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회문화적인 문제(문화혁명)


  자신과의 경쟁상대는 자신뿐이없다라는 사고방식으로 무장하여 개인적인 고뇌를 강조하면서 대중들의 전진을 가로막고 현재의 위치를 강화 발전시키기 위한 주인 된 자들의 자의식은 쁘띠부르주아들의 여과장치를 통하여 계급의식을 무력화시키면서 부르주아들의 세상을 확대강화 시킨다. 


혁명의 권위는 무엇으로 세워지는가? 혁명에 대한 열정도 아니며,  강력한 무장으로 인한 강한 물리력으로 대중을 압박할 때 사용되는 것도 아니며,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며, 대중의 대다수가 그들을 따르고 함께 할 때 자신들의 힘에 스스로 인정하고 동참하여 대중의 힘으로 굳건히 지켜 나갈 때, 그때 비로소 권위는 확립이 된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앞에는 산적한 일들이 쌓여 있다. 혁명을 형식적인 위치에서 내용으로 채워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용의 핵심은 6천여 년 간의 계급사회에서의 습관화된 대중의  피지배계급의식으로 인한 비자발적이며, 주체적이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앉아 콜럼버스의 달걀을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따라하는 수동적인 모습을  부셔나가야 하는 것이다. 연대사회의 글 중에서 일부 채용을 하면 "높은 원리를 깨친 민중이 늘어나야 변혁의 주체가 형성된다. 그러기 때문에 21세기의 사회주의는 ‘인간 중심의’ ‘사회문화적 변혁이 전제되는’ ‘세계변혁을 함께 추구하는’ 그런 사회

주의여야 한다.”(이미 낡아버린 조잡스런 운동론을 넘어서기 중에서)" 이것은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힘을 대중과 함께 전유하고자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이것은 계급사회에서 계급사회에로의 이전에 따르는 문화적인 충돌과는 다른 새로운 혁명을 제시하며, 사회주의혁명의 유지를 위한 또 다른 혁명인 문화혁명을 제시되는 예이다.


계급사회의 모든 억압의 고리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 사회를 지탱했던 근거를 제거하는 것이다. 계급사회가 유지되고 발전되어 왔던 것은 피지배계급이 자신들의 발전상을 인식하지 못하여 대안을 찾지 못하고 그 안에 자신을 매몰시키며, 자신과 가족의 풍부함 삶으로 구원을 받고자 노력하면서 사회에 존재하는 인간은 사회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며,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자신만을 강조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 이데올로기는 개인주의다. 자신과의 경쟁상대는 자신뿐이없다라는 사고방식으로 무장하여 개인적인 고뇌를 강조하면서 대중들의 전진을 가로막고 현재의 위치를 강화 발전시키기 위한 주인 된 자들의 자의식은 쁘띠부르주아들의 여과장치를 통하여 계급의식을 무력화시키면서 부르주아들의 세상을 확대강화 시킨다. 지배계급은 자신의 권위를 확대 강화한다. 계급사회의 모든 권위주의는 지배계급의 존재를 확인 시켜주는 것이며, 이를 재생산하는 것은 사회속의  가족이 아니라 개인들이 만들어낸 가족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는 집중화된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지만, 경제적인 부는 하나로 뭉치고 모여든다.  이윤의 극대화를 통한 부의 창출은 쁘띠부르주아에게 타락의 길로 가기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쁘띠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진을 막고 그에 대한 물질적이 보상을 받기 원한다. 자본주의사회의 안정을 위한 토대는 그 안에 안주하고자 하는 부르주아와 그의 하수인인 쁘띠부르주아이며 그 핵심은 가장의 위치에서 보상이나 위로를 받기위한 하나의 휴식처로서의 가족에 있다. 휴식처는 권위주의의 온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계급사회의 권위주의적인 형태의 모든 억압은 사라져야한다. 현모양처, 장남으로서의 의무, 이주노동자라는 이유, 여성이라는 의미, 가장의 의무라는 형태의 가족애를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계급사회의  형태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의미로 확대 되어 내 민족, 내가 속한 국가, 나를 위한 직장이라는 속에서 나 또는 내가 소속된 조직에 애착심을 심화 시켜주고, 그 외적인 부분에 대한 배타심을 심어주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기본적인 토양으로서 나타나는 가족은 경제적인 내용에 조응하여 발전의 모습을 유지해 왔다. 씨족사회 부족사회 농경시대의 대가족의 형태에서 산업화사회에서의 핵가족화에 이르기까지 가족은 특정한 경제구조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적 구조에서의 이데올로기의 생산, 유지, 확대의 중심적인 제공 처인 가족은 해체가 되어야 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 되어야 하는 길목에 서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의 해체는 맹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모습의 한 형태는 맞벌이 부부이다. 계급사회의 본질상 가족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인 참여는 사회의 모순적인 부분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면서 스스로를 여성해방의 입장을 가지게 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다.



가족에서의 아버지는 경제적인 책임을 지고 가정을 위한다는 삶을 살아가고, 일반적인 경우에서처럼 전업주부의 어머니는 자신이 발생하는 잉여노동을 가족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 남편의 사상을 여태껏 해왔던 관습적인 모습에서와 같이 자녀들에게 주입을 시키고 그 안에 존재하는 계급사회의 억압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관용과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한다. 자신들의 경제적, 물질적인 삶을 더 낳은 조건으로 향상 시키고자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거나 퇴보를 한다. 더 낳은 삶의 보상의 꿈은 가족의 원치 않은  해체(또는 이혼)를 낳고, 기러기 아빠를 양산하거나, 가족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자녀들에 대한 권위적인 폭압을 제공하기도 한다.



권위주의적 가족의 해체를 위해서는 경제적인 삶의 향상, 즉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청소년들의 물질적인 부모에 대한 의존을 없애야하지만 계급사회의 틀 속에서는 가족의 의존이라는 틀로 묶어 그 곳에 안주시키고자 하며, 특히 여성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차별로 인하여 아주 특별한 능력이 인정을 받거나  운이 좋아서 커리어 우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서비스업으로 직업을 갖던지, 낮은 임금에 만족하여 그 안에 존속하던지, 소규모 장사를 하던지 마지막으로는 성매매를 하던지 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을 것을 강요받는다. 노력하는 사람은 실력 있는 사람을 못 이기며, 실력이 있는 사람은 뒷줄이 있는 사람을 못 이기며, 뒷줄이 있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을 못이기는 법이다. 운은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기회를 잘 잡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배부른 자는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가족의 부양의 의무는 부르주아적 사회의 도덕적인 이데올로기를 제공을 하면서 민족과 국가와 하나의 자신이 속해져 있는 경제적인 단체 즉 회사라는 것은 동일시하게 만들어 나가면서 국가와 기업이 살아야 내가산다라는 이데올로기를 유포하면서 자신의 기초를 제공받는다. 나의 굶주림은 사회적 구조에 의한 것이 아니며, 개인적인 무능력이라고 주장을 하며, 이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AIDS보다 무서운 것은 굶주림이다.


인류해방의 길은 계급사회의 모든 억압을 해체하는 것이다. 남녀차별, 장애인차별, 인종차별, 등등의 모습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피지배계급에 대한 차별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물기 때문에 도망갈 자리를 만들어 주고, 도망가지 못하게 환상을 심어 주는 것이다. 인류의 해방은 여성해방으로 부터 시작된다. 가장의 권위, 부모의 이해관계 및 의무, 자식으로서의 가져야하는 의무 및 권리, 형제자매의 권한 등등의 모습에서 남자는 현실에선 직장으로 여자의 모습은 부엌으로 표출되어지며, 모든 권력의 상징의 정점은 왕이며, 가족의 최고지배자로서 가장의 형상이 나타난다. 가족은 사회발전의 모습을 투영한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가족에서부터 시작되고 유지가 되며, 사회에서는 약자이며, 보호를 받아야 하며, 보호를 받아야하는 개체이기에 남자에 의한 보호비 명목으로 갈취가 이루어진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여자이기 때문에  사라진다. 부르주아적 법적으로는 한 지역에 사는 경제공동체적 삶을 영위하지만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는 자신들의 노동행위의 결과에서 보호비 명목을 빼주고 나머지를 가져간다. 이러한 차별은 여성을 하나의 주체로 나가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여성해방을 이루기 위한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조건은 몇가지을 제시한다.


1)경제적 자립


사람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기 위해서, 사회의 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위치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노동을 해야 한다.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계급사회에서는 먹고살기 위함이고, 공동체사회에서는 사회의 경제적 풍요를 위함이다. 사회의 한 성원이 현재의 계급사회에서 자신의 삶이 보장받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빈곤함이 없어야 한다.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상품의 교환을 위한 화폐를 신처럼 받들어 모시고 살기 위해서라도 노동은 현실을 헤쳐 가는 기초수단인 것이다. 공동체사회의 특성상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원하는 만큼 분배가 이루어'지지만  공동체사회로의 이행과정과 현재의 계급사회 형태에서 개인이 사회에 대한 자립된 공간을 확보하고자 한다면 경제적인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인간이 사람으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자본주의사회는 산업예비군의 창출을 통하여 차별을 공식화 했지만, 현재의 자본주의사회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하여 산업시설의 이전을 자신의 무기로, 노동의 유연화는 총알로 만들어 대량의 실업 군을 만들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사이를 불안하게 조성하기도 하며, 서로간의 차별을 강조시키며 노동자간의 분열을 조성시키고, 노동관료의 육성을 통하여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를 확산 시켰다. 남과 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조건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같은 임금을 받을 수가 없고, 남자는 가정을 책임지고(여성은 가정에 대한 책임은 없는지!)있는 존재이기에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 같은 지역 또는 같은 국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지역이나 타국 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의 차별적인 임금을 적용한다는 의미, 정규직과 하청회사를 통하여 들어온 비정규직사원이라는 차이에서의 차별적인 요인들의 적용의 의미 등은 가진 자들의 특권을 남발하여 차별에 대한 저항을 없애기 위한 지배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체제가 유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여성은 사회적으로 약자이기전에 가장 많은 착취를 당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성의 가정에서의 생활은 자신의 잉여노동을 사랑이라는 틀에서 의무를 강제하고, 권리를 삭제당하며, 자녀와 남편을 위한 무한노동에 시달린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의 잉여가치를 확대하는데 일조를 한다. 자신의 임금노예를 부려먹고자 한다면 집안의 내조자가 없다면 그 만큼의 보조를 해주어야하며  이는 이윤을 축소시킨다. 남·녀의 차별로 인하여 여성의 경제적 자립능력은 사회에서 빼앗아 가며, 그들의 지위를 낮게 만들어 여성을 가정으로 종속시킨다. 경제적 자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임금의 구조는 여성을 사회 속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잡아 갈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결혼에서의 이혼, 이혼에 따르는 경제적인 곤궁이 존재해서는 안 되며, 이혼의 자유가 존재하는 만큼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자립에 날개를 달아 주어야 한다. 자본주의 발전은 이윤의 극대화 속에서 차별적인 임금을 유지하고, 대중의 상대적 절대적인 빈곤감을 이용하여 더 높은 강도의 노동을 요구하며 자유로운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부르주아들의 바램을 이루고 있어, 지역과 민족, 나라, 인종, 남녀에 따르는 차별적인 임금구조를 통하여, 형식적인 경제적인 자립을 보여준다.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는 대중의 분열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착취구조를 유지해야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차별의 철폐는 대중투쟁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혼의 증가는 자본주의사회의 또 하나의 모순으로 등장한다. 팔수 있는 것은 몸밖에 없는 대중에겐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부르주아적적 도덕심에 의해서조차도 타락적인 것으로 보이는 성매매를 지속적으로 강제 당한다. 인간이 즐기고 누려야 할 성을 즐기는 것이 아니고, 주머니를 채우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성의 상품화라고하기 보단 육체를 스스로 상품으로 만든다. 예전에는 마마나 호환이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이젠 상대적인 빈곤감, 굶주림이 더 두려운 것이다.


상품을 상품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노동자가 아님에도 성노동자라고 강조하는 상항까지의 발전은 자본주의의 발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의 육체를 성적으로 팔고자 한다는 것은 그들이 일할 수 있고, 인간적인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작업장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인간적인 삶을  구원받기 원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6시간노동제, 최저생활임금보장 그리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된다면 어느 누구든 지간에 사람으로서의 삶을 헤쳐 나가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일자리는 사회적인 생산활 동속에서 늘어날 것이며, 문화적인 향유는 즐거움을 만들어 간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사회에서 사회가 원하는 가치를 실현시켜야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이러한 가치는 부르주아의 주머니를 채워주는 가치를 실현시킬 때만이 그 에 대한 대가를 받고 자신의 능력을 내세울 수 있다. 어느 사회에서든지 인간이 인간으로서 영위를 하고자 한다면 그 사회의 가치실현에 복무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으로 실현이 된다. 여성이 어떠한 사회에서든지 자신의 지위를 유지나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부르주아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받은 임금, 노동의 대가를 가지고 자신의 상품가치를 치장 할 수 있으며,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가치가 없는 사람은 살아갈 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가치를 간직하는 여성은 대우를 받고 의무에서 벗어나 향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경우는 더욱더 확대가 된다. 남녀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고 능력만큼, 일한만큼 주어지는 평등한 조건은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을 심어주고, 여성을 한 가정의 가정부로서의 존재가 아닌 사회의 일원으로 강화시킨다. 여성으로서의 경제적인 자립은 그들의 기초적인 제공일 뿐이다. 여성은 가족의 내조가 아니라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부인과 자녀의 물질적 종속은 가부장적 사회의 특징이다. 이혼은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여성에겐 힘든 결정이며, 이 혼시에는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르주아의 법률에 부부별산제 또는 재산관리 공통제등을 내용으로 하고는 있지만 지속적인 경제활동을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엔 피폐해지는 삶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편이 죽었습니다. 10억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는 내용에서처럼 살아남은 사람의 삶을 위한 조치는 경제적인 활동, 금전적인 지위를 통한 가치가 존재하는 한,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아주 떳떳하게 방송을 탈수도 있는 것이다. 가족에서 예전과는 다르게 맞벌이 부부의 역할이 중요하게 등장을 하는 것은 이전과는 다르게 물질에 대한 투자를 하기 보다는 삶의 질이 그 만큼 떨어졌고, 그에 대한 보응의 차원으로 여성의 경제활동의 참여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전업주부의 경제활동의 참여는 가정의 경제적인 숨통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지만. 남·여 차별이 존재하는 한 더 많은 일을 가정에 쏟아 붓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의 활동으로 인하여 자신의 발언권을 강화시켜 나가면서 자신의 주장을 자신의 뜻에 맞게 각색을 할 수 있게 된다. 여성의 경제적이 자립은 여성을 사회의 약자가 아니라 하나의 성원으로 발돋움 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형태상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수 잇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확대 강조되며, 여성을 어머니, 아줌마의 모습에서 사회의 지도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갈 것이다. 


2)계급사회의 권위주의적 가족 해체


자식을 낳아서 부모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은 계급 사회적 이데올로기이다. 자신의 혈육에 대한 정은 누구나 존재한다. 정은 낳은 정만이 존재 하는 것이 아니다. 낳은 정으로 자식으로 보육하는 것이 아니라 낳은 자식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사회에 적응 시키는 것이 보육인 것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치장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의 형태로 변질된 육아 교육은 인간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계급사회의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한경쟁을 통해서 강한 자 - 엘리트를 양성하여 부르주아의 종속 화된 문화에 수용하게끔 강요한다. 자신이 못한 꿈을 자신의 희생이라는 명목으로 보육하게 되어 계급사회의 가장 억압받는 어머니라는 존재는 치맛바람을 일으켜 이루지 못한 사랑을 2대 또는 3대를  통해서라도 대리만족을 이루고자 노력하게 만든다.


부모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대리만족을 표출하는 수단으로서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정은 사교육열풍이라는 이름으로서 영재교육, 엘리트교육의 형식으로 교육의 빈부차이를 느끼게 만든다. 이들에 의한 교육은 체제 순응적이고 보수적이며 가족지향적일 수밖에 없으며, 자본주의사회의 기본적인 쁘띠부르주아 속성인 개인주의로 지향한다. 자신의 안일함을 유지하고자 상대방의 배려보다는 눈앞의 이익에 더욱 더 열을 올리며, 자신의 편안함을 위하여 약탈경제 및 억압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언제나 뒷전으로 물러나 관망하는 자세를 보여주며, 우유부단함과 소심함 때로는 광기적인 분노의 모습으로서 약자에겐 강하게 강자에겐 편안한 쉼터를 제공한다. 지배계급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모습에서 가장의 권위를 보여주고 자녀들은 사회적인 실천의 모습에서 경험적으로 배우게 된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좋은 것이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등등의 쁘띠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면서 자식이 순응하여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이 지상의 최대과제임을 상기시킨다. 너 같은 자식을 만들어봐야 부모마음을 안다는 것이 핵심내용이다. 여성의 현모양처는 최고의 미덕이며, 남자는 경제적인 부를 책임지고, 집안의 절대자로서 군림해야하며, 대를 이어 조상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하며, 국가와 민족의 작은 모습인 가족 간의 화합을 강조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의 길에 대한 어두움 전망을 보이게 한다. 이로서 가족은 현 지배질서의 저항의 의지를 막아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가족이 무너지면 사회가 문란해지고, 국가가 흔들린다는 명분은 계급사회의 가족의 형태는 그 사회 및 국가를 유지시켜주는 근간임을 보여준다. 계급사회 속에서 유지가 되어왔던 가족은 해체가 되어야 한다. 가부장적 사회의 핵심으로서 권력과 힘, 경제적 불평등으로 제시되고 있는 가족은 공동체사회로의 지향점에서 걸림돌로 남는다. 여성 해방의 전진을 가로막는 것은 계급사회의 가족인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육체적인 모습에서의 분할과는 다르게 경제적인 주체인 모습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고자 한다고 해도 6천여 년의 누적되어온 관습의 형태에서 사회적인 제약을 가족이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헤쳐 나가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제약을 2중 3중으로 막아서는 바리게이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착한소년과 참한 집안의 딸이라는 쁘띠부르주아의 이상은 종속적인 삶의 지향점을 제시하고, 강제성이라는 형식적인 틀을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른에 대한 존경심, 가족에 대한 명예를 도덕적으로 멍에를 씌우고 있기에 또 다른 물질적인 탄압의 형태를 띤다. 여성은 사회적인 요구를 결정해ㅡ 권리를 남편에게, 부모에게 떠맡기면서 스스로의  권익을 포기 해왔고, 계급사회의 도덕적인 가족관의 모습에서 맏며느리로서 하는 일과, 딸의 모습, 자녀의 어머님의 모습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무한히 착취당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다. 그것이 5 만 원권의 얼굴에 새겨진 초상화이며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부인으로서의 최고의 미덕임으로 남아 있으며, 이러한 관습과 전통은 새롭게 시작된 결혼생활을 하는 새색시의 마음에 앙금을 남긴다.


남한의 이혼율은 증가한다. 실제적으로 자유가 형식적으로 유지가 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혼율은 증가한다. 남녀의 역할이 맹아적인 형태가 이루어지며, 여성의 경제적인 참여가 적극화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선 이혼의 증가는 필연이다. 울타리에 갇혀있던 여성이 사회의 물을 먹고 차별대우에 항거를 하자마자, 권위주의적인 가족은 형식적인 남녀평등의 조건으로서 역할 분답이 이루어지지만, 남녀차별의 사회적인  구조상 넘어야할 벽을 넘지 못함으로서 나타나는 모순을 이혼의 증가라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농경사회에서의 결혼은 노동력의 증가를 가져오고, 성적인 부분의 합법적인 해소를 위한 장치를 통해서 여성에 대한 착취를 강화시켰지만 현대의 결혼은 또 다른 모습으로서의 표현되어진다.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개인주의적인 경향은 결혼의 가치를 서로의 소유권으로 발전시키면서 가족이나 부부간의 모습은 사랑이라는 형식 속에서 내용은 질투와 시기로 채워진다. 합법적인 형태의 결혼 생활은 합법적인 형태의 별거와 이혼이라는 형식으로 발전된다. 이혼의 핵심중의 하나는 성격차이다. 속궁합이 서로에게 맞지 않는 관계로 헤어지는 경우도 존재하겠지만, 서로간의 소유물이 자신의 뜻에 어긋난 행위가 존재할 땐 가차 없는 벌칙을 요구하며, 그 벌칙의 형태가 이혼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이혼은 증가하지 않는다. 계급사회에서의 결혼의 문제와는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이 사회는 계급사회에서의 차별을 철폐를 하고나가는 과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초기에는 결혼의 모습을 띄우며 이혼의 모습이 비추어지지만, 자신들의 성적 정신적인 만족을 위한 동반자적인 관계로 표출되고 서로의 어긋남은 어떠한 제제를 가하지 않고 암묵적인 합의를 통한 헤어짐이 존재한다.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며 종속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대등한 관계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서로의 소유물로서 존속되면서 가족의 사상이 유지가 되는 것은 무계급사회로 나가는 것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한다. 보수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계급사회의 근간을 제공하는 이러한 가족의 모습은 그 가족의 절대자를 위한 하나의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상태에서는 계급사회의 절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소련에서의 모습에서 사회주의로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계급사회의 가족관계를 강요하고 유지하는데 자신의 힘을 쓰고 그것으로 인한 사회주의의 발전은 영원한 숙제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가족의 해체는 가족의 행복한 삶을 충족시키기 위한 경제적 물질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필요하며 사회주의의 집산 화를 위한 기초를 제공 받을 것이다.


"가족의 폐지는 경제혁명을 수행할 사람 - 노동자, 피고용자, 농민 - 과 정확하게 관련된다. 바로 여기서 가족 유대의 보수적인 기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엄정하게 강한 가족정서는 혁명의 담당자에게 제동을 건다. 아내와 아이의 유대, 가정에 대한 사랑, 아주 초라할지라도 그가 갖게 되는 제한된 일상에 따르는 그의 경향 등은, 그가 인간의 재건이라는 혁명의 주요활동을 수행해야 한때 그를 다소 방해한다.······ 일상생활은 경제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은 경제보다 훨씬 덜 의식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낡은 가족의 붕괴는 새로운 관계의 영향에 가장 강렬히 노출된 계급의 최상층에 한정되지 않고 전위를 넘어서 더 멀리 까지 나아갔다는 것이 더욱 확실 해버렸다.······· 남편이나 아내는 점점 더 공적기능으로 빨려 들어갔으며, 이를 통해 가족이 그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파괴 되었다. 성장한 어린이는 집합체 속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가족유대와 사회유대사이의 경쟁이 생겨났다. 그러나 사회유대는 새롭고 활기 있고 막 생겨났지만, 그에 반해 가족유대는 일상생활의 모든 곳에, 심리구조의 모든 표현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가족의 주요한 결합 - 아내와 어린이를 지배하는 아버지의 경제권 - 의 지속적이고 전진적인 근절 뒤에서 생겨났다. 경제적인 속박이 깨지고, 그와 더불어 성계약도 깨졌다.  ······· 가족에 대해(?) 전기적 욕구 대신에 유아기적 의존 또는 병적 성 습관이 들어섰다. 성 에너지의 모든 힘을 부여 받았지만 생물학적으로 정상적인 오르가즘을 경험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이 파괴된 욕망이 들어섰다. 가족 구성원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미워했고, 자신들의 미움을 발작적인 사랑으로 그리고 감춰진 미움 속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서툴게 위장한 끈적거리는 의존으로 감추었다. 이런 어려움에 직면하여 여성은 성기 적으로 불구화 되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잇지 않았고, 가족에 대한 맹목적인 보호와 아이를 지배하는 대리만족을 포기 할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자신의 모든 생활을 성적으로 불구화한 이러한 여성은 아이의 양육에서 자신의 생활의 의미를 찾았다. 이러한 관계를 아이에게 한정하는 모든 것을 아내는 극심한 피해로 경험 하였고 스스로를 그 한정에 대항하여 지키는 방법을 알았다 .········  처음에 생활의 집합 화는 명령에 의해 위로부터 부과되었고 부모의 권위라는 사슬을 끊은 혁명적 집단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러나 가족유대의 금지는 보통사람이 집합 화를 향해 취하고 싶었던 각 단계에서, 우선 첫째로 자신의 무의식적인 가족적 의존과 갈망의 형식에서 작동 했다.(성혁명. 빌헬름 라이히 p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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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9 06:49 2008/02/09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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