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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자랑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랑질'을 좀 하자면, 나는 20대 후반 한 운동단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성명서를 쓰는 일을 했다. 물론 그게 내 일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성명서란 어떠한 사건에 대해 단체의 입장을 밝히는 글로 그 단체의 정체성과 정책, 그리고 그 사안에 대한 통찰을 전제로 한다. 물론 그 당시 내가 쓴 성명서들이 그랬다는 건 아니다.^^
30대 초반에는 한 시민단체에서 성명서와 논평 초안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때 나는 거의 실시간으로 연합뉴스 속보를 모니터링하며 우리 단체가 입장을 표해야 할 사안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고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지를 고민했다. 논평은 성명서를 내야 할만큼 중요한 사안은 아니지만 일일이 기자들의 전화에 시달리기 싫어서 간략하게 코멘트를 하는 수준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민주노총의 논평에 대해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사건의 발단은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이 최저임금 하루체험을 하면서 황제식사 운운한 것에 대해 민주노총이 논평을 냈는데 거기에 들어간 '개드립', '오버질' 등등의 용어, 논평의 논조 등에 대해 동아일보는 물론 여러 군데에서 말들이 나온다고 한다.
민주노총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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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6,300원짜리 황제의 삶" 한나라당 차명진의원의 오버질과 개드립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이 참여연대에서 주최한 '최저생계비 1일체험'에 참여하고는 '6300원짜리 황제의 삶"을 살았노라고 자기의 홈페이지에 자랑질을 늘어놓았다. 그는 먹거리로 쓴 돈 4,680원을 빼니까 1,620원이 남아서 1000원을 사회기부까지 했다고 한다.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다.
그는 첫머리에 굶어죽을까봐 걱정이 된 아내가 인터넷에서 조사한 자료를 참고했노라고 했다. 오버질도 이런 오버질이 없다.차명진 의원의 자랑질과 오버질도 웃기지만 사실이라면 그의 아내도 한참 웃기는 사람이다. 세상에 하루 굶어서 죽는 사람은 없다.
그는 또 "쌀 800원어치 한 컵,쌀국수 1봉지 970원, 미트볼 한 봉지 970원, 참치캔 1개 970원.. 전부 합해 3,710원. 이정도면 세끼 식사용으로 충분"하다며 황제의 삶을 강조했다.이런걸 개드립이라고 한다.
차명진 의원은 제발 그렇게 3710원으로 평생 황제의 삶을 사시기 바란다.
하루밤을 그렇게 황제처럼 보낸 차명진의원은 다음날 아침 남은 600원으로 조간신문을 샀다고 한다.
그 조간신문이 어떤 신문일지는 충분히 짐작된다.
그의 오버질과 개드립의 압권은 마지막 구절이다.
"나는 왜 단돈 6,300원으로 황제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밥 먹으라고 준 돈으로 사회기부도 하고 문화생활까지 즐겼을까? 물가에 대한 좋은 정보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저생계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분들이 저처럼 될 수 있을까요? 단 하루 체험으로 섣부른 결론 내리는 것은 옳지 않겠지요. 다만 최저생계비만 올리는 것으론 답이 안 나올 것 같습니다. 국가재정에도 한계가 있고요. "
축하한다.
굶어죽지 않고 살아난 것을, 그리고 6300원으로 잘먹고 사회기부하고 조간신문까지 사서 읽었다니 매우 자랑스럽겠다.
그리고 욕많이 먹어서 더 배가 부를 것이니 그 또한 자랑하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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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공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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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이 어제 차명진 의원의 '최저생계비 1일체험기'에 대해 논평을 냈다. 논평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어제부터 비교적 많은 매체가 다뤘다. 다음은 오늘자 동아일보에 실린 취재수첩의 한 대목이다.
차 의원의 글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의 아내를 욕하고, 사석에서도 잘 쓰지 않는 ‘○○질’이라는 비속어까지 동원해 비난한 것은 심했다고 생각한다. 대변인 공식 논평이 이 정도라면 단체의 수준을 의심해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 화가 나면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지만 격(格)이 떨어지면 말한 쪽이 손해를 보게 돼있다.
매체와 무관하게 동의하는 입장이다. 이번 논평뿐이 아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 말만 과격해진 게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논평, 성명, 기자회견문에 전쟁용어, 군사용어가 난무하는 건 예사고, 비속어를 써서라도 상대를 조롱하고 욕보이는 것으로 할 일 다 했다는 식이다. 스스로의 오르가즘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성욕을 입으로(음담패설) 발산한다는데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일까. 실천이 수반하지 않는 상태에서 입만 과격해지는... 즉자적인 분노를 가득 표출하는 것보다는 상대보다 한 수 위에서 놀아주는(?) 자세가 필요할텐데...
그런 의미에서 박상훈 선생의 칼럼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설득이라는 평화적 수단을 활용하고자 하는 진보진영이라면... 좌파에게도 품격이란 게, 명예란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파와 우파를 떠나 공적인 역할을 자임하는 단체라면 우리말을 정제하고 정화하려는 노력은 해야하지 않을까.
[사유와 성찰]말의 공격성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했고 지금은 평화운동을 하고 있는 대학 동기를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는 우리 사회 진보파의 언어가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때로는 폭력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말을 했다. 그러다보니 진보적 매체나 논의의 장에 더 이상 참여하거나 관심을 갖지 않게 되더란다.
미국 진보파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주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사울 알린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1930년대 시카고에서 빈민운동을 주도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진보적 활동가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가 교육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는, 말의 공격성 혹은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누군가를 향해 ‘돼지’나 ‘파시스트’라고 인격적으로 비난하는 활동 방식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운동권이 원래 그렇지”라는 식으로 정형화된 이미지를 갖게 해 사회운동의 고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일반 대중의 경험세계 속에서 자신의 말이 어떻게 공명될 것인지를 중시해야 하고, 또 “상대의 가치관을 온전히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진보의 언어적 실천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진보파의 언어 때론 폭력적
최근 인터넷 글쓰기의 영향이 커지면서 진보파들의 언어습관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보여 주목되고 있다. 집권세력과 그 수장을 ‘MB’ 내지 ‘2MB’로 표현하고 거기에 ‘명박이’ ‘쥐박이’ ‘생쥐’ ‘바퀴벌레’ 등의 모욕적 이미지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진보파들의 말과 글에서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통치의 가혹함에 대한 강렬한 항의의 소산이겠지만, 결과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것 같다. 한번은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을 진작시키기 위한 콘서트에 갔는데, 시작에 앞서 사회자가 그 취지를 설명했고 해직교사 한 분을 무대로 초청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데 해직교사가 자신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현 정부를 “이명박 정부”라고 지칭하자 사회자는 “MB 정부를 좋아하시나 보네요”라고 물었다. 이명박 정부와 MB 정부 사이의 언어 선택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사회자에게는 예민하게 포착되었던 듯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객석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조용했는데, 사회자가 농담이라고 말한 다음에도 여전히 조용했다. 진보파들과 그렇지 않은 일반 시민 사이에 언어습관의 괴리가 커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말이 갖는 공격성 내지 폭력성은 주로 보수적 정향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폭도나 빨갱이, 친북좌파라고 공격하는 일이 허다했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비이성적 논리가 강요되기도 했고, 빨갱이들은 개조가 안 되고 대화로 풀어보려 했다가는 자칫 말려들기나 한다며 “때려잡자”거나 “북한에 보내자”는 무서운 주장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억압적인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는 진보파들 사이에서도 말이 자꾸만 나빠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마음 불편한 일이다.
인간적 따뜻함 뒷받침될때 힘
흑인이라는 정체성 속의 이중적 억압성을 날카롭게 문제 삼는 작품들로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 모리슨은, “문학은 정치적인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정치적인 주제를 진지하게 다룬다면, 분명 이 말과 글은 파당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성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자로서 진보파가 갖는 사회적 가치 또한 파당적이 됨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세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파당성은 공정한 태도와 인간적인 따뜻함 그리고 말의 부드러움에 의해 뒷받침될 때,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진보적인 것의 가치도 소중하지만 그보다 인간적인 것의 가치가 더 넓고 풍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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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드립'이 어때서 - 민주노총 논평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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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은 최저임금으로 하루체험을 해보니 황제식사에 기부에 문화생활까지 할 수 있었다며 '개드립'에 '자랑질'을 늘어놓고는, 그러니 앞으로는 국가에 손 벌릴 생각은 하지 말라며 빈곤계층에 대한 충고까지 덧붙였다.
그런데 이후 이를 비난한 민주노총 논평이 화제가 됐다. 누리꾼들은 폭발적인 지지와 공감을 표시했고, 그 결과 차명진 의원에게 사과까지 받아냈다. 반면 <동아일보>는 표현의 격(格)을 운운하고 "단체의 수준을 의심해도 할 말이 없지 않을 것"이라며 기사까지 썼다. <동아일보>처럼 굳이 민주노총의 수준을 시비 삼는 경우는 아니더라도, 이번 논평의 표현방식에 물음표를 던질 기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동아일보>에 공식적으로 대응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일희일비하는 모습이야말로 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접었다. 그러나 고민은 가시질 않는다. 보수언론은 그렇다 치고 악의 없이 들려오는 안팎의 문제제기는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나름 이른바 '표현의 격과 권위'에 대한 평소고민을 적어보았다.
논평 논란의 핵심이고 일부러 서두에서도 다시 썼지만 '개드립'이나 '자랑질' 등은 인터넷 공간에서 쓰이는 신종언어들이다. 물론 '개드립'이나 '자랑질'은 부정적이고 공격적 의미의 말이지만 욕설도 아니다. 더욱이 이들 인터넷 신종어들은 인터넷이 우리의 깊은 일상이 된 것처럼 상당부분 생활언어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품격이 없다? 글쎄다. 난 이 대목에서 뭔가 모를 부적절한 권위를 느낀다.
격을 말하는데 도대체 격이란 것이 의심스럽다. 노동자답게 대중적 유대감과 비주류의 저항성을 지향해 온 민주노총이 언제부터 대중적 감성과 결별하고 관료들이나 보수언론들, 이른바 주류 세계가 요구하는 권위와 품격에 신경을 썼는지 모르겠다. 내가 보건데 주류세계의 품격이란 대체로 냉혹한 착취와 지배본능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거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점잔을 빼는 일이다. 이도 아니면 생존의 절박함을 느끼지 못한 가진 자의 여유에서 나오는 나른함이라는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자고로 지배층들은 그런 식의 품격으로 대중을 소외시켜 권위를 세우고 가증스러운 온화한 표정으로 착취를 일삼아 왔다.
<동아일보> 식의 품격이 바로 그러리라 추측한다. 아니 한껏 품격을 갖추고 왜곡과 비방을 일삼고 있다. 그런 식의 품격에는 파격으로 맞서고 싶은 심정 간절하다. 공식적 표현에 대한 충고를 하려거든 "보다 예의 있는 표현을 썼으면 좋았다" 정도면 새겨들을 생각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차명진이란 분은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는 짓을 하셨기에 "개드립"을 헌사한 것에 후회는 없다.
물론 민주노총 논평과 성명에 내용과 대상을 막론하고 인터넷 신조어들을 들이대겠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언어란 것의 본래 쓰임이 화자의 권위를 높이기보다는 소통하고 의미를 나누는 일이라면, 우리는 높은 수준을 보여 대중을 소외시키기보다는 우리와 같은 것들이네 하는 동질감을 얻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럼 점에서 '개드립'은 적절한 언어였다.
민주노총은 '거버넌스'네 '아젠더'네 하는 먹물의 품격과 권위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거칠지만 대중과 소통하고 쉬운 말로 생각과 철학을 나누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보다 나은 사회를 얘기하는 일에도 권위가 필요하다면, 그럴 때 권위란 권위를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생겨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지배계급에서 배운 방식으로 권위를 세우고자고 한들 권위가 세워지지도 않고, 권위를 세운들 또 다른 관료세계와 지배방식일 따름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부나 보수언론과 같은 주류집단이 인정할 만한 고품격을 갖추는 게 아니다. 대중과 소통하는 언어로 지배집단에 맞설 수 있는 대중적이고 진보적 감각, 그리고 예의가 필요한 것이다.
/박성식 민주노총 부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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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장을 묻는다면, 기회주의자답게(기회주의자는 내 대학 시절 별명같은 거였다--;) 박상훈의 칼럼이나 민주노노총 부대변인 양쪽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식상하지만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갑는다"고도 하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있다. 나는 이 두 속담의 의미를 말이란 상대가 있는, 소통을 전제로 한, 그 이상의, 공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 생각한다. 소통을 하지 않을 바에, 공감이 불가능 상태에서 말이란 술주정같은 자기만족에 그치거나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평이나 성명서의 상대는 누구일까? 일단은 기자와 언론이다. 어떤 단체의 성명서와 논평을 직접 일반인이 접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그러다보니 기자들 눈높이에서 성명이 써지고 논평이 나온다. 그런데 기자들이 대부분 먹물이다보니 노동단체가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먹물의 언어를 빌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총의 시도는 박수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성명과 논평은 언론을 매개로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그런 점에서 비평가를 독자로 상정하고 쓰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그렇듯 기자만을 생각하고 쓰는 성명과 논평은 지적 유희가 되기 십상이다. 가서 꽂혀야 하는 것은 대중이기에 성명과 논평도 기자(비평가)를 고려하되 끊임없이 대중(독자)에 대한 말걸기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가슴에 닿아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민주노총의 논평은 과연 노동자의 말투로 쓰여진 노동자의 목소리일까? 물론 노동자는 무식하고 단순하다는 편견에 기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개드립'이니 '오버질'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노동자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럼 이번 논평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을 수 있을까? 네티즌들은 열광을 한다지만 이런 비아냥이라면 굳이 민주노총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에 무수한 글을 찾을 수 있다. '아,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이렇게 보는구나'라는 지점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린 이렇게 발랄하기도 하다는 이벤트로 비춰지지나 않을까?
어쩌면 개드림, 오버질 같은 이런 용어 또한 21세기 먹물들의 신조어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말의 민주화, 글의 민주화는 대단히 중요한 숙제이지만 그게 단순히 대중이 많이, 자주 쓰는 용어를 쓴다고,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말투를 따라 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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