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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26
    굳은 땅(1)
    다다
  2. 2007/09/09
    배우에 관한 역설
    다다

굳은 땅

오랜 세월 아무도 갈아주지 않았던 땅.

비가 내리면 조금 축축하게 질척해졌다

맑은 날이면 다시 마르고

바람에 휩쓸려 온 잔가지들과 돌멩이들이

성긴 땅 사이사이에 박히고

그것들이 다시 부서져

켜켜이 더 두꺼운 딱딱한 지층을 만들어온지 오래.

이제 웬만한 자극으로는

갈라지지도 파헤쳐지지도 않는 땅.

 

다락에 깊이 처박아두었던

곡괭이로 퍽! 딱! 칵! 땅을 깬다.

더, 더 내리친다.

작은 흙알갱이들이 조금씩 튕겨져 나가더니

푹, 날카로운 곡괭이의 끝이 땅에 가 박힌다.

거기서부터 힘을 주어 으어어 쩌어억

얼마간의 땅을 들어낸 후

더 깊이, 더 넓게

곡괭이질을 한다.

이렇게 바싹 딱딱하게 굳어 있던 땅 밑에

이리 부드러운 흙이 숨어있었던가 싶게

촉촉하고 맑은 생기있는 것들의 냄새가 난다.

 

다 갈아엎는다, 모두 다.

힘찬 곡괭이질로 땅이 움푹움푹

발로 밟으면 여기저기 발자국이 움푹움푹

생기는 신선한 땅이 생겼다.

아무 씨를 뿌려도 기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해도 시원한 상상이다.

굳은 땅을 내려치는 곡괭이로

나를 내려치고 싶다.

 

감동도, 한없는 슬픔도, 넘치는 기쁨도 없이

더 두껍고 굳어져가기 전에

어서 내려쳐야 한다.

 

명백한 위기감이다.

이 작업을 바로 시작하지 않으면

더 이상 진실해지지 못하리라는 자명한 현실.

 

지금으로선 춤도, 참선도, 연기도, 여행도, 출가도, 스승도

나를 깨기는 커녕

나를 더 굳건히 지키고 켜켜이 켜켜이

두껍게만 만들 것이다.

 

어떡하지.

그래도 다행이다.

굳은 땅을 내려치는 곡괭이가 생각나서.

 

정진이다.

나를 완전히 해체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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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 관한 역설

당신은 친구나 정부가 죽자마자 그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쓸 수 있습니까?

아니죠. 그럴 때마저도 자신의 재능을 즐길 수 있는 자에게 불행 있기를!

시를 쓸 수 있는 때는 커다란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극단적인 감정이 가라앉고

재난의 순간에서 멀리 떨어져 영혼이 잔잔해진 다음, 지나가버림 행복을 기억해내고

잃어버린 것을 감상할 수 있게 될 때, 기억이 추억과 만나, 하나는 그것을 반추하고

하나는 지나간 시간의 달콤함을 과장하게 될 때, 바로 사람들이 자신을 제어하고

말을 잘할 수 있게 될 떄입니다.

 

사람들은 운다고 말하지만, 스스로를 부인하는 정력적인 형용사를 추구하고 있을

때 그는 울고 있지 않습니다. 운다고 말하겠지만 조화로운 운율을 만드는 일에

골몰하고 있을 때 그는 울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눈물이 흐른다면 펜은

손에서 떨어질 것이고, 감상에 빠져 글쓰기를 멈출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속깊은 고통만큼이나 격렬한 기쁨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말을 잃게

되겠죠. 어떤 정겹고 감성적인 사람이 오랫동안의 부재로 인해 잃게 되었던

친구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 친구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시 나타나자 상대방의

심장은 두근거립니다. 그는 뛰어가 친구를 껴안고 말을 나누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에게선 그저 토막난 단어들이 더듬거리며 튀어나올 뿐입니다.

무엇을 말할지 모르고, 친구가 하는 대답도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들뜬 상태를 상대방과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눈치챌 때, 그는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중략)

 

감성은 무대 위나 사회 속에서나 똑같이 해롭고, 오히려 1천배는 더 해롭습니다.

자 두 연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서로 해야 할 말이 많습니다. 누가 그런 난처한

상황을 더 잘 극복하겠습니까? 그건 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느 언제나 벌벌 떨면서 사랑하는 대상에게 다가가곤 했습니다. 심장은 벌떡거리고

생각들도 뒤죽박죽이 되곤 했습니다. 목소리도 어찌할 바 모르게 되고 말하는 모든

내용을 망쳐버렸죠. 저는 '네'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대답했고, 수천 가지 서투른

짓과 끝없는 실수를 해댔습니다.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이었습

니다. 그러는 사이 바로 제 눈앞에 어느 명랑한 라이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재미있고

가벼우면서도 스스로를 잘 통어할 줄 알고, 자기 자신을 잘 즐길 줄도 알고, 또 칭찬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며, 그것도 아주 섬세하게 칭찬하고 웃기고 즐겁게

하는 행복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상대방의 손을 유혹해 자기 손에 내맡기게 했고,

가끔씩은 유혹 없이도 그 손을 수중에 넣기도 했고, 거기다 입 맞추고 또 한 번 맞추고

계속 그러더군요. 저는 한쪽 구석에 파묻혀 울화를 돋우는 그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면서 주먹을 꽉 쥐고 손가락 우드득 거리는 소리를 냈습니다. 우울함으로 괴로워

하면서, 식은땀으로 온통 뒤덮이면서, 제 고통을 내놓고 드러내지도 숨기지도 못하고

있었던 거죠.

 

사랑은 그것을 품은 사람에게선 재기를 빼앗아가고, 사랑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겐

재기를 준다는 말이 있지요. 다르게 말해, 사랑은 어떤 사람들을 감성적이고 바보스럽게

만든다면, 다른 사람들은 차갑고도 대담하게 만들어준다고 하겠습니다.

 

감성적인 인간은 자연의 충동에 복종하고 정확히 심장의 외침 소리만을 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가 이 마음의 외침을 완화시키거나 정화시키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됩니다.

 

위대한 배우는 현상을 관찰합니다. 감성적인 인간을 모델로 삼아 그를 깊이 생각하고

사색과 명상을 거듭함으로써, 최선의 상태를 위해 덧붙이거나 떼내야 할 것을 발견해

냅니다. 그리고 이성 외에 사실들도 염두에 둡니다.

 

- 드니 디드로, [배우에 관한 역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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