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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활동가들은 여성주의에 대한 "저항"을 포기했을까.

자신의 위치를 객관화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동시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2008년의 남한을 살고 있는 남성, “가부장적”이라 인식되는 경상도 지방에서 산 남자 중고등학생, 남성중심적 학생운동에 대한 문제제기가 전무했던 시기에 운동을 시작했던 남성활동가, 여전히 노동운동에 자신의 기반을 두려 하는 자.

위에 나열한 어디에서도 “남성중심적” 혹은 “가부장적”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운 위치를 찾을 수 없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지금까지, 여성주의 모임이나 세미나, 집회에 참여하고 연대공간에서의 문제제기를 해왔다. 나는 어떻게 보면 다른 남성들보다는 여성주의에 친화력이 있었다는 지표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는 이러한 지표들에 기대어 ‘나는 여성주의를 많이 알아’ 혹은 ‘여성주의를 지지해’라고 착각한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일상에서 여성주의의 문제제기에 “저항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되면서 그 착각이 산산이 깨어진 적이 있다. 혼란스럽고, 불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의 내가 여성주의적으로 “순결”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게 문제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남성활동가들을 내가 알고 있는 여성주의 모임에 소개했을 때, 보다 많은 여성주의적 지식과 노동현장과 운동 공간에서의 가부장성을 폭로하면서 자신을 ‘여성주의적 남성활동가’로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나 또한 그렇게 말하다가 아차 싶은 적이 많다.) 그렇다면 이런 이들은 “저항”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불과 석달 전만 하더라도 “여성위원회가 필요하면 비정규직 위원회도 필요하겠네”라며 여성문제를 환기시키려는 이들의 문제를 조롱했던 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몇개월 만에 갑자기 여성주의 투사로 돌변했을까? 조직 내 논의 무게중심을 여성주의로 옮기기 위해 싸웠던 이들의 노력을 충분히 칭찬하고 싶지만, 급변한 태도를 보이는 몇몇을 보면서 나는 이들이 과거를 얼마나 건실하게 평가하고 있을까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오히려 정치화두가 바뀌면 그에 따라 대응하는 정치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게한다.

그렇다. 앞서 말한 문제란 이런 것이다. 여성주의를 “정치적 순결”과 연계시키는 것. 여성주의를 받아들이는 많은 남성활동가들(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의 원동력으로 활동하고있는 여성활동가들 또한)은 여성주의를 “정치적 순결”의 조건으로 끼워 맞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활동가의 소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조 관료들이 “조직 내 가부장성을 걷어내자”고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조 관료를 비판하는 많은 기층활동가들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또한, 나도 여기서 결코 자유롭지는 못하다. 활동가로서의 “정치적 순결”을 위해서 여성주의를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생활에서의 “저항”을 느끼면서 내 생활에서 “정치적 순결”을 강제하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치적 순결”을 포기한 지금, 내가 왜 여성주의를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운 이유밖에 대지 못한다. 여성들이 얘기하는 것 처럼 나는 여성주의를 생존의 보루로 삼을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남성권력의 수혜자일 수 있는데, 그게 가능한걸까. 그래서 결국 나는 여전히 “의식적인 자기투쟁”을 얘기하고, “정치적 순결”을 내가 여성주의를 받아들이는 자기 이유의 한 축으로 놓고 있다. 내 스스로의 여성주의의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 예전의 것을 대체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활에서 보이는 내 ‘남성으로서의 저항’을 목격하면서 혼란스러운 것 또한 여전하다.

이 “정치적 순결”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가부장성에 대해서 “의식적인 자기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찌보면 같은 말이다. 옳은 말일 수 있다. 함께 활동하는 공간에서 여성활동가에 대한 배려, 존중은 그들이 그리고 내가 여성주의를 시작하는 이유일 수 있다. 또한, ‘노동자는 하나여야 하기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공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남성활동가들은 왜 그래야 하는가. 활동가는 진보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올바라야 하기 때문에? 여성문제에 대한 진보적 입장을 내어놓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를 받아들인다? 사실, 여성주의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평등만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가능성으로 의미화되는 ‘너’와 ‘내’가 부딪히는 생활공간에서의 문제가 더 큰 것 같은데 말이다. 조직 내 가부장성을 비판하고, 성폭력 가해자 혹은 피임을 하지 않은 남성들을 비판하며 “여성주의적” 입장을 개진하는 남성들을 보면서 그 말이 끝난 후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주어지는 침묵의 시간 속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 싶다. 한편으로는 “가부장적이다”라는 낙인을 거침없이 찍어대는 그들이 역겹기도 하고, 그래왔던 내가 역겹기도 하다. 그들은 그리고 나는 "가부장적인 남성"을 타자화함으로써 자신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애써 주장하려했을 뿐이다.

나는 내 예전의 일상에 대한 평가 때문에 그런 말을 자신있게 할 수 없고, 또한 얘기하더라도 ‘다음에는 말 안해야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여성주의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여성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말이 많아졌던 내가 이제는 계속해서 침묵하게 된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확고한 자기이유가 필요한데, 이를 찾지 못하면 결국 나는 일상에서의 저항을 목격하면서 이를 자꾸 “정치적 순결”로만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남성의 덕목인 ‘정의로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결국, 자기문제로 받아안지 못하면 바뀌지 않는다. 여성운동의 남성에 대한 전략 설정의 문제는 여성주의적 문제제기를 남성이 ‘내 주위의 여성’ 문제로 받아 안게 하여 함께 사는 사회로 가자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문제로 받아 안게 해야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건 남성 스스로 해야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내 주위의 여성’이 남성에게는 ‘자기 소유의 여성’인 아내, 딸, 어머니, 여친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여성주의자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이 문제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남성이 존재할까? 또한, 조심스러운 의문이기는 하지만, “저항”하는 여성은 우리 생각만큼 많을까? 세미나나 모임에서 한 발자욱만 벗어나도 그렇지 않은 여성들을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남성들은 항상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한다. 소개팅에서 여성보다 두세 배 많은 돈을 쓰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그 사람은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요”라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후배에게 소개팅을 주선해주기 전, 그 후배와 여성주의에 대해서 논했건만 상대방 여성에게 그런 얘기를 듣고 이 얘기를 차마 후배에게 전달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각자, 지금 시기의 (그것이 여성주의든, 가부장성이든 뭐든)담론을 적당히 수용하기도 하고 적당히 저항하기도 하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이것 자체가 가능성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나 또한 여성주의를 얘기하는 남성들을 ‘타자화’하고 있다. 나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정치적인 순결”을 얘기하고 여전히 일상에서의 저항을 느끼면서 모순을 겪는다. ‘예전에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러니 다시는 그렇게 안할거야’라는 결심은 어떻게 보면 상황에 따라 변동폭이 아주 클 수 있다. 결국, 내가 생존의 이유에 준하는 것으로서 여성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강제와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운동진영이 여성주의를 - 온전히든, 수정해서든 - 받아안고 의제설정에 여성문제를 동등하게 놓아야 한다는데 동의하고, 강령적 입장에서, 정책적 입장에서 그것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떻게 여성의 문제를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이다. 물론, 운동진영 전체가 여성주의를 이렇게 받아들인다고 단정짓고 싶지 않다. 열심히 활동하는 남성활동가들을 폄하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이 남성인 나에게서부터 존재한다면, 이를 뛰어넘을 무언가를 찾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남성들이 “남성중심적 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근거가 되리라 생각한다.

그걸 찾기 위해, 기간 내 스스로의 평가부터 하고자 한다. 나 혼자 몰래 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나 혼자 판단하고 나 혼자 결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내 주위사람들과 하기에는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여전히 활동가의 기본 소양인 "정치적 순결" 혹은 "도덕성"의 잣대에 내 스스로를 놓고 있는 것일까... 그걸 뛰어넘을 용기가 없다. 그래서 익명성을 담보로 여기에 그 평가를 하고자 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 혼자서 자학하고 있다면, 혹은 친구에게 몰래몰래 털어놓으며 술로 푼다면, 결국 한 발자욱도 나가지 못할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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