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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27
    스톡홀름
  2. 2008/05/05
    생축
  3. 2008/05/04
    무제
  4. 2008/02/19
    정리(1)
  5. 2008/02/07
    국학원

스톡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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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축

먼저 너의 생일을 맞아, 네 안에 있을지도 모를 프리온이 변심하는 일이 없기를 기원해주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일단 네가 '후회'라는걸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개념이다'라고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글을 보면 후자에 가까운 듯 보이나 너와의 대화에선 전자에 가깝게 들렸다.

 

철학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함인가?
모호함과 모순됨을 명확히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에 대해 요리조리 고민해보는 것까지가 철학이고,
'명확히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은 철학적 사고가 빚어낼 수 있는
여러 결과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확히 잘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생각해오고 탐구해온 문제에 대해서는 사태의 명확화가 자명하고 누구에게나 그런 것,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주장하면서 자신이 정확하게 처신하고 있지 못한 부분에 있어서는 정확히 현상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올바르지 못한 부분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떠안아버리는 것 같다.
"
이 부분에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자신이 생각해오고 탐구해온 문제 <-> 자신이 정확하게 처신하고 있지 못한 부분
사태의 명확화가 자명, 누구에게나 그런 것으로 주장 <-> 현상의 직시를 피하며,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어쩔수 없는 것으로 치부


나 = 내가 행동해온 것 그 자체 -> (???) ->후회란 있을 수 없다?

(아 정리가 잘 안되네. 쳇)

 


'역사에 가정이란 것은 필요없다' 라고 누군가 한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면서 쓸모없는 상상의 나래를 펴는 짓거리는 무의미하다. 라고 해석한다.
대표적으로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정도가 있겠지.

 

"나는 더 나은 미래의 나를 위해 새로운 선택에 있어서 나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할 것이다."
-> 나는 네가 말하는 경험과 지식이 후회를 통해서도 쌓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반복해서 말한 '주체가 행위하는 것'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만약 네가 슈퍼마리오를 플레이한다고 해보자.
너는 점프 타이밍을 잘못 선택해서 끝없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10번을 그렇게 실패했다고 생각해봐. 아쉽겠지. 난 이게 후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1번째 다시 시작한 너는 그 경험들을 이용해서 드디어 뛰어넘었다.

이러한 실패-후회-재시도-성공의 과정은
반드시 이것과 모든 조건이 동일할 필요는 없다.

수렁에 빠질 정도의 실수는 아니지만, 그래서 마리오는 죽진 않았지만,
커졌던 키가 작아질 정도의 결과를 낳은 실패도 있을테고,
심지어는 남들이 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는 점프였지만, 너의 기준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점이 있어
그 부분으로 인해 실패로 규정된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경우 다음 번의 유사한 상황에서 더욱 완벽한 점프를 위해 그 기존의 경험을 이용,
더 나은 점프를 하게 되었다면 그게 위 4단계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너가 후회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
후회라는 것 안에 포함되어있는 무언가가,
삶을 '명확'하게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을 쓸모없는 가정 또는 상상을 하게 만들어 나태하게 만든다고 여기는 듯하다.

근데, 삶이 명확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상상을 하면 안되는 건가?
과연 명확한 삶일수록, 쓸모없는 상상을 하지 않을수록, 아니 상상 자체를 하지 않을수록 가치있는 것인가?


나는 사람은 상상해야 한다고, 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상상이란 그 상상하는 대상을 긍정적이게도, 부정적이게도 할 수 있겠지만,
부정적 상상과 긍정적 상상은 서로 하나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후회할 행위와 후회하지 않을 행위, 후회한 행위와 후회하지 않은 행위 또한
서로 하나만 존재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날 대화를 하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서로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리고 그닥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는 부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너무 어리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 너의 말의 다른 면면이 어느순간 이해되는 순간이 오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내가 더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후회할 것 같다.
'그때 더 고민하고 더 들어주고 더 이해하려고 노력해서 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다음에는, 누군가와 진지한 이야기를 할때는 그러려고 노력해야겠다.'


난 이러한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디가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너의 말을 듣고서는 잘 알지 못하겠다.

 


<추가>
다 쓰고나서 다시 한번 읽다가 순간 머리에 들어온 건데,
아까 마리오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면
'마리오가 수렁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라는 후회에

넌 여기에 '마리오가 수렁에 빠지지 않을수도 있었다'라는 생각이 반드시 포함된다고 보는 것 같고,
그런 부분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왜 반드시 포함된다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고,
내가 생각하는 후회라는 건 그런 생각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본다.


네가 하지 않아야만 한다고 생각한 부분이 후회에 반드시 포함된다고 하는 너의 생각은
내가 보기엔 그 부분을 후회라는 개념에 네가 자의적으로 갖다붙인 것처럼 보이며,
그 날 너의 이야기를 들었던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굳이 너의 그 부분에 대해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그러한 '~~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즉 과거의 그 주체는 다른 선택을 통해 다른 행위를 하는 것이 가능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닥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회라는 것에 반드시 그 부분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는거다.
만약 그렇게 주장하고 싶다면 왜 후회라는 것에 그 부분이 포함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근거를 확실히 밝혀줘야겠지.
내가 듣고, 읽은 너의 주장에는 그러한 근거는 없어보이는데, 아니니?


아무튼 어떤 단어, 어떤 개념이라는 것은 일단 사람들간의 약속이고
그것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그럴듯한 근거를 가지고서 제의하고, 논의하고, 설득함으로써 가능한 문제이지
'원래 그런거다. 니들의 개념이 틀린거다.'라고 규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강력한 설득의 전술로 이용될 순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너의 '후회'에 대한 주장이 그렇게 보인다.

 

<끝으로>
글이 하나로 계속 이어지도록 써서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했으면 좋았을텐데,
아마도 글의 흐름을 끊기게 하는 내용들이 중간중간 들어가 있을 것이다.
짜증과 고통이 약간 추가되긴 하겠지만, 뭐 읽어주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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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이제 슬슬 미친소 이슈가 한국을 들끓게 하고 있나보다.

 

모르긴 몰라도

미친소의 무서움과 미쿡의 사료정책은,

최소한 FTA 논란때부터 (벌써 2년 전이구나!)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을진대

 

현재에 와서 특별히 고조되고 있는 건

재앙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기상의 여건과 더불어,

 

아무래도 XXX첩이 크게 한몫 했으리라 본다.

실제로 몇몇 마이너 언론들이 프리온의 무서움과

그분들이 협상을 하는 모습을 예전부터 나름 생생히 계속 써내리고

비명을 내지르고 했음에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던 걸 보면 말이다.

 

 

텍스트 면역인 영상세대님들의 까다로운 취향에 맞춰

알기쉬운 사이버 대자보가 마구 나붙기 시작한 것도

내 좁은 시야로 볼때는 마봉춘의 파급력이

물꼬를 터뜨려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드는 걱정은,

이제 이런 일도 MB시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측할 수 없겠지만,

현재로선 이 미친소 이슈가 만들어놓은 거대한 그림자에 숨어

우리를 병들게 할 수많은 현안들이

무임승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역대 대규모 운동들이 효과있게 수습된 경우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너무나 높은 확률이다.

(게다가 현재 그들의 분위기로 봐서는 강력하고 재빠른 대처로

움직임이 조기 공중분해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보인다.)

 

 

 

특히 위 상황과 관련해서는

현재 은근히 추진되고 있는(인상을 풍기는)

신방합방이 대표적인 무임승차 사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방,김,홍 님들의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최첨단 기술로 깔끔한 화질과

선도적인 선진 방송문화를 누리며,

제리스프링거쇼를 능가하는 수준높은 오락프로그램의

무한공급 등을 통해 우리는, 더럽게 푸르른 선진방송의 숲에서

갇혀 빠져나오기 힘들게 될 것이다.

 

 

자본과 권력이 원하지 않는 방향의 프로그램이

다시는 방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다.

(끽해봤자 큰 방향을 절대 거스를리 없는

일부 정/재계 일부의 '비리'만 요란히 표장되어

가십거리로 이슈화되는 정도이리라 생각한다.)

 

 

 

뭐...이러한 사례들이 한두가지가 아닐진대,

 

우리는 이제 밤9시 이후에 옆마을까지 돌아다니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미친 짓이 되고,

(어느쪽의 입장에서 보든) 반대편의 '그들'을 이해할 기회는

평생 주어지지 않는 어딘가처럼,

계급 양극화를 넘어 국토 자체가 캡슐형태로 조각조각 나뉘어져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살아가는 선진시스템을 갖춘 국가로

발돋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쪼록 제발 미친소 이야기가 디아블로 수준으로만

받아들여지다 끝나지 않길 고대해본다.

 

 

추신 : 골방, 트라우마 복원하라!

 

 


 

어? 근데 그러고보니 나 천한신분인데-_-

(급펌) 출처 : 프리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유용한 글 :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504095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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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1. 잘살기위해

내가 저번 글에서 이야기한 잘산다 라는 말의 의미는

일반적인 삶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닌,

 

마치 영토확장전쟁처럼 서로가 보유하는 것을 향해

공격하여 뺏고 빼앗기는 양상에서의 더 잘 살아남는것에 가깝다.

 

 

남의 역사를 일부 뺏어오면 그것이 국력의 강화로 이어지고,

반대로 남에게 역사의 일부를 뺏기면 국력의 약화가 된다는

그런 식의 사고를 말하는 것이었다.

 

 

 

 

2. 동북공정의 주장

이 말을 한 의도는 대체 무엇이 옳으냐? 라는걸 알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다. 나는 동북공정이라는 것을 1. 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사실 여부를 떠나, 역사라는걸 힘의 행사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내는 사업 또는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국학원의 대응을 (적어도 나는) 그러한 중국의 도발행위에 '힘'을 밀집해 대응하자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데 나는, 너에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힘의 행사에 힘으로만 대응하려는 것이 맘에 들지않는다는거다.

 

그건 역사라는 것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역사"를 "국가의 역사적 자원"이라는 것으로 물화시킨 후, 이러한 자원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물적 투쟁으로 변질시키려는 동북공정>이 정한 '게임의 룰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행위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너는 역사의 본질이 대체 뭐냐라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뭐..'역사의 본질'이라는 부담스러운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현재를 비추어볼 수 있게 해주는 거울로서의 역사,

차분히 성찰할 기회를 제공해주는 화두로서의 역사,

이정도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누구의 역사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우리가 어떤 역사를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얼마나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었는가?"

가 더 중요해진다고 본다.

 

 

어쩌면 그들의 주장대로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역사를 빼앗기고 있는 듯한 상황이니

그걸 막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도 자체가, "역사"라는 것 자체를 훼손시키는 행위라고 보기에 불쾌한 것이며, 설사 중국과의 역사적 투쟁이 필요하다 해도 현재 이들의 방식은 동북공정이 짜놓은 판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생각하기에 싫다는 것이다.

 

 

전략적으로도 나는 이러한 도발일수록

그들의 주장을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시도,

그리고 그 뒤에 숨어있는 욕망을 까발리는 방식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들이 조작된 역사를 내세우고 그것을 그들의 장점인 힘의 우위로 밀어붙이면 우리는 힘싸움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하며, 그들이 역사를 자원화하고 소유하려는 야욕을 불태우면, 그런 논쟁 자체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자기들의 야욕을 위해 역사를 왜곡한다는 주장이

한국/중국의 경계가 아닌 상관없는 이들에게도 받아들여지려면,

 

우리는 한국의 역사만이 아닌 역사라는 것 자체를 지키기 위한

진실된 노력이 필요하며, 또한 그것이 효과적인 전략이라는 것이다.

 

 

 

3. 우리라는 경계

우리는 2. 에서 말한 것처럼 중국이 정해놓은 민족/국가간의 '역사'라는 무형자원을 놓고 벌이는 투쟁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것과 더불어, 한국인이 아닌 누군가가 들어도 옳은 주장이라고 생각할 만큼, 심지어는 중국인이 들어도 설득력을 느낄수밖에 없을 만큼의 주장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입장에서 "우리"란 단어를 생각해 본다면,

무조건 중국에 대응해 한국인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해줄 모든 이들이 되는게

효과적이라고 본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한국인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컨데 과거 고구려라는 나라의 역사에 대한 진실은

분명히 현재 중국인/한국인이 아니라도 관심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러한 관심이 현재의 논쟁을 종결시키는데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의미로 보면 "우리"는 반드시 한국인이 아니어도 되며,

오히려 아니어야만 더 맞는말로 여겨지고, 더 효과적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말을 한국인이라는 경계로 특정지으려 한다면, 오히려 아예 그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본다.

 

<<<

간단히 말하면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사업/문제제기에 대해 민족 대 민족의 문제로만 끌고들어가려는건 좀 우습지 않나 하는 거다.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방법론적인 문제에 앞서 문제의 해석부터 좀 삽질이 아닌가 하는거다.

>>>

 

 

4. 효과적인 허구

너의 말처럼 민족이란 실질적 효과를 갖는 허구일 수 있겠다. 애초부터 그러한 효과를 내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현재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느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개념이 대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제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 그리고 "~~할 수밖에 없는" 특징들을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전문적으로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민족'이란 개념의

너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국가', 특히 18세기 이후의

국민국가라 할수 있는 형태가 나오면서라고 알고 있다.

 

과거의 국가와 상당부분 단절한 근대적인 국가가 만들어지면서

국가-국민의 결합력/종속력(또는 단결력)을 일정수준 이상

유지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씨족, 부족 등의 개념에 비해

보다 초월적인 '민족'이란 개념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러한 전략을 채택한

많은 근대국가들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누구에 의해 주입되었는가?

우리나라의 경우엔 일제강점기 시대 독립운동가, 계몽가들에 의해

'우리'의 결속을 다져 개화를 이루고 독립적인 근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민족'의 개념이 한국인들에게 결정적으로 각인되었으며, 이후 지배에의 유용을 위해 지속적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이라 본다.

 

 

우리 한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민족은 이렇듯 애초에는 소수의 누군가에 의해 (그 개념이) 발견(?)되고 이용되며, 결국은 특정 집단 전체를 아우르고 단결을 도모하는 거대한 생각덩어리로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소수의 누군가에 의해"라는 말이다.

 

'민족'이란 개념은 이성적 논의가 힘든 대상이다.

기본적으로 이성보단 감성으로 받아들이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남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논의가 이루어지기보단,

한국인이면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근본적 정신구조'쯤으로

여겨지도록 설계되어있다는 거다.

 

 

아무튼 ㅅㅂ.

내가 말하고 싶은건 민족이란

소수의 누군가에 의해 제창된 거고,

다수가 고민없이 받아들이기 쉽게 설계되었으며,

 

그 결과로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 개념을 이용해 국민들을 더 잘 단결시키고 동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국민들도 뜨거운 뭔가를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럴수록 이 '민족'이란 개념은

이에 대한 의문이나 논의가 필요없는 (면제되는)

그러한 시도에 대한 거부감을 들게하는

어떤 성역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개념이 다수에 의한 변화가 가능해지고,

그것에 대한 이성적인 논의가 일상적이 된다면

내가 문제삼은 부분은 사라지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개념의 유용성도 같이 사라질 것 같다.

 

 

<<<

그리고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틀어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족이란 개념을 강조할수록, 민족주의를 제창할수록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에

가슴이 복받쳐 오를수록, 한민족 또는 대한민국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타자화는 강력해진다는 점이다.

 

아니, 반대로 민족을 언급하는 각종 사회운동과 월드컵같은 스포츠행사 등을 통한 타자화는 우리의 '복받쳐오르는 감동'을 밀려오게 하고, 이를 통해 각종 층위의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라 뒤덮혀지고, 해결되어야만 하는 모순들이 여론의 층위로 떠오르려는 시도를 깔아뭉개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잘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제외한 이들을 타자화시켜야만 하는가?

 

생존을 위해 경쟁은 어쩔 수 없다 말하지만,

사실은 배제하기 위한 경쟁은 아닌가?

 

신자유주의에서 강조하는 시장 논리라는 것도

아담스미스 등의 완전경쟁시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경쟁자를 더럽고 치사하게라도 배제시키는 과정을 변명하려는

알리바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

 

 

글이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너무 정리하지 말자.

 

너가 아무리 오래, 열심히 잘 쓰려고 해도

서로 곡해되는 부분은 항상 많을 거다.

 

약간 퀄리티가 떨어지는 다작의 공유가

(자기만의 기준으로) 잘 다듬어진 소작의 공유보단 낫지 않을까?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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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원

만약 동북공정의 주장이 모두 옳다면 어떻게 할건지.

지금 그들의 분위기를 봐서는 그렇다 해도 '우리 한민족'의

역사 투쟁을 주장할 것 같다.

 

또한 반대로 국학원이 주장이 모두 옳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얻게 되는건지.

 

 

 

내가 이해한 그들의 투정은 다음과 같다.

'우리' 것인 '우리' 역사를 '우리'는 되찾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일부의 '우리' 역사조차

중국의 강력한 투쟁(동북공정)을 통해 빼앗길 위기에 쳐했고,

 

이에 대해 자신들은 그러한 참사를 막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중국의 힘이 강하고 식민사관 등 '옳지않은' 역사관/역사학자들이

판을 치는 작금의 상황에서는

'우리'의 호응과 열렬한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우리'의 역사가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으며,

이것을 최대한 알리는 민족전사로서 투쟁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이들에게 힘을 응집시켜 올바른 우리의 역사를

되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 역사의 진실을 이미 밝혀냈으나

힘이 부족하여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며,

 

중국은 막되먹도록 왜곡해도 힘이 있어 인정받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식의 반박에는 항상

"그렇다면 중국이 옳다는 것이냐?"라고 맞받아치며

쟁점에 블러효과를 마구 일으켜놓는다.

 

아무튼 그러므로 '우리'도 힘을 모아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인정받아야한다는 결론이다.

 

 

 

여기서 의문.

과연 '우리'는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고있고 정확히 밝혀냈다는 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힘이 부족한 것 말고 다른 모자란 이유는 없는건지.

 

 

그리고 사실은 역사 '왜곡'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왜곡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가 잘살기 위함이 아닌지.

 

그렇다면 그들이 비판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비해

대체 어떤 부분이 더 나은 입장인 것인지.

 

(게다가 '우리'의 역사 투쟁이 승리했다고 했을때

얻을 수 있는  전리품 중  뿌듯함과 자부심을 제외한 +@,

즉 그럼으로써 얻게되는 학문시장과 그것을 중심으로 한

각종 서비스와 재화들에 대한 수혜는 극히 일부가

나눠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즉, 그럼으로써 이러한 힘없고 돈없고 빽없는 소수역사학파의

투쟁이 그들이 절대 빼앗겨선 안될 정당성과 도덕성을 얼마나

갖추고 있냐는 점에서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사실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유리한 역사를 만들어 주장하고

힘싸움을 통해 승리함으로써 결정되는 것을

과연 역사라 부를 수 있는건지.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범위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기나 할까.

 

과연 역사란 과거의 역사라는 가상의 영토를 가지고 싸우는

전쟁의 결과물일 뿐인가?

 

 

역사란 승리자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지만,

승리한 후 역사가 씌여진다는 것이지

승리하기 위해 역사를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건 위의 명제에 집착과 오버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민족적 열등감에 근거한 추한 운동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진국 담론, 또는 너무나 오버하는 민족주의란

열등감에 사로잡힌 단순무식한 욕망괴물의 정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아무튼 나는 이들이 정당하기 위해서, 진정하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집착과 욕망을 버리고 보다 차분하게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옳다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옳다'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트려놓는 것이야말로 옳지 않다고 본다.

그렇게 된다면 설사 진실을 밝혀내서 알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진정 역사왜곡 자체를 바로잡는 것이 목적이라면,

더이상 바보같은 맹목적 추종자들을 만들어내선 안된다.

팸플릿으로 사상과 철학과 주체의식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옛날처럼 허접한 동영상과 글 몇줄로

문제의식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

 

물론 그들의 연구 및 스터디그룹이 존재하겠지만,

얼마나 활성화되어있는지는 모르겠다.

과연 이들은 서로 같은 의견을 가지고 해대는 자기만족

그이상의 의미를 깨우쳐가고 있는가?

그럼으로써 얻은 결론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인건가?

 

 

이들이 진정성을 보여주고 싶다면,

그들의 역량이 학문시장 내에서 가치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대중적/선동적임에 앞서 하다못해 학술적 퍼포먼스라도

먼저 선보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색깔과 정체를

먼저 밝히고 시작해야만 옳은 수순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조차 이건 아니다 싶다면,

그건 왠만하면 아닌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최소한 정말 아닌건지 알기 위해서는,

뼛속까지 심장속까지 뒤집어 까봐야할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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