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0/07

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7/30
    민주노총 논평을 논하자면
    사람
  2. 2010/07/23
    광화문 현판과 한글(2)
    사람
  3. 2010/07/21
    노무현을 위한 변명
    사람
  4. 2010/07/16
    돈에 대하여
    사람
  5. 2010/07/05
    내게 거짓말을 해봐
    사람

민주노총 논평을 논하자면

 

이게 자랑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랑질'을 좀 하자면, 나는 20대 후반 한 운동단체에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성명서를 쓰는 일을 했다. 물론 그게 내 일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성명서란 어떠한 사건에 대해 단체의 입장을 밝히는 글로 그 단체의 정체성과 정책, 그리고 그 사안에 대한 통찰을 전제로 한다. 물론 그 당시 내가 쓴 성명서들이 그랬다는 건 아니다.^^  

 

30대 초반에는 한 시민단체에서 성명서와 논평 초안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때 나는 거의 실시간으로 연합뉴스 속보를 모니터링하며 우리 단체가 입장을 표해야 할 사안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고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지를 고민했다. 논평은 성명서를 내야 할만큼 중요한 사안은 아니지만 일일이 기자들의 전화에 시달리기 싫어서 간략하게 코멘트를 하는 수준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민주노총의 논평에 대해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사건의 발단은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이 최저임금 하루체험을 하면서 황제식사 운운한 것에 대해 민주노총이 논평을 냈는데 거기에 들어간 '개드립', '오버질' 등등의 용어, 논평의 논조 등에 대해 동아일보는 물론 여러 군데에서 말들이 나온다고 한다.  

 

 

민주노총 논평 

>> 접힌 부분 펼치기 >>

말의 공격성  

>> 접힌 부분 펼치기 >>

 '개드립'이 어때서 - 민주노총 논평 후기

>> 접힌 부분 펼치기 >>

 

 

내 입장을 묻는다면, 기회주의자답게(기회주의자는 내 대학 시절 별명같은 거였다--;) 박상훈의 칼럼이나 민주노노총 부대변인 양쪽 모두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식상하지만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갑는다"고도 하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도 있다. 나는 이 두 속담의 의미를 말이란 상대가 있는, 소통을 전제로 한, 그 이상의, 공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 생각한다. 소통을 하지 않을 바에, 공감이 불가능 상태에서 말이란 술주정같은 자기만족에 그치거나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평이나 성명서의 상대는 누구일까? 일단은 기자와 언론이다. 어떤 단체의 성명서와 논평을 직접 일반인이 접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그러다보니 기자들 눈높이에서 성명이 써지고 논평이 나온다. 그런데 기자들이 대부분 먹물이다보니 노동단체가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먹물의 언어를 빌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총의 시도는 박수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성명과 논평은 언론을 매개로 대중들에게 전달된다. 그런 점에서 비평가를 독자로 상정하고 쓰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그렇듯 기자만을 생각하고 쓰는 성명과 논평은 지적 유희가 되기 십상이다. 가서 꽂혀야 하는 것은 대중이기에 성명과 논평도 기자(비평가)를 고려하되 끊임없이 대중(독자)에 대한 말걸기가 되어야 하고 그들의 가슴에 닿아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민주노총의 논평은 과연 노동자의 말투로 쓰여진 노동자의 목소리일까? 물론 노동자는 무식하고 단순하다는 편견에 기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개드립'이니 '오버질'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노동자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럼 이번 논평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을 수 있을까? 네티즌들은 열광을 한다지만 이런 비아냥이라면 굳이 민주노총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에 무수한 글을 찾을 수 있다. '아,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이렇게 보는구나'라는 지점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린 이렇게 발랄하기도 하다는 이벤트로 비춰지지나 않을까?

 

어쩌면 개드림, 오버질 같은 이런 용어 또한 21세기 먹물들의 신조어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말의 민주화, 글의 민주화는 대단히 중요한 숙제이지만 그게 단순히 대중이 많이, 자주 쓰는 용어를 쓴다고,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말투를 따라 한다고 되는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광화문 현판과 한글

 

 
한글이 자랑스러운가?

 

한글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문자이고 가장 과학적인 글자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다른 나라의 글자, 다른 민족의 언어를 생판 모르는 상태에서 그러니 그러나 보다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어떤 작가는 한글이 아름다운 것은 모국어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한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겠지만 그렇다고 미인대회에서 우리 엄마에게 최고점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과 한글의 우수성을 밝히고 홍보하는 것은 다른 일이지 않을까
  

경향신문 - 다시 생각해야 할 광화문 한자 현판

프레사안 - 한글학회 회장 '사죄의 절', "세종대왕 뒤에 한자 현판이 웬 말"
 

 

--------- 

G20 회의를 앞두고 광화문 복원 사업 마무리를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부의 행태를 봐오건대 아마도 능히 그럴 것이라 짐작된다. 광화문에 걸릴 '광화문' 현판 글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아니 있었던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공사 이전의 현판 글씨는 정희 대통령이 한글로 '광화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 공사를 하면서 고종 임태영 한자로 '광화문' 내건다고 한다. 임태영 누군가 찾아봤더니 고종 시절 광화문 중건 당시 훈련대장을 지낸 이라고 한다.  

 

사실 독재자 박정희 글씨가 그야말로 광화문 복판에 걸린다는 쪽팔린다. 그렇다고 고종 훈련대장이 글씨가 내걸리면 쪽팔림이 덜해질까. 박정희  거보다 많은 인물이라고 해도 조선을 말아먹은 왕조에서 크게 했던 고종도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노무현 정부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주도로 광화문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현판 교체도 그때 결정되어 논란이 일었다. 당시에 박정희 대한 역사적 평가의 부분으로 말이다.)

 

문화재청의 입장은 경복궁의 본디 모습을 되찾으면서 정문인 광화문 현판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리 원판 사진에서 디지털 기술로 고종 임태영 현판 글씨로 복원할 것이란 이야기다.   

 

하지만 정작 본래의 광화문은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함께 없어졌는데(그것도 왕조의 배신에 분노한 인민에 의해서) 고종 다시 세워진 건물을 모델로 복원 운운하는 것이 우습다. 더군다나 과연 유적, 문화유산의 복원이란 그렇다.   

 

불에 없어진 남대문을 지을 썼던 것과 비슷한 소나무, 그때의 기술, 그때의 방법을 동원하여 짓는다고 남대문이 복원되는 것일까. 역사란, 역사유적이란 결국 시대에 따라 재창조되고 다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적,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타지마할과 앙코르와트를 보러가는 아니겠나.

 

물론 재현이 의미 없다는 아니다. 다만 재현과 복원을 구분하지 못하는 안타깝고 그저 재현하는데 복원 운운하며, G20 그렇고 중앙청이라 불리던 과거 일제총독부 건물을 허물 그랬든 국운 상승 운운하며 거기에 대단한 의미가 있는 하는 못마땅하다
 


-------

얼마 전에는 어떤 나라 사람들이 한글을 자기 문자로 삼았다며 한글의 우수성이 입증되었다고 얼마나 자랑을 해대던지, 참 남부끄러웠다. 물론 '어린백성을 위해 만들었다'는 한글의 창제정신, 그리고 이른바 배운 자들의 핍박을 받아가며, 그러면서도 배우지 못한 자, 힘 없는 사람들이 애용했으며 그들의 손과 입을 통해 풍요로워진 역사는 참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그런데
과연 작금에 그 한글을 누가 자랑스러워 한다는 말인가? 광화문 복판에 한자로 걸린 ‘광화문’을 보며 어느 외국인이 “너희들은 한글이 그렇게 좋다며 저건 뭔가? 하면 뭐라 답할 생각인지. 오뤤지의 대한민국에서, 서울은 온통 Hi, Seoul’로 도배되고 ‘동사무소’는 ‘주민센터’가 되는 나라, 그것도 광화문 앞에서 한글이 우수하니 어떠니 하는 말은 낯간지러워 도저히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노무현을 위한 변명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김병준|김창호|이동걸|안병진|박능후|김성환|김용익|조기숙|고철환|윤승용 지음
오마이북 2010.06.24
 

 

 

 

#1.
죽은 자에 관해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더군다나 노무현처럼 대규모의, 또한 열정적인 팬덤을 지닌, 일정 정도 시대 정신을 구현했던, 그리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이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진보의 미래>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을 선물로 받아 읽은 적이 있다. 삼분의 일 정도를 읽다가 책을 덮었다. "당신, 왜 그랬어?" 하는 질문이 책을 읽는 동안 샘솟았다. 그럼에도 그 질문에 답해줄 사람이 없음이 허전했고 부질없어 보였다.  

이 책에서 노무현은, 아니 그를 보좌했던 이들은 한미FTA를 추진하며 '한국인의 가능성'을 주목했다고 한다. 어차피 쇄국을 하지 않을 바에야, 주관적인, 근거없는 희망이 아니라 의지적 낙관에서 비롯된, 인민의 역량에 근거한 정책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한미FTA 반대가 반드시 쇄국인가? 또 부질없는 질문들이 샘솟는다.)

한편 아버지 같은 정부가 아니라 어머니 같은 정부를 바람직하게 생각했다고 하는 부분에서 고개가 갸웃뚱해진다. 그렇다면 인민의 역량에 무게를 두고, 과정에서 약자의 아픔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성공하리라는 믿음, 그런 추진력 대신 힘 없는 사람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목소리에 더 귀기울이고 더 신중하게 일처리를 해야 하지 않았을까.   

 

#2.
노무현이 읽었다는, 그래서 그를 기리는 마음에서 함께 읽었다는 10권의 책. 그리고 그 책들을 함께 읽은 강독회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전 지구적 시스템의 문제부터 한 사람의 머릿속의 생각의 흐름까지 다룬 책들을 읽고 이야기한 강독회를 따라가며 다시금 노무현의 부재가 안타깝다.  

책 속의 누구는 노무현을 정조와 비교하며 '공부하는 군주'라 했다고 하지만 어림없는 이야기다. 정조는 재위 기간이 24년, 박정희의 집권기와 비견될 시기다. 그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무려 60년.  

노무현에게 딱 15년만 주어졌더라면 그가 꿈꾸던 '진보의 미래'는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제2의 박정희가 되지는 않았을까.  쉽게 장담할 수 없은 일이다.

 

#3.
노무현에 대해 참 할 말이 많다. 나는 노무현이 가장 잘 한 일은 대통령이 된 것, 한나라당을 꺽고 당선된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제일 잘 못 한 일은 검찰, 국정원 등 권력기관에게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일찍 자율을 선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정반대로 그가 가장 잘 못 한 일은 너무 일찍 대통령이 된 것이고, 그가 가장 잘 한 일은 권력기관을 자기 수하에 두지 않은 일이지 않나 싶다.  

 

이 책의 필자들은 다들 노무현이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참여정부, 노무현과 함께한 집권세력이 준비되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건 물론 한국사회 진보의 안타까운 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재임기간 권력기관에게 자율을 줌으로써 어느 시기에도 누릴 수 없는 공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만끽하게 했다. 현 정부는 그 반대급부, 그 저항에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한번 획득된 자유의 시계바늘은 쉽게 뒤로 가지 않는다.  

 

 

#4.
참여정부가 진보였는지, 진보란 과연 무엇인지를 불문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사회적 약자가, 힘없는 사람들이 품위 있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에게 노무현, 김대중, 참여정부와 국민의 정부는 파고들어야 할 숙제임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이 책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보다 오랫동안 읽혔으면 좋겠다.  

 

제목을 위와 같이 달아놓으니 소크라테스가 떠오른다. 언뜻 비슷한 삶을 살지 않았나 싶다. 결국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돈에 대하여

돈에 대해서는 참 할 말이 많다. 누구는 그런다. "돈 우습게 보지 마라, 돈 100만원 때문에 사람도 죽이는 세상이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을 살며 어떻게 돈을 우습게 볼 수 있나. 오히려 살 수록 참 무서운 게 돈이다. 그리고 다들 잘 아는 것 같지만 한편 다들 잘 모르는 게 돈인 것 같다. <녹색평론>은 지난호에 이어 이번호에서도 돈과 은행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리가 보통 돈이라고 생각하는 금속화폐나 지폐는 실제로 조폐창이라고 하는 연방정부기관에 의해 생산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돈은 조폐창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은행이라고 하는 사기업에 의해 매일 막대한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예금자가 맡긴 돈을 은행이 대출해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은, 은행은 자신이 번 돈이나 예금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돈을 빌리는 사람의 상환 서약을 근거로 한 대출을 통해서 돈을 만들어낸다. 대출서류에 표시된 차금인(借金人)의 서명은 대출 원금에 이자를 덧붙인 금액을 나중에 은행에 갚거나, 아니면 집이나 자동차 혹은 담보물로 잡힌 자산을 내놓겠다는 서약이다. 이것은 돈을 빌리는 사람으로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매우 부담스러운 약속이다. 그런데 이 서명이 은행에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은행은 차금인의 계좌에 금액을 써놓는 행위만으로 마술처럼 그 액수의 돈을 생산한다. 터무니없는 일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중략) 

은행은 자신이 갖고 있지도 않은 돈을 빌려준다는 사실이 기묘하게 생각된다면, 이것은 어떠한가. 최근 몇십년 동안 은행들의 집요한 로비활동의 결과로 각국의 중앙은행에 예치금을 두어야 한다는 규칙은 몇몇 나라에서 거의 사라져버렸고, 실제 준비율은 9:1보다 훨씬더 높아졌다. 계좌 유형에 따라 20:1 혹은 30:1이 흔한 경우가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출수수료를 이용함으로써 은행들은 이제 준비율이라는 제약을 완전히 우회하는 길을 발견하였다.   
-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녹색평론> 113호 2010.7.8 
 
   


내 경우에는 얼마 전에 은행에 적금했던 돈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일이 있다. 연 이자 7%. 속이 쓰리다. 그래도 제1금융권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하나? 은행 영업시간이 지난 뒤에 돈을 인출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수료를 내는 것도 참 아깝다. 어떤 은행은 1억원 이상인 계좌를 갖고 있으면 인출은 물론 이체 등 모든 수수료가 면제라고 하니 배알이 꼴리기도 한다.  
 

   
 

한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이자놀이(usury)라고 하였고, 그것은 엄한 처벌 ― 심지어 사형 ― 을 받았다. 모든 주요 종교는 이자놀이를 금지하였다. 이자놀이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논리는 도덕적인 것이었다. 돈의 유일한 정당한 목적은 실제의 재화와 서비스의 교환을 원활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소유하고 있는 돈으로 돈을 증식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 기생적인 행위 혹은 도둑질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와서는)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유라고 믿어온 것은, 실제로는, 교묘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형태의 경제적 독재체제이다. 우리의 사회 전체가 통화공급 때문에 은행에 전적으로 의존해있는 한, 은행가들은 누가 돈을 가지거나,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위의 글에서

 
   

 

이 쯤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떠오른다. 요즘은 '더블 딥'이란 말도 많이 나온다. 한국은 부동산 거품이 없어지면서 일본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장기침체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높다.

아래는  얼마전 <르몽드디플로마크> 한국어 판에서 봤던 글이다.   

 

   
  1996년 봄, 첫 임기를 간신히 마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재선 유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돈이 필요했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냈다.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커피를 한잔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민주당의 잠재적 후원자들은 무리지어 백악관을 방문해 기업 활동 규제를 담당하는 미 행정부 관리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클린턴의 대변인이던 래니 데이비스는 이 만남에 대해 “기업 활동 규제를 담당하는 직원이 해당 산업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그럴싸하게 해명했다.(2) 그 뒤 전세계 경제가 수조 달러에 이르는 비용을 치르고, 국가 부채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노동자 수천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은 이 ‘커피 타임’과 무관하지 않다.  

1996년 5월 13일, 미국의 주요 은행 대표들이 백악관에 초대돼 1시간30분간 미 행정부 주요 관리들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는 클린턴 대통령을 비롯해 로버트 루빈 재무부 장관, 통화정책 담당 존 호크, 은행규제 담당 유진 루드위그가 참석했다. 민주당 자금 담당 마빈 로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유진 루드위그의 대변인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은행가들은 향후 입법 사안에 대해 토론했다. 그중에는 은행과 기타 금융기관을 분리하는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이 포함됐다”. - '은행가에 의한, 은행가를 위한, 은행가의 정부' <르몽드 디플로마크> 6월호 

 
   

  
청와대는 7월 8일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은행장들과 대기업 총수들을 만난 게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했다는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뷰스앤뉴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을 삼성경제연구소가 만들었다는 사실에서처럼 한국은 이 부문에서 미국보다 훨씬 선진(?)적이다.  

 

위의 기사는 모든 사람은 투표권 한 장을 가질 수 있지만 정치자금은 부자들만이 낼 수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에 눈치보는 정치권, 금융자본에 종속되는 정치를 거스리기는 힘들다고 진단하고 있다. 문제는 서브프라임 사태에서 보듯 그 폐해를 고스란히 서민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돈이란 단지 하나의 아이디어라는 것을 알았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무엇이든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 매우 단순한 대안적 화폐개념이 있다. 이 모델은 과거에 영국과 미국에서 실제로 잘 기능하고 있었지만, 금세공사―은행가들과 부분준비제도 때문에 파괴된 시스템에 토대를 둔 것이다.

항구적이고, 이자 없는 돈에 기초한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돈은 정부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바람직스럽기는, 그 돈은 도로, 철도, 교량, 항만, 공설시장 등 경제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내구성을 가진 하부구조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 돈은 부채로서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돈의 사용처 ― 그게 무엇이든 ― 그 자체가 가진 가치로서 창조될 것이다.
-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녹색평론> 113호 2010.7.8  
 
   


<녹색평론>은 대안화폐, 사회신용론을 제시하는 것 같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는 '기본소득 운동'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많다. 무엇이 되었든, 우리 삶과 생활에 기초한 새로운 대안 모색이 시급하다.   

 

   
 

화폐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이다. 화폐가 오래된 노예제와 다른 점은 그것이 비인격적이라는 사실, 즉 주인과 노예 사이에 아무런 인간적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 톨스토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게 거짓말을 해봐

딸내미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며칠 전 둘째를 가진 아내와 정밀초음파를 보러 산부인과에 갔는데 자기도 동생을 보겠다며 따라나선 딸내미는 병원에서 또래 아이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난 다섯 살이야. 넌 몇 살이야?” 하고 물으니 딸내미는 천연덕스레 “응, 나는 여섯 살이야” 그럽니다. 우리 아이와 그 아이 모두 네 살이란 걸 이미 알고 있던 아내와 나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습니다.

30여 년에 걸쳐 거짓말에 대한 연구를 한 끝에 『우리는 10분에 세 번 거짓말 한다』란 책을 펴낸 로버트 펠드먼 박사는 처음 만나는 성인은 10분 동안 평균 세 번의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옷이 예쁘다거나 요즘 괜찮다거나 하는 악의 없는 인사치례가 대부분이지만 소위 어른들의 세계에서 얼마나 거짓말이 넘쳐나며 우리가 거짓말에 얼마나 무감한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거짓말하면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 워터게이트 사건이 떠오릅니다. 솔직히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불러온 서브프라임 사태야말로 금융자본의 온갖 거짓말과 그 거짓말을 알고도 속아준 관료들의 합작품, 금권사기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거짓말은 생리(生理)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이 정부의 거짓말은 도가 지나친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이 성적표를 조작하듯 획을 더해 상황일지 숫자를 조작하지 않나, 애초에 없다던 사건 동영상이 자꾸만 튀어나오지 않나, 북한 어뢰의 설계도면이 실렸다는 소책자는 있다가도 없어지니 천안함 사건에서 국방부는 그야말로 입만 열면 거짓말입니다.

경찰의 거짓말도 가관입니다. 아동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자 피해 아동의 가족이 보도를 원치 않는다는 거짓말로 자신들의 실책을 덮으려 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고문사실을 밝혔음에도 해당 경찰서장이 스스로 나서 사실무근이라며 기자회견을 엽니다. 더 나아가 경찰 수뇌부는 당사자가 부인한 것을 가지고 은폐라 말하기는 곤란하다 우기니 말문이 막히고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당장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만 모면하고 코앞에 닥친 곤경만 벗어난다면 별로 문제될 게 없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를 가리키는 권력을 손에 쥐었으니 거짓과 진실을 모호하게 할 수도 있고, 거짓을 진실로 바꾸고 진실을 거짓으로 가릴 수도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게지요.

반면 구술생애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힘을 빼앗기고 억눌린 사람들의 거짓말에 주목합니다. 거짓말에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의 증언 가운데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사실인지를 가려내는 일보다 왜 그 사람은 그것을 사실로 믿게 되었는지, 혹은 왜 사실을 감추고 때로는 침묵하며 거짓을 말하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하며 그것이 결국 진실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거짓말로 치자면 대한민국 헌법이나 세계인권선언만한 것도 없습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대한민국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은 현실에서는 죄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는 말, 모든 사람은 의료와 주거, 노동과 교육의 권리를 가진다는 말도 거기에 담긴 염원과 열망, 지향과는 달리 이 사회에서는 모두 터무니없는 소리일 뿐이지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국가의 주인은커녕 잠재적 범죄자, 불순분자, 테러리스트가 되어 권력기관의 사찰 대상이 되기 십상입니다. 인간이기를 선언하고 인간답게 살기로 작정하는 순간 그나마 아등바등 하던 일터와 삶터에서 내쫓기는 것을 각오해야 하고 갖은 모멸과 냉대, 그리고 법을 빙자한 폭력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니 인권이라는 것은 법조문과 선언문에 적힌 글 나부랭이가 온통 거짓임을 폭로하고 그 거짓이 진실이 되게끔 만들어가는 지점에서 비로소 생겨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아이들에게 거짓말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아동발달 이론에 따르면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타인을 인식하고 다른 이의 마음이 작용하는 방법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배워가면서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또한 아이들은 3~4살부터 상상력이 풍부해지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 여길 수 있게 되며 이것이 거짓말을 만드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타인과 교감하지 못하고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며 현실을 부정하거나 새로움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니 우리는 아이들의 거짓말로부터 참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이번 <사람>에서는 청소년 스스로가 말하는 청소년과 학교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한국사회에서 학교는 그 자체로 거대한 거짓말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교에서, 학교 밖에서, 사회 구석구석에서 거짓과 맞닥뜨리고 있을 그들에게 한 편의 시를 전하며 건투를 빕니다. 

 

찍소리  
- 송경동  

찍소리 내고 얻어터진 적 세 번 있다

코 끝이 늘 토마토던 초등학교 담임이  
깨스! 하곤 찍소리만 내봐라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찍!

두 번짼 중3 시절 늦은 밤 자율학습시간 
학생과장 고스터가 찍소리도 내지 마 했을 때
슬리퍼소리 사라지기 기다려 히히 찍!
어떤 개새끼가 찍소리 냈어
마루장 무너지던 소리 온 밤을 터졌다

세 번짼 고3 시절
학력고사도 끝나 널널한데
하루는 게슈타포가 말 같잖은 말을 했다
예를 들면, 찍소리 내지 말고 공부해! 와 같은 말
참을 수 없어 큰소리로 찌이익! 해버렸다
12년간 주눅든 어떤 것으로부터 설움과
해방감 나른히 몰려오던 한낮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십여 년 더 지난 오늘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라오며 그 찍소리 몇 번이나 더 해 보았나
똥 누다 말고 찌익! 해 본다
누구도 이젠 나를 치지 않는데
마음에 찡하니 젖어오는 슬픔 한 줄기  

 

 

 

 

 

 

 

 

  

 

 

 

 

 

 

 

---------------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7-8월호에 쓴 글입니다.  
청소년들을 만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제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솔직히 제 아이는 '찍소리' 안 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지만 찍소리도 못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