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금봉, 빈민출신노동자 그리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1호
차금봉은 1889년에 경성 화천동(和泉洞)에서 빈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인전기에 흔하게 나타나는 그럴싸한 태몽이 있었다거나 어렸을 때 아주 빼어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는 14살에 미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역 철도기관의 화부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얼마 뒤에 기관사가 되었다. 그는 집안도 보잘 것 없고 그다지 배운 것도 없이 어린 나이에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차금봉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운동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계기는 1919년 3.1운동이었다. 차금봉은 3.1운동이라는 '투쟁의 학교'를 졸업하면서 선진노동자로 자라났다. 3월 1일부터 두달 남짓 격렬하게 일어났던 3.1운동에서 노동계급도 빠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저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하거나 조직적인 파업투쟁을 벌였다. 차금봉은 1919년 노동자 시위와 파업을 계획하다가 그것이 들통 나 해고된 뒤 곧바로 용산철도공장, 정미공장, 마차부 파업을 조직했다. 3월 27일 서울역 앞에서 '노동대회', '조선독립'이라는 큰 깃발을 앞세우고 많은 노동자가 시위운동을 할 때 차금봉이 그것을 지도했다. 조선에서 맨 처음 일어나 파업시위로 알려진 이 3월 27일 투쟁에는 철도국 노동자 800명이 참가했는데 차금봉 같은 선진노동자가 투쟁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200만이 넘는 민중이 참가했던 3.1운동은 끝내 실패했다. 3.1운동에서 민중이 크게 저항했는데도 일제를 물리칠 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또 '문화정치'라는 거짓 개량에 휩쓸려 친일파가 되는 사람도 늘어났다. 일제가 휘두르는 '채찍'에 겁먹었던 그들은 일제가 내미는 '당근'에 더욱 솔깃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그토록 많은 민중이 일제에 격렬하게 맞서 싸웠다는 사실에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차금봉처럼 3.1운동을 '투쟁의 기억'으로 간직한 채, 더욱 힘차게 민족해방운동에 나섰던 운동가들은 새로운 운동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는 새로운 운동이념으로 사회주의가 폭넓게 받아들여졌으며 조직의 시대라고 일컬을 만큼 노동자 농민단체가 많이 생겼다.

1920년대의 노동단체의 첫걸음은 1920년 4월 11일에 서울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에서 조직된 노동공제회에서 시작되었다. 노동공제회 발기인 가운데 한사람인 차금봉은 초대 교양부 간사가 되었다. 이미 그는 1920년 2월에 조선노동문제연구회 제1차 총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조직적인 노동운동에 첫발을 디뎠었다. 그는 1921년 3월, 노동공제회 제2회 정기총회 예비총회에서 61명의 대표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뽑혔다. 차금봉은 최상덕과 함께 노동자 출신을 대표하여 조선노동공제회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파벌의 활동과 복잡하게 얽혀 있던 노동공제회 지도부는 1922년 가을에 걷잡을 수 없는 분열에 휩싸였다. 차금봉 등이 지도부를 차지하자 윤덕병 등의 또 다른 그룹은 1922년 10월에 노동공제회 해체를 선언하고 노동연맹회를 창립했다. 한 그룹이 떨어져 나간 노동공제회는 노동연맹회에 대립하면서 1924년 노동총동맹에 합류할 때까지 존재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이 무렵 차금봉은 노동공제회를 지키면서 '조선노동공제회에 대하여', '현하의 조선사회' 등의 강연을 했다. 차금봉의 강연은 많은 노동자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가 노동자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말솜씨 때문이 아니라 노동현실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 때문이다. 그가 노동자 출신이라는 사실이 노동자들에게 큰 호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다른 보기를 들면, 노동공제회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용산철도공장 노동자 김길인이 한 즉흥연설은 많은 사람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차금봉은 노농총동맹을 조직하는 데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는 1924년 4월 18일 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 7명 기초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 1920년대 중반에 가까워질수록 곳곳에서 노동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이 크게 성장하고 노동자 농민들의 조직이 잇달아 나타났다. 이 조직들은 전국 조직으로 모아야 한다는 요구가 차츰 커졌고 드디어 1924년 4월 20일에는 노농총동맹의 닻을 올리게 된 것이다. 이날 열린 회의에서 차금봉은 50명 중앙위원 가운데 한사람이 되었다. 일제는 노농총동맹을 매우 경계했다.

일제가 노농총동맹을 '공산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파악한 것이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노농총동맹의 강령은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고" "철저하게 자본가계급과 투쟁하며" "노동자 계급의 복리를 증진하고 경제적 향상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노농총동맹이라는 공개된 노동조직이 '공산주의 선전기관"의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었다. 노농총동맹을 조직하기 얼마 전에도 전조선노동대회장에 낫과 망치를 엇걸어 그린 휘장이 나타날 만큼 사회 분위기가 급진적이었고 사회주의 영향이 컸다.
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을 때 그 산하에 260여 단체를 거느리고 회원 총수는 5만 3천명이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노농총동맹은 탄압속에서도 합법투쟁을 조직하려 했으나 일제는 이 동맹의 활동을 봉쇄해 버렸다. 강연회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차금봉을 비롯한 서울계와 북풍회 그리고 화요회계 사회주의자가 두루 참가하여 조직한 노농총동맹은 각 그룹 사이의 결합이 느슨했다. 또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노동자와 농민을 한 조직으로 묶는 것도 한계였다. 그럼에도 노농총동맹 임시대회에서 민족개량주의 사상을 선전하던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결의하자 동아일보의 모든 중역이 사표를 내야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다. 차금봉은 노농총동맹에 적극 참여하여 간부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1925년 10월에는 을축청년회의 집행위원이 되기도 했다.

노동공제회부터 노농총동맹에 이르기까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조직형태와 노선이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발전하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제대로 발맞추기 위해 노농총동맹을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으로 분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여기에는 조선공산당의 지도도 있었다. 일제가 노농총동맹을 탄압하고 조선공산당원을 검거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1927년 9월에 두 조직으로 분리되었다. 1926년 '3차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1927년 1월에 경기도를 책임지는 자리를 맡았던 차금봉은 노농총동맹 분립과정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1927년 8월 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회에서 뽑은 노동총동맹과 농민총동맹 선거위원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물론 차금봉은 노동운동 쪽을 맡은 노총부위원이었다.
중앙기구 부서를 정비한 노동총동맹은 일제의 갖가지 탄압 속에서도 적잖은 파업을 지도하거나 지원했다. 차금봉도 1927년 11월 밀양 양화직공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파업을 선동하고 확대시킨 혐의로 일본 경찰에 검속되기도 했다. 1928년 3월, 그는 신간회 경서지부 설립을 주도하여 설립대회에서 간사가 되었으며 신간회 전국대회 출석대표위원으로 뽑혔다. 조선공산당의 당원이 된 그는 신문배달로 생활을 하면서 신문배달부를 조직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신문배달총동맹을 결성하고 그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28년 3월은 차금봉에게는 특별한 때이다. 이때 그는 '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와 경기도 책임자를 함께 맡게 되었다. 철도 노동자로 출발한 그가 비합법 전위조직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1925년 4월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조선공산당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이론에서 실천으로 옮기면서 거둔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거듭 무너졌지만 그때마다 당을 다시 만들어 일제에 맞섰는데, 차금봉이 바로 마지막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를 맡은 것이다. '4차 조선공산당'은 신간회와 근우회 등에 관심을 쏟았으며, '조선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테제' 등을 마련하여 자신의 혁명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4차 조선공산당'은 5개월이 채 안되어 170여명이 검거됨으로써 활동이 거의 마비되고 말았다. 7월에 당중앙 간부와 지방간부 대부분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차금봉은 오사카를 거쳐 도쿄로 몸을 피했으나 일본 경찰에 곧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것이다.

차금봉은 일제의 고문으로 살해되었다고 해야 정확하다. 그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제 경찰에 맞서 훌륭한 '수사투쟁'을 벌였다. {차금봉 조서』에는 그의 마지막 투쟁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질문)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서 무엇을 했나?
답변) 공산당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질문) 그렇다면 너는 책임비서로서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는가?
답변) 어떤 방침이나 계획도 없었다.
질문) 공산당의 선언이나 강령을 아는가?
답변) 모른다.
출처. 최규진 「차금봉, 빈민출신노동자 그리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역사 속의 미래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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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0 18:50 2005/09/2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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