하지만 그 내용은 차이가 없다. 천민이기에 선진으로 가야한다는 사고방식은 P(N)DR의 2단계 혁명론을 그대로 이어 받았기 때문에 선진자본주의사회로 변화시켜야 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핏줄은 그대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혁명을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도 혁명에 다가설 수 없다는 사대주의 정신과 그 맥을 이어간다. 이들에겐 사회주의는 사치일 뿐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노동자민중의 국가는 자본주의를 극도로 발전시키는 것을 그 핵으로 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도 모르고 하는 철부지들의 주정이다. 자본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의 상부구조를 사회문화적인 모습에서 여려가지 변형된 모습으로 표현된다. 자신의 상부구조의 변형되어진 모습이라도 자본의 논리가 적용이 된다면 사회의 발전은 자본이라는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이해 못하는 관념론의 변형이다. 자본주의 발전은 서구와 일본에 비해 70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이루어진 축약된 형태로 자본주의 모든 장단점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다. 폭력적이며, 봉건적인 이데올로기의 충효사상, 군대식 상명하복의 규율의 사회적인 적용 등등은 세계경제 15위의 순위를 당당하게 만든 요소이며, 한국자본주의 특수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특수성은 자본주의 전체적인 경향에 흩어져가고 있다. 자본주의 핵심사상인 개인주의라는 사고의 발달로.

 

사회주의를 외치는 노동당, 통합진보당 그들의 모체인 민주노조 등은 이미 노동해방이라는 대의를 포기하고 발전의 모습은 새로운 자본주의 내부권력의 대체세력의 모습일 뿐이며, 새로운 사회로의 모습으로 자본주의를 대처하고 사회주의로 발전하고자 하는 조직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다. 말로만의 사회주의는 자신들의 변명을 위한 쉼터가 되었고, 대중들의 앞에서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방향타라는 의미보다는 판타지세계가 존재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으로, 노동자계급이 자신이 권력을 가질 때만이 실현할 수 있는 것이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했다라고, 행정부에서 몇 자리는 얻었다고 실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 내에서의 노동자계급 나가야 하는 길이고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는 조직이 제시해야 하는 길인 것이다.

 

현실은 대중에게 어떠한 선전을 무엇을 가지고 하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을 할 필요성이 있다. 곧 내년의 지방의회선거를 노동당은 몇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승리의 포석으로 삼아 그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승리로 선전 선동하고자 하며, 그 안에 소속되어있는 자칭 반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정치세력은 거기에 동조를 해서 같은 목소리를 내어 좀 더 낳은 것을 원하고 있다면 표를 몰아달라고 애원을 하고 있다. 희망버스, 재능투쟁의 승리에서 보여주었던 대중들의 열망을 소위 노동자대중조직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이 투쟁의 힘을 스스로 약화시키고 잇는 시점에서 무엇을 가지고 그들을 더욱더 높은 투쟁의 열기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 누구나 YES라고 할 때 NO라고 한다면 다구리를 당하고, 누구나 NO라고 외칠 때 YES라고 외치면 왕따를 당한다는 책임감으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계속적으로 반복시키고 있는 좌파들의 모습은 참으로 한숨이 나온다. 자신들은 스스로가 높은 점수를 매기면서 아니라고 자족하고 있는 다고 할지라도 이미 함께 했던 다른 부류의 사람들 속에서 제대로 된 자신의 주장을 대중들 앞에서 펴지 않고( 못하고 라고 하는 것이 맞는 듯하다) 그냥 자신들끼리만 아는 언어로 가족적으로 떠든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을 갖기 위해서 노력했다라고 할 수는 없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한(또는 의한) 조직을 건설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올바른 전술 관을 가지고 현 시기에 맞는 원칙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부분에 대해서는 여태까지 해왔듯이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전국적 정치연합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즉 혁명적 전위 정당을 건설해야 함은 누누이 이야기를 해왔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당이 없다고 할지라도 투쟁을 전개 할 수 있으며, 승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이 없다면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못하고 유지하지도 못한다. 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주체적인 노력에 대안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당을 건설해야 하는 것이다. 현재 진보라고 자처하는 쁘띠부르주아 정당에게서 기대는 이미 포기하는 것이 좋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그 자리에 안주하고픈 사회주의자들은 이미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피지배계급을 위해 투쟁에 앞장서기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계급협조주의인 것이다. 사회주의 정치세력의 연합체인 당은 자본주의사회에선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며, 혁명의 주체와 함께 권력을 혁명이라는 그 이후에 담당할 수 있는 하나의 축이 될 것이다.

 

두 번째로서의 현 시기에는 어떠한 전술입장을 내세워야 하는가하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접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투쟁 방향을 잡을 수가 있을 것이다. IMF체제이후 이윤율의 저하로 고통을 받은 자본은 유휴자본의 내부적립, 투기자본으로 변화 등의 모습은 설비투자 감소, 생산설비이전과 자동화 설비의 확충으로 실업자의 증대와 고용 불안, 저임금 노동의 확산 기형적으로 성장한 한국의 자영업 등등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인한 불안감으로 저축율의 감소, 내수부진, 부동산 가격의 하락으로 나타났다. 과잉생산과 과소소비가 이미 자리를 잡았다. 생존을 위해서 몸을 팔아서 돈을 벌어야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겐 하나의 재앙으로 나타났다. 사회적인 보장이 제대로 안되어 있는 사회에서 실업과 실업에 대한 공포로 대중들의 어깨를 눌러 내리는 무게는 감당하기 어렵다. 한국의 자살률이 높아지는 직접적인 원인중의 하나가 실업에 대한 공포다. 무산계급은 자신의 몸을 팔아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데 생계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된다면 ………

 

4. 현실에서 대중의 상황은?

 

한국의 현실은 빈부의 격차가 더욱더 커져가고 있으며, 대량생산의 시기에 맞추어 대중의 소비는 역으로 가고, 기업의 이윤율을 떨어져가면서 자본의 투자는 위축되어 가고 있는 시기다. 팔리지 않는 소비재는 가격이 서서히 떨어지고 – 한국은 실질임금(명목임금)의 하락과 환율정책으로 물가인상이 이루어져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나, 세계적으로 디플레이션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투기자본으로 형성된 원재료 및 금가격의 하락세는 두드러지게 떨어지는 상황이다. 이는 자본주의 공황의 전조다.

 

자본과 노동자와의 전선이 걸쳐지고 있는 것은 몇 가지의 현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첫 번째로서 나타나는 것은 "2005년 11월 중 제조업취업자수는 전년동월대비 10.7만 명이 감소하였는데 제조업부문 취업자 수는 이미 2005년 1월 이후 11개월 연속 감소하고 있었다.(SERI 경제포커스 제71호, 삼성경제연구소). 사태는 제조업내부로 들어가면 더 심각하다. 제조업 중 성장을 주도하는 업종인 전기/전자업종은 고용계수(고용계수는 산출액 10억 당 소요되는 피 고용자수를 의미)가 급감하고 있다. 전기/전자업종의 고용계수는 1990년 20.4명에서 2000년 3.8명으로 급감하여 성장주도업종임에도 일자리창출 능력은 급감했다"(해방 9호 삶의 파탄을 막고 인간다운 삶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요구 이하 요구)라고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생산설비의 이전에 따르는 산업의 공동화 현상으로 노동인력의 급속한 감속인 것이다. 본사는 그대로 있고 제조설비는 상대적으로 절감할 수 있는 지역으로의 이동으로 인하여 국내 생산현장의 노동인력은 대폭적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국내투자보단 외국에 투자를 해서 생산시설을 확충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국내와 해외의 공장 간에 경쟁 – 예를 들면 한진 중공업이 그렇다. - 을 또한 심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밥벌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현재까지의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민족주의, 지역주의, 국가주의라는 형식으로 새롭게 무장을 할 것이다. 국내 재벌은 광복이후 세계자본의 발전의 양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 폭력적인 모습이었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현재는 다국적기업으로 성장을 했다.

 

생산수단의 발전에 따르는 노동인력의 자연스러운 감축이 아니라 자본의 이동에 따르는 감축의 결과로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노동계급의 투쟁의 의욕을 생존권의 문제로 다시 떨어뜨리는 악순환 과 더불어서 고용의 불안 요소를 잠재우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비정규직의 문제가 비록 수면위로 올라와 잇지만 이 문제로 현재의 노동시장의 불안 요소를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부분 –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자 - 을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에 고용불안정 부분은 계속해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발목을 잡힐 수뿐이 없는 것이다. 정규직이 되었다라고 할지라도 공장이전에 따르는 인력감축은 부르주아의 몫으로 그대로 남아있는 한 언제든지 노동자계급은 인력감축이라는 칼날에 투쟁보다는 협력이라는, 자본가계급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투쟁으로 유지되어질 것이며, 현재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노동자간의 차별 정책으로 경쟁과 정규직을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듦으로서 투쟁의 방향성을 노노갈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것에 있다. 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미온적인 자세가 자신들이 정규직이라는 생활적인 여유가 가져오는 부분도 있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언제든지 노동유연화 정책으로 인하여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보다는 비정규직노동자의 피가 자신의 옷에 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투쟁에 방관적이고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간의 갈등은 자본가의 힘을 키워나간다. 분리되어 있는 노동자계급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면 노동자계급이 누구에게나 부르주아 체계를 흔들어 자신들의 세상을 건설할 계기나 매개체를 가져야하며 더 이상 물러나면 그들은 사육장의 개처럼 언제든 도살장에 끌려 나갈지 모르는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주시해주어야 한다.

 

세 번째로는 (잠재적인)실업자의 양산이다. 산업의 자동화로 노동인력이 줄어들었지만 새롭게 자본시장에 들어온 IT산업의 모습은 노동인력을 흡수하기에는 생산규모에 비해 작은 인력을 필요 했기에 흘러나온 노동력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다. 실업자들은 아르바이트, 단기일자리, 저임금이라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한 일자리라도 찾아다닌다. 이는 사회의 불안 요인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들이 조직화 되어 있지 못하고, 자신들의 처지가 단시간에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장기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인정 하지 않았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듯이 오랫동안 단기 알바나 저임금의 굴레에서, 실업의 상태에 존재한다면, 그게 하나의 신분이 된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는 한국의 자영업이 다른 OECD국가들에 비해 높다는 사실이다. 이는 표를 보면 이해가 빠르다. 적정수준이라고 하는 것보다 8.2%가 높고, 주요국보다 10%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의 기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이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잉여물자의 처분으로 50~70년대의 도시를 중심으로 소상인의 발전이 있었고, 70년대의 중공업중심의 자본주의 급속한 발전은 소상공인을 자본의 유통구조에 커다란 자리를 잡게 했다. 그때 이후 대중의 심리는 자신이 하던 일을 그만둔 이후엔 장사라도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 90년대 이후 비대해진 자영업(도시의 노점상도 마찬가지다)은 자신들의 경쟁 속에서 서서히 몰락하고 있다. 영세 자영업의 몰락은 대형마트가 생기기 전부터 시작 되어 왔으나 대형마트가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가속화 된 것이다. 자영업의 몰락은 유통구조를 혁신하는데 한 몫을 하지만 자영업자의 유휴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하는 한 경제적인 먹구름은 벼락과 천둥을 동반한 태풍이 되어 밀려올 것이다.

 

다섯 번째로서 박근혜정부의 등장으로 보수우익의 힘이 우위를 가져왔다. 물론 문재인이 권력을 잡았다 해도 차이가 없었겠지만. 우익의 열망은 더 오른쪽으로 회귀하기를 열망을 했다. 그래도 사회의 경제적인 차이가 대중의 불만으로 일어나는 현재의 상황에서 오른쪽보다는 형식적으로 사회복지의 예산을 집중한다고 하고 좌 클릭을 하는 것 같지만 국유화되어 있는 기업들을 민(사)유화하는 정책은 계속되고 있어 신자유주의정책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전 보다 완화된 경제의 개혁도 재벌에겐 한층 힘을 실어준다. 복지를 위해서 중산층의 주머니를 털고, 재벌을 위해선 법인세율을 그대로 두고, 전기 상하수도 등등의 가격은 기업들을 위해서 적게 올리며(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 재벌들이 판매해온 전기가격은 가격연동제로 보상을 해주는 현실이다.

 

5. 어떻게 해야 하는가?

 

1)노동자 통제.

 

노동자자주관리 노동자계급의 사회의 상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사회를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지금 무엇을 가지고 투쟁을 전개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하는가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전술의 핵심은 전략적인 승리를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며, 한나라의 유방이 초나라의 항우에게 전술적으로 계속적인 패배를 했다라고 할지라도 전략에 봉사를 하도록 유인을 했듯이 99번 패배와 승리의 주역으로 이끌어 갈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현재의 패배라는 것에 목을 매어 패배감, 무력감에 빠져있는 좌파세력들은 만회를 해야 한다는 집착에 빠져 무엇을 대중에게 보여주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대중들의 투쟁에 계급적인 입장을 포기한 채로 그들 자신의 한순간적인 이익이라는 비정규직철폐라는 구호에 이구동성으로 매달린다면 침소봉대하여 소탐대실하는 것이다. 현 시기의 노동대중의 투쟁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명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대중의 정규직노동자와의 차별적인 임금 및 근로조건 때문인 것이다. 현 시기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비정규직, 정규직의 문제(이 둘의 차별화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해소가 될 수도 있다)가 아니라 노동유연화정책으로 인한 고용불안정과 차별이며, 이런 차별적인 요소를 노동환경에서 완전히 제거를 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체제에서는 불가능하다. 노동자간의 갈등 및 노동자간의 차별적인 요소들은 세계자본주의에서는 확대되어 가고 있는 상태다. 이의 대안은 생산현장에서 권력을 장악 할 때만이 가능하겠지만, 이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생산현장의 주인이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 한 것이다. 이는 생산현장의 투쟁의 방향은 비정규직 철폐투쟁으로 제한되어선 발전이 없다는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여성 이주노동자 및 청소년의 노동에 대한 노동의 내용이 같다면 같은 임금과 같은 환경에서 일을 해야 함이고 서로간의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 비정규직이 생겨난 이유가 이윤극대화에 따르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때문이다. 도랑 치고 가재를 잡듯이 노동대중의 투쟁력이 약화되는 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과 갈등을 노노간의 모습으로 보여준 것이다. 현재의 비정규직투쟁은 노동자 스스로정규직과의 차별 속에서 자신도 차별을 할 수 있는 위치로 이동하고 싶은 열망이며, 이는 노노 갈등을 표면화 시킨 가장 큰 모습으로 들어난다.

 

차별철폐와 함께 노동자가 계속적으로 투쟁을 해나가야 하는 것은 노동자 자주관리 및 노동자통제이다. 쌍차투쟁에서의 대안으로 상하이자동차에서 인도의 마힌드라그룹으로 소유권이 넘어가기 전까지 소유권문제로 대부분의 운동단체들은 국유화를 외쳤다. 그 당시부터 소유권의 문제가 아닌 노동자의 주체적 주인의식으로 무장시켜야 함을 강조하고, 자주관리나 노동자통제로 노동자 스스로 회사를 운영해야 한다고 역설을 했다. 소유권은 자신들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주체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소유권문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투쟁은 확산되지 못하고 언제나 다른 문제에 비해 뒤로 밀린다. 사적소유권을 가장 강하게 최고의 산물로 만든 것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소유권을 소유권(국유화)의 문제로 해결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오류를 낳을 뿐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소유권을 신성시하는 것은 부르주아들의 부의 축적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국유화되어 있는 기업 생산시설 등등의 것도 경쟁의 명분으로, 이윤의 확대를 명분으로 민(사)유화의 명분을 만들었다. 현재 국유화를 전면에 내세우면 대중을 현혹시키는데 일조하는 논리다. 재벌(현대, 삼성 또한 해체위기가 전개되고 있는 동양그룹을 포함해서)의 국유화는 국유화가 되면 다 된다라는 식으로 대중에게 오해를 만드는 것이다. 국유화 -> 노동자통제의 단계적 발상이며, 실제적으로 국유화와 노동자통제의 문제는 다른 서상에 있는 것이다. 지금도 (재벌)국유화를 전면에 걸고 잇는 몇몇 정파들은 왜 국유화되어 잇는 기업들엔 노동자통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못하는가? 사회주의를 외치면서 모순적인 주장을 한다는 것은 노동자의 피를 실험용의 생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혁명을 외치면서 대중의 피를 더 이상 실험 하지 마라!

 

대중을 주체적인 투쟁의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선 차별철폐,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더불어 노동자통제(노동자자주관리)를 주장하고 생산을 자신들의 기획과 자신들의 결정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은 대중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어떻게 발전시키나 하는 것이다. 그런 대중의 자각 없이 혁명은 성공을 해도 소련에서처럼 관료주의적인 방식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속해 있는 기업이 부도가난다면 기업을 노동자스스로 자주 관리해 나가는 방법으로 투쟁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자신들이 속해 잇던 곳은 자신들이 가장 잘 아는 곳이다. 어떤 식으로 변해야 하는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것을 잘 아는 자가 그것을 관리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공황에선 부도가 많이 발생할 것이다. 소유권(국유화)의 문제로 대중투쟁을 이끌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자주관리 또는 생산자 협동조합의 형식으로라도 변화해야 한다. 그것이 노동자가 다가올 미래의 주인이 될 것이다.

 

현 시기의 대안으로서 현장에서의 권력이라는 제안은 아직 까지는 시기상조라면서 대중을 우롱하는 최소한의 투쟁으로 나가야 하는 조직도 있지만 진정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자 한다면, 최소한의 노동대중의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진정한 목적의식적인 활동을 위해서라도 노동자통제를 중심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노동현장을 노동계급이 관리 및 자발적인 생산 환경을 만들어 나갈 때 노동대중간의 차별화는 없어질 것이며, 더욱이 고용유연화정책으로 인하여 나빠진 노동환경 및 자본의 이동을 막을 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대안은 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의 현장을 노동의 권리의 행사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실제 현장 권력이라는 형태의 발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노동자 평의 회 노동자위원회 등등의 명칭으로 권력의 맹아와 권력의 진행을 가질 수 있다.

 

현장에서 핵심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들의 견해를 활발히 밝힐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있어야 한다. 그 토대는 노동자의 주체성이다. 권력의 시작은 노동자의 주체성에서 시작된다. 내가 빼앗겼다라고 느끼는 것과 빼앗긴 것을 되찾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배고프면 굶주려 잇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을 해서라도 먹을 줄 아는, 사회의 부를 재분배를 해서라도 우리의 주린 배를 채울 줄 아는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배고프면 도둑질하고 착취를 당했다면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은 당연한 것이다. 언제까지 밥 달라고 투정만 할 것인가?

 

2)실업자 운동에 대한 생각

 

가) 실업자 운동의 전개

 

아직까지는 전선이 확대가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전선의 확대를 일어날 곳은 실업자에 대한 문제다. 전국적으로 실업의 문제는 간간히 나오지만 좌파 단위에서 실제적으로 대중과 함께 하고자 한다면 실업의 문제는 끝임 없이 제게 되어야 하는 문제다. 비록 현장 노동자와의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행동의 제약을 받고 폭발적적인 힘으로 성장하지 못하지만, 대중의 앞을 막는 자본의 틀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노동의 권리를 침해받는 상황은 바로 생명줄을 놓게 만드는 치명적인 살인의 흉기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해고자의 투쟁이 원대복직이라는 협소한 차원에서 머문다면, 대중과의 일회적인 연대는 가능하지만 지속적인 연대의 장을 열기엔 내용적으로 협소해져서 자칭 고립되는 수가 나온다. 현재의 쌍차의 투쟁이 고립되고, 대중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협소한 내용으로 나오고 잇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재능은 운이 좋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엔 기륭전자의 전철로 돌아갈 수 있다. 아직도 진행 중이다.

 

“우리가 창조해야 하는 것은 사회운동과 사회의 모든 상이한 구성원이 다른 데서 볼 수 있는 이견을 접어두고 집결할 수 있는 장소다. 단지 한 점, 실업 반대라는 곳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때부터 토론이나 회의등도 좋지만 우선 행동을 해야 한다.”(프랑스 실업자운동 중에서 P160)

 

“세종=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사실상 실업'에 해당하는 사람이 39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취업준비생 수가 1년 전보다 급증했다. 4일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로는 사실상 실업자가 지난해 11월 389만7천명에 달했다. `사실상 실업'은 통계청의 공식 집계에 들어가지 않지만, 실업과 마찬가지인 사람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개념이다. “ 올해 초 발표한 실업률이다. 390만 명이 (잠재적)실업자로 나타났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7월의 실업률은 3.1%라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실업률이 3%대면 완전 고용에 가깝다. “통계청은 조사 직전 1주일 동안 일을 하지 못했고,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을 했고, 일자리가 있으면 무조건 일할 의사가 있는 15세 이상 인구만 실업자로 간주한다. 이 때문에 집이나 학원·고시원 등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은 정부 집계 실업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구직 신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취업 준비자'로 분류하는 사람은 9월 현재 57만5000명에 이른다.”(조선일보 2011.10.13.) “통계청은 우리나라 15세 이상을 취업자, 실업자, 비(非)경제활동인구 등 3가지로 분류한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실업자'가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고 비경제활동인구에 숨어 있어 실업률을 낮추는 원인이 된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조선일보 201.10.13.) 한국 사회에선 취업에 뜻이 없어 주로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집단인 니트족이 2011년 100만 명을 돌파 했다(한국노동연구원. 2012년 4월 12일 발표). “비현실적인 실업률보다는 고용률(15세 이상 생산가능인구 중 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고용시장을 더 잘 반영한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고용률은 63.3%였다. 15세 이상 인구 중 이런저런 이유로 일자리가 없는 사람이 10명 중 4명쯤 된다는 뜻이다.”(조선일보.2011.10.13.)

 

정리해고, 자본의 이동 및 폐쇄, 자영업(자영업자의 비율이 31.8%로서 OECD 가맹국의 평균의 두 배나 된다. 일본은 10%, 미국은 7.2%로 낮은 편이며 – 조선일보 2013년 4월 29일 – 갈수록 수익성의 악화로 고전 하고 있다)의 파산 등등으로 실업자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안고 살아가는 한 실업자들에게 인간답게 살아 갈수 있게 물질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노동의 권리를 해복 시켜야하고, 빈곤에서 추방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부의 재분배를 들고 나와야 한다.

 

행동의 방식은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실업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실업자 맞이 · 의견 듣고 대화하기, 식사제공, 일자리 모색, 무료 의술 제공, 정보 제공 및 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신문 전파 등등으로 시작 되어야 하며, 실업자들의 자신의 현재적 위치를 깨달게 만들어야 한다. 실업자 운동의 조직은 실업자만 있어서는 안 된다. 실업자들만의 조직이 건설 되었을 땐 외부로부터의 충격을 분산시키고 약화시키기 힘들며, 고립된 특수 집단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운동권 단체들이 그러하다. 실업자들은 직업 훈련도 받아야 하고,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업자들에게 정보도 제공 해주어야 한다. 정부가 제공하는 무료직업학교에서 기술을 받을 수 있는 정보, 취업상담을 해주는 일자리 센터 등등 존재하지만 그것은 대부분이 저임금의 노동을 조건으로 하는 곳이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치단체들은 실업자운동의 시각을 제대로 정립해야한다.

 

첫 번째로 완전고용의 의미로 다가서는 것에 반대를 해야 한다. 노동은 권리이지만 의무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노동에 동참할 수는 없다. 이미 높은 생산력과 설비의 자동화로 인간 노동력의 사용은 많이 사장되어 있으며, 그의 노동을 사회문화적인 발전에 이바지 시켜야 할 것이다. 사회적인 노동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선 자본의 잉여의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이다. 완전 고용의 의미를 나타나고자 한다면, 일자리를 늘리고, 노동시간의 축소를 통한 방식이다. 일자리를 늘린다는 것은 사회적인 한계가 있다. 공공근로라는 것이 일자리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노동시간의 축소를 통한 일자리 확충도 전체 실업자의 일자리가 생길 정도의 양이 나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몇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주어진다. 생산지향적인 내용으로 경제가 운영되어 버린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문제는 생산이 목적이 아닌 인간다운 삶의 존엄성과 방향성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생산의 목적이 소비를 위한 것이듯, 생산의 소비자가 소비자의 본연의 모습으로, 생산과 소비의 모순을 지향하는 사회의 첫걸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선 생산이 아닌 소비의 개념으로 노동의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바로 거기서 소득의 재분재의 개념이 나오는 것이다. 기존의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이 생산을 위주로 한 계획경제였기 때문에 중앙에서의 생산의 통제를 실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사고하였다면, 앞으로는 인간적인 삶을 보장 받기 위한 소득의 재분배 및 실제적인 지위와 실 임금이 보장되는 무기한의 진정한 일자리라는 개념으로 대체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의 문제는 두 번째의 이야기로 넘어가서 이윤 창출을 위한 고용이다. 공공근로의 의미는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한 복지 개념의 일자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지방재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비정규직(1년을 기준으로 계약 단위가 3개월 이젠 4개월로 바뀌었지만, 2번의 취업기회를 주는 것이다)의 양산이다. 계약직이 무기 계약직으로 변한다고 해서 공공근로로 일하는 많은 대중들은 최저임금으로, 실업수당을 받지 못하는 변형근로로 인간적인 처우를 받지 못하고 항의도 원천 봉쇄한다. 공무원의 형식적인 직함을 가졌지만 지방 공무원으로서 일을 하고도 공무원에 준하는 급여는 언강생심이며, 열악한 지반재정(?)을 돕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지방행정에서도 재정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싶어 하는 방식이지만, 이는 또 다른 착취의 형태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적인 문제가 공무 행정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는 근거이다. 지방 공무행정에서도 이윤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해결능력에 대한 의문점이 나타난다. 사회적인 요구는 무한하지만 사회의 복지라는 개념은 공무행정 – 공무원들도 정규직 무기계약직 계약직 공공근로의 형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 에서 이미 자본주의적 논리에 움직이고 있는 상태에선 해결능력의 결핍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시장제도나 공공부문의 기능은 자신들의 서비스를 점점 더 제한적이고 특정한 기능성으로 국한 시키는 경향은 이윤을 위한 규정을 만들고, 그 규정에 명시된 것만 제공 하는 것이다. 생산 우선주의적인 사회인 자본주의는 노동의 일자리는 한계가 있기에 자본주의적 노동이 아닌 인간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만드는 그런 일을 찾아 나서게 만들어야 한다. 진정한 사회적인 요구를 찾아야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임금노동자의 지위를 구축하고 장기실업을 없애는데 그 의미를 찾는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사회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주체로 선다는 것은 생산위주의 사회에서 필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노동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에 어떠한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지 문제와 대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런 내용을 가지고 현실적인 대안을 미래 사회와 연계, 즉 매개적인 역할을 할 고리를 찾아야 한다. 사회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의무다.

 

나) 실업자 운동의 대안에 대한 생각

 

자본주의 사회에선 공공재와 사적 소유를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강요한다. 사적 소유 특히나 이윤을 창출 할 수 있는 공공재라도 사적소유로 만들어 자신들의 잉여창출에 기여 시킨다. 국유화되어 있지만 신자유주의 바람은 자본의 논리를 강요하면서 민(사)유화를 시킴을 정당화 한다.

 

공공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선 공공재가 아닌 잉여의 창출의 한 공간으로 자리 잡은 병원, 학교, 전화통신, 전기, 상수도, 교통에 대한 사유화에 반대를 하며, 공공부문(국유화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으로 원상복귀 해야 한다. 공공재에 대한 자본주의적 잉여창출을 반대하며, 자본에 종속되는 노동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노동으로서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자본의 잉여에 충실한 것이 아닌 대중들과 공유하여 나누어 사용할 수 있는 사회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을 통한 일자리를 제공 받아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대중과 결합을 해야 하나 그 대부분은 소유권에 대한 것으로 귀착되게 만들어 국유화냐, 민(사)유화냐의 의미를 두지만 우리에겐 소유가 아니라 실 지배력을 행사 할 수 있는 노동자 자주관리(통제)를 가지고 투쟁의 고리를 갖는다. 그러한 것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사회의 사적 소유에 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

 

공공재는 (잠재적)실업자들에겐 무상으로 보급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현실이라고 하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실업의 상태에선 공공재의 무상서비스가 없다면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전은 일시적으로 겨울에 한해서 일부 극빈층에 대해 전기요금 체납에 단전을 시키지 않는다고 하지만 수입이 적은 사람들의 다른 부류들은 그것도 하나의 벅찬 과제다. 수입이 최저 생계비도 못하는 모든 가정에는 수도 가스 전기 교통 통신 의료 교육에 대해서 무료로 사용하게 해야 한다. 수입이 없거나 적은 가정들을 위해서 이러한 투쟁을 전개 나가야 한다.

 

두 번째의 방식으로 우리의 투쟁은 사회복지의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인 보장 없이 실업자들은 제대로 된수입이 없이 혹독한 계절을 보내야 한다. 벌써부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가을장마가 지나가고 있다. 그래프에서 나왔듯이 한국의정부의 사회보장비지출은 7.7%밖에 안 된다. 사회보장의 지출이 적다는 것은 한국정부는 신자유주의 바람의 최선봉에 있음을, 작은 정부실현에 앞장 서는 것을 의미한다. 역으로 가장이 실직이나 기타 문제로 경제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 가정은 그러한 부문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더라도 힘들 것이며, 대부분의 가정은 헤쳐 나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가족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최고의 보육시설임에도 불구하고 편부모가정에서 아이들은 기르지 못해 보육센터(어린이 집)에 맡겨놓는 일이 이젠 당연한 일이 되었다.

 

수입이 없는데 지출은 고정되어 있으면 거리로 나가라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수입이 없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삶을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수입이 없다면 수입을 만들면 된다고 하지만, 그 수입을 어디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 실업자들이기 때문이다. 수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무능력한자라고 낙인을 찍는 사회에선 죄인으로 사회에 부적응하는 자로 만든다.

 

수입을 확보하는 것은 취직을 하는 것이다. 취직은 일자리가 존재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벗어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향의 길에서, 자본의 노동의 굴레를 벗어난 일자리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즉 일자리 나눔을 위한 노동시간의 단축 – 대부분의 서구자본주의 국가들에선 이 내용이 임시직과 파트타임의 연장에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의 개념이 아니라, 소규모 자영업자들을 중심으로 생활협동조합을 건설하여 유통에서 거대자본과의 경쟁 및 일자리 창출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는 환경과 일상생활주변(개인에 대한 봉사직, 교육기관 보조, 보건활동, 연로자 가택 방문 보조 등등)의 부분을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정부의 축소 운영으로 줄어든 복지예산을 확대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문화 활동 활성화를 시켜야 한다. 현재처럼 전시행정과 지역의 잉여생산물을 판매하고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문화를 발굴 보전하고, 놀이나 운동, 문화 활동을 개발함으로써 지역 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것이다. 그 외적으로 법률상담, 중재, 정부의 재정중단으로 사람들에겐 필요한 것이지만 기업의 이윤의 논리에 밀려 중단된 사업들 등등의 것들이 많이 산적해 있다. 이런 것들을 중심으로 비록 현 시기에 어렵다고 할지라도 자본가 세상의 국가라 할지라도 먹고 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하고, 받게 만들어야 한다. 국가에 대한 재정적인 종속이 아니라, 부의 재분배적 투쟁을 전개 해 가면서 정보의 교류의 창을 확대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찾아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는 어둡다. 어두운 곳에서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수동적인 인간들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야하는, 배가 고프면 눈치라는 것을 모르고 도둑질을 해서라도, 자신의 노동력이 착취당한다면 자본가에게 항의를 하고 파업을 해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하는 그런 노동자 그런 무산계급으로 커야한다. 그런 방식으로 실업자운동의 발전을 찾아 봐야 한다.

 

6. 맺는말

 

노동계급의 투쟁은 언제든지 생존권에서적인 문제부터 나타나며 그 끝은 정치투쟁으로 막을 내린다. 정치권력을 잡은 계급이 앞으로의 사회를 이끌어 나갈 것이며, 그 목적성을 가진 계급만이 목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생존권적인 문제를 가지고 정치투쟁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 갈 수는 있지만 준비를 하지 못한 계급은 자신의 힘을 자신을 믿고 따라 준다고 판단되는 계급에게 전가시켜 피지배계급은 또 다른 계급에게 종속을 당한다. 노동대중이 진정한 힘을 가지려면 권력을 장악해야하고 권력을 장악하고자 한다면 현 시기에서 자신의 의지를 다른 계급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중간에 동요하는 계급을 노동계급의 편으로 끌어들이던지 아니면, 적대계급에게 동조를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으려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져야 하며 투쟁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가져야 한다.

 

본인은 이 글에서 두 가지전선이 걸쳐 있음을 제시했다. 첫째가 현장의 차별철폐 및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 그것을 하기 위해선 현장에서 노동자가 권력을 장악해야하는 것이며, 이는 노동자통제(자주관리)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음을 이야기 했다. 물론 현재 자주관리가 이루어진 일부 현장에서 관료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관료적인 모습은 회사의 모든 영업비밀폐지 및 지역적 공개 그리고 노동자들에 의한 소환 파면권으로 자신들의 관리능력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두 번째로는 실업자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미 유럽은 90년대 중후반부터 실업률이 10%가 넘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있으며, 대중적 분위기가 매우 동조적이며 협조적인 분위기를 가졌다. 10%가 넘는 실업률은 대중의 위기의식을 고조시켰고, 운동에 대한 연대감으로 확산 된 것이다. 한국의 실업률은 잠재적인 실업률까지 포함을 한다면 10%이미 넘어 선지 오래다. 그것을 왜곡한 것은 통계청의 조작이고 노노갈등이다. 비정규직 철폐 투쟁과 해고자원대복직투쟁이 노동자들이 모이는 곳에선 같은 장소의 다른 얼굴로 나타나 투쟁하는 노동자와 구경하거나 방관하는 노동자로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한다.

 

한국은 수출지향적인 나라다. 대외의존도가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대외의 충격에 더욱 약화 되고 수출을 위해선 더 많은 노동자의 착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착취의 일선엔 비정규직이 있지만 정규직조차 작취를 당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누구보다 덜할 뿐이다. 수출을 통한 이윤의 확대는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다. 또한 자본의 수출과 해외의 재투자는 공장 내의 노동자간의 갈등에서 지역 간 나라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새로운 민족주의정신은 또 다른 나찌즘을 만든다. 사회주의자들이 경계할 일이다.

 

부르주아는 힘은 뭉쳐있고 그들의 자신들 간의 협조 및 정보를 공유하여 피지배계급을 지배할 수 있는 형태이고 프롤레타리아트는 흩어져 있으며, 정보를 언론의 교묘한 통제로 제대로 연결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현재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정인 것이다. 약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지배계급을 분열시키고 그들의 힘을 약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국정원의 정치 개입과 개인사생활을 사찰한 것, – 그 부분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전혀 건들지 못하고 있다. 왜? - 그리고 민주당의 원내외의 투쟁, 박근혜정권의 소통의 먹구름 등등은 지배계급의 정치적인 분열을 보여주고 그 틈새가 진보세력에겐 햇살로 다가설 것이다. 통상임금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남아 있지만, 어떻게 관철이 되든지 노동계급운동에 영향을 줄 것이지만 지배계급의 정치적인 결전에 의한 공백을 무산계급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에 따라 더 넓은 운신의 폭이 결정 된다.

 

혁명은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꿈은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그것에 맞는 행동강령의 적절한 제시 그리고 제일 중요한 대중의 자주성과 주체성의 확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지배계급이 이야기하는 또는 주사파들이 이야기하는 대중의 창의적이고 자주성에 대해선 같은 글이지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그들에게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한에 있어서의 자주성이요, 주체성이며, 자기계발이다. 즉 대중위에서 자리를 잡은 누가 존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나오는 지배사상의 변형이다.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는 그런 사고방식을 제거하는 것이다. 대중의 위에서 지시 감독하는 사회가 만들어져서는 안 되고 대중 스스로가 지휘하는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혁명을 승리하기위해선 대중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높은 생산력은 대중에게 분배되고 소비되는 것을 전제로 새로운 사회의 터전이 나오는 것이다. 생산에 의지해서만 안 되고 생산과 소비의 모순이 계급사회의 모순임을 깨닫고, 분배를 위한 대중의 투쟁을 구걸이나, 애운을 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인 스스로 기업을 유지 발전하여 자신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토대로 나가는 방향성을 잡아야한다. 혁명은 스스로 발전시키는 계급만인 자신들의 새로운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우뚝 들어 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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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7 06:31 2013/09/27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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