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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밤 혹은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

어제 고등학교 때 알고 지내던 선배를 만났다.

오랜만에 마음 굳게 먹고 선배가 일하는 라이브 카페에 찾아갔던 것이다...

 

선배 일 끝나기를 기다리다보니 시간이 거진 자정이 다 되어 버렸다.

그 늦은 시간에 여의도 한강둔치에 가서 여름치고는 제법 쌀쌀한 강 바람을 맞으며 (만나면 으례 그랬듯이) 잊혀져 가는 과거 운동권의 조직계보를 다시 한번 훑고, 친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조금 떠올려 안부를 묻고, 또 동향(?)을 파악하고, 최근들어 가장 힘들었던 일들을 하나둘씩 떠올려 보기도 하고...

주변에서 폭주족들이 시끄럽게 나돌아 다니지만 않았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을텐데... 뭐 그래도 분위기가 썩 나쁘진 않았지. (그래도 여자선배랑 같이 있자니 좀 불안하기는 했다)

 

새벽 2시쯤 한강을 빠져나와 보라매 공원 어귀에 있는 국수 집에서 우동을 먹고(선배가 맛있다고 해서 갔는데... 정말 우동 맛이 끝내준다...) 편이점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또 얘기를 조금 더 나누고... 그런데 이상한 건 술은 한 방울도 먹지 않았는데 자꾸만 취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는 것이다...(졸려서 그랬나?)

'삭막한 대도시 삶에 이런 낭만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조금 하기도 하고...

 

선배가 고맙게도 집 앞까지 차를 태워줘서 미안한 마음에 놀이터에서 얘기나 잠깐 하자고 했던 것이... 동이 틀때까지 얘기를 했지 뭐야~ 내일 살 걱정은 없는 사람들처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끝없이 수다를 떨었던 것이다... 뭐 수다라기 보다는 이런 편안한 대화가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에 집에 가기 싫었던 것이 더 정확할테지만...



"그댄 왠지 달라요"

 

이날 선배가 불러준 노래다. 시원한 새벽 공기를 타고 가느다란 멜로디들이 하늘 위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 캬~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15년 전, 그러니까 선배도 나도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선배가 모 놀이터에서 이 노래를 불러줬었다는 것이다. 난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었는데(사실 이날 나왔던 고등학교 시절 얘기의 태반을 기억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랬었단다.

 

"누나 뭔 생각으로 나한테 이런 노래 불러줬어요"하고 물어봤는데, 선배는 그냥 씩 웃고 만다. 효창운동장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걸으며 얘기를 나누고 원효로 근처에 있는 어느 놀이터에 앉아 오늘 처럼 결코 해답이 필요없는 대화를 하고, 또 노래를 부르고... 그런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이런 얘기를 듣다보니 갑자기 과거로 통하는 시간의 문이 활짝 열리는 듯, 옛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울의대 언덕을 수없이 넘으며 나누었던 지겨운 학교생활과 가슴 아픈 연애담, 시덥지 않은 농담들과 사람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리바이벌 되던 귀신얘기들... 고등학생으로는 좀 버거웠던 정치얘기와 불안한 미래의 삶까지... 

아~ 또 그런 일도 있었다. 토요일이었나~ 정기회합을 마친 늦은 밤에 절친했던 친구들과 성대 금잔디에 둘러앉아 막걸리 잔을 부딪히며(그렇다... 난 그 당시 비행청소년이었다...)  밤이 세도록 불렀던 민가 메들리와 어설픈 논쟁들...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세상과 타협하지 말자고 했던 풋내나는 약속들...

죽을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저 몇몇 인상들만 남아 있을 뿐, 태반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최근 심사가 좀 뒤틀리면서 어리석은 생각을 간혹 하곤 했었다. '그때(고등학교때) 선배 누구누구를 만나지 않다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그때 무슨무슨 단체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대학에 들어와서 무슨무슨 동아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떤 운동을 결의하지 않았다면... 아~ 나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던 그녀, 오~ 그녀를 붙잡을 용기가 조금만 더 있었다면...' 나의 인생이 정말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과거는 어둡게만 다가왔고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으며, 심지어 혹시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것은 아닌가하는 터무니없는 패배의식에 젖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선배에게 이런저런 과거사를 들으며 떠오른 생각은, '와~ 나 정말 멋지고 재미있는 삶을 살아 왔구나~'였다.(기억력이 나쁜게 이런때 도움이 되긴한다. 무슨 얘기를 들어도 항상 새롭게 다가온다니깐^^) 물론 그때가 꼭 행복했었던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나의 과거는 그다지 어둡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또한 결코 잘못된 삶의 길을 걸어 온 것도 아니라는 거...(되려 고등학생때는 지금보다 몇배는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았었다... 겁이 없었으니깐)  선배의 말을 들으며 그걸 조금 깨닫게 되었다... 그랬더니 이상하게 내일을 살아갈 용기가 조금씩 생겨 났던 것이다... 그게 바로 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새벽동이 터오는 길다란 거리 사이로 선배의 차가 사라져 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렀게 보고 있자니 선배의 차가 멀어지는 만큼 왠지 방금전까지 활짝 열려있던 과거로 통하는 시간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집으로 가기 위해 뒤돌아 섰을 때는 완전히 현실의 세계로 돌아온 듯 다시 가슴이 싸늘해지고... 나도 모르게 "그댄 왠지 달라요"를 흥얼거리며(가사를 잘 몰라 정말 흥얼거리기만 했다) 발걸음을 터벅터벅 집으로... 집으로... 향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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